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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숫타니파타]

많은 사람들에게 소유가 기쁨이다.
집착하는 것을 얻었을 때 하늘을 날아갈 듯 기쁘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 것’이라는 소유를 늘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과제일 것이다.

자녀가 있으면 자녀로 인해 기쁘고,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기쁘고,
차가 있으면 차로 인해 기쁘다.

그러나 이 모든 소유에서 오는 기쁨은
항상 하지 않으며 근원적이지 않다.
언젠가 소유물은 없어지고 만다.
소유한 것이 소멸되었을 때 그에 따른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소유하더라도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그 때 참된 기쁨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우선 당장에 달콤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침내 근심이 되고 만다.
집착으로써, 소유로써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이면에 행복의 크기만 한
불행의 씨앗을 키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식이 있으면 자식 때문에 기쁘지만
또한 자식으로 인해 괴롭고,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기쁘지만
돈 때문에 괴롭기도 하다.

모든 소유의 기쁨은 곧 괴로움으로 바뀐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세상의 모든 집착을 놓으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소유물에 집착하지 말라.
집착 없이 소유한다면 세상을 다 소유해도 상관없다.
언젠가 소멸되었을 때 마음에 아무런 파장이 없을 것이기에.
집착이 없으면 근심도 없다.
  1. Favicon of http://namhwan53@yahoo.co.kr BlogIcon 김남환 2008.08.15 12:53

    공{일체가 고}
    스님 말씀이 본인에게는 구구절절 ~덕분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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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성취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바로 그 진리가 연기법인 것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있고, 불교 경전이 있으며,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또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현재 전 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수많은 논서와 강론 등을 낳아왔지만 그 모든 이치를 한 마디로 하자면 연기법이라고 정리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아함경』상적유경에서는 ‘연기를 보면 곧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곧 연기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무상, 고, 공, 무아, 자비, 일체법, 12연기, 업과 윤회 등의 근본불교 교리에서부터 부파, 대승불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연기법을 벗어나는 교리나 사상은 없다. 모두가 연기법의 각론이며, 연기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에 불과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연기법을 깨닫게 되면 온 우주의 모든 이치를 확연히 깨닫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의혹도 남아있지 않고 환히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다나』에서는 ‘성자가 참으로 진중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치에 대한 그 모든 의심과 의혹들은 비로소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지 부처님께서 별도로 연기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연기법은 부처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고 설령 오지 않으셨더라도 언제나 이 우주의 법칙이요 진리로써 항상 하고 있는 진리란 의미다.

『잡아함경』12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며 깨우칠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교설이 아니라 이 우주를 운행하는 법칙으로써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부처님은 이러한 우주적인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달아,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연기법’이라고 편의상 이름 붙여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연기법은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말에 불과한 것이지 연기법이라는 언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아셨고, 연기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이러한 연기법을 중생을 위해 수많은 교리로써 분별하여 설하고 깨우쳐 주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연기법이 무엇이기에 부처님께서 이토록 역설하셨으며, 그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종교요 가르침이 되고 있는가. 물론 연기법을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수많은 교리 해설서를 보더라도 경전의 말씀을 풀어 놓으면서 주석을 달고는 있지만 그것을 읽는다고 연기법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읽고 나더라도 연기법에 대한 어떤 확연한 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나 또한 대학 다닐 때 처음 접해 보았던 불교교리서나 경전해설서를 보면서 연기법이 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 연기법이 불교를 대표하는 교리이며, 이것이 진리의 핵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불교를 대표할 정도로, 이 세계와 우주를 운행하는 근본 원리요 법칙으로써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내 안에 화두로써 자리잡고 있었고, 아마도 그 의심이 지금까지 이렇게 불교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하던 제자들이 많았던가 보다. 『증일아함경』권46에 보면 아난 존자가 연기와 십이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부처님께 여쭙는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이 그리 깊은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한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깊고 깊은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이처럼 연기법은 언뜻 보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법처럼 보인다.

여기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 연기법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깊이와 통찰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스님들께서, 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이 고민해 온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불교를 잘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혹은 불교를 믿고 신행하는 초심 불자들이라도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불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교리들도 다양하며, 경전도 수없이 많아서 어떤 것이 불교를 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하는 질문을 받고 주저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교리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도 막연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다.



연기의 의미

그러면 이제부터 연기법이 과연 어떤 법인가를 차근 차근 공부 해 보자. 연기법에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것들도 모두 다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보면 불확실한 일들이 많고, 불확정적인 것들이 많으며, 복잡다단하고, 언뜻 보기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합리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으며, 진리는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낄 법한 일들도 벌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못 사는 나라에 가난한 이로 태어나 기아와 전쟁으로 아귀다툼을 벌이다 죽어가는 이들도 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살더라도 어떤 이는 교묘한 술수와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진리는 없는 것인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이 벌어지고,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치가 숨어 있다. 이 모든 존재며 상황들을 가능케 하는 우주적인 법칙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먼저 ‘연기’란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 연기의 어원은 팔리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Paticca Samuppada’라고 하여 ‘Paticca’는 ‘~때문에’, ‘~로 말미암아’라는 뜻이고, ‘Samuppada’는 ‘일어나다’는 의미이다. 즉 연기는 ‘~로 말미암아 일어나다’, ‘~때문에 생겨나다’는 의미이다.

연기의 산스크리트어 또한 ‘pratitya samutpada’로써 ‘pratitya’는 ‘~때문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저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말미암아 생기고, 무언가에 의해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란 뜻이다. 이는 그 어떤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란 의미다.

『잡아함경』13권 335에서 이 연기법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경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며 상황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생성과 발생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와 상황은 어떻게 소멸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연기의 공간적인 표현이며,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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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황악산 직지사



[신라 아도화상이 세운 절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 절안의 오랜 소나무의 운치하며 깊은 계곡 맑은 물소리가 항상 맑게 들리는 절입니다. 경내에 나무가 참 많고 도량이 깨끗하기로 유명, 직지사는 전 대중스님들이 운력을 중시하기로 소문났지요. 아침 공양이 끝나면 모든 스님들이 나와 도량에서 운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단순하게 사상으로만 그치는
허울좋은 관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법은 죽은 사상이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자라고 한다면
연기법을 믿는 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주위엔
참 겉보기만 불자인 사람이 참 많은 듯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럿이 있을 때는
참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쉽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던가요...

다른 법우님들과 함께 차를 탈때면
참 조심스레 천천히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차를 몰게 되면
어느덧 거리의 무법자가 되어
다른 운전자를 황당케 하는 경우를 저 또한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연기법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법사인가?
하고 되묻곤 한답니다.
진정 연기법을 아는 이는
연기법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연기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첫째가 인과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인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상대에게 욕좀 얻어 먹고 나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어느정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만
혼자있을 때라면 그 과보 그대로를 훗날 모두 받아야 합니다.

법계의 인과는 어느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법계에 그대로 저축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법계의 인과라는 철저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못 보이면
다음에 다시 잘 보이게 되면 그만이지만
한 번 지은 업장은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없게 됩니다.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지은 모든 것이 그대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무심코 지은 미세한 생각까지도 철저히
내가 짓고 내가 그대로 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인과를 믿는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누가 있든 없든
항상 맑고 향기로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어느 한 때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 순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어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순수한 삶을 살아 간다고 확신 할 수 있는가요.

그러나 우린 이미 인과라는 법계(法界)의 이치에
우리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노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일체 모든 이에게 나의 삶을
그대로 보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연기를 믿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삶, 그리고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 한 톨에 담긴
일체 법계의 은혜를 명상해 보셨나요?

농부의 은혜,
농부를 낳아주신 부모님 그리고 또 그 부모님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속의 모든 조상, 존재의 무한한 은혜...

곡괭이의 은혜, 비료의 은혜, 비료 공장 모든 인부들의 은혜
토양의 은혜, 태양의 은혜, 비와 바람의 은혜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공간을 향기롭게 감싸고 있는
이 모든 무한한 은혜...

우린 일상을 살아가며 작고 하찮은 일에서도
이 모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니 순간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벽 두 눈을 뜨면서부터 감사하는 연기의 실천은 시작됩니다.
아침을 깨워주는 자명종의 은혜, 침대의 은혜, 맑은 아침공기의 은혜...
새면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의 은혜, 비누, 샴푸의 은혜...
아침 공양에 올라온 이 모든 음식물의 은혜...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온 우주의 밝고 넓은 은혜...

... 너무나도 너무나도 세상엔 감사할 것들 뿐입니다.
이런 긍정명상을 통해 우린
나를 살려주고 있는 세상의 무한한 은혜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고개들어 세상을 보며 감격스런 눈물이 흐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무한한 참생명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의 나툼이심을...

그렇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는
결코 둘이 아닌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한마음 한생명이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무아(無我)이며 동시에 전체아(全體我)인 것입니다.

이런 감사한 세상을 향해,
나와 둘이 아닌 일체의 참생명을 향해,
무한한 생명력으로 나를 살려주고 있는 법계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회향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회향해야 합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회향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회향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기법을 믿는 수행자는
언제나 회향할 꺼리를 찾아 눈을 돌립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기에 회향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일체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회향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이 그저 이유라면 이유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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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성 2020.06.05 09:5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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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한바탕
신나는 연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이 연극의 주인공이고 작가이고 감독입니다.

연극의 주인공은
그 연극의 대사가 슬프다고 실제로 슬퍼하고
그 대사가 즐겁다고
실제로 즐거워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연극이라는 것은 실제상황이 아닌
비실체적인 것을 알기에
그 속에서 회사가 부도가 나든,
애인에게 버림을 받든,
직장 상사에게 비난을 받든
사람들에게 심한 욕을 듣든
아니 그 이상의 괴로움 속에서도
겉으로 드러난 괴로운 표정 연극은 할 지언정
실제 참된 주인공은 흔들려서 괴로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즐거워도
크게 즐거움에 노예가 되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연극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한 연극과 같이
비실체적인 것이기에
인생 속에서의
온갖 괴로움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괴롭다고
크게 얽매여 집착할 필요가 없으며
즐거움에도
크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 괴로움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인연에 따라 잠시 온 것뿐이며
인연이 다하면 자연히 흩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주인공은 어차피 각본을 다 짜놓고
연극을 하기에 재미가 없지만
우리네의 인생은 당장 앞에 일어날
10분 후의 일도 예감할 수 없기에 더욱 박진감이 넘칩니다.

이미 써있는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충분히
내 연극의 각본(業力)을 바꾸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전생 그 전생부터 가지고 있던
우리의 업장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업이야 어떻든
충분히 내 삶을 바꾸어 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연극인가요.
이 얼마나 박진감 넘치고 흥미 있는 연극인가요...
이렇듯 우리의 삶이 한바탕 연극인 줄
올바로 아는 사람은
인생의 크고 작은 경계에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연극에서 스스로
연극 전체(세계, 주위 환경, 사람들...)의 주인공이 되어
그 박진감 넘치는 연극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인생인가요...
이렇게 인생은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실로 인생 전체를 연극이라 관할 수 있다면
살며 느끼는 괴로움들은 크게 적어짐을 느낍니다.
다만 연극에 충실 할 뿐
그 속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내 삶을 망쳐버리지는 않게 됩니다.

어느날인가 문득
'인생은 참으로 연극과도 같구나'
하는 진한 감동이 가슴을 밀고들어왔습니다.
그리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나의 모습들...
이기적인 모습,
작은 일로 아웅다웅 하는 모습,
좀 더 성공 되고자 애쓰는 모습,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어리석은 분별들...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헛되지만 너무도 소중한 나의 모습임을...
이 모두가 내 연극 속의 주인공들임을...
주인공이 곧 엑스트라임을...
이 모두가 참으로 고운 '하나'임을 말입니다.

세상을 참으로 살아 볼 만한
괜찮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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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성 2020.06.05 09:4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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