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어떻게 벌것인가
- '10. 01. 3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1
오늘은, 오늘은요, 조금 색다르게 ‘돈 잘 버는 방법’, ‘돈 버는 방법’
이것을 좀 말씀드릴까 합니다. 아주 확실하고도 직접적인 돈 버는 방법입니다.
매번 법당에 오면 "비워라, 놓아라,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비워라" 이런 얘기만 한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너무 서운하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째, 불교는 자꾸 이렇게 비워라, 놓아라. 이런 얘기만 하느냐?, 너무 서운하다.” 이리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돈 좀 버는 방법, 이것에 대해 말씀드릴까 싶은데요.
아~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은 아마 그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 이거 너무 세속적이다.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
“불교에서 어찌 그렇게 세속적인, 잡스러운, 돈 같은 그런 좀 추잡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어떻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돈이 그렇게 추잡한 겁니까?
돈이 잡스럽고 세속적인 것인가?
진짜 그런지 아닌지 오늘 한 번 탐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는 ‘돈을 많이 벌어라,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해져라’ 이렇게 얘기하는 종교입니까?
아니면 ‘돈을 벌지 말고, 마음을 좀 비우고, 돈 없이도 가난하고 청빈하게 사는 걸로써도 만족하고 행복해라’하는 종교입니까?
불교는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라’는 종교인가, 아니면 ‘돈이 없어도 행복해라’는 종교인가?
어떤 종교일까요?
불교는 돈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말 그대로 ‘행복하라,’ 라고 말하는 것이지,
‘행복하라’고 얘기하는 그 주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돈이 많고 적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돈이 많음으로써 행복할 것이냐, 아니면 돈이 적더라도 그 속에서 만족과 평화를 느끼면서 행복할 것이냐?
돈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다. 단지 우리는 행복한 것,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물론 그동안 부처님도 그렇고 많은 인류의 성인들이
가난의 정신, 자족과 만족의 정신, 또 청빈의 정신을 많이 얘기하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고,
돈을 벌고 돈에 의해서 행복하게 되고자 하는 것에만 중점을 잡아왔고,
너무 욕심과 집착을 많이 부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좀 중도적으로 바로잡아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한 것이죠.
그러나 사실 돈이라는 것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좋거나 나쁠 수 있겠어요? 돈이라는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돈을 좋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돈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면요.
‘돈은 좋은 것이다’, ‘돈이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겠어요?
만약 돈이 좋은 것이라고 하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겠습니까?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아무리 훌륭했던 사람도 돈을 많이 벌게 되고, 돈을 너무 과도하게 축적하게 되면
점점 돈의 욕심에 막 휘둘리고 집착하고,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됩니다.
로또에 당첨되고 나면 잘 지내던 부부가 갑자기 이혼을 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서로가 이제 돈을 놔두고 투쟁의 대상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심지어 로또 당첨된 사람들을 보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를 죽이고….
이런 경우까지도 심지어는 있단 말입니다.
돈이라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인데,
돈에 대한 집착이 너무 과도하게 됐을 때, 그로 인해서 우리는 타락해지기가 쉽다.
예전에 미국에서 한 650억원 이라는 로또 금액에 당첨됐던 부부가,
당첨되자마자 얼마 안 있어 이혼을 하고,
그리고 얼마 후 대저택에서 막 으리으리하게 살다가,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그러거든요.
우리나라도 이런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이 ‘돈이다.’ 라고 하면 심지어 정말 막 가족도 죽이고 하는 그런 세상이 될 정도란 말입니다.
그럼 과연 돈이 좋은 것인가? 그런 걸 본다면 돈은 좋은 게 아니죠.
또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성인들이, 현자들이, 또 부처님께서
가난의 정신을 찬양하고, 청빈의 정신을 찬양했다. 무소유를 주장하곤 했단 말이죠.
이렇게 본다면 돈이라는 것은 나쁜 게 분명해 보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이, 부탄이라든가 방글라데시나, 티베트, 미안마 같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지수가 더 높단 말이에요.
그런 것을 보면 돈이 별 필요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 필요하지도 않고 돈은 좀 나쁜 것 같아요. 돈은 나쁜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연 그러면 ‘돈은 나쁜 것'인가?
이게 '나쁜 것'인가?라고 생각한다면 또 거기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나쁜 거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서 행복해 할까?
여러분, 돈 있으면 행복하죠? 돈 있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그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고, 돈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고 누린단 말이에요.
그리고 돈은 ‘나쁜 거’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돈을 잘 쓰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행복과 평화로움과 부유함, 풍요로움을 이 세상에 가져다준다.
전 세계 제일가는 부자가 빌 게이츠라고 하는데, 2006년도에 빌 게이츠가
"자신의 일의 반만 하겠다.” 이렇게 말하다가 나중에는 거의 은퇴를 선언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그야말로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재단에 자선하겠다, 보시하겠다.
그렇게 해서 베푸는 일에 뛰어들기로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 빌게이츠는 전부터
“자신의 전 재산의 99%를 사회에 기부하겠다. 그리고 자식에게는, 자녀에게는 천만 달러씩만을 상속하겠다.”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전 세계에서 최고가는 갑부지만 99%를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발표가 있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워렌 버핏이라고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빌 게이츠가 만든 기부재단, 자선재단에
‘빌게이츠가 믿음이 가고 잘 할 것 같아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의 80%인 370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합니다. 워렌 버핏이 기부했다.
그렇게 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아직도 어마어마한 부자죠.
돈이 만약 이렇게 쓰여 진다면,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을 뭔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베풀어 쓸 수 있다면,
과연 돈이 나쁘기만 한 것인가?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단 말이에요.
돈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은 중립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부자 그 자체만을 가지곤 그 사람이 훌륭한가, 훌륭하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다’라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결정적인 요건이 되지는 않는다.
돈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우리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나 해석,
또는 돈에 대한 욕심, 그것이 좋거나 나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돈을 벌어야 됩니까, 벌지 말아야 됩니까?
가난의 정신을 위해서 돈을 포기해야 됩니까, 아니면 돈을 벌어야 됩니까?
이 돈을 버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돈 벌지 않고 가난하지만 자족하면서 만족하면서 사는 게 나을까요?
2
이건 어느 게 옳다, 어느 게 그르다, 어느 게 더 맞다, 더 좋은 것이다, 더 나쁜 것이다, 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부분은 사실은 아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부자를 선택해도 좋고, 가난과 청빈의 정신을 선택해도 좋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가난하게 사는 것, 청빈하게 사는 것, 뭐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를 좀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좀 식상하단 말입니다.
불교신자들이 “야, 이거 좀 가난한 것 말고, 좀 부자 되는 것 좀 가르쳐달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이번에는 돈을 좀 많이 벌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이것을 좀 말씀드려보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오늘처럼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돈을 많이 버는 쪽을 선택하더라도 좋을만한 정신적인 바탕이 돼 있어야 된다.
정신과 지혜가 우뚝 서 있어야지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무너뜨리게 될 수도 있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돈은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돈을 나쁘게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가 돈에 대해서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나 자신을 위해서, 나 개인을 위해서 쓸 때, 돈은 나빠진다는 것이죠.
돈이라는 것이 우리 아상과 이기심과 아집을 위해 사용될 경우에, 돈은 나빠진다.
아상을 강화하기 위한 용도로, 아집을 키우기 위한 용도로 쓰여 질 때, 돈은 나쁘단 말이죠.
그러나 돈을 좋게 하는 것은 그 돈이 우리 아상을 타파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 진다면, 돈은 좋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타적으로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고, 타인을 돕는 용도로 사용된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럴 때 돈은 벌어도 좋다.
그러려면 어때요? 돈을 벌어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바탕이 돼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토대가 자리 잡고 있어야 된다.
이 돈을 ‘나 개인만을 위해 쓸 것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남을 위해 쓰겠다.’라는
그 토대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돈을 버는 것으로써 행복한 그 상황도 좋은 상황이다.
그러나 아상과 아집에, 이기심에 쌓여 있은 사람은 돈을 버는 것으로 인해서 행복한 상황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돈이 독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설법에 앞서서 돈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두 번째가,
돈으로 인해서 나눔과 베품을 실천할 수 있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내 아상 타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써야 된다.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 된단 얘깁니다.
그러면 이제, 돈을 버는 방법을 한 번 알아보겠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이.
그 법칙이 뭐냐 하면 ‘업보(業報)의 법칙’이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 업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는 법칙입니다.
업보라는 것은, 인간이 즉 나라는 존재가 업을 지으면 세상은 즉 이 우주법계는 보를 가져 온다, 이겁니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업을 바깥으로 내보내면, 보 즉 과보라는 것이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이게 바로 업보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업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나고, 보는 세상으로부터 옵니다. 나에게.
그럼 여기서 업은 뭐냐? 업이라는 것은 행위입니다, 행위, 행위.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결과가 온다.’ 이거거든요. 어떤 과보가 온다.
돈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
돈이 들어올 것인가, 적게 들어올 것인가, 많이 올 것인가, 적게 들어올 것인가,
돈이 들어 올 것인가, 말 것인가가 결정된다는 소리입니다.
내 행위가 어떠냐에 따라서 돈이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업보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이 행위라는 게 뭐냐?
다시 말해서 이 업보의 관점에서 본다면 돈을 벌려면 돈을 벌만한 업을 지어야 된다.
그런데 그 근간이 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의업(意業)이다’, 의업.
업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해서 몸으로 짓는 업이 있고, 입으로 짓는 업이 있고, 생각으로 짓는 업이 있다.
그런데 이 생각으로 짓는 업은 가장 토대가 되고, 근본이 되고, 근원이 되고, 근간이 됩니다.
나무로 치면 뿌리가 된단 말이에요. 근원이 되는 의업(意業).
이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생각을 내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이냐, 돈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냐가 결정이 된단 말입니다.
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뿌리, 근본이 바로 의업(意業)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돈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돈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되는 것이다. 거기서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에 대한 나의 생각, 사고, 정신. 그것을 바꿔야지만 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요,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는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돈을 벌수 있도록 하는 사고방식, 의업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를테면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생각, 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내 안의 생각.
즉 다시 말해 업보의 관점으로 봤을 때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보가 결정되는데,
이 업이라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의업이라고 했고, 의업, 즉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 과보로 돈이 들어올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된단 말이에요.
그럼 그 어떤 생각이 돈을 들어오게 하느냐, 어떤 생각이 돈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느냐, 나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느냐,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돈이 안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안에 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특별한 독특한 생각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돈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생각에너지가 있다. 업이 있다.
그런 업을 짓고 있다. 생각에너지를.
여러분, 돈이 나한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대표적인 업이 뭐냐, 의업이 뭐냐, 생각이 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나에게 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요.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하고 산다.
뭐냐 하면? 이를테면 첫째, 어떤 생각이 나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느냐?
첫째는 뭐냐 하면, ‘나에게는 돈이 부족하다’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돈이 충분하지 않다’라는 생각이에요.
여러분, 자기가 충분히 쓸 만큼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아직은 부족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더 필요하다’ 이리 생각해요.
‘아직 돈이 부족하다. 돈이 충분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의업으로 내 생각으로 ‘나는 돈이 부족해, 나는 돈이 충분하지 않아’ 라는 것을
이 우주법계로 내보낸단 말입니다.
업을 ‘나는 돈이 없다, 부족하다.’ 이것을 우주법계로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이런 업을 짓는단 말이에요. 부족과 결핍의 업을 짓는단 말입니다.
‘나는 없다. 나는 돈이 부족하다.’ 이 생각을 우주로 보내니까, 어때요?
우주법계는 어떤 보를 가져오겠어요?
내가 내보내는 게 부족하고 결핍돼 있는 걸 내보내니까, 우주는 똑같은 것을 반사시키는 겁니다.
이 우주법계는 ‘내 생각의 스캐너’ 입니다. 복사기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우주로 내보내면 그것이 그대로 나에게 다시 스캔되어져서 돌아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족한 에너지를 내보내니까, 어때요?
부족한 것이 들어온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수가 없다.
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부족하다는 생각에너지, 부족하다는 의업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보는? 부족한 과보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받고 있는 월급이 ‘부족하다, 충분하지 않다’,
이리 생각하는 사람은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도 없고
더 많은 돈을 얻을 근원적인 의업 자체를 생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비슷한 얘기인데요.
‘돈이 부족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원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돼', 하고 돈을 원해요.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한단 말입니다. 빈단 말이에요. 빌고 원하고 기도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아주 특별한 것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원하고 빈다.’라는 것은, 빌게 됐을 때 ‘빈다’ 라는 것, ‘원하다’ 라는 것은
지금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 돈을 원한다,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었어요.
그 말은 지금 ‘나는 지금 돈이 없습니다,’라는 소리를 내보내는 것이잖아요. 생각의 토대가 그렇다.
의업. 이 생각의 토대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은 ‘돈을 더 벌게 해주세요,’ 이 말인데,
그 토대는 뭐냐 하면,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나는 돈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내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원하는 마음, 이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듭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
‘돈 벌게 해주세요’ 하고 ‘돈을 더 많이 벌게 원합니다’ 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고 궁핍하게 만드는 생각에너지다. 의업이다.
그러니까 돈을 더 벌게 해달라고 빌면 빌수록 우리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 안에는요, 아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법당에서
“오늘은 돈 버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수행자 불자 내지는 조금 더 신성하고 청정하고 성스러운 어떤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어떤 생각을 하냐 하면,
“아니, 어떻게 스님이 저런 말씀을 할 수 있지? 법당에서 어찌 돈 버는 얘기를 할 수 있지?”
이런 생각을 가져요.
그런 생각의 바탕에 뭐가 있습니까?
‘돈은 나쁘다’, ‘돈은 성스럽지 못하다’, ‘돈은 추잡스러운 것이다’ 이런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은 나쁘다는 생각, 돈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 세속적이고 추잡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깔려 있습니다. 근원에는.
여러분의 생각의 사고에, 여러분의 의업에서, 여러분의 생각에서 ‘돈은 나쁘다’, 라는 생각이 있단 말이에요. ‘돈은 근원적이지 못하다. 돈이 없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단 말입니다.
네 번째는 그겁니다. 위의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없더라도 행복해야 해.' '돈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때요? 한편으로는 돈을 요구하고 돈을 갈망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한편으로는 돈을 더 벌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돈은 없어도 되는 거야', '돈은 좋은 게 아니야', '성스러운 게 아니야', 이런 에너지를 내보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 봤을 때는 어때요?
이 우주법계는 그야말로 스캐너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주로 내보내는 생각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나쁘다는 생각도 내보내고, 그런데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도 내보내고.
우리의 돈에 대한 관점이 이중적입니다. 일관성이 없어요. 오락가락 합니다.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 나한테 돈을 가져다주려는 마음도 있고, 또 주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는 거예요.
이 우주법계도 우리에게 과보를 오락가락~ 하게 내보내주는 겁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 그 생각입니다.
이것은 좋고 나쁜 개념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얘기하는 거예요.
어느 게 더 좋다 나쁘다, 라는 개념이 아니고.
이를테면 또 어떤 생각이 있냐 하면 예를 들면 월급쟁이들은 이런단 말이에요.
“야, 돈이라는 게, 어떻게 내가 더 벌고 싶다고 더 벌어지냐?"
"나야 어차피 공무원이고 월급쟁이니까, 월급 받는 게 그게 다지”
“야, 땅을 파서 돈이 나오냐? 내가 생각하다고 돈이 더 나오냐?”
이런 생각을 가져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어때요?
자기가 받는 월급 이상은 절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오지가 않아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 내 안에서
“야, 나는 더 많은 돈을 벌수 없어. 나올 구멍이 없는데 어떻게 벌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 머릿속에 돈이라는 것에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내 월급 이상은 벌 수 없다고 딱 한정시키고 있어요. 그런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사실은요. 사실은. 땅을 파면 돈이 나옵니까?
땅을 파면 돈이 나올 수도 있다. 땅을 파면 돈이 나올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돈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나한테 있던 돈이 왕창 나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아, 요런 요런 틀 속에서만 돈을 벌 수 있어’라고 딱 고정지어 놓으면
그 틀 속 이외에는 돈을 벌 방향이 없어진다.
내 마음속에서 그것을 원했으니까, 그것을 딱 의업을 내보냈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다양한 어떤 생각들이, 이제 좀 핵심적으로 말하면 크게 두 가지 입니다.
돈에 대한 여러분의 편견, 이 돈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생각을 크게 말하면 두 가지다.
첫째는, 나는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생각. 이게 부족과 결핍을 창조해요. 돈이 더 없는 현실을 창조합니다.
두 번째는, 돈은 나쁘다는 생각, 돈은 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 수행자가 어떻게 돈을 가질 것이냐, 수행하는 사람들이 어찌 돈에 연연할 것이냐? 이런 생각.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제가 그것이 나쁘다, 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 생각이 다만 우리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이다.
아까 앞에서 한 번 더 짚었지만, 다시 한 번 짚어야 될 생각은 뭐냐 하면
돈은, 돈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돈을 쓰는 사람이 문제죠. 돈을 잘 쓰는 사람에게 돈은 좋은 겁니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은 오히려 돈을 많이 벌수록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돈이 없는 게 좋아요. 없을수록 좋아요.
돈이 없으면 그나마 나쁜 짓도 덜 하잖아요. 돈이 많으면 나쁜 짓도 더 대규모로 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롭지 못한 사람에게 돈이 없는 게 더 나을 수가 있다.
근데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에겐 돈이 많은 게 나을 수가 있다.
아까 그 토대, 이타적인 토대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생각, 의업.
돈에 대한 나의 생각 때문에 내가 돈을 벌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의업을 바꾸면 돼요.
업을 바꾸면 현실, 과보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게 이 우주법계의 이치입니다.
내가 생각의 에너지, 의업을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
가난한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이 의업, 돈에 대한 내 생각,
‘생각이 가난하기 때문에 현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는 그런 생각을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는 거예요.
그러면 답이 나왔죠? 그죠?
생각만 바꾸면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이에요.
부자가 될 수 있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면,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다. 간단하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그다지 시원~한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뭔가 아주 막 희망에 차서 ‘야, 나도 이제 돈을 벌 수 있구나.’ 이런 신이 난 표정이 아니에요. 왜 그럴까요?
“아니, 생각을 바꿔야지 현실이 바뀐다는 것 정도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아니, 생각을 바꿔야지만 된다는 얘기는 저도 알지요”
“생각을 바꾸는 게 그게 힘든 거지.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쳐 줘야지, 생각을 바꿔라, 라는 얘기는 누가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얘기 한다 말이에요.
맞죠? 생각을 바꿔야 된다는 것은 압니다.
돈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꾸면 현실도 바뀐다, 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점은 뭐냐 하면 그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워요.
여러분이 지난 여러분의 생애 동안 가져왔던 생각인데, 딱 못 박혀진 놓은 생각인데,
그 생각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느냐? 바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답답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면 생각이 바뀌겠느냐? 의업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구체적인 방법을, 쉽게 말해서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방법을 말씀을 드린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관한 거예요.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어떤 과보가 나에게 온단 말입니다.
그럼 업은 어떤 종류가 있느냐를 먼저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업은 세 가지로 나뉜다고 했어요. 신구의(身口意) 삼업.
이 신구의 삼업 가운데 의업(意業)이 가장 토대가 되는 근원이 되고, 근간이 되고, 뿌리가 되는 에너지라고 했습니다.
의업이 딱 바뀌게 되면, 의업이라는 토대 위에 즉 그 뿌리 위에 신업과 구업이 바뀌게 됩니다.
그럼 내 운명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뀔 수밖에 없게 근원적으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본질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젤 중요한 것은 의업을 바꾸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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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의업이 근원적이긴 하지만,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이지는 못할 수도 있어요.
뭐보다? 신업이나 구업보다.
의업보다는 좀 더 직접적이고 좀 더 현실감각 있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구업입니다. 의업보다는 구업.
의업은 생각에너지예요. 사고에너지, 정신에너지입니다. 그러니 아직 정신의 에너지 일 뿐이에요.
그런데 구업(口業), 즉 입으로 말로 함과 동시에 소리에너지로 바뀌어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던 에너지가 소리의 파장으로 바뀝니다.
소리의 파장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 이 소리의 파장인 말보다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더 빠른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신업(身業)이다. 신업. 몸으로 직접 행동하는 거다.
마음속으로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것을 말로 하는 게 더 빨리 실천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로만 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가서 행동하는 게 더 직접적인 것이잖아요?
그러나 근원적으로 생각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말도 나오지 않고, 행동도 나오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아까 다시 주제로 넘어가서요.
의업을 바꿔야 된다고 그랬어요. 생각을 바꿔야 된다, 생각을 바꿔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안 바뀌어요. 생각을 바꾸고 싶은데, 생각은 바뀌지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생각은 근원적이기 때문에 잘 안 바뀌어요. 근원적인 것은 뒤흔들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그럼 근원적인 것 말고, 뿌리 말고, 뿌리에. 뿌리에 양분을 주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런데 줄기나 가지나 열매를 맨들맨들하게 바꾸려면 어때요?
바로 눈에 보이니까, 바로 그냥 물을 뿌려서 씻든가 할 수 있단 말이죠. 눈에 보이니까.
그러니까 의업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의업은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업을 바꾸면, 이건 모든 게 끝난 겁니다.
그런데 의업이 안 바뀐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신업과 구업을 먼저 바꾸면 된다.
왜냐면 신업은 직접적이고, 구업도 직접적이기 때문에.(그렇다.)
구업은 직접적이고, 신업은 더욱더 직접적이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렇다.
신업을 바꾸면 즉, 행동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 생각은 따라오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중요한 얘깁니다.
생각을 먼저 바꿔야 되는데, 생각이 잘 안 바뀐단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느냐?
행동을 먼저 바꿔라, 말을 먼저 바꿔라.
그러면 그것에 따른 생각이 토대로 정립이 되게 돼 있습니다.
신업과 구업을 먼저 행하면, 의업도 거기에 따르게 돼 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 이런단 말이에요.
먼저 웃어야 된다. 먼저 행동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행동한다.
예를 들어, 이제 돈에 대한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비유를 들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느냐?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풍요롭다는 생각, 돈은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은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
돈을 아름답게 썼을 때 돈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렇게 바꾸면 되는데,
“아니 나는 지금 가난해 죽겠는데, 나는 지금 가난한데, 어떻게 내가 풍요로운 생각으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가난한데요.' 이런 의업 때문에 현실이 가난하게 됐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가난합니다. 가난하지만 내가 부자가 되고 싶어요.
그럼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각을 바꿔야 된다. 부자가 될 수 있도록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나는 풍요롭다’는 것을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가난하니까, 풍요롭다 라고 의업을 바꿀 수가 없어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한다? 신업과 구업, 즉 먼저 행동하고 먼저 말한다.
그러면 그 토대인 생각이 바뀝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부자라고 생각한다면, 풍요롭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부족합니다, 결핍되어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풍요롭다고 여길 수 있다면, 어때요?
어떤 행동이 나오겠어요? 부자들은 어떤 행동을 하겠어요?
아까 제가 먼저 토대를 얘기했어요.
이타적인 쪽으로 돈을 쓰게 됐을 때 돈은 좋은 것이라고 했어요. 나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이고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사랑과 자비의 토대에서 돈이 많습니다.
이타적인 토대 위에 돈이 많아요. 그럼 여러분은 그 돈으로 뭐를 하겠습니까?
어떤 행동이 나오고, 어떤 말이 나오겠어요?
베푸는 행동이 나옵니다. 돈이 많다면.
지극히 이타적인 사람이 돈이 많아요. 그럼 그 돈을 가지고 뭐를 하겠습니까?
베푼다. 베푸는 행동을 직접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도 “베풀어야 된다, 베풀어야 된다.”, 고 말하고.
어디 가서도 “제가 베풀겠습니다.”라고 말 한단 말이에요.
말하고 나면 어때요? 그러고 나면 돈이 따라 오는 겁니다.
제일 직접적인 게 뭐냐? 행동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 어디에 힘든 분들이 계세요. 아이티 참사가 일어났다.
‘야, 내가 도와야겠다.’ 생각에서 몇날 며칠을 ‘도와야겠다, 도와야겠다.’, 생각합니다.
생각에너지는 근원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이고 직접적이지는 못해요.
‘야, 내가 아이티 참사에 1,000만원을 보시해야겠다. 내가 100만원을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에너지는 바로 현실이 되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만 계속 ‘100만원, 100만원, 100만원’ 돌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먼저 말하면 된다. 먼저 공표를 하는 겁니다. 약속을 하고, 약정을 하는 거예요.
“제가 100만원 내겠습니다.” 먼저 말해놓으면 어때요?
말하고 난 다음에 따라가는 것은, 뭡니까?
말했으니까, 말에 책임을 져야 되니까, 입금한단 말이에요. 행동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행동이 뒤따르는 거예요.
그런데 말하고 났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때때로 있어요.
그런데 행동은 어때요? 신업은 어때요? 말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100만원 보시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보다 말하는 게 더 나은데,
말보다 더 빠른 것은 행동이다.
생각나자마자 바로 그냥 100만원 탁 갖다 주면, 그건 바로 행동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업이 제일 직접적인 거예요.
우리가 보통 ‘100만원 보시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의업의 에너지가 100만원 보시해야겠다, 고 생각해 놓고
그 다음날 어떤 생각이드냐 하면, 이 생각은 아상과 아집이 계속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100만원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100만원 보시하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막 아상이 소리칩니다.
‘야, 100만원이 얼마나 큰돈인데, 네가 거기다 그걸 갖다 주냐?'
'야, 한 50만원만 하자.’ 이런단 말이에요.
‘아, 맞아. 한 50만원만 하자.’ 이 생각이 들었다가
조금 있다가 돈 입금하려고 은행에 걸어가면서 ‘한 30만원만 할까?’
은행 문 앞에 가서, ‘아, 한 20만원만 해야지’
하다가 은행 창고 앞에 가서 10만원을 꺼내 든단 말입니다.
그래놓고선 정작 그 직원한테 얘기 할 때는 “한 5만원만 거기로 보내주세요”그런단 말이에요.
처음에 100만원을 생각했으나 계속 우리 머릿속의 생각은,
머릿속의 생각이라는 녀석은 계속 나 위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상을 충족시키는 위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먼저 행동하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
뭔가 보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바로 먼저 행동부터 해야 한다. 아님 말부터 하던가.
행동부터 하는 게 제일 좋고, 그게 안 되면 말부터 한다.
그래서, 이제 결론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러면 생각을 바꿔야 해요.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된다. 풍요롭다고 생각해야 돼요.
난 이대로도 충분하다. 풍요롭다. 즉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이 생각의 의업을 바꿔야 된다. '풍요롭다', 라는 생각으로 바꿔야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단 말입니다. 이 의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의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면 의업이 바뀌어 지느냐?
먼저 신업과 구업을 바꾸고 나면 의업은 따라서 점점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먼저 행동해야 된다.
불교에서는 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이라는 게,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업(身業)이 제일 직접적이라 맨 먼저 나왔어요. 구업(口業)이 그 다음으로 직접적이고, 의업(意業)은 그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우리가 뭔가 업을 바꾸려면 신업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게 순서예요.
신업 바꾸고, 구업 바꾸고, 의업이 점점 따라 오는 거예요.
의업은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럽니다. “저질러라. 표현이 성불의 지름길이다” 먼저 저질러라 이럽니다.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먼저 저질러라.
‘오늘 법당 갈까 말까, 갈까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저질러서 신발신고 나와야 돼요.
머릿속에서 ‘가야지, 가야지, 오늘 좀 쉴까? 가지 말까?’
이렇게 머릿속에서 돌게 되면, 일단 못 간다.
일단 먼저 신업, 먼저 행동해야 된다.
그러고 구업으로 “야, 나 오늘 간다. 저 다음 주 가겠습니다.”
말이라도 해야 된다. 그러면 더 실천할 수 있는 확률이 커져요.
생각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물론 생각의 토대가 있어야 돼요. ‘법당을 가는 것이 좋다’는 그 토대가 의업으로서 있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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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집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 그러면 돈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
돈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
돈이 좋게 쓰이면 좋은 것인데, 왜 나쁜 것입니까?
그러려면, 그 의업을 바꾸려면 신업과 구업이 먼저 바뀌어야 된다.
그래서 먼저 풍요롭다고 생각하고 신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내보내야만 들어오니까,
내가 다만 100원이 있으면 100원을 나누고, 먹을 게 있으면 먹을 걸 나누고, 책이 있으면 책도 나누고.
뭐든지 몸으로 그냥 저질러서 나눠야 된다. 이웃과 나눠야 된다.
나눈다는 행위 자체는 뭡니까? 내가 풍요롭다는 의지, 에너지를 이 우주법계에 내보내는 거예요.
풍요로워야 나눠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눈다’, 라는 행위 자체는,
나는 풍요롭다는 것을 이 우주로 내보내는, 강력한 우주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신업과 구업이 바탕이 되면 점차 이제 생각도 따라갑니다.
여러분, 돈이라는 건요. 돈이라는 것은,
그렇게 여러분이 쩔쩔매야 될 그렇게 엄청난 게 아닙니다.
돈 때문에, 돈 10원 한 장, 20원 한 장 때문에 막 그냥 쪼잔하게 쩔쩔매야 될 그런 것이 아니다.
내 생각 속에서 ‘돈을 벌기에는 너무 힘들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그 사람은 돈 벌기 힘들어져요.
그런데 생각 속에서, 쉽게 말해 돈을 좀 우습게 보란 말이에요. 같잖게 보란 말이에요.
‘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이렇게 말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그렇게 생각에너지를 바꾸면 돈이라는 물질에너지는 딸려 오는 겁니다.
100만원 벌기는 좀 쉽지만, 천만원, 일억 버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에요. 우리 생각일 뿐이다.
천만원을 버는 거든, 일억을 버는 거든, 10억을 버는 거든, 100억을 버는 거든, 사실은 다르지 않다.
내 생각이 바뀌면 현실은 바뀐다.
음,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돈에 대해서 그렇게 막~ 막~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돈이라는 것은요, 내가 이타적으로 쓸 수 있고 분명히 지혜롭게 쓸 수 있다면,
돈은 언제든지 이 우주법계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겁니다. 언제든 우주법계에서 끌어 쓸 수 있다.
이게 바로 무량대복(無量大福)입니다.
우리 생각이, 복된 생각을 하게 되면 복된 신업, 의업, 구업을 가지고 있게 되면 현실은요, 무량대복이 생겨납니다.
무량대복이 뭐냐? 큰~ 복인데, 어떤 큰 복? 무량한 복.
돈이 백원, 이백원, 삼백원, 천원, 이천원, 만원, 백만원, 천만원이 아니고,
무량한 돈, 무량한 물질, 무량한 복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복덕과 복력이 있단 말입니다.
이타적이고 뭔가 지혜로운 그 에너지, 그런 생각, 그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돈이라는 것은 이 우주법계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끌어다 쓸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너무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아집과 아상에 얽매여 있게 되면 절대 끌어 쓸 수가 없죠.
내가 복을 지은 만큼만 받는 거죠.
그러나 그 아상을 넘어서면, 아집을 넘어서게 되면, 내가 우주법계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인 그릇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 전체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타파하면 우주 전체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우주법계의 복을 고스란히 갖다 쓸 수가 있다.
이게 하나의 물질에 대한, 복에 대한, 우리의 관념, 생각이 그렇게 바뀌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바뀌면 법계의 복덕을 우리가 가져다 쓸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 더 벌어야 된다고 빌고, 기도하고, 원하는 마음,
이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는 마음, 이것을 놔버려야 된다.
그리고 먼저 신업과 구업으로써 먼저 저질러야 된다. 먼저 베풀어야 된다.
먼저 베풀지 않고 어떻게 부자가 되겠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거든요.
“내가 돈 많이 벌면, 그때 가서 베풀게요.”
부처님께 기도합니다.
‘부처님, 저 10억 벌게 해주세요. 10억 벌고 나면 제가 부처님께 보시하겠습니다.’
‘제가 얼마 보시할 테니까, 보시 많이 할 테니까, 돈 좀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이건 완전 잘못된, 거꾸로다, 거꾸로.
지금 나는 천만원 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께,
‘내가 10억 벌게 해주면 내가 부처님께 보시하겠습니다.’ 이게 아니다.
내가 천만원 있으면, 먼저 백만원이든, 이백만원이든 먼저 보시하고 나면, 저절로 벌리는 거예요.
왜? 먼저 보시한다는 게 뭐냐? 신업이 먼저 움직이는 겁니다.
업이 움직여야 보가 따라오는 거예요. 업보가 그거 아니겠습니까?
업이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보가 따라옵니까?
업도 짓지 않고, 부처님께 업을 거꾸로 준단 말이에요.
‘부처님, 저한테 10억을 벌게 해주십시오.’
이래 놓고 “왜 10억 안 벌리느냐,” 고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법사님,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 했다는데, 마음먹으면 현실로 이뤄진다고 했다는데,
나는 10억을 벌기로 마음먹었는데, 왜 10억이 안 벌려집니까?”
그 일체유심조라는 게, 마음으로 짓는다는 게 업을 얘기합니다. 의업. 업.
어떤 방식으로 업을 짓느냐? 이것을 제대로 모르는 거예요.
비는 방법, 빌음으로써 반대로 지은 겁니다. 반대로.
그래놓고 내가 창조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체유심조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먼저 저질러서 신업을 짓지 않고, 구업을 짓지 않고, 의업을 짓지 않고 보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거예요?
제가 지금 한 말은, 여러분이 듣기에 어찌 보면 좀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제가 했던 얘기들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이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또 ‘이게 막 나쁘다는 생각’,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너무 세속적인 사람은 어때요? 돈을 막 벌어야 된다는 데 너무 집착하고,
또, 너무 성스러운 사람은 어때요? 반대로 너무 돈은 나쁜 것인 거처럼, 돈은 무슨 독사인 것처럼, 돈 자체가 무슨 사탄이고 마귀인 것처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올바로 쓸 수 있다면, 그 힘이 있다면, 그 지혜가 있다면, 왜 돈이 나쁜 거냐?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토대를 잘 생각하세요. 이타적인 토대 위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으로, 지금 이것을 적용했다가는 이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부자가 되란 말입니다. 먼저 부자가 되어라.
먼저 풍요로워져라. 나란 존재 자체가 먼저 풍요로워져야 된다.
그리고 먼저 업을 지어라. 먼저 행위를 해라.
먼저 몸으로 베풀고, 말로 베풀고, 생각으로 베풀고, 생각으로 부유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그 업의 토대 위에서 과보가 생겨난다.
부처님 가르쳐준 ‘업보라는 법칙’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부자가 되시고, 개인적이고 아주 이기적인 부자가 되지 말고,
이타적이고 나누고 실천하고 베풀고,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부자가 되어서,
여러분들이 많은 돈을 버셔서, 그 많은 돈으로 나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남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기 위한 부자가 되라.
이웃에게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부자가 되시라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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