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처한 괴로움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방법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마음을 몰아가보는 것은
하나의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치달을 수 있는 가장 괴로운 상황,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을 하고 난 뒤
그 상황에서 하나하나 다시 시작하는 것 말입니다.

살다보면 감당키 힘든 괴로움이 몰려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짓눌린 상황에 이끌려 몸도 마음도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어떤 괴로운 상황이라도
우린 능히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린 너무 쉽게 잊고 지내는 듯 합니다.
마음만 잘 다룰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황은 우릴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마음 내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숙한 삶의 화가이기에
화가의 손에서 자유롭게 그림이 그려져야지
그림에 따라 화가의 손이 왔다갔다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최악을 가정하는 삶은
자칫 포기하기 쉬운 괴로운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일미(一味)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진급이나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했을 때
그 괴로운 상황에 안주하여 머물고 있으면,
그 상황은 나에게 더 큰 실망감과 자괴감 등을 몰고 옵니다.

그런 괴로운 마음은 앞으로의 삶에 있어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을뿐더러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했을 때 오는 희망마저 빼앗아 가기 쉽습니다.

빨리 마음을 비워야 빨리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방편으로 최악을 가정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히려 더 괴로운 상황,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낙방 정도가 아니라 강제 퇴직을 당하여 직장을 잃고
퇴직하면서도 동료들의 야유를 받으며,
직장이 없다보니 그나마 있던 집도 팔아야 하고
자식 학비걱정에 먹고 살 일이 걱정이며,
업친데 덮친 격으로 몸까지 아파 일을 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시첫말로 갈 때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바탕위에 하나 하나 다시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즐거운 일만 있게 됩니다.

그나마 퇴직 당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더 열심히 일해야겠고,
진급은 못 했어도 위로해 주는 동료가 있으니
야유하고 비난하지 않아 준 것에 감사하고,
따뜻한 집에 아내와 자식들 잘 크고 있음에 감사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 몸 건강함에 새삼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으니
이처럼 남은 것은 올라갈 일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일과 즐거운 일 뿐이며
이제 남은 것은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마음 다스리고 나면
다시금 시작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한 부자 사업가가 시한부인생 선고를 받았습니다.
1-2년 정도를 살고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못할 괴로움의 끝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괴로워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가만히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겠지 하며
더욱 심한 최악의 상황을 설정해 보니 감사할 일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남들에게 미움 주지 않고
괴로움 주지 않고 고요히 눈 감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당장 내일 모레 죽지 않음에 감사하며,
남은 생을 보람되게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해 할 수 있었습니다.

남은 날 동안 그간의 벌어 놓은 돈을 널리 회향하고자
또한 일에 시달여 평생 원하던 해외여행을 해 보고 죽으려
돈을 싸들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을 때는 정말 괴롭던 마음도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했습니다.
환한 웃음으로 해외를 떠돌며
많은 어려운 이를 만나고 도움을 주고
그렇게 몇 달 간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바로 죽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렇게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음에 감사해하며
그렇게 해외여행을 마쳤을 땐
신기하게도 이미 몸이 완쾌되어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 또한 마음으로 짓는 일입니다.
마음이 변하면 생사의 인연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상황 자체가 괴로움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그 상황에 놀아나기에
마음이 괴로운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그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집착된 괴로운 마음을 비워버리고 나면
뜻하지 못했던 상황이 우리를 반길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더 떨어질 최악의 상황이 있으니
우리 앞에 펼쳐질 그 어떤 상황이면 어떻습니까.

그렇듯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두면
앞으로 닥치는 일들이 즐겁고 감사해지며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면
안 될 일들이 다시금 되어지는 도리가 나옵니다.
마음이 변하면 주위가 변하고 세계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괴로운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에 안절부절하는 우리의 마음이 병통인 것입니다.


괴로움,
그것은 곧 즐거움이다.
즐거움이자 성장이자
도반이자 스승이며
내 삶의 반려자요 수행의 재료이다.

아픔, 괴로움, 서글픔, 상처, 고통, 몸부림, 실수,
좌절, 패배, 슬픔, 공포, 증오...

이런 것들은 곧 우리를 성숙하게 해 주고,
내적으로 성장하게 해 주며,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고 깨어있게 해 주는
스승의 죽비와도 같고 한줄기 목탁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과 좌절과 슬픔, 아픔을 마주하게 된다.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라.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내 존재를 스쳐 간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좌절들이야말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지금의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로였고 동반자였다.

그 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아픔들, 모든 고통과 좌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삶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 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가져다 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에서는 도저히 그 아픔 속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 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고, 내적으로 어느 정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되면
그 때의 그 아픔이 나에게 어떤 성장을 가져다 주었는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 순탄한 삶,
우리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런 삶 속에는 깨우침도, 성숙도, 지혜도, 자비도 꽃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얕은 정신과 공허한 내면을 가져다 줄 뿐이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 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빠듯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알아서 잘 쓰라는 말 외에는 어디에 무엇을 썼느냐고 묻지도 않고 맡겨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수행자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적인 삶,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삶이란 것은
그 어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그 문제의 뒤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하며, 괴로워 할 뿐이지만,
보다 영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이는
그 문제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지혜롭게 관찰하곤 한다.

언제나 문제는
그 이면에 우리를 돕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배울 것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의미가 너무 깊고 심오하여 깨닫지 못하는 수도 있지만
존재의 깊은 곳에서는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나 아픔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그 상황, 그 문제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포용하는 일이다.

그 깊은 의미를 찾고자 애쓸 필요는 없다.
내 깊은 곳에서 알아서 깨달을 것이고, 알아서 이끌어 갈 것이니
그저 믿고 맡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 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 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사실 수행의 길, 명상의 길, 영적인 구도의 길은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괴로운 일이 사라지고, 장애가 사라지고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도의 길 위에는
온갖 가시밭길이 놓여 질 수도 있고,
일반인들 보다 더 큰 아픔과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아픔과 괴로움을 대항해 싸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도의 길을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요,
신의 사랑이고, 붓다의 자비이다.
지혜로운 이는 문제 속에서,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붓다의 자비로운 이끎을 보고 신의 사랑스런 도우심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공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지켜본다.

실제로 티베트에서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움을 청하는 축원을 암송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와 인내와 정진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럴진데 우리의 삶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 생겼다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회피하고 투쟁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오히려 그 때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알아야 한다.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공부의 재료이듯 즐거움 또한 공부의 재료가 된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거기에 집착해 더 많은 즐거움을 쟁취하려 애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고행을 위해 즐거움을 죄다 내다버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다만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어떤 일’들은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내 존재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살며시 돌아 갈 뿐이다.

내 삶에는 괴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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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도갑사 대웅보전]

이따금씩 찾아오는 법우님들 중에는
당장에 괴로운 일들 때문에 수행이며 깨달음은 별 관심이 없고
오직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깨달음에 대한 염원이
지나치기까지 하신 분들 또한 더러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참 바람직하다 할 만하겠지만
이따금씩 ‘깨달음’병에 걸려
빨리 깨닫고자 하는 조급증이
좀 심하신 분들도 있는 것을 더러 본다.

수행자에게 있어 깨닫고자 하는 것이야
당연한 서원(誓願)이라 하겠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안 될 일.
중도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빨리 깨닫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면
도리어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한 깨달음의 향기를 놓치고 만다.

깨달음을 미래의 일로 설정해 두고
기다려서는 안된다.
‘빨리 깨쳐야겠다’거나
‘언젠가 깨닫겠지’ ‘왜 이렇게 안 깨달아지지’ 하는 마음은
다 분별이고 망상일 뿐.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문제이다.

엄격히 말해
깨달은 자는 없고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이란 말이 있다.

깨닫게 되면
내가 깨달았다거나 하는 아상이 몽땅 사라지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이 순간 순간 있을 뿐이란 말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시간의 개념 자체가 그냥 텅 비어 있으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관념 또한 비어 있다.
오직 순간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우리들이 깨달음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한가지.

언젠가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다시말해 깨닫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얼마나 하고 있는가를
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의 문제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 깨달음이란 환상에 불과하며, 깨달은 자는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누가 하는가.
깨달은 각자(覺者)만이 할 수 있는가?
다 이룬 부처의 행위만 깨어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깨어있는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 문제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의 문제이다.

부처님은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의 연장이지만,
우리들의 행위는
깨어있는 행위와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자는 무엇인가.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어 가는 사람이다.

언젠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깨어있는 행위가 되기 위해
애쓰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 미래에 있을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은 깨달음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전도된 생각이다.

시간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과거로부터 시간이 흘러 지금에까지 이르렀으며
또 그 시간이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시간이 공하다면
깨달음을 어느 순간에 찾을 것인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그대로 진리 그 자체인 것이며, 불성의 싹틈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온전한 알아차림으로 100%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할 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사는 것이 된다.

어떤 법우님들은 묻는다.
‘이렇게 수행하면 깨닫나요?’
‘언제쯤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나 또한 깨달음 병이 너무 크게 나서
한동안 꼼짝달싹 못하던 적이 숯한 나날이다.

도대체 빨리 깨달아야 할 것 같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빨리 부처가 되야지 이렇게 언제까지 중생으로 살 것인가 싶었던 날들...

그러나 그건 내 착각.
깨어있는 행위를 하는 순간 우린 이미 깨달은 것이고,
우린 그 순간 부처인 것이며,
진리와 하나되고, 온 우주 법계와 하나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또다른 순간 이를테면 깨달음의 순간이라거나,
부처되는 순간 그런 것을 바라는 마음을 놓아야 한다.

깨어있는 행위를 하는 순간
방하착이 되고,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 되고,
지금 이 순간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깨닫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깨닫지 못한 것에 조급해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지금 이 순간 얼마만큼
‘깨어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있는 행위’를 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애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부처의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그대로 부처인 것.

부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부처가 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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