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 기타의 행동명상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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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바가바드 기타의 행동명상

목탁 소리 2009. 8. 24. 06:44




[사진 : 해인사]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교 경전이면서도
그 사상이 너무나도 불교에 가깝다 보니
학자들 중에는 기타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엮어진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제가 읽어 보니
몇몇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많이 닮아있고
그 깊이나 가르침의 내용이 아주 감동적이어서
왜 간디가 이것을 자신의 영적인 지침서라고 했는지,
또 왜 라마크리슈난, 비베카난다, 타고르 등
수많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는지를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특히 바가바드 기타는
이전의 힌두교 경전인 베다나 우파니샤드 같은 것들이
하층 천민들이 들을 수 없었거나,
하층 천민들의 해탈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 너무 전문적인 비젼이라 일반인들에게 동떨어져 있었는데 반해
하층민들의 해탈 가능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언제나 서민의 삶 속에서 함께 지속되어 왔고
모든 지역,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래서 다양한 인도를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인 격이라고 합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다가
카르마 요가라는 장에 시선이 머뭅니다.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라.
행함은 행하지 않음 보다 낫다.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하라.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르기 때문이다.

자나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완전에 이른 것도
행함에 의해서 된 것이다.
너도 이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때때로 공사상과 무아, 방하착, 무집착, 무소유의 사상에 빠져
허무주의로 빠진다거나,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빈둥거린다거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해 내지도 못하면서
무위를 즐기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무위의 행을 위해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는다거나,
자연 속에서 소요하면서
제 의식주 조차 해결하지 못하거나,
어떤 인위적인 일과 직업을 가지는 것을
심지어 수행자답지 못한 것으로 오인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 공, 방하착, 무집착은
행함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보듯이
다만 집착이 깃든 행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위 기타의 게송은
그것을 좀 더 쉽게 풀어 주고 있습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카르마 요가'라고 하여
행동의 수행, 행동명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수행이나 명상은
행함을 놓아버리고,
좌선을 함으로써 몸을 움직이지 않고
비우고 그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카르마 요가에서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머무름 없는 행동의 수행' '집착 없는 행위'야말로
중요한 삶 속의 수행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행함은 행하지 않음보다 낫다.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라...

내 삶에 주어진 일을 분명하게 해 내는 것이야말로
진리로 나툰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온전하게 해 내는 일일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내 명함을 가지고,
내 일과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해 나가는 것은
수행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빨리 이 일을 해 놓고, 돈도 벌어 놓고,
훗날 퇴직하면 그 때라도 수행자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참된 수행은 삶 속에 있고,
행동 속에 있으며,
내 일과 속에 녹아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일과 직업을 마땅히 행하되,
다만 집착을 떠나서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생활 속 수행이요, 카르마 요가인 것입니다.
기타에서는 이를 두고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행하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몫을 해 냄으로써
나라는 부처에게, 나라는 진리에게 주어진 다르마를
이번 생에 완성하고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타에서는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 삼계 속에서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또 얻지 못해서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렇더라도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이 세상에서 내가 반드시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즉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것은 없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며,
가져도 되고 안 가져도 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언제나 원만구족이며,
나 또한 언제나 원만구족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부처였다는 가르침만을 듣고
아무런 수행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빈둥거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본 뜻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행해야 합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반복하여 염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복하여 독송해야 하고,
끊임없이 나를 낮추어 절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명함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온전히 해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그 일을 행하되 진리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일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에 얽매임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을 내되 머뭄이 없어야 하고,
일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타에서는 말합니다.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고,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혜 없는 자는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만,
지혜 있는 자는 마땅히 집착함이 없이
우주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와 같이 일해야 한다."

지혜 있는 자가 행하는 행은
집착이 없으며,
그러한 무집착의 모든 행은
우주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카르마 요가의 장에
다음의 게송도 눈에 띕니다.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 하는 것보다 낫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리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 뿐이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나답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우주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가장 진리다운 몫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버리고,
끊임없이 남들의 몫을 부러워하거나,
남들의 의무를 좇기만 한다면
우리는 나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외모, 나의 능력, 나의 직업, 나의 특기,
그리고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바로 그것,
다른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조건을 부러워하지 않고,
지금의 나 자신으로써 나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행자답게 살아가는 카르마 요가의 길이요
명상 수행자의 길입니다.

남들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의 직업과 연봉과 능력을 보면서
나 자신을 질책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나로써 할 진리의 몫이 있습니다.
농부의 길도, 청소부의 길도, 수행자의 길도,
파출부의 길도, 사원의 길도, 사장의 길도,
그 모든 길들이
이 우주가 우리에게 맡긴,
법신 부처님께서 간절하게 우리에게 맡긴
온전한 진리의 몫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집착없이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이고
행동명상이며 카르마 요가의 길인 것입니다.


No. 1
2008-01-25 
13:55:33 

우병근 
바가바드 기타는
본래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제6권에 해당하는 일부분이지만, 내용상 워낙 핵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독립된 경전으로 취급하여 읽혀집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현대인도 힌두교와 요가 계통 수행체제에서는 "요가 수트라" "우파니샤드"와 함께 독립경전으로 대접받고 있고, 명상수행자들에게 꼭 읽어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현대의 인도 힌두교 3대 경전 중의 하나이며, 서민 대중들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인기 있는 힌두교 계시서입니다. 인도 고대 경전들이 다 그렇지만 이 경전도 기원전 5-10세기 에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불교 창시 이전에 이미 대중들에게 널리 유포된 인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경전이다. 마하트마 간디도 이 경전을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죽을 때까지 품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명상수행 방법과 깨달음에 대한 개념, 수행자의 자세 등에 참고할 만한 구절이 많습니다. 현대화된 명상체계에서도 바가바드 기타는 여전히 좋은 지침서가 된다고 생각하여 윗글 법상스님께서 인용하여 법문하신 바가바드 기타 카르마 요가 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봅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700구절로 된 노래집입니다.
이 글 제목의 의미는 "거룩한 분의 노래" 또는 "신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아루즈나 라는 몰락한 판두 왕국의 다섯 왕자 가운데 세 째 왕자와 전차 몰이꾼인 크리슈나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이 아루주나가 자기의 사촌인 왕과 전쟁을 벌이는 극한 상황에서 아루주나 왕자의 전차 몰이꾼인 크리슈나가 가르침을 펼치는 장면입니다.

전차 몰이꾼인 크리슈나는 바로 신의 화신이며, 아루주나의 전차 몰이꾼으로 가장하여 아루주나 왕자에게 깨달음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아루주나가 사촌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갑자기 삶과 죽음에 대한 회의에 빠진 채,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에 고민하면서 전차 몰이꾼으로 변장한 신 크리슈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가?
죽은 다음에도 영혼은 존재하는가?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깊은 근원적인 실체가 존재하는가?

크리슈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 줄뿐만 아니라, 자기구원과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들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어떻게 보면 "우파니샤드"와 "요가 수트라" 등 인도의 명상에 대한 고대경전의 중요한 핵심 에센스만 뽑아 놓은 다이제스트 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 수행자들은 바가바드 기타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고 다니며, 잘 때에도 꼭 머리맡에 놓아두고, 심지어 죽을 때에도 무덤에 까지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이 바가바드 기타를 읽기 전에 특별한 자세가 필요한데, 보통 일반 책을 읽는 자세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신이 이글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읽어 보기 바랍니다.

즉, 가르침을 받는 아루즈나의 입장이 아니라, 크리슈나의 깨달은 사람 입장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상태가 자신의 상태라고 확신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좀 거북하겠지만 자신이 가르침의 선생인 크리슈나 입장이 되어 크리슈나가 말하는 모든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글 전체를 읽고 나면 아마도 지금과 다른 자세와 관점을 가질 수가 있겠지요. 크리슈나의 애기가 바로 읽는 분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고, 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크리슈나의 얘기를 제3자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읽는 사람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얘기한다는 상황으로 바꾸어 읽어 보십시오.

당신이 바로 크리슈나입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수행방법입니다.
바가바드기타는 각본이고, 크리슈나라는 주인공이 바로 읽고 있는 당신 자신입니다.


///// 카르마 요가 ( 행위의 길 ) -1 /////

1.
"크리슈나여,
당신 말씀처럼 더 이상 미혹되지 않는
초월적인 지혜가 행위보다 중요하다면
어째서 저에게 이런 끔찍한 전쟁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2.
당신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가장 높은 선(선)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한가지로 결정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3.
"내가 예전부터 말했듯이 영혼의 순수함에 이르는 길은 둘이 있다.

영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즈나나 요가(지혜의 길)와
이기적인 욕망이 없는 행위를 추구하는 카르마 요가(행위의 길)가 그것이다.

4.
단순히 행위를 포기한다고 해서 영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다.
행위를 포기하고서는 그 누구도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5.
단 한순간이라도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본성인 타고난 기운에 따라
끊임없이 행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6.
마음은 끊임없이 감각의 대상을 쫒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자세를 제어하고 앉아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수행자가 아니다.

7.
하지만 마음으로 감각기관을 통제하면서
감각기관의 활동을
이기적인 욕망이 없는 행위에 쓰는 사람은 진실로 뛰어 난 사람이다.

8.
아르주나여,
그러므로 그대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행위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휠 씬 더 낫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대의 육신조차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9.
신께 바치는 제사 외의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욕망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

그대는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이기적인 욕망이 없는 행위를 하도록 하라.

모든 행위를 신께 제물을 바치듯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고 행하라.

10.
사람과, 이기적인 욕망 없이 행하는 행위인 제사는 함께 창조되었다.

창조주 프라자 파티는 사람과 제사를 함께 만들면서
'너는 너의 모든 행위를
이기적인 욕망 없이 행하는 제사가 되게 함으로써
번성하고 모든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11.
모든 것을 신으로 보고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말고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라.
그러면 신들도 그대를 사랑으로 보살펴 줄 것이며,
이런 봉사와 사랑을 통해 그대는 가장 높은 선(善)에 도달할 것이다.

12.
신들은 그대의 순수한 사랑과 섬김을 기뻐하며
그대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신께 제물을 바치지 않고
신이 주는 선물만을 받아 즐기려는 사람은 도둑이다.

13.
자기가 먹는 음식도
신께 제물을 바치는 심정으로 먹는 사람은
죄악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자신의 혀와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사람은
음식이 아니라 죄악을 먹는 것이다.

14.
모든 사람이 음식을 먹고 생명을 유지한다.
그런데 음식이 되는 곡식은 비를 먹고 자라며,
비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내린다.

비가 내리고 곡식이 영그는 것 자체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위인 제사이다.

따라서 사람이 먹는 음식은
모두 대가를 바라지 않고 바치는 제물인 것이다.

15.
아르주나여,
욕망 없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영원하고 무한한 브라흐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모든 제사행위 속에 현존하고 있으며,
만물은 브라흐만 안에 있다.

16.
이런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다른 사람은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쫒는 사람의 삶은 늘 공허하다.

17.
하지만 참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참자아 속에서 늘 만족을 누린다.

그는 기쁨과 성취의 원천이
곧 자신의 참자아 임을 알기 때문에
외적인 대상을 통해 행복을 누리겠다며 헤매지 않는다.

18.
그는 어떤 행동을 통해서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바라지도 않는다.

19.
그러므로 언제나 결과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그대가 해야 될 행위를 하라.
그대는 집착 없는 행위에 헌신함으로써
깨달음과 평화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20.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라.
어진 임금이었던 자나카 왕은
이런 행위를 통해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다른 성자들도 이 길을 따름으로써 완전함에 이르렀다.

21.
훌륭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따르려고 애쓴다.
그가 보인 모범을 온 세상에 따르는 것이다.

22.
아루주나여,
나는 이 세상에서 꼭 해야 할일도 꼭 얻어야 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23.
만약 내가 행동을 멈춘다면
사람들은 나를 본받아서 행동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일하기를 멈추면 온 세상이 혼란해 질 것이고,
결국에는 세상과 사람이 모두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카르마 요가 (행위의 길) -2

25.
아르주나여,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며 행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의 행복을 위해 행위한다.

26.
무지한 사람에게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살지 말라고 꾸짖으면
그들의 마음은 혼란해 진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깨달은 사람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함으로써
무지한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27.
모든 행위는 타고난 본성적인 기운(구나)의 흐름에 의해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에고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가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28.
하지만 본성적인 기운과
그 기운의 흐름에 따라 행위가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위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기운의 상호작용에 의해
저절로 행위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9.
모든 행위가
세 가지 기운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한다.
깨달은 사람은 그런 무지한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면 안 된다.

30.
그대는 참자아에 몰입하여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말고 행위 하라.
모든 행위가 나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는 생각으로 행위 하라.
자- 나가서 싸워라- 그대의 욕망을 버리고 싸워라.

31.
내가 가르치는 이 신성한 법칙을 진리라고 확신하고
불평 없이 따르는 사람은 카르마(業)의 굴레로 부터 벗어난다.

32.
그러나 의심하고 불평하면서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이며,
그들은 스스로 고통을 불러들이는 가련한 자들이다.


카르마 요가 (행위의 길)-3

33.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위 한다.
본성의 힘에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34.
감각기관은 어떤 대상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감각기관에 남겨 놓고
그대는 그 좋고 싫은 느낌에 이끌려 다니지 않도록 하라.

이원적인 분별심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35.
본성에 거슬려 억지로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보다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다 죽는 편이 더 낫다.

죽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 공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의 일을 팽개치고 남이 하는 일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흉내 내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늘 억압을 받으며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만다."

36.
"크리슈나여!
그러면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그 힘은 대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을 행하도록 만드는 힘이 대체 무엇인가요?"

37.
" 본성의 세 기운 중에서
활동적인 기운인 라자스 구나에서 나오는 욕망과 분노의 에너지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다.

그대는 이 욕망과 분노가 악이며,
이것이 그대에게 위험한 적임을 알아야 한다.

38.
아루주나여,
불이 연기에 싸여 있고 거울이 먼지에 덮여 있듯이,
또 뱃속의 아이가 막으로 덮여 있듯이
참된 지혜는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에 가려져 있다.

39.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이 욕망의 불길이
예로부터 지혜로운 자들의 가장 무서운 적이었느니라.

40.
이기적인 욕망은
감각기관과 마음과 지성 속에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
참다운 지혜를 덮어 어둡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상에 빠진다.

41.
그러므로 아르주나여,
그대는 그대의 감각기관을 제어함으로써,
지혜와 분별력을 어둡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대의 적을 쳐부수라.
힘을 다해 싸우라.

42.
물질적인 육체보다 감각기관이 우월하며,
감각기관보다 마음이 더 우월하다.
그리고 마음보다 지성이 더 우월하며,
지성 위에는 참자아 아트만이 있다.

43.
그러므로 지고한 아트만을 깨닫고,
아트만이 그대의 에고를 정복하게 하라.

억센 팔을 휘둘러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무서운 적을 가차 없이 쳐부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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