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적 삶의 기술 -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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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적 삶의 기술 -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목탁 소리 2009. 8. 24. 06:53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도솔,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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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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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 6. 28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삶은 고(苦)가 아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삶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아!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구나’라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들에게 삶은 힘들고 고된 괴로움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불교에서도 일체개고라고 하여 ‘삶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힘든 곳이구나’ ‘누구나 이렇게 힘든 삶을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겠지’ 하며 힘들고 괴롭게 살아가는데 아주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고 있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즐거운 일이 생기고, 아주 행복한 일이 생길 때 어떻게 생각 하느냐 하면 그것이 사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한테 어떻게 이런 좋은 일만 자주 생길 수 있지?’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계속 좋은 일만 있다가 뭔가 큰 괴로운 일이 오려고 이러는 거 아냐?’ 하면서 좋은 일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불안해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는 인생을, 삶이라는 것을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삶은 힘든 것이구나!’ 이렇게 많이 인식하며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이면에서, 본질에서 이야기한다면 삶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아주 신비로운 것이고 또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삶이라는 자체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본질이 뭐냐면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괴롭게 사는 게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걸림 없이 살면서 아주 평화롭게 이 삶을 아주 아름답고도 멋들어지게 살아 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본질적인 삶의 모습대로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보통 우리들의 삶은 아주 고되고,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앉아 가지고 이만큼 1미터 부웅~ 떠올라 앉아 있는 게, 그게 삶의 신비가 아닙니다. 그게 경이로운 일이 아니고, 그게 신통자재한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들의 존재자체, 삶 자체, 그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것 그 자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가 우리가 이렇게 괴롭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행복하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우리 본래 모습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것인가?' 말이죠. 원래 우리 삶의 바탕이 행복에 있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힘겹게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수도 있는데 현실은 괴롭게 살고 있단 말이죠.

또 여러분들이나 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단 말입니다. 왜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싶은데 깨달아지지 않는가, 그 이유가 뭐겠는가 말입니다. 그 이유를 바로 알고, 그 이유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으면 우리 삶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삶이 괴로운 이유가 뭐지?

 

그러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실은 이 세상이 전혀 행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니까, 돈 없는 이런 상황이 나를 가로 막고 있다’ 이렇게 내 바깥을 탓하거든요. ‘저 사람과 결혼을 하기만 했다면, 저 사람과 사귀기만 했어도 나의 행복이 완전할 수 있을 텐데. 저 사람이 나를 차버리는 바람에 내 행복은 무너져 버렸다’ 하면서 내 바깥에 탓을 돌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행복을 차버린 것은 나다, 딴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행복을 차버린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행복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내 안에서 행복이 들어오는 모든 통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내 주위에 방어막, 방어벽을 딱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참된 행복이라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내 주변에 아주 촘촘하게 방어벽을 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하는 작업이 바로 이 방어벽을 쌓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그 방어벽을 허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허물지 못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쌓고만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구하려 하지 말라, 찾으려 하지 말라, 다만 깨달음이 오는 것을 막지만 말라’ 바로 이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나라는 존재를 허용하기만 해라, 완전히 나를 열어둬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틀어 막고자 하는 그 마음만 버리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내가 깨달음을 찾고자 애쓰지 말고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열어 둬야 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깨달음을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너도나도 힘들고 고된 수행의 ‘일’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나의 일이 되고 하나의 문제가 된다 이 말입니다. 다만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허용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하고 딱 내 주변에 울타리로 방어막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친 방어벽은 무엇인가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는 방어막을 안치고 있는데 왜 방어막을 친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의문을 표시할 수 있지요. '도대체 뭐가 방어막이냐? 내가 치고 있는 방어막이 도대체 뭐기에 그 방어막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하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틀에 박힌 생각, 관념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여러분이 쳐놓은 방어벽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 한다면 우리 안에 어떤 막힌 탁한 에너지나 업장(業障), 업습(業習)이라든가 또는 관념이라던가, 바람이나 꿈이라던가,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진 모든 생각이 만들어낸 구조물들이 전부 다 방어벽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로서 내 주변에 벽을 치고 방어하고 있다는 말인데요, 세상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딱 벽을 쌓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 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나라고 생각하는 어떤 견해 또는 모양, 관점 이런 것으로써 나를, 내 주변을, 딱 벽으로 둘러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특성, 특징들 이런 것들이 전부다 하나의 방어벽으로서 작용을 합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삶을 행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허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삶이라는 신비가 완전히 경계 없이 방어벽 없이 모든 것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도록 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내 주위의 방어벽이 되고 있습니다.

 

배 고파도 밥도 못 먹는 사람

 

예를 들어서 쉬운 것부터 이야기를 해 본 다면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혼자서 밥을 못 먹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밖에 나가서도 혼자서 밥을 못 먹겠더라. 누구랑 같이 먹어야지, 어떻게 혼자서 밥을 먹어? 혼자 밥을 먹으면 왠지 모르게 남들이 친구도 없는 왕따로 보지 않을까', ‘외롭다고 느끼지 않을까’하는 등의 관념을 고수하느라고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밖에 나가서 혼자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이런 관념을 가지면 '내가 혼자 밥을 못 먹는다' 하는 그 생각, 그 견해가 하나의 방어막이 되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탁' 가로 막기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배가 고파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지요. 그저 가까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은 뭐냐면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자연스럽게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데 갑자기 한 생각 방어벽이 생겨납니다. 내 안에서 생각이 지껄입니다. '야! 어떻게 혼자 밥을 먹으려고 하냐? 주위에 봐라. 전부 다 가족이 왔거나, 친구와 왔거나, 연인이 함께 왔잖아? 너 혼자 밥 먹으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어? 처량하게 혼자 밥먹는 것을 쳐다보는 남들 시선을 생각해봐’ 그런 생각이 치켜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자연스럽게 밥을 먹지 못하게 되고, 굶든가, 아니면 밥을 먹고 싶어도 그냥 어디 슈퍼에 들어가 빵이나 하나 사먹고 때우던가 한단 말입니다. 이 얘기를 하니까 제 경험도 떠오르는데요, 저도 대학 초년 시절에 어느날은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은 겁니다. 삽겹살 집 앞을 지나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요.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삽겹살을 시커서 먹고 싶었지만 혼자서 고기 먹으러 간다는 것이 여간 찜찜한게 아니데요. 이런 경험들 아마 다들 조금씩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혼자 먹지 못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내 스스로 내 안에서 ‘혼자 먹으면 좀 그래’ 하고 딱 벽을 쳐 놓고, 관념을 만들어 놓으니까 그 때부터 스스로 만든 벽에 스스로 걸려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배고파도 밥 한 끼 자연스럽게 못 먹고 살아요. 그래서 중생인가요! 밥 먹고 사는 이 사소한 일상 하나에도 생각이 만들어 낸 구조물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그 단순한 삶이야말로 도(道)다,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했단 말이지요. 일상 생활을 단순하게, 자유롭게 그냥 하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고 자유로운 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자신이 만든 생각의 감옥, 울타리, 방어벽에 갇혀 별일 아는 것에도 오락가락 하는 차별심으로 사는 삶이 바로 우리들 중생의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죠. 어떤 사람은 '나는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고, 리더십도 없고, 뭔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라고 하면 두렵다' 이런 생각의 구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어벽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정작 나서야 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서질 못합니다. 살면서 내가 어떤 뭔가 발표를 해야 되는 일이 때때로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그걸 피해갈려고 애를 써요.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자체가 그 하나의 방어벽 때문에 스트레스가 됩니다. 때때로 무언가 발표를 해야 되고, 앞에 나서야 하고, 뭔가 만들어야 하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다는 한 생각에 딱 차있는 이상, 그때부터는 그것을 피해갈 생각만 하게 됩니다. 직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완전히 열려 있어서 모든 직장을 다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건 안 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저건 안 되니까 저런 직장은 제외하고, 나는 이런걸 못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건만 찾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선택의 폭은 너무나도 축소가 되고, 제한이 되고, 나의 삶은 너무나도 위축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향해서 모든 가능성에 완전 나를 열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고 있고 한정하고 있으니 사실은 인생이 그것 때문에 괴롭고 버겁고 풀리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 인생이 꼬였다거나 내 직장생활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보면 그것은 그 이면에 바로 내 생각이 만들어낸 그 구조물, 거기에 내 스스로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나는 앞에 나가 발표를 못해'라는 생각에 부딪혀서 삶이 풀리지 않는 것이기 쉽습니다. 사실은 내가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는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해, 발표할 때만 되면 덜덜덜 떨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발표를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주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죠. 내 생각, 견해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나의 경험들이 모여서 신념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내 생각으로서 딱 굳게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 말입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

 

예를 들어 ‘나는 영어를 못한다’하는 신념이 자리잡으면 영어가 두려워서 영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못합니다. 1년이나 2년 해외연수가 준비되어 있는데,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영어를 못한다, 나는 두렵다' 하는 것 때문에 내 앞에 딱 드러난 그 기회를 우리는 딱 마땅히 차단시켜 버립니다. 영어 공부가 필요하면 그냥 자연스럽게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질러 시작하면 되는데 마음 속에서 영어에 대한 방어벽을 칩니다. ‘나는 원래 영어를 잘 못한다’거나, ‘이 나이가 되어 뒤늦게 영어를 다시 시작한들 젊은 사람들 따라갈 수 있겠어’ ‘너무 늦었어’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지금 한다고 되겠어’ 이런 등등의 수많은 방어벽들이 순간 둘러쳐진단 말입니다. 숭산 큰스님 아시죠? 세계 살아있는 4대 생불이라 하는 숭산스님께서는 해외로 다니면서 하버드대를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영어로 법문을 하시고, 전세계인들에게 영어로 법문을 하시면서 감동을 주셨단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원래 숭산스님께서 어릴적부터 영어를 잘하는 분이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당신이 47세 때인가에 영어를 시작했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영어를 못한다'란 생각에 딱 부딪혀 있으면, 혹은 ‘나이가 많아서 영어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생각의 벽을 만들어 놓으면 그 때부터는 내가 내 인생에서 뭔가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많이 위축시키고 축소시키게 만들고 맙니다. 나의 능력을 한껏 축소시키게 만듭니다.

 

나를 둘러싼 다양한 방어벽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우유를 못 먹습니다. ‘나는 원래 우유를 못 먹어’ ‘우유를 먹으면 배탈이 나고 뭔가 문제가 생겨’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이런 사람은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나요. 그런데 이를테면 그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놓고 우유를 먹게 하면 맛있게 먹고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유를 못 먹는다는 것은 몸에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못 먹는다는 한 생각이 우유를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내 몸에서 우유를 거부하고 배탈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산에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에 아버지가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붙잡고서 아들을 데리고, 딸을 데리고 산에 왔다갔다 다녔단 말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큰 정기를 키워주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정말 가기 싫어 죽겠는데 아빠가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가지고 산이 싫어졌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산이 싫다고 했던 그 한 생각, 그 한 생각이 그때부터 산과 관련된, 산행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 나를 나의 마음을 비좁고 웅크리게 만드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직장에서 3박4일 지리산 종주를 간다더라, 그러면 마음에서 거부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딱 막아서는 마음이 일어나요. 방어벽을 딱 칩니다. '나는 산행은 못해'합니다. 아니면 집에 가서 생각합니다. ‘그때 무슨 핑계를 댈까? 무슨 핑계를 대서 이 산행을 내가 안 갈수 있을까? 하루도 아니고 3박4일 동안 그 험한 지리산을 어떻게 가느냐?’ 하면서 탁 방어벽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생각은 온갖 핑계 거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아주 말도 안 되는 일도 벌인단 말이예요. 나에게 오는 삶의 가능성을 딱 막아서는 겁니다. 이를테면 어릴 때는 산이 싫었지만 마음을 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가 보면 그전에는 전혀 눈뜨지 못했던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눈을 뜨게 될 수도 있어요. 왜 애초부터 과거에 얽매여 그 가능성을 해 보지도 않고 막아서는 겁니까. 모든 가능성에 대해 거부하지 말고, 막아서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통째로 받아들여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어벽을 깨고 자유로와지는 길이예요.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초등학생들은 그런다고 하데요. 학교에서 주사를 맞는 날이다 하면 그 주사를 맞기 싫어서 그날 하여간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겁니다. 학교에 뭔가 핑계를 대고 안 가거나, 갑자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거나, 또 어떤 어린아이는 주사바늘 앞에서 그냥 기절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 그런 것도 마찬가지죠. 이런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안절부절을 못 합니다. 마음에서 방어벽을 치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에 몰두합니다. 사실은 그 만남에서 사람들과 함께 친해지고 어울릴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변화의 때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방어벽을 침으로써 애초에 거부하고 마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요, ‘나는 집만 나가면, 집 나가서 어디서 잠을 자거나 하면 화장실을 못 간다’ 이런 사람도 있데요.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화장실에 가 큰일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를 들어 ‘여러분들 송광사 여름수련회나 해인사 여름수련회나 어떤 수련대회를 한번 참석해 보십시오’라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이런 추천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고 허용하며 ‘좋습니다. 한 번 가 보죠’ 하고 시원스레 답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 ‘수련회 한번 가 보십시요’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자기가 쳐놓은 방어막에 걸려 그것을 있는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생각으로서 방어막을 탁탁 쳐 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밖에만 나가면 화장실을 못가서 그 수련대회 3박4일, 4박5일 가는데 5일 동안 대변을 못 보면 어떡하나? 나는 그것 때문에 못 간다’ 이래요. 설마 그러시죠? 지금 웃으시는 분도 계시는데 실제 그런 사람이 있다니까요. 이를테면 어떤 보살님이 하도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하기에 출가하라고 했더니 우스개로 하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머리 깎으면 머리가 안 예뻐서 출가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또 ‘수련대회를 가라’ 이러면 한순간 마음속에 ‘나는 가부좌 틀고 참선을 오래 못해’, ‘다리가 아파서 나는 그것 때문에 못가’ 이렇게 방어벽을 딱 칩니다. 참선하는데 다리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밤새 철야정진하고 잠도 안 재우고 수행시킬지 모르는데 '아! 나는 잠은 절대 포기 못해. 잠은 푹 자야해' 이렇게 방어막을 딱 칩니다. 온갖 자기 나름대로의 방어벽을 다 치거든요.

제가 이 자리에서 만약에 정토회에서 하는 ‘깨달음의 장’ 수련대회 가 참 좋다더라, 거기에 한 4박5일 한번 갔다 오십시오 하고 이야기를 했단 말입니다. 여기 한 이삼백 명이 앉아 있어도 이중에 갈수 있는 사람은 한둘도 안 될 겁니다. 그만큼 방어벽이 견고해요. '거기 갔다 와서 엄청난 깨달음을 느끼고 왔다. 삶이 정말 확 바뀌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너무나 좋으니까 꼭 다녀오십시오.' 라고 온갖 찬사를 하며 추천을 했습니다. 그러면 갈 것 같죠? 대부분의 사람은 못 갑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방어막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그것을 탁 잡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잠을 여덟 시간은 자야 된다’는 울타리를 딱 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전날 여섯 시간을 잤다, 그러면 마음 한편에 두 시간, 두 시간, 두 시간, 출근을 해서도 나는 두 시간을 못 잤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뭔가 두 시간만큼 피곤이 몰려옵니다. 어디 구석 불편한 곳에서 새우잠이라도 한 두 시간을 자고나면 그때 되서야 이제야 잠에서 해방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중에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도 전혀 문제없다’ 그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 시간만 자도 돼, 어떤 사람은 나는 다섯 시간은 자야 돼, 나는 여섯 시간은 자야 돼, 하고 딱 잠에 대해 울타리를 치고 나면 내가 울타리를 친 그 관념 때문에 그것이 나의 실제가 돼 버립니다. 실제 삶에서 내가 정해 놓은 그 시간의 잠에 걸려 넘어진단 말이지요. 내가 만들어 놓은 관념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거사님은 잠에 대한 아주 독특한 그 신념을 가지고 계세요. 당신은 잠을 많이 자고 조금 자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한 시간이라도 자고만 일어나면 되는 겁니다. 이분은 당신이 한 시간을 자든 두 시간을 자든 그 다음날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또 실제로 그런 관념에서, 그 신념에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은 잠 때문에 뭐 힘든 것이 없데요. 그리고 또 아주 신기한 것은 뭐냐면 이분은 자다가 중간에 한 번 깨고 나서 또 자면 우리는 괜히 좀 찝찝하잖아요. 푹 못 잔 것 같고, 잠을 설친 것 같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거사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면 잠에서 깼다가 다시자면 ‘아~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잠을 한 번 자면 되는데 하룻 밤 사이에 두 번이나 잤으니 더 좋다는 겁니다. 저는 농담이겠지 생각 했는데 실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중간에 뒤척이다 다시 잠들더라도 별로 괴로울 일이 없는 겁니다.

자식들에 대해서는 ‘공부 좀 해라. 성적 좀 올려라. 좋은 대학을 가야돼’ 한단 말이지요.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자식은 항상 뭐를 하고 있어야지 마음이 놓여요? 공부를 하고 있어야 되지요.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는 항상 공부하고 있어야지 아주 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아주 뭔가 제대로 가는 상황 이예요. 그런데 볼 때마다 공부만하고 있는 상황은 어찌 보면 불행한 상황이지요. 그 활자에 거기에 놓쳐서 친구와의 아름다운 사귐, 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는, 이 햇볕 속에서 뛰어 놀고 자랄 수 있는, 그런 천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볼 때 자식은 늘 공부하고 있어야 되요. 그러니까 아이가 한참 공부하다가 부모님이 딱 들어갔을 때 마침 컴퓨터를 켰는데 닦달을 한단말이죠. '너는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하고 있냐?', ‘또 컴퓨터야?’ ‘공부는 안하고 맨날 그것만 하고 있다' 그런단 말이죠. '자식은 공부를, 공부만 해야 되는 사람이다' 이건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방어벽입니다. 그런 방어벽이 있게 되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식이 공부를 안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확 올라옵니다. '저놈은 또 공부는 안하고 저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이렇게 올라온단 말이예요. 그 방어벽을 탁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으면 아이가 놀더라도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흥미롭고 행복하며 함께 재미있습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항상 '오늘 뭐 공부 잘했니? 오늘 공부 많이 했니? 시험 잘 봤어? 성적이 얼마 나왔어?' 이런 걸 주로 물어보지, '너는 어떤 친구가 있니? 아! 그 친구는 어떤 것을 좋아하니? 뭐하는 걸 좋아하고, 취미는 뭐고, 함께 하면 무슨 놀이를 하고 지내니?' 이런 것들을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늘 뭐하고 놀았니? 뭐해서 재미있었니? 오늘 하루도 즐거웠어?' 이걸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대상으로 공부해야 된다는 방어벽을 탁 놓아 버리게 되었을 때에 그 아이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공부를 안 하더라도 미운 대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왜 있는 그대로의 자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안의 온갖 생각들, 잣대들에 끼워맞추면서 편견어린 시선으로 자식을 바라봅니까. 그럼으로써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감옥으로 인해 아파하고, 상처받고, 자유롭지 못해야 하는 겁니까. 부모 눈치보는 자식으로 키우면 안 되요. 자유롭고도 당당하게 자기 삶을 휘적휘적 창조적이고도 자율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자주적인 아이로 키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의 틀에 갇힌 생각 속에 아이를 끼워넣는 작업을 중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내 스스로 만든 구조물에 갇혀 가지고 그렇게 내 스스로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단 말이죠. 성공해야 한다, 항상 1등해야 된다, 이런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봅니다. '나는 여자다' 하는 것도 하나의 상이고 방어벽입니다. 여자다 혹은 남자다, 이것도 내가 만들어 낸 방어벽입니다. ‘여자다’라는 방어벽 때문에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남자로만 태어났어도 혼자 배낭여행을 한 번 꼭 가보고 싶다, 그런데 여자다 보니 위험해서 홀로 여행을 못 떠난다. 자유롭게 홀로 떠날 수 있는 남자들이 참 부럽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이 말이 진실일까요? 사실은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가 더 많을까요? 혼자 배낭여행 다니는 남자가 더 많을까요? 제가 외국에 다녀보니까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생각에서는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은 남자들이나 한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그런 여자분들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여자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방어벽을 쳐 놓고 그 방어벽에 갇혀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남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울타리를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걸려 넘어져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나이가 오십 살이다, 나이가 스무 살이다, 하는 그 나이에도 걸립니다. 내 나이가 오십 살이다 그러면 ‘내가 이 옷을 입으면 남들이 괜히 주책이라고 하지 않을까? 늙어서 나이값도 못 한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이를테면 입고 싶어도 못 입는 옷도 있고요, 꾸미고 싶어도 못 꾸미는 경우도 있고,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고작 나이 하나에 걸려서 말이지요.

아이들 다 독립시켜 놓고 내가 뭔가를 새롭게 공부라도 하고 싶은데 ‘이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게 말이 되겠어?’ 하고 내 나이 오십이라는 것에 큰 방어벽을 쌓고 있기 때문에 그때 저지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나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나이는 없습니다. 항상 제로예요. 어떤 틀이 박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내 스스로 방어벽을 쌓고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대학 못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고, 전문대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어서 사람들이 대학교 이야기만 하면 꽁무니를 줄줄 빼고 자리를 뜨기도 합니다. 대학이라는 학벌이 내 인생의 하나의 커다란 방어물이 되는 겁니다. 군대 안 갔다 온 사람들이나 방위 갔다 온 사람들은 은근히 그것이 그렇게 큰 스트레스랍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야 별일 아니다 싶겠지만,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남자가 위축이 된다 합니다. 그거 그럴 필요가 없지요.

사회적인 지위가 높으신 분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스스로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엄청난 방어벽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곤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다보니 이렇게 행동해야 된다, 근엄하게 행동해야 한다, 천박하게 보이면 안 된다, 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하는 방어벽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스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승복을 입고 어디 밖에 나가면 이게 족쇄가 돼버리고 감옥이 돼버려요. 그럼 하고 싶은 것도 못합니다.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못 먹고, 바쁜 일이 있어서 조금 뛰어가야 하는 일이 있어도 자유롭게 뛰지 못합니다. 여기저기 감옥에 걸린단 말이지요. 사실은 계율이라는 것도 본질에 있어서는 걸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무애도인, 걸림 없는 옛 도인들의 삶은 언뜻 중생들의 판단, 분별, 생각으로 보면 막행막식이다 싶을 정도로 일상적인 삶에 걸림이 없이 살기도 했단 말입니다. 당신은 안에 어떤 스스로를 가두는 틀이 없고, 방어벽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롭죠. 남들이 보기에는 계율도 안 지키는 것 같고, 말도 막 하는 것 같고, 도인 같지 않아 보이지만 그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군에서 보내주는 자기계발 프로그램 같은 것에 갈 수 있게 되어 동사섭이라는 용타스님이 운영하시는 수련장에를 갔었는데요. 거기에서 일종의 행동명상을 하는데 남녀노소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전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방에서 한 1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스님께서 자기라는 상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스님의 말만 따르라고 하는 겁니다. 남자라는 상, 나이라는 상, 지위가 높고 낮다는 상, 그 모든 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만이라도 완전히 자유인이 되어 보자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방어벽을 모두 벗어보자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은거지요. 스님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고 스님이 말씀하시는 그것이 돼야 합니다. '나'라는 상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그것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안 되면 그것은 '나'라는 상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입니다. 예를 들어 스님이 지금부터 우리 모두 '개다! 강아지다!' 그러면 갑자기 지금부터 개가 되어야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강아지처럼 ‘멍멍!!’ 짖어대면서 깨물고 날뛰며 나를 버리고 개가 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근엄하신 분들일수록, 아상이 많은 사람일수록, 방어벽이 높은 사람일수록 눈치 살살 봐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멍멍' 한번 하고 말지 적극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개가 되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딱 놓아버린 사람들은 그냥 사십, 오십, 육십이 되더라도 마구 짖고 뛰어다니면서 잘도 논단 말입니다. 진짜 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거 신기하게도 한 60이 넘어 보이시는 근엄하게 생기신 분께서 그냥 '개'하라 하면 그냥 막 개가 되고, 고양이가 되라하면 고양이가 되고, 애기 하라하면 갑자기 애기가 되어 가지고 응애응애 울고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놓은 그 벽! 그것이 크면 클수록 그게 잘 안되지요. 자유롭게 그것을 못합니다. 그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틀들은 바로 내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매순간 순간 이 세상을 향해서 수많은 방어벽을 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들과 풍성한 새로운 경험들, 그리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깨달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찾아나서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본질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제 스스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니 찾아 온다기 보다는 언제나 깨달음 아닌 순간이 없고, 참된 자성이 아닌 적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행복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행복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불행하기 때문에 언젠가 있을 행복을 찾아 나서겠다, 달려가겠다, 그게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때로 어떤 선지식이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을 보면 끊임없는 정진과 피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뭔가 치열하게 수행을 해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 가지고 결국에 깨달았다 하는 이런 게 정답인줄 알았는데 그런 방식으로 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수행이라는 것에 ‘수’자도 모르고,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도 그 사람에게 깨달음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불교나 깨달음은 불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해탈과 열반이 불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르침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지 사실은 불교라는 그 비좁은 이름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이라는 것은 사실은 나를 완전히 여는 작업입니다. 가두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활짝 열어두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깨달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참된 진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은 매 순간순간 나에게로 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방어벽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반사되어 나가버립니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활짝 열고 보면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언제 어느때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함께 하고 있었다기 보다 나를 포함은 모든 것은 그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다만 내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눈도 어때요? 무엇을 찾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분명히 그 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못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있었지만 못 찾아요. 그것이 그 방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것이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법당에 아~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 있습니다. 꽃다지가 있고, 개망초가 있고, 별꽃, 패랭이, 연꽃, 참나리 뭐 다양한 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다양한 꽃들이 눈에 보이거든요. 절에 오면 ‘아 이 절 관음사는 꽃들이 많아서 좋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꽃을 향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꽃이 눈에 보이질 않죠. 꽃은 전혀 나에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꽃은 항상 지천에 열려 있지만 그 꽃이 나에게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 꽃들은 꽃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꽃에 관심이 없다가 어느 날 꽃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염과 동시에 아름다운 꽃들이 신비롭게 막 들어오기 시작해요.

제가 예전에 어떤 절에 있을 때 그때 갑자기 그냥 불현듯 막 꽃이나 나무나 숲, 자연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신비롭게 느껴지면서 그저 꽃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던 그런 때였는데요. 그때부터 꽃에 대해서 아주 유심히 관찰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 오면서 이렇게 외진 곳에, 이렇게 척박한 곳에 절만 하나 뚝 떨어져 있으니까 너무 삭막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저도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느꼈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꽃과 야생초나 이런 것들을 좀 보다보니까 너무 신비로운 곳인 겁니다. 사실 그곳이 군사보호구역이다 보니 오래도록 사람들의 발길도 별로 없었던 곳이고 숲이 우리 생각하는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아니였다보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더없이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삭막하고, 그렇게 느끼겠지만 야생의 숲이 주는 자연스러운 풍요를 가만 가만히 느끼고 지켜보다 보니 그것은 그 어떤 식물원에서도 감상할 수 없는 엄청난 생명의 보고이자 신비의 보고였더란 말입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꽃들, 생각지 못했던 약초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산야초들, 책에서만 보았을 법한 그런 온갖 종류의 희귀한 식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 작고 소박한 절이 얼마나 풍요로운 곳이고, 이름다운 곳이고,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운 꽃들로 넘쳐나는 곳인지를 알게 되면서 그 절의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될 수 있었지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리 안 된 쓸모 없는 땅이거나, 가치 없는 숲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혹은 몇몇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만 그 가치는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로 절에 나오게 된 보살님 한 분이 야생화를 많이 공부하고 관심 가지던 분이 계셨는데요, 그 분과 저만 이심전심 염화미소를 보내며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었지, 다른 분들은 여전히 깜깜하더란 말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라

 

우리가 마음속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 놓지 못하면 이 세상에 있는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질 않습니다. 여러분들! 이것을 분명하게 좀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깨달음은 나에게 오고 있다, 지금 이순간도 모든 진리, 모든 자유로움, 모든 행복은 항상 오고 있습니다. 언제 왔냐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오고 있다. 아니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서는 내 마음의 방어벽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보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중에 나에게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선택해서 받아들이는데 익숙합니다. 우리 마음은 자동적으로 좋고 나쁜 것,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거부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에게 이익 되는 사람, 도움 되는 사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면서 사귐을 유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오면 이렇게 밀쳐내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이 오더라도 내 몫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일은 내가 잘하니까 받아들이려하고, 이러이러한 일은 딱 거부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거부하려고 애썼던 그 일속에 나를 일깨워줄 수 있는 엄청난 신비로운, 비밀스러운, 이치가 담겨 있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바로 그 생소한 일을 통해 우주는 나에게 아름다운 삶의 이치나 또 다른 새로운 진리에의 가능성을 보내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례히 그렇듯, 하던대로 거부하는데 익숙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에 불편함과 벽을 가진 채 받아들이니까 그것이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새로운 변화나 어떤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자주 인사이동을 해야 하는 분들 같은 경우에 ‘이런 곳은 가고 싶고, 저런 곳은 안 갔으면 좋겠다’ 하고 방어벽을 쳐 놓습니다.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집착을 한단 말이지요.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지든,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 바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가능성을 향해 나를 활짝 열어놓치 못한다는 거예요. 어디를 가도 좋고 무슨 일이 있어도 좋다, 시골을 가도 좋고 도시에 가도 좋다, 서울을 가도 좋고, 전라도를 가도 좋고 어디를 가도 좋다, 어디를 가든 바로 그곳이 이 우주법계가 지혜와 자비로움으로써 나를 돕기 위해 나를 보내주는 곳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생각 자체가 좁아지고, 내 삶의 엄청난 가능성이 한껏 축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그곳이 바로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곳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삶을 대상으로 마음속에서 딱 벽을 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 가고 싶다 하고 벽을 치니까 어때요?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곳에 갔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저 친구는 나보다 뭐가 잘나서 저 좋은 곳에 보내주고, 나는 여길 보내 줬느냐?’ 하고 그냥 시비거리가 생겨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다 말이죠. 나를 완전히 열어 놓는다면 어디가도 좋다, 어떤 일이 나에게 멀어져도 좋고, 어떤 인연을 만나도 좋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좋다, 설령 어떤 직장을 갔는데 작장 상사가 너무 나쁜 사람이고 너무 사람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런 일이 왔느냐? 나에게 어떤 영적인 각성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나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혹은 나에게 업장소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자비로움으로써 계획해 낸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를 대장부라는 말로 많이 표현하곤 하는데요, 이 정도 너른 마음, 활짝 열려서 꽉 막혀 있지 않은 마음, 무엇이든 오너라 하고 당당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이 정도가 되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방어막을 침으로써 허용할 것과 허용하지 못할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이것을 딱 분명하게 나눠 놓습니다. 내가 받아들일 것,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둘로 나눠 놓고 그중에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깨어남이 자꾸 더뎌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업장소멸의 가능성이 자꾸 뒤로 미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완전한 깨달음, 열려있음, 행복, 자유로움 이런 것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이 말입니다.

다른 게 감옥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게 감옥이 아니라 이렇게 내가 방어막을 치고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가 친 방어막에 내 스스로 갇혀 있는 것! 그게 바로 존재의 감옥이고, 의식의 감옥입니다.

 

삶은 언제나 나를 돕고 있다

 

그래서 다음의 이 명제를 분명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삶은 항상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모든 사건은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여러분을 완전한 각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끌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신의 시험은 사실 그것 자체로써 나를 위한 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나를 참으로 믿는지 시험해 보자 하고 신께서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지 선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나에게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빛이 못 들어오게 방어벽을 쳐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 막은 것은 세상의 많은 어두운 요소들, 문제들, 경제적인 궁핍 내지는 내 능력의 부재, 이런 것이 어두움처럼 느껴져서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한없이 들어 올 수 있는데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딱 치고 있음으로써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놓고 나서 스스로 어둡다고 ‘삶은 왜 이리 어두우냐? 삶은 왜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 것이냐?’ 라고 삶과 다투고 투쟁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를 찾도록 완전히 나를 진리에 내맡기고 포용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냐? 일상이 바로 진리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소한 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로운 것이고, 가장 경이로운 겁니다. 가장 사소한 것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보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나를 완전히 활짝 열어둘 수 있어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은 정확히 여러분이 받아야 될 바로 그 사람인 겁니다. 이 모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건, 사고, 일, 경계, 사람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의 세계, 법계로 부터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그것도 우리를 이끌어 주고, 일깨워 주고, 우리를 깨닫게 해줄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한 어떤 진리의 소식이요 부처님의 큰 자비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가 삶 속에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바로 진리의 나툼이다 이 말입니다. 그 모든 사소한 일상의 경험이야말로 나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진리의 계획입니다. 하루 하루 매 순간순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기적이고 신비이며 진리의 소식입니다. 우리를 깨어남으로 이끄는 최적의 공부인 것입니다. 일상의 삶이야말로 깨어남을 향한 장대한 여행인 것입니다.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안에 오래도록 깊이깊이 저장되어 있던 어떤 업장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모처럼의 풀려날 최적의 기회를 맞아 가지고 나에게 찾아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이든 사고든,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평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부터 어떤 특정한 깨우침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를 평화와 자유로움으로 이끌어 주는 상황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신비를 맞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삶이라는 평범함 뒤에 감춰진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가짐은 어떠냐 말이지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전혀 소중하게 여기거나, 새롭게, 신비롭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그저 그렇게 반복되는 진부한 일상일 뿐이란 말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에, 삶 그 자체에 완전히 나를 열어두지 못합니다. 그 모든 삶을 분별하고 해석하고 차별하고 선택함으로써 통째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특정 대상에만 나를 열어 보입니다. 사람을 만나도 선택적으로 만나고, 어떤 일을 만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만나고 그런단 말입니다. 삶이라는 진리가 나에게 주는 선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면, 삶 그 너머의 깊이에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취사선택하거나 나누지 않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휘익 대충 한 번 훑어 보고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야’ 하고는 툭 처박아 놓습니다.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깨달음이 담겨있는 책인지도 모른 채 그냥 책장에 꽂혀서는 몇 년이고 처박혀 있기만 합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방어막을 쳐놓은 그 사람에게는 그 책이 들어올 수 없어요. 그 가르침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존재가 깨어나게 되면 내가 어느 정도 열려 있게 되면 그 진리나, 그 가르침이나, 어떤 삶의 부분에 대해서 열려 있게 되면 그때부터 그것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집안에 푹 처박아 놓았던 그 책이 이렇게 보배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잘 따라오고 있나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계신 건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이중에 많은 분들에게는 아마도 별 의미 없이 다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내가 딱 닫아걸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들어 올 수가 없거든요. 부처님 제자들도 부처님께서 그 오랫동안 법을 설하고 했지만 스스로 닫아 건 사람은 결코 가르침을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을 오래도록 곁에서 시봉했던 아난존자나 처음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 마부로 따라왔다가 훗날 출가하여 비구가 된 찬나장로도 부처님이 계시는 동안에 그 많은 가르침과 훈계와 지도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부처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닫아거는 사람에게는 그 부처도 아무런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나를 완전히 열어둔 사람에게는 만나는 모든 사건, 모든 일들, 모든 사람, 모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바로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깨우침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할 필요가 없단 말이예요.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흘러와서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자꾸 가둬두거나 못 들어오게 틀어막을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완전히 나를 허용하는 겁니다. 그럼 그 일이 진리의 일이 되고 부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순간순간 우리에게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방어벽을 없애주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찾아옵니다. 만약에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하나의 방어벽에 대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방어벽을 허무는 방법

 

보통 사람들은 방어벽에 걸리지 않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런데 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잖습니까? 방어벽에 걸리는 것, 사상적으로도 그렇고 뭐든 내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뭔가 나한테 와서 부딪치고,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내 마음에 화를 남기거나, 내 마음에 짜증을 남기거나, 이거는 내가 좀 거부하고 싶거나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것,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내 방어벽을 깨주기 위한 목적으로, 내 방어벽을 깨 줌으로써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고, 나에게 진리가 파도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나에게 오는 것, 나에게 오는 모든 일들을 대상으로 나를 완전히 열어두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파도쳐 들어오고 그랬을 때 내 안에 내가 꽉 울타리 쳐놨던 방어벽들이 하나둘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경지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방어벽도 없으니까 모든 것이 자유롭게 오고 간단 말입니다.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어요. 이 자리가 바로 무애도인의 자리라고 했어요. 그랬을 때 비로소 아까 말했던 다양한 예를 들었던 방어벽들, 그런 어떤 크고 작은 관념, 관념의 틀, 방어벽 그것에서 내가 놓여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어떤 틀에 잡힌 관념에 빠져가지고 거기에서 괴로워하는 일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방어벽 너머에 자유로움이 있다, 내가 쳐 놓은 그 방어벽 너머에 깨달음이 있고 빛이 있다 하는 겁니다. 어디 가서 깨달음을 찾으려고, 진리를 찾으려고, 행복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다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진리가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에게 파도쳐 들어올 수 있도록 다만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고 깨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절에서 수행하는 것만 영적이고, 수행자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나에게 욕하는 사람, 나에게 욕하는 상황이 바로 아주 영적인 대상인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이 녀석이 나한테 욕했다고 시비를 붙이고 싸움을 걸 때 그것이 세속적인 분쟁이 되는 것이고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에게 욕을 했을 때 그 마음을 관찰하면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들여다보고, 그 욕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는 겁니다. 왜 이 우주에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욕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누구도 나에게 욕 할 수 있어요.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은 당연히 있는 거예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걸 허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닫아 걸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걸 허용하고 났을 때 비로소 그 욕이 나에게 와서 흔적을 남기고, 화를 남기고, 두려움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욕 얻어먹기 싫어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두려움에 못 하게 되는 일이 없어집니다.

제가 전에 그 말씀을 드렸나 모르겠는데요. 종교가 화합을 해야 된다,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이런 취지의 내용을 인터넷에 블로그 기사로 올려서 포탈 싸이트에 메인으로 채택이 한나절 됐는데 그 사이에 몇 만 명이 그 글을 봤어요. 그 한나절 동안 댓글이 천육백 개가 달렸는데 그냥 언뜻 읽어보면 정말 불교도 옳고, 기독교나 천주교도 옳을 수도 있고, 모든 종교, 모든 사상이 다 옳을 수 있다,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함께 화합을 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켜 나가야 된다, 뭐 그런 내용이거든요. 언뜻 보더라도 특별히 시비 걸 내용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천육백 개 댓글 가운데 한 반수 가까이가 아주 상스러운 욕입니다. '그래. 너 잘났다. 이 중놈아!' 거기 첫 번째 댓글, 그것이 아주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건 하도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첫 번째 댓글만 딱 기억이 납니다. 딱 네글자였어요. ‘까고있네’ 하 이거 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웃음) 그래가지고 그 안에서 수십 수백개의 댓글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종교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종교전쟁 하지 말자고 쓴 글 밑에서 버젖이 종교전쟁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제가 그 다음부터 ‘야! 이렇게 욕을 얻어먹을 바엔 차라리 글을 쓰지 말자’ 해야 되느냐 그게 아니다 이겁니다.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는 거지요. 인생에서는 나를 욕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부처님도 외도들에게 수도 없이 욕도 얻어 먹고, 억울한 누명도 쓰고, 심지어 죽이려 한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교화활동을 중지해야 옳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을 허용해야 되는 거예요. 나한테 괴로운 일도 있는 겁니다. 그것을 왜 부정합니까? 다 허용할 필요가 있어요.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좋은 일에 대해서도, 나쁜 일에 대해서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게 됐을 때 내 인생은 엄청난 깨어남이 시작되고, 내 인생에 큰 자유로움이 시작됩니다.

단, 나를 완전히 오픈했을 때, 모든 것을 받아 들였을 때, 어떤 일종의 자아상실감이라든가 일종의 내가 무너지는 것 같은, 내가 좌절되는 것 같은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보호막을 치는 것, 방어막을 치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알고 살아오면서 엄청난 방어막을 쳤고, 그 방어막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방어막이 바로 난데 내가 바로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우리는 일순간 괴로워 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 괴로움을 허용하라는 말입니다. 그 자아상실감은 바로 아상이 깨지는데서 오는, 바로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아상이 타파되는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 쯤이야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수행자가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어벽이 좀 깨짐으로서 내 존재가 조금 상실감이 오더라도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이예요.

 

받아들임이 곧 깨어있음이다

 

그것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를 완전히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행복, 깨달음, 진리, 자유로움, 우리 삶의 걸림 없는 삶 이런 것들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열어두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하는 일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나를 열어두고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분별 없이 매 순간순간을 관하며 사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활짝 열고 삶을 허용할 때 직장에서 진급할까? 안할까? 뭐 돈을 벌 수 있을까? 없을까? 이번 사업이 잘될까? 못될까? 남편하고 싸웠는데 맘 풀어졌을까? 안 풀어 졌을까? 자식이 공부를 잘할까? 못할까? 내가 미래에 잘 살 수 있을까? 없을까? 1년 뒤에 있을 수능시험 결과가 좋을까? 안 좋을까? 그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생각이 만들어 냈고,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일 뿐이에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고요. 허상이란 말입니다. 허상. 수많은 대학교에 가면 연구논문들 있잖아요? 그 연구논문이 그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 또한 상당수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 아니겠어요. 제가 그것 자체를 그냥 묵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순간 그 모든 것도 다 공허한 것이란 말입니다.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지금, 듣고 있는 이것만이 실재입니다. 이 죽비를 듣고 있는 이 순간 ‘탁 탁 탁!’ 이것입니다. 지금 이 죽비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이 소리가 들리죠? 귓 전을 생생하게 울린단 말입니다. 이것!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이 자리에 깨어있을 수 있는 것, 이 자리로 가져다주는 것! 그것만이 실재입니다. 내가 온전히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 모든 걸 포용하게 되고, 내가 완전히 관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그 방어벽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시고 하여간 내 인생에서 뭔가 껄끄러운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의 경계가 나타난다면 ‘아 이게 바로 나를 붙잡는 방어벽이구나. 이게 바로 나의 행복과 자유로움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방어벽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포용하시길 바랍니다. 나한테 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허용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진리는 나에게 엄청난 파동으로서 파도쳐 들어올 것입니다. 그 파도쳐 들어오는 것을 내가 막지만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어때요? 여전히 어렵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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