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의 동시성,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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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동시성,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목탁 소리 2010. 3. 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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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보살님께서
불법이 담겨 있는 책들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자주 읽어본다고 하시는데
때때로 신기한 것을 경험한다고 하신다.

때때로 자식 문제로 고민이 있다거나,
남편과의 다툼이 있었다거나,
혹은 사회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고민들로
답답해 하면서 답을 찾다가
우연히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볼 때,
종종 마침 바로 거기에 그렇게 궁금해 하던 답변이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 설법한 것처럼 생생하게 말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때때로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답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모처럼 켠 TV에서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하기도 하고,
우연히 펼친 신문에서
평소 같으면 그저 지나쳤을 작은 기사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가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공부하자마자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되기도 한다.

아주 쉽게는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드는 순간,
바로 그에게 전화가 오는 것 또한 이런 작은 예일 수 있다.

이것을 칼 융은 동시성(同時性)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 융이 한 여인을 치료하는데,
그 여인이 하루는 풍뎅이 꿈을 꾼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칼 융은 그것이 고대 이집트에서 환생을 상징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환자의 무의식이 심리적 재탄생을 겪을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을 때
창문 밖에 풍뎅이가 날아온 것이다.
물론 융은 그 때가 그곳에서 풍뎅이를 본 유일한 때였다.

이러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동시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질서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피트는 이러한 융의 동시성이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본다.
겉에 드러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있으며,
그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봄의 견해에 따르면 만물이 비롯되는 근원인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차원’에서 다루어진 일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우리 눈에 우연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더 깊은 차원의 법계에서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 자리에 온 것이다.
우리의 깊은 차원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정확한 인연으로 바로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 감추어진 질서라 불리우는,
우주법계의 근원적 질서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

부처님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온 우주의 더 깊은 이면에 담겨 있던 본래 완전했던 진리를
다만 발견하신 분이라고 했다.

사실, 진리는 온 우주에 충만하게 꽉 차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때때로 체험하곤 한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면 언제든 진리의 차원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뭣고’ 하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화두선의 방법 또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성립되는 수행법이다.

그래서 피트는 동시성을 자연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광대한 질서를 힐끗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믿는다.

바로 그렇다.
이 겉에 드러난 몽환포영(夢幻泡影)의 세계 이면에
완전하고 충만한 진리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만 우리의 아상과, 아집, 탐진치 삼독과 무명이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을 쉬고, 내면을 살펴 본다면
그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힐끗 엿보게 될 수 도 있을뿐더러,
그 세계와의 깊은 연결을 이룰 수도 있으리라.

삶의 본질에 이르고 싶다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마음을 비우고 질문을 던지라.

세속적인 질문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해답을 법계에서는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질문을 던지면 우주법계는 언제나 거기에 답을 할 것이다.
물론 그 답변은 꼭 현자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책이나, 신문에서,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서, TV에서나,
아니면 문득 내면에서 올라오는 직관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을 닫아 걸지 않는다면,
활짝 열린 맑은 정신 안으로 진리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스승에게 묻는 것, 부모님께 묻는 것,
친구들에게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제부터 우주법계의 진리 그 자체에 직접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떤가.

내면의 진리, 우주법계의 진리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직접적이며 본질적이다.

또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법계 본연의 계획에 입각해
무한한 자비와 지혜로써 내리는 답변이 될 것이다.

에둘러 가던 버릇을 돌이켜 내면으로,
법계로 직접 노크 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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