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찬'에서는 첫 구절에서 大道常在目前(대도상재목전)이라고 설합니다.
큰 도는 눈앞에 있다는 것이지요.
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습니다. 목전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도, 깨달음, 부처, 마음, 열반, 해탈, 견성, 자성, 불성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이것을 설하지만, 이것은 나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은 불이법이며, 불이중도입니다. 즉,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찌 다른 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법, 도를 찾아 바깥으로 찾아나설 수 있겠습니까?
찾고 있는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눈앞에 있다는 말도 맞지 않아요.
그만큼 둘이 아니고, 가까이 있다는 말을 목전(目前)의 당처(當處:이곳, 이 자리)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입니다.
이것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는다면, 그것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꼴이고, 눈을 가지고 눈을 찾는 것입니다.
찾고 있는 대상은 놔두고, 먼저 찾고 있는 그놈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십시오.
명백하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도를 찾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지요.
찾을 도는 중요하지 않아요.
찾고 있는 그 놈이 누구입니까?
무엇이 도를 찾고 있지요?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렇게 도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로 그 찾는 놈이 찾을 것입니다.
찾아야 할 객관 대상이 따로 있고, 찾는 놈이라는 주관이 따로 있다면, 주객이 둘로 나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둘이 아닌 불이법만이 참된 법입니다.
찾는 놈이 있다는 사실이 곧 찾고 있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도를 찾고, 깨달음을 찾는 당신이 곧 깨달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찾는 '이것'이 찾는 '그것'입니다.
이렇게 작용하는 순간 그것은 명백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모양으로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중생의 습은 모양만을 볼 줄 알다보니, 모양으로만 찾으려고 해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본다는 사실이 눈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로 눈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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