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느낌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게 되고, 그렇게 흐르게 되면 좋은 느낌에는 애욕과 탐심을 싫은 느낌에는 증오와 진심을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은 방치함으로써 어리석음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과정은 이윽고 애욕과 집착, 삼독심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무수히 많은 좋고 싫은 등의 관념 혹은 편견의 틀을 형성하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관념을 뭉쳐진 실재적 개체로 인정하게 되어 거기에 '나'라는 관념을 개입시켜 '나'를 실체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옳다'라고 하는 아상(我相)인 것입니 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상(相)은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각종의 '느낌'을 놓침으로 인해 연이어 애욕과 집착이 일어나고 여기에서 오는 물질적 정신적 인과 작용의 끊임없는 순환작용에 불과한 비실체적 허상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의 근본교설에서의 '무아(無我)' 개념 또한 이러한 연유입니다. 이렇게 형성되어진 '나'라는 관념에서 시작되어 다시금 무수한 분별과 편견, 새로운 관념이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편견과 관념들을 고집하여 사실이라 받아들이지만 그 관념이란 우리들 습(習)으로 무장된 헛된 관념에 불과합니다. 가만히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대상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관(觀)함에 있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관념이나 생각의 늪에 빠지면 안됩니다. 떠오르는 분별과 생각으로 대상을 관찰해선 안됩니다. 관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관념과 생각이 게재되지 않는 순수한 주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관념이나 생각이 게재되면 또 다른 관념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처럼 저마다의 관념의 틀에 세상을 대입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법당에서 '목탁'을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보라는 주문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전의 경험과 기억, 관념을 목탁에 투사하여 자신의 관념대로 목탁에 대한 분별을 이야기 합니다. '목탁이다', '소리나는 나무다', '둥글고 속이빈 소리나는 통이다' 하며 애써 편견없이 보려 하지만 우리네 관념의 틀은 너무나도 깊숙히 개입이 되어 있음만을 증명해 줄 뿐입 니다. 목탁을 바라보는 순간 좋고 나쁜 분별 또한 일어납니다. 불교신자이며 목탁이 친근한 이라면 좋다는 느낌을 또 타종교 신자라거나 심지어 산골자기에서 자라 목탁채로 맞으며 자란이가 있다면 싫은 느낌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시각에서 목탁을 바라본다면 '나무'라는 관념도, '소리'난다는 생각도 '둥글다' '속이 비었다' '좋다' '싫다'라는 관념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이전에 만들어 오던 고정된 관념을 빼고 사물을 바라보면 바라보는 그 순간의 느낌은 고요할 것입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입니다. 소리를 들어도 좋고 싫음이 아닌 그저 '들릴 뿐' 무엇을 보아도 그저 '바라볼 뿐' 냄새를 맡아도 그저 '냄새날 뿐' 이와 같이 육근의 모든 감각기관은 오직 '할 뿐'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만나는 직장의 상사를 만난다거나 가족이며 친구를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상사' '싫은 친구' '좋은 사람' 하는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 놓은 관념으로 상대를 대하기 때문에 늘상 관념의 늪에 빠져 그 대상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면 행복하고 싫은 사람 만나면 괴롭고 그렇듯 대상에 내 마음이 놀아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령 미워하던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일을 했더라도 내 마음의 편견 때문에 그렇게 쉽게 칭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에 빠져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그저 일체의 모든 사물, 사람, 대상을 바라봄에 오직 고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텅 비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고 담을 수 있도록 그런 열린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워하던 사람, 싫어하는 음식, 도저히 못 할 일, 내 능력 밖의 일...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어설픈 관념일 뿐입니다. 놓아 버렸을 때 잡히지 않던 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어설픈 관념을 현실로까지 가져와 투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에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의 틀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묶어두는 관념의 사슬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괴로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라는 현실에서 떠오르는 생각, 관념 그 자체의 '현상'은 현재의 실제이지만 그 관념과 생각을 파고 들어가보면 이미 그것은 공(空) 그 자체입니다. 거짓된 분별이며 인연따라 만들어진 허상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 몸과 마음의 '현상' 그 자체가 가장 참된 진실에 가깝습니다.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텅 빈 거짓 관념일 뿐 더 이상 진실일 수 없습니다. 거짓된 허상을 붙잡고 늘어져 봐야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참된 실재' 그 자체가 수행의 대상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지금 여기'라는 '보다 가까운 실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관찰하는 순간 미세하게 끼어드는 과거 혹은 미래로부터 오는 일체의 무수한 관념을 그저 순수한 객관이 되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녹여야 할 것입니다. 관념의 틀은 '나다' 하는 아상과 아집(我執)을 형성하지만 관수행은 관념의 허상을 바로 봄으로써 관념의 소멸, 아상의 소멸, 아집의 소멸을 돕습니다. '진리'는 생각이나 관념 속에 있지 않고, 오직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 속에 있습니다. 오직 대상인 '현상'과 현상에 대한 고요한 '관찰'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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