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여기의 신비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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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여기의 신비

목탁 소리 2010. 9. 6. 21:38

 

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센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寂寥),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존재를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바로 그 상황이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가 된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 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찰나 찰나로 순간만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바로 이 현실, 지금 여기의 이 삶만을 살아 나가는 것이다. 다른 시간을 다른 공간을 살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왜 지금 여기라는 생생하고 직접적인 삶을 놔두고 다른 과거나 미래의 다른 공간의 삶을 피상적으로 뒤척이고 있는가. 물론 때로는 과거를 뒤척이는 것이 위안을 줄 때도 있고, 따뜻한 미소를 머금게 할 때도 있으며,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삶을 더욱 열심히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거나 미래에 속게 되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꿈이 가져다주는 속임수. 간밤에 단꿈을 꾸었다면 우리는 그 꿈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지 않은가. 왜 우리가 직접적이고 생생한 깨어있는 현실을 놔두고 꿈에 얽매이고, 꿈의 달콤함에 젖어 현실의 삶을 덜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를 살아갈 시간에 현재라는 순간을 더 깊이 있게 진하게 사는 것이 모든 명상과 수행의 핵심이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진리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 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 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명상,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심연에는 이미 지혜가 있다. 그것을 끌어다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전념(專念)하면 된다. 전념은 원초적 지혜이며 순수의식 그 자체이다.”
우리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고요함의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주의집중을 통해서 나온다. 전념이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알아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내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살게 될 때 그저 현실만을 살아가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온갖 지식들과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번거롭고 정신없게 만들 뿐이다.
다만 내 앞에 있는 그것만을 하라. 내일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 이미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어 생각하지 말라. 물론 꼭 생각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생각을 사용할 수 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멍하니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아니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각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원칙이 통한다. 마땅히 생각을 일으키되 그 생각에 머물거나 집착함이 없이 생각을 일으키란 말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라. 생각으로 살지 말고 온 존재로써 살라. 온 존재가 그대로 직접 삶과 부딪치라. 내 앞의 현실만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살게 될 때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단순함과 명료함의 지혜는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우리의 삶이 한없이 단순해진다. 단순해지면서 또렷해진다. 삶을 사는 것 그 자체가 그대로 지혜의 움직임이 된다. 맑고 쾌청한 가을 하늘처럼 삶을 다만 살기만 하라.
또한 톨레는 불교의 연기법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도로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緣起)요, 상의 상관성(相依相關性)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 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佛性), 법신(法身), 영성(靈性),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示現)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 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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