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학림사]

 


억울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괴로운 일이 닥치지요?
제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겁니까?

지금
네 호흡의
들고 남을 보고 있느냐?
다만 들이쉬고 내쉬어라.


...

그 사람은
처음부터 저를 싫어했어요.
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그냥 제가 못마땅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사람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는 순간
네 호흡은
완연하게 들고 나는지 살펴보라.


...

일이 잘 안 풀립니다.
요즘은 통 되는 일이 없어요.
남들은 돈 잘도 벌고 일도 잘 하던데
난 왜 이런 걸까요?

숨만 잘 쉬면 된다.


...

완전히 망했습니다.
거리로 내 앉을 판이니
이거 어찌해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
호흡을 잘 비추어 보라.


...

타종교 신자들이
자꾸 비판하고 욕을 합니다.
지하철만 타면
승복 입은 죄로 욕을 얻어 먹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지혜로울 수 있겠습니까.

묵묵히
지켜보아라.


...

욕심을 버리고 싶습니다.
집착을 버리고 싶습니다.
다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그게 맘같이 잘 되지 않아요.
어디 똑 부러지는 수행방법 없을까요?

숨을 올바로 쉴 수 있다면
숨을 쉬는 순간
욕심도 집착도 붙을 자리가 없다.
수행도 해탈도 다 티끌일 뿐이다.


...

이번 주부터
정말 중요한 일이 시작됩니다.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스님께서 축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나도 내 숨 잘 쉬지.
그래도
네 숨은 네가 쉬어야 한다.


...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내 생에 두 달이 남았습니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아들 딸 학교도 보내야 하고,
우리 예쁜 아내 사랑도 해 줘야 하고,
손 붙잡고 가 보고 싶은 곳도 많고,
수행도 아직 익지 못했는데...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들이 쉬고 내 쉬고
들이 쉬고 내 쉬고...
숨만 잘 따라가면
나고 죽는 일 없다.


...

빨리 깨닫고 싶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 너무 큽니다.
어떻게 해야 확철대오 할 수 있겠습니까.

숨 잘 쉬는
바로 그 순간이
확철대오의 순간이다.









Posted by 법상

괴로움,
그것은 곧 즐거움이다.
즐거움이자 성장이자
도반이자 스승이며
내 삶의 반려자요 수행의 재료이다.

아픔, 괴로움, 서글픔, 상처, 고통, 몸부림, 실수,
좌절, 패배, 슬픔, 공포, 증오...

이런 것들은 곧 우리를 성숙하게 해 주고,
내적으로 성장하게 해 주며,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고 깨어있게 해 주는
스승의 죽비와도 같고 한줄기 목탁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과 좌절과 슬픔, 아픔을 마주하게 된다.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라.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내 존재를 스쳐 간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좌절들이야말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지금의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로였고 동반자였다.

그 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아픔들, 모든 고통과 좌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삶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 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가져다 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에서는 도저히 그 아픔 속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 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고, 내적으로 어느 정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되면
그 때의 그 아픔이 나에게 어떤 성장을 가져다 주었는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 순탄한 삶,
우리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런 삶 속에는 깨우침도, 성숙도, 지혜도, 자비도 꽃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얕은 정신과 공허한 내면을 가져다 줄 뿐이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 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빠듯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알아서 잘 쓰라는 말 외에는 어디에 무엇을 썼느냐고 묻지도 않고 맡겨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수행자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적인 삶,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삶이란 것은
그 어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그 문제의 뒤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하며, 괴로워 할 뿐이지만,
보다 영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이는
그 문제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지혜롭게 관찰하곤 한다.

언제나 문제는
그 이면에 우리를 돕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배울 것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의미가 너무 깊고 심오하여 깨닫지 못하는 수도 있지만
존재의 깊은 곳에서는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나 아픔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그 상황, 그 문제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포용하는 일이다.

그 깊은 의미를 찾고자 애쓸 필요는 없다.
내 깊은 곳에서 알아서 깨달을 것이고, 알아서 이끌어 갈 것이니
그저 믿고 맡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 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 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사실 수행의 길, 명상의 길, 영적인 구도의 길은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괴로운 일이 사라지고, 장애가 사라지고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도의 길 위에는
온갖 가시밭길이 놓여 질 수도 있고,
일반인들 보다 더 큰 아픔과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아픔과 괴로움을 대항해 싸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도의 길을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요,
신의 사랑이고, 붓다의 자비이다.
지혜로운 이는 문제 속에서,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붓다의 자비로운 이끎을 보고 신의 사랑스런 도우심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공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지켜본다.

실제로 티베트에서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움을 청하는 축원을 암송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와 인내와 정진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럴진데 우리의 삶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 생겼다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회피하고 투쟁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오히려 그 때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알아야 한다.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공부의 재료이듯 즐거움 또한 공부의 재료가 된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거기에 집착해 더 많은 즐거움을 쟁취하려 애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고행을 위해 즐거움을 죄다 내다버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다만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어떤 일’들은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내 존재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살며시 돌아 갈 뿐이다.

내 삶에는 괴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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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반야심경 강해 -12강-

멸성제와 도성제

(3) 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멸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 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성제는 사성제의 집성제와 반대되는 경지입니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입니다. 이를 차례 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근본불교에서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 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습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입니다. 어쨌든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로 다다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란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멸성제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합니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합니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입니다.

(4) 도성제 - 괴로움 소멸의 실천에 대한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입니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합니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군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정도의 ‘정’과 중도의 ‘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덟가지 바른 길’이라고 할 때의 ‘바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중도의 중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라고 하여 그저 단순히 ‘중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바른 길’이라고 했을 때도 도대체 무엇이 바른 길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과 ‘정’의 의미는 앞서 설명했던, 불교 근본 교설인 연기와 공, 삼법인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란 적당히 중간의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다만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존재이므로 텅 비어 있다는 온전한 자각에서 오는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텅 빈 존재라면 어느 한 쪽을 택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치우친 견해를 내세울 수 없게 됩니다. 팔정도에서 바른 길이라는 것도 연기와 무아, 공에 입각한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견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 하면, 보되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다만 인연 따라 생겼다가 흩어지는 것임을 바로 보라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는 것으로 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도와 팔정도의 실천은 곧 연기와 공과 삼법인의 실천인 것입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잡아함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정사・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다’ 하는 아상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견해이며, 연기적으로 보는 견해이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텅 빈 시선으로 보는 견해이며,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습니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 사유, 즉,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말합니다. 요컨대, 삼업(三業) 중 구업을 올바로 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바른 신업(身業)을 말하는 것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습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진,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합니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을 닦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입니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따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을 말합니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월출산 도갑사 대웅보전]

이따금씩 찾아오는 법우님들 중에는
당장에 괴로운 일들 때문에 수행이며 깨달음은 별 관심이 없고
오직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깨달음에 대한 염원이
지나치기까지 하신 분들 또한 더러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참 바람직하다 할 만하겠지만
이따금씩 ‘깨달음’병에 걸려
빨리 깨닫고자 하는 조급증이
좀 심하신 분들도 있는 것을 더러 본다.

수행자에게 있어 깨닫고자 하는 것이야
당연한 서원(誓願)이라 하겠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안 될 일.
중도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빨리 깨닫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면
도리어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한 깨달음의 향기를 놓치고 만다.

깨달음을 미래의 일로 설정해 두고
기다려서는 안된다.
‘빨리 깨쳐야겠다’거나
‘언젠가 깨닫겠지’ ‘왜 이렇게 안 깨달아지지’ 하는 마음은
다 분별이고 망상일 뿐.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문제이다.

엄격히 말해
깨달은 자는 없고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이란 말이 있다.

깨닫게 되면
내가 깨달았다거나 하는 아상이 몽땅 사라지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이 순간 순간 있을 뿐이란 말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시간의 개념 자체가 그냥 텅 비어 있으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관념 또한 비어 있다.
오직 순간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우리들이 깨달음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한가지.

언젠가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다시말해 깨닫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얼마나 하고 있는가를
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의 문제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 깨달음이란 환상에 불과하며, 깨달은 자는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누가 하는가.
깨달은 각자(覺者)만이 할 수 있는가?
다 이룬 부처의 행위만 깨어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깨어있는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 문제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의 문제이다.

부처님은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의 연장이지만,
우리들의 행위는
깨어있는 행위와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자는 무엇인가.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어 가는 사람이다.

언젠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깨어있는 행위가 되기 위해
애쓰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 미래에 있을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은 깨달음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전도된 생각이다.

시간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과거로부터 시간이 흘러 지금에까지 이르렀으며
또 그 시간이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시간이 공하다면
깨달음을 어느 순간에 찾을 것인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그대로 진리 그 자체인 것이며, 불성의 싹틈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온전한 알아차림으로 100%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할 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사는 것이 된다.

어떤 법우님들은 묻는다.
‘이렇게 수행하면 깨닫나요?’
‘언제쯤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나 또한 깨달음 병이 너무 크게 나서
한동안 꼼짝달싹 못하던 적이 숯한 나날이다.

도대체 빨리 깨달아야 할 것 같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빨리 부처가 되야지 이렇게 언제까지 중생으로 살 것인가 싶었던 날들...

그러나 그건 내 착각.
깨어있는 행위를 하는 순간 우린 이미 깨달은 것이고,
우린 그 순간 부처인 것이며,
진리와 하나되고, 온 우주 법계와 하나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또다른 순간 이를테면 깨달음의 순간이라거나,
부처되는 순간 그런 것을 바라는 마음을 놓아야 한다.

깨어있는 행위를 하는 순간
방하착이 되고,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 되고,
지금 이 순간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깨닫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깨닫지 못한 것에 조급해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지금 이 순간 얼마만큼
‘깨어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있는 행위’를 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애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부처의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그대로 부처인 것.

부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부처가 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Posted by 법상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도솔,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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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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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 6. 28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삶은 고(苦)가 아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삶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아!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구나’라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들에게 삶은 힘들고 고된 괴로움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불교에서도 일체개고라고 하여 ‘삶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힘든 곳이구나’ ‘누구나 이렇게 힘든 삶을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겠지’ 하며 힘들고 괴롭게 살아가는데 아주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고 있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즐거운 일이 생기고, 아주 행복한 일이 생길 때 어떻게 생각 하느냐 하면 그것이 사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한테 어떻게 이런 좋은 일만 자주 생길 수 있지?’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계속 좋은 일만 있다가 뭔가 큰 괴로운 일이 오려고 이러는 거 아냐?’ 하면서 좋은 일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불안해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는 인생을, 삶이라는 것을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삶은 힘든 것이구나!’ 이렇게 많이 인식하며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이면에서, 본질에서 이야기한다면 삶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아주 신비로운 것이고 또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삶이라는 자체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본질이 뭐냐면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괴롭게 사는 게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걸림 없이 살면서 아주 평화롭게 이 삶을 아주 아름답고도 멋들어지게 살아 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본질적인 삶의 모습대로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보통 우리들의 삶은 아주 고되고,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앉아 가지고 이만큼 1미터 부웅~ 떠올라 앉아 있는 게, 그게 삶의 신비가 아닙니다. 그게 경이로운 일이 아니고, 그게 신통자재한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들의 존재자체, 삶 자체, 그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것 그 자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가 우리가 이렇게 괴롭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행복하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우리 본래 모습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것인가?' 말이죠. 원래 우리 삶의 바탕이 행복에 있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힘겹게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수도 있는데 현실은 괴롭게 살고 있단 말이죠.

또 여러분들이나 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단 말입니다. 왜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싶은데 깨달아지지 않는가, 그 이유가 뭐겠는가 말입니다. 그 이유를 바로 알고, 그 이유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으면 우리 삶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삶이 괴로운 이유가 뭐지?

 

그러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실은 이 세상이 전혀 행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니까, 돈 없는 이런 상황이 나를 가로 막고 있다’ 이렇게 내 바깥을 탓하거든요. ‘저 사람과 결혼을 하기만 했다면, 저 사람과 사귀기만 했어도 나의 행복이 완전할 수 있을 텐데. 저 사람이 나를 차버리는 바람에 내 행복은 무너져 버렸다’ 하면서 내 바깥에 탓을 돌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행복을 차버린 것은 나다, 딴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행복을 차버린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행복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내 안에서 행복이 들어오는 모든 통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내 주위에 방어막, 방어벽을 딱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참된 행복이라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내 주변에 아주 촘촘하게 방어벽을 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하는 작업이 바로 이 방어벽을 쌓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그 방어벽을 허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허물지 못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쌓고만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구하려 하지 말라, 찾으려 하지 말라, 다만 깨달음이 오는 것을 막지만 말라’ 바로 이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나라는 존재를 허용하기만 해라, 완전히 나를 열어둬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틀어 막고자 하는 그 마음만 버리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내가 깨달음을 찾고자 애쓰지 말고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열어 둬야 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깨달음을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너도나도 힘들고 고된 수행의 ‘일’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나의 일이 되고 하나의 문제가 된다 이 말입니다. 다만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허용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하고 딱 내 주변에 울타리로 방어막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친 방어벽은 무엇인가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는 방어막을 안치고 있는데 왜 방어막을 친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의문을 표시할 수 있지요. '도대체 뭐가 방어막이냐? 내가 치고 있는 방어막이 도대체 뭐기에 그 방어막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하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틀에 박힌 생각, 관념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여러분이 쳐놓은 방어벽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 한다면 우리 안에 어떤 막힌 탁한 에너지나 업장(業障), 업습(業習)이라든가 또는 관념이라던가, 바람이나 꿈이라던가,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진 모든 생각이 만들어낸 구조물들이 전부 다 방어벽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로서 내 주변에 벽을 치고 방어하고 있다는 말인데요, 세상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딱 벽을 쌓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 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나라고 생각하는 어떤 견해 또는 모양, 관점 이런 것으로써 나를, 내 주변을, 딱 벽으로 둘러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특성, 특징들 이런 것들이 전부다 하나의 방어벽으로서 작용을 합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삶을 행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허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삶이라는 신비가 완전히 경계 없이 방어벽 없이 모든 것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도록 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내 주위의 방어벽이 되고 있습니다.

 

배 고파도 밥도 못 먹는 사람

 

예를 들어서 쉬운 것부터 이야기를 해 본 다면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혼자서 밥을 못 먹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밖에 나가서도 혼자서 밥을 못 먹겠더라. 누구랑 같이 먹어야지, 어떻게 혼자서 밥을 먹어? 혼자 밥을 먹으면 왠지 모르게 남들이 친구도 없는 왕따로 보지 않을까', ‘외롭다고 느끼지 않을까’하는 등의 관념을 고수하느라고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밖에 나가서 혼자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이런 관념을 가지면 '내가 혼자 밥을 못 먹는다' 하는 그 생각, 그 견해가 하나의 방어막이 되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탁' 가로 막기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배가 고파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지요. 그저 가까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은 뭐냐면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자연스럽게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데 갑자기 한 생각 방어벽이 생겨납니다. 내 안에서 생각이 지껄입니다. '야! 어떻게 혼자 밥을 먹으려고 하냐? 주위에 봐라. 전부 다 가족이 왔거나, 친구와 왔거나, 연인이 함께 왔잖아? 너 혼자 밥 먹으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어? 처량하게 혼자 밥먹는 것을 쳐다보는 남들 시선을 생각해봐’ 그런 생각이 치켜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자연스럽게 밥을 먹지 못하게 되고, 굶든가, 아니면 밥을 먹고 싶어도 그냥 어디 슈퍼에 들어가 빵이나 하나 사먹고 때우던가 한단 말입니다. 이 얘기를 하니까 제 경험도 떠오르는데요, 저도 대학 초년 시절에 어느날은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은 겁니다. 삽겹살 집 앞을 지나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요.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삽겹살을 시커서 먹고 싶었지만 혼자서 고기 먹으러 간다는 것이 여간 찜찜한게 아니데요. 이런 경험들 아마 다들 조금씩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혼자 먹지 못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내 스스로 내 안에서 ‘혼자 먹으면 좀 그래’ 하고 딱 벽을 쳐 놓고, 관념을 만들어 놓으니까 그 때부터 스스로 만든 벽에 스스로 걸려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배고파도 밥 한 끼 자연스럽게 못 먹고 살아요. 그래서 중생인가요! 밥 먹고 사는 이 사소한 일상 하나에도 생각이 만들어 낸 구조물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그 단순한 삶이야말로 도(道)다,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했단 말이지요. 일상 생활을 단순하게, 자유롭게 그냥 하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고 자유로운 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자신이 만든 생각의 감옥, 울타리, 방어벽에 갇혀 별일 아는 것에도 오락가락 하는 차별심으로 사는 삶이 바로 우리들 중생의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죠. 어떤 사람은 '나는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고, 리더십도 없고, 뭔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라고 하면 두렵다' 이런 생각의 구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어벽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정작 나서야 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서질 못합니다. 살면서 내가 어떤 뭔가 발표를 해야 되는 일이 때때로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그걸 피해갈려고 애를 써요.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자체가 그 하나의 방어벽 때문에 스트레스가 됩니다. 때때로 무언가 발표를 해야 되고, 앞에 나서야 하고, 뭔가 만들어야 하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다는 한 생각에 딱 차있는 이상, 그때부터는 그것을 피해갈 생각만 하게 됩니다. 직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완전히 열려 있어서 모든 직장을 다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건 안 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저건 안 되니까 저런 직장은 제외하고, 나는 이런걸 못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건만 찾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선택의 폭은 너무나도 축소가 되고, 제한이 되고, 나의 삶은 너무나도 위축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향해서 모든 가능성에 완전 나를 열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고 있고 한정하고 있으니 사실은 인생이 그것 때문에 괴롭고 버겁고 풀리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 인생이 꼬였다거나 내 직장생활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보면 그것은 그 이면에 바로 내 생각이 만들어낸 그 구조물, 거기에 내 스스로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나는 앞에 나가 발표를 못해'라는 생각에 부딪혀서 삶이 풀리지 않는 것이기 쉽습니다. 사실은 내가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는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해, 발표할 때만 되면 덜덜덜 떨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발표를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주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죠. 내 생각, 견해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나의 경험들이 모여서 신념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내 생각으로서 딱 굳게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 말입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

 

예를 들어 ‘나는 영어를 못한다’하는 신념이 자리잡으면 영어가 두려워서 영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못합니다. 1년이나 2년 해외연수가 준비되어 있는데,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영어를 못한다, 나는 두렵다' 하는 것 때문에 내 앞에 딱 드러난 그 기회를 우리는 딱 마땅히 차단시켜 버립니다. 영어 공부가 필요하면 그냥 자연스럽게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질러 시작하면 되는데 마음 속에서 영어에 대한 방어벽을 칩니다. ‘나는 원래 영어를 잘 못한다’거나, ‘이 나이가 되어 뒤늦게 영어를 다시 시작한들 젊은 사람들 따라갈 수 있겠어’ ‘너무 늦었어’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지금 한다고 되겠어’ 이런 등등의 수많은 방어벽들이 순간 둘러쳐진단 말입니다. 숭산 큰스님 아시죠? 세계 살아있는 4대 생불이라 하는 숭산스님께서는 해외로 다니면서 하버드대를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영어로 법문을 하시고, 전세계인들에게 영어로 법문을 하시면서 감동을 주셨단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원래 숭산스님께서 어릴적부터 영어를 잘하는 분이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당신이 47세 때인가에 영어를 시작했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영어를 못한다'란 생각에 딱 부딪혀 있으면, 혹은 ‘나이가 많아서 영어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생각의 벽을 만들어 놓으면 그 때부터는 내가 내 인생에서 뭔가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많이 위축시키고 축소시키게 만들고 맙니다. 나의 능력을 한껏 축소시키게 만듭니다.

 

나를 둘러싼 다양한 방어벽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우유를 못 먹습니다. ‘나는 원래 우유를 못 먹어’ ‘우유를 먹으면 배탈이 나고 뭔가 문제가 생겨’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이런 사람은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나요. 그런데 이를테면 그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놓고 우유를 먹게 하면 맛있게 먹고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유를 못 먹는다는 것은 몸에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못 먹는다는 한 생각이 우유를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내 몸에서 우유를 거부하고 배탈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산에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에 아버지가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붙잡고서 아들을 데리고, 딸을 데리고 산에 왔다갔다 다녔단 말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큰 정기를 키워주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정말 가기 싫어 죽겠는데 아빠가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가지고 산이 싫어졌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산이 싫다고 했던 그 한 생각, 그 한 생각이 그때부터 산과 관련된, 산행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 나를 나의 마음을 비좁고 웅크리게 만드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직장에서 3박4일 지리산 종주를 간다더라, 그러면 마음에서 거부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딱 막아서는 마음이 일어나요. 방어벽을 딱 칩니다. '나는 산행은 못해'합니다. 아니면 집에 가서 생각합니다. ‘그때 무슨 핑계를 댈까? 무슨 핑계를 대서 이 산행을 내가 안 갈수 있을까? 하루도 아니고 3박4일 동안 그 험한 지리산을 어떻게 가느냐?’ 하면서 탁 방어벽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생각은 온갖 핑계 거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아주 말도 안 되는 일도 벌인단 말이예요. 나에게 오는 삶의 가능성을 딱 막아서는 겁니다. 이를테면 어릴 때는 산이 싫었지만 마음을 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가 보면 그전에는 전혀 눈뜨지 못했던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눈을 뜨게 될 수도 있어요. 왜 애초부터 과거에 얽매여 그 가능성을 해 보지도 않고 막아서는 겁니까. 모든 가능성에 대해 거부하지 말고, 막아서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통째로 받아들여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어벽을 깨고 자유로와지는 길이예요.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초등학생들은 그런다고 하데요. 학교에서 주사를 맞는 날이다 하면 그 주사를 맞기 싫어서 그날 하여간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겁니다. 학교에 뭔가 핑계를 대고 안 가거나, 갑자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거나, 또 어떤 어린아이는 주사바늘 앞에서 그냥 기절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 그런 것도 마찬가지죠. 이런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안절부절을 못 합니다. 마음에서 방어벽을 치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에 몰두합니다. 사실은 그 만남에서 사람들과 함께 친해지고 어울릴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변화의 때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방어벽을 침으로써 애초에 거부하고 마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요, ‘나는 집만 나가면, 집 나가서 어디서 잠을 자거나 하면 화장실을 못 간다’ 이런 사람도 있데요.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화장실에 가 큰일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를 들어 ‘여러분들 송광사 여름수련회나 해인사 여름수련회나 어떤 수련대회를 한번 참석해 보십시오’라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이런 추천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고 허용하며 ‘좋습니다. 한 번 가 보죠’ 하고 시원스레 답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 ‘수련회 한번 가 보십시요’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자기가 쳐놓은 방어막에 걸려 그것을 있는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생각으로서 방어막을 탁탁 쳐 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밖에만 나가면 화장실을 못가서 그 수련대회 3박4일, 4박5일 가는데 5일 동안 대변을 못 보면 어떡하나? 나는 그것 때문에 못 간다’ 이래요. 설마 그러시죠? 지금 웃으시는 분도 계시는데 실제 그런 사람이 있다니까요. 이를테면 어떤 보살님이 하도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하기에 출가하라고 했더니 우스개로 하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머리 깎으면 머리가 안 예뻐서 출가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또 ‘수련대회를 가라’ 이러면 한순간 마음속에 ‘나는 가부좌 틀고 참선을 오래 못해’, ‘다리가 아파서 나는 그것 때문에 못가’ 이렇게 방어벽을 딱 칩니다. 참선하는데 다리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밤새 철야정진하고 잠도 안 재우고 수행시킬지 모르는데 '아! 나는 잠은 절대 포기 못해. 잠은 푹 자야해' 이렇게 방어막을 딱 칩니다. 온갖 자기 나름대로의 방어벽을 다 치거든요.

제가 이 자리에서 만약에 정토회에서 하는 ‘깨달음의 장’ 수련대회 가 참 좋다더라, 거기에 한 4박5일 한번 갔다 오십시오 하고 이야기를 했단 말입니다. 여기 한 이삼백 명이 앉아 있어도 이중에 갈수 있는 사람은 한둘도 안 될 겁니다. 그만큼 방어벽이 견고해요. '거기 갔다 와서 엄청난 깨달음을 느끼고 왔다. 삶이 정말 확 바뀌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너무나 좋으니까 꼭 다녀오십시오.' 라고 온갖 찬사를 하며 추천을 했습니다. 그러면 갈 것 같죠? 대부분의 사람은 못 갑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방어막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그것을 탁 잡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잠을 여덟 시간은 자야 된다’는 울타리를 딱 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전날 여섯 시간을 잤다, 그러면 마음 한편에 두 시간, 두 시간, 두 시간, 출근을 해서도 나는 두 시간을 못 잤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뭔가 두 시간만큼 피곤이 몰려옵니다. 어디 구석 불편한 곳에서 새우잠이라도 한 두 시간을 자고나면 그때 되서야 이제야 잠에서 해방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중에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도 전혀 문제없다’ 그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 시간만 자도 돼, 어떤 사람은 나는 다섯 시간은 자야 돼, 나는 여섯 시간은 자야 돼, 하고 딱 잠에 대해 울타리를 치고 나면 내가 울타리를 친 그 관념 때문에 그것이 나의 실제가 돼 버립니다. 실제 삶에서 내가 정해 놓은 그 시간의 잠에 걸려 넘어진단 말이지요. 내가 만들어 놓은 관념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거사님은 잠에 대한 아주 독특한 그 신념을 가지고 계세요. 당신은 잠을 많이 자고 조금 자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한 시간이라도 자고만 일어나면 되는 겁니다. 이분은 당신이 한 시간을 자든 두 시간을 자든 그 다음날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또 실제로 그런 관념에서, 그 신념에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은 잠 때문에 뭐 힘든 것이 없데요. 그리고 또 아주 신기한 것은 뭐냐면 이분은 자다가 중간에 한 번 깨고 나서 또 자면 우리는 괜히 좀 찝찝하잖아요. 푹 못 잔 것 같고, 잠을 설친 것 같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거사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면 잠에서 깼다가 다시자면 ‘아~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잠을 한 번 자면 되는데 하룻 밤 사이에 두 번이나 잤으니 더 좋다는 겁니다. 저는 농담이겠지 생각 했는데 실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중간에 뒤척이다 다시 잠들더라도 별로 괴로울 일이 없는 겁니다.

자식들에 대해서는 ‘공부 좀 해라. 성적 좀 올려라. 좋은 대학을 가야돼’ 한단 말이지요.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자식은 항상 뭐를 하고 있어야지 마음이 놓여요? 공부를 하고 있어야 되지요.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는 항상 공부하고 있어야지 아주 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아주 뭔가 제대로 가는 상황 이예요. 그런데 볼 때마다 공부만하고 있는 상황은 어찌 보면 불행한 상황이지요. 그 활자에 거기에 놓쳐서 친구와의 아름다운 사귐, 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는, 이 햇볕 속에서 뛰어 놀고 자랄 수 있는, 그런 천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볼 때 자식은 늘 공부하고 있어야 되요. 그러니까 아이가 한참 공부하다가 부모님이 딱 들어갔을 때 마침 컴퓨터를 켰는데 닦달을 한단말이죠. '너는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하고 있냐?', ‘또 컴퓨터야?’ ‘공부는 안하고 맨날 그것만 하고 있다' 그런단 말이죠. '자식은 공부를, 공부만 해야 되는 사람이다' 이건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방어벽입니다. 그런 방어벽이 있게 되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식이 공부를 안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확 올라옵니다. '저놈은 또 공부는 안하고 저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이렇게 올라온단 말이예요. 그 방어벽을 탁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으면 아이가 놀더라도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흥미롭고 행복하며 함께 재미있습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항상 '오늘 뭐 공부 잘했니? 오늘 공부 많이 했니? 시험 잘 봤어? 성적이 얼마 나왔어?' 이런 걸 주로 물어보지, '너는 어떤 친구가 있니? 아! 그 친구는 어떤 것을 좋아하니? 뭐하는 걸 좋아하고, 취미는 뭐고, 함께 하면 무슨 놀이를 하고 지내니?' 이런 것들을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늘 뭐하고 놀았니? 뭐해서 재미있었니? 오늘 하루도 즐거웠어?' 이걸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대상으로 공부해야 된다는 방어벽을 탁 놓아 버리게 되었을 때에 그 아이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공부를 안 하더라도 미운 대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왜 있는 그대로의 자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안의 온갖 생각들, 잣대들에 끼워맞추면서 편견어린 시선으로 자식을 바라봅니까. 그럼으로써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감옥으로 인해 아파하고, 상처받고, 자유롭지 못해야 하는 겁니까. 부모 눈치보는 자식으로 키우면 안 되요. 자유롭고도 당당하게 자기 삶을 휘적휘적 창조적이고도 자율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자주적인 아이로 키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의 틀에 갇힌 생각 속에 아이를 끼워넣는 작업을 중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내 스스로 만든 구조물에 갇혀 가지고 그렇게 내 스스로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단 말이죠. 성공해야 한다, 항상 1등해야 된다, 이런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봅니다. '나는 여자다' 하는 것도 하나의 상이고 방어벽입니다. 여자다 혹은 남자다, 이것도 내가 만들어 낸 방어벽입니다. ‘여자다’라는 방어벽 때문에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남자로만 태어났어도 혼자 배낭여행을 한 번 꼭 가보고 싶다, 그런데 여자다 보니 위험해서 홀로 여행을 못 떠난다. 자유롭게 홀로 떠날 수 있는 남자들이 참 부럽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이 말이 진실일까요? 사실은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가 더 많을까요? 혼자 배낭여행 다니는 남자가 더 많을까요? 제가 외국에 다녀보니까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생각에서는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은 남자들이나 한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그런 여자분들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여자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방어벽을 쳐 놓고 그 방어벽에 갇혀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남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울타리를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걸려 넘어져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나이가 오십 살이다, 나이가 스무 살이다, 하는 그 나이에도 걸립니다. 내 나이가 오십 살이다 그러면 ‘내가 이 옷을 입으면 남들이 괜히 주책이라고 하지 않을까? 늙어서 나이값도 못 한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이를테면 입고 싶어도 못 입는 옷도 있고요, 꾸미고 싶어도 못 꾸미는 경우도 있고,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고작 나이 하나에 걸려서 말이지요.

아이들 다 독립시켜 놓고 내가 뭔가를 새롭게 공부라도 하고 싶은데 ‘이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게 말이 되겠어?’ 하고 내 나이 오십이라는 것에 큰 방어벽을 쌓고 있기 때문에 그때 저지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나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나이는 없습니다. 항상 제로예요. 어떤 틀이 박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내 스스로 방어벽을 쌓고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대학 못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고, 전문대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어서 사람들이 대학교 이야기만 하면 꽁무니를 줄줄 빼고 자리를 뜨기도 합니다. 대학이라는 학벌이 내 인생의 하나의 커다란 방어물이 되는 겁니다. 군대 안 갔다 온 사람들이나 방위 갔다 온 사람들은 은근히 그것이 그렇게 큰 스트레스랍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야 별일 아니다 싶겠지만,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남자가 위축이 된다 합니다. 그거 그럴 필요가 없지요.

사회적인 지위가 높으신 분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스스로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엄청난 방어벽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곤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다보니 이렇게 행동해야 된다, 근엄하게 행동해야 한다, 천박하게 보이면 안 된다, 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하는 방어벽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스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승복을 입고 어디 밖에 나가면 이게 족쇄가 돼버리고 감옥이 돼버려요. 그럼 하고 싶은 것도 못합니다.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못 먹고, 바쁜 일이 있어서 조금 뛰어가야 하는 일이 있어도 자유롭게 뛰지 못합니다. 여기저기 감옥에 걸린단 말이지요. 사실은 계율이라는 것도 본질에 있어서는 걸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무애도인, 걸림 없는 옛 도인들의 삶은 언뜻 중생들의 판단, 분별, 생각으로 보면 막행막식이다 싶을 정도로 일상적인 삶에 걸림이 없이 살기도 했단 말입니다. 당신은 안에 어떤 스스로를 가두는 틀이 없고, 방어벽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롭죠. 남들이 보기에는 계율도 안 지키는 것 같고, 말도 막 하는 것 같고, 도인 같지 않아 보이지만 그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군에서 보내주는 자기계발 프로그램 같은 것에 갈 수 있게 되어 동사섭이라는 용타스님이 운영하시는 수련장에를 갔었는데요. 거기에서 일종의 행동명상을 하는데 남녀노소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전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방에서 한 1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스님께서 자기라는 상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스님의 말만 따르라고 하는 겁니다. 남자라는 상, 나이라는 상, 지위가 높고 낮다는 상, 그 모든 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만이라도 완전히 자유인이 되어 보자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방어벽을 모두 벗어보자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은거지요. 스님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고 스님이 말씀하시는 그것이 돼야 합니다. '나'라는 상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그것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안 되면 그것은 '나'라는 상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입니다. 예를 들어 스님이 지금부터 우리 모두 '개다! 강아지다!' 그러면 갑자기 지금부터 개가 되어야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강아지처럼 ‘멍멍!!’ 짖어대면서 깨물고 날뛰며 나를 버리고 개가 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근엄하신 분들일수록, 아상이 많은 사람일수록, 방어벽이 높은 사람일수록 눈치 살살 봐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멍멍' 한번 하고 말지 적극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개가 되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딱 놓아버린 사람들은 그냥 사십, 오십, 육십이 되더라도 마구 짖고 뛰어다니면서 잘도 논단 말입니다. 진짜 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거 신기하게도 한 60이 넘어 보이시는 근엄하게 생기신 분께서 그냥 '개'하라 하면 그냥 막 개가 되고, 고양이가 되라하면 고양이가 되고, 애기 하라하면 갑자기 애기가 되어 가지고 응애응애 울고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놓은 그 벽! 그것이 크면 클수록 그게 잘 안되지요. 자유롭게 그것을 못합니다. 그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틀들은 바로 내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매순간 순간 이 세상을 향해서 수많은 방어벽을 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들과 풍성한 새로운 경험들, 그리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깨달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찾아나서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본질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제 스스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니 찾아 온다기 보다는 언제나 깨달음 아닌 순간이 없고, 참된 자성이 아닌 적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행복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행복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불행하기 때문에 언젠가 있을 행복을 찾아 나서겠다, 달려가겠다, 그게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때로 어떤 선지식이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을 보면 끊임없는 정진과 피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뭔가 치열하게 수행을 해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 가지고 결국에 깨달았다 하는 이런 게 정답인줄 알았는데 그런 방식으로 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수행이라는 것에 ‘수’자도 모르고,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도 그 사람에게 깨달음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불교나 깨달음은 불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해탈과 열반이 불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르침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지 사실은 불교라는 그 비좁은 이름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이라는 것은 사실은 나를 완전히 여는 작업입니다. 가두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활짝 열어두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깨달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참된 진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은 매 순간순간 나에게로 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방어벽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반사되어 나가버립니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활짝 열고 보면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언제 어느때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함께 하고 있었다기 보다 나를 포함은 모든 것은 그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다만 내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눈도 어때요? 무엇을 찾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분명히 그 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못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있었지만 못 찾아요. 그것이 그 방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것이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법당에 아~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 있습니다. 꽃다지가 있고, 개망초가 있고, 별꽃, 패랭이, 연꽃, 참나리 뭐 다양한 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다양한 꽃들이 눈에 보이거든요. 절에 오면 ‘아 이 절 관음사는 꽃들이 많아서 좋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꽃을 향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꽃이 눈에 보이질 않죠. 꽃은 전혀 나에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꽃은 항상 지천에 열려 있지만 그 꽃이 나에게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 꽃들은 꽃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꽃에 관심이 없다가 어느 날 꽃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염과 동시에 아름다운 꽃들이 신비롭게 막 들어오기 시작해요.

제가 예전에 어떤 절에 있을 때 그때 갑자기 그냥 불현듯 막 꽃이나 나무나 숲, 자연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신비롭게 느껴지면서 그저 꽃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던 그런 때였는데요. 그때부터 꽃에 대해서 아주 유심히 관찰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 오면서 이렇게 외진 곳에, 이렇게 척박한 곳에 절만 하나 뚝 떨어져 있으니까 너무 삭막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저도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느꼈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꽃과 야생초나 이런 것들을 좀 보다보니까 너무 신비로운 곳인 겁니다. 사실 그곳이 군사보호구역이다 보니 오래도록 사람들의 발길도 별로 없었던 곳이고 숲이 우리 생각하는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아니였다보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더없이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삭막하고, 그렇게 느끼겠지만 야생의 숲이 주는 자연스러운 풍요를 가만 가만히 느끼고 지켜보다 보니 그것은 그 어떤 식물원에서도 감상할 수 없는 엄청난 생명의 보고이자 신비의 보고였더란 말입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꽃들, 생각지 못했던 약초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산야초들, 책에서만 보았을 법한 그런 온갖 종류의 희귀한 식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 작고 소박한 절이 얼마나 풍요로운 곳이고, 이름다운 곳이고,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운 꽃들로 넘쳐나는 곳인지를 알게 되면서 그 절의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될 수 있었지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리 안 된 쓸모 없는 땅이거나, 가치 없는 숲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혹은 몇몇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만 그 가치는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로 절에 나오게 된 보살님 한 분이 야생화를 많이 공부하고 관심 가지던 분이 계셨는데요, 그 분과 저만 이심전심 염화미소를 보내며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었지, 다른 분들은 여전히 깜깜하더란 말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라

 

우리가 마음속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 놓지 못하면 이 세상에 있는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질 않습니다. 여러분들! 이것을 분명하게 좀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깨달음은 나에게 오고 있다, 지금 이순간도 모든 진리, 모든 자유로움, 모든 행복은 항상 오고 있습니다. 언제 왔냐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오고 있다. 아니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서는 내 마음의 방어벽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보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중에 나에게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선택해서 받아들이는데 익숙합니다. 우리 마음은 자동적으로 좋고 나쁜 것,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거부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에게 이익 되는 사람, 도움 되는 사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면서 사귐을 유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오면 이렇게 밀쳐내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이 오더라도 내 몫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일은 내가 잘하니까 받아들이려하고, 이러이러한 일은 딱 거부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거부하려고 애썼던 그 일속에 나를 일깨워줄 수 있는 엄청난 신비로운, 비밀스러운, 이치가 담겨 있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바로 그 생소한 일을 통해 우주는 나에게 아름다운 삶의 이치나 또 다른 새로운 진리에의 가능성을 보내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례히 그렇듯, 하던대로 거부하는데 익숙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에 불편함과 벽을 가진 채 받아들이니까 그것이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새로운 변화나 어떤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자주 인사이동을 해야 하는 분들 같은 경우에 ‘이런 곳은 가고 싶고, 저런 곳은 안 갔으면 좋겠다’ 하고 방어벽을 쳐 놓습니다.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집착을 한단 말이지요.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지든,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 바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가능성을 향해 나를 활짝 열어놓치 못한다는 거예요. 어디를 가도 좋고 무슨 일이 있어도 좋다, 시골을 가도 좋고 도시에 가도 좋다, 서울을 가도 좋고, 전라도를 가도 좋고 어디를 가도 좋다, 어디를 가든 바로 그곳이 이 우주법계가 지혜와 자비로움으로써 나를 돕기 위해 나를 보내주는 곳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생각 자체가 좁아지고, 내 삶의 엄청난 가능성이 한껏 축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그곳이 바로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곳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삶을 대상으로 마음속에서 딱 벽을 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 가고 싶다 하고 벽을 치니까 어때요?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곳에 갔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저 친구는 나보다 뭐가 잘나서 저 좋은 곳에 보내주고, 나는 여길 보내 줬느냐?’ 하고 그냥 시비거리가 생겨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다 말이죠. 나를 완전히 열어 놓는다면 어디가도 좋다, 어떤 일이 나에게 멀어져도 좋고, 어떤 인연을 만나도 좋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좋다, 설령 어떤 직장을 갔는데 작장 상사가 너무 나쁜 사람이고 너무 사람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런 일이 왔느냐? 나에게 어떤 영적인 각성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나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혹은 나에게 업장소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자비로움으로써 계획해 낸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를 대장부라는 말로 많이 표현하곤 하는데요, 이 정도 너른 마음, 활짝 열려서 꽉 막혀 있지 않은 마음, 무엇이든 오너라 하고 당당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이 정도가 되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방어막을 침으로써 허용할 것과 허용하지 못할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이것을 딱 분명하게 나눠 놓습니다. 내가 받아들일 것,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둘로 나눠 놓고 그중에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깨어남이 자꾸 더뎌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업장소멸의 가능성이 자꾸 뒤로 미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완전한 깨달음, 열려있음, 행복, 자유로움 이런 것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이 말입니다.

다른 게 감옥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게 감옥이 아니라 이렇게 내가 방어막을 치고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가 친 방어막에 내 스스로 갇혀 있는 것! 그게 바로 존재의 감옥이고, 의식의 감옥입니다.

 

삶은 언제나 나를 돕고 있다

 

그래서 다음의 이 명제를 분명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삶은 항상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모든 사건은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여러분을 완전한 각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끌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신의 시험은 사실 그것 자체로써 나를 위한 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나를 참으로 믿는지 시험해 보자 하고 신께서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지 선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나에게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빛이 못 들어오게 방어벽을 쳐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 막은 것은 세상의 많은 어두운 요소들, 문제들, 경제적인 궁핍 내지는 내 능력의 부재, 이런 것이 어두움처럼 느껴져서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한없이 들어 올 수 있는데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딱 치고 있음으로써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놓고 나서 스스로 어둡다고 ‘삶은 왜 이리 어두우냐? 삶은 왜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 것이냐?’ 라고 삶과 다투고 투쟁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를 찾도록 완전히 나를 진리에 내맡기고 포용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냐? 일상이 바로 진리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소한 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로운 것이고, 가장 경이로운 겁니다. 가장 사소한 것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보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나를 완전히 활짝 열어둘 수 있어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은 정확히 여러분이 받아야 될 바로 그 사람인 겁니다. 이 모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건, 사고, 일, 경계, 사람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의 세계, 법계로 부터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그것도 우리를 이끌어 주고, 일깨워 주고, 우리를 깨닫게 해줄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한 어떤 진리의 소식이요 부처님의 큰 자비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가 삶 속에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바로 진리의 나툼이다 이 말입니다. 그 모든 사소한 일상의 경험이야말로 나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진리의 계획입니다. 하루 하루 매 순간순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기적이고 신비이며 진리의 소식입니다. 우리를 깨어남으로 이끄는 최적의 공부인 것입니다. 일상의 삶이야말로 깨어남을 향한 장대한 여행인 것입니다.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안에 오래도록 깊이깊이 저장되어 있던 어떤 업장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모처럼의 풀려날 최적의 기회를 맞아 가지고 나에게 찾아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이든 사고든,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평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부터 어떤 특정한 깨우침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를 평화와 자유로움으로 이끌어 주는 상황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신비를 맞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삶이라는 평범함 뒤에 감춰진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가짐은 어떠냐 말이지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전혀 소중하게 여기거나, 새롭게, 신비롭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그저 그렇게 반복되는 진부한 일상일 뿐이란 말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에, 삶 그 자체에 완전히 나를 열어두지 못합니다. 그 모든 삶을 분별하고 해석하고 차별하고 선택함으로써 통째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특정 대상에만 나를 열어 보입니다. 사람을 만나도 선택적으로 만나고, 어떤 일을 만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만나고 그런단 말입니다. 삶이라는 진리가 나에게 주는 선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면, 삶 그 너머의 깊이에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취사선택하거나 나누지 않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휘익 대충 한 번 훑어 보고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야’ 하고는 툭 처박아 놓습니다.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깨달음이 담겨있는 책인지도 모른 채 그냥 책장에 꽂혀서는 몇 년이고 처박혀 있기만 합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방어막을 쳐놓은 그 사람에게는 그 책이 들어올 수 없어요. 그 가르침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존재가 깨어나게 되면 내가 어느 정도 열려 있게 되면 그 진리나, 그 가르침이나, 어떤 삶의 부분에 대해서 열려 있게 되면 그때부터 그것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집안에 푹 처박아 놓았던 그 책이 이렇게 보배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잘 따라오고 있나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계신 건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이중에 많은 분들에게는 아마도 별 의미 없이 다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내가 딱 닫아걸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들어 올 수가 없거든요. 부처님 제자들도 부처님께서 그 오랫동안 법을 설하고 했지만 스스로 닫아 건 사람은 결코 가르침을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을 오래도록 곁에서 시봉했던 아난존자나 처음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 마부로 따라왔다가 훗날 출가하여 비구가 된 찬나장로도 부처님이 계시는 동안에 그 많은 가르침과 훈계와 지도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부처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닫아거는 사람에게는 그 부처도 아무런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나를 완전히 열어둔 사람에게는 만나는 모든 사건, 모든 일들, 모든 사람, 모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바로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깨우침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할 필요가 없단 말이예요.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흘러와서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자꾸 가둬두거나 못 들어오게 틀어막을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완전히 나를 허용하는 겁니다. 그럼 그 일이 진리의 일이 되고 부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순간순간 우리에게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방어벽을 없애주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찾아옵니다. 만약에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하나의 방어벽에 대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방어벽을 허무는 방법

 

보통 사람들은 방어벽에 걸리지 않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런데 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잖습니까? 방어벽에 걸리는 것, 사상적으로도 그렇고 뭐든 내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뭔가 나한테 와서 부딪치고,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내 마음에 화를 남기거나, 내 마음에 짜증을 남기거나, 이거는 내가 좀 거부하고 싶거나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것,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내 방어벽을 깨주기 위한 목적으로, 내 방어벽을 깨 줌으로써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고, 나에게 진리가 파도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나에게 오는 것, 나에게 오는 모든 일들을 대상으로 나를 완전히 열어두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파도쳐 들어오고 그랬을 때 내 안에 내가 꽉 울타리 쳐놨던 방어벽들이 하나둘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경지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방어벽도 없으니까 모든 것이 자유롭게 오고 간단 말입니다.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어요. 이 자리가 바로 무애도인의 자리라고 했어요. 그랬을 때 비로소 아까 말했던 다양한 예를 들었던 방어벽들, 그런 어떤 크고 작은 관념, 관념의 틀, 방어벽 그것에서 내가 놓여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어떤 틀에 잡힌 관념에 빠져가지고 거기에서 괴로워하는 일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방어벽 너머에 자유로움이 있다, 내가 쳐 놓은 그 방어벽 너머에 깨달음이 있고 빛이 있다 하는 겁니다. 어디 가서 깨달음을 찾으려고, 진리를 찾으려고, 행복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다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진리가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에게 파도쳐 들어올 수 있도록 다만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고 깨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절에서 수행하는 것만 영적이고, 수행자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나에게 욕하는 사람, 나에게 욕하는 상황이 바로 아주 영적인 대상인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이 녀석이 나한테 욕했다고 시비를 붙이고 싸움을 걸 때 그것이 세속적인 분쟁이 되는 것이고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에게 욕을 했을 때 그 마음을 관찰하면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들여다보고, 그 욕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는 겁니다. 왜 이 우주에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욕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누구도 나에게 욕 할 수 있어요.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은 당연히 있는 거예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걸 허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닫아 걸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걸 허용하고 났을 때 비로소 그 욕이 나에게 와서 흔적을 남기고, 화를 남기고, 두려움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욕 얻어먹기 싫어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두려움에 못 하게 되는 일이 없어집니다.

제가 전에 그 말씀을 드렸나 모르겠는데요. 종교가 화합을 해야 된다,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이런 취지의 내용을 인터넷에 블로그 기사로 올려서 포탈 싸이트에 메인으로 채택이 한나절 됐는데 그 사이에 몇 만 명이 그 글을 봤어요. 그 한나절 동안 댓글이 천육백 개가 달렸는데 그냥 언뜻 읽어보면 정말 불교도 옳고, 기독교나 천주교도 옳을 수도 있고, 모든 종교, 모든 사상이 다 옳을 수 있다,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함께 화합을 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켜 나가야 된다, 뭐 그런 내용이거든요. 언뜻 보더라도 특별히 시비 걸 내용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천육백 개 댓글 가운데 한 반수 가까이가 아주 상스러운 욕입니다. '그래. 너 잘났다. 이 중놈아!' 거기 첫 번째 댓글, 그것이 아주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건 하도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첫 번째 댓글만 딱 기억이 납니다. 딱 네글자였어요. ‘까고있네’ 하 이거 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웃음) 그래가지고 그 안에서 수십 수백개의 댓글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종교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종교전쟁 하지 말자고 쓴 글 밑에서 버젖이 종교전쟁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제가 그 다음부터 ‘야! 이렇게 욕을 얻어먹을 바엔 차라리 글을 쓰지 말자’ 해야 되느냐 그게 아니다 이겁니다.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는 거지요. 인생에서는 나를 욕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부처님도 외도들에게 수도 없이 욕도 얻어 먹고, 억울한 누명도 쓰고, 심지어 죽이려 한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교화활동을 중지해야 옳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을 허용해야 되는 거예요. 나한테 괴로운 일도 있는 겁니다. 그것을 왜 부정합니까? 다 허용할 필요가 있어요.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좋은 일에 대해서도, 나쁜 일에 대해서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게 됐을 때 내 인생은 엄청난 깨어남이 시작되고, 내 인생에 큰 자유로움이 시작됩니다.

단, 나를 완전히 오픈했을 때, 모든 것을 받아 들였을 때, 어떤 일종의 자아상실감이라든가 일종의 내가 무너지는 것 같은, 내가 좌절되는 것 같은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보호막을 치는 것, 방어막을 치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알고 살아오면서 엄청난 방어막을 쳤고, 그 방어막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방어막이 바로 난데 내가 바로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우리는 일순간 괴로워 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 괴로움을 허용하라는 말입니다. 그 자아상실감은 바로 아상이 깨지는데서 오는, 바로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아상이 타파되는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 쯤이야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수행자가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어벽이 좀 깨짐으로서 내 존재가 조금 상실감이 오더라도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이예요.

 

받아들임이 곧 깨어있음이다

 

그것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를 완전히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행복, 깨달음, 진리, 자유로움, 우리 삶의 걸림 없는 삶 이런 것들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열어두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하는 일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나를 열어두고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분별 없이 매 순간순간을 관하며 사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활짝 열고 삶을 허용할 때 직장에서 진급할까? 안할까? 뭐 돈을 벌 수 있을까? 없을까? 이번 사업이 잘될까? 못될까? 남편하고 싸웠는데 맘 풀어졌을까? 안 풀어 졌을까? 자식이 공부를 잘할까? 못할까? 내가 미래에 잘 살 수 있을까? 없을까? 1년 뒤에 있을 수능시험 결과가 좋을까? 안 좋을까? 그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생각이 만들어 냈고,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일 뿐이에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고요. 허상이란 말입니다. 허상. 수많은 대학교에 가면 연구논문들 있잖아요? 그 연구논문이 그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 또한 상당수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 아니겠어요. 제가 그것 자체를 그냥 묵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순간 그 모든 것도 다 공허한 것이란 말입니다.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지금, 듣고 있는 이것만이 실재입니다. 이 죽비를 듣고 있는 이 순간 ‘탁 탁 탁!’ 이것입니다. 지금 이 죽비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이 소리가 들리죠? 귓 전을 생생하게 울린단 말입니다. 이것!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이 자리에 깨어있을 수 있는 것, 이 자리로 가져다주는 것! 그것만이 실재입니다. 내가 온전히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 모든 걸 포용하게 되고, 내가 완전히 관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그 방어벽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시고 하여간 내 인생에서 뭔가 껄끄러운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의 경계가 나타난다면 ‘아 이게 바로 나를 붙잡는 방어벽이구나. 이게 바로 나의 행복과 자유로움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방어벽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포용하시길 바랍니다. 나한테 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허용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진리는 나에게 엄청난 파동으로서 파도쳐 들어올 것입니다. 그 파도쳐 들어오는 것을 내가 막지만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어때요? 여전히 어렵습니까?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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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늘 불안정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삶이 안전하고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안정적인 분명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생기를 잃고 말 것인가.
그런 삶은 언뜻 보기에는 안정되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자는 나약하고 속박되어 있으며 틀에 박혀 있고 생기가 없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도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면
거기에 나만의 자유의지를 펼칠 공간이 없다.
확실한 삶에 틀어박히고 구속된 채 자유를 잃고 해맬 수 밖에 없다.
그런 삶은 얼마나 희뿌옇고 재미가 없는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한달 뒤, 일년 뒤, 십년 뒤 머언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그것처럼 따분하고 기계적인 밍숭맹숭한 삶이 또 있을까.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저 기계의 움직임일 뿐.

그것이 아무리 부유한 미래일지라도 그것은 구속이요 속박이다.
돈과 재물로 가득 찬 부유한 노후라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삶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삶에 지쳐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고, 노후를 준비하려 들지 말라.
내 삶의 미래며 노후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 분명하고 알찬 미래며 노후준비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일이다.
노후자금을 은행에 넣어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삶으로써 시공의 법계에 무량한 공덕을 저축하는 일이다.

삶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단 한 순간의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경이롭다.
우리는 그 불확실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나를 얹어 놓은 채 다만 따라 흐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불확실하고 정해진 바가 없다면 불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안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 삶에서 때때로 마주하게 될 혼란과 위험을 거부하지 말라.

삶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곳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삶도 없다.
좋은 일만 일어나며,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 인생처럼 따분하고 심심하며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삶에는 생기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자유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눈물겹다.
삶의 모퉁이에서 역경을, 위험을, 좌절을 만나게 된다면
호흡을 가다듬고 반짝이는 눈으로 눈부시게 지켜보라.
혼란스런 삶도 깊이 바라보면 눈부시게 빛난다.
또 때로는 극단적인 좌절과 혼란이
도리어 저 반대편의 극적인 기쁨이 되는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던 사람들의
기도를 본 적이, 들은 적이 있는가.
인생의 최저의 나락에 빠져 있는 이들일수록
그것에서 빠져나오려는 에너지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단번에 그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극과 극은 언제나 가깝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극단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의 다른 흐름일 뿐이다.
에너지의 흐름만 살짝 바꾸어 놓는 순간 그 삶은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최악의 괴로운 삶은 곧 최고의 행복과 가깝다.
그 둘은 극단의 먼 발치가 아니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길벗이다.
살짝 고개만 돌리면 언제나 눈빛을 나눌 수 있다.

사랑을 시작했다면 그 이면에 증오를 또한 시작하고 있는 것이며,
크게 성공할수록 크게 실패할 가능성도 안고 있는 것이고,
삶에 대한 욕구가 클수록 죽음에 대한 고통 또한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놓아버릴 때 증오 또한 놓여지며,
성공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실패의 두려움도 사라지고,
삶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릴 때 죽음에 대한 괴로움도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처럼 극과 극은 언제나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인생이 자꾸만 꼬이고, 괴롭고, 답답하다고?
인생에서 지금이 최악의 순간이라고?
괴로운 일들이 몇 가지고 겹쳐서 나를 미치게 한다고?
잘 되었다. 지금이 바로 삶의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될 시점이다.
내 생에 가장 큰 공부가 곧 시작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 깊게 삶을 지켜보라.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고민하지 말고
주의깊게 마음을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관조가 예민해지고 깊어지는 순간
마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절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를 저질러 볼까 하는 생각이 일어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만 그것을 하라.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다만 그것을 해 보라.
운이 좋다면 삶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기적은 아주 사소하게 우리 삶에 등장한다.
진리도 그렇고, 변화도 그렇고, 깨달음도 그렇고,
언제나 정점을 지나는 일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고 미세하게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삶에 엄청난 진리가, 부처가, 신이
봄 바람이 불듯 그렇게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몇 번이고 우리 존재를 스쳤을 터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깊은 관찰로 삶을 지켜보아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삶의 역경과 혼란을 타고 진리는 온다.
삶이 비탈진 내리막에서 뒤집혀 막 내동댕이 쳐 지고 있을 때
도리어 삶의 획기적인 변화가 소리 없이 찾아온다.

이처럼 불안과 혼란과 위험과 역경은 모두
우리를 더욱 더 내면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이르게 해 주는 영적인 동반자요 도반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 없다면, 그래서 세상일들이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만 펼쳐진다면
그 때부터 우리의 삶은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역경이 없고 순경만 있는 삶이란 그것이 곧 가장 큰 역경이다.

우리의 삶이 역경과 순경, 편안과 불안,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또한 여간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삶의 속성이요, 진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좋고 싫게 받아들이고, 집착과 미움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다만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지 않고 불안과 위험을 버리려 애쓰고,
행복과 편안과 순탄한 삶만을 바라기 위해 애쓴다면
그 때부터 삶은 그대를 외면하고 심지어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살아 낼 수가 없다.
온전한 삶이 그대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삶을 조종하려 들지 말라.
삶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 들지 말라.
내가 원하는 삶만을 살고자 애쓰지 말라.
그런 삶은 없다.
그렇기에 그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삶은 컴컴한 어둠 속이다.

내 앞에 일어나는 삶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삶을 조종하려는 자는 삶을 살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만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는
삶을 살 의지를 포기한 것일 뿐이다.
그런 자는 삶을 살아갈 아무 이유가 없다.

안정적이고 평탄한 삶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모든 화를 부른다.
순탄한 삶만을 바라는 생각이 도리어 순탄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생각이 많을수록
‘그런 삶’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 때
삶은 저절로 삶 그 본연의 길을 걷게 된다.

편안함을 갈구할수록 더욱 불편해지고,
안정을 갈구할수록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편안, 안정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삶은 순조롭다.

이 세상의 근본 이치는 언제나 변한다는 제행무상의 이치와
고정된 것, 확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제법무아의 이치를 따른다.
또한 그러므로 삶이란 언제나 불안전하고 불안정하며 괴로울 수 밖에 없다는
일체개고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삶의 기본 원칙이며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기초를 거스르려 애쓴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안정적이고 확실하며 불변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는 꿈이고 환영이며 억지일 뿐,
그런 것은 없다.
없는 것을 찾아 나서봐야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라.
그랬을 때 삶은 아름답다.
아니 사실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삶의 곳곳에 내재된 위험과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삶은 경이롭고 찬연히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삶의 복잡성과 혼란과
어느 때고 쉴 사이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위험과 근심과 역경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다.
그런 도전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피폐하고 나약해지고 말 것인가.

삶은 언뜻 보면 혼란스러워 보일 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모든 혼돈은 혼돈이 아니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조화로운 인연의 화합이요, 진리의 드러남이다.
혼란스럽게 보이는 모든 삶에는,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명한 신의 메시지, 붓다의 뜻이 담겨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
느긋하게 삶의 혼란을 즐기라.
아수라장처럼, 난장판같이 튀어나오는 삶의 모든 위험들을
그저 한발자국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라.
다가오는 삶을 전체적으로 느끼고 만끽하고 수용하라.
그리고 그 모든 삶에 감사하라.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될 수도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기로우며 아름다운가.

Posted by 법상

[1]

결혼생활 16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싸웁니다. 남편은 집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 남편을 어쩌면 좋지요?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남편이 밖에 나가 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안을 봐야지 밖을 봐선 안 됩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지요. 본래 원만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놓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남편이 내가 원하는대로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하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아요.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업장소멸의 기회요 마음공부의 장이라는 점입니다.

16년 동안이나 거사님은 변함없이 밖으로 나돌았고, 보살님은 마음 아파하며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셨으니 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할 때입니다. 그 고리는 보살님께서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좀 더 가정적으로 변하길 바라는 그 마음도 놓아버리는 방하착의 수행 속에서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저 툭 하고 놓아보세요.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2]

아내는 너무 많은 것을 제게 요구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불만을 늘어놓고 잔소리를 해댑니다. 아내의 뜻을 거부하면 불화가 생기고,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물과 기름처럼 겉돕니다. 이 모든 것이 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해보지만 이렇게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요?

 

이 모든 것이 내 업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려 해 본다고 하셨는데, 과연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이 과연 아무리 괴로운 삶이라도 그냥 받아들이면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풀죽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소극적인 말이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나와 상대를, 또 나와 상대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완전한 수용하고, 상대방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서 진실로 용서해 주고, 그 또한 내 문제이며, 내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네가 변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온전한 수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 뿐이지요.

 

[3]

내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 그 내 문제를, 내 업을 도대체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상황을 수행으로 풀어갈 수 있겠는지요?

 

수행이라고 하셨는데요, 진정한 받아들임은 그 모든 사건과 상황을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관(觀) 수행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불만을 늘어놓을 때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혹 억지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원망과 화를 억눌러 놓고 있는 것이기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잠재워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받아들이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관하고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려고 애쓰면 힘들지만 다만 분별없이 지켜보기만 한다면 저절로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불만을 늘어놓을 때 내 안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이라는 삶의 수행은 곧장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잘못과 불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그 상황에 대해, 또 아내에 대해 판단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의 잔소리나 불만투성이의 말들도 다만 어떤 공간 너머의 객관적인 관찰대상일 뿐 싫은 것, 나쁜 것이라는 분별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관수행은 그 상황에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않고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해 줌으로써, 그 상황을 보는 지혜롭고도 자비로운 통찰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 새로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통찰의 관수행 속에서 근원적인 열쇠가 저절로 거사님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관수행은 언제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의 답변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Posted by 법상

삶은 왜 괴로울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감당 하면서 살고 있고, 어쩌면 그 고통과 괴로움, 두려움 같은 것들과 전쟁을 하다시피 투쟁하고 싸우면서 그것들이 없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을 어찌 보면 좀 허비하고 있고 낭비하고 있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우리 안에서 만들어 놓은 수많은 고통, 괴로움 그런 것들과의 한바탕 전쟁을 불사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고통 받고 사는 것, 고되고 힘들고 두려운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요. 과연 그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또 어떤 사람은 아마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고통 받지 않고 삶에 대해 두렵지 않고 그냥 문제없이 살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 과연 내가 고통 받지 않고 살고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조차 ‘내가 내안에서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내면서 그것과 싸우며 살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을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왜 고통을 받게 될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것에서 분명한 사실이 무엇인가하면‘내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만드는가! 우리들은 삶을 살면서 ‘내 앞에 그 어떤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아주 굳게 바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삶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힘든 게 있으면 안 된다, 고통이 있으면 안 된다, 내 삶에는 항상 좋은 일이 벌어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누구나 원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까봐 나를 욕할까봐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항상 걱정이 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사람이 뒤에서 나를 욕하지 않을까, 남들의 어떤 판단 평가, 뒷말 이런데 항상 조마조마 하면서 사는 우리 마음이 어찌 보면 너무나도 약하고 여립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경계에도 크게 휘청거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 누가 내 욕하는 말 한 마디 듣고 나면 몇날 며칠을 붙잡고서 괴로워하고, 자꾸 떠오르고 떠오르면서 오래도록 괴로워 한단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버림받으면 어쩌지’, ‘이 조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어쩌지’, ‘친구들 사이에서 버림받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입니다. 아주 쉽게 생각해서 어떤 사람이 ‘한 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그냥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무언가 얼굴 표정이 찜찜했어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내가 한말 때문에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하느라고 그 말 한마디 내뱉은 것 가지고 몇날 며칠을 근심 걱정에 시달립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에이 이미 지나갔는데 괜찮겠지’, ‘아니야 그래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다른사람에게 내 욕하고 다니면 어쩌지?’ 하면서 온갖 생각 생각으로 말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잘됐느냐 잘못됐느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끄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으로 고민을 애써 만드느라 괴롭고, 상대방에게 끝없이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서 괴롭고, 좋게 보이고 싶고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계속해서 우리는 근심 걱정을 굴리며 덩치를 키우고 산다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며 살아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나를 좋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어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모두 다 나를 좋아하는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정작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한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죠. 당연한 겁니다.

 

 

부처님을 청부살인해?

 

부처님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부처님을 다 좋아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외도들이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별수단을 다 썼어요. 부처님을 죽이려는 자객만 해도 엄청났습니다. 실제 자객이 칼을 가지고 찾아간 적도 있었고, 막 지나가는 협곡 같은데서 큰 바위덩어리를 던지거나 성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을 짓밟게 한 데바닷다 같은 사람도 있었지요.

또 어떤 사람은 큰돈을 주어서 젊고 예쁜 여자 분을 시켜서 돈을 얼마나 많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부러 사람들 눈에 띄도록 밤만 되면 부처님 처소 쪽으로 가고 아침이 되면 나오는 모습을 보여라 하고 그것을 열 달 동안 하되 애기를 가진 것처럼 배를 점점 불려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여자가 열 달 동안 왔다 갔다 하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거든요. 열 달쯤 되었을 때 법회 날 부처님께서 법문을 마쳤더니 어떤 한 여인이 벌떡 일어나서는 ‘당신이 어떻게 깨달은 부처라고 할 수 있느냐. 배속에 있는 당신의 아들조차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겠다고 하는 것이냐’ 라고 하면서 부처님의 아기가 이 뱃속에 있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피웠던 말입니다. 그렇더니 경전에는 천신들이 시켜서 쥐가 배속에 있는 박의 줄을 끊어서 탈로가 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예요. 그것이 탈로가 났는데도 몇 년 있다가 동일한 범죄를 또 저지릅니다.

외도들이 부처님이 싫어서 어떻해서 든지 부처님의 거대한 교세와 인기와 신자들의 존경심 이런 것들을 없애버리고 싶어서 또 한 여인을 열 달 동안 왔다 갔다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여인에게 시켜놓고는 이번에는 그 방법이 안 되겠다 싶어서 열 달 후에 자객을 시켜서 죽인 후에 부처님 처소 근처에 묻어버립니다. 그래서 여인이 없어지자 그 여인이 열 달 동안 부처님 처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부처님이 애기를 낳을 때가 되니 사람을 시켜서 죽인 것 같다 이렇게 외도들이 소문을 내고 다닌 거예요. 그래서 외도들이 소문을 막 내고 사람들을 시켜서 여기 저기 찾다가 그 여인 묻은 곳을 찾아서는 모든 죄를 부처님께 덮어씌웁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 여인을 죽었던 자객이 너무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참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실은 누구누구가 시켜서 이렇게 했다 해서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죠.

그것처럼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부처님일지라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란다는 것도 우리의 욕심이지요.

 

 

괴로움의 이유

 

그런데 우리가 괴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이 나를 욕하기 때문이거든요. 누군가 한 사람이 나를 욕하기 때문에 괴롭단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지구상에 수십억 인구가 되는데 그 엄청난 인구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향해 욕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 때문에 괴롭고 죽을 지경입니다. 어떤 한사람이 나를 향해 욕을 했다 그것이 왜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가 돼야 합니까. 누가 나에 대해서 평가절하 했다, 욕을 했다, 미워했다 그것 때문에 왜 미칠 것 같은 그런 이유가 되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얘긴가 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누구에게도 상처 받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욕 얻어먹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내가 원하는 삶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항상 매여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내 생각이 무조건 맞다 맞다 하면서 다 들어줄 수 있겠어요.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처럼 엄청 큰 착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사는 거예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노후가, 부유한 노후가, 아무 문제없는 노후가 나에게 왔으면 좋겠다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삶이 얼마나 황당하고 과하며 무지몽매하고 터무니없습니까. 너무 과한 바람 속에 산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삶 속에서 바라고 있는 것이 너무 터무니 없단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 없이 문제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세상이 문제이기 때문에 내게도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 대고 불평불만을 하기 때문에 내게도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다가 너무 내 마음대로 내식대로 너무 높은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내 기준대로만, 내 생각대로만, 내 마음대로만 따라 줄 수 있겠어요.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대상으로 하여간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있고 그러다보니까 거꾸로 내 내면에 문제가 있어서 세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모르고 세상만을 탓합니다. 세상과 싸우려듭니다. 내안에 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든단 말이에요.

 

 

문제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모든 문제는 내면의 문제인데 이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외부를 바꿈으로서, 세상을 바꿈으로서 내면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인생에 있어 하는 일이 대부분 무엇인가 하면요, 내 내면적인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 내면적인 문제를 바꾸는 방법으로 자기 내면을 바꾸는 것을 택하지 않고 거꾸로 외부적인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외부세계를 바꿈으로써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나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매사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노심초사하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이 문제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도록 세상을 통제 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문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속에 외로움이나 고독감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바로 이성 친구가 없는 것을 탓합니다. 즉 무언가 마음에 외로움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냐하면 이 외로움을 없애줄 세상의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외로움이라는 내 문제를 해결해 줄 내 밖의 대상을 찾아요. 외로움이라는 것은 내 내면의 문제 아닙니까. 내면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줄 무엇인가를 찾는다 이 말입니다. 끊임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하던가, 좋은 친구를 사귀려 하던가, 이성 친구를 사귀려 하던가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도 나에게 외로움을 충족 시켜주지 못 한다, 처음에 사랑했을 때는 외로움이 그칠 것 같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이 사람도 아니다, 그럼 바로 바로 쳐버리고 다른 여자를 또 사귄단 말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내 바깥에 있는 대상에서 내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완벽한 대상을 만남으로서 그 외로움을 극복했다 이렇게 착각 하는 거예요. 함께 있다고 해서 근원적인 외로움을 없앨 수 있습니까? 누군가 함께 있다고 해서 인간 본연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본연적인 외로움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좀 서글픈 이야기죠.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는 이 외로움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아주 좋은 공부의 재료가 되어주고 우리가 내면을 살필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는 때때로 사람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바깥에 누군가가 나의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있고 나를 사랑해주어 그 외로움을 없앨 수 있는 그런 대상을 찾아 헤메는 방법이 근원적인 답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 일 년, 이 년, 삼 년 지나다보면 그 다음에는 무상하게 휙 휙 없어지는 거예요. 그 마음은 내면의 문제이거든요. 바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바깥을 아무리 바꾸어 봐야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혼한 지 몇 년, 혹은 몇 십 년 되어서 바람을 피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기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다 내적인 문제를 외부를 바꿈으로써 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내면의 결핍감, 불만족, 어떤 그 가난한 마음, 뭐랄까 거지같은 마음, 무언가 모를 부족감 같은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끊임없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봉을 이천, 삼천을 받다가 거기서 만족을 못 하고 오천만원, 일억을 벌어도 거기에 만족을 못 하잖아요. 그런 만족은 마음의 문제이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우리의 만족감 그것이 충족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충족될 수가 없어요. 우리 삶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부족합니다. 이 부족이라는 결핍감은 내면의 문제이지 외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차를 사고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고통은, 그 결핍감은 더욱 더 강렬해지죠. 더욱 더 엄청난 욕망으로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어리석은 욕망에 빠지게 만들죠.

보통 우리들 마음의 바람이 소박하잖아요. ‘뭐 나는 많은 것도 바라지 않는다’ ‘어느정도 연봉만 되면 좋겠다’ 그렇듯 소박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발생되는 순간 우리의 소박함은 없어지고 맙니다. 또 다른 목적 또 다른 욕망 또 다음 것에 대한 욕망을 시작하고야 말지요. 이 세상을 다 소유하더라도, 세계 1등 가는 부자가 되더라도 우리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아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이것이 내적인 문제이지 어찌 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내적인 문제인데, 바깥의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끊임 없이 바깥을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돈이 없어 괴롭고, 친구가 없어 괴롭고, 성공하지 못해 괴롭다, 이것은 전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내면의 문제입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는 외적인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부족함을 채워줄 외적인 어떤 대상이나 물질이 필요할까요? 아니겠지요. 항상 가득 차 있고, 항상 원만 구족하신 분입니다.

 

 

중심을 잡고 삶 위에 서라

 

엊그제 어떤 도반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스승님으로 존경하는 스님이 계신다는데 그 스님을 보면 항상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당신이 보았을 때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것 같데요. 무언가 삶에 낙이 없어 보인답니다. 늘 법회하고 기도하고 참선하고 산책하고 아니면 방안에 혼자 앉아 있을 뿐입니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답니다.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 한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혼자 앉아있고 좌선을 하고 또 기도 시간되면 기도하고 법회 시간되면 법회 하고 그 외에 시간에는 취미 활동 이런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신도님이 오시면 신도님과 이야기 나누다가 또 없으면 들어가 앉아있고 그냥 방 안에만 앉아 있는데요. 그래서 이 스님이 생각 할 때는 저 스님은 어찌 삶을 재미없게 심심하게 살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오랫동안 그 스님을 살펴보았더니만 이 스님은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야지만 행복한 스님이 아닌 거예요. 그냥 항상 혼자 있어도 충만한 것입니다. 돈과 함께 있지 않아도, 무언가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지 않아도, 누군가 전화를 걸어 노닥거릴 일이 없어도, 무슨 재미있는 건수를 찾지 않아도, 그 어떤 것 없이 혼자 독방에 앉아 있더라도 아무런 외로움이 없는 자기중심이 딱 서 있는 분인 거예요. 자기 내면의 중심이 딱 서있게 되면 바깥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방안에 딱 들어서 있는 것이지 바깥을 향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내면의 이 공허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어떤 재미난 일이 되었든, 명예를 충족시키는 일이 되었든, 그런 것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그저 홀로 있더라도 가득 차있기 때문에,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밖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스님 같겠지만 정말 얼마만큼 중심이 서있는 분이신지, 그 자리가 얼마나 굳고 깊은 자리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삶이 고되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삶이 실패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이게 바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엄청난 이상적인 것을 꿈꾸고 있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 일어날 때 그것을 문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면에서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아까 회사에서 했던 말이 혹시 실수 한 건 아닐까? 그 때 그 말을 괜히 했나? 오늘 내가 말이 너무 많았나? 너무 내 자랑만 했나? 너무 남 욕만 했나? 너무 속보이는 말이었나?’ 말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그건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실수한 것 같다, 끈임 없이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서 우리를 괴롭게 한단 말이예요. 그 말 한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붙잡는단 말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넘기지 못하고 붙잡아 멘단 말입니다.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 딱 박혀 있는 거죠. 그런 식으로 우리 삶에서 흐르지 못한 채 문제가 되어, 정체가 되어, 괴로운 무언가가 되어 꽉 막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괴로움 없는 삶을 사는 방법

 

그런데 아주 다행스러운 소식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꽉 막힌 삶을 대번에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실패적인 삶을 살지 않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면서 걱정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이일이 잘 될까 못 될까 두려워하거나 조바심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의 성패에 따라 내 진급 문제가 달린 아주 중요한 회사의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조차 초조한 마음, 걱정스런 마음을 붙들고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회사의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여유로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맑게 비어있으면, 어떤 하나에 붙박혀 있어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한다’ 하고 고집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삶에 즐거운 일만,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야 됩니까? 그렇지 않지요.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 내가 원하는 삶이 펼쳐져야 성공한 삶이라고 고정지어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지혜롭다면, 사업에 성공하지 않더라도, 진급을 하지 않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아주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겨우 겨우 끼니를 이어가면서 한 달에 몇 십만 원 정도 가지고 그냥 아이들 키워가면서도 즐겁게 삶을 누리며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어요. 고층빌딩을 소유하고, 아주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그 아파트 값이 몇 년 안에 두 배 세배 뛰고 그런 삶을 살지 않더라도, 승승장구하며 제때 제때 진급을 하지 않더라도 삶이 성공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성공적인 삶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실패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겉으로는 성공한 삶으로도 실패한 삶으로도 보이지만 사실은 실패한 사람 투성이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이 소유 할수록 오히려 실패한 삶일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긴 하죠.

나의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많은 삶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나를 뒤에서 욕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진급을 못 했을 수도 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뒤에서 해코지 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거기에 막 신경증에 걸려 예민해져서 하나하나에 마음 쓰고 괴로워하며, 누구 하나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나쁜 말 한 마디 한다고 그것 때문에 몇날 며칠 지옥세계에 빠져서 살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인연 따라 펼쳐지는 삶으로부터 나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갖 생각 생각 가지고 분별심을 가지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어나는 그 일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포용하란 말입니다.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누가 나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생각과 바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온갖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그런 바램들을 긍정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허무맹랑한 바람들에 우리가 왜 다 응해야 합니까. 그것을 맞추기 위해 내 인생 전부를 걸고 그냥 전쟁을 하는 삶을 살아야 되고, 고통의 삶을 살아야 되느냐? 그런 삶을 당장에 청산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 내 기분대로 내 생각대로 만사가 돌아가야 된다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렇다고 이 내부의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고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구나 그러니까 내부의 문제를 고치면 되는구나 해서 나 자신을 탓하고 내면의 문제를 탓하고 고치려고 애쓰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받아드리고 허용하되 거기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내부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 바람, 욕망, 번뇌 등의 속삭임을 귀담아 듣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야 그때 너 잘못 한거 아니야’ 하고 끈임 없이 올라오는 생각 생각들을, 그 불평불만을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 뒤에 떨어져서 그 생각이나 고통이나 분별이나 내가 만들어낸 모든 문제들, 문제라고 만들어냈던 모든 것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나라고 하는 것이 벌려 놓은 삶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지켜보면 삶이 너무나도 생기발랄해집니다. 어떤 고통도 고통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삶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삶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해 온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는 거예요. 가만보면 우리는 작은 것 하나 가지고 예민하게, 어찌 보면 우리가 아주 신경박약증세를 보이고 있죠.

남들이 말하는 것에 몇날 며칠을 구속돼서 끄달리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산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껏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붙박여서 몇날 며칠을 아파하고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 생각들에 힘을 보태줄 필요가 없습니다. 힘을 실어주면 안 되요.

 

 

아상에 밥 주지 마라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생각을 또 다른 생각으로 플러스 플러스 시키지마라 하는 말입니다. 내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모두 아집(我執), 아상(我相)의 범주라고 볼 수 있는데요. 즉, 내생각 내견해는 아집이고 아상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일뿐이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밥 주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삶, 내가 바라는 삶 거기에 끊임없이 끄달려가고 생각이 붙박여 있으면 그 생각은 더욱 더 에너지를 받아서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예를들어 ‘저 사람이 너를 뒤에서 욕하더라’ 하고 한 마디를 들었어요. 그러면 그냥 욕했구나 하고 탁 흘려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욕한다는 그 말 한마디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내 인생에서, 우리 삶에서 백년 팔십년 칠십년 되는 삶에서 이 수십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뒤에서 욕했어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어요. 더구나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이니 100% 분명한 사실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뒤에서 욕한다더라’ 하는 그 한마디에 온갖 밥을 줍니다. 에너지를 보태요. 어떻게 밥을 주느냐하면 생각으로써 ‘야! 저 때도 나를 미워했고 이 때도 나를 미워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괴심한 녀석이네’, ‘어쩌면 이 사람이 그 사람에게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욕하고 다닐지도 몰라’, ‘어쩌면 이 사람이 나를 아주 음모를 꾸며가지고 우리 회사에서 매장 당하게 할지도 몰라’, ‘어쩌면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하려 들지도 몰라’ 하면서 온갖 생각 생각으로 에너지를 키워요.

그냥 단순히 욕 한마디를 넘겨 버리면 되는데 그 생각 하나에 온갖 에너지를 개입시킴으로서 밥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덩치가 너무 커져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립니다. 그렇게 생각 생각으로 밤새도록 그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 다음날 그 사람을 딱 만났는데 말 한마디를 걸어 옵니다. ‘야! 너 요즘에 잘하는 것 같더라’ 하고 좋은 얘기를 했어요.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생각에서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너무 덩치가 커졌기 때문에 ‘저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나에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앞에서는 저러지만 뒤에서 뒤통수를 치려고 저려는 걸 꺼야’ 무언가 칭찬을 하는 말도 나쁘게 들린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커피 한 잔 타주면서 ‘이거 한 잔 먹고 해’ 하면, ‘야! 네가 먼저 먹어봐’, 혹시 독을 탓을 지도 모른단 말이지요. 이거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벌어졌어요. 그런데 거기에 분별하고 온갖 생각 생각들이 밥을 주지 않는다면 그 생각은 거기서 딱 끊어지고 맙니다. 붙잡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면 그냥 거기에서 끝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펼쳐지는 흥미로운 경험이 됩니다. 왜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문제로 생각 할 필요가 없지요. 문제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실어 주면 실어 줄수록 우리는 나중에 가면 남들이 보았을 때 좀 미친 사람처럼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어떤 한 가지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참 이상한 사람이다, 꼭 정신병자 같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렇게 밥을 주니까 생긴 거지 그 사람은 원래부터 정신병자가 아니였어요.

로또에 당첨되었거나 아버지가 농사를 짓다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 엄청난 돈이 생겨서 자식이 싸워가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가 자살을 하고, 아내가 로또 당첨되어 남편과 싸우고 이혼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럽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애초부터 나쁜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각 생각에 온갖 밥을 주다보니까 그것이 그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생각에 밥을 주게 되면 엄청난 욕망 집착 이런 것으로 몸뚱이를 키우게 되고 그것이 이제 나를 장악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상의 덩어리가, 생각의 덩어리가 나를 완전히 장악하게 돼서 그때부터는 내 삶이 그 방향으로 흘러들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실은 우리가 크고 작게 이런 일을 벌이면서 인생을 살고 있는 거죠. 이런 아찔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아상에 밥 주는 일을 하면 안 돼요.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고 어떤 문제가 생겨났어요. 불평스런 일이 생겨났습니다. 불평불만을 일으키는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지혜로운 거예요.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순간 그날 모든 것을 딱 풀어버리는 겁니다. 질질 끌고 가면서 거기 계속 머물러 있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몸뚱이를 키우게 되고 말지요.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라’ ‘응당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하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지라

 

어떤 불평거리가 생겼을 때 ‘불평거리가 생겼구나’ 하고 거기에 응해 줄 수는 있겠죠. 어떻게 할까 하고 대응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 마음이 머물러서 그 불평스런 마음에 점점 더 살을 붙이고 몸뚱이를 키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발자국 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이 화가 나고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으로부터 떨어져서 나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내 안의 온갖 생각 생각들을 지켜볼 수 있어야 되고 그렇게 지켜보다보면 내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내 생각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많이 거기에 밥을 줌으로 해서 생각의 몸뚱이를 키우는지를 여실히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실히 보게 되면 덩치가 커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보게 되면 생각이 덩치를 키우지 않고 저절로 관찰 한다는 것이, 본다는 것이 그 문제를 녹여주게 되고 없애주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를 양산해내는 것은 바로 아상이라는 놈이 하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지켜보는 자가 우리의 본질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을 지켜보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나로 살지 않고 겉껍데기로 살잖아요. 생각을 가지고 온갖 분별하니까 껍데기인 나로 사는 겁니다. 그 분별과 해석과 생각을 놓아버리고 그 껍데기의 나가 아닌 본연의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을 지켜보는 자, 주시하는 자, 온갖 문제를 만들어낼 때 그 문제를 지켜보는 자, 화가 올라올 때 그 화를 지켜보는 자, 그렇게 주시하는 자가 되었을 때 주시하는 자가 바로 본연의 참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켜보는 자가 되었을 때 어떤 공덕이 있겠어요? 부처님은 우리의 모든 업장을 소멸시켜주신다고 하잖아요. 그 말은 내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을 녹여준다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녹여주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 말입니다.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니까 이 말에도 걸려서는 안 되겠죠. 그런데 부처님이 누구냐?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 말입니다.

지켜보는 것이 바로 나의 본체이고 당체입니다. 그래서 ‘관찰하라’, ‘깨어있으라’, ‘어떤 놈이 관하고 있는가 그것을 돌이켜보아라’, ‘보는 놈을 돌이켜 보아라’ 하는 얘기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본다 라는 것, 주시 한다는 것, 분별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 상황을 지켜본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순간순간 부처로 만들어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우리가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부처가 되는 문제이지, 내가 지금 부처로 사느냐 중생으로 사느냐 하는 문제이지, 지금은 중생이지만 나중에 깨달아서 부처 되겠다 하는 그 공부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 되는 공부가 아니라 부처로 사는 공부

 

불교 공부는 부처가 되는 공부가 아니라 순간순간 부처로 사는 공부입니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고 했잖아요. 어떤 것이 내안의 부처냐? 지켜보는 자, 그것이 내안의 부처다 이 말입니다. 생각이 내안의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차라리 직관을 의지하라 그러잖아요. 영감 같은 내안에 깊은 곳에 있는 직관 같은 것 그것은 생각보다 더 차원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과 다투는 대신, 삶과 투쟁하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대신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가 만들어낸 모든 문제를 주시하고 있을 때 삶이 어떻게 바뀌겠어요. 삶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여름에 휴가를 가고 싶잖아요.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나서 여름이 딱 되면 삼박사일 사박오일 휴가를 내서 휴가를 가잖아요. 매일 매일 일 년 휴가를 기다리잖아요. ‘야! 올 여름 휴가 때가 언제 오겠나’ 하고 매일 매일 기다리잖아요. 그런데 매일 매일의 삶이 휴가가 될 수 있습니다. 휴가 가는 날로서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을 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주중에는 매일 주말을 기다리지만 주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주말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 이 자리에서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야! 집에 가서 좀 쉬고 싶다’ 하지만 그 집에 가서 쉬고 싶은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집에 가서 쉬고 싶다 하고서도 정작은 집에 가서 쉬지 않죠. TV 켜놓고 누워서 TV 보고 있잖아요. 머릿속은 온갖 생각과 계획들로 가득 채워둔 채 말입니다. 그건 쉬는 것이 아니죠. 엄청난 문제를 머릿속에서 양산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전혀 거꾸로 가는 거죠.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황됩니다. 그것이 쉬는 것이라 착각을 하고 살아요. 다시말해 휴가 때나 주말을 그렇게 기다려 놓고도 우리의 습관이 막상 주말이나 휴가가 다가오면 ‘쉬는 일’을 하면서 마음을 또 힘겹게 만들어 냅니다. 쉬는 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말 그대로 푹 쉬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히 푹 쉴 수 있는 시간이 오더라도 쉬는 법을 모른단 말입니다. 쉬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살면서 우리는 한 번도 참되게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참된 휴식을 취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매일 매일이 아주 흥미롭고도 생기로운 휴가가 되고, 주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순수하게 상대방과의 사귐 그 자체를 즐겨야지, 내 필요에 의해서 친구를 사귄다거나, 저 사람을 사귀면 도움이 되겠지 하는 식으로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람과 사귐이 즐거운 거예요. 이익이 될지 안 될지는 생각이 하는 거예요. 생각은 항상 그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을 따집니다. 그게 바로 생각의 전공분야예요. 그런데 우리 본질이 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다만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교제를 할 때 교제를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묵묵히 분별없이 지켜볼 뿐입니다.

그리 되었을 때는 설사 늘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킬지언정 나에게는 문제를 안 일으키게 됩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사기 치는 사람에게 사기 치지 자기 친구에게 사기 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란 놈은 편견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냐 하면은요, ‘이 사람은 전과가 있으니까 나에게도 사기를 칠거야’, ‘나에게도 나쁜 짓을 할 거야’ 이런 편견을 가지고 대화를 하거든요. 끊임없이 그 사람의 과거를 끌어들이고, 기억하고, 판단하고, 추리하고, 상상하고, 분별하면서 무수한 생각의 다발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그것을 상대방이 분명히 압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의 나에게 친구가 아니에요. 그때부터는 사기 칠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활짝 열고 온전히 받아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의 과거를 놓아버린 채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고 주시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때에도 여전히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생각을 놓아버리면, 그 사람이 사기를 쳤다든가 그 사람이 나쁜 놈이라든가 하는 그런 생각을 질질 끌고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에게 투명한 존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럼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가 아주 흥미롭고도 즐거운 사귐이 됩니다. 이처럼 무분별의 지켜봄이 관계의 토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상대방도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게 되고, 나아가 상대방이 그 때부터 근원적으로 변하게 되고, 감동스러운 삶을 살아나가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근원적인 삶의 변화가 찾아온단 말입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이 돈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으로서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게 되면 그냥 하루하루 일하는 그자체가 즐거운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주 즐거운 일을 할 때는 어때요. 밤을 세며 일하더라도 즐겁고 피곤한 줄을 모르잖아요. 또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밤새도록 어디 여행을 갔다 와도 지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삶을 살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직장생활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직장생활을 즐기려는 생각을 못 하고 직장생활 그것을 온갖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있는 거예요. 직장생활이 왜 문제가 됩니까. 빨리 퇴근하고 싶은 곳, 직장이 왜 이런 곳입니까? 직장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정말 우리가 꿈꾸는 것입니까? 아니거든요. 그런데 멀쩡한, 또 고마운 이 직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찌 생각해 보면 완전히 잘못된, 정신병자 같은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얼마나 결혼하고 싶어 합니까. 그런데 결혼하고 났을 때, 아이를 낳고 났을 때 그렇게 생각하던 것 처럼 행복하기만 한가요? 씩 웃으시는 분들 계시죠. 자식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하다가도 자식이 생겼을 때 막상 키우기 어렵다고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아름다운 일도 문제가 됩니다. 문제를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수행의 재료가 됩니다. 내 공부의 재료가 되고 어떤 아름다운 정신적인 성숙을 위한, 깨달음을 향해 가기 위한 아주 아름다운 재료가 된단 말입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내부적인 문제이지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아름다운 외부세계나 환경도 모두 문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양산해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악조건이나 역경일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아무런 고통도 남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외부를 바꾸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겠습니까? 어떻게 사시겠어요? 그것은 자기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분별없이, 생각에 휘둘림 없이 다만 삶의 모든 것이 내 존재위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쳐가도록 내버려 두면 됩니다. 다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내 존재 위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둔 채 지켜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물들지 말고,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거기에 깊이 개입하지 않은 채, 그저 영화 한 편을 보는 마음으로 내 삶의 연극을 흥미롭게 지켜보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분들은 관하고 사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살면 너무 삶이 게을러지고 나태해 지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시하고 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 순간순간 아주 온 존재를 바쳐서 일을 하고 주어진 몫을 해 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마음을 모아 집중한 상태에서 모든 일을 생생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이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라도 된 것처럼 바로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 불교에서 집착을 버린다고 하니까 그냥 대충 대충 사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직장의 일에 나의 온 존재를 투영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깨어있음에 담긴 우주적 힘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렇듯 완전히 깨어있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힘이 붙는다는 점입니다. 깨어있는 순간, 내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 상대방과 교제를 나눌 때 혹은 상대방과 일을 추진할 때, 어떤 글을 쓸 때, 무언가 일을 하나 할 때, 내가 온전히 그 일을 주시하고 일을 하게 된다면 아주 그 일에 성스러운 에너지가 붙게 됩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잡스러운 에너지가 사라지고 내 더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더 깊은 불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엄청난 에너지와 힘이 붙기 때문에 그 일의 흐름이 아름답게 바뀌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고도 법계의 흐름과 일치를 이루는 우주적인 힘으로써 그 일이 저절로 진행되게 됩니다.

도반 스님께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법당 주지스님들이 군종병을 뽑아 함께 살잖아요. 그런데 어느 부대에 아주 문제를 많이 친 문제아랄까, 관심사병이 있었단 말입니다. 아주 사고만 치고 전과도 있고 가만히 놔두면 자살 할 것 같고, 너무 장병들을 괴롭히고 부대에서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장병이 있었는데 이 스님이 상담을 해 본 뒤에 그럼 내가 거두어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법당에 데리고 와서 그 장병 법우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 아이가 과거 부대에서 어떻게 했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사귀어 주는 겁니다. 처음에 그 장병을 데려와서 같이 살겠노라고 했을 때 주위에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요, ‘법사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법사님이라도 얘가 하도 교묘한 아이라 무슨짓을 할 지 모릅니다.’, ‘모르긴 해도 법사님에게도 무슨짓을 하고 사기를 칠 놈이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스님에게 했던 결정적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세요. 눈물을 흘리면서 며칠을 같이 살다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어떤 사람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내가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왜 이런 나쁜 짓을 하지는 진심으로 나를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나를 조금 멀리 하려는 것을 감지 했을 정도라는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나를 얼마나 부담스러워하고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스스로 느끼면서 이 친구의 좌절감은 거의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 나를 살펴줄수 있고 나를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냐 한 거지요. 그런데 이 주지법사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실 어떤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내가 바라볼 때 문제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내게 와서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투명하게 바라보면 그 사람은 나에게 와서 맑고 아름답고 투명하게 좋은 인연이 됩니다. 모든 것은 내문제이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사귀는 친구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친구를 사귀는 것이고 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바깥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을 내가 불평이 있을 때 불만이 있을 때 무언가 고통이 있을 때 그때를 아주 생기로운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내 마음공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아차!’하고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연루된 자가 아닌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는 자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친구가 욕을 했고, 내 안에서 욱 하고 화가 올라왔단 말입니다. 이 상황에 맞받아쳐 욕을 하고 싸움을 걸 것이 아니라, 이때 한 발자국 물러나서 내안의 화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욕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거예요.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도 지켜보고. 힘든 일을 할 때, 힘든 훈련을 할 때 힘들다는 생각에 함몰 되어 버리면 그 생각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그것을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 세 번째 화살을 맞는다 이래요. 그 일 자체가 힘들 것 보다는 내가 생각으로 그 일을 더 크고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든 일을 할 때, 한 발자국 떨어져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볼 수 있어요. 그렇게 지켜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힘든 일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천팔십 배, 삼천 배를 할 때 힘들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마음도 고통스럽습니까? 절을 할 때는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거든요. 몸은 힘들 지언정 마음은 뿌듯합니다.

내가 무언가 뿌듯한 일을 해서 이일을 성취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어서 축구를 할 때 힘들어 죽겠습니까? 뭐 기합을 받는다 이럴 때 힘들어 죽겠지 축구할 때 힘든 일이 없죠. 몸은 힘든데 마음은 더 즐겁습니다. 거기다가 골이라도 하나 넣으면 아무리 힘들게 뛰어도 힘들지 않거든요. 괴로운 일 자체, 괴로운 현상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괴롭다고 생각하고 괴롭다는 생각으로 온갖 밥을 주고 그것이 더욱 더 큰 괴로움으로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시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괴로움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양극단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것에서 우리는 큰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휴가 같은 삶, 주말 같은 삶, 달콤한 낮잠과도 같은 삶,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연인과도 같은 그런 관계, 매 순간 순간이 투명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삶을 즐기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겁니다.

삶과 투쟁하지 않고 삶의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왔다가 갈 수 있도록, 흘러왔다 흘러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 한 발자국 떨어져 내 중심에서 모든 삶을 그냥 가만히 투명하게 지켜보게 되고, 그랬을 때 내가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내 중심에 딱 뿌리내린 삶을 살게 됩니다. 중심을 잡고 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화에 정신을 빼앗기고, 누가 밉다고 거기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모든 일이 생길 때 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에너지를 소진하는 삶이 아니라 내 중심에 딱 자리 잡고 앉아서, 내 깊은 뿌리에 자리 잡고 앉아서 내 안에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가만히 지켜보는 거예요. 인연따라 일어나는 삶을 거부하지 않고 내버려 둔 채 허용하고 수용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중심이 딱 잡힌 장부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격장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더라도 나는 중심에 머물러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외부의 경계에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는 왔다 갔다 하는 삶이 아니라 중심에 딱 뿌리 내리고 그것을 자유롭게 바라보면서 거기 휘둘리지 않고 걸림 없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사실 아주 즐겁고 생기롭게 누리는 삶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고통 받고 사는 삶이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니라 즐겁게 사는 게, 행복하게 살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본질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본성을 거슬러 살지 말고 다만 본성에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내가 공연히 문제를 만들지 말고 애써 만들지만 않으면 그 자리가 부처의 자리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드리실지 모르겠으나 이것을 한 번 듣고 넘기지 마시고 내 안에 딱 주시하는 중심을 두고 내 존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지켜보겠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생생하게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스스로 체험해야 되요. 그럼 이 수행이라는 것이, 나라는 본연의 중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깨어납시다.


Posted by 법상



[파주 보광사, 산사에 늦은 봄눈이 내립니다.]

어떤 한 경계에서
가슴 시 린 쓰라린 아픔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딛 고 일어서는 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공만을 바라고
바라는 대로 잘 되어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겠지 만,
사실 늘상 성공만 하고
바라는 바 대로 이루기만 하 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내면의 뜰은 공허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실패 속에서
또 그 아픔 을 딛고 일어나는 그 속에서
더 강인해 질 수 있을 것 이고,
바라는 바가 좌절되어지는 그 속에서
좌절을 딛고 일 어설 수 있는 지혜로움이 생겨나며,
세상을 얕보지 않 을 수 있고
좀 더 겸손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 다.

요가를 가르치는 분이라거나
몸 다스리는 법에 대해 강의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분들 비슷한 공통점이
어렸을 때 죽고 싶을 만큼 몸이 너 무 허약했다고들 그래요.

너무 몸이 약하고 병이 많다보 니
건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그랬으 니 제 몸 죽어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겠습니 까.

제 몸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라거나, 운동이라거나, 요가라거나
아무리 얘기를 해 줘도 나몰라라 하지
죽기 살기로 뛰어들어 공부할 수가 없어 요.
뭐. 당연한 일이지요.

한 번 아파 본 사람만이
그 것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고
정말이지 피나는 노력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생각지 못하게
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고
능통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취직 할 때도
쉽게 쉽게 좋 은 직장 취직 잘 한 사람은
직장 고마운 줄 잘 모릅니 다.
그러니 그만큼 열심히 일 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요.

그런데 한 1년이고 2년이고 백 수 백조로 있다가
실업자로 논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 고 눈치보이고
어려운 지 충분히 경험했다가 어렵게 어렵게 취직한 사람 은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즐겁게 열심히 일 합니 다.

어지간히 어려운 일, 치사한 일이 있어도
꾹꾹 참고 견딜 수 있는 힘도 생기고
일 그만두지 않으려고,
집에서 논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잘 아니까
회 사에서 힘겨운 일이나, 답답한 일이 생겨도
어지간하 면 뛰쳐 나올 생각 않고 최선을 다한단 말입니 다.

제가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 만 나다 보니까
여러 번 보아온 일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었다거 나
주식 투자해서 대박이 났다거나 그랬을 때
당장엔 이 경계가 '행복'이라고 느끼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 번
노력 도 안 하고 큰 돈을 만져 본 사람은
절대 소박하고 정직하게 작은 돈 벌면서 살 수가 없어요.
수십억 수백 억을 쉽게 벌었다면
분명 쓰는 것도 아주 쉽게 쓸 수 밖 에 없고,
쉽게 쓰는 습을 익혀 놓으면 그게 결국 업이 되고 맙니 다.

그러니 그 사람은
계속해 서 요행만 바라지
정직하게 내가 일한 만큼 돈 벌면서
소박하게 살아갈 수가 없어집니다.
어디 몇백억 쉽게 벌 어 쉽게 막 쓰던 사람이
한달에 일이백만원씩 받아가면 서 정직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처음엔 이 경계가 행복 인 줄 알았겠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망쳐놓는 역경계 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수행도 마찬가지입니 다.
멀쩡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 한테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 가르쳐주고
행복에 이르는, 평화와 자유에 이 르는 길이라고 말을 해도
그리 크게 느끼지 못합니 다.

그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 하거든요.
그런데 뭐하러 또다른 행복을 목숨걸고 찾겠어요.
물 론 수행하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절하지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수행도 적당히 하고
시간 있을 때, 마음 내킬 때 적당히 하지
이게 생사를 결단짓는 중대한 문 제라고 여기면서
미친듯이 달려들지 않는단 말입니 다.

그런데 한 번 삶의 저 아래 진 흙탕에
떨어질 때까지 떨어지고,
괴로울 때까지 괴로워 해 보고,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갈 만큼, 자살하고 싶을 만큼
삶에서 아파하고 괴로워 해 본 사람은
이 가르침이 너 를 살려줄 수 있다 하고
이 가르침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다 하면
정말 죽기 살기로 수행하고 정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겁 니다.

실제로 그래요.
너무나도 큰 괴로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죽고싶을 만큼 아파하는 사람은
불법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 는 그 말을
정말 뼛속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고
온몸을 다 바쳐 서 죽기살기로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겠 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왔길래,
또 자살밖에 길이 없다고 워낙 확고하게 이야기 하길래
기왕에 자살 할꺼면
내 몸 내가 죽이면 그것 큰 죄가 되니까
법당에서 절하다가 엎어 져 죽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가만 생각하다가 그러겠노 라고 하셨지요.

전 그 분 무슨 철인인줄 알았 습니다.
하루 종일 밥 생각도 별로 없고 절만 하시는데
밤 도 꼬박 새시면서 절만 하시는데
정말 절하다가 죽으 면 어쩌나 걱정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 절 하다가는 안 죽더라고요.
그렇게 한 몇 일을 하시더니만
죽어가야 될 사람이 생 기있는 눈을 뜨고는
이제 가겠다고 해요.

죽으러 가겠다는 말인지 알았 는데
살 생각이 생겼노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셨지요.
집 에 돌아가서 뒷얘기를 들어보니까
매일같이 3000배 이상 절 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지금은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 요.
문제 다 해결하고
나 살려준 것이 불법이다 싶어
불교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래서 지지난 달인가 짐 다 싸들고
이 밝은 길 따라 출가하 겠노라고 오셨더랬습니다.
지금 행자생활 열심히 잘 하 고 계실겁니다.

이 분이 괴로운 역경이
자 살하고 싶을 만큼의 괴로운 역경이 없었다면
이렇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겠어요?
아마도 나중에 스님 되시면
훗날 설법하실 때 신도 님들께 당신 이야기
절절하 게 웃으면서 이야기 하실 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은
괴로움을 당해서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또 역경 속에 서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더 큰 행복 속으로 들어가 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는 삶이라는게 어때요?
지금 당장 괴로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행복 의 밑거름이 되고,
지금 당장 행복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괴로움의 시작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 까.

역경이 곧 순경이고
순경 이 곧 역경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역경과 순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순간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 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역경이 다, 순경이다,
혹은 괴로움이다 즐거움이다,
이렇게 나누어 놓는 마음만 없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그저 분별없는 텅 빈 경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경계들을
죄 다 두 가지로 나누어 놓고
어느 하나는 선으로 어느 하나는 악으로,
어느 하나는 행복으로 어느 하나는 괴 로움으로,
그래 놓고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만 정신이 없었습 니다.

그러다 보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분별의 참된 지혜의 눈을 가지지 못하 고
삐뚫어지고 왜곡되고 치우친 관점만을 지니게 된단 말입니 다.
그러니 거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생겨나지요.

이를테면 '건강과 질병' 이렇 게 나누어 놓고,
우린 건강하기만을 바라면서 삽니 다.
건강하면 좋은 것이고
질병이 걸이면 나쁜 것이라고 분 별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질병에 대해서 나쁘다 고 분별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 당장에 건강하다고 좋아하면서
안일하게 대처하여 운동도 안하고 몸도 안 돌보게 되면
겉으로는 건강이지만 내적으로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질병 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질병이 걸림으로써
몸의 건 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도 알 게 되고,
그로인해 앞으 로 더 열심히 운동하고 심신을 단련해야겠다는 것도 알게 되 고,
또 내면에 쌓여있던 탁하던 기운들도
한 며칠 앓 아 누움으로써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게도 되는 것이지 요.

그러니 질병은 나쁜 것, 건강 은 좋은 것
그렇게 나누어 놓을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질병이 걸리는 것도
좀 더 넓고 지혜로운 시각으로 보 면
우리를 공부시키는 것이고, 이끄는 자성불의 나툼인 것입 니다.

역경이 처해 봐야
비로소 괴로운 줄 알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되며
그렇게 됨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을 좀 더 바르게
치열 하게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면
그 역경은 도리어 불법 으로 이끌려는 방편 공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계를 가지고
역경이다 순경이다 하겠습니까?
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 어 놓은 분별심일 뿐이지
이 법계는 항상 공평하고 여 여할 뿐입니다.

나쁠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가 가장 좋을 때일 수 있고,
좋을 때라고 생각하 지만
그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 일 수 있는 것입니 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 다'는 말이 있잖아요.
젊어서 뿐 아니라 늙어서도 다 마찬 가지지요.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만 큼 우리 인생을 값지게 만들어주고
우리 삶에 밑거름 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항상 성공만하고
항상 마음 대로 하고 살아온 사람,
실패나 역경을 경험해 보지 못 한 사람은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겠습니 까.

역경 속에서
수많은 실패 속에서 이겨내고
비틀비틀 쓰러질 듯 하다가도 오뚝이 처럼
당차게 일어서면서 세상을 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 은 내면에 딱 힘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 속에 서도 이겨낼 수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경계에도 속지 않 고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중심이 잡힌 사람이라는 거지요.

한 가지 괴로운 경계가 온다 고 했을 때
우린 '괴롭다'고만 생각하지
그 경계의 고마운 점, 이익되는 점은 보지 못한단 말입니 다.

그러니 이런 저런 분별 하지 말고
오직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합니 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법우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즐거우십니까 아니면 괴로 우십니까?
일이 잘 풀리는가요 아니면 잘 안 풀리는가요?
지금 의 경계가 역경입니까 순경입니까?

아닙니다.
역경도 역경이 아니고
순경도 순경이 아니며,
괴로움도 괴로움이 아니고
즐거움도 즐거움이 아닌 것입니다.

순역의 양 극단의 분별을 다 놓아버리세요.
다 놓아버리고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라 도
부처님의 나투신 경계로 즐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러면 모두가 고마운 공부의 꺼리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없이 자유롭습 니다.
역경도 순경도 아니고
다만 여여하고 평등한 하나의 순수한 경계일 뿐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괴로 운' 경계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서 '즐거운' 경계 또한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경계는
다만 그러한 경계일 뿐
좋고 나쁜 경계는 아니란 말입니 다.

괴로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 이고,
즐거움도 고마운 공부의 재료인 것입니다.
역경이든 순 경이든
우리 마음 속에서 분별해 가지고
행 불행을 마음 속 에 품고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순역의 경계,
즐거움 괴로 움의 경계를 다 놓아버리고
무분별로써 일체를 다 받아들이 면서
자유롭고 당당한 걸음을
휘적휘적 내딛으시기 바랍니 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평화 롭습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닙니 다.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다 놓아 버리고 나면
지금 이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대로 텅 비어 고요합니다.
여여하며 여법합니다.

그런 경계가 좋고 싫은 이유는
경계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분별이 있는 탓입니다.

경계에 휘둘리는 마음 또한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경계는 본래 휘둘리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맑은 하늘에
인연 따라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듯
텅 비어 고요한 본래자리에
인연 따라 이런 저런 경계가 잠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좋고 싫은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분별의 경계가 꿈처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경계가 일어날 때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의 경계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모인 경계를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짓고
좋고 나쁜 분별을 일으킵니다.

연이어 좋은 분별엔 애착[탐(貪)]의 마음을,
나쁜 분별엔 성내는 마음[진(嗔)]을 일으킵니다.
그런 두 가지 분별이 생기는 연유는
본래 나도 경계도 모두 공하고 허망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치(癡)]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아무런 분별이 없음을
밝게 깨쳐 알 수만 있다면 거기에 휘둘릴 것도 없습니다.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그럽니다.
그러나 ‘더위’는 그냥 더위일 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더위’일 뿐
좋고 싫다는 고정된 분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위는 나쁘고 싫은 것이라든가
좋은 것이라든가 하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텅 비어 고요한 더위라는 경계에
우리는 온갖 분별을 부여하고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분별 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흘리며 일을 할 때는
더위라는 경계에 ‘짜증난다’ ‘미치겠다’ ‘쪄죽겠다’ 하며
나름대로의 싫은 마음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애써 찾아간 사우나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한 더위에서도 ‘시원하다’ ‘피로가 확 풀린다’
하고 좋은 마음으로 분별을 몰아갑니다.

본래 ‘더위’라는 경계는 텅 비어 고요하기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더위’ 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 좋고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분별 때문에 또 한번 괴로워합니다.

내 마음이 좋고 싫은 것이지
경계가 좋고 싫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경계는 이처럼 아무런 잘못이 없고, 분별이 없지만
우리 마음은 작은 경계에도 끄달리고 휘둘리고 그럽니다.
그러니 제 혼자 만들고 그렇게 만든 분별로 인해
제 혼자 괴로워 하고 그러는 기가 막힌 세상입니다.

그러니 깨달은 이가 우리를 바라본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한없이 북받쳐 오르는 우울함에 어쩔 줄 몰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달을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똑같은 달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사람, 적적해 하는 사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등 제각각입니다.

하늘의 달은 아무런 분별도 없고 잘못도 없습니다.
그냥 떠 있는 달일 뿐이지만,
우리 마음은 과거 달과의 연관된 기억이나 추억들로 인해
좋고, 싫고, 우울하고, 그리워하는 등의 분별을 일으킵니다.

육체적인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들고 고된 일이 되지만,
운동 삼아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쁜 마음입니다.
일은 힘든 것이고 운동은 즐거운 것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모두 똑같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애써 운동을 하느라고 헬스크럽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육체적 한계를 느낄 만큼 무거운 역기를 들고도 힘든 줄 모르고,
샤워 후엔 그렇게 개운하고 시원하여 힘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면 그보다 더 가벼운 것을 들고도
쉽게 피곤해지고 노곤해져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됩니다.

같은 육체적 노동이지만
마음 따라 일도 되었다가 운동도 되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괴로워 녹초가 되기도 하고, 되려 힘이 펄펄 나기도 합니다.
육신을 움직인다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경계는 같지만 마음에서 일이다, 운동이다 분별하여
더 힘이 나게도 하고 녹초가 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 미운 사람 하고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누구라도 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밉다고 그 사람이 미운 사람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며,
내가 좋다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하고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 내가 만들어 놓은 분별일 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좋은 사람 보면 애착을 하여 헤어짐을 괴로워하고,
미운 사람 보면 괴로워하여 만남을 괴로워하고,
그렇게 제가 만들어놓은 틀에 제가 걸려 괴로워합니다.
기막힌 중생놀음이라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합니다.
그러나 ‘욕’에도 좋고 싫음이 본래 없습니다.
내가 욕을 얻어먹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하지만,
미운 사람에게 누군가가 욕하는 것을 들으면 되려 통쾌합니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즉 아상이 얼마나 큰 대상인가에 따라
같은 욕설에도 우리 마음은 천차만별로 변화합니다.
그러니 ‘욕’ 그 자체가 좋거나 싫은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그럴듯한 욕은 참 듣기 좋기도 합니다.
본래 정해진 바가 없기에
인연 따라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경계가 이와 같을진데
어찌 좋고 나쁨이 따로 정해져 있겠습니까.
똑같은 경계일지라도
좋다고 분별할 수도 있고, 나쁘다고 분별할 수도 있으며,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으며,
힘 빠지는 일일 수도 있고, 힘 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경계에 뭣하러 끄달립니까.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탓하는가 말입니다.
‘괴로움’ 하고 딱 정해졌다면이야, 절대적 괴로움이라면이야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당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괴로움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내가 선택하는 일인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분별도 잘못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 또한 하나의 분별입니다.
그러니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그대로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으면 그대로 고요한 세상입니다.
좋고 싫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대로 해탈의 경계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경계를
애써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행복하다 괴롭다 분별하여,
좋다고 잡으려 애쓰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느라
우리의 삶이 많이 번거로워 졌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평화로운데 말입니다.
그냥 놓아버리면 본래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애써 탓하지 마십시오.
조건이 별로라고, 환경이 별로라고
부모님이 별로라고, 남편이 별로, 친구 성격이 별로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절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로 돌릴 일입니다.
내 마음이 변하면 경계는 따라서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싫은 경계를 잡으면 괴로움이고,
좋은 경계를 잡으면 즐거움이지만,
그 마음 놓면 해탈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