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8강-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 시제법공상
앞에서 반야경의 핵심 사상인 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공(空)이란, 존재 본질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의 본질을 공상(空相)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금강경에서도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즉 공임을 올바로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한 것입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장에서, 일체제법은 공상이기에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공의 모양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정의 논리를 통해 공의 모양을 살펴보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법(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법이라고 하면 ‘진리’를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법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가 ‘진리, 최고의 실재(實在)’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가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할 때, 언제나 법의 개념 정리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에서 ‘법(法)’도 역시 ‘존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석하면, ‘이 모든 존재의 공한 모양은’이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닙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과 멸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부정이 아니라 생멸이란 고정된 실체적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불’이란 부정의 의미라기 보다는 ‘연기’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입니다. 인연생기하여 인연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不]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불생불멸’은 우리에게 존재 본성의 영원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멸해 없어졌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인 것입니다. 누군가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슬퍼하며 인생이 허무함을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이 육체가 인연이 다해 쇠해졌기에 겉껍데기를 갈아치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새롭고, 보다 젊고, 건강한 몸을 받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나름대로의 업에 걸맞은 껍데기를 찾아 다시 태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좀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반복하는데, 일본 동경대학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간은 약 7년 사이에 몸의 전체 세포가 바뀐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몸과 7년 후 내 몸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같은 ‘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포는 죽고 살지만, 좀 더 크게 인간을 놓고 보면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자들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소립자들은 다시 수많은(300여개) 소립자들로 상호 형성되어 서로 의존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밝혀 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구성하는 실체적인 기본 입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어떤 존재라도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수많은 인과 연들이 상호 의존함으로써, 즉 인연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생멸이 결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 유와 무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의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공의 두 번째 모양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모든 존재의 본성은 절대 청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청정’이라는 것은 더러움의 반대 개념으로서 청정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청정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깨끗하다, 더럽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을 할 때에는 작업복을 입으며, 의례 옷이 더럽혀질 것을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 더러워지더라도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맞선을 보려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양복을 입고 나갔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작은 잡티가 있어도 신경이 쓰이고, 더럽게 느껴집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할 때 훨씬 더 더러운 데도 말이지요. 이처럼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도 상황 따라, 인연 따라 다른 것이지, 본래 더럽고 깨끗한 고정됨이 있지 않은 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다는 상을 내며, 더럽다는 상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분별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수련대회를 진행하다 보면 초심자이신 분들이 발우공양을 하기 싫어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여쭈었더니 한마디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음식 찌꺼기를 김치를 휘휘 둘러 숭늉으로 씻고는 다시 마시는 것에 대해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몸 안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 음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밥상을 차려 놓고 밥을 먹고 나서 김치를 먹고 숭늉을 마시면 깨끗하고, 이것을 발우에 놓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이지요. 다만, 시간적으로 선후가 정해지면 깨끗하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은 우리의 분별이지, 실제로 더럽고 깨끗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무언가를 판단할 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있기에,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도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했을 때 그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에 비해서 더러운 것이고, 깨끗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더럽고 깨끗한 가치의 분별은 좀 더 넓게 확대하여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불구부정이란 공성의 이해는, 어떤 사물에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을 없애려는 사상이 아니라, 사람의 인품이라든가, 인종, 학력, 재산, 명예 등에 있어서도 불구부정임을 올바로 깨닫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순수하게 다가서기보다는, 온갖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신분, 재산의 유무, 학력의 고저 등에 의해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태어나면서부터 못나고 잘난 것이 어디 있을 수 있으며, 청정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나뉘어 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공의 바탕, 연기법의 바탕에서는 스스로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본래 더럽다거나 청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 사상이야말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인간 청정성의 회복이며, 인간 무죄의 엄숙한 선언인 것입니다.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러워질래야 더러워질 수 없는 절대 청정한 것입니다. 다만 현실에서 행위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연가합(因緣加合)으로 잠시동안 귀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는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증불감
마지막으로 공의 모습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부증불감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상계의 물질,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量)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면을 봅시다. 본래 물질에는 내 것, 네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이것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있기에,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 내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보시하면 아깝고,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소유와 나눔이 오히려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무소유를 통해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존재가 가진 본성의 원만 구족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고, 부유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그를 부유하고 가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과 소욕의 정신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다’, 혹은 ‘너다’ 하고, 너와 나를 갈라놓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상(我相), 아집(我執) 때문에 ‘내 것’이라는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아상이 없는 곳에 네 것, 내 것은 없습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어디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아상을 깨고 보면 ‘내 것’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사라졌을 때 이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백만 원의 돈이 있다고 합시다. 이 돈은 많은 돈입니까, 아니면 적은 돈입니까? 이 백만 원은 한없이 가난한 인도나 북한의 불쌍한 가정에서라면 수억 원과도 맞먹는 값어치가 있으며, 대재벌에게 있어서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몇천 원, 몇만 원과도 같은 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백만 원이지만 인연 따라, 어떠한 이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한없는 양의 돈이 되어 늘어날 수도 있으며 반면에 줄어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늘고 주는 것이지, 백 만원이라는 돈 자체에 어떤 증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공성의 세계에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이렇듯, ‘내 것’이라는 소유도 부증불감의 세계에서, 공의 측면에서 보면 증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넓게 보아 내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든다면, 내가 돈 만 원을 가지고 있을 때, 오천 원을 배우자에게 준다면 내 돈은 줄어들었지만,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늘어난 것입니다. 즉 ,우리 가족 전체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와 배우자를 가르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증감이 있게 마련이며, 배우자에게 오천 원을 주었을 때 괴롭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습니다. 둘은 하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라는 생각이 있다면 부증불감이며, 내것이 없어져도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곧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관련지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를 우리의 가족처럼 ‘하나’라고 생각했을 때 , 즉 사회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고 ‘하나’라는, ‘동체(同體)’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바로 사회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 바로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라는 분별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의 궁극으로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한 부분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이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합니다.
사상(四相)의 기본은 아상에 있으며, 아상이 있기에 인상이 있는 것입니다. 즉, ‘나다’ 하는 상이 있기에 ‘너다’ 하고 가르는 상이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우리 전체가 일체로서의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은 사라집니다. 내 것이 줄어들면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가 나와 다르지 않거늘 무엇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하나’의 가르침이 바로 불교의 핵심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했을 때, 지혜는 ‘하나’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하며, 자비는 너와 내가 진정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천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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