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7분 무득무설분 강의 -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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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7분 무득무설분 강의 -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다

목탁 소리 2009. 8. 3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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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무득무설분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無得無設分 第七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무득무설’이란 말 그대로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는 뜻으로써, 이 분에서는 본래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 무유정법의 이치를 밝혔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앞 장에서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 말씀이야말로 진리구나’ ‘이러한 법을 깨달으신 부처님처럼 나도 깨달음을 얻어야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법은 없으며, 내가 설한 바도 없고, 또한 얻은 바도 없다는 말로써 법은 어디에도 집착됨이 없음을 다시금 일깨우고 계신다.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로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한다. 그 뜻은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으로, ‘무상’이란 더 높은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고, ‘정’이란 객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치우침 없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며, ‘등’은 어느 한쪽에만 타당한 가르침이 아닌 일체 모든 존재에게 두루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야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분이시며, 부처님께서는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당연한 물음을 던지신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예 그러하옵니다.’ 가 되어야 하겠지만 수보리는 부처님 질문의 의도를 바로 깨닫고 있다.

수보리의 답변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 또한 언어적인 표현일 뿐이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없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펼치신 분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진리 그대로일 뿐이다. 진리는 항상 온 우주 법계를 골고루 비추며 항상 참빛을 수놓고 있다. 진리는 없어진 적도 없고 다시 만들어 진 적도 없으며, 아니 진리라고 이름 붙일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텅 빈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할 뿐이다. 스스로 삐뚫어진 생각과 분별로 괴로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속에 스스로 갇혀 있을 뿐이다. 괴로움도 스스로 만든 것일 뿐, 본래 괴로움이란 없다. 인간의 욕심과 집착 온갖 번뇌며 분별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여래의 눈으로 본다면 그 또한 역시 진리의 모습으로 온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여래는 전도된 망상을 깨라고 하시고, 어리석은 욕심과 집착을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며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릴 적부터 그 바윗덩이를 늘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또 남들도 그렇게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너무 무겁다. 이렇게 큰 바위를 들고 살아가기가 너무 힘에 겹다. 그래서 괴롭다고 야단이다. 어느날 바위를 이렇게 붙잡고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 한 사람이 이 사람에게 놓아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었고, 놓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으며, 남들도 다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 보니 놓을 수 없다고 고집한다. 안 놓으려고 꼭 붙잡고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놓아버리고도 아무런 일 없이, 아니 오히려 가볍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과감하게 스스로 놓아버렸다. 놓고 나면 큰 일이 날 줄 알았는데 놓고 나니 비로소 자유롭고 무거운 삶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괴로움은 없다. 그렇다면 놓으라고 한 그 말이 진리인가? 스스로 깨닫고 놓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인가? 제 스스로 들고 있으니 다만 놓으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말만을 했을 뿐이지만 그 사람은 그로인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말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실체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고정관념일 뿐이며, 욕심이고 집착일 뿐이다. 부처님은 다만 그것을 놓으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진리는 그 무엇도 붙잡고 있지 않다. 항상 빈 손이며, 텅 비어 있고, 자유롭다. 그런데 다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붙잡을 것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 내었고 거기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괴로움은 시작되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에는 붙잡고 사셨지만, 비로소 깨달았다. 붙잡고 있는 것만 놓으면 그대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은 다만 ‘집착’일 뿐이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 것’을 늘리려고 집착하고 욕심 부리고, 그래서 스스로 아상과 아집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놓아라” “그것이 너가 아니다. 놓아라”

본래 우리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있었다. 그 때는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 무거울 것이 없고, 삶이 힘들 것이 없었다. 다만 진리만이 있었고, 평화만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하나씩 하나씩 잡기 시작했다. 실체인 줄 알고 잡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집착하여 붙잡기 이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고, 고요만이 있으며,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신이고 부처였다. 아니 이런 말 조차 필요 없는 텅 빈 허공 그 자체였다. 다만 진리만이 있을 뿐, 다만 하나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나뉘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것’이라고 나누기 시작하면서 분별하고, 자신의 것을 가지려는 집착과 소유, 욕심을 일으키면서부터 이 세상은 괴로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은 온전한 진리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그 괴로움은 그 사람의 문제다.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착각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괴로움일 뿐이고, 고정된 상일 뿐이다. 스스로 붙잡아서 괴로운 것이니 스스로 놓아버리면 다시 본래자리로써 여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만 그것이다.
“잡아서 괴롭다면 놓아라”

이렇게 평범한 말이다. 이것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법이라고 할 것인가, 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것을 깨달은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것이라고 할 것인가? 물론 다 언어의 장난일 뿐이니,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여전히 우리가 만들어 낸 약속이고 비실체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 또한 놓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본래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깨달아 있는데 거기에 또다시 깨달음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붙일 것은 무엇인가. 이해를 위해 방편으로 그런 이름을 붙이기로 약속했다면 이해된 뒤에는 그 약속 또한 놓아버려야 한다. 여래가 ‘이것이 진리다’라고 고정된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멀었다. 그것조차 놓아버렸을 때 여래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계속해서 수보리는 말한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법을 취한다는 것은 법을 붙잡는다는 말이다. 붙잡아서 괴로운 사람에게 또 다른 것을 붙잡도록 이끎으로써 그 괴로움을 없애줄 것인가. 붙잡아서 괴로운 사람에게는 그저 놓을 수 있도록 ‘놓아라’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空, 無我]’ ‘네가 붙잡고 있을만한 그 어떤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떤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항상하지 않고[無常], 괴로운 것이다[苦].’라는 방편의 말로써 이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또다시 ‘진리’라는, ‘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공’ ‘삼법인’ ‘사성제’ ‘무아’ ‘무상’ 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법’이라는 상을 또다시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상일 뿐, 그것이 진리인 것은 아니다.

진리는 취할 수 없다. 아니 취함이 있었을 때 이미 그것은 진리로써의 기능을 상실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 자체일 수는 없다. 방편은 그 쓰임이 다하면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는 말할 수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교화 끝에 반열반에 드실 때 “내가 녹야원에서부터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 내 생에서 한 마디 설법도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설법을 하셨지만 그 설법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을 뿐이다. ‘함이 없이 한’ 무위의 설법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부처님은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집착을 놓으라고 하셨을 뿐이고, 욕심을 버리라고 하셨을 뿐이며, 분별을 없애도록 이끄셨을 뿐이다.
다시말해 삿된 것을 타파해 주셨을 뿐, 새롭게 진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삿된 것, 즉 욕심이며 집착, 분별들을 깨뜨리면 스스로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이념인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삿된 것을 파하면 그대로 바른 것이 드러난다. 그러니 일체 모든 삿된 것,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법상까지 다 타파하고 깨뜨릴 지언정 새롭게 ‘진리’라는 상을, ‘법’이라는 상을 내세울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놓고 살면 평화로운데, 어리석게 잡고 살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이에게 ‘놓아라’ ‘실체가 아니다’ 이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법이라고 할 것인가, 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방편에서는 법이라고 할 수도 있고, 법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진리에서는 법이라고 해도 안되고, 법이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 그저 그런 것까지를 모두 놓아버려야 할 뿐이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인과 성인, 즉 깨달은 자는 일체 모든 행위가 ‘함이 없는 행위’이고, ‘머무르지 않는 행위’이다. 함이 있는 법을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함이 없는 법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깨달은 자는 일체 집착이 없고, 번뇌가 없으며, 그러한 함이 없는 행위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업을 남기지 않고, 티끌을 남기지 않으며, 그 어떤 행위도 온전하고 순수하다. 그런 행을 무위라고 하고, 흔적을 남기며 업을 남기고 괴로움을 남기는 행위를 유위라고 한다.

쉽게 말해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집착을 하거나, 욕심이 있거나, 했다는 상이 있거나, 아상, 아집이 있다면 그는 유위를 행하는 것이지만, 집착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린 채 그 일을 했다면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차별적인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사실은 무위로써 함이 없이 한 것이다. 보시를 한다고 했을 때, 보시를 하고도 ‘내가 네게 얼마만큼 보시했다’는 상이 남아 있고, 보시한데 대한 집착이 남아 있거나, 아까운 마음 혹은 보시했으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있다면 그는 유위로써 보시를 한 것이다. 그러나 보시를 하고도 보시했다는 상이 남아 있지 않고, 보시한데 대해 그 어떤 집착이나 보상도 바라지 않으며, 아주 보시했다는 것조차 잊게 된다면 그는 무위로써 보시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리석은 중생은 무슨 일을 해도 ‘내가 했다’ 하는 상이 남고, 집착이 남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 행하지만, 일체 모든 현인과 성인은 ‘내가 했다’는 아상이 없고 집착이 없는 무위의 행을 하는 것이다. 해도 했다는 상이 없기에 무위의 행을 ‘함이 없는 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현인과 성인은 오직 무위로써 행동한다.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일체 모든 것을 한다. ‘함이 없이’ 한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다 하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교화를 하다가 열반에 드신 것 또한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어 나투시며 교화하신다. 그렇기에 여래는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무위로써 태어나기 때문이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차별심을 일으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렇듯 차별로써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유위로써가 아닌 무위로써 태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로써 차별을 두어 태어나기도 하고 늙고 병들고 죽기도 한다. 무위로써 인간들 앞에 나타나고, 무위로써 온갖 중생을 구제하며, 무위로써 살아가지만, 무위이기 때문에 나도 난 것이 아니고, 구제도 구제가 아니며, 삶도 삶이 아니고,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다. 즉 삶의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치의 집착도, 한 치의 욕심도, 한 치의 아상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어떤 흔적도, 결과도, 티끌도, 업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중생들 앞에 일체 모든 것으로 화하여 나타난다. 무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과도 하나가 되어 나툰다. 관세음보살이 33화신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 세상 삼라만상 그 어떤 곳에서도 법신불을 친견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무위의 행을 하며 무위의 법을 설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고정된 법이 없다. 고정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에도 수만가지로 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수한 중생이 있고, 무수한 근기의 중생이 있으며, 또한 그 많은 중생들의 무량한 괴로움이 있지만 여래는 무위의 행과 무위의 법을 설하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은 무량한 중생과 무량한 근기와 무량한 괴로움에 자유자재로 나투는 차별법으로 중생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바가 없이 무위의 행이라야지만 무수한 중생 앞에 차별법으로 나투는 것이 가능하며, 무량한 방편법을 행하고, 무량한 근기에 대기설법으로 응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는 무량한 차별법을 행하지만 무위로써 행한다. 함이 없이 행한다.

그렇다면 성현은 왜 차별을 일으켜 중생들 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그것은 중생구제를 향한 동체대비(同體大悲) 때문이다. 오직 성현은 중생구제를 위해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나툰다. 부처님도 깨닫고 나서 바로 반열반에 들 수 있었지만, 동체대비심 때문에 그대로 인간의 모양으로써 80세까지 교화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반열반에 드심으로써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되셨다. 아니 우주 그 자체가 되셨다. 일체 모든 것으로써 늘 나투고 계시는 것이다. 바람으로도, 구름으로도, 태양으로도, 사람으로도, 축생으로도, 사랑하는 모습으로도, 미워하는 사람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능히 나투어 주고 계신다. 능히 나투어서 일체 중생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있는 일체 모든 모양으로써 나투고 있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릴 뿐이다. 공연히 스스로 가리지만 않으면 나도 존재도 그대로가 부처이며, 모든 행위가 그대로 함이 없는 부처의 행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별 있는 모습 속에서 차별 없는 무위의 부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차별 있는 몸으로써 차별 없는 법신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무위의 행은 무엇인가. 현실을 사는 우리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무위란 앞서 말했듯이 함이 없다는 뜻이다. 함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티끌이 없으며, 아상이 소멸된 행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무위란 자연스러운 행이다.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타게 된다면 아무런 걸림이 없게 된다.

뒤에 금강경 제9분에 사향사과라는 수행의 계위가 나오는데, 그 첫 번째 수행의 계위가 수다원과로 이는 ‘흐름에 든 자’란 의미를 가진다.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깨달음인 수다원이 바로 흐름에 든 자란 뜻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흐름에 들었다는 것은 곧 이 우주의, 진리의 흐름에 완전히 내맡기고 함께 따라 흐른다는 뜻이다. 그 자연스런 흐름에 자연스럽게 들어 함께 따라 흐를 뿐, 그 자연스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 온 존재를 내맡기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진리와 하나 되며, 그 어떤 것과도 다투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은 채 진리로써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타는 것 그것이 바로 무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물처럼 사는 삶이다. 물은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저 흐름을 따라 흐를 뿐이다. 그렇기에 다툼이 없고, 괴로움이 없으며, 걸림 없이 자유롭다. 우리의 삶도 물이 그 흐름을 타고 자연스레 흐르듯, 우리 삶의 거대한 진리의 흐름에 온 존재를 내맡기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함께 따라 흐를 때, 그 어떤 다툼도, 괴로움도, 걸림도 없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는 삶 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거스르는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조작의 삶에 더 달콤함을 느끼곤 한다. 돈이 없다면 없는 대로 그 수준에 맞춰 만족하며 살면 되는데, 남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부족하다는 관념에 빠져 괴롭게 산다. 어떻게 해서든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애쓰고,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고,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자 억지스런 노력을 감행한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쓰는 것들은 모두가 인위적이며 유위적인 것들일 뿐이다.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것들은 자연스런 삶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흐를 것인데, 우리는 붙잡고자 애쓰고, 더 많이 벌고자 애쓰면서, 억지스럽고도 정의롭지 못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억지와 인위, 노력과 애씀 속에는 ‘지금 이 자리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인위적이고 억지스런 애씀을 통해 무언가를 욕구하고 갈구하며 그것을 이루고자 하지만, 그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듯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모든 것은 결국 괴로움을 불러 올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무위로써 걸림 없이, 함이 없이 사는 것이다. 무위의 삶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만족과 자족으로 이끌며,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요즘 현대 사회에 가장 큰 문제는 단연 환경의 문제요, 생태계 위기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환경 위기의 문제라는 것이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에서 기인한다. 자연을 야생의 상태 그대로, 자연스러운 자연의 상태 그대로 놓아 두면 아무런 혼란이 없고, 오염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명과 욕망에서 기인한 억지스런 유위의 노력이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운행을 막고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시키고 파괴시켜 왔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자연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유위적인 조작을 가함으로 생겨난 위기다. 요즘 같은 환경 위기의 시대야말로 무위법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현실 속에서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행은 우리들 개개인의 괴로움을 풀어줄 뿐 아니라, 현대 환경의 위기, 지구의 위기를 구해낼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실천 수행의 방법일 수 있다.

얼핏 보면 무위와 차별이라는 두 단어가 전혀 서로 다른 것 같이 느껴지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중도의 실천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우리들의 수행에 균형이 생겨날 것이다. 불교를 단순히 허무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무위법에만 치우쳐 바라보기 때문이다. 무위라고 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실천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고, 그저 바보처럼 멍 하니 살라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위법은 그렇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사회 생활도 하고, 경제 생활도 하며, 역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삶을 살라는 차별의 가르침이다. 즉, 차별이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일으키는 모든 말과 행동과 마음을 가리킨다. 세상을 살면서 행동하고 말하며 마음을 쓰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듯 차별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인과 성인의 차별은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무위법으로써의 차별인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중생이든 현성이든 모두 차별을 일으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똑같이 밥 먹고, 잠 자고, 일 하고, 삶을 살아 나간다. 그러나 중생은 유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지만, 현성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의 중도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별을 행하지만 그 차별에 집착하지 않는 무위를 행하고, 무위를 행하지만 무위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차별을 다시 행하는 것이다. 뒤에 10분 장엄정토분에 나올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도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라. 차별심을 일으켜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 나가라.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는 말라. 나만 잘 살자고 아상과 아집을 일으켜 거기에 집착하지는 말라.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함이 없이 돈을 벌고, 사랑을 하되 사랑에 집착함이 없는 사랑을 하라. 그것이 바로 무위로써 차별을 일으키는 함이 없는 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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