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보살님께서
불법이 담겨 있는 책들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자주 읽어본다고 하시는데
때때로 신기한 것을 경험한다고 하신다.

때때로 자식 문제로 고민이 있다거나,
남편과의 다툼이 있었다거나,
혹은 사회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고민들로
답답해 하면서 답을 찾다가
우연히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볼 때,
종종 마침 바로 거기에 그렇게 궁금해 하던 답변이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 설법한 것처럼 생생하게 말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때때로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답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모처럼 켠 TV에서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하기도 하고,
우연히 펼친 신문에서
평소 같으면 그저 지나쳤을 작은 기사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가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공부하자마자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되기도 한다.

아주 쉽게는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드는 순간,
바로 그에게 전화가 오는 것 또한 이런 작은 예일 수 있다.

이것을 칼 융은 동시성(同時性)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 융이 한 여인을 치료하는데,
그 여인이 하루는 풍뎅이 꿈을 꾼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칼 융은 그것이 고대 이집트에서 환생을 상징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환자의 무의식이 심리적 재탄생을 겪을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을 때
창문 밖에 풍뎅이가 날아온 것이다.
물론 융은 그 때가 그곳에서 풍뎅이를 본 유일한 때였다.

이러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동시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질서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피트는 이러한 융의 동시성이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본다.
겉에 드러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있으며,
그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봄의 견해에 따르면 만물이 비롯되는 근원인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차원’에서 다루어진 일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우리 눈에 우연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더 깊은 차원의 법계에서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 자리에 온 것이다.
우리의 깊은 차원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정확한 인연으로 바로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 감추어진 질서라 불리우는,
우주법계의 근원적 질서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

부처님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온 우주의 더 깊은 이면에 담겨 있던 본래 완전했던 진리를
다만 발견하신 분이라고 했다.

사실, 진리는 온 우주에 충만하게 꽉 차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때때로 체험하곤 한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면 언제든 진리의 차원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뭣고’ 하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화두선의 방법 또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성립되는 수행법이다.

그래서 피트는 동시성을 자연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광대한 질서를 힐끗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믿는다.

바로 그렇다.
이 겉에 드러난 몽환포영(夢幻泡影)의 세계 이면에
완전하고 충만한 진리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만 우리의 아상과, 아집, 탐진치 삼독과 무명이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을 쉬고, 내면을 살펴 본다면
그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힐끗 엿보게 될 수 도 있을뿐더러,
그 세계와의 깊은 연결을 이룰 수도 있으리라.

삶의 본질에 이르고 싶다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마음을 비우고 질문을 던지라.

세속적인 질문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해답을 법계에서는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질문을 던지면 우주법계는 언제나 거기에 답을 할 것이다.
물론 그 답변은 꼭 현자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책이나, 신문에서,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서, TV에서나,
아니면 문득 내면에서 올라오는 직관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을 닫아 걸지 않는다면,
활짝 열린 맑은 정신 안으로 진리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스승에게 묻는 것, 부모님께 묻는 것,
친구들에게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제부터 우주법계의 진리 그 자체에 직접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떤가.

내면의 진리, 우주법계의 진리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직접적이며 본질적이다.

또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법계 본연의 계획에 입각해
무한한 자비와 지혜로써 내리는 답변이 될 것이다.

에둘러 가던 버릇을 돌이켜 내면으로,
법계로 직접 노크 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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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혹은 어떤 특정한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나 겉옷이나 껍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 육신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격이 나이며, 몸이 나이고,
내 느낌이나, 내 생각, 내 견해, 내 욕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다.
다만 문제가 있고, 근심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 성격이나,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구 따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그런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하며
꽁꽁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고 했을 때
나의 성격을 내세우곤 하지만,
성격이 어찌 결정적인 나일 수 있겠는가.
성격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살아 온 환경 속에서,
또 나의 경험 속에서 인연 따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경험과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또 언제라도 지금의 내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성격은 변화에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성격은 현재진행형이며 종착역에 이를 수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해 그것이 ‘나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그것을 나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인가.
이 몸 또한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제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진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들이 나인가.
느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특정한 경험 속에서 느낌이 규정되어지기도 하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도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욕구도, 생각도, 집착도, 관념이나 견해들도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욕구도 집착도 생겨나고,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이나 관념, 견해들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제 있던 욕구가 사라지고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관념들도
새로운 어떤 조건에 의해 완전히 깨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념과 신념에 의해 무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으면서 거기에 죽고 살며,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들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성격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에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성격과 나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을 내가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니 상관하지 말고, 개의치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되 다만 있는 그대로 살펴 보고 관찰하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를 내가 다 풀 수는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었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는 끊임없이 성격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찾는 일이고,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 밖에 없다.

인격이 만들어 내는 문제,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 등
그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바로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요,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은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보자.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에 일일이 다 관여하면서
몸에게 휘둘릴 필요도 없다.
몸도 성격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다.
다만 몸이 움직이며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내가 할 일은 다만 관찰하고 주시하는 일일 뿐이다.

예를 들어 몸에 감기 몸살이 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육체와 이 세상 사이의
어떤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흡사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태풍이 오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몸이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병적인 현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부터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안달하고
괴로워하며 내 마음까지 괴롭히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다만 주목하고 주시하면 된다.
감기 몸살이 아주 멀리서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라 생각하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감기 몸살과 나 자신 사이에
객관적인 넓은 공간, 먼 거리를 만들라.
혹은 감기 몸살이 다만 영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지켜보라.

다른 나와 동일시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집착이나 관념이 생겨날지라도
그것과 나 사이에 먼 공간을 만들어 지켜보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다만 지켜보듯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처럼 내 삶의 연극을 다만 지켜보라.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근심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주 멀리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흥미롭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문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가짜에 속지 말라.
껍데기에 속지 말라.

내 몸, 내 성격, 내 느낌, 내 생각, 내 관념, 내 욕구...
이 모든 것들에 ‘내’라는 ‘나’라는 수식을 빼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에 휩쓸리지 말라.
그 모든 문제며 근심걱정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만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기억하라.

흥미로운 영화를 보듯
내 삶의 연극을 지켜보라.



[사진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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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저 피상적으로 조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이고도 가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너와 내가 서로 통해 있다는 것이고,
너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것이며,
세상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하나의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일은 결코 작지 않다.
그 하나의 사건에는 무수히 많은 존재가,
나아가 이 우주법계가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에도 내가 만나는 존재, 나와 마주하는 존재는
특별한 어떤 인연의 힘을 가지고
나와 특별한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 존재는, 그 사건은, 그 사물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사람과 존재들이
모두 내 내면에 있는 어떤 것들이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올 수가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내면과 외부가 둘이 아니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가,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외부의 어떤 대상을 끌어당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내면의 어떤 문제가
겉보기에는 외적인 어떤 문제인 것처럼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오는 문제 또한
나와 전혀 관련이 없던 것이
투영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즉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나와 인연이 있었던,
과거 전생의 어느 시기에 나와 인연이 있었던,
혹은 업의 관계, 빚진 관계, 원수 관계,
복을 베푼 관계, 사제관계, 부자관계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빚어진 업과 인연의 인다라망과 같은
복잡한 사슬 속에 놓여 있던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즉 내 안에 화의 업이 올라오게 되면
과거 전생의 화와 원수관계 등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혹은 물질이나 존재들이
내 안의 화라는 직접적인 원인(인연 중에 ‘인’)에 의해
우주법계의 인연법으로써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과와 업,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생각과 기억과 관념들이 가득하다.
이번 생에서 만들어 낸 것들은 대개 기억과 관념으로 투영되어 존재하고,
지난 생에서 만들어 진 것들은 업이라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번 생의 것이든 지난 생의 것이든
우리가 분명히 인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우리 앞에 나타난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우리는 그 원인을, 그 무수히 많은 원인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무량수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분명히 환히 볼 수 있지,
가섭존자 조차 낱낱이 살펴 알기 어렵다고 했다.

심지어 매 순간 순간 우리 주변에는
1500만 비트의 정보가 발생하는데 반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정보는 고작 15비트에 불과하다고
호오포노포노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것을,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1500만 비트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그 몇 백배, 몇 천배 이상의 복잡다단한 인과의 그물코가
우리 삶의 현장에 매 순간 놓여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타고 가던 차를
뒤의 차량이 와서 접촉사고를 냈다고 치자.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앞차와 뒤차만의 인과관계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 속에는
수백 수천만가지 이상의 엄청난 인과가 얽혀 있고,
수많은 존재와 존재들, 사람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만약 이 두 차의 운전자가 병원에 갔다면
병원의 의사 간호사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집의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함께 걱정을 할 것이고,
병문안을 와야 할 것이고,
병문안을 오느라고 또 차를 타고 와야 하고,
음료수라도 사 와야 하니 슈퍼마켓에도 들러야 하고,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면 다른 것을 했을 그 시간에
그 모든 사람들이 병문안 오기 위해 시간을 비웠어야 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밥 한 톨이 내 앞에 오기까지
우주 법계가, 수백 수천만 이상의 사람들, 존재들이
밥 한 톨 먹는 것을 도왔다는 연기법의 이야기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온갖 존재들이
이 접촉사고 하나와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사고가 난 두 당사자는
우연으로 그런 접촉사고가 났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상대방 안의 어떤 업의 부분과 절묘하게 바로 그 순간에 만나서
그런 사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왜 하필이면 앞차가 5초만 빨리 왔어도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교차로에서 멈춰서게 되었으며,
왜 하필이면 뒤차의 운전자가 바로 그 순간에
주의가 흐려져 앞에 서 있는 차를 못 보고 그냥 들이받았겠는가?

그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업과 인과의 차원에서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차원을 넘어 서 있다.

직장에서 상사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는 상황을 가정 해 보자.
이 또한 상사와 나 사이에, 또 수많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일어난 법계의 일인 것이다.

그로인해 그 상사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을 수도 있고,
그래서 오후에 있을 일의 성과가 좋아졌을 수도 있으며,
그로인해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져서
직장 동료들에게도 화를 내고, 집에 와서도 뾰로통 해 있으며,
오늘 했어야 할 일들을 다 끝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은 단순히 그 상사와 나, 둘 만의 일이 아니다.
그로인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 일들을 생각해 보라.
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새롭게 연결되어져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 낸다.

회사의 부장이 과장에게 화를 냈다는 그 하나의 사실,
그로인해 그 부서에 그 과에 분위기가 하루 종일 냉랭했고,
그 탓에 부하직원 한 명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조퇴하려고 했다가
눈치보느라 조퇴도 못 하고 꼼짝 없이 회사에 갇혀 있는 바람에
병이 더 심해 져서, 저녁에 쓰러질 수도 있다.

그 하나의 상황은
크고 작은 수많은 또다른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 그 하나의 상황은
이 모든 사람, 상황들까지도 감안한 법계의 치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나와 연관되어져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나와는 상관 없는 ‘그 사람들’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내 밖의 문제라고 생각되어지겠지만,
사실은 나와 연결된 문제이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내 문제’인 것이다.

법계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고 더 세세하며 더 치밀하다.
수많은 업과 기억과 생각과 수많은 정보들을
법계에서는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고도 치밀한 계획으로
그 문제를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와 연관된 사람들 또한
모두가 그 문제와 연관된 나름대로의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된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그 문제 주변에 모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혹은 내 삶 속에서 목격하는
그 모든 일들은
모두가 나와 직간접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 문제가 내 외부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문제 아래에 놓여 있는 문제란 뜻이다.

내가 목격하는 모든 문제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제3자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와 관계된 문제이며,
나아가 바로 ‘내 문제’라는 것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결코 내 밖으로 투영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법계의 이치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면의 투영이다.
내 문제요, 내 책임이다.

그것은 또 다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에게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문제나 고민을 가지고 올 때
그 고민을 들어 주고 답을 내려 주지만,
우리 내면에는 그것이 ‘네 잘못’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너의 문제’이고 나는 그 문제를 상담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그의 문제이기도 한 동시에
‘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없다면
그 사람이 그 문제를 나에게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할 우리 공동의 과제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세상은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상담을 하려 왔겠는가?
나와의 공유된 업이,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대방의 고민을 들으며
사실은 내 안의 업을 닦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문제를 치유해 준다는 것은
곧 내 안의 문제를 치유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큰스님들께 상담을 하고 온 신도님들 중에는
특별히 큰스님께서 답을 주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다녀오고 났더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거나,
병으로 아파하던 환자가
큰스님을 친견하고 났더니 낫기 시작한다거나 하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가능한가?
큰스님과 심리상담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상대방의 문제를 상대방의 문제로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치유를 하면 될지를 알려주는데 반해,
수행자의 방식은
상대방이 가져 온 문제를 상대방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바로 내 문제라고 생각함으로써
내 닦을거리라고 받아들인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으로써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그를 나에게 이끌었으며
그와 내가 만나는 순간 그 문제는 더 이상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담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내 안에 어떤 업장, 어떤 문제가
저런 고민을 가진 상대방을 내 앞에 오게 했는가?

물론 그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되는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며,
한 두 생에 걸친 원인이 아닌 몇 생에 걸친
수많은 업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거나,
수백 수천가지 이상의 크고 작은 인연들이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얽혀 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사실 그 원인은 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 연결고리를
어떻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다 볼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1500만 비트의 정보 중에서도
고작 15비트만을 인식하는 우리가,
수억만 종류 이상의 업과 인과의 소식을 어떻게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부처님께서만 아실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원인은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그 원인을 닦고 비움으로써
상대방과 연결되어 있는 공업이 함께 닦여지면서
상대방과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의식이나 법회에서 행하는
축원의 비밀이다.
스님들이 축원을 해 준다고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직접 닦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인연지어진 스님께서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축원을 해 준다면
당신의 마음 닦은 그 힘이 법계를 울리고
나와 연결되어진 내 안의 업도 함께 변화를 맞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수행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능하며
실제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이
이러한 마음 마음, 발원과 기원의 힘들에 의한 것들이 많다.

이상에서 공부한 이 이치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 사건, 문제, 사람들은
사실은 온전히 내 문제며,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탓할 일은 하나도 없다.
상대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라.
그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 돌리고,
그 잘못을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뀌는 한
그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만다.

그 문제를
내 내면이 투영된 ‘나의 문제’요, ‘나의 책임’이라고
자각하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올 때,
그 문제는 이제 본격적인 열쇠를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관하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닦아갈 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상대방의 문제, 내 밖의 경계들이 닦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를 바깥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내가 그 문제를 인식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은 내 문제요, 내 숙제다.

내 안에서 그 문제를 풀라.
내 안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적인 각종의 문제들, 부정부패들,
환경문제, 가정문제, 아들문제, 남편문제,
이 모든 문제들은 사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내 문제’다.

내 문제가 풀리고 나면
내가 사는 세상이 청정해진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 진다는 경전의 말씀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때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가들이
자기 자신의 변혁은 등안시 한 채,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탐욕으로 점철된 시대를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마음 같이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그로인해 자신 안에 화를 키우고,
사회에 대한 불신과 미움과 증오를 키우다가
오히려 자신 몸에 병도 나고,
자신의 마음이 미움과 증오로 얼룩지곤 하는 것을 본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이며,
자기 자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변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변한다.
세상은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법계로 언제나 청정해 있다.
다만 내 마음이 오염되고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본 나의 세상도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깨닫고 보니
이 세상은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말이 있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특별히 구제해야 할 중생은 없다는 말도 있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 우주는 동시에 함께 깨어난다.
내 업장을 닦고 소멸시키는 순간,
이 우주도 함께 어둠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바깥으로 돌리지 말고,
내 문제로 보고
나 자신을 닦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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