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목탁소리 대중법회 안내
공지를 공유 합니다 
 
10월 4일 #법상스님
불이사 #정기법회 안내 드립니다.

10월 첫번째 일요일
경기도 포천 불이사에서
13시~14시
14:20 ~ 15:20
2시간에 걸쳐
법상스님 #신심명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법회 참석시
법당이 부대내에 있는 관계로
출입 보안 신청을 받습니다. 
 
이전 법회 때
이미 법회 참석하신다고
보안 승인 받으신 법우님께서는
이번에도 성함만 저에게
문자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법회 참석 희망 하시는 법우님들은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참석할지 말지
망설이거나 불확실할 때는
일단 신청을 해주세요~~
신청 해주셨다가
불참하셔도되지만
신청 안 하셨다가
갑자기 전날 오신다고 하면
출입조치가 어려워요~~ 
 
♡♡♡♡♡ 
 
10월 4일 불이사
#목탁소리정기법회
참석신청 안내
(법회시간13시시작~)  
 
1.9월 30일 까지 참석신청  
 
2.기존 참석하셨던 법우님은
법명 .아이디.이름만
문자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3.처음 참석하시는 법우님들은  
 
-  법명 .아이디.이름.
-  주민등록 번호 앞6자리(생년월일)
-  주소
-  핸드폰 번호
-  차량으로 출입시 차종 과 자동차 번호 등을 작성 하시어  
 
 010-9007-7897 로 문자로 넣어주시면 됩니다.(9월 1일까지)  
 
꼭 문자로 넣어주세요 ^^
카톡이나 이메일 접수는 어려워요 
 
*  기타 교통이나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통화 보다는 문자를 이용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주간에는 회사 업무를 보느라
전화를 못받기에 문자로 부탁을 드립니다. 
 
법상 스님과 함께 하는
불이사 정기 법회에
많은 참여를 바라며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문자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碧松 _()_

Posted by 법상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삶이 안전하고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안정적인 분명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생기를 잃고 말 것인가.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면
거기에 나만의 자유의지를 펼칠 공간이 없다.

사실 우리의 삶의 미래며 노후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 분명하고 알찬 미래며 노후준비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일이다.

우리는 그 불확실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나를 얹어 놓은 채
다만 따라 흐를 수 있을 뿐이다.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라.
그랬을 때 삶은 아름답다.
아니 사실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삶의 곳곳에 내재된 위험과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삶은 경이롭고 찬연히 빛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도전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피폐하고 나약해지고 말 것인가.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될 수도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기로우며 아름다운가.
혼란스런 삶도 깊이 바라보면 눈부시게 빛난다.

물론 불확실하고 정해진 바가 없다면 불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안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은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눈물겹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그 눈물겨운 아픔들을 헤쳐나가는 삶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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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늙어가는 것,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있는 존재에게 있어 얼마나 큰 괴로움인가.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늙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고, 불노장생의 꿈을 꾸어 왔지만 인류 역사상 단 한 사람도 늙음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들의 늙지 않기 위한 염원을 반영하듯, 세상에서는 온갖 의학과 과학적 지식을 총 동원하여 늙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고 온갖 노화방지 약품과 물질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나아가 젊어지기 위한 온갖 종류의 성형수술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늙지 않으려는, 늙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피나는 노력이겠지만 그 모든 노력은 삼법인이라는 진리 앞에서 허망한 짓이 되고 만다. 누구나 늙을 수밖에 없고, 나이 들어 갈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여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어떤 사람에게도 젊음은 고정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무아의 이치이다.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노고(老苦)다.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노망이다.

 

삼법인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자는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늙어간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진리다운 여법한 삶의 모습이다.

 

사실 늙어가는 것, 썩어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늙고 썩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사람은 늙어가고, 물질은 썩어가고 부식되고 부패되어 감으로써 이 세상은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우리들 또한 새로운 삶의 준비를 위해 다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요즘의 시대는 늙은 사람이 이 사회에 온전히 설 수 없는 처량한 시대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나이 든 어른이 있어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지혜가 부족할 때에는 항상 어르신의 삶의 지혜를 배우며 살아갔다. 나이가 들더라도 죽기 전날까지 온 몸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고, 내 스스로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갔다.

 

계절의 운행에 맞춰 농사짓고, 지혜를 키워가며,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산 어르신들은 수행자의 그것처럼이나 지혜가 밝고 총기어린 그 마을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인생의 이치를 받아들이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의 모습 속에 늙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노망스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시골을 버리고 죄다 도시로 떠나면서 도시 노인들을 갈 곳도 잃고 일터도 잃었다. 경제발전과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노인층은 두터워졌고, 각종의 노인문제, 노령화 문제를 안게 되었다.

 

도시의 어른들은 경제적 고충과 고독감, 무력감, 병고 등으로 인해 더욱 괴로워지고 개인주의적이고 서구적인 문화가 도입되면서 노인 공경과 봉양의 윤리적 가치는 사라졌으며, 핵가족화로 인한 가족의 분화는 독거노인을 끊임없이 양산해 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더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어리석은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 늙는 괴로움을 더욱 더 아프고 괴로운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어차피 우린 누구나 늙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이 세상의 진리는 무상과 무아라는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은 늙어가는 것을, 변해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완전히 수용하는 것이다.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라. 늙어감을 수용하고 나이듦의 지긋한 향기를 즐기라.

Posted by 법상

 

 

 

나는 늘 네 가지 삶을 꿈꾸고 산다. 내가 원을 세우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삶, 그것은 바로 '깨어있는 삶' '조화로운 삶' '소박한 삶' 그리고 '나누는 삶'이다. 난 이 네 가지 삶이 내 안에 깊이 파도쳐 들어 와 세포가 되고 골수가 되며 우뚝 선 정신이 되기를 늘 서원하고 있다.

먼저 '깨어있는 삶'이란, 불교 수행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지관止觀과 정혜定慧, 즉 마음을 비우고 알아차리는, 집착을 버리고 비추어 보는 두 가지 수행을 말한다. 깨어있으려면 마음에 번뇌와 집착, 욕심과 바람을 먼저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마음의 온갖 번뇌를 비우고자 한다면 있는 그대로 잘 지켜보면 된다. 번뇌며 욕심, 집착이며 바램들을 있는 그대로 잘 지켜보면 애써 비우고 없애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깨어있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매 순간 깨어있으면 그 자리에서 자족自足과 평화를 얻게 되며 나아가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 조금 쉽게 말해 깨어있는 삶이란, 거창한 수행이 아니라, 매 순간 생각과 망상 분별 속에만 사로잡혀 있는 그대로의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생각 속에 허상으로 지어진 가짜 인생을 살던 것을 돌이켜 있는 그대로의 존재감을 느껴보는 것 즉 ‘본래적인 천연의 있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생각과 망상도 내려놓고 그저 이렇게 이대로 있는 그대로 있어주는 것이다.

두 번째 내가 꿈꾸는 삶은 바로 '조화로운 삶'이다. 대자연과의 공존과 공생, 생명 있고 없는 모든 것들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 즉 대자연이라는 비로자나 진법신眞法身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이다. 산과 들, 나무와 들풀, 계곡과 숲, 그리고 모든 짐승과 곤충들을 비롯한 모든 대자연 식구들과 둘로 나뉘지 않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삶이다. 대자연에 마음을 두게 되면 욕망과 이기는 저절로 소멸된다.

세 번째는 '소박한 삶'이다. 이것은 청빈, 가난, 자족, 절약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스스로 만족하며, 절제와 절약을 지키며, 최소한의 필요에 따른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정신을 가장 고귀하게 일깨워주며 속 뜰의 본래 향기를 환히 밝혀주는 삶의 본보기다. 요즘같이 청빈의 정신이 고갈되어 있는 이 때에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야말로 가장 소중한 덕목이다.

네 번째는 '나누는 삶'이다. 스스로 아무리 행복하고 만족한들 이웃의 불행과 가난, 기아와 질병 등을 외면하고 방치한다면 그것은 진정 건강한 부유함도, 참된 행복도 아니다. 내가 행복하게 밥을 먹고 공부하고 있는 이 순간도 이 세상 다른 곳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가난과 기아에 헐벗어 굶주리고 죽어가고 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한들 그것이 세상으로 회향回向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지혜가 아니다. 참된 지혜는 이 세상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기에 내 것과 네 것이라는 차별이 없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정신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동체에서 나오는 대자대비의 정신이야말로 나 자신과 이웃, 이 온 세계를 밝히는 지혜와 자비의 근본정신이자 실천행이다.

이상의 네 가지 삶의 모습, 나는 이 말만 들어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설렌다. 물론 아직 그런 삶과 일치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내 삶에 지침이 되는 이 길이 있기에 늘 행복하다. 이따금 이 네 가지 삶의 모습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며 내 삶이 올바로 가고 있는가 스스로 점검하곤 한다. 때때로 삶의 발길을 멈추고 자신을 점검해 보자. 나는 과연 얼마나 깨어있는, 조화로운, 소박한,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가.

Posted by 법상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의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 것이지요.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 할지 본인도 모르면서 어쨌든 변화를 꿈꾸고, 야심차게 변화하리라 마음먹곤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변화하지 않는 자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경고가 아닙니까. 세상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렇게 휙휙 변화해 가는 세상에서 나만 변하지 않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답답함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떻게 되든, 일단 변하고 봐야 한다는 변화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잠시 돌이켜 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의 진실은 제행무상에 있습니다. 도장을 찍어주듯이 확실한 진리의 법인 가운데 첫 번째 가르침이 제행무상, 즉 모든 것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그렇게 애써서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또 나는 언제나 매 순간 끊임없는 변화 중에 있습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존재의 실상이 머무는 바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실 우리는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변화중인 삶의 진실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허용하면서 그 흐름에 나를 얹어 놓으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저절로 이 진리의 세계인 우주법계가 저절로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를 매 순간 안내하고 있게 됩니다. 우리는 단지 그 안내에 따라 우주적인 변화를 타고 흐르면 됩니다. 여기에는 ‘노력’이나, ‘인내’ ‘극기’ 같은 것은 필요치 않지요.

 

사실 진리란 이런 것입니다. 진리는 억지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진리인데, 무엇하러 진리를 얻으려고 노력을 하겠어요. 이미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방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을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들어 와 있으니 말이지요.

 

이처럼 단순하고 쉽게 힘쓰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왜 그렇게 애써 뭔가를 만들고, 변화를 도모하면서 긁어 부스럼을 기어이 만드는데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것일까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변화라는 진리 안에서 그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과 변화 하나 하나는 전부가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도 진실이고, 몸이 아프고 병이 나는 것 또한 진실이며,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또한 하나의 진실입니다. 그 모든 것은 이 변화라는 게임, 제행무상이라는 게임의 일부인 것입니다. 모든 게임은 극적이고 반전이 있으며 일정부분 풀리지 않는 과제를 동반하지요. 우리 삶이 꼬이는 듯 보이고, 힘들어 보이는 것 또한 이 진실게임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변화하는 듯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진실의 일부분으로 완전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변화의 흐름을 타고 수용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흘러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랬을 때 모든 변화하는 것들 그 자체에 변화하지 않는 ‘이것’ 또한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이 곧 변화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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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삶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내가 그토록 이루려고 원해 온

그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더 이상 이루려고 애쓸 필요는 없지요.

 

존재의 완전성과 풍요로움은

단 한 번도 훼손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세요.

 

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낱낱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요?

 

햇살은 반짝이며 빛나고

밤 하늘의 별빛은 총총하게 떠 있습니다.

 

아침 나절 두 뺨위로 간질거리는 햇살이며,

저녁 산책 시간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마치 영혼까지 일깨워 주는 듯 합니다.

 

나무와 꽃과 산자락 풍경에 시선이 머물 때면

마치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서

그윽한 종소리가 울려오는 듯도 합니다.

 

새들은 지저귀고

풀벌레는 노래합니다.

 

부드러운 숨은

들어오고 나가며 생명을 연주합니다.

 

매일 밤 건강한 두 발로

산책의 숲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은

더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내가 억지로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이 산하의 대자연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아름다운 사계를

어김없이 선물 해 줍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게 하기 위해

우리는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숨 들이쉬지 못하면 죽고마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들숨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이대로 놀라웁게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지금 이대로 완벽합니다.

 

신비라는 표현을 써도 좋다면,

이토록 신비로운 삶을

우리는 매 순간 느끼고 누리고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두 손으로 물건을 집어들 수 있는 것도 신비이고요,

바람이 불어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몇 종류의 새소리가 끊이지 않고

제 귓가 언저리까지 찾아와 연주를 해 주고 있네요.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나 사귀어 두었던

들고양이 야옹이는

하루에 몇 번씩이고 제 방 창문 앞에 서서

정겹게 ‘야옹 야옹’ 거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야옹’ 소리를 들을 때의

그 반가움은 어떻게 표현 할 방법이 없네요.

 

이 모든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루 하루를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저절로 살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적같지 않은가요?

 

바람이 불어올 때면 저는

마치 부처님의 법신을 친견한 듯 감동 받게 됩니다.

 

이 평범한 일상 이것을 놔두고

또 어디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대로 감당이 안 될 만큼

주어진 삶의 풍요로움을 두고

또 다른 무엇을 더 벌려고 애쓰고 있나요?

 

지금 이대로가 정말 부족한 걸까요?

 

잠시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어져 있는

이 삶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며

감격스러운 것들인지 모릅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에

물음표를 붙여 보세요.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에게

두 눈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 앞에 놀라운 기적이

매 순간 펼쳐지고 있지만,

그 기적을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요?

 

내가 이 정도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너무 거만한 발상인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어떤 판단이나 비교 분별도 필요 없이,

지금 이대로 모든 것은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천상세계와도 같은 눈부신 하루가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이토록 완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이 주어진 것들을 진하게 느끼고,

감사해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눈부신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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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우리는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삶의 경험이 진짜라고 굳게 믿으면서 살아간다. 이 삶이 진짜라고 느끼기 때문에 삶은 심각해진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진짜니까 잘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무겁고도 늘 긴장의 연속이다.

그러나 걱정 하지 말라.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진짜’가 아니다. ‘내 식대로 현실을 해석하고 왜곡한 자기만의 가짜 현실’일 뿐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식대로’, ‘분별심이라는 필터에 걸러서’ 해석하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며, 완전한 하나로써 눈부신 한바탕일 뿐이지만, 분별심이라는 필터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적과 아군들의 싸움터 같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들의 투쟁의 장처럼 보여진다.

둘로 쪼개진 세계는 언제나 불안하다. 완전히 하나만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까봐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만, 둘로 셋으로 쪼개어지게 되면 그 중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적과 아군이 있으면 언제나 적군을 경계해야 하며, 옳고 그른 것이 있으면 옳은 쪽을 선택하고 그른 쪽은 거부하느라 에너지가 소모된다.

좋고 싫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들려고 집착하고, 싫은 것과는 함께 하기 싫어 거부하고 미워하게 된다.

이처럼 둘로 나누는 분별심의 삶에서는 언제까지고 안심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히 안심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나를 해치지 않으며,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안심은 가능할까?

그렇다. 가능하다.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둘로 쪼개어지지 않은 세계다.

둘로 나뉘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곧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와 내가 하나고, 성공과 실패가 따로 없으며, 옳고 그른 것도 없고, 부자와 가난도 없으며,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전부 통으로 하나라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불안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하나’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괴롭힐 것도 없다.

누가 누구를 이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해칠 그 누구도 없는 것이다. 내가 싸워 이겨야 할 내 밖의 적이 없게 된다. 그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그랬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세상, 둘로 나누어지지 않은, ‘한바탕’이요, ‘한마음’이고, 모두가 ‘한가족’인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지금 이대로의 현실세계의 실상이다.

그렇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이대로가 바로 그런 ‘하나’의 세계다. 이를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 한마음이라고 했다.

어떤가? 분별하지 않고 안심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공연히 힘들여 분별해 놓고 그 환상 속에 빠져 제 혼자 허우적거리고 살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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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불법을 안심법문이라고 한다. 마음을 편안케 하고, 안심할 수 있게 하는 가르침이란 의미다.

우리는 안심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는 과연 어떨 때 안심을 느끼고 있을까?

우리가 주로 느끼는 편안한 안심의 상태는 어디엔가에 의지하고 기댈 곳이 있을 때 안심을 느낀다. 내 스스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속에서 안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부 경계에 의존하고 기댐으로써 안심을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이나 명예나 권력, 사람, 사랑, 소유물, 집과 자동차, 가방과 명품, 노후자금 등에 의지하고 기대면서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지식을 끊임없이 쌓아 나감으로써 새로운 지식이 채워질 때 안심을 느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병 없이 건강한 몸에서 안심을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통해 안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무언가에 머물러 의존해야지만 비로소 안심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안심을 얻고자 그것들에 머물러 의지하게 될 때 사실은 그것이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그것에게 구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돈에 노예가 되어 돈이 나의 삶을 휘두르게 된다. 사랑을 얻음으로써 안심을 얻으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랑에 오히려 구속되고 얽매이기도 한다. 노후준비가 나를 안심시키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로인해 나의 젊은 청춘은 노후준비에 바쳐지기도 한다.

내가 위안과 안심을 얻으려고 기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처럼 우리의 본연의 삶 그 자체를 구속시키며 나의 삶을 휘두르는 것이다.

또한 내가 안심을 얻고자 하는 그 모든 경계들은 영원하지 않다.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가질 수도 없다. 그것으로 인해 안심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속박당하고 구속당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내 인생을 다 바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언제까지고 내게 있어 주지 않는다. 돈과 성공에 인생 전체를 걸었지만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날 수도 있고, 지식을 쌓느라고 한평생을 다 바쳤지만 어느 순간 교수 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지만 그는 나를 떠나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가 그것을 통해 안심을 얻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진정 우리를 안심시켜 줄 수 없다. 그렇기에 이런 방식을 통해 위로받고 안심을 얻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를 안심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외부 경계를 통해서도 안심을 받으려고 하지 말아 보라.

그냥 지금 이대로의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여 지금 있는 이것들 속에서는 안심할 수 없는지 살펴보라.

지금 있는 이대로의 현존 그 자체에서 안심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 무엇을 통해서도 안심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안심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에 구속당하기만 할 것이다.

지금 이렇게 있는 이대로로써 세상은 완전하다. 우리는 이미 완전한 안심을 부여받았다. 그저 지금 이대로이길 수용하고 이대로 있기를 선택할 때, 안심하기 위한 그 어떤 외적인 것도 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안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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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삶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기에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술, 담배, 약물 중독이나 고통이나 분노나 폭력 성향이 있는 사람들도 그런 성향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성향을 인정하고 변화시키려고 애쓰지도 않은 채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고 개선하고 노력해야 한다면 ‘받아들임’과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궁금해 한다.

 

먼저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중독적인 대상에 에너지를 과도하게 투여하지 말아야 한다. 보통 중독된 사람들을 보면 중독된 것에 과도한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도리어 그 사람을 지배해 버리고 만다.

 

보통 사람들은 중독되었을 때 중독에서 놓여나는 방법으로 중독적인 것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 정신력으로 그것과 싸워서 영광스럽게 승리를 거두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정말 어렵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권장하고 싶은 방법도 못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독적인 대상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싸워 이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나와 중독적 대상 둘을 나누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로 나누게 되면 그 중에 하나는 선택받고 하나는 소외되며, 둘 중에 하나는 적이 되고 하나는 아군이 되고 만다. 둘로 나뉘는 곳에는 언제나 분리감, 다툼,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워 이겨야 겠고, 끊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은 그 중독적인 것을 거부하는 생각이다. 중독과 싸워 이기려는 그 에너지로 인해 우리는 늘상 에너지가 낭비되고 탈진될 수밖에 없다. 또한 마음속에서 강하게 거부를 하게 되면 사실은 그것이 더욱 큰 에너지를 받게 된다. 거부하는 그 마음이 오히려 에너지를 키우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중독적인 것들은 그것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하고 싶어진다. 거부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거부하는 바로 그것이 지속된다. 중독적인 것에 더 중독되는 결과를 초래하곤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거식증과 폭식증이 반복되는 사람이 있다. 음식을 안 먹겠다는데 집착이 심한 사람은 안 먹고 안 먹는데 너무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다. 먹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는데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가면 결국 눌러 참고 참다가 그냥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다. 폭발해서 그 때부터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계속해서 미친 듯이 먹어 대는 것이다. 거식증에 집중된 에너지가 도리어 다른 극단인 폭식증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이처럼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면 그 반대편, 반대급부도 상승하는 것이다. 이 우주는 모두가 파장이라고 하는데, 파장이라는 것의 특성이 어느 한 쪽이 크게 올라가면 반대로 내려가는 파장도 증폭이 커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중독적인 것을 끊어 없애려고 싸워서도 안 된다면, 그냥 중독적인 것들을 계속 좋아하고 빠져들어 계속 중독된 삶을 넋놓고 그저 중독된 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 또한 중독적인 모든 것들을 좋아하고 집착하고 소유하려는 쪽으로 에너지를 쓰는 것이기에 마찬가지로 에너지 낭비가 심해진다. 담배를 구하고, 마약을 구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러 뛰어다니느라 힘이 빠지고, 또한 술담배며 약물을 취하면서 더욱 더 생명력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중독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담배나 술이나 약물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좋아해서 구하고 취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싫어해서 거부하고 싸워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 중도적인 방법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자비의 방식이다. 참된 자비란 무엇일까? 참된 자비는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지 않음으로써 나뉘지 않은 전부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둘로 나누지 않는 불이(不二)의 방식이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방식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과 ‘알아차림’이라는 놀라운 연금술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마음을 없애려고 싸우거나, 그 마음에 현혹되어 끌려가는 대신,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을 아무런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약물 중독된 나 자신을 심판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만 술담배에 중독되었고, 약물에 중독된 사람일 뿐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참된 용서이며 참회이기도 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독을 따라가도 괴롭고, 중독을 거부해도 괴롭다. 이 두 가지의 대응방식 대신 중독이 거기에 있음을, 내가 중독되어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고,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심판하지도 말고, 그저 받아들이고 관찰 해 보라.

 

있는 그대로의 중독된 나를 다독거려 주고, 괜찮다고 말해 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라. 담배 피우고 싶은 내가 기꺼이 되어 주는 것이다. 잠시 담배 피우고 싶은 그 마음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 욕구를 가만히 판단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은 중독이라는 병을 치료하는 가벼운 약방문 같은 것이 아니다. 전에는 중독을 병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라고 생각해 치료해서 없애버릴 것으로 바라보았다면, 이 방식은 중독이라는 현 상황을 전혀 ‘문제상황’으로 낙인 찍지 않음으로써 획기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보는 방식이다. 중독을 보는 방식 자체가 근원에서부터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방법이 아닌 방법이며,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무위(無爲)의 방법이다.

 

이것은 전혀 애쓸 필요가 없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노력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판단하지 않은 채 그것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취하려 해도 괴롭고, 버리려 해도 괴롭다. 양 쪽 다 힘이 든다. 그러나 그 어느 한쪽에 힘을 부여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로써 존재해 주는데는 어떤 힘도 들지 않는다. 힘이 들지 않지만, 근원에서는 그렇기에 더욱 강력한 무위의 힘이 저절로 상황을 이끌어 간다.

 

이처럼 ‘받아들임’은 무기력이나 나약한 수동적 대응방식이 아닌 진정한 본래적 힘을 끌어오는 능동적이고도 주도적인 삶의 자세다. 우리는 참된 받아들임을 통해 중도적이고 자비로운 무위자연의 근원적 힘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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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불법은 둘로 나누는 이법이 아닌, 나누어지지 않는 불이법이라고 한다. 이것이 중도다.

볼펜은 길다거나 짧다라는 어느 한 쪽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길다거나 짧다고 판단해 인식한다.

나아가 그 어떤 사람도 성격이 좋거나 나쁠 수 없지만, 우리는 어느 한 쪽을 마땅히 선택해서 타인을 인식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양 변이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다. 길다는 것은 짧은 것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분별이며 개념이다. 짧은 것이 없으면 긴 것도 없다.

그래서 길고 짧은 것은 인연가합으로 상의의존적이며 연기적으로만 성립될 뿐, 실체적으로 길고 짧은 것은 아니다. 공생공존의 관계인 것이다.

이 말은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둘로 쪼개어지는 개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가 개념짓고 분별해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인식들은 전부가 이와 같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하는’ 연기적 관계이다. 연기적 관계라는 것은 거짓된 허망한 분별일 뿐 진짜에서는 분별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다.

또한 연기적 관계라는 것은 그 이분법으로 나뉜 모든 것이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이 우주의 근원적 진리다. 이 세상은 단 하나도 둘로 쪼개지지 않는 전체로써의 ‘하나’다.

‘나’도 하나이고, 타인도 모두 나와 둘이 아닌 하나다. 물질도, 정신도, 사람도, 우주도 모두가 둘로 나뉘지 않는 참된 하나다.

예를 들면 마치 꿈과 같다. 꿈 속에는 모든 사람들도, 우주도, 사물도, 사건도 모든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 모든 꿈 속의 세상은 사실 다 낱낱이 떨어져 있는 별개의 존재가 아닌 모두가 하나의 ‘꿈’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분별심으로 볼 때는 여럿으로 나뉘지만, 분별심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는 하나도 나뉘지 않는 참된 ‘하나’, ‘한마음’만을 보게 될 뿐이다.

부처와 중생도 하나요, 나와 너도 하나고, 인간과 동물도 하나이며, 삶과 죽음도 하나요, 모든 생각과 견해, 사물과 사람, 물질과 우주, 둘로 나뉘어져 있는 모든 것들이 전혀 나뉘어지지 않은 한마음이요 한바탕인 것이다.

바로 이 ‘하나’임을 바로 보는 것이 견성이고 깨달음이다. 하나인 줄 알면 삶이 완전히 뒤바뀐다. 둘일 때 다툼이 있고, 욕심이 있고, 추구하고 원할게 있지 하나밖에 없으면 그저 지금 이 자리에 완전한 평화, 완전한 자비만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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