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두 뺨 위로 간질거리는 햇살이며, 저녁 산책 시간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마치 영혼까지 일깨워 주는 듯하다. 새들은 지저귀고 풀벌레는 노래한다. 부드러운 숨은 들어오고 나가며 생명을 연주한다. 매일 밤 건강한 두 발로 산책의 숲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은 더없는 행복이다.


내가 억지로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이 산하의 대자연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아름다운 사계를 어김없이 선물 해 준다. 내일 아침 해가 뜨게 하기 위해 우리는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한 숨 들이쉬지 못하면 죽고 마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들숨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봄에 꽃을 피우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하려고 구름을 만들 필요도 없으며, 저 장대한 밤 하늘의 별과 은하수 조차 아무런 노력 없이 주어져 있다. 풀꽃 한 송이에서부터 저 우주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며 저절로 생명을 피워내고 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이대로 놀랍게, 완벽하게 주어져 있다. 이처럼 무위로써 주어진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나 또한 무위로써 살아가면 된다.


무위란 함이 없이, 노력 없이도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자연이 그렇듯 인간 또한 무위의 존재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 아닌가. 그러니 인간이 가장 지혜롭게 살려면 자연스럽게, 저 대자연의 무위행을 따르면 된다.


없는 것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소유하려고 애쓰고 집착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들에 더 많이 감사하고 누리고 만끽해 보라. 무엇을 하고도 ‘내가 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온 우주가 자연스럽게 이루어낸 것임을 받아들여 보라.


인위적으로 가공된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을 가까이 해 보라. 인공적인 조형물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더 많이 교감하고 가까이 해 보라. 헬스장을 찾기 보다 산 길을 걷고, 가공식품을 먹기 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음식을 가까이 하라.


일어나는 생각도 그저 자연스럽게 바람처럼 오고 가도록 놔둘 일이지, 억지로 무언가를 짜내거나, 그 생각을 실체화하면서 거기에 힘을 실어주지는 말라. 그저 모든 생각들이 흔적 없이 오고 가도록 내버려 두라. 인위적인 노력이 개입되는 유위행 보다, 노력 없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쓰고 사는 무위행 속에 사실은 더욱 강력한 힘과 지혜와 자비가 있다. 안 하는 듯 하지만 거기에서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사사로운 아상이 원동력이 되는 내 노력이 없을 때, 우주 본연의 무한 동력이 삶을 운행해 간다. 아상이 없을 때, 대기대용(大機大用)의 무한 우주가 무한한 쓰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대기대용이란, 말 그대로 이 우주는 크나큰 무한 동력의 무한 생명의 기관 즉 대기로써 이 우주 전체를 한바탕의 쓰임으로 돌리는 대용을 이루어낸다는 뜻이다.


나도, 너도, 자연도, 하늘도, 우주도, 삼라만상의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이처럼 따로 따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대기대용이라는 이 하나의 우주 무한동력에서 동시에 운행되는 것이다.


연기적으로 상호연결된 일체 모든 존재가 서로 서로 톱니바퀴 아구가 딱딱 드러맞듯이 하나가 움직일 때 무한한 우주가 동시에 움직이는 거대한 한생명의 기관인 것이다. 그러니 이 대기대용의 무한 우주의 운행을 외면한 채 나는 나대로 알아서 살겠다고 우기면서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면, 거기에 무한동력의 힘은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이 장엄하고 장대한 무한한 우주법계의 대기대용의 운행 법칙을 깨닫는 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미 주어져 있는 이 우주 속에 녹아들어 전혀 힘들이지 않고 우주전체를 내어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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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선업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너무나도 큰 악업을 많이 지었다면 당연히 그 악업도 받게 됩니다. 선업을 짓고 착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나쁜 일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지어왔던 과보를 받는 건 받는 문제이고, 내가 새롭게 짓는 건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수행을 잘하는 참 존경할만한 수행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정말 열심히 수행하는데,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깁니다.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수행을 하면 뭐해? 저렇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데…….”


이것은 우주법계의 이치를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과거에 지은 업장을 녹임과 동시에 그 괴로운 일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워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금강경]에서도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소멸될 것이고,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생애를 나고 죽고 나고 죽기를 반복하며 삽니다. 그 중 어느 생은 나이 30세를 살다 죽었고, 또 어느 생은 90세까지 살았으며, 또 어느 생은 1살도 안 되어 죽은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살도 안 되어 죽은 사람이 그 다음 생에는 90세까지 살 수도 있습니다. 즉, 이 생에 몇 살을 사느냐를 가지고 과연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를 결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사가 둘이 아닌 자리에서 본다면 빨리 죽든 늦게 죽든 그것은 별 차이가 되지 못합니다.


천상세계에서는 인간계의 1,600년이 그곳의 하루라고 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100년을 살다왔든, 10년을 살다왔든 천상세계에서 본다면 그저 잠깐 다녀온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전생에 누군가를 죽인 죄로 어느 한 생은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업을 받아야 할 업보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은 40세, 50세 되어 결혼해 자식 낳고 성공하며 잘 살다가 갑자기 죽는 것 보다 차라리 너댓 살까지 살고, 혹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빨리 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생사의 관점에 얽매여 사는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것이 전부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는 한낱 하룻밤 꿈과 같을 뿐입니다. 아무리 나쁜 꿈을 꾼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의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이 생에 힘들고 괴롭고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가치를 떨어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꿈이며, 환상일 뿐이지요. 우리는 그 꿈의 이야기, 한 생에 펼쳐진 삶의 이야기 너머에 그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지 않는 꿈 깬 이의 삶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도 방편이지만, 꿈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스토리, 인생사의 굴곡에 일희일비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삶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기 위한 꿈의 일부일 뿐,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선업을 받든, 악업의 과보를 받든, 좋은 일이 생기든, 괴로운 일이 생기든, 남들이 나를 칭찬하든 업신여기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모든 분별 너머에 그 어떤 분별이나 판단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입처개진이라는 참나의 실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란 주어진 삶의 스트리에 속지 않고, 그 너머의 진실을 보려는 자입니다.


목탁소리 공식 홈페이지 : moktaksor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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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평일 오전 07:52-08:00

https://youtu.be/-VmdLKBS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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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경전독송과 마음공부 듣기
https://youtu.be/6W7v2GV_M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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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경전에는 탐욕에 관한 많은 가르침들이 등장한다. 우리 마음을 오염시키는 세 가지 삼독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 또한 탐욕심이다.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증일아함경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음이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무거운 짐을 벗을 수는 없다. 짐을 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병이요, 짐을 벗어버리는 것은 최상의 즐거움이니 무거운 짐을 버릴지언정 새 짐을 만들지 말라.”


탐욕하고 욕망한다는 것은, 공연히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이미 충분하고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삶은 원만하게 이어진다. 하루 세 끼니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고, 애쓰지 않더라도 맑은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실 수 있다. 걷고 싶으면 걸을 수도 있고,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처럼, 지금 이대로 충분한 존재가 갑자기 무언가를 더 가지고 싶어진다. 더 이상 지금 이대로를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들이 가진 좋은 집과 차와 소유물들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아보이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탐욕과 욕망이라는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탐욕과 욕망의 짐을 스스로 짊어지기 시작하면서 삶은 고되고, 힘들며, 끊임없이 소유하고 쟁취해야 하는 투쟁의 장이 되고, 남들과 싸워 이겨야하는 생존경쟁의 장이 되고 만다. 한 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빨리 더 많은 것을 채워야 하고, 가져야 하고, 빼앗아야 한다.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 삶이 힘겨워지고,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다. 세상의 즐거움이란 결국 고통 아닌 것이 없다. 탐욕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것, 모든 고통과 근심은 바로 탐욕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근심과 고통은 바로 탐욕에서 생기는 것이다. 아무 문제 없던 자연 상태,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고통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성실론에서는 이렇게 설한다.


“중생은 생각이 어리석어 탐욕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탐욕이 바로 괴로움인 줄 알기 때문에 수시로 끊어버린다. 탐욕을 욕망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소금물을 마셔 더욱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다. 탐욕을 없앤다면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고, 얻고 싶고, 되고 싶다면 그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것을 하고 싶다면 최선을 다해 그것을 하라. 다만 ‘절대로’, ‘반드시’ 그것을 해야 한다거나, 그 결과를 얻지 못하면 절대 안 된다고 여기지는 말라. 최선을 다해 그것을 하되, 결과는 법계의 뜻에 맡겨 보라. 그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며, 탐욕 없이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탐욕과 욕망을 버리라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탐욕이 괴로운 줄 알아 수시로 끊어버리는 것이다. 집착 없이 행한다면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져 갈 것이다. 지금 나는 탐욕과 욕망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집착 없이 행하고 있는가를 늘 살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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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신문에서 20대, 30대 미혼남녀 열 명 중 일곱 명은 미신을 믿거나 신경을 쓰게 된다고 하는 설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실제 그런 것 같다. 신도님들을 만나뵙다 보면 미신이나 사주팔자 같은 것을 의외로 크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보면, 우리나라에서 주로 믿는 미신들은 ‘밤에 휘파람을 불면 귀신이 온다’거나, ‘애인에게 신발을 선물하면 도망간다’거나, ‘숫자 4는 불운이나 죽음을 의미한다’거나, ‘빨간색으로 사람의 이름을 쓰면 안 좋다’거나, 심지어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류의 미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임신한 사람은 초상집에 가면 안 된다’거나, ‘손 없는 날에 이사를 가야 한다거나’, ‘밥상에 앉을 때 모서리에 앉으면 안 된다’거나, ‘제사 지낼 때는 홀수로 해야 한다’거나,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거나, ‘돼지 꿈을 꾸면 돈이 들어온다’거나 하는 등등으로 온갖 다양한 종류의 미신이나 터부시 하는 것들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널리 알려진 미신 말고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다양한 미신이며, 징크스 같은 것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얽매여 있다.


미신이나 징크스 같은 것은 정말 있는 것일까?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은 없다. 불법은 무유정법이다. 정해진 바가 없는 것이야말로 불법이다. 미신이라는 것 자체가 ‘이러면 이런다더라’하는 하나의 믿음이 아닌가. 내가 그렇게 믿기 시작할 때 그 믿음이 그것에 실체를 부여하여 그런 현실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런 고정된 실체로써의 정해진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미신 아닌가? 미신은 말 그대로 진실된 것이 아닌, 미혹한 믿음, 헛되고 바르지 못한 미신일 뿐이다.


이렇듯 말 자체에서 그렇다고 이미 결정지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흔한 미신들에 스스로 얽매여 있다. 물론 아마도 그럴지 아닐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니 기왕이면 안 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하는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미신을 스스로 믿어 버리거나, 그 미신대로 하고 나서 마음 속으로 근심걱정을 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된다. 징크스라는 것도 비슷하다. 징크스는 없다. 내가 그렇게 믿기로 작정했을 뿐, 그런 것은 없다.


미신이나, 사회에서 혹은 사람들이 터부시 하는 것, 혹은 내 스스로 징크스라고 여기는 것에서 자유롭게 놓여나라.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은 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미신도 나라마다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접시를 깨면 재수가 없다고 여기지만, 러시아에서는 접시를 깨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터부나 미신에 얽매이게 되면, 자신의 창의성과 혁신, 번뜩이는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방해하기 쉽다. 터부나 미신에 얽매일수록 삶은 제한된다. 터부나 미신은 하나의 헛된 분별심이며, 망상일 뿐이다. 그것을 믿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미신이나 터부시되는 것들을 무조건 배격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음으로써 그로인해 나의 삶이 제약되거나, 구속되거나, 괴로워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금강경에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지 말 것을 설하는데, 미신 같은 거짓 믿음에 집착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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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교파 캬규파의 창시자 나로빠에게 그의 스승 틸로빠는 여러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 중 이 불법공부에 대한 핵심을 설하는 유명한 여섯 마디의 가르침이 유명하다.

살펴보면, 첫째는 이미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말라, 둘째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상상하지 말라, 셋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지 말라, 넷째는 어떤 것도 탐구하거나 머리로 헤아리지 말라, 다섯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거나 만들어내지 말라, 여섯째는 그저 쉬라이다.
이 여섯 마디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이 마음공부의 핵심을 아주 적절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 공부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상상하지 말고,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첫 세 마디 말이다.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이다. 과거나 미래, 현재라는 것은 전부 환상일 뿐, 실제가 아니다. 주로 나이가 들수록 ‘내가 예전에는 어땠는데’ 하면서 과거를 들추길 좋아한다고 한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반대로 미래를 상상하며 부푼 꿈을 꾼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를 향한 그 모든 기억과 상상은 한낱 분별망상일 뿐이다. 물론 필요할 때 잠시 필요한 만큼의 기억을 꺼내와 쓸 수도 있고, 또 필요할 때는 미래를 계획할 필요는 있다. 그것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를 하는 입장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이 전부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생각은 실제일까? 그렇지 않다. 현재에 일어나는 생각 또한 망상일 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과거 기억을 꺼내와 현재와 비교 대조함으로써 현재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일들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럼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를 경험하는 이 생생한 순간에조차 현재에 깨어있지 못한 채 과거와 비교분별의 생각 속 망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어떤 것도 탐구하거나 머리로 헤아리지 말라인데, 이 또한 현실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까지 탐구나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이 공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아주 필수적이며 중요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하면서도 세속의 습관을 못 버리곤 한다. 생각으로 헤아리고 탐구하는 버릇이 그것이다. 수행에서는 가장 독이 되는 것이 바로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이 법의 세계는 생각이나 의식으로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이라는 분별, 알음알이, 생각, 망상이 꼼짝 못하고 꽉 막힐 때가 되어야 그 너머에 있는 진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도 비슷한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거나 만들어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행을 하면서 어떤 신비체험이나 삼매나, 깨달음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고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무언가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있는 것이고, 수행은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고 만들려고 애쓰는 동안에는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깨달음을 탐구해도 안되고, 만들어내려고 추구해도 안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바로 여섯 번째 가르침에 그 답이 있다. 그저 쉬어라. 그 모든 분별망상, 생각, 조작, 탐구, 추구를 몽땅 몰록 쉴 때 진리는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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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은 치유될 수 있다! 누구든 반드시 질병을 인생에서 질질 끌고 다니는 운명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다.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아프지 않은 상태다. 자연 그대로는 언제나 완전하다. 우리는 언제나 아프지 않았던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회귀하고 있는 중에 있다. 자연치유력은 단 한 순간도 작동을 하지 않을 때가 없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치유는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본래 건강한 자연 상태의 나에게 질병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질병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온다.

첫째, 그것은 나를 깨어나게 하고, 인생의 의미를 배우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참된 진실, 진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배움과 귀의(歸依)의 여정이다. 그런데 배움과 깨우침이란 언제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좋은 일, 행복, 기쁨, 건강을 통해서도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만, 그 반대를 통해서도 균형 있게 깨달아 가야 하는 것이다. 즉 건강 속에서 깨닫는 만큼 질병 속에서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이 언제나 역동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파장으로써 행·불행, 건강과 질병 등이 다이나믹하게 연출되고 있는 이유다. 삶은 하나의 파동이다. 파동은 언제나 골과 마루로 이어지듯 삶 또한 건강과 질병, 행복과 불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건강할 때,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치면서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일과 목표에 집착할 때 우주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잠시 쉴 수 있도록 질병을 만들어 내 주기도 한다. 우주는 언제나 삶의 중도와 균형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병을 통해 너무 집착하지 말고,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과 깨우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병의 두 번째 이유는 업장소멸, 카르마의 정화에 있다. 쉽게 말해 내면의 어둡고 탁한 부분이 병을 통해 풀려나가는 것이다. 즉 업장이 소멸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병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주법계의 진리는 언제나 업장이 소멸되어야 할 가장 정확한 때를 알고 있다.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업장의 어둡고 탁한 덩어리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우리 몸은 한결 가볍고 청정하게 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병은 목적이 있어서 찾아온다. 그것도 나를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아닌, 나를 진정으로 살리고 돕기 위한 무한한 사랑과 대자대비한 이유를 가지고 찾아오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는 결코 우리를 괴롭히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온갖 질병을 만들어 내고 그 속으로 당신을 집어던지지 않는다. 그것을 하는 쪽은 오히려 내 쪽이다. 그러니 질병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결코 그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다. 외부를 탓할 것은 없다. 자기 자신의 결정이며 책임이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치유는 이러한 자기 책임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병의 원인이 외부가 아닌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그 치유의 힘 또한 외부가 아닌 내면에 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 비로소 치유할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지혜가 생겨난다.

우주법계의 근원적 에너지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기에 우리는 자연 상태에 있을 때 언제나 자비와 사랑의 끊임없는 보살핌을 받는 상태에 있다. 이 우주는 언제나 우리를 완전한 치유의 상태로 이끌고 있으며, 나 자신의 내적 치유력 또한 언제나 완벽하게 작동하며 나 자신을 돕고 있다.

사실 질병은 최악이 아닌 최선으로써 온 것이며, 문제가 아닌 ‘문제의 해결과정’으로써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무 깊이 상심하지 말라. 그것은 곧 하나의 커다란 전환과 변화의 과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롭게 깨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과거의 눅눅한 찌꺼기들을 털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병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마땅히 병을 받아들이고, 그 병이 찾아옴으로써 내게 깨닫게 해주고자 한 배움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그 병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병에서 벗어나려고 애써오던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오히려 그 병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과 함께 있어 주기를 선택하라. 아픔을 피해 달아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충분히 받아들여 아파해 주라. 병에서 벗어나려고 거부하는 마음을 돌이켜 병이 온 목적을 받아들여 병을 수용하고 사랑해 보라.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것과 함께 있어주기를 선택할 때 나라는 존재의 깊은 심연에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비로소 그 때 내적인 참된 치유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병원의 치료도 다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의심하지 말고, 이 치료가 약사여래의 손길이라는 마음으로 턱 내맡긴 채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내면의 수용과 관찰과 사랑이라는 참된 치유의 수행을 해 나가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둘이 아닌 우주법계의 법신부처님과 내면의 자성부처님이 다차원적인 도움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치유되게 할 것이다. 이처럼 내면에서 치유가 시작되면 이 우주 전체가 나를 돕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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