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두려워 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무한한 자비요 사랑일 뿐이니.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이나 염라대왕도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외부의 그 어떤 존재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부처는 무한한 자비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해 지옥을 만들어 낸 분이 아니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행위들을 선악 등의 그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는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는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한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들었다. 내가 만들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엔 창조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오직 내면의 나툼일 뿐이다.
지옥도, 죄도, 두려움도 모두 내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 지옥이며, 죄와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는 있지만, 그 이면의 바탕에는 오직 무한한 자비와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선행을 하면 천상으로, 악행을 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본질에서는 선악이 없고, 천상과 지옥이 없다. 그것은 둘이 아니다. 본래부터 나누어 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별하고, 나누었을 뿐이다. 본질에는 선악을 넘어선 동체적인 자비만이 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지악수선(止惡修善)을 말하면서도, 천수경에서는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亡)이라고 했다. 방편법에서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지어야 하지만, 근본법에서는 선악이랄 것도 없고, 죄 또한 없는 것이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가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무한한 자비의 바다다. 영겁의 삶이란 그 자체로써 본질적인 자비로의 돌아감이다. 우린 누구나 근원의 자비로 돌아간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목적인 귀의(歸依)이다. 삼귀의란 불보인 자비와, 법보인 자비로 가는 가르침, 승보인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자에게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의미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속에 무한한 동체대비의 사랑을 품으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대양에서 춤을 추며 만날 것이다.
운학사 주지/목탁소리 지도법사 법상 스님
법보신문 1042호 [2010년 03월 30일 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