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현존의 기쁨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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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지금 이 순간, 현존의 기쁨

목탁 소리 2008. 8. 21. 22:37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포근해 졌다. 그리고 벌써 이렇게 들녘엔 새봄을 맞이하는 꽃들이며 봄나물이 한창이다. 이렇게 세월은 하루가 다르게 흘러가는데 내 속 뜰의 공부는 얼마만큼 그 흐름에 부응하며 보내왔는지, 하루 이틀, 일분일초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너무 쉽게 소모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날이 갈수록 단순한 아쉬움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뻐근한 가슴앓이로 다가온다.

  이 소중한 기회 이 소중한 순간을 놓쳐버리면 다음 순간이란 그다지 소중하지 못하다. 이 순간, 내게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에 가장 소중한 때다. 백일 천일 공부할 것도 없고, 전생이나 다음 생을 논할 것도 없으며, 과거나 미래를 논할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그렇게 찾던 '바로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할 것.

  우리는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란다. 돈을 벌기 바라고, 지위가 오르길 바라고, 성공하기 바라며 계속해서 무엇인가 이루길 바란다. 그러나 바라는 순간 그 마음은 '지금 여기'에 없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자꾸 어디로 가려고 애를 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린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주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그 일을 하는 순간 온전히 거기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작은 일이 내 삶의 완전한 목적임을 알아야 한다. 작은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집중하며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때, 수많은 어려운 일, 큰일들 또한 쉽게 이루어 낼 수 있는 선적인 수행의 힘이 생긴다.

 



  내 밥 먹는 사소한 일상을 돌이켜 본다. 매일 같이 하루 세 번을 나누어 공양供養을 하면서도 공양을 위한 공양을 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 싶다. 밥을 먹으면서 늘 다른 것을 계획하고,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거나 무언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고 밥 먹는 것은 소홀한 뒷전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밥 먹을 때 온전히 밥만 먹지를 못했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임을 늘 그렇게 놓치고 산다.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순간이 온전한 ‘지금 여기’의 순간이자 내 생의 전부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몸은 밥상 앞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무언가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곤 하는 것을 본다.

  밥을 먹는 순간, 일을 하는 순간, 운전하는 순간, 걷는 순간, 대화하는 순간, 그 어떤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은 온전히 거기에 있어야 한다. 매 순간 도착해 있어야 한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갈 필요는 없다. 우린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임을 알면 된다. 그랬을 때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고,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명상이며 깨어있음이 된다.


  사람 성격은 운전대를 잡아 봐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맞는 말 같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도 운전대를 잡으면 갑자기 급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스님도 평소에는 정말이지 그렇게 여유가 있고 차분한데,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그냥 폭주족 저리가라 하고 질주를 한다. 물론 내 경우도 비슷하다. 가만 보면 운전대를 잡을 때 참 공부가 많이 된다. 마음이 얼마나 바쁜가, 마음에 얼마나 일이 많은가가 평소에는 숨겨져 있다가 운전대만 잡으면 고스란히 드러나 스스로에게 들키고 만다. 그래서 더욱 내면의 뜰을 잘 지켜볼 수 있을 때가 운전을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운전을 할 때도 운전이 어디까지 도착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만 운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도착하기 위해 운전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도착지라는 목적에 가 있기 때문에 운전하는 순간순간에는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마음은 목적지에 가 있는데 몸은 도중에 있으니 얼마나 조급한가. 운전하고 가는 순간순간 그대로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운전하는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놓쳐선 안 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 알아차리게 되면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온전히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운전을 위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걸어서 어떤 목적지에 가려고 할 때 우리 마음은 걷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도착하는 데만 마음이 가 있다. 빨리 도착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 때 길을 걷는 일은 시원찮은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걷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빨리 도착하려는 조급한 마음도 비워지고 오직 걷는 그 자체로써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진 그 어떤 일이라도 모두가 마찬가지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그 순간순간이 그대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마음은 분열을 멈추고, 내적인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 마음이 즉한 순간 깨어있으면 그 순간 우리는 온 우주와 하나가 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왔지만 사실 우리가 산 세상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요,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그 순간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을 돌아보자.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는 이 마음을.

  우리 삶이란 것이 그렇게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남들을 더 많이 재끼면서 달려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지 한 시도 멈추고 비우며 자족하는 도착의 삶, 순간의 삶을 산 적이 없지 않은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모든 욕망과 집착에 얽매인 마음, 결과와 목적을 향해 치닫는 마음에 제동을 걸어 보자. 그 목적지를 향한 삶의 속도를 멈추는 순간, 이미 행복의 정원에 도착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빨리 달릴수록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멈출수록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자동차가 생겨나고, 기차며 비행기가 나날이 빨라지고 있지만 우리 삶의 속도는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빨리 도착하도록 해 주는 운송수단이 생겨나면 빨리 도착한 만큼 더 많은 휴식과 여유가 생겨야 하는데 반대로 우리의 삶은 더 빨라지고 정신이 없어지며, 목적지는 더 멀게만 느껴진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세상이 부유해졌고 편리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낀다. 세상의 부유함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세상 사람들의 부유함에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내달려도 힘겨울 판이다. 그러니 어찌 멈출 수 있는가. 죽을 때 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어찌 마음을 비우고 ‘지금 여기’라는 순간에 멈춰 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달려서 결국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뿐이다. 그렇게 달려가는 목적지가 성공에 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 그 속도감은 우리에게 죽음이란 목적지에 더 빨리 다다르게 할 뿐이다. 우리의 속도전은 죽음 앞에서 겨우 멈춰 서게 될 것이다. 삶에 대한 한없는 후회와 함께. 죽음의 목적지에서 모든 사람은 지난 삶을 되돌아 볼 것이다. 왜 매 순간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느끼며 즐기며 살지 못하고 이 순간만을 향해 달려왔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왜 그 때에 가서야 깨달아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멈추기만 한다면 행복과 평화, 고요함과 깨어있음이라는 참된 목적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존現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수행이며 명상, 기도란 것도 사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과 명상의 궁극도 깨달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멈춰 서는 깨어있음에 있다. 그러니 참선·염불·독경·진언·절 등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려고 해선 안 된다. 참선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이미 본래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선수행을 하기 위해 선방에 가는 순간도 그것이 절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로 가는 그 걸음 걸음의 순간 또한 그대로 본래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아닌 바로 깨닫는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절에 가는 순간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그대로 경행수행이 된다. 그랬을 때 절에 가는 과정도 참선이며, 절에 가서 앉아 있는 것도 참선이다.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경전을 꺼내어들고 방석을 펴는 순간 매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깨어있으면 수행과 생활이 따로 없고, 과정과 목적이 따로 나뉘지 않는다. 주말에 있을 참선모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무엇하러 그 긴 시간을 기다리느라 소모해야 하는가. 기다림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 도착했을 때 모든 순간이 온전한 참선의 순간이 된다. 수행을 위한 준비는 필요 없다. 바로 그것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수행의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명상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수행이라는 '마음' 닦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부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말은 방편일 뿐이다. 중생이나 마음이나 부처가 그대로 하나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며, 중생이 그대로 부처다. 그랬을 때 우리 삶의 그 어떤 순간도 우리를 괴롭게 만들지 못한다. 모든 순간이 다 온전한 순간이고,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깨달음의 순간이라면 온전한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내 삶을 돌이켜 보라. 내 삶의 속도를 느껴보라. 시간이란 것이 다 우리가 만들어 낸 조잡한 관념에 불과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 속에 내가 온전히 살고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순간을 살면 시간은 없다.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는데 시간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매 순간 도착해 있으며, 매 순간 현존의 깨어있음이 빛을 피워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잡는 것은 ‘그 순간’만을 잡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잡는 것이다. 이 새로운 순간. 이 소중한 시간 시간을 결코 소홀히 흘려보내지 말자.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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