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홀로 존재하고 싶은 깊은 속 뜰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언젠가 나 홀로 떠나 그림자와 함께 여행하던 그 바닷가 외로운 포구, 혹은 저 홀로 울울창창 소리치며 그 깊은 산 우뚝 솟아 있던 한 그루의 소나무가 지독하게 보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럴 때는 한 며칠 일도 다 때려 치고 내 행동 범위도 최소한의 것으로 한정시킨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핸드폰, 전화 벨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행여 TV를 켜거나 신문 보는 것조차 번거로워 잠시 접어 둔다. 될 수 있다면 먹는 음식도 소박하면 좋겠고, 군것질도 끊고 나면 속이 비어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야말로 입에는 말이 적고, 마음에는 일이 적고, 뱃속에는 밥이 적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배려한다.
그럴 때면 이른 새벽 뒷산 깊숙이까지 들어가 호젓하게 자연 속에서 그저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도 한다. 후덥지근하던 열대야 더위에서나, 온몸을 달달 떨어야 하는 한겨울 추위에서는 느끼지 못할 그런 청정한 산기운이 길을 걷는 한 사람의 속 뜰을 비춰줄 수 있는 그런 날. 그런 날, 바로 오늘 같은 날에 삶의 무게를 무색하게 만드는 외로움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곤 하는 것이다.
모처럼 찾아오는 이런 외로움의 때를 예전 같으면 무기력이나 우울증쯤으로 여기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겠지만, 가만히 그 느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건 우울한 때가 아닌 오히려 신선한 삶의 활력이 되는 때임을 깨닫게 된다. 이럴 때가 있다는 것이 많이 고맙고 감사하다. 이런 때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이 모처럼만에 성숙할 수 있을 기회를 맞이한다는 것. 외로움의 깊이만큼 내 삶의 깊이도 한층 깊어진다는 것. 그런 것이다.
사실 외로움이란 근원적인 문제다. 그 깊은 외로움을 통해서 잊고 있었던 참된 자아와 만나는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홀로 된 외로움을 통해서 전체와 하나로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한없이 충만한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면 헛헛하고 외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텅 빈 가운데 성성하게 깨어 있는 속 뜰은 마구잡이로 채워 넣는 소유의 정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울 때 비로소 내가 나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일상에서는 내가 나의 존재를 잊고 내 바깥 존재며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지 나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지 못하지만, 외로울 때, 나 홀로 고독의 한 가운데 딱 내 버려져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내 안에 숨어 있던 참된 친구, 어진 벗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홀로 있으면 외롭고, 외로움은 싫은 것이라고.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음으로써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쓴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느끼고 실제로 함께 함으로써 조금 덜 외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깊이 비추어 보면 함께 하고 있음이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해도 우린 여전히 외롭다. 가족과 함께 할 때도 우린 외롭고, 친구와 함께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번잡한 군중 속을 거닐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을 때라도, 그 어느 때라도, 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라도 우린 여전히 외롭다. 함께 있음으로써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고 할 때 우린 세상에 속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을 떨쳐낸 것이 아니라 잠시 덮어두고 있을 뿐, 언제까지 그 외로움을 덮어둘 수 있을까. 덮어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속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린 내 안의 참된 고독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저 홀로 외로움을 맞이했을 때 그 때 우리는 외롭지 않다. 아니 어쩌면 너무 외로워서 외롭지 않다. 우린 누구나 그러한 외로운 때를 가져야 한다. 철저하게 저 홀로 고독해져야 한다. 외로움이 싫다고 자꾸 벗어나려 하면 안 된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외로움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울 뿐. 그럴 바에야 두 눈 똑바로 쳐다보고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 관심을 바라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고, 철저히 혼자가 될 수 있을 때, 그럴 때 우린 비로소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 자신과 마주하기를 꺼려하고, 자꾸 바깥 세상에 기대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을 만나질 못한다. 나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려거든 먼저 바깥의 관심이며 기대를 다 포기해 버려야 한다. 바깥으로 치닫는 그 어떤 마음도 다 놓아버리고 철저한 고독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나 홀로 그 고독 앞에 우뚝 설 수 있어야 한다. 이 길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그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일뿐이다.
이처럼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함께 할 수 있고, 작은 나의 허울을 벗고 전체와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몸뚱이만 그저 덩그러니 혼자 있다고 해서 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혼자 있으려면 번거로운 우리의 소유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잔뜩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많으면 우린 호젓하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물로부터 소유를 당하며 소유물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휘둘리고 있는 소유란 물질적인 것들이 물론 포함되지만 돈, 명예, 권력, 지위, 배경, 학벌, 등등의 것들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혼자 있는 법을 배우면 이런 것들이 있건 없건, 높건 낮건 우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존재하면서도 충만할 수 있는 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적인 것들이 많이 채워져야 충만하고 행복하다고 여긴다. 돈이며 명예 권력 지위 학벌이며 온갖 소유물들이 넘쳐나야 행복하지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나 홀로 덩그러니 남으면 내 존재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 마냥 외로워하고 괴로워한다.
또한 이러한 유형무형의 소유물로부터, 온갖 물질로부터 자유로워 졌다고 하더라도 아직 온전한 홀로 있음을 실천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홀로 있음의 실천 요소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정신의 홀로 있음이다. 아무리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더라도, 온갖 소유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롭게 살더라도 우리 머릿속이 온갖 번뇌와 탐진치 삼독심貪瞋癡 三毒心으로 또 잡다한 지식 같은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면 우린 참으로 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듯, 우리 정신 또한 온갖 번뇌며 수많은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한다. 머릿속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그 때 우린 참으로 몸도 마음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넘쳐나는 소유물 속에서 또 온갖 지식과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터질 것 같은 번뇌와 잡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린 누구나 이따금씩이라도 홀로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짐으로써, 채움으로 삶의 목적을 삼아 왔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조금씩 비움으로, 놓아감으로 바꾸어 갈 수 있다.
우린 어차피 혼자서 잠시 이 지구로의 여행을 온 것이고, 이 여행을 마치고 되돌아 갈 때, 또 다른 삶의 여행을 떠날 때 또다시 우린 혼자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때 그동안 쌓아 놓았던 모든 것들을, 인연이며, 소유물들을 한꺼번에 버리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미리 미리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버리는 연습을 해 나갈 수 있다.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우린 당당해 질 수 있고, 내 안에서 충만하게 우러나오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주변 상황이나 조건의 좋고 나쁨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나 혼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이 숲도 봄이 되니 한겨울 외로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홀로 우뚝 서 있던 나무들이 이제 다시금 여행을 떠나려고 재잘거리고 있다. 겨우내 나 홀로 이 추위를 맞이했던 이 나무들은 잘 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러고 나면 또 다시 함께 존재하는 풍성한 시간 또한 오게 된다는 것을. 법상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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