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영화가 나를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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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영화가 나를 죽인다

목탁 소리 2010. 6. 25. 12:47

 

하루가 다르게

TV에서는 온갖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문, 라디오, 영화, 드라마, 뉴스, 잡지 등에서

우리는 무수한 정보를 끌어당겨 흡수함으로써

그 정보들을 자기화하고 있다.

내가 접한 정보들은

그냥 흘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부분 나를 형성시킨다.

부정적인 정보를 많이 흡수했다면

그것은 내 존재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만큼 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정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부정적인 주파수와 파장을 흡수시키고,

자기화함으로써

내 존재에 부정적인 파장을 깃들게 한다.

그러면 머지않아 부정적인 파장으로 길들여진

내 안의 세포 하나 하나가

내 외부에 있는 부정적인 또 다른 정보들과

공명하고 유유상종으로 끌어당겨

내 인생은 부정적인 일들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정보와 사실들을 많이 접하게 되면

저절로 나의 삶이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이루고 일치를 이루어

점점 더 삶 속에 긍정적인 일이 일어날 확률이 커진다.

요즘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라.

그 폭력성과 잔인성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상상력이 나왔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조차 없어진다.

이제 어지간한 폭력성과 잔인성을 가지고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어렵게 되었다.

보다 획기적이고도 광적이며

무지막지하게 잔인한 장면들을 위해

작가들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맨 정신으로 저런 장면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 만큼,

정신분열과 강박과 공황으로 얼룩진

참담한 폭력과 잔인, 살인과 전쟁... 등등

이런 고심참담한 세상을 살고 있고,

이런 세상과 어쩔 수 없이 공명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뉴스는 또 어떤가?

왜 세상의 뉴스에는 ‘착한 뉴스’ ‘선행 뉴스’가

자주 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요즘을 뉴스를 보라.

폭력, 절망, 기상이변, 전쟁, 살인, 강도, 강간, 부정부패...

끊임없는 부정적인 뉴스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정말이지,

뉴스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영화를 찍고,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언론 매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본연의 사랑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런 난해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부정적인 정보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일수록

그런 세상 속에서

살짝 비켜 설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부정적인 정보에 대해,

또 부정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사람에 대해,

욕하고, 미워하며, 비판만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욕하고 비판하며 증오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를 돕는 것에 불과하다.

좋은 쪽으로 폭력성에 열광하든,

나쁜 쪽으로 폭력성을 욕하든,

그 두 가지 모두 결국 우리 안의 폭력성을 일깨운다.

결국은 그 폭력성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폭력성은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의 에너지도 먹고 살지만,

오히려 그것을 미워하는 사람의 에너지를 먹고

더 덩치를 키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우리가 거기에 붙박히고, 관심을 가지고,

중요성을 부과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에너지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연예인들은

악플을 두려워한다고 하던데,

악플이 많은 것 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플이라고 하지 않던가.

악플이라도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에너지가 붙고,

인기나 유명세가 붙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폭력성을 좋아할 필요가 없는 것 처럼

폭력적인 것을 미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폭력적인 것을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쏟는다는 것 자체가

폭력적인 것에 그만큼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이고,

우리가 좋든 나쁘든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신경을 많이 쓸 때

우리 안의 폭력성은 더욱더 비중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폭력성을 과도하게 거부하면

바로 그 거부하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다.

과도하게 좋아하지도 말고,

과도하게 미워하지도 말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폭력성, 잔혹성, 퇴폐성, 선정성, 부정성 등을 대상으로

싸우거나 열광하는 양 극단에서 벗어나

그저 살짝 옆으로 비껴 서는 것이다.

욕하지도 말고, 열광하지도 말고

그저 무관심하는 것이다.

무시하는 것이다.

그저 무심하게

그것들이 흘러가도록 잠시 비껴선 채

내버려 두는 것이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욕하거나 열광하거나,

그 어떤 판단도 내려 놓은 채

다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폭력성, 잔혹성 등에 대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관심을 두기 보다

오히려 선행, 자비, 사랑, 나눔, 평화, 명상, 영성 등의

아름다운 덕목에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아예 우리 안의 스위치를 끄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미워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할 것도 없고,

거기에 열광하면서 부정적 에너지를 키울 것도 없다.

다만 부정적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대신에 긍정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으로

마음의 초점을 바꾸는 것이다.

영화를 한 편 보더라도

아무거나 재미있다고, 유명하다고, 스케일이 크다고,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고,

그런 이유로 보지는 말라.

그 영화 한 편에서

내 안의 사랑, 자비, 나눔, 지혜, 용서,

평화, 명상, 선행, 비폭력, 아름다움, 따뜻함 등을

일깨울 수 있는지 아닌지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게 하라.

부정적인 영화, 드라마, 정보들을 많이 접할수록

우리는 바로 그 부정성을 자기화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 부정성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 나눔, 지혜, 아름다움이 깃든

영화나 드라마나 책이나 정보를 듣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삶의 진보, 성찰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며, 명상의 행위이고,

삶을 일깨우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폭력적이고 잔혹성이 깃든 영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는 대신

우리 내부의 세포와 존재 전체를 부정적 에너지로 물들일 것인가,

아니면 조금 재미는 없을지라도

사랑스러운 영화를 보면서

평화와 행복, 자비와 사랑을 키워 갈 것인가.

잠들기 직전

끔찍한 영화를 보거나,

잔혹한 뉴스 기사를 보다가 잠이 들어 보라.

잠자는 내내 꿈 속에서 악몽에 휩쓸린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형성한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거나 보고, 아무거나 듣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를 형성해 간다는 점을 잊지 말라.

부정적인 정보에 노출되는 순간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내 안의 잠재의식과 세포와 업식의 차원은

엄청난 부정적 에너지와 하나가 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라.

부정적인 정보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긍정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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