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것이라면 참회해야 할 나도 없는 것 아닌지요? 모든 것이 공하다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또 내가 없는 것이라면 무엇에 감사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업도 없는 것인지요?
만약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결정짓고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무기공에 떨어지는 거예요. 무애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참회도 안 하고, 감사도 안 하고, 악업도 마구 지으면서 업을 받을 나도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주로 그런 경우는 무아, 공, 연기, 중도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머리로만 이해해도 그렇습니다.
무아는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내가 없다'라고 하는게 아니예요. 이렇게 내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없다고 했느냐? 그건 이런 내가 없어서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이고, 다만 인연따라 변해가는 인연가합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연따라 변해가는 인연가합의 존재는 있어요. 다시말해, 악업을 많이 짓고 선업을 안 지으면 분명히 상황이 좋지 않은 곳에 나쁜 조건으로 태어나서 그 나쁜 업보를 다 받아야 합니다. 그 업보를 받더라도 아무 상관없다, 그런 정도는 넘어섰다고 한다면 그렇게 무애자재하게 살면 됩니다. 돈이 없어도 괜찮고, 그저 걸망 하나 달랑 들고 살아도 괜찮고, 심지어 전쟁의 공포 속에서 태어나도 괜찮고, 기아와 굶주림, 질병 속에 고통을 누려도 괜찮은 정도가 된다면이야 그 공부를 인정해 줍니다. 실제 깨달은 도인들은 그런 외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살곤 합니다. 그러나 아직 공부가 다 안 된 우리들 입장에서 그런 무애도인을 흉내내었다가는 큰일난다 이 말입니다.
근본법에서 본다면, 참회니 발원이니 감사니 수행이니 그 어떤 말도 붙을 것이 없어요. 삶 자체가 그냥 진리이기 때문에, 별도로 꾸며낼 일이 없고, 참회나 감사할 것이 없어요. 그냥 삶 그 자체가 아무런 티끌이나 흔적이 없단 말입니다.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를 않으니 그것을 다시 무너뜨릴 것도 없단 얘기예요. 그러나 우리는 마음 안에 티끌을 스스로 만들어 놓았으니, 스스로 만든 그 티끌, 죄업을 스스로 참회해서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면, 남이 나에게 욕을 하면 우리는 화가 나고 괴씸한 마음이 올라와요. 그런데 사실은 그건 그냥 말에 불과합니다. 그 말에 화를 낼 이유는 없어요. 그 욕도 공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누가 욕을 하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방편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온갖 티끌을 만들었으니, 내 스스로 그것을 다시 돌이켜 놓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방편이 필요한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방편도 다 공해요. 그래서 환상으로 환상의 병을 치유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이 법계의 큰 계획과 질서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 모순 아닌가요? 지금까지 제 맘대로 살아온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법계의 계획이었고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저의 삶도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아, 혼란스럽습니다.
업의 차원에서 조금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미 내가 지은 업이 있습니다. 그 업은 분명히 받아야 돼요. 그리고 남들이 지은 업도 분명히 그들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지은 업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인연, 인과, 업보의 관계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법계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존재들의 다양한 인과와 업보를 조화롭게 질서 있게 운행시킴으로써 저마다의 업에 걸맞는 응보를 저마다의 인연에 맞는 사람들과 존재를 통해 받을 건 받고 줄 것 주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계예요. 그런데 그 업은 누가 지었어요? 내가 짓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업을 지어요. 다시말해, 이미 지은 업에 대해서는 법계의 질서대로 법계의 계획에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법계의 인과적인 질서 이면에는 나의 자유의지가 바탕이 되어 있어요.
그 자유의지 속에는 복을 짓거나 수행을 하는 자유의지도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복과 지혜라는 자유의지가 모여서 나의 과거 업을 어떤 방식으로 받을 것인지를 법계는 충분히 감안하여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업을 받아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 업을 받을 때, 현재의 삶에 따라, 예를 들면 얼마나 깨어있는 삶을 현재에 살고 있느냐, 얼마나 복을 짓고 베풀며 살고 있느냐, 즉 지혜와 복덕을 순간 순간에 얼마나 꽃피우며 살았느냐에 따라 법계에서는 과거의 업들을 현재에 받기는 받되 다른 방식으로 받게 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물의 비유’입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됩니다. 나아가 그 그릇에 온갖 양념을 하고 나물을 넣어 국이나 찌게를 끓인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도리어 맛깔스런 음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과거에 악업을 지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업을 기계론적이나 결정론적으로 반드시 나쁘게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업장소멸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입니다. 업장이 받지도 않고 수행만 하면 그냥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행, 마음공부를 통해 업장을 받더라도 받지 않는 것 처럼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자유의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우주법계의 질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서로 모순되지 않아요.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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