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과 무아면 누가 깨닫나요?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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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즉문즉설

무상과 무아면 누가 깨닫나요?

목탁 소리 2010. 12. 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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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무상과 무아라고 합니다. 항상 하는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 해탈을 하는지요?

해탈을 하는 '나'도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나'에 얽매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 있을 뿐이지, 깨달은 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상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아직 자아가 남아 있고, 아상이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깨달은 자'가 없다는 것은 깨달은 자라는 육신이나 존재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자아에 갇힌 생각이 없다는 말이고, 무아와 무상을 완전히 자각한 채 고정적인 실체관념을 비워버렸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나 무아는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연기한다'는 말입니다. 즉 있기는 있는데 그게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신기루처럼 환영처럼 잠시 있는 것 처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겁니다. 바로 그러한 무아를 바로 깨닫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러니 ‘누가 있어서 열반을 하느냐?’ 하는 질문 자체가 오류를 품고 있어요. 열반을 하는 어떤 정해진 고정불변을 실체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반한 자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생겨난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은 자란 말입니다. 무아를 바로 깨달은 자란 말이지요. 그러니 무아를 깨친 자에게 '나'라는 실체적 단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나’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육근, 오온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셨습니다. 즉, 열반도 실체가 아니고, 고정된 무언가가 아닙니다. 열반을 실체시 하는 것은, 진리를 실체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도 놓아버렸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걸까요? 수행한다고 하면서 그 외의 일들에 무심해지고 주위 인연들에 소홀해졌습니다. 이 공부는 어쩔수 없이 주위와 멀어지면서 홀로 가는 것인가요?

이 마음을 관찰하는 공부는 바로 내 삶을 관찰하는 공부이고, 매 순간 순간의 삶에서 충실해 지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고 공부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깨어있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는 세상과 동떨어진 공부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공부가 아닙니다. 내 바로 앞에 나타난 사람과 말 한 마디며,(정어) 행동 하나 하나를 할 때며,(정업) 또 생각을 하나 일으킬 때 조차(정사유) 온전히 깨어있는 것이 불교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수행법인 팔정도에 정념, 정정진, 정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수행덕목은 뒤쪽에 있고, 그 앞에 먼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이 와 있는 것입니다. 삶을 바로 보아야 하고, 바르게 생각을 관해야 하고, 타인과의 대화 중에 말을 관하며, 행동을 관하고, 자신의 직업과 생계라는 생활을 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과,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가르침이지요.

불교는 매 순간 순간의 삶에서 분명히 깨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세상과의 관계를 조화롭고도 평화롭게 가꾸어가는 길입니다. 자비희사의 덕목이나, 보시, 애어, 이행, 동사라는 사섭법과 사무량심의 덕목을 보더라도 얼마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수행법들이지요.

 

저는 어릴적부터 벌레를 너무 많이 무서워합니다. 새벽 좌선 중에 갑자기 벌레를 보고 놀라 너무 무서워서 살충제를 쏘아 죽였습니다. 벌레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한 마리의 벌레가 있습니다. 그 벌레는 그저 벌레일 뿐입니다. 나무처럼, 구름처럼, 한 송이의 꽃처럼, 혹은 강아지나 예쁜 토끼처럼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것은 무분별이고, 무차별입니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애착할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곤충이나 벌레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 안의 해석, 분별, 판단, 경험 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우님께서 느끼는 그 공포나 무서움은 벌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벌레에 대해서 벌레를 보면서 내 안에서 해석하고, 생각하며, 또 느끼는 그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즉 그것은 벌레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입니다. 그것도 벌레를 보는 내 안의 '보는 문제'인 것입니다. 보는 문제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를 무섭고 보는 데서 문제가 생겨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면 그런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벌레를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내 식대로 해석하거나, 좋다 나쁘다, 무섭다 안 무섭다, 징그럽다 예쁘다 하는 그런 판단 분별의 시선에 걸러서 그 대상을 해설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벌레를 보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온갖 생각, 분별, 판단, 두려움, 무서움 등을 그저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 보십시오. 무서운 벌레는 아주 좋은 공부의 재료가 됩니다. 벌레를 지켜보면서 내 안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는지, 어떤 느낌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의 어떤 부분이 공포와 무서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만히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별없는 지켜봄을 통해서 아주 근원적인 벌레에 대한 통찰이 생겨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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