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잠을 설쳤다.
생각지 못했던 추위 때문이다.
팍딩 마을 자체가 계곡 바로 곁에 위치한데다가
높은 산 아래 그늘진 곳이라 그런 것인지,
본래가 안나푸르나에 비해 이곳이 더 추워서 그런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2주쯤 전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000고지 이상에서도
그리 큰 추위를 느끼지 못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추위가 이번 산행의 가장 큰 관건으로 떠올랐다.
2,600고지 밖에 안 되는 이 낮은 곳의 추위가 이 정도면
앞으로 걸어 올라5,000고지 이상에서 며칠을 묵어야 하는 나로서는
달리 다른 고민 할 필요 없이
남체에서라도 겨울 침낭을 빌리는 것 외에는
뽀족한 다른 수가 없어 보인다.
8월말 한국에서 출발하면서 봄여름용 작은 침낭을 하나만 가져 온 데다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안나푸르나에 올랐을 때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기에
여기도 괜찮겠지 하고 카투만두에서 침낭을 안 빌려 왔더니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팍딩에서 남체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3~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언 몸, 언 손을 따뜻한 밀크티 한 잔과 가벼운 스프로 녹이고
이른 아침 길을 나선다.
어젯밤을 배회하던 바로 그 거리를 가로질러
팍딩 마을을 뒤로 하며 길을 걷는데,
길 좌우로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의 선연한 기상이 시선을 압도한다.
계곡 옆 길을 따라 걷는다.
밤새 밖에서 노숙을 했을 야크들도
짐을 잔뜩 등에 인 채 출발 준비에 한창이다.
어제와 같이 계곡을 따라 옹기종기 마을들이,
아니 롯지와 집들이 하나 둘씩 모여 있다.
출렁다리로 계곡을 두 번 건너고
몇몇 마을과 게스트 하우스를 지난다.
새벽빛에 반짝이는 꽃들과 인사를 나눈다.
아직은 낮은 고도라 발아래 작고 소박한 꽃들이 소담히 피어올랐다.
한참을 걷자니 돌을 깨 집을 짓는 풍경이 펼쳐진다.
한 쪽에선 힘줄 굵은 사내들이 모여 앉아 거친 돌들을 깨어 다듬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돌들을 모아 벽채를 세우고 있다.
그 모습이 햇살에 따스히 반사되어 아름답고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모든 일은 성스럽다.
위대한 일과 하찮은 일이란 인간의 잣대일 뿐,
그래서 오히려 위대하고 유명하던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다음생으로 가면
지옥의 동기동창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 나왔다.
위대함과 큰 일 속에서는
더욱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이 개입되기 쉽기 때문이다.
대단한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엄청난 크기의 욕심과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큰 업에는 큰 과보가 따르는 법.
천상세계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
이를테면 먹는 것, 입는 것 같은
어찌보면 작고 유치한 어린이나 할 법한 일들로 다툰다고 한다.
업이 무겁지 않다보니 큰 규모의,
이를테면 사업 확장을 위해 엄청난 돈을 대출받거나,
진급을 위해 타인을 음해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거나,
땅을 몇 만평씩 사서 리조트를 짓거나,
산을 깎아 골프장이며 스키장을 짓거나,
어디 어디에 투자가치가 좋은가를 살펴 투기를 하거나,
사업을 국제적으로 키워 가거나,
명성이 온 세계에 드러나거나 하는 등의
무거운 고민거리가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업이 가벼운 사람들은 고작해야
기본적인 의식주 같은 사소한 것이 크게 보인다.
그래서 선방의 스님들은 저 스님이 나에게 얼마를 크게 사기쳤다거나 하는
그런 걸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먹는 것 하나로 유치한 투덜거림을 일삼기도 한다.
아주 원초적이고 가벼운 것들이 작지만
그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옛날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는
꽃밭에서 꽃향기를 맡았다는 이유로 선신(善神)들의 꾸중을 들었다.
아난다가 발끈하여 저 많은 사람들은 꽃을 꺾고 꽃밭을 해집는데도 왜 가만히 놔두면서
나는 향기 맡은 것을 가지고 그리 크게 꾸중을 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업이 무거운 자들에게는 그 무거운 업에 비해
꽃을 꺾는 정도의 업은 죄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지만,
업이 가벼운 수행자에게는 그 어떤 탁한 악업의 구름이 없어 투명하고 맑기 때문에
작은 죄업도 크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큰 일 보다는 작은 일,
작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몫이 있는 법이니
자기 그릇에 주어진 몫을 그저 받아들이고
집착과 욕심 없이 행할 수 있다면
아무리 큰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흔적 없는 위대성이 깃든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직업’ 자체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행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업적이나 성취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이 아집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 성취의 과정에서 아무런 무리가 없고,
타인의 고통 위에 기초하지 않는
그런 자연스러운 일을 행할 것이다.
그런 일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법계(法界)의 흐름을 타고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 무위(無爲)의 바탕에 기초한다.
그래서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 일을 행하면서 억지와 개인적 욕심으로 무리하게 추진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주변 환경의 흐름을 타고,
주변 법계의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도움을 받으면서
힘들이지 않고 너무 과도하게 애쓰지 않고 진행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진리의 일이요 신이 나에게 부여해 준
이번 생에 내가 가야 할 나다운 삶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은연중에 나를 드러내고 과시하며
아상을 강화시키려는 삿된 목적에 동조하는 일이라면
당장에 그 일을 그만두거나,
그 일의 흐름을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이타적인 자비로써, 무아의 실천으로써, 또 깨어있음으로써 바꿔 나가야 한다.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짓고 고치고 보수하며 산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본래적인 일인가.
네팔의 시골마을을 다니다 보면 자신의 집 뒤안에
누구나 집을 짓고 고치는데 필요한 공구함이나 창고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또한 젊은이들이 직접 톱질하고 켜고 짜맞추면서
나무를 손질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지붕을 고쳐나가는 풍경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구상의 모든 숨을 가진 생명은
모두가 제 집을 제 힘으로 짓고 고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생명 고유의 본능적인 것이지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새삼스러운 본연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유일하게 인간의 세계에서만 자기가 살 집을 자기 손으로 짓지 못하며,
자기가 먹을 먹거리를 제 힘으로 구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족이 입고 살 옷을 제 힘으로 얻지 못한다.
의식주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오직 인간들만 타인의 손에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본래적인 차원에서 무언가 벗어나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돈이 다 해 주는데 무슨 상관이람!”
요즘 같은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세상에서
무슨 얼토당토 않은 논리를 펴는가 할 것이다.
바로 이 분업화와 전문화가 이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연스러운 삶의 기초를
붕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길을 걸으며 내 얼굴에 미소를 만드는 것은 꽃들과
진하다 못해 새까맣게 푸른 하늘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와 계곡 물들 뿐인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
새까만 얼굴에 발그라니 익어간 볼살,
줄줄 흘러내려 손등으로 훔친 자국이 역력한 콧물 자국,
오래 씻지 않았거나 빗지 않은 자유분방한 머릿결과 살결,
기워 입고 덧데입고 오래도록 어머니의 손길로 오히려 예스러워진,
아마도 몇 대를 물려받아 입었을 법한 오랜 누더기 웃옷하며,
이 성스러운 설산의 기운을 닮은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된 듯한 천연의 또 다른 자연을 만나는 것이다.
저 어린 아이의 투박하지만 살풋하고,
열퉁적지만 오달지고 선명한 눈빛을 보라.
부디 저 천진함이 먼저 슬어 간 어른들의 시그러진 정신과
세상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기를.
아이들이 뛰어노는 마을 한 켠 귀퉁이 낡은 책상 위에
나른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낯선 여행자의 카메라를 보고 깜짝 놀라는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코스모스는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옆 집 담장 곁을 하늘거리며 서 있다.
여행자들의 발길은 쉼 없이 흐른다.
어떤 여행자는 그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만이 이 여행의 목적인 양
끊임없이 양 발로 땅을 퍽퍽거리며 내치며 걸어가고,
또 어떤 여행자는 하늘도 바라보고 아이들의 눈빛도 바라보고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하며 발걸음을 즐기고 걷기도 한다.
이른 아침 팍딩에서 함께 출발했던 두 커플인 듯 보이는 한 무리의 여행자가
꼬질꼬질한 여자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하나 건네더니
아예 짐을 풀고 쉬면서 이내 그 집안까지 둘러보고는
아이와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삶 속에서, 또 이런 자칫 팍팍해지기 쉬운 순례길에서
잠시만 시선을 평범한 곳에 고정짓고 지켜보다 보면
이렇듯 일순간의 작은 웃음과 여유가
밋밋한 여행길에 맑은 샘 같은 청량함을 선사하곤 한다.
미소가 있고, 웃음이 있는 풍경은
바라보기만 해도 정겹고 살갑다.
그리고 또 발걸음은 계속된다.
우뚝 우뚝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이 진한 하늘색과 어우러져
마치 동화 같고 소설 같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푸르른 하늘색을 배경으로
이번에는 그림같은 높은 폭포수가 길 바로 옆으로
시원한 노랫소리를 연주하며 떨어진다.
이 이른 아침, 사뭇 찬 온도 속에서도 폭포 아래 작은 샘터 호수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의 물장난이 흥미롭다.
그리고 바로 그 인상적인 폭포를 지나자마자
건너편에 어둡게 드리워져 있던 검은 그림자의 앞 산이 툭 트이면서
그 뒤로 숨어 있던 하이얀 설산
탐세쿠(thamserku)가 거짓말처럼 순간 눈 앞에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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