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14년도 불교아카데미 '금강경과 명상수행' 강좌 수강생 모집

 

“금강경과 마음공부” 저자 법상스님 직강으로 실시됩니다!


■ 금강경 강좌 및 명상수행 실수(금강경 강좌 + 명상수행 실수)


 ❏ 일 시 : 2014.3.7.(금)∼7.4(금) 매주 금요일 오전 10:00~12:00
 ❏ 장 소 :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 동참보시금(교재비) : 30,000원, 동참보시금은 입학 당일납부!
 ❏ 문의/전화접수 : 화랑호국사 02-972-7747, 이메일 접수 : buda1109@daum.net
 ❏ 접수는 전화나 이메일로 ‘이름, 핸드폰번호, 주소, 차량번호, 차종’만 알려주세요.
   (차종/차량번호 등은 육사 위병소 통과 시 필요하며 아카데미 수강생은 위병소 바로 통과됨)
 ❏ 시간일정 : 10:00~10:30 : 명상 강의 및 실수, 10:40~12:00 : 금강경 강의

 

▣ 불교아카데미 강사 약력 : 법상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큰스님 은사로 출가,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졸업,

목탁소리(www.moktaksori.kr) 지도법사,

『생활수행이야기』『날마다 해피엔딩』『금강경과 마음공부』등 10여 권 저술,

‘05년 올해의 불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선정,

현 군승(軍僧)으로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주지,

목탁소리 불교아카데미 학장,

2014년 불교교리 책 '붓다수업' 출간

BBS 불교방송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문자서비스'

 

▣ 법상스님 강의 후기
❏ 온 몸으로 들었다. 2시간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집중하여 들은 강의. 이 강의는 온 몸의 세포
   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뭔지 모를 감동으로 차 있는걸 보면 [무애안]
❏ 아카데미가 횟수를 더 할수록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행복의 확신이 듭니다.[뭉게구름]
❏ 이 좋은 강의를 많은이들이 들었으면하는 소망이 생겼다. 이런 강의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여래심]
❏ 스님 강의를 들으면 세상만사 온갖 시름이 일시에 확 걷히는 느낌입니다. [jikeunhye]
❏ 희유합니다. 감격스럽습니다. 환희심이 솟고 막연하던 가르침이 와 닿습니다. [죄많은중생]
❏ 공부하면 할수록 무한한 진리에 온 몸이 전율을 일으킵니다. 환희심에, 가슴 가득 충만함에 나도 모
   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친구에게 달려가 이야기 해주기도 했습니다. [관음행]
❏ 스님 모시고 공부할 수 있는 것, ‘세상 어디에 이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있을까’ 싶습니다.  [원행선]
❏ 가르침에 날이 갈수록 붓다의 깨달음에 귀의 하고픈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살아 오면서 이 정도로
    저의 마음의 강한 울림이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깐요.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저의 인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권효임]
❏ 내가 무슨 복이 많아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나 생각하면 매번 울컥합니다. "살다 보니 우리에게도
    이런 행운이 있구나"했습니다. [청송]

 

대한불교조계종 군종교구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서울시 노원구 공릉2동 사서함 77-1호 02-972-7747

 

 

법우님들, 설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렇게 또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나이도 먹어가는데,

자신의 영적인 성숙과 깨달음 또한 나이만큼 깊어가고 있는지,

나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행복해지고 풍요로와지고 있는지를

한번쯤 냉정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그 어떤 성취보다 더 중요한 일이고,

그 어떤 다른 일들 보다 우선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면,

스스로의 내면적인 삶의 여정을 위한

지혜의 양식을 선물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여기 여러분들의 내적인 깨어남과 지혜의 완성,

그리고 실질적인 생활 속의 명상수행과

대승불교의 핵심 가르침이요

모든 불교 종단의 소의 경전을인 금강경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영적인 성장을 실천해 갈 수 있는

마음공부의 기회가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인연이 있더라도,

심지어 부처님께서 내 곁에 와 계신다고 할지라도,

인연을 스스로 선택해 맺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연연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2014년까지만 이 도량에 머물고,

내년에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오니,

혹시 함께 공부하고자 마음내신 분이 계신다면,

불교아카데미 '금강경과 명상실수' 강좌를 권해 드립니다.

 

지난 한 해 불교아카데미에서는

불교입문과 역사, 교리와 사상, 문화와 예절 등을 비롯해

반야심경 과정까지 공부를 해왔습니다.

 

올 해 새롭게 개설될 '금강경과 명상수행' 강좌에서는

대승불교의 핵심요체이며,

모든 불교종단의 소의 경전이고,

불법의 가르침의 대의가 잘 나타나 있는

금강경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갈 뿐 아니라,

금강경 강의에 앞서 30분씩

명상 수행을 배우고 직접 수행해 봄으로써

장기적으로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

명상수행은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워보고자 합니다.

 

사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불교하면,

기도하고, 절하고, 염불하고, 독경하는 등의 실천을

불교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이런 모든 기도법들은 하나의 방편이었지,

결국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공부는

바로 명상이요, 수행이고, 참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기도하는 방법은 대충 알겠는데,

명상 수행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또한 불자들 가운데에서도

매일 명상과 참선을 실천하는 이들은,

염불이나 절, 독경을 실천하는 이들에 비해 매우 적은 실정입니다.

 

이에 이번 '금강경과 명상수행' 과정에서는

금강경 공부를 통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지혜의 완성을 돕고,

명상실수를 통해 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 가능한

명상수행의 방법을 배워 나갈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10시~10시30분 : 명상수행 및 실습

10시30분~12시 : 금강경 강의

 

13년도에도 서울, 경기도 각지 뿐 아니라 

멀리 인천, 대전, 충북 등에서도 2~3시간에 걸리는 길을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공부하신 많은 분들이 계셨는데요,

시간을 억지로 내서라도,

이번 한 생을 살아가며 한번쯤 꼭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해 볼 가치가 있는,

아니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한번쯤 공부해 볼 필요가 있는 공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년에 공부를 하지 않으셨거나,

기초가 전혀 없으시고, 불교를 전혀 모르는 분이라도

전혀 상관 없이 누구든 참석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럼 법우님들의 많은 참석을 바라오며,

아래에 내용을 참조하여,

접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참금(교재비)은 일괄 첫째날 3월 7일

현장에서 받도록 하겠사오니,

일단은 인원을 220명에 한정해서 접수받고자 하오니,

접수를 먼저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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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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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는가?
누가 말하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맛보고, 행동하는가?

과연 이 '보는 놈'이 누군가?

볼 때는 보이지만,
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고정된 성품을 가진 실체적 '보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언제나 무언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볼 때만 보이지,
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은 채로 있다.

단지 볼 때만
'보는 자'가 있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보지 않을 때
'보는 자'는 어디에 있으며,
'보여지는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본다는 인연따라
보여지는 것이 존재할 뿐,
본래 자리에서는
'보는 자'도 없고,
'보여지는 것'도 없으니.

다시 묻는다!

'보는 자'가 누구인가?
'행하는 자', '말하는 자', '생각하는 자'가 누구인가?
고정된 실체로써의 '생각하는 자'가 있었다면,
언제나 생각되어지는 것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할 때만
생각하는 자가 있고,
생각의 대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생각하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으며,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잠깐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며 생각할 뿐
'보는 자,
듣는 자,
냄새맡는 자,
맛보는 자,
접촉하는 자,
생각하는 자'는 없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소식!

'나'는 없다.
'보는 놈'은 없다.

인생을 살고 있지만
'사는 자'는 없다.

없지만
볼 때는 보고,
들을 때는 들으며,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그 자를 찾으라.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보는 자'를 돌이켜 찾아 '보라'

이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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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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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쉽게 오픈마인드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고 한다.
그러면,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여는 것이 마음공부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자.

문을 닫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것도 문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
다만 문 안의 주인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들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으면
내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깥의,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유로이 내 존재의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게 된다.
그 모든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힘들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내게 이득되는 것만,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음을 활짝 연다는 것은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애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을 닫고 있을 때는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중심이 되어,
문을 열 것인지 닫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닫으며,
내 입맛에 맞는 것, 내 견해와 일치하는 것은 열고
내 입맛에 안 맞거나,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닫는 것이다.

즉, 문을 닫고 있을 때는
아상에 갇히게 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있을 때
아상은 타파되고
내가 아닌 우주법계의 질서와 차원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된다.

즉 문을 닫는 것은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하는 것이고,
문을 열 때
비로소 온전한 ‘내맡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을 열고
이 우주법계의 진실에 삶을 내맡길 때,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살게 된다.

그 때 모든 지혜와 힘이
무한한 자비로써 나를 돕기 시작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깨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아니 완전히 열었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바로 삶의 완전성,
원만구족과 온전함이 깃드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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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본래 완전하고,
모든 것이 구족된 존재이고,
완전히 깨달아 있는 존재인데,
‘나’라는 아상과 이기가
문을 닫고 막아 섬으로써
그 완전성과 원만구족과 깨어남과 자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존재 근원의 깊은 차원의 질서에 내맡기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오다,
문득 깨달아 문을 활짝 열게 되면
우주적 깨달음과 완전성이
허물어진 벽과 툭 트인 문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깨어남은 더뎌진다.
지혜도 자비도 내게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있는 건,
아상 뿐!

아상만이 나를 집어 삼키고,
아상이 시키는 대로,
이기와 에고가 시키는 대로의 삶만을
반복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전혀 새롭지 않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의 삶이 반복된다.
아상은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고,
과거에 안주하며, 안정만을 쫓는다.

아상의 기준에서
문을 선택적으로 분별하여 열고 닫기 때문에,
언제나 비슷한 것만을 열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결정은 죽어도 못 한다.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될지라도
병원과 현대의학만을 신봉하는 사람은
대체의학이나 명상과 기도를 통한 치유는
다분히 기복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 매도하며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느 한 종교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거나,
어느 한 집단, 사상, 이념, 가치만이 옳다고 믿는 이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과 다른 사상, 종교, 이념,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 이에게는
계속적으로 똑같은 진부한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열지는 못하는 것이다.
당장에 마음만 열면
내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먼저 내 마음 속에서 반복되는
좋고 싫다는, 옳고 그르다는, 맞고 틀리다는
분별과 차별심을 잘 관찰하고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두 가지 극단적인 분별이 있으면
좋고 옳고 맞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문을 열게 되고,
싫고 틀리고 그른 것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는
좋은 것도 유효하고 싫은 것도 유효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내 생각의 틀일 뿐 실체가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배울 수 있고,
순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경과 순경을,
행복과 불행을,
맞고 틀리는 모든 것을,
그 양 쪽 모두를 향해
완전히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그저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맞다고 여기면서,
바보가 되라는 말로 여겨선 안 된다.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좋고 나쁜 선호 조차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좋아해도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싫어해도 너무 증오하지 않으면서
그 두 가지 모두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경계 모두를 받아들여
그 양 변을 통해 깨달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닫지 말라는 것이다.
역경을 통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순경계에서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역의 좋고 나쁜 모든 경계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양 쪽 모두에서 영적인 진보, 깨달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찬란하고도 눈부신 삶이라는 축제를 온전히 즐기라.
우주법계는 언제나 완벽하고도 충만한 지혜와 자비로써
당신의 삶을 조화롭게 균형 잡아 줄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써,
선택적으로 좋은 것들만 받아들임으로써,
우주법계가 내게 무한히 공급해주고 있는
진리의 법비를 뿌리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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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부처님께서는, 신성의 하느님과 성령은
언제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나에게 딱 걸맞는
완벽한 인생의 시나리오와
삶의 교과과정을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다.

그것도 저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식으로 정확히 필요한 일들을 균형 있게 내보내 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할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다 똑같지 않고 다 다른 것이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어느 때에는 잘 풀리며 행복해 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안 풀리며 괴로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있는 삶과 인생의 교육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곧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귀의(歸依)라는 구도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본래 부처였고, 본래 진리였으며, 본래 청정한 수행자인
바로 그 본향인 자성의 귀의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하는 것,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향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귀의의 숭고한 여정은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 신의 가호,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완벽한 도움이
매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온전한 도움이 바로 인생이라는 수업이다.
저마다에게 딱 걸맞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만을 위한 맞춤식 인생수업이
바로 나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인생의 수업을 온전히 이수해야지,
내가 선택적으로 원하는 수업만을 들음으로써,
좋아하는 수업만 선별해서 들음으로써,
균형과 조화로운 영적 진보와
성스러운 귀의로 가는 구도의 길을
에둘러 멀고 먼 길로 돌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완전히 열고 받아들이면
수업의 진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깨달음에로의 당도는 멀지 않지만,
마음을 닫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지지부진하게 깨어남의 속도는 느려지는 것이다.

그 수업을 완전히 이수해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괴로움도, 병도, 아픔도, 스트레스도, 역경도
빨리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 거부하던 것은 계속되고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부하면 거부하는 것이 계속된다.
결국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그러니 어떤가.
삶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놀이하듯 즐기며 살아내라.

설사 그 인생의 길에
굴곡진 역경이 놓여질지라도
‘괴로운 삶’이라고 해석하고 판단함으로써,
그리고 그 괴로운 삶을 거부함으로써,
그 인생의 수업을 이수 못한 채
다음 생에까지 나머지 공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살하는 사람이 바로 나머지공부의 대표적 사례다.
주어진 역경을 못 견디고 거부하고 저항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는 곧장 그 수업을 끝마치기 위해
그 역경을 다시 선택해서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 생에 거부하고 저항하던 에너지를 듬뿍 양분으로 받아
다음 생에서는 지금보다 더 힘겨운 수업을 이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고 느끼며
놀이하듯 가지고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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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풍요로우며, 긍정적이고, 감사할 일로 넘쳐나는,

무엇보다도 무한한 사랑이 꽃피어나는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명상법이 있어 화재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연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연기법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연하여 일어난다는 이 세상의 법칙을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장엄한 동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른 봄에 피는 꽃 한 송이 조차
저홀로 피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가 참여하고 도운 것이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삶 위에 놓여 있는 일체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얽히고설킨 인연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에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것조차
그 나무 혼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과
나아가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연관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렇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조차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도왔고 참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내가 이렇게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내가 돈 잘 벌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조금 깊이 연기적으로 사유해보면
일체 모든 사람들과 하늘 바람 구름 햇살을 비롯한
이 우주법계 전체가 어머님의 품처럼 나를 돌보며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는 과연 그러한 법계의 도움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한 우주법계의 크고 작은 도움들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 오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그 일체 모든 존재의 무량한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살기 보다는
더 많이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연기적인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의 은혜에, 법계의 도움에 보답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연기적인 ‘감사’의 실천은
생각하고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인 감사, 밑도 끝도 없이 대책 없는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 우주의 드넓고도 깊은 차원의 전방위적인 도움을
도저히 다 헤아리고 알아차릴 수 없다.
어떻게 생각으로 그것을 다 보고 알 수 있겠는가.

그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넓고 깊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영겁의 생과
전생에서의 업장과 인연들 전체를 아우르는,
시공을 초월하는 작용으로써 우리를 무한히 돕고 있으며,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삶의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러한 무한히 살려주는 연기의 법칙이 우주 법계의 방식이라면
그 우주법계의 진리와 하나되는 길,
법계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 나에게 갖추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완전히 받아들여 수용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방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크나큰 도움에 보답하고
작게나마 회향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우주법계에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도와 줄 준비를 항상 마치고 있다.
언제든 우리가 그 도움을 요청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주법계는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래서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는 일만 하며,
항상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100%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주법계의 도움을
마땅히 뿌리친다.
뿌리칠뿐더러 우주법계의 도움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쉬워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증오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가?
먼저 첫째는 나를 열어놓아야 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이 아무런 걸림 없이 나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해야 한다.
마음을 닫아두면 들어 올 수가 없다.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밝은 힘은
나에게 와 닿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여기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법계를 감동시키고 움직여
나에게 더 많은 도움이 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다는 뜻이다.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마음 하나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며,
이 우주법계와 하나 되는 진리의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언어요,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단순하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느끼라.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감사’를 외치라.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감사를 외치라.

나 자신을 향해,
이 세상과 우주를 향해,
법신 부처님을 향해,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를 향해,
그리고 자동차와 집과 하늘과 구름과
읽고 있는 책과 신고 있는 신발과
버스 기사님, 청소부 아저씨,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물건이나
원수처럼 증오하는 대상에게까지
무작정 대책 없는 ‘감사’를 외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오랜 방식이며,
예수의 오랜 방식이기도 하고,
인류 모든 성인들의 방식이며,
호오포노포노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과 명상가와 영적인 교사들의
공통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절에 가거나 교회에 가면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진급하게 해 주세요’
‘좋은 성적 나오게 해 주세요’
하며 비는 기도를 하곤 한다.

그러나 비는 것은 진리의 방식이 아니다.
빌게 되면 사실은 거꾸로를 연습하게 된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은
돌아켜 보면 가난과 결핍을 연습하는 말이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마음은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내 안에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연습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내가 마음에서 연습한 것을 고스란히 보내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감사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부족과 결핍에 집중하는 마음에서
감사와 만족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감사한 상황으로 바꾸라.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소유물,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라.

내가 받고 있는 현재의 연봉과 월급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며 감사를 느끼라.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에게 온전히 감사하라.
더 나은 조건의 직업, 더 나은 성적을 가져오는 자식,
더 나에게 잘 해주는 아내, 더 많은 돈을 벌어오는 남편을 바람으로써
결핍과 부족과 불만족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말고
그 모든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긍정과 만족과 감사한 것들에 마음을 모으라.

우주는 항상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100% 가져다 준다.
일체유심조,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
마음에서 그린 것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주의 창조원리다.

내 마음이 부족과 결핍에서 만족과 감사로 바뀌게 되면
내 마음의 그릇이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바뀌니까
우주법계는 내 마음의 요구를 100% 들어주게 된다.
전에는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주다가 감사할 일들로 삶을 수놓게 된다.

진언을 외듯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 정도 반복해 외우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언을
관세음보살 염불하듯, 아미타불 염불하듯 할 수 있는 모든 순간 외치라.
이 작은 외침이 우리 삶에 경이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도저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나
증오하고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주법계는 항상 나를 돕기 위한 일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법계의 본질적인 에너지는 언제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괴로운 상황이고, 꼬이는 상황이며,
답답하고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법계에서는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나를 조금 더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그 일을 벌인 것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상황이, 모든 최악의 조건이
나를 위해 법계에서 준비한 최상의 자비로운 상황으로 바뀐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답답한 상황일지라도
사실은 우주가 그것을 통해 나를 돕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오묘한 장치인 것임을 완전히 대긍정으로 받아들이라.
그러한 대긍정의 받아들임의 표현이 바로 ‘감사합니다’ 라는 외침이다.

‘감사합니다’라고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적으로 외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우주의 근원적인 파장은 언제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얕은 의식에서는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 주고 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배움이 있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종교와 사상, 성자와 현자들의 가르침에서
사랑과 자비를 그 가르침의 근원적 원리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이 우주의 바탕, 깊은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 파장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와 이치와 합일을 이루려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우주적인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 또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깨닫게 하고, 신에 이르게 하며
근원적인 차원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불교에서도 수행을 통해 해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일체 중생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구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동체대비가 먼저 있다.

금강경에서도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구류중생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을 참된 행복과 평화인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부처는 자비 그 자체이고,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 우주에는 오직 자비와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면,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사랑을 연습하고,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진리이다.

오랜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도
이러한 자비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자비심을 연습하는 수행법으로 자비관(慈悲觀)을 말하고 있다.

“수행자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어떤 생물일지라도, 강하거나 약하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남을 속여도 안 되고, 경멸해서도 안되며,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져라.”

이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는 오랜 방법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행복하라 안락하라 평안하라 하고 외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모든 존재를 향해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연습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향해 무한한 자비를 행하며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이 오랜 자비관을 삶 속에서 연습하고 실천하는
아주 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온 우주를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사랑을 외치라.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한 이 사랑의 외침을 실천하라.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처럼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면 된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람에게,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쳐보라.

이 두 가지 단어야말로
이 우주의 진리를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참된 말, 진언(眞言)이다.

이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진리의 언어를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염불하듯 독송해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세상은 사랑으로 물들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서 중요한 것은
보내는 것대로 받는다는 점에 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을 고스란히 받는 업보의 원리다.

돈을 베풀면 돈을 얻게 되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면 건강을 얻게 되며,
나이든 분들을 공경하면 장수를 얻게 된다.
인색함을 내보내면 들어오는 것도 인색해지고
성냄과 다툼을 내보내면 싸울 일들이 줄을 선다.

마찬가지로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사랑을 내보내면 사랑할 일들이 많아진다.
감사와 사랑이 한없이 나를 향해 파도쳐 들어오는 삶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이 바로 정토고 극락이며 천상세계가 아니겠는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의 에너지 파장을 담고 있는
핵심적인 언어인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조금 더 수행과 연결지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흡관’이다.
숨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숨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름하여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호흡관이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호흡에 모아 집중하고 관찰하는 오랜 수행방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이 수행법은
불교에서뿐 아니라 모든 명상법에서도
필수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수행법으로 잘 알려져 왔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알아차림으로써
온갖 망상과 번뇌를 비우고, 탐진치 삼독을 비우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수행법이다.

호흡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의 일이며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끄달리는 마음을 다스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로 통하는 통로와 연결될 수 있다.

호흡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호흡과 함께 한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삶과 연결되어 있는 호흡에
우리의 의식의 빛을 쏘아 줌으로써 의식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로 이 수천년을 이어 온 수행의 전통인 호흡관에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연결시키는 수행법,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짧게 말해도 좋다.

호흡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호흡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로 혹은 생각이나 망상에 끄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연결된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텅 빈 명상의 장에 머물면서
우주와 연결된 그 현재의 순간을 통해
감사와 사랑의 파장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는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헤맨다.
평소에 끊어져 있던 바로 그 우주와의 소통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때가 바로 ‘지금 여기’라는 때이고,
그 현재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영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지금 여기’를 반영해 주는 가장 투명한 것이 바로 호흡인 것이다.
우리는 호흡관찰을 통해 지금 여기라는 우주와의 연결고리와
조화로운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호흡에 머물면서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나에게 돌아오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법계의, 진리세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창조 에너지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주법계와 하나되는 차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명상의 장과 연결되고,
또한 감사와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아름다운 파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본법과 방편법을 아우르는 수행법이다.

본질적인 진리에 다다르는 수행법이자,
삶을 풍요로운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만드는
현상계와 본체계를 아우르는 수행법인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오면서 이 단순한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무한한 감사로써 들어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숨을 내뱉을 때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왔다가 내 몸을 스치고 내 밖으로 나가면서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단순한 공기, 호흡 한 자락 조차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나를 스쳐 나갈 때는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호흡관을 통해 호흡만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모든 것이 감사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이든, 음식이든, 호흡이든, 말 한마디든, 행동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존재와 함께 파도치고 흘러 나갈 때는 무한한 ‘사랑’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밥 한 공기 물 한 모금을 먹을 때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받아들여 먹고
음식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쌓은 뒤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과 자비의 일을 행함으로써 내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 때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말이 나갈 때는 ‘사랑’스러운 말, 애어(愛語)로써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의 숨을 들이쉬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숨을 내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상징을 담고 있다.

다시말해 내 삶에 등장하는,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상황, 조건, 사람 등
일체 모든 것들을 감사로써 받아들이고,
내가 이 세상에 내보내는 모든 행동, 말, 생각, 파장 등
일체 모든 것은 사랑을 내뿜고 자비를 방사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나갑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10번만 해도 에너지가 바뀌는데,
하루에 10번씩 10번을 반복해 100번 이상을 실천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게 에너지가 바뀌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수행법이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우리의 내면세계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이 사소하고 단순한 것 같은 수행법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써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냥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말이라도 일정한 양의 파장이 형성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도
찌그러진 물의 결정에 ‘감사’와 ‘사랑’이라는 말을 외쳤을 때
순식간에 물의 결정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바뀌는 언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한다.

우리 몸이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리가 한 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외칠 때
그 몸의 모든 결정이 한꺼번에 아름답게 바뀔 것이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싱그럽고 이상적인 세포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하루에 100번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실천해도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게 바뀐다.
조금 민감하게 깨어서 지켜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 작은 실천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든 상황에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연결해 보라.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각 호흡을 관찰하며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을 붙여보라.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옷을 입으면서도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으로 깨어나라.
운전 중이나, 지하철 안에서도,
일하다가 잠시 짬나는 시간 동안에도,
언제나 의식적으로 호흡을 관찰하며 감사와 사랑을 연습하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시간,
커피를 뽑아 마시는 시간,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순간,
앞 차가 끼어들기를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는 순간 등
이 수행을 통해 하루 중에 만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수행의 순간, 명상의 순간, 삶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행이란 그리 거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몇 시간을 고통을 참아가며 좌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00배나 1만배를 통해서 선정을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작은 감사와 사랑의 호흡을 통해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사실 그런 것이다.
이처럼 삶 속에서 삶과 하나되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행은 참된 수행이 아니다.
좌선하고 앉아 있을 때만 고요하고
일어나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갈 때 흩어진다면
그것을 어찌 참선이라고, 명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하루 중 만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하라, 사랑하라.
원수같은 사람에게 도저히 감사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면
내 안에 무언가 좋지 않은 업이 그 원수를 만나게 한 것이므로
내 안에 있는 바로 그 업에다 대고 감사와 사랑을 외치라.

괴롭고 답답하고 힘겨운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내 안의 꽉 막힌 어떤 에너지를 향해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을 보내주라.
그랬을 때 막힌 기운은 뚫리고, 거친 업은 눈 녹듯 활짝 녹아내리게 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병을 미워하고 바이러스를 죽여 없애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 대신 그 병과 바이러스를 향해
감사와 사랑의 따뜻한 호흡을 보내주라.

불교적인 방식은 암세포도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비로 감싸주는 방식이며
암세포 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내 업이 암세포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 줌으로써
업이 풀리고 소멸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하고
고맙다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방식이다.

암세포 또한 동체대비로써 나와 싸울 적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품어 주어야 할 세포인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힘을 호흡관을 통해 매 순간순간 암세포에게 보내줄 때
그 수행은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작동시킴으로써
작게는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치유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고
넓게는 암을 치유할 수 있는 의사나 치유자를 보내주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상적이고 수행자적인 방식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방법이다.
심지어 암세포 일지라도 사랑으로 품어주고 안아줌으로써
우리 안에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좋지 않은 상황, 경계, 대상은
미워하고 싸워서 이겼을 때는 잠시 꺽일 뿐이지만,
감사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녹여냈을 때는
완전히 그 근원까지 녹아내려 치유가 된다.

이처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온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나의 본연의 힘을 이끌어 내어
온 우주가 함께 나를 도와주는 작용을 시작하게 해 준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나를 위한 사랑의 도움을 시작할 뿐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일의 흐름 등을 바꿈으로써
우주 전체가 나를 돕는 일에 전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명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
당장 실천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매일 절이나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을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몇 시간씩 방석위에서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내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수행법이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춰보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

들어오는 숨을 지켜보며
‘감사합니다’
나가는 숨을 지켜보며
‘사랑합니다’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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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고독과 침묵 속의 새벽길

 

드디어 오늘부터는 모든 고산에의 적응을 마쳤다고 보고

한없이 원 없이 오르는 날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나푸르나도 다녀왔고,

물론 그 전에 인도 북부의 라다크, 판공초에서 5,000고지를 몇 번 넘어도 봤고,

또 이렇게 지금껏 일주일 동안 5,000고지 이상을 오르기 위한

느릿느릿 고산적응 산행을 계속 해 온 터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도를 올리며

내가 가야 할 바로 그 곳들을 두 발로 휘적휘적 걸어올라 줄 차례다.

첫 새벽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청신(淸晨)의 길을 나선다.

 

 

 

어제 출발하던 바로 그 언덕길을 걸어올라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어제처럼 오늘도 타보체피크, 촐라체, 아라캄체,

니제카 피크, 로부체피크 등의 봉우리들이

내가 가야 할 방향 앞으로 병암(屛巖)처럼

그 우뚝 선 백발의 봉우리들을 한껏 드높이며 장중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겨울옷과 장갑, 모자까지

단단히 몸에 붙여 메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고도 초엄한 솜씨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은 지 오래라

초원이요, 벌판이며, 흙먼지길이거나 소설(素雪)의 해쓱해쓱한 설산이 전부다.

이런 낯선 황량함이 왠지 모르게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웅려하고도 시린 풍경 앞에서

내 눈은 찬란히 부셔오고 감각은 새록새록 깨어나며

발걸음 하나조차,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설산 너머 어디쯤에선가 들려오는 침묵이 무너지는 소리조차

다 들려오는 듯 민예하게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이 정작 현실이란 말이냐.’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아늑한 영겁 전에 이미 이 길을 뒤 뜰 처럼 거닐었던 듯

새로우면서도 익숙하고, 시리면서도 따스하며,

외로우면서도 꽉 차 있는 느낌!

철저한 고독감 속에 그러나 온 존재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 느낌!

 

이런 선연한 길 위를 내 존재를 이끌고 이렇듯 두 발로

그것도 아무도 없는 이 적막의 새벽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경이에 가까운 체험이 아닌가.

 

걸으며 모든 생각을 잊는다.

모든 기억과 기대, 바람과 희망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 따위는 더 이상 입에 담을 흔적조차 없다.

모든 사고의 기초가 붕괴된 듯, 텅 빈 대지 위,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한 존재가 다만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을 뿐!

 

걷다보니 햇살이 발길을 비추고, 하나 둘씩 짐꾼들이 스쳐간다.

제 몸보다 더 크고 높고 무거운 짐을 이마에 짊어지고

몸을 최대한 앞으로 낮게 기울인 채 목에 힘을 딱 주고

시선은 오직 땅에 고정,

때때로 그 힘겨운 눈을 치켜뜨며 몇 미터 앞 길을 주시하며 묵묵히 나아간다.

 

 

 

 

그 노련한 시선과 여행자의 눈길이 마주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미소 짓는다.

그 힘들고 고된 짐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도 무거울 거라는 생각은

단지 여행자들의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이 설산에서 만난 대부분의 포터나 짐꾼들은

그 순수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를 품고 있다.

 

때때로 짐꾼들의 풍경은

이 히말라야 속의 또 다른 설산이요 산맥처럼

이미 이 풍경 속의 한 자락을 형성하는 또 다른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다.

 

 

 

검은 새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처럼,

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고산 야생화들의 생명력처럼,

저 설산 주위로 붙었다 떨어지고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감감 도는 구름의 출몰처럼,

저들 셀파 족들의 걸음 걸음 속에는

또 다른 히말라야가 맥박처럼 흐르고 있다.

 

사람이면서 인위적이기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택한, 말하자면 자연주의자,

그러나 그것 또한 듣기 거북한 하나의 거추장스런 수식일 수밖에 없는

‘그저 거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바로 히말라야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내려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에서는 줄로 홀로, 혹은 둘이서 오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반해

이 곳 에베레스트 지역에서는

주로 이처럼 팀을 이루어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다.

 

 

 

 

4,800 고지를 흐르는 생명수

 

두사(Duda, 4503m) 마을을 지난다.

마을이라고 해야 집 두어 채가 전부인데다

그곳조차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전혀 인기척이 없다.

아마도 그저 목장 주인이 때때로 야크를 데리고 풀 뜯으러 올 때나 잠시 들러

바람을 피해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사에서 약 30분 쯤 더 걸으니

산산한 작은 계곡을 감돌아 토클라(Thokla, 일명 Dughla, 4620m)가 나온다.

 

 

토클라 또한 롯지 두세 곳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를테면 딩보체나 페리체에서 로부체로 가기 위해

잠시 쉬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는 간이역인 셈이다.

 

 

 

토클라 롯지 앞 빈 의자에 잠시 앉는다.

몇몇 여행자와 포터, 그리고 짐꾼들이 야외 식당에 잠시 걸터앉아

풍연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롯지 뒤로는 바로 설산이 휘몰아쳐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룽다 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

새들만 바삐 먹이를 찾느라 롯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너무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배낭도 풀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이십 여 미터를 오르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토글라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다소 가파른 오르막 하나를 넘어야 한다.

숨을 고르고는 이제 다시 출발! 4,600 이상의 고도에서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호흡에 벅찬 일이다.

단숨에 200미터를 올라 4,800고지를 밟아주겠다던 야무진 계획이

호흡에서 턱턱 막힌다.

 

한두 걸음 걷고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르고,

몇 걸음 걷고 거친 숨을 헉헉거리며 쏟아내면서

느린, 아주 느린 발걸음을 꼬무작거리며 꾸준히 옮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 올랐을

평범한 언덕 정도인데 보는 것처럼 만만하진 않다.

 

 

 

포터 지텐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났다.

지텐은 언제부턴가 출발하고 나면

으레 알아서 다음 코스에 먼저 가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

고지로 올라갈수록 현지인들과의 호흡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그야말로 체력 차이라기보다는 호흡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저들은 이 숨쉬기 힘든 고지에서 아주 헐하게 산을 오른다.

 

가파른 비탈길을 도드밟아 꼭대기에 올라서니

초르텐들이 줄지어 서 있고,

룽다가 여기저기에서 외로운 진혼곡을 부르듯 처연하게 흩날린다.

 

 

이들 초르텐은 이 쿰부지역 설봉을 오르다가 명을 달리 한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을 위한

추모와 명복을 비는 개개인의 무덤 내지는 묘탑이다.

 

 

 

 

 

 

잠시 숙연해진다.

내 마음만 숙연해 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도, 룽다도, 바람도, 흙과 바위도,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숙엄하게만 느껴진다.

 

로부체 방향으로 백여 미터 더 걸으니

장쾌한 시야가 터지며 또 다른 호장한 풍경을 빚어낸다.

 

 

 

좌우 설산을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이제부터는 계곡 옆길을 따라 걷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물이 완전히 살아있는 그 어떤 생명력을 연출해 낸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을 본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물이 아니라

무언가 모를 생동하는 깊은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흐르는 물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곳에서 만난 계곡물에서는

더없이 강렬한 생명의 연주를 감지한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4,800고지 이 높은 곳을 흐르는 생명의 물이 아닌가.

 

나는 때때로 흐르는 물 앞에 서곤 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아주 내밀하고 깊은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그 어떤 새로운 박동이 느껴진다.

완전히 살아 생동하는 그 어떤 우주적 흐름과도 같은,

혹은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수대(水大)의 여린 움직임의 감각과도 같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히말라야의 맑고도 시린 호흡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내 호흡과 히말라야의 호흡이 일치를 보는 듯,

이 생기어린 주변 환경과 걸음과 호흡이 마치 하나가 된 듯,

걷는다는 사실도 잊고 걷는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순화롭다.

유장한 침묵이 흐른다.

이 묵연한 선정을 따라 내 존재도

자연스레 본래의 커다란 침묵과 공명을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생각이라는 목소리들이 이 고요한 풍경 앞에 넋을 잃었는지

끼어 들 틈을 잃었다.

 

저 산 아래에서는 매일같이 내 존재를 복잡하게 휘어잡던 온갖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질서를 찾아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충분히 제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 또한 이 길 위를 걷고 있음으로써

내 몫의 삶을 표연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내 존재의 몫은 길 위를 그저 걷는 것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100% 순수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내가 그 어떤 엄청난 성취를 할 때나,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을 때보다도

그저 지금 이렇게 걷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완전히 삶을 연소하고 있다는 생생한 존재감이 깃든다.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이렇게 충장하고 꽉 찬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배운다.

 

우리 삶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보다

그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아무리 성스러운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 하는 자의 마음속에

삿된 생각이 끼어들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주에서 알고 그 행위를 성스러움에서 배제시키겠지만,

아무리 사소한 행위를 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행위자가 온전히 깨어있음으로써 그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진리에서의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위 자체보다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마음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계획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물길을 따라 한두 시간 걸었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이 처연한 땅 위에 계곡 옆으로 작지만 빼어난 풍경의 마을,

로부체가 나타난다.

 

 

 

 

6,000미터 로부체 피크를 비롯해

7,000, 8,000미터의 거대한 지붕들을

마치 뒷산 거느리듯 연꽃처럼 옴팡진 곳 꽃술자리 한 가운데

로부체 마을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오늘 하루를 신세질 곳인데,

서너 곳 있는 롯지는 이미 이른 아침에 다 차서 방이 없단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요즘 같은 성수기 빅시즌에는

단체 트레커들이 자신의 포터를 전날이나 당일 새벽부터 로부체 마을에 먼저 보내

방들을 전부 잡아 놓는다고 한다.

 

더구나 로부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오르기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라

다양한 루트로 올라 온 사람들이

거의 전부 이곳에서는 꼭 하룻밤을 묵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보니

더욱 방 잡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이 곳 로부체뿐만 아니라,

고락샵, 종라, 고쿄 등 정상 부근 사람들이 붐비는 전초기지로서의 마을들은

항상 방 잡는 일이 전쟁과도 같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지텐이 잠시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로부체 위로 두세 시간 거리, 내일 하루 묵기로 계획된 고락샵에

마침 도미토리 침대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그곳이라도 가겠느냐고 묻는다.

 

그마저도 누가 고산병으로 부랴부랴 내려가는 바람에

조금 전에 취소된 자리라고 한다.

당연히 따지고 생각할 겨를 없이 고락샵에 가서 묵기로 한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제 5,000고지의 낭카르창 피크를 다녀왔으니

고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라는 지텐의 말을 듣고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사실 고락샵까지 안 가고 오늘 하루 로부체에서 자고

내일 고락샵에서 자기로 계획한 이유는

거리가 멀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고산 적응을 위한 계획이었다.

 

지금부터의 높이에서는

고산병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여행자들의 조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법계에 맡기고 그저 인연 따라 갈 수밖에.

 

어쩌면 이것이 더 깊은 차원의 나와 연결된 우주 법계의 지성이

나를 위해 준비한 본연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나의 생각, 인간의 판단과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에서

준비한 더 깊은 계획에 맡기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저 믿고 맡기며 자연스러운 우주의 이치대로 흐르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일과를 하느님께 맡기라’고 했던 성경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혹은

‘아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

노자가 말했던 ‘무위자연’의 이치 또한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안(假案)의 계획일 뿐,

‘절대’ 바꿀 수 없는 계획은 없다.

언제든 그 계획은 바뀔 수 있다.

유연하고도 활짝 열려 있는 마음으로

미리 잡아 놓은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행의 일정도 그렇고, 삶의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일, 아니 당장에 다음 순간 벌어질 일에 대해

내가 무엇을 결정적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혹은 이 계획대로 되야만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롭다.

 

그러나 계획은 있되 그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치에 나를 맡기다 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활짝 마음을 열어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과 마주할 투명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보통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면 스스로 정한 그 틀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그 틀 안에서의 비좁은 삶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진부하고 반복적인

그냥 그런 통속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방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내 앞에 펼쳐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에 나를 활짝 열어두고,

그 어떤 것이 오더라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새롭고 창조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차원과 접촉할 수 있는

깨어남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이 변경되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고산병이 걸리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하나의 가능성이자,

새로운 체험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최종적인 목적지의 하나였던

칼라파타르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리 좌절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순간 성공만이 있을 뿐이지 실패란 없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실패도 성공도 없고

다만 우리 생각이 성공이라고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판단과 해석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다.

사실 모든 실패는 실패했다는 생각일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이 고지대에서도

봄처럼

아름다운 노오란 꽃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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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동시성, 진리에 직접 물으라
 

어떤 아주머니께서 불서들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자주 읽어본다고 하시는데 때때로 신기한 것을 경험한다고 하신다. 때때로 자식 문제로 고민이 있다거나, 어떤 고민들로 답답해하면서 답을 찾다가 우연히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볼 때, 종종 마침 바로 거기에서 원하던 정확한 답변을 얻게 되곤 한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 부처님께서 바로 그 쪽을 펼치게 해 주신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때때로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에 답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모처럼 켠 TV에서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한다거나, 우연히 펼친 신문기사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 평소에는 그것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가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에서도, 책에서도, 혹은 주변에서도 동시적으로 그것을 듣게 되기도 한다. 이것을 칼 융은 동시성(同時性)으로 설명한다.

칼 융이 한 여인을 치료하는데, 그 여인이 하루는 풍뎅이 꿈을 꾼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창문 밖에 풍뎅이가 날아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동시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질서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피트는 이러한 융의 동시성이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본다. 겉에 드러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있으며, 그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말하듯, 우리의 깊은 차원은 인드라망 그물코처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연기적 연결성에서는 그 무엇도 우연이 없다. 더욱이 감추어진 질서라 불리우는, 우주법계의 근원적 질서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어떤 부족함도 없다. 부처님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본래 충만했던 진리를 다만 발견하신 분이다. 사실, 진리는 온 우주에 충만하게 꽉 차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때때로 체험하곤 한다. 질문을 던지면 언제든 진리의 차원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뭣고’ 하고 화두를 던지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피트는 동시성을 자연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광대한 질서를 힐끗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믿는다. 바로 그렇다. 이 겉에 드러난 몽환포영(夢幻泡影)의 허상의 세계 이면에 완전하고 충만한 진리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만 우리의 아상과, 아집, 탐진치 삼독과 무명이 그것을 보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을 쉬고, 내면을 살펴본다면 그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힐끗 엿보게 될 수 도 있을뿐더러, 그 세계와의 깊은 연결을 이룰 수도 있으리라.

마음을 비우고 질문을 던지라. 세속적인 질문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해답을 법계에서는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물론 그 답은 다양한 방식으로 온다. 스님의 설법, 책이나 신문, 아이들의 말 한마디, TV, 아니면 문득 내면의 직관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을 닫아걸지 않는다면, 활짝 열린 맑은 정신 안으로 진리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스승에게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제부터 우주법계의 진리 그 자체에 직접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직접적이며 본질적이다. 또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법계 본연의 계획에 입각해 무한한 자비와 지혜로써 내리는 답변이 올 것이다. 에둘러 가던 버릇을 돌이켜 내면으로, 법계로 직접 노크 해 보라.

운학사 주지 법상 스님


법보신문 1040호 [2010년 03월 16일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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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창조하는 네 가지 방법

빗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지난 시간에 ‘내가 내 삶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 삶을 아주 멋지게 만들어낼 수가 있다, 창조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랄까 좀 희망찬 그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전 같으면, ‘집착을 하지 마십시오,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사십시오.’ 이런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마음을 멋들어지게 창조해내고 자유자재로 쓰면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보니까 아무래도 아주 상기가 되면서 ‘아! 이렇게 멋지게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바꾸어 가면서 살 수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찌 보면 이제 좀 찬물을 끼얹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말씀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일으켜서, 나의 삶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업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내 삶을 만들어낸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구의 삼업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사는 이유는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써 다른 업을 지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가 창조를 할 수 있느냐? 그리고 대부분 내가 내 생각으로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로 된다는 얘긴가? 사실과 좀 다른 것 같다. 『시크릿』에서도 얘기하기를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 나의 현실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더라.’ 라는 얘기를 한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이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아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 이 우주법계에서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하면서 남들에게는 ‘너는 망해라’ 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 거예요.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너지와 남들은 망해라 하는 에너지를 함께 일으킨 거니까 우주법계에서 볼 때는 이게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겁니다.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으니까, 그 두 가지 마음에 대해 똑같이 창조에너지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고 싶단 말인지, 망하고 싶다는 말인지 영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써 나의 창조에너지로 바뀐다 이 말입니다. 남들에게 ‘너 좀 망해 봐라’ 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나를 망하게 하는 강력한 창조에너지로써 내 삶을 망하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오는 자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세상을 창조하는 일체유심조의 원칙은 뭐냐 하면 바로 내 바깥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얼마만큼 자비롭게 대했느냐 하는 것이 내 삶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주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원리는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내 삶은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일종의 아상(我相), 아집(我執)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기 스스로 자기 능력을 한정짓고, 한계를 지우기 때문에 그만큼의 범위 안에서만 창조가 되지 그 바깥의 더 많은 창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은 이것 밖에 안 돼,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계를 지움으로써 자기능력을 자기 스스로 그렇게 딱 제한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능력을 딱 제한 해 놓으니까 그 능력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기 한계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신을 제한하고, 묶어두는데 쓰고 있으니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내 스스로 그 제한과 한계와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놓여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외부적인 힘도 나를 바꿀 수 없고, 내 삶을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자기 한정의 관념만 깨버리면 무한한 자기 창조의 에너지로써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이 깨어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다면 그것이 생겨나기를 바라고, 빌고, 기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라는 그 부분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 하고, 만족스러워하고, 충분히 느끼고 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빌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고 한다면 돈을 더 벌려고 막 기를 쓰고 원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재산 그 돈에 대해서 충분히 누릴 줄 알아야 되고 느껴볼 줄 알아야 되고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알면 그 감사한 것이 우주로 전달이 되어서 감사할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감사하지 않고 만족해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일으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창조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감사와 만족에 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현실을 창조해 내려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맑고 깨끗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깨끗하고 텅 비어 있을 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강력한 에너지를,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항상 혼란스럽고 망상이 들끓고 온갖 생각들이 막 죽 끓듯이 왔다갔다 오락가락합니다. 한 가지 판단을 가지고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가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듯이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까 뭔가 한 가지 원하는 것에 힘이 집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잘 하는 말로 몰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흐트러지고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에너지를 강력하게 쓸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명상과 기도 끝에 하는 발원이 힘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삶을 멋들어지게 창조하고 싶다면, 네 가지가 중요합니다. 만약에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네 가지 중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로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지요. 두 번째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짓지 말아야 한다, 아견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무한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바라고 빌기보다는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하는 참선과 명상 같은 그런 기도와 수행을 통해서 발원을 했을 때 그것은 큰 힘을 받는 것이라고 이렇게 네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의 창조를 뛰어넘으라

그러면 이제 좀 어떻습니까? 이제 좀 현실에서 잘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마음을 쓰면, 배운 것처럼 마음 내는 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삶이 창조되어 집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하는 그 크기만큼 거꾸로 내 삶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이제 창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내 뜻대로 세상을 창조한다 그것은 업이 아닙니까? 뭔가 내가 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이잖아요. 의지적인 행위가 곧 업(業)입니다. 의지적인 생각도 업(意業)이고, 의지적인 말(口業), 의지적인 행동(身業)도 업입니다. 아주 정확히 본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지만 다른 말로 내가 나의 업을 창조해내는 거예요. 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바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좋은 에너지, 좋은 삶을 창조해내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난 시간에 내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설법을 했던 내용은 뭐냐 하면 “기왕 세상을 창조할 거라면 못살고 고통 받고 부정적인 에너지 가지고 세상을 살지 말고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고 뭔가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창조하십시오.” 라는 방편으로써 그런 말씀을 드렸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이것이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한다면 본질은 뭔가? 방편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는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내안에서 자성부처님께서 본래적인 참나가 나를 창조해내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맡겨놓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가 내 삶을 창조하도록 완전히 나를 내맡겨놓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창조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본질적인 지혜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껍데기 의식인 에고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무명(無明)이다 보니까 나 잘되고자 하는 아상(我相)과 이기심에 기초한 세상을 창조한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방편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의업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아름답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창조된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창조에너지로 작업 해 놓은 것이 현재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지은 업들이 모여 그 업보라는 결과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라는 것은 곧, 불교적 표현으로 업을 변화시킴으로써 업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은 행위인데, 신구의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고,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마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 그 중에도 뿌리인 의업, 즉 생각을 어떻게 조작하고 다스리며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업의 결과인 업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도 바로 이것입니다. 업을 내보내면 업보가 끌어당겨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건 내보내는 업에 있어요, 업을 내보내면 당연히 업보가 끌어당겨지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반대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끌어당겨지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했습니다. 불교는 나의 행위가 중심이고, 『시크릿』은 내가 받을 결과물이 중심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데서 조금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업을 잘 지어야 좋은 과보를 받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업을 잘 짓고 과보를 창조해 낼 것이냐’를 말씀드렸는데요,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업이라는 것이 이 세상, 즉 껍데기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만, 근원으로 들어가면 업이라는 것도 공(空)합니다. 우리가 선업, 악업이라고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라는 것도 공해요. 불교에서는 업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업이라는 공한 환영과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 업 자체를 뛰어넘고, 선악 자체를 뛰어넘어 어떻게 업을 넘어선 본질적인 곳에 가 닿을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의 핵심을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라는 의미인데요,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업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선악 업을 뛰어넘어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즉 업이라는 구속에서 조차 뛰어넘는 것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창조에너지를 가지고 좋은 업을 짓고, 우리가 마음을 잘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명예도 높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도 사고, 남들 돕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 된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으로 그냥 인생이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부자로 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를 창조하고 싶어서 부자를 창조할 수는 있겠지만 부자와 가난 그 양 극단을 뛰어넘어 부에도 가난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고, 명예도 높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그 차원에서는 『시크릿』의 가르침, 업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공부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 잡히고, 여여한, 우뚝 선 지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착하게 사는 방법은 됐을지언정 착하게 사는 것이 도(道)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제가 누군가에게 기분은 나쁘겠지만 꼭 해 주어야 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을 한 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그 사람하고 좋게 지내려면 날카로운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겠지만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당장은 조금 껄끄럽더라도 한 마디 해 줘야합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그것이 다는 아닌 겁니다. 선악을 뛰어넘고,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으며, 부와 가난을 뛰어넘는 더 큰 지혜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텅 빈 근원 위로 많은 것이 지나간다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것은 이 완전한 지혜, 내안에 있는 부처가 나를 창조할 수 있도록 전혀 뒤탈이 없는 그런 어떤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려면 우리가 먼저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는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말씀드리자면 본래는 어땠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는 지금 나라는 아상에 얽매여서, 에고에 얽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질은 어떠한가? 나라는 삶에 얽매이지 않았을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중생으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얘기입니다. 이 우주법계의 본래 근본, 나라는 존재의 근본 마음자리, 그 바탕자리, 주인공자리, 그 자리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완벽하고도 고요하고도, 청정하고도, 순수하고도, 텅 비어있는, 하여튼 맑고 텅 비어있는 어떤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원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나라는 존재를 원이라고 했을 때, 원 안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욕심과 집착과 삶의 계획과 판단과 온갖 것들로 내 것, 내 생각, 내 소리라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본래는 이 원이 텅 비어있었고 맑고 청정한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티 없는, 먼지하나 없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는 그러한 청정하고 맑은 텅 빈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이 우주법계도 그렇고. 본래의 우리 자신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많은 때가 낀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본바탕은 항상 깨끗하고 맑고 청정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더러워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더럽혀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마음자리는 항상 맑고 깨끗하고 청정하다, 텅 비어있다, 텅 빈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이 맑고 깨끗한 텅 빈 자리에 수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흘러가고 지나갑니다. 삶이라는 것이 등장을 하고 사라지고, 스쳐 지나갑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가고, 갑자기 친구가 하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중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고등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20대 때 대학교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또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요. 여러분 삶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지금까지 내 존재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도 스쳐 지나가고 나쁜 일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도로에, 고속도로에 가만히 있으면 자동차들이 무수한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간단 말입니다. 온갖 생각 생각들도 지나가고 우리의 어떤 감정들도 지나가고 수많은 에너지들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물질들이 지나가고 수많은 대상들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고 사건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어떤 에너지의 파장들이 파동들이 지나갑니다. 제가, 물리학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본질은 모든 물질도 정신도 모두가 하나의 파동이었고 파장이었다 그랬거든요. 수많은 파동들 파장들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수많은 파동과 파장, 에너지의 파장이 그 본바탕 위를 지나간다 말이에요.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맑고 깨끗한 바탕 위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지나가니까 맑고 깨끗한 바탕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물러있지 않는단 말이죠. 그냥 지나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모든 것이 지나갈 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벌이기 시작했냐 하면, 그 중에 눈에 띠는 게 있단 말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게 있어요. 뭔가 모르게, 모든 것들이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는데, 수많은 자동차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그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맘에 드는 게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의식의 초점을 집중합니다. 처음의 텅 빈 자리는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더라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 스쳐 지나는 것들은 아무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았어요.


지나가는 것을 멈춰 세운다

우리의 의식은 다만 무엇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어요. 강가에 앉아서 강물 줄기가 지나가는 것을 다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게 없었고, 나와 더 가깝거나 더 먼 것도 없었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었어요. 좋은 것 나쁜 것 없이 그저 존재 위를 스쳐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나에게 좀 더 관심이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띠기 시작했고,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갖다 보태게 된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냥 스쳐지나가야 될 것이 갑자기 나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나의 의식이 거기에 딱 머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의식으로써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자, 다만 바라보는 자로서 머물렀어야 되는데, 다만 보는 자가 되지 않고, 거기에 내 생각을 개입시키고, 내 의지를 개입시켜서 내가 맘에 드는 것을 유독 관심을 가지고 봤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 아상을 개입시킨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멈추게 됩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멈추게 만든 거예요. 그럼으로써 머무르게 됩니다.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바라보기만 해야 되는데, 그것이 나에게 와서 머물기 시작합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해요? 집착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집착이 하나 없었던 맑고 청정하게 티 없이 깨끗하던 본바탕에, 그저 그 위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것들을 그 가운데 일부분을 내 식대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만 채택해서 머물게 만들고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옆으로 껴놓고 사는 겁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집착하고, 좋아하고, 머물러 사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것과 관련된 것들, 또 다른 좋은 것들이 눈에 띠게 되고 그때그때마다 이제 집착해서 붙잡아 놓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의 덩어리들은 자꾸자꾸 덩치를 키워요. 점점 커지는 겁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사실은 그 본바탕이 본래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아상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또 나머지 대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집착 없이 그저 지켜보는 자 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인 삶도 일부분 살고 있고 중생의 붙잡고 집착하는 삶도 살고 있습니다. 그냥 스쳐 보내는 것도 있고, 붙잡아두는 것도 있잖아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내가 좋다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상으로 붙잡아 놓고 집착해 놓고 내 것으로 만들려던 대상들을 나머지 대부분 그저 스쳐 보내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두고 스쳐 보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 자유로워집니다. 붙잡아 둘 것이 없어져요. 내 것을 빼앗길까봐 근심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집착한 것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그 모든 삶 위에 스쳐 지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되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크게 보면, 집착을 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선택적으로 내가 관심이 있는 것들만 집착을 하고 살지, 관심 없는 것까지 집착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상, 아집의 형성

제가 앞에서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자동차가 휙휙 지나갈 때 빠른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은 집착 안 하거든요. 마음이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갈 뿐이에요. 근데 순간 어떤 한 차에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남자친구가 거기에 타고 있는데, 딴 남자하고 딴 여자하고 부둥켜안고 운전하는 것 같은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럼 그것은 붙잡는 겁니다. 그 생각에 계속 머물러있어요. 그래서 몇날 며칠이고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그 다음에 여자 친구를 만나 얘기도 못하겠고 그 생각에 자꾸 붙잡혀있는 겁니다. 이것처럼 뭔가를 붙잡아두면 그것이 나에게 와서 문제가 되고 그것이 나에게 집착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집착하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많지요. 더 많습니다. 즉 흘려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흘려보내듯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 또한 흘러갈 수 있도록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섭니다. 내 의지로써 내 생각으로써 그것을 거기에만 제한시켜서 관심을 둠으로써 막아서서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럼으로써 뭐를 창조하느냐 하면 이제 아집(我執)을 창조해냅니다.

나라는 집착덩어리, 내가 좋아서 선택적으로 붙잡아두었던 것, 그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어때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내거라고 생각해서 붙잡아두었던 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정이 드는 거예요.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자꾸 개입되니까 이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붙잡아 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내가 집착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집착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아니고 나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스쳐지나가는 것을 붙잡아놓았을 뿐입니다. 붙잡아놓았을 뿐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흘러가도록 돼있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나에게 와 있을 것이라는 고정된 믿음을 가지고 붙잡고 있는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아요. 꽉 부둥켜안고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이나 존재 뿐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 어떤 한 가지 특정한 생각을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 내 견해라고 생각하고 내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자기 견해가 뚜렷한 것을 좋아해요. 나라는 견해가 뚜렷하게 있으니까 나라는 견해 그것을 가지고 또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 견해에 합당한 외부적인 대상을 찾아서 붙잡아 집착합니다. 그러면서 이 바깥에 있는 것들도 다양한 것들이 내 것으로 편입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안팎에서 내 것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내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아집과 아상, 아견이라는 나의 집착 덩어리가 이 몸뚱이를 붙들게 됩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설정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방어벽이라는 것도 내 것이라는 집착, 어떤 생각에 대한 집착, 그것을 하나의 방어벽처럼 나라는 울타리, 나라는 울타리를 막고 있는 방어벽으로써 탁 틀어막고 있는 거지요. 그 방어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의 집착이고, 하나의 나라는 아견이고, 아상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는 하나의 틀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다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어떤 한 가지를 보고 누구나 집착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것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그저 흘려보내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는 강가에 있는 돌이 다 스쳐지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중 특별한 돌들을 붙잡아 ‘내 것’ ‘내 소유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아무리 봐도 내 거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냥 흘려보내기 밖에 안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기가 만들어놓은 어떤 틀, 아집, 아상, 그 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상을 내가 만들어 놓은 아집에 빗대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잣대 짓고, 방향성을 설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그것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고, 삶의 방향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까 말했듯이, 돌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떠냐 하면 돌만 찾아다닙니다. 심마니가 산삼만 캐러 다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건 관심이 없습니다. 운동 좀 해볼래 해도 운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 좀 해볼래 해도 수행에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 높은 자리를 준다고 해도 별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요. 내가 딱 틀 잡아 놓은 나라고 형성해 놨던 그 틀에 있어서 거기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를 정의하는 어떤 집착덩어리를 가지고 자기를 정해놨던 틀로 만들어서 그것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내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식을 전혀 다르게 키웁니다. 자식에게 정말 친환경 쪽으로, 정말 자연 그대로, 정말 지혜롭게 키워야 되겠다는 가치관을 가진 분들은요, 서울에 사는 대학교 교수님이 자기 자식이 서울의 좋은 대학, 고등학교, 좋은 대학을 다니는 애를 갑자기 데리고 시골에 내려와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시골에 있는 허름한 대안학교 같은 데 보낸다 말입니다. 그 좋은 대학 그만 두고 서울대를 나오고 무슨 카이스트를 나오고 한 사람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 삶을 갑자기 때려치우고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서울대를 나왔던 사람들이 대거 몇 명씩 한꺼번에 출가를 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어떻게든 공부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가치관을 가지고 키우는 사람은 모든 것의 기준을 공부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결정짓겠지요. 그러나 어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면 뛰어놀게 해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과 하나 되어서 어울리게 해줄까 이런 거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삶의 방식 자체가 어디에 머물러 있고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이라는 그 직업이 바로 나와 동일시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 과목 어떤 과목을 담당한다고 하면 그 과목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 뭐가 관련되더라도 그 과목과 관련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그 틀에 그 색안경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수학선생님은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보고, 과학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보고, 음악선생님은 어디를 가도 관련된 음악을 찾게 됩니다. 우스개로 직업병이라고도 하는데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평생 흙 가지고 무엇을 만들고 짓고 하셨다 보니까 어디 모처럼 여행을 가셔서도 흙만 보시면서 좋은 자재다, 아니다 하는 것만 생각하십니다.

스님이나 성직자 분들도 마찬가지죠. 자기종교라는 그 틀에 빗대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색안경에 빗대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불교신자나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도 마찬가지죠. 자기의 종교적인 색안경, 집착하고 있는 그 종교적 견해나 사상 그 틀 속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갈등이 엄청나잖아요? 자기만이 집착하고 있는 하나의 덩어리가 딱 있어서 그것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환경론자와 개발론자 사이에 그 갭 또한 엄청 크거든요. 그것도 자기가 나름대로 틀 잡아 놓은 그것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나라는 생각에 탁 굳게 집착되어 있단 말입니다.


창조할 것인가 창조를 넘어설 것인가

이렇게 되다 보니까 처음에 애초에 텅 비어있던, 맑고 깨끗하던 그 공간을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 중 처음에는 하나를 붙잡아 두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개, 세 개, 수많은 것들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아놨던, 머물게 집착해놨던 수많은 것들로 나라는 어떤 존재를 형성시키게 됩니다. 아상을 만들고, 존재의 집을 만들고, 어떤 존재의 성을 만든단 말입니다. 견고한 어떤 벽돌을 쌓아서, 방어벽을 쌓아서 나라는 것을 딱 만들어두는 작업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해왔던 작업이고, 그 틀에 기초해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행무상이라는 단순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순한 가르침을 변화하도록 내버려두질 않고, 막아서고 집착하고 붙잡아둠으로써 생겨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그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 또는 시크릿이나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책들에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창조해내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 역설하고 있는 그 많은 가르침들, 그것이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말한 본질적인 가르침에서 얘기한다면,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내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붙잡아서 나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법을 말해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의 어떤 집착, 집착 덩어리를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것을 집착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그것에 집착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방편이라고 했어요. 기왕 집착할 거면 나쁜 걸 집착하지 말고 좋은 걸 집착해라, 기왕이면 아주 그냥 지지리도 가난하게 못 살지 말고 부유하게 살아라, 이런 방편을 얘기해줬던 거예요. ‘나’라는 것, 아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을 ‘나’로 창조할 것이냐 하는 부분이 바로 지금까지 살펴봐 왔던 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창조 작업은 곧 아상을 견고히 하고 확장하는 방법인데, 어떤 방법으로, 어떤 부분으로 나를 창조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란 곧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창조한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기에, 이런 아상을 창조해 내기 보다는 차라리 창조해내지 않는 게 더 윗자리입니다.

선행(善行)보다는 무위(無爲)의 행이 더 본질적이란 말이지요. 선행을 하는 것은 선의 과보를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윤회하는 토대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선의 과보를 통해 천상에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벗어나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선악 자체를 뛰어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는 법을 방편으로 말씀을 드렸지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정체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얘기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생각은 항상 이기적인 것을 창조해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창조해내요. 우리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아집과 아상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본질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있습니다. 아상에 묶여 이기적인 것들만 만들어 내기 쉽습니다.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만을 위한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다보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처음부터 실수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처음부터 과한 욕심을 부려서 나쁜 짓까지 하게 되고 남들을 괴롭혀서라도 더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유함이 늘어나다 보면 점점 더 집착이 늘고, 차차 점점 더 삿된 생각으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상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창조 작업, 아상과 아집을 잔뜩 쌓는 작업을 잘하는 사람을 아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옹호하고,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줍니다. 온갖 상을 내려줍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하나 딱 일으켜서 부자가 된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일인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일인 것처럼 당연히 이 세상에서는 알고 있고, 묘사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렇게 강력한 마음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을 때 업(業)조차 비껴갈 수 있습니다. 잠시 비껴갈 수 있다 이 말이지요.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업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업이라는 것은 과거에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입니다. 과거에 만들어놓은 창조의 행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가 지금 드러나는 거거든요. 지금 아니면 미래에 드러난다는 거예요. 즉 과거에 이미 해놨던 창조의 행위, 신구의로써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 그것을 우리는 업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지금 이 순간 내가 한 창조의 행위, 그게 바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자유의지 즉 현재의 업으로써 과거의 업에 대한 과보를 잠시 비껴갈 수는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과거의 과보를 받아야 하지만 현재의 자유의지, 즉 창조의 에너지가 강력해서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새로운 업을 짓고, 새로운 자유의지를 일으킨다면 이번에 받아야 할 업을 지금 당장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미 지어놨던 업은 반드시 받기는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언젠가 받아야 해요.

이 정도로 우리가 지금 생각한 어떤 마음 에너지가 강력하기는 하나, 업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거나, 업장을 소멸시키거나, 이럴 수 있지는 못하다는 말입니다. 창조 작업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과거에 지어놓은 아주 큰 업이 있으면, 지금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했더라도 그것은 꿈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꾼 것과 동일한 것이지 결국에는 그 악업이 내 인생에 등장을 반드시 하게 될 때가 있단 말입니다.

지금 당장 등장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 에너지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현실세계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나쁜 짓도 하고 못된 사람인데도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때, 혹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다음 생에 결정이 됩니다. 그 다음 생에 바로 인색했던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날 수가 있고, 사람을 괴롭힌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 태어나도 괴롭힘을 당하는 인연을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죠.



아상이 아닌 참나가 나를 이끌게 하라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느냐?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이냐? 내 삶을 아상에 기초해 창조하며 사는 방법 말고,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앞에서 제가 잠깐 말씀 드렸는데, 내가, 나라는 아상 아집이, 나라는 에고가 내 삶을 창조해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해서는 안 돼요. 아상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주법계가,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참된 법신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하기 좋아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불성, 주인공, 자성불, 본래자리, 참나, 신성(神性), 대지의 어머니, 어떻게 얘기해도 좋은데, 그 본연의 자리, 본바탕의 자리, 그 자리에서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그냥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더 깊은 본래의 내가 나를 끌고 가도록 맡겨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나는, 아주 나약한 나고, 아주 조악한 나고, 아상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아주 조잡스런 나가 아니겠습니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이잖습니까? 이런 지혜도 없고 빈약한 내가 아니라 내 안에는 더 큰 내가 있고, 엄청난 지혜의 덩어리가 있단 말입니다. 참나가 있다. 그 참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도록 하는 겁니다. 결정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주인공이 할 수 있도록, 모든 내 안에 있는 본래자리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가, 우주법계가 스스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에서 행하는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내버려둔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가장 지혜로운 본연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내 안의 자성부처에게 믿고 맡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일이 펼쳐집니다. 아주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이 펼쳐져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우주법계는 나에게 근원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겉껍데기의 나라는 아상은 당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본질적인 도움이 아닌 일들을 벌입니다. 아상이 보기에는 남들을 돕기보다는 나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원적 지혜에서 본다면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을 때는 당장에 조금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참된 지혜의 일들을 합니다. 이처럼 우주법계의 계획은 광대하고 무한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는 이기적인 성취를 잘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기초해 벌어들인 돈이고 성취이며, 타인을 밟고 일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 죽고 나면 다음 생에 지옥 갈 게 뻔하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우주법계에서는 그런 계획을 잡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음 생에까지 도움이 되는 계획을 잡는단 말입니다.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계획은 더 장대하고, 더 크고 넓으며, 시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계획은 지금 나의 계획과는 다를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당장 돈을 많이 버는 게 절대목표일 수 있으나, 법계의 계획은 그게 목적인 아닌 겁니다. 우주법계의 계획은 내 계획과 다를 수 있으나 항상 전적으로 옳은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우주법계에서는, 내 안의 자성부처는 나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 그것도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써 전적으로 옳은 일만 하고 있는 겁니다.


우주법계의 본래의 계획, 금강경의 가르침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참다운 지혜, 참된 깨달음, 열반, 평화,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엄청나고 웅대한 우주법계의 계획을 위해, 부처님의 계획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즉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의 사상이에요.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녀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구류중생 전부를 내가 모두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발원해야 하며 그 발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답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에 ‘내가 했다’고 하는 아상을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해 냈다는 아상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아상을 타파하고 우주법계의 계획에 따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 따라 그저 일체 모든 존재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그 큰 법계의 질서에 나를 내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기에 그게 조금 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더라도, 좋든 나쁘든, 맞고 틀리든, 잘된 일이든 나쁜 일이든, 판단 없이 무조건 맡기고 가라는 겁니다. 더 큰 차원의 진리에서 더 큰 차원의 어떤 나를 돕는 계획의 일환에 모든 것을 맡기고 가라 하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아상이 무너지고, 뭐든지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믿고 맡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붙잡지 않겠지요? 이제부터는 막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내 걸로 만들어놓고 막 집착해서 붙잡던 삶에서, 모든 걸 믿고 맡기게 되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게 됩니다. 그냥 거기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요. 흘러가는 것이 법계의 일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제행무상이 진리란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거예요. 이처럼 내 걸로 붙잡지 않고, 믿고 맡기게 됐을 때 저절로 집착이 놓입니다.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주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맡기는 것이 바로 무집착(無執着),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겁니다.



창조할 것인가 내맡길 것인가

그러면 이즈음에서 궁금한 게 있을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내 삶을 내 스스로 창조하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보다는 온전히 맡기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어떤 말이 맞는 겁니까?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앞에서 설명한 일체유심조, 즉 내 스스로 창조하는 작업은 방편의 지혜이고, 본질적인 지혜는 곧 내맡김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창조한다는 말은 업의 굴레 속에서의 일이고, 내맡김이라는 것은 업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또 창조 작업은 내 스스로 무엇이 창조되기를 바라고, 원하고,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원하고 원하지 않는 둘로 나누어지기 쉬워요. 의도한 바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때 우리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결과에 집착하게 된단 말입니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행하면서, 즉 마음으로써 무언가를 의도하고, 어떻게 되기를 바랄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그저 순수한 의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뭐랄까요 그것은 그저 선호의 차이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나는 이 두 길 가운데 이 길을 선호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쨌든 그 두 가지 길 모두가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금방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죠.

이것처럼 우선 첫째로는,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창조하며 살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 첫째 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본질적인 지혜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모든 선호를 놓아버리고, 모든 의도를 놓아버리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언제나 지금 이대로 완전한 우주법계의 완전성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내 의도가, 내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굳게 믿고 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창조 작업에 비해 두 번째 내맡김의 길은 더없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아니, 내맡김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구현해 가는 작업이 됩니다. 창조하겠다는 생각에는 창조될지 말지에 대한 구분이 있고, 원하고 원하지 않는 선호가 있지만, 내맡김은 그 어떤 구분도 없고, 분별도 없고, 오직 완전성만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겁니다. 내맡김의 길에서는 언제나 ‘지금 이 자리’가 최상의 자리가 됩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창조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것을 창조해야지만 완전해 지고, 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완전히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해 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원하던 모든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내맡길 것인가, 관(觀)하라

그러면 이제 맡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에 일체를 내맡기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 잘났다고 내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우주적인 근원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겠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고 싶어도 잘 안 된다는데 있습니다. 맡기고 싶지만 맡겨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건가 싶다 말이에요.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맡겨지고, 어떻게 해야 흘러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답이 바로 똑바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어떤 것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것이 어떤 방식으로 스쳐지나가다가 내가 그것을 끌어당겨서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내 옆에 두려고 애써서 집착하고 있었는지까지 눈에 보이고, 이것을 놔버리게 됐을 때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이 흘러갔을 때 더 큰 자유가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고 집착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뒀을 때, 그때 아름다운 본연의 일이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관(觀)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깨어있어야 된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려 하는지를 분명히 보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분명히 보고 있을 때, 또렷이 보고 있을 때,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내가 막아서고 있는지, 이 세상 이치가 제행무상이라는 것, 제법무아라는 것, 실체가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구나 라는 자각이 생기고, 이해가 생기고, 참된 지혜, 앎이 생기는 겁니다. 그랬을 때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억지로 집착을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집착이 놓여지게 되죠. 저절로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나인가

그러면 보세요. 이제 방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관하라, 믿고 맡기라, 집착을 버려라 얘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도,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이렇게 또 묻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조금 다른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두는 스쳐지나가고 있는데, 스쳐지나가는 것을 내가 내 것으로 붙잡았고, 집착해서 묶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묶어 둬 놓고 수많은 것이 내 옆에 막 쌓여있는 것, 나라고 생각해서 막 쌓여있는 것, 그게 나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내 소유, 내 생각, 내 성격, 내 몸뚱이, ‘이것이 과연 나인가’, ‘이것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놓고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었는데, 실제 그게 내가 맞는 것인가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해 내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집착해서 쌓아놓은 게 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나인가. 몸뚱이를 나라고 하지만 이것은 이번 생에 지나고 나서 다음 생이 되면,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신의 세계에 갈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도대체 어떤 것이 나냐? 가만 살펴보면 내가 없단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냐’, 이렇게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뭐냐’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된다 말이에요.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나에게 묻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꾸만 묻게 되면 어쨌든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지를 답을 내야 되잖아요. 물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답을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답을 찾게 됩니다. 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봐야 되거든요. 봐야 답이 나오잖아요.

문제를 냈는데, 어떤 도형을 하나 갖다놓고, 이 도형을 어떻게 하면 어떤 게 만들어져? 이거 한 번 만들어 봐라, 답을 내 봐, 하고 물으면 그 답을 풀기 위해서는 도형을 자꾸 봐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봐야지만 답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봐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이 뭐꼬?’ 하면, 나는 누구인가, 이 뭐꼬 라는 화두에 답을 내려면, 봐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편견 없이 봐야 합니다. 기존의 편견, 선입견 어린 시선으로 보면 답을 낼 수가 없어요. 새로운 문제를 냈는데, 기존의 편견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답을 풀 수가 있겠어요?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완전히 과거를 놓아버리고, 편견을 놓아버리고,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봐야 됩니다. 편견의 시선으로 보면 똑같이 집착의 눈으로 보이니까 똑같은 편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편견 없이 무분별로써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게 됐을 때 답이 나온다 그 말입니다. 이게 바로 화두선(話頭禪),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입니다.

화두선, 이 뭐꼬,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그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 물음을 자꾸 던졌을 때, 그것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지켜보게 되고, 그 결과 ‘아 이것이 흘러가는 거고 내가 붙잡아 놓은 것이구나, 이것이 붙잡아 놓은 것일 뿐이지 이것이 실체가 아니구나’라는 자각이 생겨서 법계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보게 된다는 관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수행이나, 관하라는 수행이나, 집착을 버려라 하는 수행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라 하는 수행이나,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든 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여라, 거부하지 마라,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얘기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써 내가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법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또 그렇게 했을 때 집착이 놓이니까 집착을 하나하나 놓아보고, 또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나라고 생각했던 이 집착덩어리 이것이 과연 내가 맞는가 라는 물음을 자꾸자꾸 나에게 던지고, 그리고서는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관찰함으로써 과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가 하고 바라보고 관찰하는, 그러면서 직접 온몸으로 답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수행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한번 실천해 볼만 합니까? 수행해 볼만 하지요?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당장에 실천해 스스로 맛보고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법상, 무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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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종교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나와서 불교를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혹은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종교의 근원적인 이유,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그 부분을 오늘은 좀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는 해탈과 열반을 향해 가는 종교다, 그리고 ‘나의 해탈과 열반뿐 아니라 일체중생을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종교다.’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금강경의 물음을 다시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가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이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는지’의 답변에 대해 우리 생각에는 부처님께서 수행법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수행해라.’라고 답을 할 것으로 일반적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의외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십니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 구류 중생이라고 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열반으로 인도하여 완전히 멸도에 들게 하리라’ 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답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수행을 해야 되느냐?’ 라고 하는 이 질문에 ‘일체 중생을 완전한 행복인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라고 하는 동체대비의 마음,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내야 한다 라고 답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여기에 아주 중요한 불교의 목적이자, 우리들 모든 존재의 삶의 목적이 드러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의 목적은 깨달아 부처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쉽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하겠어요. 깨달음을 얻어서 그것으로써 내가 돈 좀 벌어볼까, 명예를 높여 볼까, 내가 좀 큰 스님으로 대접받아 볼까, 유명세를 타 볼까, 깨달은 자로서의 어떤 대접을 받아볼까 라는 생각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나 홀로 깨달음을 얻어서 나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 스님들께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일체 중생들을 구제하기가 쉬워진다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들을, 많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고 평화로움으로 이끌고 자비로 이끄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불교는 그냥 깨달음을 얻으면 끝나는 종교구나, 깨달음만 얻으면 되는구나, 이렇게 된다면 설사 지혜가 조금 증장된다 할지라도 자비를 소홀히 여기기 쉽게 됩니다. 물론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다. 나중에는 결국 하나로 만나는데, 너무 깨달음과 수행에 집착하고 매진해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비와 사랑을 조금 소홀히 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얼마만큼 공부가 되었는가를 보는 잣대

그런데 어찌되었든 간에 불교에서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다니는 근본적인 목적은,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겠다, 불교를 통해서 내 마음 좀 편안해 보겠다, 어떻게든 내 삶이 좀 아름다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런 목적으로만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목적은 불교를 공부함으로써 나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나아가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내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것입니다. 바로 이 자각,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지혜이고, 이러한 동체대비의 지혜가 생겨나면 저절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가 곧 자비이고, 깨달음이 곧 사랑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모든 목적이 자비와 사랑에 있다면, 사실 내가 수행을 해 나가면서, 마음공부를 해 나아가면서 또 절에 다니면서, 내가 어느 정도 마음공부가 되었느냐, 내가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숙되었느냐, 나의 삶에 어떤 진보가 있었느냐, 내가 조금 더 깨달음에 가까워 졌느냐, 이것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만큼 자비로워지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절에 다니기 전보다 절에 다니면서 조금 더 자비로워 졌느냐, 무자비하고 악의에 찬 화와 증오에 물든 행동을 얼마만큼 더 줄여 나아가고 있느냐, 내가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얼마만큼 더 사랑이 깊어지고 있느냐, 내 마음이 사랑과 자비로 넘쳐나고 있는지, 이것을 살펴보면, 내가 얼마만큼 수행이 되어가고 있고, 얼마만큼 삶을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판가름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잣대가 된다는 겁니다.



행위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직업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어떤 의도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해 집니다. 똑같이 공무원일지라도, 똑같이 사회봉사단체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있을 지라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또 똑같이 절에 와서 절을 하고 있을지라도, 어떤 의도로 하느냐, 이것이 내 개인적인 기복을 위한 것이거나 내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과 평화로움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그 의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는, 행위 이면에 있는 의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어떤 마음의 의도로써 그 행동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봤을 때는 아주 무자비하게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것을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들이 했을 때는 그것을 우리가 무자비하다 라고 생각지 않거든요.

저의 은사 스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아주 엄하시단 말 이예요. 너무 엄하셔서 아주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입니다. 그냥 뺨을 때리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때로는 거친 욕설도 하시고, 저 때만 하더라도 때때로 맞았는데, 저의 윗대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하고 훌륭한 스님들, 그 스님들 또한 은사 스님 밑에서 공부할 때는, 거의 하루도 안 맞은 적이 없다고 그래요. 옛날에 군 생활 하다 보면, 하루라도 안 맞으면 잘 때 오히려 불안하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야말로 그것처럼 하루라도 은사 스님께 안 맞은 날이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그랬다는데 지금에 와서 그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요, 은사 스님이 그렇게 무서웠었고, 매서웠던 것에 대해서 증오를 품고 있다거나, 아주 미운 마음을 품고 있다거나,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라고 원망한다거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화를 내고, 때로는 매를 들고 하시는 그 의도,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우리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 진리로 깨우침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그 행위를 하느냐 하는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똑같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이냐, 그 이면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할 것이냐 하는 이것을 분명하게 명확하게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의 의도에 따라 회사 전체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직장 생활에서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붙고 무한한 복이 쌓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 복이 안 붙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 일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겉에 드러난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전혀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이면에서는 고통과 화와 짜증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은 자를 볼 때 그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알 수가 없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자는, 너무나도 평범해 집니다. 우리와 다를 것이 없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평상심으로 사는 겁니다. 지극한 평상심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휙휙 날라 다니거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신통 자재함을 부리거나, 여러분들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내년을 조심하십시오. 사업에 투자하지 마세요!’ 라고 하거나 뭐 아는 소리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나도 똑같고 평범해 지지만, 그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스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평범함 가운데의 그 비범함을 모르죠.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청소하고 똑같이 사니까 말 이예요. 그러나 이 이면에 담긴 의도는 우리와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심,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면의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동일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 속에 이 우주를 먹여 살릴 만한 큰 대자비의 마음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또 똑같은 행위 속에 겉으로 봤을 때는 자비의 행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복을 까먹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가 보통 깨달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자비심 그것 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할 때는 그것 자체가 완전한 동체대비심, 완전한 자비심, 일체 모든 중생을 향한 완전한 자비심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참된 자비란 무엇인가

그러면 자비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라고 하는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랑, 자비심, 이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는 것은 어떤 한계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정된 것이 아니고, 선택적인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고, 저런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눠놓고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선택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한 동체대비의 사랑이 아닙니다. 동체대비라는 말 자체가, 동체(同體), 같은 몸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여러분과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동체, 바로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이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온 우주를 하나 거르지 않고 모조리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적인 사랑이 아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해석이 없고 심판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내가 어떤 여인을 사랑했고, 어떤 멋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사랑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보통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좀 뭐랄까요.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상에 갇힌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사랑하는 이면에는 사실 증오와 믿음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요. 깊이 사랑하면 깊이 사랑할수록 사실은 더 깊은 곳에서는 깊은 증오도 함께 품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난다고 얘길 했을 때, 조금 사랑했던 사람보다, 내가 정말 믿었고 정말 사랑했다. 라고 생각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 더 큰 충격을 받고, 더 복수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그냥 떠나가더라도 별 느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 이면에 사실은 증오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히 사랑할 뿐이라면,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이만큼 사랑 받겠지 라는 계산이 깔리지 않은 온전히 베푸는 사랑을 한다면 그냥 줬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를 살펴보려면, 여기에 분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차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아니면 무분별에 의한 무차별에 의한 사랑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죠. 차별이 생기면 이게 좋고 나쁜 게 생긴단 말이에요. 좋고 나쁜 게 생기면 좋은 것은 내 편이 되고, 나쁜 것은 적이 된다 말이죠. 적과 아군이 생겨요. 그래서 내 편 네 편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기고, 내 것 네 것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옳다 그르다 라는 마음이 생겨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적과 아군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로 싸우게 됩니다. 다투게 돼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을 때 옳은 것과 틀린 것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전쟁을 하게 되요.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은 그 어떤 다툼도 없다는 거죠.



심판하지 않고 무한히 사랑하는 신

우리는 보통 ‘신은 우리를 심판하신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일을 했는지 그른 일을 했는지를 신께서 심판하신다. 그래서 저 위에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을 우리는 신으로 알고 섬기고 있다는 말이죠. 좋은 심판 받기를 바라면서, 또 나쁜 심판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신은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뭐에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나누는 것이거든요. 이것은 죄다 이것은 선이다 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신은, 신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인 것이고 완전히 절대적인 것이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사랑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미워하고 이러는 분이 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잘못 알아왔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하는 신으로 알다 보니까 어때요? 신 앞에 서면 떨게 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요.

그러나 사실 신은 무한한 사랑이고, 완전한 자비이며, 무분별 그리고 무차별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어머니가 자식을 품어 안듯 그렇게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못했다고 미워하고, 잘 한 자식만 선택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듯이, 신도 그 이상입니다.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싫어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주고 착한 일 한 사람은 선물을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존재를 완전히 품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분이십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 앞에 서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바로 그게 신의 진실 된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신에 대한 용어는요, 어떤 특정 종교의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도 같은 용어입니다. 온 우주의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심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차별이 있게 되면 너와 내가 생기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어떤 종교에서든지 신의 사랑이 유대인들만 사랑하는 것이고 유대인들만이 신의 자식이라고 한정짓는 선민사상, 이것을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신을 모독하는 겁니다. 어떻게 신의 사랑이 어느 한 종족에게만 한정될 수 있겠어요. 또 신의 사랑이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 그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신의 사랑이 있다, 이것처럼 신을 무시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절에 다니니까 저의 어릴 적 아주 절친했던 친구는, “이렇게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다. 우리 신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착하게 살아도 지옥 갈 텐데,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봐줄 수가 없다. 제발 좀 개종해라” 이렇게 하는 분이 있었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신이 아니지요. 아니 신을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분으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신이라는 분이 네 종교, 내 종교 나눠서 이 종교에 있는 사람만 올바르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 안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참된 하느님께서는 불자들도 사랑하고, 참된 부처님께서는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도 똑같이 자비로써 대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많은 목사님 신부님 또 성직자 분들을 만나 뵈면, 지금 말했던 이러한 신을 섬기지, 어떤 한계 지어진 조건 지어진 신을 섬기지 않더란 말입니다. 신은 그 어떤 모든, 일체 모든 존재에 대해서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네가 이 종교 믿으면 사랑할거야” 이런 것이 아니란 말이죠. 모든 존재를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자비라는 거죠. 그래서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전혀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그랬어요.


사랑 없음을 탓하지 말라. 다만 차별하지만 말라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뭐냐 면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하는 실천적 지침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있을 겁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얘기하는데, 또 교회나 성당을 가도 사랑을 얘기하는데, ‘나는 너무도 자비심이 부족한 것 같아. 나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이런 죄책감,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우리 스님들, 성직자나 수행자들은 그것이 좀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 출가하고 나서 내가 진정한 수행자라면 끓어오르는 자비심을 주체할 수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단 말이죠.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인가, 한없는 자비심이 왜 없는 것이지?’ 하고 실망감과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나는 왜 이리 사랑이 없지, 난 왜 이렇게 자비롭지 못하지’ 하고 자기 자신을 탓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랑이 없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끊임없는 판단이 일어나는 것, 이것을 걱정해야 된다는 말이죠. 판단과 분별과 시비와 이런 것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완벽한 사랑 그 자체입니다.

“아니, 스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차별하지 않는 게 어찌 사랑입니까? 정말 아껴주는 게 사랑이죠”라고 말씀들 하시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차별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것. 이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보살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사랑입니다.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눈빛으로는 바라보거든요. 그런데 그 눈빛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아상이 개입된 사랑입니다. 완전한 무차별심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내 자식은 한없이 사랑하거든요. 그 때는 완전한 사랑 같아요. 그런데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들거든요. 내 자식이 조금 잘못한 것 같아도, 내 자식의 편을 든다는 말이죠. 그건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누는 차별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내 것’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아상, 에고가 개입된 사랑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면 상대방과 나를 함께 사랑합니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들 둘로 나누지 않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거예요. 네 것과 내 것, 네 편과 내편, 내 가족과 다른 가족, 이렇게 둘로 나누는 차별심이 있는 마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한국축구가 중국에게 지면 기쁜 일?

우리가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본단 말이죠. 우리나라와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애국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래요. 우리나라가 이기면 한 없이 기쁘고 신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이긴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것도 없고 진다고 괴로워할 것도 없죠. 우리가 이겼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기쁜 거죠. 4천만이 기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나와 너의 틀, 내 나라 너의 나라 이런 분별이 없이 완전히 툭 터진 마음으로 본다면 우리가 중국에 지면 어떻습니까? 지면 13억 인구가 기쁜 겁니다. 4천만 인구가 조금 기분이 나쁠지언정, 저 13억 인구가 기쁜 거예요. 그것은 지구 전체의 에너지를 놓고 본다면 훨씬 플러스(+) 에너지가 많아지는 겁니다. 4천만 인구가 기뻐하고 13억 인구가 괴로워하느니, 13억 인구가 기뻐하고 4천만이 조금 서운해 한들 우주 전체로 놓고 본다면 그게 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우리 생각은 늘 ‘나’의 관념에 빠져 있고, ‘내 나라’의 관점에 빠져 있다 보니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 합니다. 그 모든 분리, 분별을 넘어서는 더 큰 생각을 못 한단 말 이예요. 이 말은 그렇다고 애국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응원을 하되 이기면 우리가 이겨서 좋고, 지면 중국이 이겨서 그것도 또 좋아해 줄 수 있는 드넓은 가슴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체대비의 관점에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는 이처럼 툭 터진 너른 가슴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동체적인 관점에서는 생각을 못 하지요. 내 나라 내 가족 내 자식만을 아끼고 사랑해요. 애국이라는 것 또한 내 나라라는 틀이 있는 겁니다. 내 나라 너의 나라라는 틀이 있는 거예요. 내 종교 네 종교, 인간과 자연, 이런 일체의 모든 틀로부터 벗어나서 분별과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내 것과 네 것을 나누지 않습니다. 즉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 때 맹목적으로 내 자식의 편을 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 자식을 위해서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내 자식이 조금 잘못이 있으면 잘못이 있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인거죠. 맹목적으로 편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요.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식에게 화가 나잖아요. 자식이 막 속을 썩입니다. 그럼 자식에게 욱 하고 버럭 화를 낸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사랑의 행동이 아니죠. 그런데 진정한 사랑의 행동은 무엇이냐 하면, 그 상황, 내가 지금 화가 올라오는 상황, 자식이 화를 돋우는 상황,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겁니다. 분별하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보는 거예요. 지켜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지켜보게 되면 욱 하고 화를 내지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그 화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화에 휘둘리지 않으면 자식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대신, 그 화를 지켜보게 되고 저절로 지혜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화를 내지르지 않게 되요.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지켜보게 된다면 화를 다스리게 되는데 그 화에 휩쓸리면 욱 하고 화를 낸단 말이죠. 한 템포 늦추고, 잠시 멈춰서,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우리 내면의 더 큰 나, 참나의 자리, 근원의 자리에서 그 화를 저절로 사라지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화나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를 알아서 이끌어 주게 됩니다. 한 번 해 보세요. 직접 해 보지 않고는 이 말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스갯소리인데요, 얼마 전에 은행에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님이 어린 딸 하고 같이 은행에 왔다가 업무를 보는데 딸이 하도 옆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시끄럽게 하니까 “야 조용히 좀 해, 조용히 해!” 하고 화를 내면서 꼼짝 못 하게 옆에 잡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은행 창구에 서서 업무를 보는데, 딸이 옆에 서 있다가 뭐 재미있는 게 없나 찾더니 이내 엄마 뒤에 가서 있는 힘껏 똥침을 놓았어요. 이건 실제 제가 본겁니다. 제가 뒤에 앉아 있었는데, 엄마를 찌르는데 이게 너무 제대로 들어갔나 봐요. 아, 이 어머님께서 그 순간 너무 화가 났는지, 고개를 확 돌리더니 갑자기 딸을 보자마자 한 대 퍽 때리면서 화를 버럭 내는 겁니다. 딸이 그 전까지만 해도 막 즐겁게 떠들고 놀고 그러다가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그 사람들 많은데서 크게 한 대 얻어맞았단 말이에요. 그 뒤에 딸은 갑자기 기가 확 죽어가지고, 풀이 죽어 앉아있단 말이죠.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냐, 그런 방식으로 욱 하고 내지르는 것이 그게 사랑이 아니지요. 진정한 사랑은, 전체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겁니다. 즉 내가 올라오는 화, 그것을 잠시만 지켜보고 있었어도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요. 모든 상황에서, 이 상황에 어떻게 내가 대응해야 하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사랑으로써 대응하는 것이냐 이게 기준입니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우주 전체에 보다 많은 자비와 사랑을 품어주는 뿜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나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예요.


결정을 내리는 기준, 사랑과 자비

내가 이 사업을 확장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어떤 것을 고민으로 삼느냐. ‘내가 사업을 확장하면 돈을 많이 벌겠지? 그러면 좋은 집도 사겠지?’ 이런 이기적인 마음, 내 욕심이 개입이 된 것이냐, 아니면 순수하게 이것이 확장돼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 이득을 줄 수 있는 것이냐는 그 기준에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결정이 안 나면 어떨까요? 이게 이기적인 욕심인지, 아니면 이타적인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마음을 관해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분별심 없이 차별심 없이 관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심 차별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의미 하거든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 그런데 그 생각은 항상 내 이기적인 마음, 아상에 길들여진 생각입니다.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면 생각이 잦아들면서 생각 그 이면에 있는 무심(無心),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적인, 더 깊은 차원의 불성과 불성에서 우려 나오는 어떤 본연의 직관적인 지혜를 만나게 된단 말이죠. 그렇게 관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으로써 이것에 해답을 놓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던 사랑과는 차원이 조금 다를 수가 있어요. 우리는 좋아하는 것, 편들어 주는 것, 그게 사랑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분별없이 지켜봐 주는 것, 차별하지 않고, 네 편 내편 나누지 않고 지켜봐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상이라고 하는 것, 참선이라고 하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관 수행,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방법입니다. 사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라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증장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했을 때, 사랑이 커지는 겁니다. 자비와 사랑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태양처럼 빛난다

마치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태양이 뿜어내는 빛과도 같습니다. 태양빛은 어때요? 온 우주에 골고루 비친단 말이죠. 어디에만 선택적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비칩니다. 태양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비치고, 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비쳐요. 심지어 태양빛을 비추지 말라고 증오하고 욕하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비칩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분별이 없어요. 좋은 사람에게도 비추고 나쁜 사람에게도 비추고, 죄인에게도 비추고 성자에게도 비추고, 동일한 태양의 빛이 모든 존재에게 인간과 짐승 할 것 없이 자연만물 모든 것에 평등하게 비출 뿐입니다. 하다못해 동굴 속에 10년 20년 갇혀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굴 안에만 벗어난다면 언제든 그 빛이 비칠 수 있습니다.

“나는 빛이 싫어. 빛을 믿지 않아. 빛은 없어. 즉 진리는 없어. 신은 없어. 부처는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빛은 그 사람에게 비칩니다. 태양은 언제나 있지요. 태양이 비추는 것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우주 법계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근원적인 빛, 이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물결치고 있고, 부처님의 자비와 신의 사랑이 언제나 충만하게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는 있느냐면, 우리가 그것을 ‘안 보겠다. 난 믿지 않겠다. 태양을 보지 않겠다’라고 고개를 숙일 수는 있습니다. 고개 숙이고 안 보겠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태양이 없는 거죠.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조차 고개를 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고개를 드는 순간 태양은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어디 도망간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 모두에게 부처님은 한없는 자비로써, 법계는 언제나 완전한 자비로써 우리를 품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심판하는 일, 우리를 미워하는 일 이런 일을 전혀 안 한다는 말이죠. 항상 사랑하는 일 밖에 안 합니다. 그야말로 ‘사랑밖엔 난 몰라’예요.

그러면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나에게 괴로운 일이 생기는 이유는 뭡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 낸 거죠. 내가 만들어 낸 겁니다. 부처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내가 그것을 만들겠다고 해서 작정하고 만드는 사람에게 이 태양빛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에게는 태양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물결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일체 모든 사람을 내가 자비로 대하고 있느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것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바탕 된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 이것을 봐야 됩니다.


최악으로 힘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

군에 몇 년 전부터 비젼캠프라고 해서 군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 하는 특별한 장병들을 열 댓 명씩 모아서 4박 5일 일종의 치유의 수련회 내지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군에 계시는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이 같이 진행을 하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처음에 몇 번을 하면서 뭐랄까 상담을 할 때도 보면, 너무 힘든 경우가 있거든요.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모아 놓으니까 막 힘이 드는 거예요. 너무 에너지가 소진되고 그 친구들과 하루 지내고 나서 저녁에 잘 때가 되면, 힘이 쭉 빠질 정도로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너무 힘들다.’ 이런 느낌이 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너무 힘들어 하던 어느 날, 문든 한 생각 일어나면서 이 모든 것이 감사함과 복된 것으로 다가오데요. 정말 삶이 힘든 사람들은 힘이 들수록 빛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행복한 삶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너무 고통 받을수록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에너지가 너무 강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르게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좀 힘들지언정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수행의 장이고 자비를 닦아갈 수 있는 장인데, 내 스스로 이렇게 내 마음을 어지럽혔었구나 그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한 다음부터 오히려 그들과 만나고 대화 나누고 하는 것들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만나면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나기만 하면 나한테 번번이 하소연만 하고, 힘들다고만 얘기하고 답답하다고만 얘기하니까 조금은 짜증스런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한두 번 들어주는 것이 세 번 네 번 계속 얘기하면 짜증스럽고, “야 좀 그만 좀 와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우리의 자비심을 계발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순간입니다.

평범하거나 위대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사랑을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힘들고 고되고 막막한 사람들에게, 즉 정말 간절히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최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에게 있어서 최상의 사랑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감사를 받는 그만큼 고스란히 사실은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는 자비로, 신은 사랑으로 바꿔 불러라

우리가 한 번 두 번 자비심을 연습하고 마음에 사랑을 연습하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의 행위가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된 행동을 했을 때, 우주는 나를 위해서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줍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질적 에너지가 바로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법계는 사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어요. ‘오직 자비 밖에 없고 사랑 밖에 없다.’ 우리가 부처라고 표현하는 그 단어는 사실, 자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 단어는 사실, 신이라는 용어보다는 사랑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법계는 항상 자비 밖에는 없단 말이에요.

내가 우주법계의 본질과 주파수를 맞췄을 때, 자비를 실천하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의 마음을 실천했을 때 즉 우주법계와 주파수가 맞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자비심을 연습하면 보다 빨리 깊은 명상에 들기 쉽다.’ 자비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수행의 성취가 빠르다는 말이죠. 그러나 자비심을 연습하지 않았을 때, 마음이 흐트러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했을 때 사랑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우리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자비로 대하는 연습을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또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어떤 일을 하든지,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직장 생활을 하든지, 자비와 사랑이 근원에 깔려 있느냐 이것을 항상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자비심, 사무량심을 닦으라

불교 경전에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사무량심이란 것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말하는데, 무량한 마음이라는 것은, 무량한 부처님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해탈의 마음, 그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일으켜야 될 네 가지 무량한 마음, 그리고 이 네 가지 마음을 일으켰을 때 무량한 공덕이 성취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사무량심인데, 그게 바로 자비희사(慈悲喜捨)입니다.

첫째, 자심(慈心), 자무량심(慈無量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더해주기 위해서, 행복과 평화로움을 더해주기 위해서 마음 쓰는 것, 이게 바로 자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까, 행복하게 해줄까 하고 마음 쓰는 것이 자심이에요.

둘째, 비심(悲心)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통을 없애 줄까, 고통을 덜어 줄까, 내가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감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연민심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측은하고 가엾은 마음입니다. 힘들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냥 고개를 확 돌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든 함께 없애줄 수 있을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을 바로 비심이라고 합니다.

이 자심과 비심을 합쳐서 자비심(慈悲心)이라고 하죠.

그리고 세 번째 마음이 희심, 희무량심(喜無量心)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희심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우리가 아주 잘 못 일으키는 마음이 바로 희심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걸 우리는 잘 못해요. 오히려 남들이 잘 되면 배 아프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들이 좋은 일이 생기고 대박이 나고 잘 되면 괜히 배가 아프단 말이에요. 괜히 꼴 보기 싫고 칭찬해 주기 싫고, 칭찬에 굉장히 인색하고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준다, 이것을 수희동참한다고 하거든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수희동참해줄 때, 함께 기뻐해 주면서 함께 동참해 주었을 때 내 마음 속에 연습 되는 것은 그 장점 그 좋은 점이 고스란히 내 마음 속에 남는 겁니다. 내가 함께 동참해 준다는 것은 곧 내가 함께 한 것과 다름없는 공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요, 물질적인 것을 보시했을 때만 보시의 공덕이 있는 게 아니라, 보시하는 마음을 찬탄하고 수희하면서 함께 기뻐해 줬을 때 동일한 보시의 공덕이 지어지는 겁니다.

물질세계란 내가 직접 그 물질을 얻어야지만 물질세계가 아니라, 마음만 내어도 그 물질세계가 영향을 미친다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해야 근력이 강화되지만, 마음속으로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는 상상을 하잖아요. 그렇게 상상을 하고 나면, 동일한 시간을 상상했을 뿐인데 근력이 마찬가지로 강화됩니다. 상상밖에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우리 마음 작용의 본질이 그래요. 그렇게 마음을 내기만 했는데도, 그것이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희동참하는 마음, 누가 보시를 했을 때, ‘그래, 너 잘났다. 돈이 많으니 그렇게 보시하지. 난 하기 싫어서 안하냐.’ 이렇게 빈정거리기 보다는,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은 동일하게 함께 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희공덕, 수희의 수행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수희동참, 모든 기쁜 일이 있을 때, 남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아니꼽다는 눈으로 보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것, 그랬을 때 수희공덕이 생깁니다. 직접 한 사람만 공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희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공덕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보원행원품(普賢行願品)에 보면, 보원행원에 다섯 번째가 수희공덕이란 게 있습니다. ‘내가 평생 수희공덕 짓기를 발원합니다. 함께 기뻐해 주는 공덕을 짓기를 발원합니다.’ 하는 것이 다섯 번째의 발원 일 만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 주고 찬탄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되는 겁니다. 그걸 수희찬탄이라고 해요.

길거리에서 향을 파는 사람이 향을 하나 피워 놓으면, 향을 파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죠? 향을 사려고 보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것처럼 향을 직접 사지도 않았고 팔지도 않았지만 향냄새를 누구나 맡는 것처럼 수희를 하게 되면, 내가 직접 피운 향은 아닐지라도 향냄새를 맡는다 이 말입니다. 수희공덕, 수희찬탄, 모든 것을 보고 찬탄하는 마음, 공경하고 감사하는 마음, 함께 기뻐하는 마음, 이 찬탄심을 일으켰을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다 하는 이야깁니다. 진정한 자비심이 있어야 그것이 찬탄이 되고, 수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수희가 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을 것을 보고 함께 수희동참을 했을 때 그것이 곧 나에게 벌어집니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 남들 아파트 값이 올라서 두 세배 올랐다 그러면 배 아파 죽잖아요. ‘에이 난 그 옆에 있는 아파트를 샀는데 안 오르고, 왜 저사람 아파트 값만 오르는 거야’ 하지 말고, ‘와, 저 사람은 전생에 지은 공덕이 얼마나 많으면 저렇게 됐을까.’ ‘참 잘 되었다’ 하고 수희찬탄해 주면, 나에게도 그 공덕이 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함께 공덕이 쌓여요. 그래서 수희찬탄을 많이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로 사심(捨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무차별심, 무분별심, 모든 평등심을 의미합니다. 사심은 좋고 나쁜 것을 완전히 놓아 버리는 완전한 평등심을 얘기 하거든요. 그래서 최고봉에 사심이 있다고 그럽니다. 자심과 비심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희심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심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희심과 사심에서 나옵니다.

모든 존재를 완전한 평등한 마음으로 보고, 네 편 내 편을 나누지 않고, 좋은 것 나쁜 것 나누지 않고, 좋은 것을 보고 수희동참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 좋은 것을 보든 나쁜 것을 보든 분별하지 않고 관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게 바로 사심이고 최고의 자비심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희사를 연습하게 되었을 때 우리 안에 무량한 자비심이 생기고 무량한 공덕이 생기고 무량심이 생겨난다 이 소립니다. 그게 바로 사무량심의 의미입니다.


자비심의 실천력, 사섭법

사섭법(四攝事)이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의 사무량심보다 구체적으로 자비심을 어떻게 발현할 것인가를 의미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사섭법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말해요.

첫째, 보시섭은 이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보시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나눌 수 있어야 된다, 자비를 입으로만 보시, 보시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소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가르침을 나누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을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애어(愛語)인데요, 애어가 뭐냐 하면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나누는 데서 중요한 것이 말 한마디를 나누는 것이란 말이죠.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고, 아름다운 말 한마디 해주는 것, 그것이 중생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는 소립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 가지고도 천 냥 빚을 값 듯이, 말 한마디 갖고서도 그 사람에게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며,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지만 말을 제대로 표현 못함으로써, 애어를 못함으로써 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미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면서요. 경상도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고, 마음으로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말을 안 하니까 아내는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 막 툴툴거리잖아요. 사랑스러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에는 특별한 파동, 파장의 에너지가 있어서 이 말의 파장이 이 우주 법계 끝까지 퍼져나갑니다. 그 말의 에너지가 하나의 창조 에너지가 되어 우주 끝까지 전달되고,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든 만 번이고 십만 번이고 반복해 말하면 무조건 그게 현실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진언(眞言)이 된다는 소립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행(利行)입니다.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이로운 행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몸으로써 이타적인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애어는 구업을 말하고, 이행은 신업을 말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 생각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보시를 해야 하는데, 애어와 이행으로, 즉 말과 행동으로 직접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것이 바로 신업입니다. 행동이에요.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행동을 바꾸면 생각도 뒤따라옵니다. 생각을 바꾸긴 쉽지 않지만 행동을 바꾸기는 쉬워요. 그래서 먼저 행동으로 저지르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실천하고 싶다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저질러 물질로써, 몸으로써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으로 얼마를 보시해야지가 아니고, 직접 저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동사섭(同事)입니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그 일을 함께 하는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으면서 잘 하라고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일에 뛰어들어 고락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요. “불살생을 지켜야 하는 스님들이 어떻게 군대에 가십니까?” 이런 게 바로 하나의 동사섭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군대가 누구 죽이는 단체에요? 살리는 단체죠. 살리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군대이지, 죽이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죠. 여러분의 아들들이 군에 있단 말입니다. 이들을 행복으로 안내하고, 고통에서 구제하고, 이들에게 뭔가 진리를 알려주려면, 나는 아주 초월해서 그냥 저기 신선처럼 있으면서 “중생들아, 좀 잘 살아봐” “너희들 군 생활 힘내서 잘 해라” 이렇게 얘기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그곳에서 함께 훈련도 하고, 함께 뛰고 하면서 동사(同事)하면서 함께 그곳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중생 속에 함께 뛰어들어서 그 일을 함께 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동사섭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뭔 일을 할 때, 설령 안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뛰어들어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동사(同事)로서 구제해 주는 것, 그것이 아주 중요한 자비 실천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에서도 보듯이 우리가 자비심을 자꾸 계발할 수 있어야 되고, 삶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자비를 실천하고 있느냐, 사랑과 자비의 마음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느냐, 나의 모든 행위의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자비심의 발로이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이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이 생각처럼 잘 실천되지 않더라도 그래서 무조건 저질러 실천하고 봐야 합니다. 처음에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그것을 어렵게 한 번 저질러 실천하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연습한 것이 그야말로 습(習)이 되어서 훨씬 더 쉬워집니다.

악행을 연습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연습하면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다음에 똑같이 화를 내고 욕을 하기가 더 쉬워지거든요. 이걸 습(習)이라고 그래요. 업이 습이 되는 겁니다. 업습(業習)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선한 업을 짓는 것이, 의도적으로 연습을 하면, 그것이 처음에는 어려워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갈수록 더 쉬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선업의 습의 물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근원적인 힘이 우리에게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돕게 됩니다. 우주의 그 어떤 힘보다도 자비의 힘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쌍둥이 아이 둘이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한 명의 아이가 죽었어요. 그런데 간호사 한 분이 그 아이가 죽은 지 미처 모르고서 죽은 아이 옆에 살아 있는 쌍둥이 아이를 같이 두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조금 있다 살아있는 쌍둥이 아이가 죽어 있는 아이를 그냥 끌어안았단 말이에요. 그 사진 찍어 놓은 것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던데 보셨나 모르겠어요.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어요.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 근원에 사랑이라는 아주 본질적인 흐름이 누구에게나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 어린 아이도 저절로 사랑을 향해 행동하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근원은 사랑으로 물결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사랑은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라는 책을 보니까 말이죠. 그 지리산의 스님 세 분이 독초를 먹고 죽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도 약이 없다고 그러고, 그런데 세 분 모두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스님 세 분이 자기 몸을 걱정하기는커녕 서로 다른 스님들의 몸을 걱정해 주고, 약이 한 사람 먹을 양 밖에 없었는데, 서로 내가 안 먹겠다, 다른 스님보고 먹으라고 하고, 모든 스님들에게 ‘나’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 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한 스님이, 당신도 아파 죽겠지만 다른 스님들의 그 마음 씀씀이의 사랑을 보고, 안 죽는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 우리는 죽지 않겠구나’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 마음이 있는 이상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죠. 병원도 안 갔는데 그 날 밤에 수행을 하고 앉아서 참선도 하고, 밤을 꼬박 새었는데 죽지 않고 다들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살린 것이지,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다면 나 먼저 살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 것이다 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시더란 말입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그 어떤 모든 덕목에도 제일 우선가는 것이고, 우리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최우선시 돼야 하는 것이고, 사랑과 자비가 있었을 때 우리 삶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랑으로 병을 치유한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 칩시다. 암에 걸렸어요. 어떤 분들은 보니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하도록 시키기도 하던데요, 그렇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싸워가지고 전쟁으로써 적을 죽임으로써 내가 살아보겠다는 마음이거든요. 암세포라는 것을 왜 적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암세포는 적이 아니에요. 그 세포 또한 중생입니다. 우리가 구제해야 할 중생 이예요. 암세포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 암세포가 바로 나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죽이려 하지 않듯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인 암세포를 죽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암세포가 문제가 아니지요.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정적인 부분, 탁한 에너지, 어떤 악업 같은 어떤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암세포로 물질화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원인은 나에게 있어요. 즉 내 안의 어떤 사랑이 아닌 부분, 자비가 아닌 부분, 지혜가 아닌 부분, 바로 그 부분이 세포를 기형적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닌 것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죽여 없애는 방법을 쓴다는 것은 근원적인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암세포, 종양 제거 수술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도 삶의 방식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고, 본질적으로 그 병의 원인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암이 재발하거나, 다른 부위로 재발하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대의학의 기본개념이 어디가 아프면 그곳을 딱 잘라 버리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써는 온전한 치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암세포를 사랑하고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큰 자비의 마음으로써 관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살 수 있는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적으로 알아서는 안 돼요. 내 몸에 어디 안 좋은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나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자비로써 풀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비심이 바탕이 되면 그 어떤 문제도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이 발로가 되었다면 그 일은 망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나는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삶을 살아 나아가고 있는가, 사랑으로써 이웃을 대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 수행자들은 끊임없이 삶 속에서 지켜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비심으로 할 수도 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할 수도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모기 한 마리를 죽여야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화난 마음으로 짜증스럽게 죽일 수도 있고, ‘네가 미물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스레 살고 있구나,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여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자비스러운 마음을 내고 염불하고 기도해 주고 어쩔 수 없이 죽인다면 그건 앞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죽임입니다. 죽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리 하찮은 미물도 죽여선 안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 일이 생긴다고 한다면 마음을 이렇게 써야 한다는 거예요. 겉에 드러난 행위 이면의 의도가 ‘자비’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가 있어요. 깨달은 자는 살생을 해도 그 중생을 살리는 살생을 할 수가 있지만 중생은 중생을 살리면서도 죽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행위 이면에 자비의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이 차이가 그렇게 중요하단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 그 자체를 문제 삼지 말고, 그 이면에 담겨있는 자비심, 사랑의 마음, 그것을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근원에 사랑과 자비가 언제나 춤추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우주법계의 근원에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와 파장이 언제나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탁한 에너지 같은 것은 없어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아상으로, 아집으로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면,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연습하면,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우주법계의 근원과 연결이 됩니다. 그 순간 우주법계가 함께 기뻐하고, 우리를 돕게 됩니다. 그 연결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를 두 손 모아 발원하고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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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행복수업
카테고리 종교 > 불교 > 불교이야기
지은이 법상 (무한,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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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날씨가 봄 같지 않게

싸늘하네요.


바람도 많이 불고,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 한데,

법우님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오늘은

신간 출간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법우님들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부터

설법을 녹음하여 이 곳에

소리파일로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올려 놓았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법우님들께서

설법 녹취록을 작성하여 주셨고,

그 녹취록을 바탕으로

구어체의 녹취록을 문어체로, 한 권의 책으로

다듬고,

또 부족하거나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 등에 대해서

과감하게 자세한 설명을 보충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 목탁소리 카페와 홈페이지 '법상스님 설법듣기'에 올라와 있는

설법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쉽고, 감동이 있는 내용들을 선별하여

총 7편의 설법을

새롭게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설법 녹취록을 읽으셨거나,

설법 내용을 소리파일로 들으신 분들께서

들으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있으셨다면,

이번의 책으로써

보다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부모님들께 선물하거나,

아무 컴퓨터에서도 들을 수 있고,

차량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CD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의해

책 속에 MP3 설법 CD를 첨부하였습니다.


약 1시간 가량의 설법 소리 파일로

7개 설법이 CD에 수록되어 있으니,

총 6~7시간 가량의 설법 파일이

한 장의 CD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지요.


출판사에서

CD에 설법을 담고, 책에 포함해 발행 해 주셨고,

400여 페이지의 책에,

올컬러로 인도, 라다크, 히말라야 등지에서 찍어 온 사진을

컬러로 아름답게 편집도 해 주셨고,

이래 저래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물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된 데는

우리 목탁소리 법우님들의 관심과 사랑과 애정의 도움이 컸습니다.

무엇보다도 설법을 듣고 녹취해 주신

많은 법우님들의 애정어린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법우님들의 공부에,

또 인터넷을 할 수 없으시거나,

책을 읽기 어려우신,

또 이래저래 불법과 인연짓기 어려우셨던 많은 분들께

작은 공부의 씨앗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법우님들 모두에게

이 책의 감사함을 회향합니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 베포한

책에 대한 보도자료와 자료화면입니다.


바로구입 -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 예스24 (판매가 13,500원, CD포함)


바로구입 -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 알라딘(판매가 13,500원, CD포함)


바로구입 -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 인터파크(판매가 13,500원, CD포함) 





1. 책 소개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 법상 스님의 영혼을 두드리는 가슴 벅찬 말씀


매주 일요일 아침, 스님은 성스러운 의식을 준비한다. 지난 일주일간 내면의 뜨락을 살펴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붓다와 신과 저 눈 밝은 선각자들의 정묘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담아 둔 작은 이야기들을 펼쳐 낼 시간이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은 언제나 이러한 내면의 미진한 공부들을 끄집어내어 작게나마 깨닫고 느껴왔던 것들을 인연 닿는 분들과 소담하게 나누는 소통의 장이다. 그렇게 일요일마다 이야기를 나눈 지가 벌써 12년이 되고 있으며, 물론 지금도 또 아마도 당분간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스님은 이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고,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순간들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일요법회는 어쩌면 세상을 향해 나눔과 회향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지만, 그것을 통해 스님은 우주와 연대하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한 연결과 소통을 통해 가장 나다운 방법으로 세상에 자비와 사랑이라는 근원의 꽃을 피우는데 거름 하나 보탤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삶이란 우주의 성스럽고 벅찬 연주다. 그 연주 속에 우린 누구나 자기다운 방식으로 묵연한 침묵의 선율 하나를 피워내고 있다. 이 책이 그러한 연주에 조화로운 음율 하나를 보태고 세상과의 연결을 조금 더 깊이 이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 마음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행복수업 7교시


제1장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여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중요한 본질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거부하거나 막아서지만 않으면 됩니다. 막고 있던 방어벽을 허물고 마음을 활짝 열어 행복이 파도쳐 들어오도록 삶을 받아들이십시오.


제2장 새로운 무한 가능성에 나를 열어 두라
매 순간 우리가 느끼는 경험은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과거의 경험과 비교, 대조, 분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의 새로운 경험을 익숙하고 진부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이지요.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전혀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삶의 신비와 마주하게 되면, 꽃 한 송이가 당신을 압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새로움 속에서 깊은 고요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3장 홀로그램적 창조를 넘어서라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정확한 인연에 따라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그 자리에 존재합니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조차 우주적인 이유와 목적을 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주적인 홀로그램과 연기법은 삶의 모든 부분 속에서 성숙을 이루고 배움을 얻으라는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그 모든 것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우주와 하나가 되라는 다르마의 명령인 것입니다.


제4장 괴로움을 없애는 선禪적 방법
우리의 행복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다만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과 판단이 있을 뿐이지요.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외부적인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리라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입니다. 행복이란 내 안에서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안의 문제이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5장 세상을 창조하는 법
삶을 마음먹은 대로 멋지게 창조하고 싶지만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면 다음 4가지 중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지요. 둘째,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한정 짓지 말고,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굳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바라고 빌기보다는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산란한 수많은 생각으로는 삶을 창조하기 어렵습니다. 명상과 참선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나면, 그 텅 빈 마음속에서 일으킨 하나의 발원에 큰 힘이 붙게 됩니다.


제6장 스스로 창조하도록 맡겨라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행하는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계획이 나를 통해 꽃피어납니다. 그때야 비로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만 펼쳐집니다. 삶에서 내 앞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멈춰 세우고 집착하던 삶에서, 모든 것을 믿고 맡기게 되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게 됩니다. 내맡김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되찾고 우주법계와 하나가 되는 공부입니다.


제7장 우주의 창조와 하나 되는 힘, 사랑과 자비
우주와 나의 근원적 삶의 목적은 사랑과 자비로 동일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전 인류가 나아가는 길이고,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우주법계는, 부처와 신은 언제나 한없는 자비로써 우리를 사랑하고 품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심판하고, 지옥에 보내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자비심과의 연결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해주며, 우주와 나를 하나로 일치하게 만들어 줍니다.



2. 목차


프롤로그


제1장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여라
삶은 고(苦)가 아니다
삶이 괴로운 이유 
자신이 친 방어벽 
배고파도 밥도 못 먹는 사람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 
영어를 못하는 사람  
나를 둘러싼 다양한 방어벽  
수련회에 못 가는 이유 
잠에 대한 강박관념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부모  
여자라서, 나이가 많아서 못한다고?
사회적 지위라는 감옥  
깨달음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마음의 문을 열고 진리를 초대하라 
삶은 언제나 나를 돕고 있다  
방어벽을 허무는 방법
받아들임이 곧 깨어 있음이다 


제2장 새로운 무한 가능성에 나를 열어두라
뇌에서 받아들이는 정보
새로운 경험인가? 익숙한 경험인가? 
다 안다는 착각 
새로운 가능성을 닫지 말라
여행을 떠나는 것이 깨달음의 반이라고?  
익숙함을 넘어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사업가에서 농부로, 자원봉사자로  
안철수에게 배운다 
새로움, 그것은 영적 성장의 길 
아이들 다 키운 중년 주부의 도전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라
뇌 가소성 
신경접속 회로 
200만 개의 가능성에 나를 열어 두라
우주법계의 계획을 받아들여라
무한한 새로운 가능성에 나를 내맡기라  
받아들이고 느끼고 자각하라  
업습(業習)을 완전히 끝내고 넘어가라 
일상적인 삶을 낯설고 새롭게 보라 
삶의 신비와 마주하다


제3장 홀로그램적 창조를 넘어서라
홀로그램의 이해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하나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업(業)사상과 양자물리학 
마음이 물질을 창조한다는 과학적 증명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삶의 의문들에 대한 답변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연기적 해석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없으면 사랑하지만 많으면 퇴락한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제4장 괴로움을 없애는 선(禪)적 방법
삶이 괴로운 이유  
모두에게 존경 받을 수는 없다 
괴로움의 원인은 내면에 있다  
문제가 없길 바라는 마음이 문제
홀로 있음으로도 충만한 스님 
우리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것을 꿈꾼다
고치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받아들여라 
아상(我相)에 밥 주지 마라 
한 발자국 떨어져 보라 
매 순간 휴가를 떠나라 
투명하게 사람을 사귀는 방법
연애하듯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 
모든 문제는 나를 돕기 위한 영적 성숙의 과정이다
깨어 있음에 담긴 우주적 힘  
자기 중심을 잡고 살라 
삶의 본질은 행복하게 사는 것 


제5장 세상을 창조하는 법
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시크릿』을 보는 불교적 관점 
창조과정과 업보  
껍데기 마음과 거짓 나 
더 깊은 마음, 근원의식, 참 나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긍정적인 언어의 파장 
근원에 믿고 맡겨라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시성 
심상화기법 
플라시보 효과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사실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보면 사라진다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는 마음 
명상수행과 창조에너지 
자기 한정의 관념을 타파하라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제6장 스스로 창조하도록 맡겨라
삶을 창조하는 4가지 방법  
삶의 창조를 뛰어넘어라 
텅 빈 근원 위로 많은 것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을 멈춰 세운다 
아상, 아집의 형성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설정
창조할 것인가 창조를 넘어설 것인가
아상이 아닌 참 나가 나를 이끌게 하라 
우주법계의 본래의 계획, 금강경의 가르침 
창조할 것인가 내맡길 것인가
있는 그대로 똑바로 관(觀)하라
이것이 바로 나인가  


제7장 우주의 창조와 하나 되는 힘, 사랑과 자비
종교의 근본적인 목적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보는 잣대 
행위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참된 자비란 무엇인가 
심판하지 않고 무한히 사랑하는 신 
다만 차별하지 말라  
한국축구가 중국에게 지면 기쁜 일?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  
결정을 내리는 기준, 사랑과 자비 
사랑은 태양처럼 빛난다 
가장 힘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  
부처는 자비로, 신은 사랑으로 불러라 
구체적인 자비심의 실천법  
4가지 자비심의 발현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
사랑으로 병을 치유한다  



3. 저자 소개


법상(法相) 
현재 강원도 운학사 주지로 있으며, 인터넷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www.moktaksori.org)’와 다음 카페 목탁소리(http://cafe. daum.net/truenature)의 지도법사로서 생활 속에서 마음을 닦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수행을 이끌어 가고 있다.
스님은 불교와 명상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다 쉽고 실천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수행과 명상, 자연과 환경을 주제로 쓴 진지한 깨침의 글들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게 스님의 글을 읽고 ‘생활 속의 수행’에 뜻을 모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 사이버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이다. 이제 ‘목탁소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생활인들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소중한 정진의 공간이 되었고, 종교와 계층을 초월하여 마음을 맑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고향과 같은 귀의처가 되면서 불교와 명상 분야의 대표적인 웹사이트로 자리 잡았다.
동국대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조계종 포교사이트 「달마넷」을 비롯 「한국일보」 「법보신문」 「월간불광」 등에 글을 연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한국문인」에서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기도 했다. 특히 저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는 불교출판문화협회에서 주관하는 ‘2005년 올해의 불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금강경과 마음공부』『부처님 말씀과 마음공부』『관심』『생활 속에서 마음닦기』 『마음을 놓아라 그리고 천천히 걸어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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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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