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흥국사 연못에 비친 종각]

선택하지 말라.
분별하고 차별하지 말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는 선택과 분별의 연속이다.

단 한 순간도 선택을 멈춘 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바보가 될 것 같다.
매 순간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란 점은 좀처럼 생각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 우리를 괴롭히며,
선택이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몰고간다.

우리는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순간 순간 보다 올바로 선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온갖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배움들은 이제 다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모든 분별과 차별, 그로인한 '선택'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한 가지를 옳다고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 선택받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삶은 둘로 나뉜다.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나뉜다.
그렇게 둘로 나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좋고 하나는 싫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선택하여 내 것으로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선택하지 않은 채 버려두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파괴시키고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좋고 싫은 것으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본 진리의 관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혼란과 분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전쟁을 가져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좋고 싫은 것을 나누게 되고,
점점 더 사물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만다.

항상 우리의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좋거나 싫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어찌 항상 좋을 수만 있고, 옳을 수만 있는가.
어찌 항상 싫을 수만 있고, 그를 수만 있겠는가.

흔히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은 늘
'괜찮아' 혹은 '별로야'이거나,
'좋은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거나하는 둘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둘 중 하나의 견해로 규정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하는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판단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편견을 불러올 뿐이다.

'나쁜 사람이야', '성격이 별로야'란 평가를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분명 우리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쁘다' '별로다'라는 편견이 자리한다.
그런 치우친 견해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마음 속에는
'혹시 무언가 또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
좀처럼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다.

모든 나뉨과 판단과 분별 그리고 선택이란 것이 이와 같다.
좋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않고
나쁘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어떤 한 가지를 좋고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좋아진다.
또 한 가지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좋아보이지만,
한 번 미운 사람은 하는 행동이 다 미워보이지 않는가.

좋고 싫은 색안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비뚫어지고 분열 될 뿐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해석도, 분별도, 선택도 하지 말라.
그랬을 때 치우침 없는 정견의 시야가 열린다.
좋고 나쁜 양변에 갇히지 않은 무분별의 맑은 견해가 생겨난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시험에 진급에 떨어졌다고?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실패를 했다고?

그것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 그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좋고 나쁜 분별을 갇다 붙인 것일 뿐이다.

대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실은 항상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험에 떨어져서 그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보통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운 상황으로 몰고가곤 한다.
그러나 왜 그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가.
그 선택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긍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에 아무런 판단이나 선택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분명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스스로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집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과 해석을 가하지 말라.
판단하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말라.
그 어떤 상황도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내 마음이 좋은 것이라 선택하고,
나쁜 것이라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실패가 왜 반드시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인가.
그로인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내적인 힘이 쌓였을 수도 있으며,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의 때였을 수도 있고,
때때로 실패가 훗날 생각해 보면 더 큰 성공을 위한 정말 필요한 기초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떤 판단도 버리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 없이 그 상황 자체를 무분별로 받아들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큰 틀에서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

그것이 바로 업을 뛰어넘는 길이다.
업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 구속되지 않는 길이다.
악업과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라.
'능력있는 사람'이라거나 '능력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습관을 버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을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치 말라.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사람도, 상황도 그것 자체는 완전한 무분별이다.
완전 중립이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든 문제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라.
모든 차별과 선택을 버리라.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라.

선택없이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기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온갖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며,
우리 삶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바라보라.
분별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외로움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는지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나를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와 조금 더 가까워 진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은 고개를 치켜들고 찾 아와
혼자있음의 고요를 방해합니다.

외로움은
가진 것이 없을 때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없 을 때,
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우린 외로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외로움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혼자 있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외로움이란 느낌이 없다면
우린 쉽게 혼자 있을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랬다면
아마 보다 많은 수행자들이
깨우침을 얻었을 지 모릅니다.

외로움이란 느낌 때문에
우 린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자꾸 밖으로 무언가를 찾아나섭니다.

혼자 있으면
도대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TV를 켜든가,
비디오를 빌려 보던가,
사람들 많은 곳을 방황하던가,
아련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그런 일들 때문에
오랜만에 맑게 텅 비어지려던 내면은
다시 금 물들어 꽉 채워지게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 그 속으로 들어가
온전히 느껴보고 하나 될 때,
우린 조금씩
내면의 참나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늘상 밖으로 치닫는 사람은
내면이 헛헛하지만,
혼자 있음 을 즐기는 수행자는
맑은 향기가 충만합니다.

혼자 있어도
당당하고 초연합니다.

무언가 함께 할 때 당당한 것,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한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홀 로 있을 때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어
외로움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이 내 영혼을 맑혀 줄 것입 니다.

외로움 속에서
혼자 있음! 그 속에서
우린 가장 순수해 질 수 있습니다.

혼자인 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내면은
조금씩 참나에게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려 하지 말고
법을 믿어라.
사람은 변함이 있지만
법은 변함이 없다.

믿었던 사람이
남들로부터 비난을 당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파계 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의지처를 잃게 된다.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으면
그와 같은 허물이 생긴다.

[잡아함경]의 말씀입니다.
불법 을 믿을 것이지
스님을,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는 사람을 믿으면
사람 이 변할 때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리게 됩니다.
중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법을 믿고 부처님 을 믿으면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금강과도 같은 굳은 믿음이란
그 대상이 사람에 있지 않고
법과 부처님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파계를 하고,
원효스님이 속세로 돌아가고,
법 정스님이 대사찰을 소유하고,
원성스님이 결혼을 하고,
법상스님이 큰 죄를 지었더라도

내 마음의 중심은
한 치 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타락하고,
절이 청정함을 잃더라도
내 마음 공부는
한 치의 흔 들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부처님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을 일이지
사람을 등불로 삼아선 안 될 일입 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할 일이지
승등명(僧燈明)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고락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둔한 범부들이 느끼는 감정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
감정적으로 더 예민할 수도 있다.

다만 지혜로운 사람 은
즐거움을 만나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괴로움에 부딪쳐도
그것 때문에 공연히 근심을 더하지 않아
괴로움과 즐거움 의 감정에 구속받지 않고
그 모두를 버릴 줄 알아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울 뿐이다.

[잡아함경]

지혜로운 수행자라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정이 없다거나
늘 여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경계를 만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똑같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중생은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물 러 휘둘리지만,
지혜로운 수행자는
즉한 순간 관하여 깨어있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며
바로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경계에 닦쳐
욱! 하고 올라오는 마음은 같지만,
그 감정에 머무르느냐
빨리 놓아버리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바로 관하면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빨리 놓아버리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절에 오며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나 쁜 일들은 부처님께서 다 거두어 주시고
늘 즐거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서 당당해 져야 합니다.
떳떳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은 것 모두 내가 받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진실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 체의 모든 경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행심입니다.

불교 교리 의 핵심을 연기법, 인과법이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말합니다.
큰스님네들은 연기와 공을 실천키 위해
'마음 을 비워라'
'놓아라' 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기, 공을 실천할 수 있고
어찌 해야 비울 수 있 습니까.

모두를 버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진정 비우는 것인가요?

비운다는 것은
공을 실 천한다는 것은
연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합 니다.

지을 때는 선도 악도 모두 닦치는대로 지어놓고
받을 때 되어선 좋은 것만 받겠다고 하니
중생심이란 얼마나 교활 합니까.
괴로움은 받기 싫은데
지어 놓았으니 지은대로 자꾸 나오게 되고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내 앞에서 당당해 지세요.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 들이세요.

나는 수행했으니
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괴로움이 비켜갈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진정한 수행자라면
괴로움, 즐거움 이 모두를
다 받아들일 준 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수행 많이 한다고
괴로움이 비켜가 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수행심으로 괴로움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 이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괴로움의 과보가 왔을 때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셔야 합니다.
내 안에서 다 녹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용광로라 고 하지 않던가요.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나의 참생명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까 짓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 이세요

나의 참생명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님 이십니다.







[봄이 오고 있는데,
사진은 벌써 가을 단풍이네요...]

28.
깨어있는 명상으로써 마음을 관하는 수행자는
방일과 근심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본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듯이



어느 날 삡팔리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마하가섭이 아침에 탁발을 하고 돌아와 공양을 드시고 자리에 앉아 천안으로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들이 어떻게 업에 따라 나고 죽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닦아 밝아졌는지,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나태하고 산만한 마음으로 생을 허비하고 있는지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이번 생에 이렇게 부유하게 태어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어떤 과거생의 인연으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지, 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인연과 업은 어떤 과거생의 수많은 인연으로 얽혀있었는지 등에 대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연을 환히 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가섭을 관찰하시고는 가섭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말씀하신다.

“가섭이여, 일체 중생들이 각자의 업에 따라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를 환히 깨달아 아는 것은 오직 붓다의 지혜에만 한계가 없다. 다른 이의 지혜로서는 중생들이 여기 저기에서 업에 따라 부모를 만나며 나고 죽는지를 다 알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네 능력 밖이다. 붓다만이 이 모든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있느니라.”

물론 가섭 또한 아라한이기 때문에 전생과 업에 대해 볼 수는 있을지라도 일체 모든 중생들의 심지어 축생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어떤 업 때문에 저 두 사람이 원수 지간이 되었는지, 어떤 업 때문에 저 아이들이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업 때문에 저들은 이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거나, 이별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인연이기에 이번 생에 함께 결혼하게 되었는지, 또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며, 주인과 하인이 되었는지 일체 모든 중생의 일체 모든 업연을 하나 하나 낱낱이 환히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업과 인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스승들은 무수히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처럼 일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과 윤회의 사실을 분명하고도 환히 알고 보는 분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부처님처럼 그 무수히 많은 출재가의 재자들에게 그것도 분명한 대기설법을 통해 때로는 말 한마디로, 때로는 지속적인 수행의 주제를 내어 주고 법을 설해 줌으로써 아라한으로 이끈 이는 없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과거 전생의 수많은 인과와 윤회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어떤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인과 이야기를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또한 믿기 힘들 정도로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 하나만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이 때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과를 증득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심지어는 수십, 수백명이 동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능력은 인류 역사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영적인 스승일지라도 가능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스승이 등장하고, 성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능력은 우리의 생각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러나 부처님 같은 이런 능력은 그 어떤 이에게도 없었다.

바로 이 가섭에게 한 설법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가섭이 어떤 제자인가. 마하가섭이라는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님의 상수 제자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제자요, 선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은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가섭 정도의 지혜라면 인류의 수많은 성자와 영적 스승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분 가운데 한 분이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는 이토록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것인가.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전생부터의 선근 공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공부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나 우리도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부처님의 법문 한 자락 끝에 저마다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선근 공덕을 지어야 하고, 바로 그 선근이란 것이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다름 아니다.

방일함이 없이 깨어있는 관찰의 수행을 닦는 수행자는 언젠가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려다 볼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한 단계 아래로 깔본다거나,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의 대지와 사람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듯이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붓다는 모든 중생들의 인과와 업과 근기 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근기와 업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걸맞는 수행재료를 줄 수도 있고,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만 유독 수많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깨어있는 명상이라는 마음 관찰의 수행이 있는 것이다.





[사진 : 인도의 홀리 축제, 델리 기차역 앞에서]

26.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게으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값진 보물처럼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한다.

27.
언제나 깨어있으라.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값진 보물을 지키듯 깨어있음의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방일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깨어있으며 명상의 힘을 키우는 자,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않는 자, 그런 수행자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깨어있음의 유무에서 온다. 지혜롭게 깨어있는 이는 매 순간 순간 세상을 향해 온 존재를 열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활짝 깨어 지켜본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잣대는 무의미하다. 과거의 판단과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현재를 걸러서 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의 눈은 언제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놀랍고도 신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난생 처음 만난 것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내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마주한다. 그에게 모든 대상은 ‘다만 그러할 뿐’,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치우친 견해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만 중도적인 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항상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 온갖 판단 분별을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재단하려 든다. 그에게 보여지는 모든 대상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양자 택일의 것일 뿐이다. 극단의 두 가지 판단 속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이고, 진부하고도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가 보는 시선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보더라도 과거의 비슷했던 기억과 분별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둔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고, 눅눅하며, 과거와 미래로 생각을 끄집고 다니느라 늘 힘이 없고, 빨리 지친다.

어느 날 사위성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 불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똥과 재를 바르고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해 대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인도의 홀리 축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홀리 축제는 약간 성격이 달라진 듯 한데, 각종의 물감과 진흙으로 범벅하여 온몸에 뒤집어 쓰거나 바르고,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홀리는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이나, 낮은 계급의 지위에서 항상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을 위한 날로, 평소 눈엣가시이던 상층 카스트나 남성들에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그 공격이란 것도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물감을 푼 물이나 물풍선 따위를 던지면서 장난을 치는 수준으로, 대부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간 계급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모처럼의 일탈을 즐기는 수준이다.

부처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지금의 홀리축제처럼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맞다면 아마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축제의 성격이 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부처님 당시의 그 축제는 주로 쌍스러운 욕설과 온갖 악담을 하는 등 그 부작용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이 축제 때인 일주일 동안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일지라도 어김없이 소똥과 재를 맞으며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던 듯 하다. 그러다보니 부처님과 승단에 늘 공양을 올리던 재가신도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일주일 동안은 음식을 준비해 사원으로 미리 보내고 절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 간의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한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 그동안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에 대해 말씀드리며 부처님을 공양에 초청하지 못했던 연유를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깨어있음이라는 관 수행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축제에서처럼 악담과 욕설의 업을 지으며 깨어있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설법하셨다.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며 언제나 깨어있으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상징에 불과하다.
모든 개념작용들은
환영과도 같은 공허한 헛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태초에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개념도, 관념도, 분별도, 상징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꽉 찬 충만함이 여여(如如)하게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시비도, 분별도, 싸움도, 좋고 나쁨도,
행복과 괴로움도, 성공도 실패도 없었다.

나아가 중생과 부처도 없고,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고,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없었기에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 없고,
어리석은 이가 지혜롭게 되기 위한 공부도 필요 없고,
죽지 않기 위해, 늙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성공을 위해, 부유함을 위해, 승리를 위해, 해탈을 위해 달려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며 충만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처였고, 신이였으며, 그저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아니 어느 한 순간 그러한 텅빈 충만이 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왜 나에게는 그런 충만하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가 없는가.
이 세상은 왜 이토록 어둡고 탁하며 어지러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 사유의 뜰을 거닐어 보자.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은 이름짓기다.
무엇이든 거기에 이름을 짓고, 상을 짓고, 규정 짓기를 좋아한다.
이른바 상징을 만들어 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상을 짓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감정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어떤 감정에는 ‘미움’이라는 상징을,
또 어떤 감정에는 ‘슬픔’이니, ‘행복’이니 하는 상징을 붙여 놓았다.
또 어떤 것에는 ‘부유함’을 또 어떤 것에는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어떤 상태에는 ‘성공’이라고, 또 어떤 상태에는 ‘실패’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으며,
어떤 것에는 ‘옳음’ 또 어떤 것은 ‘그름’이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중생’이라는 이름을,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부처’라는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이름붙이고 상징화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화하는 작용, 이름짓고, 상을 짓는 작용
이것이 모든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러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뭉뚱그려 ‘이런 이름’을
‘저러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저런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사실 그러한 이름과 그러한 상황이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상징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그 어떤 정해진 실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고,
또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랑이 행해질 수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100번의 사랑을 했다면
거기에 또한 100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많은 사랑의 상황 가운데
어떤 것만을 딱 찝어 ‘사랑’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을 받으면서 성공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연봉 속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이 부유하다면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을지라도 실패한 인생이라 자책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사랑도 미움도, 성공도 실패도, 옳음도 그름도, 좋음도 나쁨도,
부자도 가난도, 중생도 부처도,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대충 이러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이름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많은 문제점을 유발시켰다.

이런 수많은 약속, 수많은 상징, 수많은 이름들은
그 어떤 기억과 감정과 찌꺼기들을 양산해 낸다.



이렇게 이름짓고, 상징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만 어떤 상황을 접할 때 오직 순수하게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경험들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경험으로 분별없이,
과거의 기억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과거의 상징이며 이름들과 섞이지 않은 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징과 이름을 정해 놓기로 약속한 순간부터
우리의 어떤 경험은 어떤 이름으로 붙여져 기억 속에 저장되기 시작한다.
기억 속에 저장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파일을 저장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고,
창고에도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이름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생겨난
어떤 특정한 느낌이며 감정들을 ‘A'라고 이름을 짓기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접할 수 있는 그와 비슷한 감정들은
그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똑같이 ‘A'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것은 전혀 ‘A'가 아닌데도 똑같이 'A'로 불리는 것이다.
사랑도 똑같은 사랑이 아닌데 그저 이름은 똑같이 사랑인 것 처럼.

이것은 엄청난 문제를 초래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하고, 따분해 지기 시작한다.
이름을 붙여 놓고 나면 곧 그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게 된다.
특히나 저장될 때는 그 과거의 기억에 빗대어
좋거나 싫다는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자동으로 섞인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것과 비슷한 또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자동적으로 튀어 나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기억 속에 담겨진 이름으로 걸러서
판단하고 분별하게 만든다.
전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그 상황으로 한정짓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삶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전혀 새롭고 신선한 매 순간 순간을 늘상 그저 그렇고 새로울 것 없는
따분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 때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 과거의 ‘사랑’이 아프고 ‘싫은’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마주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서 해석을 하게 된다.
그 사람에게 사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과거에 해 보았던 기억과 그 기억에 담긴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새롭게 마주한 사랑의 상황에 대해서도 똑같은 해석과 전제를 깔게 된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상황과 사람에 대한 폭력이며 억압이다.
그것은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놓치고 있는 것인가.

이처럼 예전의 기억이 좋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좋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졌다가
훗날 새로운 비슷한 상황을 맞을 때 똑같이 ‘좋다’고 해석하게 되고,
‘나쁘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 있던 상황들은
또 다른 상황을 맞을 때 ‘나쁜 상황’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제부터 모든 상황은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지고 해석되게 된다.
과거로 걸러지면서 그것은 좋고 나쁜 두 가지 감정으로 한정되고 만다.
과거의 기억에는 언제나 그 기억이 가졌던 감정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실수며, 오류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오류인지를 모른다.
아니 그것이 옳다고 느끼고, 정당한 해석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옳고, 내 감정이 옳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매 순간 순간 전혀 새롭고 신선한 경험들을
새롭고 경이롭게 체험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얽매여 아집에 사로잡힌 해석을 가하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새로운 곳이 아니다.
매 순간 순간은 과거의 연장이며, 과거의 속박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된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
과거의 경험에 빗대로 ‘좋았던’ 감정을 ‘행복’이라고 이름 짓고
계속해서 그 좋았던 행복의 감정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물론 반대로 과거에 ‘나빴던’ 감정은 회피하고 멀리하려고 애쓰게 된다.



우리의 욕망이나 집착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과거의 잔재이며 기억된 감정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욕망하고, 욕망한 것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욕망을 채워나가는 방법으로는
언제까지고 욕망을 끝낼 수는 없다.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욕망을 끝낼 수 없다.
욕망이 생겨나게 된 전체적인 마음의 작용을 전체적으로 사유하고 깨달아
욕망이라는 것이 허망하게 일어났으며, 허망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볼 때 욕망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상’ ‘상징’에 얽매여
그러한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욕망의 문제를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채우겠다거나, 욕망을 없애겠다는 생각 모두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일어나는 방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이 중생이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면,
욕망을 없애고 초월하겠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라는 상징도, 중생이라는 상징도
모두 다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일 뿐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욕망과 집착과 아상의 전체적인 이해와 사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피나는 수행으로 욕망을 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을 채워 나가겠다는 생각도 안 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욕망을 채우거나 끊는 문제로 다가설 것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전체적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찰하되,
그 어떤 시비분별도 옳고 그르다는 판단도 없어야 한다.

다만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좋거나 싫다는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체적으로 자각하여 바라볼 때
욕망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보게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났다.
우리의 습관은 순간 과거의 어떤 비슷한 상황과 기억으로 쏜살같이 달려 갈 것이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를 판단 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 상황에 집착할 것이고,
나쁜 감정이라고 판단되면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모든 과정을 낱낱이 돌이켜 관조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애써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 된다.

바라보다 보면 순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습관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순간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작용을 지켜보게 되면 좋거나 나쁘게 보는 틀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온전히 보면
매 순간 새롭고 신선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
온전히 바라보면
욕망을 없애려고도 채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욕망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금 태초의 텅 빈 고요로써 되돌아 옴을 느낀다.
본래 아무 일도 없었음을.



[사진 : 강화도 적석사 낙조]









우리는 평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느낌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게 되고,
그렇게 흐르게 되면 좋은 느낌에는 애욕과 탐심을
싫은 느낌에는 증오와 진심을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은 방치함으로써 어리석음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과정은 이윽고 애욕과 집착, 삼독심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무수히 많은
좋고 싫은 등의 관념 혹은 편견의 틀을 형성하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관념을 뭉쳐진 실재적 개체로 인정하게 되어
거기에 '나'라는 관념을 개입시켜 '나'를 실체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옳다'라고 하는 아상(我相)인 것입니
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상(相)은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각종의 '느낌'을 놓침으로 인해 연이어 애욕과 집착이 일어나고
여기에서 오는 물질적 정신적 인과 작용의 끊임없는
순환작용에 불과한 비실체적 허상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의 근본교설에서의 '무아(無我)' 개념 또한 이러한 연유입니다.

이렇게 형성되어진 '나'라는 관념에서 시작되어
다시금 무수한 분별과 편견, 새로운 관념이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편견과 관념들을 고집하여 사실이라 받아들이지만
그 관념이란 우리들 습(習)으로 무장된 헛된 관념에 불과합니다.

가만히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대상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관(觀)함에 있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관념이나
생각의 늪에 빠지면 안됩니다.
떠오르는 분별과 생각으로 대상을 관찰해선 안됩니다.

관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관념과 생각이 게재되지 않는 순수한 주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관념이나 생각이 게재되면 또 다른 관념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처럼
저마다의 관념의 틀에 세상을 대입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법당에서 '목탁'을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보라는 주문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전의 경험과 기억, 관념을 목탁에 투사하여
자신의 관념대로 목탁에 대한 분별을 이야기 합니다.
'목탁이다', '소리나는 나무다', '둥글고 속이빈 소리나는 통이다' 하며
애써 편견없이 보려 하지만
우리네 관념의 틀은 너무나도 깊숙히 개입이 되어 있음만을 증명해 줄 뿐입
니다.

목탁을 바라보는 순간 좋고 나쁜 분별 또한 일어납니다.
불교신자이며 목탁이 친근한 이라면 좋다는 느낌을
또 타종교 신자라거나
심지어 산골자기에서 자라 목탁채로 맞으며 자란이가 있다면
싫은 느낌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시각에서 목탁을 바라본다면
'나무'라는 관념도, '소리'난다는 생각도
'둥글다' '속이 비었다' '좋다' '싫다'라는 관념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이전에 만들어 오던 고정된 관념을 빼고 사물을 바라보면
바라보는 그 순간의 느낌은 고요할 것입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입니다.

소리를 들어도 좋고 싫음이 아닌 그저 '들릴 뿐'
무엇을 보아도 그저 '바라볼 뿐'
냄새를 맡아도 그저 '냄새날 뿐'
이와 같이 육근의 모든 감각기관은 오직 '할 뿐'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만나는 직장의 상사를 만난다거나
가족이며 친구를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상사' '싫은 친구' '좋은 사람' 하는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 놓은 관념으로 상대를 대하기 때문에
늘상 관념의 늪에 빠져 그 대상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면 행복하고
싫은 사람 만나면 괴롭고
그렇듯 대상에 내 마음이 놀아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령 미워하던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일을 했더라도
내 마음의 편견 때문에 그렇게 쉽게 칭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에 빠져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그저 일체의 모든 사물, 사람, 대상을 바라봄에
오직 고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텅 비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고 담을 수 있도록
그런 열린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워하던 사람, 싫어하는 음식, 도저히 못 할 일, 내 능력 밖의 일...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어설픈 관념일 뿐입니다.
놓아 버렸을 때 잡히지 않던 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어설픈 관념을
현실로까지 가져와 투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에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의 틀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묶어두는 관념의 사슬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괴로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라는 현실에서 떠오르는 생각, 관념
그 자체의 '현상'은 현재의 실제이지만
그 관념과 생각을 파고 들어가보면 이미 그것은 공(空) 그 자체입니다.
거짓된 분별이며 인연따라 만들어진 허상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 몸과 마음의 '현상' 그 자체가 가장 참된 진실에 가깝습니다.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텅 빈 거짓 관념일 뿐 더 이상 진실일 수 없습니다.
거짓된 허상을 붙잡고 늘어져 봐야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참된 실재' 그 자체가 수행의 대상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지금 여기'라는 '보다 가까운 실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관찰하는 순간 미세하게 끼어드는
과거 혹은 미래로부터 오는 일체의 무수한 관념을
그저 순수한 객관이 되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녹여야 할 것입니다.

관념의 틀은 '나다' 하는 아상과 아집(我執)을 형성하지만
관수행은 관념의 허상을 바로 봄으로써
관념의 소멸, 아상의 소멸, 아집의 소멸을 돕습니다.

'진리'는 생각이나 관념 속에 있지 않고,
오직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 속에 있습니다.

오직 대상인 '현상'과
현상에 대한 고요한 '관찰'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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