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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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홀로그램과 법계 그리고 수행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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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도솔,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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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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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 6. 28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삶은 고(苦)가 아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삶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아!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구나’라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들에게 삶은 힘들고 고된 괴로움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불교에서도 일체개고라고 하여 ‘삶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힘든 곳이구나’ ‘누구나 이렇게 힘든 삶을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겠지’ 하며 힘들고 괴롭게 살아가는데 아주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고 있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즐거운 일이 생기고, 아주 행복한 일이 생길 때 어떻게 생각 하느냐 하면 그것이 사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한테 어떻게 이런 좋은 일만 자주 생길 수 있지?’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계속 좋은 일만 있다가 뭔가 큰 괴로운 일이 오려고 이러는 거 아냐?’ 하면서 좋은 일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불안해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는 인생을, 삶이라는 것을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삶은 힘든 것이구나!’ 이렇게 많이 인식하며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이면에서, 본질에서 이야기한다면 삶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아주 신비로운 것이고 또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삶이라는 자체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본질이 뭐냐면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괴롭게 사는 게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걸림 없이 살면서 아주 평화롭게 이 삶을 아주 아름답고도 멋들어지게 살아 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본질적인 삶의 모습대로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보통 우리들의 삶은 아주 고되고,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앉아 가지고 이만큼 1미터 부웅~ 떠올라 앉아 있는 게, 그게 삶의 신비가 아닙니다. 그게 경이로운 일이 아니고, 그게 신통자재한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들의 존재자체, 삶 자체, 그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것 그 자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가 우리가 이렇게 괴롭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행복하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우리 본래 모습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것인가?' 말이죠. 원래 우리 삶의 바탕이 행복에 있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힘겹게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수도 있는데 현실은 괴롭게 살고 있단 말이죠.

또 여러분들이나 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단 말입니다. 왜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싶은데 깨달아지지 않는가, 그 이유가 뭐겠는가 말입니다. 그 이유를 바로 알고, 그 이유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으면 우리 삶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삶이 괴로운 이유가 뭐지?

 

그러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실은 이 세상이 전혀 행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니까, 돈 없는 이런 상황이 나를 가로 막고 있다’ 이렇게 내 바깥을 탓하거든요. ‘저 사람과 결혼을 하기만 했다면, 저 사람과 사귀기만 했어도 나의 행복이 완전할 수 있을 텐데. 저 사람이 나를 차버리는 바람에 내 행복은 무너져 버렸다’ 하면서 내 바깥에 탓을 돌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행복을 차버린 것은 나다, 딴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행복을 차버린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행복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내 안에서 행복이 들어오는 모든 통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내 주위에 방어막, 방어벽을 딱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참된 행복이라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내 주변에 아주 촘촘하게 방어벽을 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하는 작업이 바로 이 방어벽을 쌓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그 방어벽을 허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허물지 못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쌓고만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구하려 하지 말라, 찾으려 하지 말라, 다만 깨달음이 오는 것을 막지만 말라’ 바로 이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나라는 존재를 허용하기만 해라, 완전히 나를 열어둬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틀어 막고자 하는 그 마음만 버리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내가 깨달음을 찾고자 애쓰지 말고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열어 둬야 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깨달음을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너도나도 힘들고 고된 수행의 ‘일’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나의 일이 되고 하나의 문제가 된다 이 말입니다. 다만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허용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하고 딱 내 주변에 울타리로 방어막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친 방어벽은 무엇인가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는 방어막을 안치고 있는데 왜 방어막을 친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의문을 표시할 수 있지요. '도대체 뭐가 방어막이냐? 내가 치고 있는 방어막이 도대체 뭐기에 그 방어막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하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틀에 박힌 생각, 관념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여러분이 쳐놓은 방어벽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 한다면 우리 안에 어떤 막힌 탁한 에너지나 업장(業障), 업습(業習)이라든가 또는 관념이라던가, 바람이나 꿈이라던가,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진 모든 생각이 만들어낸 구조물들이 전부 다 방어벽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로서 내 주변에 벽을 치고 방어하고 있다는 말인데요, 세상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딱 벽을 쌓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 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나라고 생각하는 어떤 견해 또는 모양, 관점 이런 것으로써 나를, 내 주변을, 딱 벽으로 둘러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특성, 특징들 이런 것들이 전부다 하나의 방어벽으로서 작용을 합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삶을 행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허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삶이라는 신비가 완전히 경계 없이 방어벽 없이 모든 것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도록 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내 주위의 방어벽이 되고 있습니다.

 

배 고파도 밥도 못 먹는 사람

 

예를 들어서 쉬운 것부터 이야기를 해 본 다면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혼자서 밥을 못 먹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밖에 나가서도 혼자서 밥을 못 먹겠더라. 누구랑 같이 먹어야지, 어떻게 혼자서 밥을 먹어? 혼자 밥을 먹으면 왠지 모르게 남들이 친구도 없는 왕따로 보지 않을까', ‘외롭다고 느끼지 않을까’하는 등의 관념을 고수하느라고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밖에 나가서 혼자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이런 관념을 가지면 '내가 혼자 밥을 못 먹는다' 하는 그 생각, 그 견해가 하나의 방어막이 되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탁' 가로 막기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배가 고파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지요. 그저 가까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은 뭐냐면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자연스럽게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데 갑자기 한 생각 방어벽이 생겨납니다. 내 안에서 생각이 지껄입니다. '야! 어떻게 혼자 밥을 먹으려고 하냐? 주위에 봐라. 전부 다 가족이 왔거나, 친구와 왔거나, 연인이 함께 왔잖아? 너 혼자 밥 먹으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어? 처량하게 혼자 밥먹는 것을 쳐다보는 남들 시선을 생각해봐’ 그런 생각이 치켜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자연스럽게 밥을 먹지 못하게 되고, 굶든가, 아니면 밥을 먹고 싶어도 그냥 어디 슈퍼에 들어가 빵이나 하나 사먹고 때우던가 한단 말입니다. 이 얘기를 하니까 제 경험도 떠오르는데요, 저도 대학 초년 시절에 어느날은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은 겁니다. 삽겹살 집 앞을 지나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요.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삽겹살을 시커서 먹고 싶었지만 혼자서 고기 먹으러 간다는 것이 여간 찜찜한게 아니데요. 이런 경험들 아마 다들 조금씩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혼자 먹지 못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내 스스로 내 안에서 ‘혼자 먹으면 좀 그래’ 하고 딱 벽을 쳐 놓고, 관념을 만들어 놓으니까 그 때부터 스스로 만든 벽에 스스로 걸려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배고파도 밥 한 끼 자연스럽게 못 먹고 살아요. 그래서 중생인가요! 밥 먹고 사는 이 사소한 일상 하나에도 생각이 만들어 낸 구조물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그 단순한 삶이야말로 도(道)다,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했단 말이지요. 일상 생활을 단순하게, 자유롭게 그냥 하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고 자유로운 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자신이 만든 생각의 감옥, 울타리, 방어벽에 갇혀 별일 아는 것에도 오락가락 하는 차별심으로 사는 삶이 바로 우리들 중생의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죠. 어떤 사람은 '나는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고, 리더십도 없고, 뭔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라고 하면 두렵다' 이런 생각의 구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어벽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정작 나서야 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서질 못합니다. 살면서 내가 어떤 뭔가 발표를 해야 되는 일이 때때로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그걸 피해갈려고 애를 써요.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자체가 그 하나의 방어벽 때문에 스트레스가 됩니다. 때때로 무언가 발표를 해야 되고, 앞에 나서야 하고, 뭔가 만들어야 하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다는 한 생각에 딱 차있는 이상, 그때부터는 그것을 피해갈 생각만 하게 됩니다. 직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완전히 열려 있어서 모든 직장을 다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건 안 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저건 안 되니까 저런 직장은 제외하고, 나는 이런걸 못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건만 찾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선택의 폭은 너무나도 축소가 되고, 제한이 되고, 나의 삶은 너무나도 위축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향해서 모든 가능성에 완전 나를 열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고 있고 한정하고 있으니 사실은 인생이 그것 때문에 괴롭고 버겁고 풀리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 인생이 꼬였다거나 내 직장생활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보면 그것은 그 이면에 바로 내 생각이 만들어낸 그 구조물, 거기에 내 스스로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나는 앞에 나가 발표를 못해'라는 생각에 부딪혀서 삶이 풀리지 않는 것이기 쉽습니다. 사실은 내가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는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해, 발표할 때만 되면 덜덜덜 떨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발표를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주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죠. 내 생각, 견해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나의 경험들이 모여서 신념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내 생각으로서 딱 굳게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 말입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

 

예를 들어 ‘나는 영어를 못한다’하는 신념이 자리잡으면 영어가 두려워서 영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못합니다. 1년이나 2년 해외연수가 준비되어 있는데,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영어를 못한다, 나는 두렵다' 하는 것 때문에 내 앞에 딱 드러난 그 기회를 우리는 딱 마땅히 차단시켜 버립니다. 영어 공부가 필요하면 그냥 자연스럽게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질러 시작하면 되는데 마음 속에서 영어에 대한 방어벽을 칩니다. ‘나는 원래 영어를 잘 못한다’거나, ‘이 나이가 되어 뒤늦게 영어를 다시 시작한들 젊은 사람들 따라갈 수 있겠어’ ‘너무 늦었어’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지금 한다고 되겠어’ 이런 등등의 수많은 방어벽들이 순간 둘러쳐진단 말입니다. 숭산 큰스님 아시죠? 세계 살아있는 4대 생불이라 하는 숭산스님께서는 해외로 다니면서 하버드대를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영어로 법문을 하시고, 전세계인들에게 영어로 법문을 하시면서 감동을 주셨단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원래 숭산스님께서 어릴적부터 영어를 잘하는 분이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당신이 47세 때인가에 영어를 시작했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영어를 못한다'란 생각에 딱 부딪혀 있으면, 혹은 ‘나이가 많아서 영어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생각의 벽을 만들어 놓으면 그 때부터는 내가 내 인생에서 뭔가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많이 위축시키고 축소시키게 만들고 맙니다. 나의 능력을 한껏 축소시키게 만듭니다.

 

나를 둘러싼 다양한 방어벽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우유를 못 먹습니다. ‘나는 원래 우유를 못 먹어’ ‘우유를 먹으면 배탈이 나고 뭔가 문제가 생겨’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이런 사람은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나요. 그런데 이를테면 그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놓고 우유를 먹게 하면 맛있게 먹고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유를 못 먹는다는 것은 몸에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못 먹는다는 한 생각이 우유를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내 몸에서 우유를 거부하고 배탈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산에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에 아버지가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붙잡고서 아들을 데리고, 딸을 데리고 산에 왔다갔다 다녔단 말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큰 정기를 키워주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정말 가기 싫어 죽겠는데 아빠가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가지고 산이 싫어졌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산이 싫다고 했던 그 한 생각, 그 한 생각이 그때부터 산과 관련된, 산행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 나를 나의 마음을 비좁고 웅크리게 만드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직장에서 3박4일 지리산 종주를 간다더라, 그러면 마음에서 거부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딱 막아서는 마음이 일어나요. 방어벽을 딱 칩니다. '나는 산행은 못해'합니다. 아니면 집에 가서 생각합니다. ‘그때 무슨 핑계를 댈까? 무슨 핑계를 대서 이 산행을 내가 안 갈수 있을까? 하루도 아니고 3박4일 동안 그 험한 지리산을 어떻게 가느냐?’ 하면서 탁 방어벽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생각은 온갖 핑계 거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아주 말도 안 되는 일도 벌인단 말이예요. 나에게 오는 삶의 가능성을 딱 막아서는 겁니다. 이를테면 어릴 때는 산이 싫었지만 마음을 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가 보면 그전에는 전혀 눈뜨지 못했던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눈을 뜨게 될 수도 있어요. 왜 애초부터 과거에 얽매여 그 가능성을 해 보지도 않고 막아서는 겁니까. 모든 가능성에 대해 거부하지 말고, 막아서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통째로 받아들여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어벽을 깨고 자유로와지는 길이예요.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초등학생들은 그런다고 하데요. 학교에서 주사를 맞는 날이다 하면 그 주사를 맞기 싫어서 그날 하여간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겁니다. 학교에 뭔가 핑계를 대고 안 가거나, 갑자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거나, 또 어떤 어린아이는 주사바늘 앞에서 그냥 기절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 그런 것도 마찬가지죠. 이런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안절부절을 못 합니다. 마음에서 방어벽을 치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에 몰두합니다. 사실은 그 만남에서 사람들과 함께 친해지고 어울릴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변화의 때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방어벽을 침으로써 애초에 거부하고 마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요, ‘나는 집만 나가면, 집 나가서 어디서 잠을 자거나 하면 화장실을 못 간다’ 이런 사람도 있데요.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화장실에 가 큰일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를 들어 ‘여러분들 송광사 여름수련회나 해인사 여름수련회나 어떤 수련대회를 한번 참석해 보십시오’라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이런 추천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고 허용하며 ‘좋습니다. 한 번 가 보죠’ 하고 시원스레 답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 ‘수련회 한번 가 보십시요’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자기가 쳐놓은 방어막에 걸려 그것을 있는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생각으로서 방어막을 탁탁 쳐 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밖에만 나가면 화장실을 못가서 그 수련대회 3박4일, 4박5일 가는데 5일 동안 대변을 못 보면 어떡하나? 나는 그것 때문에 못 간다’ 이래요. 설마 그러시죠? 지금 웃으시는 분도 계시는데 실제 그런 사람이 있다니까요. 이를테면 어떤 보살님이 하도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하기에 출가하라고 했더니 우스개로 하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머리 깎으면 머리가 안 예뻐서 출가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또 ‘수련대회를 가라’ 이러면 한순간 마음속에 ‘나는 가부좌 틀고 참선을 오래 못해’, ‘다리가 아파서 나는 그것 때문에 못가’ 이렇게 방어벽을 딱 칩니다. 참선하는데 다리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밤새 철야정진하고 잠도 안 재우고 수행시킬지 모르는데 '아! 나는 잠은 절대 포기 못해. 잠은 푹 자야해' 이렇게 방어막을 딱 칩니다. 온갖 자기 나름대로의 방어벽을 다 치거든요.

제가 이 자리에서 만약에 정토회에서 하는 ‘깨달음의 장’ 수련대회 가 참 좋다더라, 거기에 한 4박5일 한번 갔다 오십시오 하고 이야기를 했단 말입니다. 여기 한 이삼백 명이 앉아 있어도 이중에 갈수 있는 사람은 한둘도 안 될 겁니다. 그만큼 방어벽이 견고해요. '거기 갔다 와서 엄청난 깨달음을 느끼고 왔다. 삶이 정말 확 바뀌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너무나 좋으니까 꼭 다녀오십시오.' 라고 온갖 찬사를 하며 추천을 했습니다. 그러면 갈 것 같죠? 대부분의 사람은 못 갑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방어막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그것을 탁 잡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잠을 여덟 시간은 자야 된다’는 울타리를 딱 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전날 여섯 시간을 잤다, 그러면 마음 한편에 두 시간, 두 시간, 두 시간, 출근을 해서도 나는 두 시간을 못 잤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뭔가 두 시간만큼 피곤이 몰려옵니다. 어디 구석 불편한 곳에서 새우잠이라도 한 두 시간을 자고나면 그때 되서야 이제야 잠에서 해방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중에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도 전혀 문제없다’ 그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 시간만 자도 돼, 어떤 사람은 나는 다섯 시간은 자야 돼, 나는 여섯 시간은 자야 돼, 하고 딱 잠에 대해 울타리를 치고 나면 내가 울타리를 친 그 관념 때문에 그것이 나의 실제가 돼 버립니다. 실제 삶에서 내가 정해 놓은 그 시간의 잠에 걸려 넘어진단 말이지요. 내가 만들어 놓은 관념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거사님은 잠에 대한 아주 독특한 그 신념을 가지고 계세요. 당신은 잠을 많이 자고 조금 자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한 시간이라도 자고만 일어나면 되는 겁니다. 이분은 당신이 한 시간을 자든 두 시간을 자든 그 다음날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또 실제로 그런 관념에서, 그 신념에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은 잠 때문에 뭐 힘든 것이 없데요. 그리고 또 아주 신기한 것은 뭐냐면 이분은 자다가 중간에 한 번 깨고 나서 또 자면 우리는 괜히 좀 찝찝하잖아요. 푹 못 잔 것 같고, 잠을 설친 것 같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거사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면 잠에서 깼다가 다시자면 ‘아~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잠을 한 번 자면 되는데 하룻 밤 사이에 두 번이나 잤으니 더 좋다는 겁니다. 저는 농담이겠지 생각 했는데 실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중간에 뒤척이다 다시 잠들더라도 별로 괴로울 일이 없는 겁니다.

자식들에 대해서는 ‘공부 좀 해라. 성적 좀 올려라. 좋은 대학을 가야돼’ 한단 말이지요.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자식은 항상 뭐를 하고 있어야지 마음이 놓여요? 공부를 하고 있어야 되지요.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는 항상 공부하고 있어야지 아주 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아주 뭔가 제대로 가는 상황 이예요. 그런데 볼 때마다 공부만하고 있는 상황은 어찌 보면 불행한 상황이지요. 그 활자에 거기에 놓쳐서 친구와의 아름다운 사귐, 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는, 이 햇볕 속에서 뛰어 놀고 자랄 수 있는, 그런 천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볼 때 자식은 늘 공부하고 있어야 되요. 그러니까 아이가 한참 공부하다가 부모님이 딱 들어갔을 때 마침 컴퓨터를 켰는데 닦달을 한단말이죠. '너는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하고 있냐?', ‘또 컴퓨터야?’ ‘공부는 안하고 맨날 그것만 하고 있다' 그런단 말이죠. '자식은 공부를, 공부만 해야 되는 사람이다' 이건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방어벽입니다. 그런 방어벽이 있게 되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식이 공부를 안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확 올라옵니다. '저놈은 또 공부는 안하고 저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이렇게 올라온단 말이예요. 그 방어벽을 탁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으면 아이가 놀더라도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흥미롭고 행복하며 함께 재미있습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항상 '오늘 뭐 공부 잘했니? 오늘 공부 많이 했니? 시험 잘 봤어? 성적이 얼마 나왔어?' 이런 걸 주로 물어보지, '너는 어떤 친구가 있니? 아! 그 친구는 어떤 것을 좋아하니? 뭐하는 걸 좋아하고, 취미는 뭐고, 함께 하면 무슨 놀이를 하고 지내니?' 이런 것들을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늘 뭐하고 놀았니? 뭐해서 재미있었니? 오늘 하루도 즐거웠어?' 이걸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대상으로 공부해야 된다는 방어벽을 탁 놓아 버리게 되었을 때에 그 아이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공부를 안 하더라도 미운 대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왜 있는 그대로의 자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안의 온갖 생각들, 잣대들에 끼워맞추면서 편견어린 시선으로 자식을 바라봅니까. 그럼으로써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감옥으로 인해 아파하고, 상처받고, 자유롭지 못해야 하는 겁니까. 부모 눈치보는 자식으로 키우면 안 되요. 자유롭고도 당당하게 자기 삶을 휘적휘적 창조적이고도 자율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자주적인 아이로 키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의 틀에 갇힌 생각 속에 아이를 끼워넣는 작업을 중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내 스스로 만든 구조물에 갇혀 가지고 그렇게 내 스스로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단 말이죠. 성공해야 한다, 항상 1등해야 된다, 이런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봅니다. '나는 여자다' 하는 것도 하나의 상이고 방어벽입니다. 여자다 혹은 남자다, 이것도 내가 만들어 낸 방어벽입니다. ‘여자다’라는 방어벽 때문에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남자로만 태어났어도 혼자 배낭여행을 한 번 꼭 가보고 싶다, 그런데 여자다 보니 위험해서 홀로 여행을 못 떠난다. 자유롭게 홀로 떠날 수 있는 남자들이 참 부럽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이 말이 진실일까요? 사실은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가 더 많을까요? 혼자 배낭여행 다니는 남자가 더 많을까요? 제가 외국에 다녀보니까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생각에서는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은 남자들이나 한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그런 여자분들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여자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방어벽을 쳐 놓고 그 방어벽에 갇혀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남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울타리를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걸려 넘어져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나이가 오십 살이다, 나이가 스무 살이다, 하는 그 나이에도 걸립니다. 내 나이가 오십 살이다 그러면 ‘내가 이 옷을 입으면 남들이 괜히 주책이라고 하지 않을까? 늙어서 나이값도 못 한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이를테면 입고 싶어도 못 입는 옷도 있고요, 꾸미고 싶어도 못 꾸미는 경우도 있고,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고작 나이 하나에 걸려서 말이지요.

아이들 다 독립시켜 놓고 내가 뭔가를 새롭게 공부라도 하고 싶은데 ‘이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게 말이 되겠어?’ 하고 내 나이 오십이라는 것에 큰 방어벽을 쌓고 있기 때문에 그때 저지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나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나이는 없습니다. 항상 제로예요. 어떤 틀이 박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내 스스로 방어벽을 쌓고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대학 못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고, 전문대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어서 사람들이 대학교 이야기만 하면 꽁무니를 줄줄 빼고 자리를 뜨기도 합니다. 대학이라는 학벌이 내 인생의 하나의 커다란 방어물이 되는 겁니다. 군대 안 갔다 온 사람들이나 방위 갔다 온 사람들은 은근히 그것이 그렇게 큰 스트레스랍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야 별일 아니다 싶겠지만,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남자가 위축이 된다 합니다. 그거 그럴 필요가 없지요.

사회적인 지위가 높으신 분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스스로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엄청난 방어벽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곤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다보니 이렇게 행동해야 된다, 근엄하게 행동해야 한다, 천박하게 보이면 안 된다, 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하는 방어벽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스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승복을 입고 어디 밖에 나가면 이게 족쇄가 돼버리고 감옥이 돼버려요. 그럼 하고 싶은 것도 못합니다.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못 먹고, 바쁜 일이 있어서 조금 뛰어가야 하는 일이 있어도 자유롭게 뛰지 못합니다. 여기저기 감옥에 걸린단 말이지요. 사실은 계율이라는 것도 본질에 있어서는 걸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무애도인, 걸림 없는 옛 도인들의 삶은 언뜻 중생들의 판단, 분별, 생각으로 보면 막행막식이다 싶을 정도로 일상적인 삶에 걸림이 없이 살기도 했단 말입니다. 당신은 안에 어떤 스스로를 가두는 틀이 없고, 방어벽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롭죠. 남들이 보기에는 계율도 안 지키는 것 같고, 말도 막 하는 것 같고, 도인 같지 않아 보이지만 그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군에서 보내주는 자기계발 프로그램 같은 것에 갈 수 있게 되어 동사섭이라는 용타스님이 운영하시는 수련장에를 갔었는데요. 거기에서 일종의 행동명상을 하는데 남녀노소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전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방에서 한 1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스님께서 자기라는 상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스님의 말만 따르라고 하는 겁니다. 남자라는 상, 나이라는 상, 지위가 높고 낮다는 상, 그 모든 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만이라도 완전히 자유인이 되어 보자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방어벽을 모두 벗어보자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은거지요. 스님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고 스님이 말씀하시는 그것이 돼야 합니다. '나'라는 상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그것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안 되면 그것은 '나'라는 상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입니다. 예를 들어 스님이 지금부터 우리 모두 '개다! 강아지다!' 그러면 갑자기 지금부터 개가 되어야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강아지처럼 ‘멍멍!!’ 짖어대면서 깨물고 날뛰며 나를 버리고 개가 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근엄하신 분들일수록, 아상이 많은 사람일수록, 방어벽이 높은 사람일수록 눈치 살살 봐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멍멍' 한번 하고 말지 적극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개가 되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딱 놓아버린 사람들은 그냥 사십, 오십, 육십이 되더라도 마구 짖고 뛰어다니면서 잘도 논단 말입니다. 진짜 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거 신기하게도 한 60이 넘어 보이시는 근엄하게 생기신 분께서 그냥 '개'하라 하면 그냥 막 개가 되고, 고양이가 되라하면 고양이가 되고, 애기 하라하면 갑자기 애기가 되어 가지고 응애응애 울고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놓은 그 벽! 그것이 크면 클수록 그게 잘 안되지요. 자유롭게 그것을 못합니다. 그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틀들은 바로 내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매순간 순간 이 세상을 향해서 수많은 방어벽을 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들과 풍성한 새로운 경험들, 그리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깨달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찾아나서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본질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제 스스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니 찾아 온다기 보다는 언제나 깨달음 아닌 순간이 없고, 참된 자성이 아닌 적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행복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행복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불행하기 때문에 언젠가 있을 행복을 찾아 나서겠다, 달려가겠다, 그게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때로 어떤 선지식이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을 보면 끊임없는 정진과 피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뭔가 치열하게 수행을 해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 가지고 결국에 깨달았다 하는 이런 게 정답인줄 알았는데 그런 방식으로 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수행이라는 것에 ‘수’자도 모르고,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도 그 사람에게 깨달음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불교나 깨달음은 불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해탈과 열반이 불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르침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지 사실은 불교라는 그 비좁은 이름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이라는 것은 사실은 나를 완전히 여는 작업입니다. 가두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활짝 열어두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깨달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참된 진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은 매 순간순간 나에게로 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방어벽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반사되어 나가버립니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활짝 열고 보면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언제 어느때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함께 하고 있었다기 보다 나를 포함은 모든 것은 그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다만 내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눈도 어때요? 무엇을 찾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분명히 그 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못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있었지만 못 찾아요. 그것이 그 방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것이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법당에 아~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 있습니다. 꽃다지가 있고, 개망초가 있고, 별꽃, 패랭이, 연꽃, 참나리 뭐 다양한 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다양한 꽃들이 눈에 보이거든요. 절에 오면 ‘아 이 절 관음사는 꽃들이 많아서 좋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꽃을 향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꽃이 눈에 보이질 않죠. 꽃은 전혀 나에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꽃은 항상 지천에 열려 있지만 그 꽃이 나에게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 꽃들은 꽃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꽃에 관심이 없다가 어느 날 꽃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염과 동시에 아름다운 꽃들이 신비롭게 막 들어오기 시작해요.

제가 예전에 어떤 절에 있을 때 그때 갑자기 그냥 불현듯 막 꽃이나 나무나 숲, 자연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신비롭게 느껴지면서 그저 꽃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던 그런 때였는데요. 그때부터 꽃에 대해서 아주 유심히 관찰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 오면서 이렇게 외진 곳에, 이렇게 척박한 곳에 절만 하나 뚝 떨어져 있으니까 너무 삭막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저도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느꼈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꽃과 야생초나 이런 것들을 좀 보다보니까 너무 신비로운 곳인 겁니다. 사실 그곳이 군사보호구역이다 보니 오래도록 사람들의 발길도 별로 없었던 곳이고 숲이 우리 생각하는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아니였다보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더없이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삭막하고, 그렇게 느끼겠지만 야생의 숲이 주는 자연스러운 풍요를 가만 가만히 느끼고 지켜보다 보니 그것은 그 어떤 식물원에서도 감상할 수 없는 엄청난 생명의 보고이자 신비의 보고였더란 말입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꽃들, 생각지 못했던 약초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산야초들, 책에서만 보았을 법한 그런 온갖 종류의 희귀한 식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 작고 소박한 절이 얼마나 풍요로운 곳이고, 이름다운 곳이고,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운 꽃들로 넘쳐나는 곳인지를 알게 되면서 그 절의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될 수 있었지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리 안 된 쓸모 없는 땅이거나, 가치 없는 숲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혹은 몇몇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만 그 가치는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로 절에 나오게 된 보살님 한 분이 야생화를 많이 공부하고 관심 가지던 분이 계셨는데요, 그 분과 저만 이심전심 염화미소를 보내며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었지, 다른 분들은 여전히 깜깜하더란 말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라

 

우리가 마음속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 놓지 못하면 이 세상에 있는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질 않습니다. 여러분들! 이것을 분명하게 좀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깨달음은 나에게 오고 있다, 지금 이순간도 모든 진리, 모든 자유로움, 모든 행복은 항상 오고 있습니다. 언제 왔냐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오고 있다. 아니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서는 내 마음의 방어벽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보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중에 나에게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선택해서 받아들이는데 익숙합니다. 우리 마음은 자동적으로 좋고 나쁜 것,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거부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에게 이익 되는 사람, 도움 되는 사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면서 사귐을 유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오면 이렇게 밀쳐내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이 오더라도 내 몫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일은 내가 잘하니까 받아들이려하고, 이러이러한 일은 딱 거부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거부하려고 애썼던 그 일속에 나를 일깨워줄 수 있는 엄청난 신비로운, 비밀스러운, 이치가 담겨 있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바로 그 생소한 일을 통해 우주는 나에게 아름다운 삶의 이치나 또 다른 새로운 진리에의 가능성을 보내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례히 그렇듯, 하던대로 거부하는데 익숙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에 불편함과 벽을 가진 채 받아들이니까 그것이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새로운 변화나 어떤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자주 인사이동을 해야 하는 분들 같은 경우에 ‘이런 곳은 가고 싶고, 저런 곳은 안 갔으면 좋겠다’ 하고 방어벽을 쳐 놓습니다.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집착을 한단 말이지요.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지든,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 바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가능성을 향해 나를 활짝 열어놓치 못한다는 거예요. 어디를 가도 좋고 무슨 일이 있어도 좋다, 시골을 가도 좋고 도시에 가도 좋다, 서울을 가도 좋고, 전라도를 가도 좋고 어디를 가도 좋다, 어디를 가든 바로 그곳이 이 우주법계가 지혜와 자비로움으로써 나를 돕기 위해 나를 보내주는 곳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생각 자체가 좁아지고, 내 삶의 엄청난 가능성이 한껏 축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그곳이 바로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곳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삶을 대상으로 마음속에서 딱 벽을 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 가고 싶다 하고 벽을 치니까 어때요?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곳에 갔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저 친구는 나보다 뭐가 잘나서 저 좋은 곳에 보내주고, 나는 여길 보내 줬느냐?’ 하고 그냥 시비거리가 생겨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다 말이죠. 나를 완전히 열어 놓는다면 어디가도 좋다, 어떤 일이 나에게 멀어져도 좋고, 어떤 인연을 만나도 좋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좋다, 설령 어떤 직장을 갔는데 작장 상사가 너무 나쁜 사람이고 너무 사람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런 일이 왔느냐? 나에게 어떤 영적인 각성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나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혹은 나에게 업장소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자비로움으로써 계획해 낸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를 대장부라는 말로 많이 표현하곤 하는데요, 이 정도 너른 마음, 활짝 열려서 꽉 막혀 있지 않은 마음, 무엇이든 오너라 하고 당당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이 정도가 되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방어막을 침으로써 허용할 것과 허용하지 못할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이것을 딱 분명하게 나눠 놓습니다. 내가 받아들일 것,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둘로 나눠 놓고 그중에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깨어남이 자꾸 더뎌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업장소멸의 가능성이 자꾸 뒤로 미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완전한 깨달음, 열려있음, 행복, 자유로움 이런 것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이 말입니다.

다른 게 감옥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게 감옥이 아니라 이렇게 내가 방어막을 치고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가 친 방어막에 내 스스로 갇혀 있는 것! 그게 바로 존재의 감옥이고, 의식의 감옥입니다.

 

삶은 언제나 나를 돕고 있다

 

그래서 다음의 이 명제를 분명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삶은 항상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모든 사건은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여러분을 완전한 각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끌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신의 시험은 사실 그것 자체로써 나를 위한 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나를 참으로 믿는지 시험해 보자 하고 신께서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지 선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나에게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빛이 못 들어오게 방어벽을 쳐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 막은 것은 세상의 많은 어두운 요소들, 문제들, 경제적인 궁핍 내지는 내 능력의 부재, 이런 것이 어두움처럼 느껴져서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한없이 들어 올 수 있는데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딱 치고 있음으로써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놓고 나서 스스로 어둡다고 ‘삶은 왜 이리 어두우냐? 삶은 왜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 것이냐?’ 라고 삶과 다투고 투쟁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를 찾도록 완전히 나를 진리에 내맡기고 포용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냐? 일상이 바로 진리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소한 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로운 것이고, 가장 경이로운 겁니다. 가장 사소한 것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보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나를 완전히 활짝 열어둘 수 있어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은 정확히 여러분이 받아야 될 바로 그 사람인 겁니다. 이 모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건, 사고, 일, 경계, 사람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의 세계, 법계로 부터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그것도 우리를 이끌어 주고, 일깨워 주고, 우리를 깨닫게 해줄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한 어떤 진리의 소식이요 부처님의 큰 자비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가 삶 속에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바로 진리의 나툼이다 이 말입니다. 그 모든 사소한 일상의 경험이야말로 나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진리의 계획입니다. 하루 하루 매 순간순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기적이고 신비이며 진리의 소식입니다. 우리를 깨어남으로 이끄는 최적의 공부인 것입니다. 일상의 삶이야말로 깨어남을 향한 장대한 여행인 것입니다.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안에 오래도록 깊이깊이 저장되어 있던 어떤 업장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모처럼의 풀려날 최적의 기회를 맞아 가지고 나에게 찾아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이든 사고든,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평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부터 어떤 특정한 깨우침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를 평화와 자유로움으로 이끌어 주는 상황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신비를 맞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삶이라는 평범함 뒤에 감춰진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가짐은 어떠냐 말이지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전혀 소중하게 여기거나, 새롭게, 신비롭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그저 그렇게 반복되는 진부한 일상일 뿐이란 말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에, 삶 그 자체에 완전히 나를 열어두지 못합니다. 그 모든 삶을 분별하고 해석하고 차별하고 선택함으로써 통째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특정 대상에만 나를 열어 보입니다. 사람을 만나도 선택적으로 만나고, 어떤 일을 만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만나고 그런단 말입니다. 삶이라는 진리가 나에게 주는 선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면, 삶 그 너머의 깊이에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취사선택하거나 나누지 않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휘익 대충 한 번 훑어 보고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야’ 하고는 툭 처박아 놓습니다.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깨달음이 담겨있는 책인지도 모른 채 그냥 책장에 꽂혀서는 몇 년이고 처박혀 있기만 합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방어막을 쳐놓은 그 사람에게는 그 책이 들어올 수 없어요. 그 가르침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존재가 깨어나게 되면 내가 어느 정도 열려 있게 되면 그 진리나, 그 가르침이나, 어떤 삶의 부분에 대해서 열려 있게 되면 그때부터 그것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집안에 푹 처박아 놓았던 그 책이 이렇게 보배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잘 따라오고 있나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계신 건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이중에 많은 분들에게는 아마도 별 의미 없이 다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내가 딱 닫아걸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들어 올 수가 없거든요. 부처님 제자들도 부처님께서 그 오랫동안 법을 설하고 했지만 스스로 닫아 건 사람은 결코 가르침을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을 오래도록 곁에서 시봉했던 아난존자나 처음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 마부로 따라왔다가 훗날 출가하여 비구가 된 찬나장로도 부처님이 계시는 동안에 그 많은 가르침과 훈계와 지도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부처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닫아거는 사람에게는 그 부처도 아무런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나를 완전히 열어둔 사람에게는 만나는 모든 사건, 모든 일들, 모든 사람, 모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바로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깨우침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할 필요가 없단 말이예요.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흘러와서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자꾸 가둬두거나 못 들어오게 틀어막을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완전히 나를 허용하는 겁니다. 그럼 그 일이 진리의 일이 되고 부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순간순간 우리에게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방어벽을 없애주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찾아옵니다. 만약에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하나의 방어벽에 대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방어벽을 허무는 방법

 

보통 사람들은 방어벽에 걸리지 않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런데 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잖습니까? 방어벽에 걸리는 것, 사상적으로도 그렇고 뭐든 내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뭔가 나한테 와서 부딪치고,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내 마음에 화를 남기거나, 내 마음에 짜증을 남기거나, 이거는 내가 좀 거부하고 싶거나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것,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내 방어벽을 깨주기 위한 목적으로, 내 방어벽을 깨 줌으로써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고, 나에게 진리가 파도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나에게 오는 것, 나에게 오는 모든 일들을 대상으로 나를 완전히 열어두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파도쳐 들어오고 그랬을 때 내 안에 내가 꽉 울타리 쳐놨던 방어벽들이 하나둘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경지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방어벽도 없으니까 모든 것이 자유롭게 오고 간단 말입니다.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어요. 이 자리가 바로 무애도인의 자리라고 했어요. 그랬을 때 비로소 아까 말했던 다양한 예를 들었던 방어벽들, 그런 어떤 크고 작은 관념, 관념의 틀, 방어벽 그것에서 내가 놓여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어떤 틀에 잡힌 관념에 빠져가지고 거기에서 괴로워하는 일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방어벽 너머에 자유로움이 있다, 내가 쳐 놓은 그 방어벽 너머에 깨달음이 있고 빛이 있다 하는 겁니다. 어디 가서 깨달음을 찾으려고, 진리를 찾으려고, 행복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다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진리가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에게 파도쳐 들어올 수 있도록 다만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고 깨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절에서 수행하는 것만 영적이고, 수행자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나에게 욕하는 사람, 나에게 욕하는 상황이 바로 아주 영적인 대상인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이 녀석이 나한테 욕했다고 시비를 붙이고 싸움을 걸 때 그것이 세속적인 분쟁이 되는 것이고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에게 욕을 했을 때 그 마음을 관찰하면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들여다보고, 그 욕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는 겁니다. 왜 이 우주에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욕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누구도 나에게 욕 할 수 있어요.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은 당연히 있는 거예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걸 허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닫아 걸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걸 허용하고 났을 때 비로소 그 욕이 나에게 와서 흔적을 남기고, 화를 남기고, 두려움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욕 얻어먹기 싫어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두려움에 못 하게 되는 일이 없어집니다.

제가 전에 그 말씀을 드렸나 모르겠는데요. 종교가 화합을 해야 된다,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이런 취지의 내용을 인터넷에 블로그 기사로 올려서 포탈 싸이트에 메인으로 채택이 한나절 됐는데 그 사이에 몇 만 명이 그 글을 봤어요. 그 한나절 동안 댓글이 천육백 개가 달렸는데 그냥 언뜻 읽어보면 정말 불교도 옳고, 기독교나 천주교도 옳을 수도 있고, 모든 종교, 모든 사상이 다 옳을 수 있다,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함께 화합을 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켜 나가야 된다, 뭐 그런 내용이거든요. 언뜻 보더라도 특별히 시비 걸 내용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천육백 개 댓글 가운데 한 반수 가까이가 아주 상스러운 욕입니다. '그래. 너 잘났다. 이 중놈아!' 거기 첫 번째 댓글, 그것이 아주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건 하도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첫 번째 댓글만 딱 기억이 납니다. 딱 네글자였어요. ‘까고있네’ 하 이거 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웃음) 그래가지고 그 안에서 수십 수백개의 댓글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종교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종교전쟁 하지 말자고 쓴 글 밑에서 버젖이 종교전쟁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제가 그 다음부터 ‘야! 이렇게 욕을 얻어먹을 바엔 차라리 글을 쓰지 말자’ 해야 되느냐 그게 아니다 이겁니다.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는 거지요. 인생에서는 나를 욕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부처님도 외도들에게 수도 없이 욕도 얻어 먹고, 억울한 누명도 쓰고, 심지어 죽이려 한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교화활동을 중지해야 옳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을 허용해야 되는 거예요. 나한테 괴로운 일도 있는 겁니다. 그것을 왜 부정합니까? 다 허용할 필요가 있어요.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좋은 일에 대해서도, 나쁜 일에 대해서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게 됐을 때 내 인생은 엄청난 깨어남이 시작되고, 내 인생에 큰 자유로움이 시작됩니다.

단, 나를 완전히 오픈했을 때, 모든 것을 받아 들였을 때, 어떤 일종의 자아상실감이라든가 일종의 내가 무너지는 것 같은, 내가 좌절되는 것 같은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보호막을 치는 것, 방어막을 치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알고 살아오면서 엄청난 방어막을 쳤고, 그 방어막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방어막이 바로 난데 내가 바로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우리는 일순간 괴로워 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 괴로움을 허용하라는 말입니다. 그 자아상실감은 바로 아상이 깨지는데서 오는, 바로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아상이 타파되는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 쯤이야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수행자가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어벽이 좀 깨짐으로서 내 존재가 조금 상실감이 오더라도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이예요.

 

받아들임이 곧 깨어있음이다

 

그것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를 완전히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행복, 깨달음, 진리, 자유로움, 우리 삶의 걸림 없는 삶 이런 것들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열어두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하는 일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나를 열어두고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분별 없이 매 순간순간을 관하며 사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활짝 열고 삶을 허용할 때 직장에서 진급할까? 안할까? 뭐 돈을 벌 수 있을까? 없을까? 이번 사업이 잘될까? 못될까? 남편하고 싸웠는데 맘 풀어졌을까? 안 풀어 졌을까? 자식이 공부를 잘할까? 못할까? 내가 미래에 잘 살 수 있을까? 없을까? 1년 뒤에 있을 수능시험 결과가 좋을까? 안 좋을까? 그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생각이 만들어 냈고,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일 뿐이에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고요. 허상이란 말입니다. 허상. 수많은 대학교에 가면 연구논문들 있잖아요? 그 연구논문이 그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 또한 상당수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 아니겠어요. 제가 그것 자체를 그냥 묵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순간 그 모든 것도 다 공허한 것이란 말입니다.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지금, 듣고 있는 이것만이 실재입니다. 이 죽비를 듣고 있는 이 순간 ‘탁 탁 탁!’ 이것입니다. 지금 이 죽비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이 소리가 들리죠? 귓 전을 생생하게 울린단 말입니다. 이것!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이 자리에 깨어있을 수 있는 것, 이 자리로 가져다주는 것! 그것만이 실재입니다. 내가 온전히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 모든 걸 포용하게 되고, 내가 완전히 관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그 방어벽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시고 하여간 내 인생에서 뭔가 껄끄러운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의 경계가 나타난다면 ‘아 이게 바로 나를 붙잡는 방어벽이구나. 이게 바로 나의 행복과 자유로움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방어벽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포용하시길 바랍니다. 나한테 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허용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진리는 나에게 엄청난 파동으로서 파도쳐 들어올 것입니다. 그 파도쳐 들어오는 것을 내가 막지만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어때요? 여전히 어렵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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