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의 관문, 루클라 - 에베레스트 라운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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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의 관문, 루클라 - 에베레스트 라운딩(1)

목탁 소리 2009. 7. 2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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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의 관문, 루클라

- 에베레스트 고쿄(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 촐라패스 + 고쿄 교코리) 라운딩 1일차 (1) - 

 

 

 

 

 

 

 

드디어 그토록 기다려오던 날이 밝았다.

그냥 쉬엄쉬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간절히 이번 생에 꼭 하나 끝내고 가야 하는 그 어떤 숙제라도 되는 양

결연히도 기다려 왔다.

그러나 막상 그 기다림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의연히도 무덤덤하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삼 일 쯤 전에 루클라행 비행기에 올랐어야 한다.

내 일정이 조금씩 당겨진 이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생각지 못했던 네팔인들의 명절이 계속되면서

바로 엊그제까지 모든 관공서가 문을 닫는 바람에

산행에 필요한 퍼밋(Permit, 입장허가서)이며 팀스(TIMS, 트레커 정보운영 시스템) 발급이 늦어졌고,

그 차에 전부터 알고 지내던 현지인 벗으로부터 명절 초대도 받고,

산골 마을의 인연 있는 학교에도 다녀올 겸 해서 마음 편하게 먹고 비행기표를 삼일 늦추었다.

 

덕분에 오늘 출발하게 되었는데 엊저녁 듣게 된 충격적 소식!

내가 타고 가려했던 그 날짜에 출발한 비행기가

루클라 공항의 날씨 사정과 운전자의 부주의로 인해 그만 추락을 했다는게 아닌가!

조종사 한 사람은 겨우 탈출을 했지만

독일인 17명과 오스트리아인 2명, 그리고 네팔 현지인 포터와 가이드 4명이

모두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순간 머릿속에서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사이에 ‘한국인 1명’이라는

오싹한 상상력이 스치며 소름이 끼쳐왔다.

국제 뉴스에도 연일 보도되고 있다더니 나중에 카투만두에서 이메일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산에 있는 2주 동안 내 일정을 알고 있던 몇몇 지인으로부터 걱정 어린 메일이 와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정확한 인연과 우주적인 질서에 따른 삶이라는 큰 계획의 일환이었겠지만,

내 계획을 바꾸지 않고 일단 루클라까지라도 가고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더라면

내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 내 삶이 마감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모르긴 해도 더 큰 인과의 법칙 속에서, 신의 계획 속에서

그들은 정확히 가야할 때가 되어 그 비행기에 오른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아직 그 때가 아니기에 내 입장에서는 그저 단순한 에피소드로 끝났는지 모른다.

 

우주법계에서 부여하는 삶의 질서는

개개인이 자기 고집과 아상(我相)과 온갖 판단 분별로 상황을 자기식대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정확히 필요한 일들을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자비로운 목적을 가지고 펼쳐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기 고집과 집착으로 우주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대항하고 투쟁하려 한다면

그것은 제 스스로 지옥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나는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아서 살았고 그렇기에 그들보다 우월하거나 운이 좋고,

그들은 운이 나쁘거나 악행을 많이 했거나 잘못한 일이 많아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과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요, 계획인 것이다.

물론 그 계획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죽은 자에 비해 우월한 것도, 승리자가 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양한 방법으로 찾아올지언정 분명히 공평하게 찾아오고야 만다.

그렇기에 죽음은 실패나 좌절이나 아픔, 이별,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요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어쨌든 일정에 차질은 생겼지만, 그래서 계획 변경으로 인한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그 대신에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당장에 눈앞에 드러난 현실은 일정 차질이며 계획 변경이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깊이 지켜보면

이처럼 삶의 그 뒤에 숨은 목적, 혹은 더 깊은 차원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곤 한다.

 

그러니 삶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괴로워할 일만은 아니다.

계획된 일정에 부득이한 변경이 생겼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은 없다.

심지어 그 변경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삶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부득이한 계획 변경과

어쩔 수 없는 사건, 사고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그것은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계획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더 큰 법계(法界)의 계획표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던 것이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욕심’, ‘내 집착’, ‘내 소유’라는 아상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가 만들어 놓았던 인생 계획에 작은 변동이라도 생기면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못한다.

심지어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한다.

내 계획대로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대로, 내 욕심대로 모든 것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상에 갇혀있지 않은 자는 삶에 계획을 세우기는 할지언정

애초부터 ‘반드시, 절대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자기 고집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변화에도 심리적인 괴로움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 어떤 변화도 마땅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도 좋고, 저렇게 되어도 좋다.

삶의 그 어떤 변화무쌍한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느 한 쪽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 고통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는 더 큰 질서를 안다.

인생의 더 깊은 차원에서 만들어내는

신의 질서를, 법계라는 진리의 이치에 완전히 자기를 내맡긴다.

자기 고집과 아상을 버리고 더 큰 삶의 진리에 나를 고스란히 내던진다.

삶의 거대한 강줄기에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힘을 빼고 함께 따라 흐른다.

 

이러한 대수용과 무집착과 대긍정이야말로

리의 삶이 비좁은 인간의 틀에 갇히지 않고

진리의 차원, 신의 차원, 붓다의 차원으로 접근이 가능하게 만든다.

더구나 그 ‘더 큰 질서’는 언제나 더 높고 깊은 차원에서 보면 항상 나를 돕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계획대로 안 되는 것 같고,

때때로 나에게 너무도 불합리하게 느껴지며 불리하고 고통스럽게 보여지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우리 생각의 틀을 뛰어넘는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우리를 돕기 위한 대본인 것이다.

때때로 그것은 우리의 업장(業障)을 녹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사건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지혜를 전해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더 큰 질서’ ‘더 깊은 진리’에 나를 완전히 내던지고 맡기는 삶은

모든 고통과 근심을 덜어주고 우리를 진리로, 신에게로, 깨달음으로 이끈다.

 

3일 연기된 일정의 의미를 지켜보며,

설산으로의 여행 대신 다른 삶으로의 여행을 먼저 떠난 그들의 영전에

깊은 조의와 함께 ‘티벳 사자의 서’를 한 편 독송해 바쳐 본다.

 

 

국내선 공항은 언제 사고가 있었냐는 듯 루클라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하기야 10월~11월이 네팔 트레킹의 가장 큰 성수기에다

작년 한 해 국내 정치의 안정으로 인해 유례없는 최대의 관광객들이 네팔을 찾았다고 한다.

 

8시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씨타항공, 루클라”를 외치는 말이 없어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네팔리 타임’이라며 어제는 3시간도 넘게 지연되었었다고 귀뜸해 준다.

하기야 3년 전에 왔을 때에도 카투만두-포카라행 오전 8시 비행기를 오후가 되어서야 탓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을 듣고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누려본다.

 

한 30분 쯤 더 지났을까.

왠일로 이렇게 빨리 비행기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

표를 끊고 나가 버스에 올라 비행장 한 켠에 서 있는 작은 비행기를 향한다.

 

 

 

 

네팔의 공항은 국제선과 국내선이 가까이 함께 있는데

한 나라의 수도 대표 공항답지 않게 작고 소담하다.

버스에서 내려 비행기 앞에 줄을 서니 사람과 함께 체크인 할 때 맡긴 짐들도 함께 싣고 있다. 

 

 

  

20여 명 남짓 탈 수 있는 아주 작은 비행기,

앉으면 조종사의 조종석까지 환히 보이는 미니 비행기다.

 

  

일행이 다 타자마자 비행기 몸체 전체를 뒤흔들며

미니 프로펠러를 움직이더니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잠시 뒤 구르릉 소리를 내며 그 작은 기체가 쏜살같이 달리더니

드디어 창밖으로 카투만두의 전경을 발아래로 펼쳐낸다.

 

[공항 활주로에서 출발, 하늘로 날아올라, 카투만두 시내를 펼쳐보여 준다] 

 

 

의외로 안정감 있게 그리 높지 않은 하늘을, 아니 아슬아슬하게 산 위를 날고 있다.

비행기가 뜨자마자 조종사 보조석 뒷자리에 있던 한 남자가 일어나더니

작은 쟁반에 두 종류의 사탕을 내어 온다.

작고 허름한 비행기지만 일반 항공사에서 하는 서비스를 다 하기는 하네.

 

 

 

야트막한 산 위를 사뿐 사뿐 나는 동안

산 위에 펼쳐진 네팔인들의 전형적인 산골 논밭 풍경과 올막졸막한 집들에 시선이 머문다.

 

 

푸르른 초록빛과 익어가는 노란 황금빛의 논이

꼬물 꼬물 모여 있는 마을, 집, 길, 산과 어우러져 마음까지 시원하게 씻어주는 듯하다.

 

 

잠시 뒤 비행기가 산 위를 가볍게 날아오르고

전형적인 네팔 산악 마을의 풍경인 계단식 다랑이 논이

한국이 가을 들녘처럼 누우렇게 익어가고 있다.

 

 

 

한 20여 분 쯤 떠 있은 것 같은데 비행기는 벌써 착륙을 준비중이다.

착륙직전 창밖으로 거대한 산군이 펼쳐지면서 기체가 주춤하고 흔들리더니

비행기가 눈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을 하는게 아닌가.

순간 엊그제의 사고가 떠올랐다.

루클라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산에서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 해 정면의 산으로 부딪혔다는 신문기사가 오버랩되며 온몸이 순간 경직 되 옴을 느낀다.

 

‘이놈의 생각’, 생각이 공연한 공포감을 또 만들어낸 것이다.

아무 일 없이 물론 잘 도착을 했지만,

생각이란 놈은 비행기에 타는 순간부터 엊그제 있었던 사고를 끄집어냄으로써

계속해서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가 조금만 주춤 거려도 '혹시나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고,

조금만 조종사가 딴짓을 해도 '저 사람이 저러다 어쩔려고' 하며

혼자서 생각으로 근심과 걱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상황에

자동적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면서 온갖 망상 분별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마구잡이로 끄집어내는 생각들은

별로 의미 없고 쓸모없이 왔다가 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화가 날 때 보면 화가 날만한 상황이 생기면 자동 반사적으로 욱 하고 올라오듯이

생각도 마찬가지로 온갖 상황이나 조건이 생기면

무조건적으로 기억 속 흔적들을 끄집어내 연관된 것들을 막 의식의 표면으로 쏘아 올린다.

꿈처럼이나 아무런 질서도 없이 언뜻 비슷한 기억들은 죄다 끄집어내고 보는 것이다.

 

이게 바로 생각의 속성이다.

이처럼 생각은 과거의 기억을 먹고 산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과거의 생각들이 솟구치는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충만한 자리를 놓치고 만다는 사실이다.

 

생각은 늘 그런 방법으로 우리 내면의 본연의 평화와 고요를 밀어내곤 한다.

한 번 그 늪에 빠져 버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지는 생각의 의미 없는 혼돈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현존(現存)에서 오는 충만한 삶의 에너지는 그 기운을 잃고 만다.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

너무 생각이나 판단에 의존하려 하지 말라.

과거의 기억들로 오늘을 판단하거나 과거의 색안경으로 지금 이 순간을 평가하지 말라.

무심(無心)의 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가보라.

생각이 놓여지는 순간 우리 마음은 짧은 평화를 경험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생각이 힘을 잃고 대신 그 자리에 무심과 관조(觀照)가 빛을 비출 때

우리의 의식은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바로 그 때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나, 기존의 관습을 넘어서는 번뜩이는 창의,

그리고 기억과 사고 너머의 깊은 존재의 심연 속에서 지혜의 가르침들이

직관적이고도 창조적인 영감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생각과 기억이라는 과거의 잔재,

또 계획과 바람과 욕망이라는 미래의 잔재가

모두 사라진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존의 순간에 깃드는 것이다.

그러니 공연한 생각으로 너무 근심 걱정할 것은 없다.

그것은 그저 생각과 기억이 만들어 내는 쓸데없는 것들일 뿐이다.

 

그래서 어니 젤린스키는 그의 책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것,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

22%는 사소한 고민,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

4%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 이라고 말했다.

결국 걱정은 제로라는 말.

본래부터 근심이나 걱정이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 공연히 근심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들을 바라보며 몸의 경직이 풀리고 있는데

곧바로 비행기는 이륙을 마쳤다.

착륙 절차도 아주 간단하고 그 시간도 매우 짧다.

쿠궁 하고 비행기가 땅으로 구른지 불과 2~3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비행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짐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바삐 내린다.

 

비행기를 나서는 순간, 루클라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진한 물감을 풀어낸 듯 강한 콘트라스트의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집들이

포근히 둘러싸인 산 아래 소박하게 누워 있다.

 

 

비행장 한 켠 언덕에는 두 명의 군인이

마을을 배경으로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20여 명의 함께 내린 동행자들이 모두들

여행자거나 가이드, 포터다 보니 앞으로 이들과 꾸준히 만날 것 같은 느낌.

 

 

일반적으로 개인 여행자들은 루클라에 도착해 포터나 가이드를 구하곤 하는데,

단체 여행자들은 여행사에서 구해 준 가이드와 포터를

카투만두에서부터 그들의 비행기값까지 지불하면서 함께 오기도 한다.

물론 비행기표는 여행자들의 반값 정도로 저렴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카투만두-루클라 노선의 왕복 비행기 가격이 24만원 정도이니

10만원은 넘는 지출을 감행하면서라도 2주 이상을 함께 먹고 자며 지내고 의지해야 할 가이드와 포터를

믿을만한 여행사를 통해 데려오곤 하는 것이다.

 

공항 주변에는 포터와 가이드를 알선해 주겠다는 현지 여행사 직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루클라 공항 밖에서는 포터와 가이드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주로 포터는 미화 하루 10달러, 가이드는 15달러 전후의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나는 다행히도 카투만두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사회복지재단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오랜 벗 라케스의 도움으로 중간 소개업자나 수수료를 떼어가는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하루 600루피에 좋은 포터를 소개 받은 터라

그를 만나러 루클라 시내의 쿰부롯지로 향한다.[목탁소리(www.moktaksori.org) 법상]

 

[루클라 공항 풍경]  

 

 [루클라 공항 활주로와 루클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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