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나절,

하늘은 화창하고,

푸르름은 너무도 높고,

몽실몽실 떠가는 구름은 아름답고,

바다색은 너무도 짙고,

고개 들어 산을 바라보면 희끗희끗 눈덮인 산맥이 성스럽고,

그 청명한 하늘 위로 자유로이 갈매기 떼들이 떼지어 날고 있습니다.

 

아, 이 곳에서의 삶은

하루 하루가 여행이며 만행이고,

모든 걸음 걸음이 히말라야이며,

매 순간 순간이 휴가이자 휴식입니다.

 

시선 가는 곳마다

영적이고

고요하며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아니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빈 공간이 꽉 차게 느껴집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내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구나!

매일 매일 흙냄새 맡으며 걷고

바닷바람과 포구를 거닐으며

저 고요한 산맥을 벗삼아 살고 있구나!

 

 

 

 

휴가나 여행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쉼, 설렘, 떠남, 평안 등의

일상적이지 않은 아주 특별한 상황을 의미하는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휴가나 여행은

어떤 몸이 떠나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잠시의 멈춤으로써

휴가와 여행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걷고

길 위의 모든 존재에 눈빛을 보내며

따뜻한 사랑을 보내며

묵연히 걷기만 할 때

이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솟아오른 눈덮인 설악의 산맥을 보고 있자면

그 순간 바쁘고 정신 없던 일들은 사라지고

나는 지금 어느덧

히말라야 깊은 산 위를 걷게 됩니다.

 

아무리 해야 할 일로 번거롭다 할지라도

잠시 호흡에 마음을 모으고

맑고 시린 공기를 깊숙이까지 품어안았다가

내보내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나는 어느덧

2,500년 전 붓다의 영산회상 한 켠에 앉아있는

그 성스러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있곤 합니다.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다가도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이 곳은 익숙한 일터이거나

생존경쟁의 장이 아닌

호젓한 여행자가 머무는

인도의 시골마을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가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휴식으로, 쉼으로,

여행으로, 휴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니 본래 우리의 삶이

그렇듯

고요하고 신선한

쉼이었고, 여행이었으며, 휴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전혀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돌려 길 가에 앙상하게 피어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책을 보다가도, 신문을 읽다가도

잠시 보고 읽는 것을 멈추고

호흡의 들고 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행여 TV에 정신이 팔려 있었더라도

잠깐 TV를 끄고

그저 텅빈 빈 벽을 주시하며

내면의 아주 작고 여린 움직임을 관찰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루 중에,

하루 일과 중에,

익숙하던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잠깐 잠깐

단 10초라도 좋습니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행하고 있던,

바로 그 모든 행위를

잠시 비우고, 멈추고,

아주 낯선 시선으로

전혀 텅 빈 시선으로

속 뜰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그 ‘멈춤’의 순간

위대한 신의 사랑과 축복이 깃들고,

붓다와 모든 성인의 깨어있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하게 됩니다.

 

 

애써 한 시간, 두 시간 이상을

억지로 시간을 내서,

바쁜 가운데 짬을 내서,

절이나 선방에 찾아 가서

가부좌 트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잠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참선을, 명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것을 참선이나 명상이라고

애써 이름짓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그저 텅 빈 순수 그 자체이고,

깨어남이며,

모든 선각자들의 방법이었으며,

붓다의 방식입니다.

 

잠깐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휴가가 되고,

잠깐 숲으로 난 길을 걸을 때

그 순간이 곧 여행이 되고,

잠깐 생각을 멈추고 호흡을 지켜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명상이 되며,

잠깐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깨어남이 되고,

잠깐 내 앞의, 옆의 동료며 가족들을

편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낯설고 새롭게 바라볼 때

그 때가 바로 사랑이 되고,

이렇게 잠깐 잠깐 일상에서 멈추고 바라볼 때

우리는 지금 이 자리가 완전한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명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수행은 근기가 높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너무 멀리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구도의 길을 간다는 것에 너무 거창한 환상을 덧칠하지 마십시오.

 

본래 수행, 명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피나게 노력하고 애쓴 끝에

소수의 사람만이 경쟁에서 승리해 쟁취해 내는

그런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그간의 편견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고서는

나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말 뿐입니다.

 

그 편견을 놓으십시오.

백일 기도, 천일 정진, 동안거, 선방, 철야정진...

이 모든 거대한 편견들이 수행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그 또한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어려운 길만이 가장 옳은 길이거나,

유일한 길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 순간 순간

일상에서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자주 자주 멈춤과 바라봄의 때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쉽습니다.

아주 쉽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여기’라는 곳이야말로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실은

나라는 존재야말로

완전하고도 충만하고 꽉 찬

더 이상 얻어야 할 또 다른 힘을 필요치 않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본래 있던

힘과 지혜와 사랑을

없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아주 작은 ‘멈춤’과 ‘봄’을 통해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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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정심행선분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보리를 얻으라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정심행선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앞서 6분 정신희유분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선법이란 악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선한 법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 즉 ‘지혜로운 마음 집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고 있다. 무상정등정각의 완전한 깨달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심행선은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발 붙일 틈이 없다. 높고 낮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선하고 악하다거나, 크고 작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나아가 어리석고 지혜롭다거나, 중생과 부처라거나, 생사와 열반이라는 개념조차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개념일 뿐 진실한 법의 바탕에서는 그 모든 차별이 대 평등의 용광로 속에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보라. 모든 것이 차별과 나뉨이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높고 낮은 구분을 두어 차별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더라도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부터 꼴지까지 등수로써 높낮이를 매겨 차별하고, 기업도 대학들도 무슨 무슨 평가의 틀에 따라 등수를 매겨 세계에서 몇 위의 기업인지, 대학인지를 가늠하곤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차별된 어리석은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모두가 직장에서 서열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고, 점수화되어 관리되고, 나아가 먹거리들 또한 어떤 틀에 맞춰 몇 등급인지가 정해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높고 낮은 틀을 정해두고 그 결정에 따라 사람들의 등수가 정해진다. 또 그 등수에 따라 사람들 서로간에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 높고 낮은 차별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투쟁하고 싸우고 심지어 국가간 인종간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 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곳 낮은 계층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만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 달려있고, 반대로 괴로움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열등에 놓여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이 차별이 모든 세상의 괴로움을 몰고 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법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그렇듯 높고 낮음을 차별하는 거기에 있지 않고 대평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만생명 대평등의 가르침 속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차별 뿐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사람과 자연간의 높고 낮은 차별의 마음이 지금 이 세상을 극단적인 환경 악화로 인한 멸망 위기까지 몰고 왔다. 신과 인간도 차별되어선 안 되고, 인간과 동식물도, 인간과 자연도 차별되어선 안 된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이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이요, 온전한 법이고 불이고 신으로써 대평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 평등의 가르침,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의 땅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 대 평등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 존재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기 때문에 너와의 차별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차별이 생겨남으로써 나아가 우리나라와 남의나라,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등의 모든 부가적인 차별들이 연이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차별의 원인은 바로 아상에 있다. 아상을 타파하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높고 낮은 차별도 생길 수 없다. 내가 있어야 나를 더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으며, 내가 높아졌을 때 오는 기쁨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인데, 나라는 아상이 소멸되고 나면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남이란 차별이 없다면,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둘이 아닌 한생명이란 자각이 있다면 나와 남 사이를 높고 낮게 나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높고 낮은 차별 없이 일체만유, 만생명이 대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구마라집의 한역의 의미로 보자면 착한 법을 닦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착한 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악한 법에 상대되고 차별되는 선한 법이기에 이 또한 높고 낮은 차별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법의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의 가르침’ 즉 ‘마음 집중’의 수행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이 일체의 마음 집중 수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이해해 보면, 이 법 즉 진리의 가르침은 높고 낮음도 없이 대 평등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높고 낮음 없는 대 평등의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에서 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체 상의 타파는 마음 집중의 수행을 통해 온다. 그러니 다시 돌려 말하면, 높고 낮음 없는 대평등의 진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집중의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왜 불교의 가르침이 무차별이요 무분별인지, 무아이며 무아상인지, 왜 대평등인지,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분이 바로 정심행선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부처님은 자비로운 우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났더니 ‘아! 그러면 마음 집중의 수행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집중’의 수행에 집착하고 있을 중생들을 위해 선법 즉 마음집중의 수행 또한 그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 거기에 집착할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마음집중의 수행,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이라는 수행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여 그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도 이름 뿐인 것이지 거기에도 빠지면 안 된다. 요즘 위빠사나니 관수행이니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 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의 수행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하여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고 있는 부분이다.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과 간화선을 공부하는 수행자 혹은 염불이나 진언, 독경이나 절 수행 등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때때로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한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자신의 수행법이 더 우수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다툼도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대평등의 법을 거스르는, 높고 낮은 차별심에서 나왔으며, 나아가 어떤 한 수행법에 집착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 금강경에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선법도 선법이 아니니 이름이 선법일 따름이다. 즉 마음집중이란 수행도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니 다만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처럼 분명하고 자비롭다.

높고 낮은 일체의 차별심을 거두어 대평등으로 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찌 수행법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에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법에 다름 아니다. 즉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염불도 참선도 진언도 독경도 절 수행도 그 모든 수행도 모두 그 중심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에 있다. 염불하는 수행자가 마음을 염불에 모아 주의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과 번뇌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찌 염불수행일 수 있겠으며, 절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지 않고 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절을 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 수행이 아니라 단순한 다리운동에 불과할 것이고, 염불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입 운동이고 소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간화선도 마찬가지다. 화두를 의심하며 그 의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분별하고 따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화두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든 수행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인 것이다.














달마스님의 파상론(破相論)을 보면
관심 수행에 대한 소중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다른 일체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수행방법은 다름 아닌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관하는 것이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며,
무심(無心)에 이르는 길이고, 집착을 놓는 일, 방하착의 길이며,
나아가 본성을 살피는 길인 것입니다.

제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나 삼계와 육도는 무한히 넓습니다.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도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삼계와 육도의 모든 업 또한
결국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곧장 삼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은
'마음을 비운' 자리, 무심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삼계 육도를 다 청정하게 가꾸려 애쓸 필요가 없으며,
수미산 보다 높은 업장을 다 녹이려 애쓰거나
그 무거운 업장을 탓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관함으로써
지극한 침묵, 무심을 이루게 되면
본래 아무 일도 있지 않았던 본래의 자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또 이야기 합니다.

"그대가 닦는 수행이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지켜보는 깨어있음의 수행은
그대로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깨어있지 못할 때 마음은 있지만,
온전히 깨어있는 순간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대로 무심(無心)입니다.

온전히 깨어있는 바로 그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잘 지켜봄으로써 깨어있을 수 있다면,
깨어있음으로 무심을 이룰 수 있다면,
모든 불국토가 그대로 청정해 질 것입니다.
깨어있는 순간이 그대로 부처요, 불국토라는 말이지요.

파상론의 본문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관심수행의 법문을 청해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단 말입니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육경이라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 다는 말입니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냅니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힙니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집니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입니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됩니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는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파상론의 말미로 갈수록
달마스님은 더욱 간절한 법문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부처는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어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부처를 만나는 것입니다.
천지가 요동을 치는 엄청난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만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주 쉽고도 은은하고 평화롭게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세상을 지켜보는 것이나, 거룩함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진정한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 마음을 쉬는 일입니다.
애쓰려는 마음,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마음을 모두 쉬고
묵묵히 지켜봄으로써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나옵니다.
또한 세상을 지켜보고 마음의 거룩한 본성을 지켜보는 수행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지금 바로 그대에게
깨달음은 한없는 평화로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진 : 인도의 홀리 축제, 델리 기차역 앞에서]

26.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게으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값진 보물처럼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한다.

27.
언제나 깨어있으라.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값진 보물을 지키듯 깨어있음의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방일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깨어있으며 명상의 힘을 키우는 자,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않는 자, 그런 수행자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깨어있음의 유무에서 온다. 지혜롭게 깨어있는 이는 매 순간 순간 세상을 향해 온 존재를 열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활짝 깨어 지켜본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잣대는 무의미하다. 과거의 판단과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현재를 걸러서 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의 눈은 언제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놀랍고도 신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난생 처음 만난 것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내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마주한다. 그에게 모든 대상은 ‘다만 그러할 뿐’,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치우친 견해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만 중도적인 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항상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 온갖 판단 분별을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재단하려 든다. 그에게 보여지는 모든 대상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양자 택일의 것일 뿐이다. 극단의 두 가지 판단 속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이고, 진부하고도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가 보는 시선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보더라도 과거의 비슷했던 기억과 분별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둔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고, 눅눅하며, 과거와 미래로 생각을 끄집고 다니느라 늘 힘이 없고, 빨리 지친다.

어느 날 사위성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 불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똥과 재를 바르고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해 대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인도의 홀리 축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홀리 축제는 약간 성격이 달라진 듯 한데, 각종의 물감과 진흙으로 범벅하여 온몸에 뒤집어 쓰거나 바르고,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홀리는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이나, 낮은 계급의 지위에서 항상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을 위한 날로, 평소 눈엣가시이던 상층 카스트나 남성들에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그 공격이란 것도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물감을 푼 물이나 물풍선 따위를 던지면서 장난을 치는 수준으로, 대부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간 계급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모처럼의 일탈을 즐기는 수준이다.

부처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지금의 홀리축제처럼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맞다면 아마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축제의 성격이 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부처님 당시의 그 축제는 주로 쌍스러운 욕설과 온갖 악담을 하는 등 그 부작용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이 축제 때인 일주일 동안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일지라도 어김없이 소똥과 재를 맞으며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던 듯 하다. 그러다보니 부처님과 승단에 늘 공양을 올리던 재가신도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일주일 동안은 음식을 준비해 사원으로 미리 보내고 절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 간의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한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 그동안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에 대해 말씀드리며 부처님을 공양에 초청하지 못했던 연유를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깨어있음이라는 관 수행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축제에서처럼 악담과 욕설의 업을 지으며 깨어있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설법하셨다.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며 언제나 깨어있으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방하착(放下着), 놓아버림

연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이거나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도 존재가 만들어내는 현실도 모두가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졌다, 머물고 변화하며 결국에는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존재는 생주이멸하며, 인간 또한 생노병사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붙잡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내게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는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 집착하고 나서는 인연이 다해 그것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언젠가 떠날 것이 분명하다면 붙잡아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붙잡는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어쩌면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아 집착함으로써 ‘내 소유’를 늘려 나가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붙잡을 것이 없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붙잡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괴롭다. 붙잡는 것은 결국 괴로움을 남길 뿐이다. 그렇지만 도저히 붙잡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온다. 허망하여 꿈같고, 신기루 같으며, 환영 같은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데서 모든 인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집착을 놓으라.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모든 소유와 집착의 대상을 해방시켜 주라. 행복은 집착을 놓아버리는데서 온다.

연기법이 끊임없이 설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집착할 것이 없다는 자각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을 내 것이라고 붙잡으면 남는 것은 괴로움 뿐이다. 연기적인 삶이란 방하착이요, 집착을 버리는 삶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니, 오면 오는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되,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인연 따라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인연 따라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라. 온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간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일 뿐이다.

오고 가는 모든 것을 허용하라. 내 존재 위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두되 어떻게 오고 어떻게 머물다가 어떻게 가는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지켜보았을 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지켜보았을 때 본래 머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 흘러갈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주라.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이 잠시 왔다가 몸을 쉬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자비로운 객사(客舍)가 되어 주라. 세상 모든 존재가 잠시 들러 쉬었다 떠날 수 있는 간이역이 되라. 내게 와서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말라. 종착역으로써 나에게 오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나에게 종착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것은 잠시 머물다가 떠날 뿐이다. 그것을 거역하지 말라. 잠시 왔다가 가야할 때가 되면 떠나게 내버려 두라. 수행자에게 방하착, 놓아버림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을 여의는 축복 같은 선물이다.




관, 깨어있는 관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연기법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셨는가. 이 세상이 상의상관적으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셨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 관조(觀照)에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치우침 없는 관찰에 있다. 이 세상의 이치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관행(觀行)이 필요하다. 뒤에서 팔정도와 사념처에서 별도의 설명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한 소개만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지만 설명만으로는 연기법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연기법이 그대로 내 삶의 방식이 되고, 내 삶이 고스란히 연기법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알음알이나 지식만을 가지고는 부족하다. 연기법에 관한 몇 백 권의 책을 낸다고 해도 읽는다고 해도 연기법을 깨닫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철저한 수행이 필수적이다. 불교적인 깨달음, 연기의 깨달음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 수행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라.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능력이 있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실천되어질 수 있는 고난이도의 고행이나 묘기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지식인들이라도 한 발조차 내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자일지라도 성큼 성큼 앞서갈 수도 있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한,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바로 관(觀)에 있다. 관 수행이야말로 나와 내 밖의 우주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식대로 왜곡해서 보고 편견과 선입견을 투영해서 본다. 똑똑한 지식인일수록 오히려 현실을 바라볼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지식과 견해라는 색안경으로 투영해서 보기 쉽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사람, 순수한 사람일수록 왜곡해서 볼 내 안의 견해와 판단이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자기만의 가치관이 뚜렷하거나, 세상 일을 판단해 낼 수 있는 가치판단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에 빠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편견과 선입견, 지식과 아집이야말로 이 공부에서 버려야 할 첫 번째 것들이다.

아무런 편견과 선입견도 없이, 순수하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난생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옳고 그르다거나, 선악이라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을 비워버리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한 번도 지켜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내 마음과 느낌, 감정들을 지켜보라. 세상에 처음 태어나 첫 호흡을 내쉬는 갓난아이처럼 천진한 비춤으로 호흡을 지켜보라. 나와 내 밖의 세상이 어떻게 마주치며, 접촉하고, 느끼고, 흘러가는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보는 것에 그 어떤 이름도 붙이지 말라. 관 수행이라거나, 위빠싸나라거나, 지관이니 정혜(定慧)니 하는 모든 이름을 지워버려라. 관 수행을 통해 연기법을 깨닫겠다는 생각도 놓아버리라.

내가 수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 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람, 수행이 잘 되고 있다는 혹은 잘 안 된다는 모든 착각을 버리라. 그리고 다만 분별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봄, 깨어있는 관찰, 알아차림, 지켜봄, 비추어 봄, 관, 주의집중, 마음모음, 그 어떤 용어에도 걸리지 말고 다만 바라볼 때, 연기가 드러난다. 온 존재가 연기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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