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식온과 식온무아

 

 

식온의 의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계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객관계를 만나 접촉할 때 수상행이 일어난다고 했으며, 십팔계에서는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난다고 했다. 즉,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날 때 수상행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수상행식은 늘 함께 일어난다.

 

여기에서 식온(識薀)이란 일반적으로 식별, 분별, 의식, 알음알이, 대상을 아는 마음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심의식(心意識)이 동의어라고 보았을 때, 식온은 쉽게 말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며, 의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대상을 의식하고 알 때는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주관적으로 분별하고 식별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보통 식온은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것’으로 이해된다.

 

눈앞에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했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무언가가 눈에 나타났음을, 즉 안근이 색경을 접촉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눈이 색이라는 대상을 보고 눈에 대상이 보인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안식이다. 마찬가지로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아는 마음이 이식이고, 코에서 냄새 맡아지는 것을 아는 마음이 비식이다. 마찬가지로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난다.

 

이처럼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무언가가 감지되었음을 아는 마음을 ‘식’이라고 부르고, 여섯 가지이므로 육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대상이 나타났음을 아는 작용으로써의 안이비설신식인 전오식이 있지만, 여섯 번째 의식도 있다. 의식은 물론 눈앞의 대상을 즉각적으로 아는 작용도 의식이라고 부르지만, 전오식의 도움을 받아서 종합적으로 분별해서 아는 작용도 포함된다. 이처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함께 작용하여 그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마음을 뒷날 유식의 가르침에서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앞서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할 때 수상행이 생겨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식이 일어날 때 수상행 또한 함께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앞의 설명처럼 수상행의 도움을 받기도 전에 먼저 즉각적으로 대상이 감지되었음을 단순하게 아는 작용도 식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보통 식온이라고 하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함께 작용하여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전오식에서 말하는 ‘식’은 바로 이처럼 수상행의 도움을 받기 전에 대상을 즉각적으로 아는 ‘의식’으로써의 ‘식’을 말한다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의식의 작용을 ‘분별’, ‘식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식이란 ‘의식’이라는 의미와 ‘분별’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대상을 단순히 인식하고 알기도 하지만, 수온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느껴서 알고’, 상온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개념화하고 생각해서 알며’, 행온의 도움을 받아 대상에 대해 ‘의지를 일으킴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는 그냥 단순히 아는 의식도 있지만,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분별해서 아는 의식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이 있음을 아는 것은 그 대상이 느껴지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그 대상에 대해 어떤 의도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통해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별하여 의식하는 것이 바로 식온의 작용이다.

 

이와 같이 식온은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별심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주된 기능이 바로 식온이다. 그래서 보통 식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주석을 달고 연구를 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식을 ‘심왕(心王)’이라고 하고, 수상행 등을 ‘심소(心所)’라고 부름으로써, 식이야말로 마음의 대표임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국왕이 명령을 내리면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식은 심왕으로 국왕에 비유할 수 있고, 수상행은 심소로써 국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국왕을 돕는 것처럼 심왕의 작용을 돕는다. 심소라는 명칭도 신하가 국왕에 소속된 것처럼 심왕이 심소를 소유한다고 하여 심소유법(心所有法)을 줄여 쓴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심소는 항상 심왕에 의지하여 작용을 야기하며, 심소는 항상 심왕과 더불어 상응하면서 활동하고, 심소는 항상 심왕에 소속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식온은 항상 수상행이라는 심소 즉 마음부수와 함께 활동하며,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작용을 말한다.

 

 

 

수상행과 식의 이해

 

앞에서 행온과 식온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요지는, 수온과 상온을 가지고 행온이 유위를 조작하고 그 조작된 유위를 명색으로 종합적으로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 식온이라고 했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 처음 어떤 여인을 보았는데, 느낌과 생각이라는 마음의 데이터에서 좋은 느낌과 좋은 생각이 일어나는 그 여인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유위를 조작한 것이다. 즉 ‘사랑’이라는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행온이다. 수온과 상온을 가지고 행온이 사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게 된 여인은 이름과 모습 즉 명색으로 인식한다. 내가 사랑하게 된 여인은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을 가진 존재라고 식온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식의 대상은 명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 그 전에는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에 사랑하는 감정이나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온과 상온이 좋은 느낌과 생각을 일으키고 행온이 사랑하는 의도를 일으킴으로써 결국 식온은 그 평범하던 여인을,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 여인은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분별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을 가진 누구라고 명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된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여인과는 같지 않다. 다르게 분별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여인과 헤어지고, 뒤에 다시 다른 여인을 만났다고 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예전에 만났던 여인과 지금 만나는 여인을 나도 모르게 비교하고 분별하여 어느 여인이 더 좋고 나쁜지를 분별하여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식온은 대상을 의식할 때 분별하여 인식한다. 분별해서 아는 것이다.

 

이처럼 식온은 수온, 상온, 행온의 작용을 통해 종합적으로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마음이다.

 

 

 

유식에서의 이해

 

이렇게 식온에 대해 설명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식온’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잠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서 나오는 육식에 대한 설명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육식의 의미를 공부하고 나면 식온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 더 쉽고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유식불교에서는 이러한 ‘식’을 전오식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대상만을 분별한다고 해서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고도 하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등의 분별작용을 한다고 해서 수념분별(隨念分別)이라고도 부른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려면 수상행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과거의 느낌들, 과거의 개념작용 내지 사고들, 미래 계획을 위한 의지 등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야만 수념분별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식은 수념분별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계탁분별(計度分別)이란 착각을 하여 대상을 인식하는데 오류를 일으키는 분별작용을 말한다. 이 또한 수상행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상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느낌이나, 잘못된 개념화나 생각, 잘못된 의지작용으로 인해 대상을 착각하여 분별하는 데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식온의 헤아림과 분별작용의 특징에 따라, 전오식처럼 눈앞에 나타난 사물에 대해 기본적인 분별심을 일으켜 헤아리는 작용을 현량(現量)이라고 하고, 육식의 작용인 상온 등의 도움을 받아 비교, 분석, 판단하는 작용을 비량(比量)이라고 하며, 대상을 판단하여 잘못 헤아린다고 하여 비량(非量)이라고도 한다.

 

유식불교에서는 육식의 역할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상을 의식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이비설신식과 함께 작용하여 대상을 분별한다고 하여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하며, 꿈 가운데 나타나는 의식은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 불리고, 객관세계의 대상과는 상관없이 내면에서 단독으로 분별하는 의식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모든 의식에서 나타나는 착각과 잘못된 분별, 장애와 번뇌 등을 모두 정화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청정하고 맑은 의식을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육식을 물질, 정신세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대상으로 수많은 광범위한 의식작용을 일으킨다고 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별심과 식의 성장

 

[잡아함경] 39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식은 네 가지에 머물면서 반연(攀緣)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식은 색 가운데 머물고 색을 반연하며 색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 또한 식은 수상행 가운데 머물고 수상행에 반연하며 수상행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

 

쉽게 말하면, 식은 색수상행에 머물면서 의지하고, 색수상행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을 사식주(四識住) 즉 네 가지 식이 머무는 장소라고 하며, 이 사식주가 바로 색수상행이다. 이처럼 식은 색수상행에 머물면서 의지하고 즐기면서 커 간다.

 

앞에서 식은 안이비설신이 색성향미촉을 만날 때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아는 의식, 귀에 들리는 것을 아는 의식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식은 아는 의식이지만, 십이입처에서 수상행이 생겨나면서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라고도 했다. 즉 식은 즉각적으로 대상을 아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는 분별심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식이 수상행에 머물면서 의지하고 즐기면서 살아가며 커 간다는 점이 바로 식의 증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식은 수상행에 머물면서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면서 커 가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아는 작용인 ‘의식’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분별하는 ‘분별심’이 되고, 수상행의 도움으로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의식은 또 다시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수상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또 다시 수상행의 도움으로 분별심도 커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이입처에서 발생한 식이 색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다시 새로운 식으로 성장, 증장하고, 새로운 분별심인 식은 또 다시 성장한 의식으로써 색수상행을 통해 또 다시 분별심이 커 가는 것이다. 이처럼 식은 십이입처에 의해 발생했지만, 색수상행에 의존해서 성장하고 커 간다. 이러한 식이 커간다는 가르침이 훗날 대승불교 유식사상의 종자설, 아뢰야식 사상으로 발전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대학교 1학년 때 내가(색) 누군가에게 좋은 느낌을 받아(수) 사랑에 빠지고, 그녀만을 생각하며(상), 온통 그녀를 나의 여인으로 만들려고 의도, 사랑하려는 의도(행)를 일으켰다면, 그러한 색수상행의 작용을 일으키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하여 ‘나’라고 알고, 의식하는 마음이 식인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퇴짜를 맞고 아픔도 겪으면서 군대를 다녀 온 뒤 다시 성숙해진 마음으로 대학교 2학년 때 똑같이 내가(색)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수), 온통 그녀만을 생각하며(상), 그녀와 꼭 사귀어야겠다고 의도(행)를 일으켰다면, 1학년 때 일으킨 식과 2학년 때 일으킨 식은 같은 마음(식)일까? 이것은 같은 마음이 아니다. 식은 그저 인연 따라, 즉 십이입처라는 인연 따라 식이 발생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던 의식과 2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의식이 같은 의식이라고 여긴다. 내 안에 동일한 마음, 동일한 의식이 계속 존재하고 있어서, 그 식이 시간이 흐르더라도 대상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식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가 만난다는 인연 따라, 즉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것일 뿐이다. 지속적인 의식, 지속되는 마음이 내 안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식온무아(識薀無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식)과 1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1학년 때 사랑하던 마음 보다 2학년 때는 그녀를 보는 느낌도 다르고, 그녀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고, 그녀를 사랑하는 의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1학년 때 그녀를 짝사랑 해 본 경험을 통해, 색수상행을 통해 그녀에 대한 인식, 분별도 달라지고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수상행식이라는 경험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1학년 때의 실수를 2학년 때는 더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도 그만큼 더 성숙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색수상행에 의지해 식이 성장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즉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의 접촉과 거기에서 나타나는 수상행의 발생을 통해 우리의 의식은 성장한다. 분별심도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의 성장이다.

 

 

 

 

식온무아

 

이와 같이 ‘분별해서 아는 작용’인 식온은 고정되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연 따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식온무아인 것이다.

 

경전에서도 “의식은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조건이 없으면 의식은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조건에 의존하여 의식이 발생하는가? 눈과 색에 의존하여 발생한 의식을 눈의 의식이라고 한다.” 라고 하며, 다른 귀코혀몸뜻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십이입처에서 육식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식온은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만난다는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눈이 어떤 대상으로써의 색을 보았기 때문에 보는데 따른 의식이 발생하는 것이지, 보지 않고 대상을 분별하여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그 소리를 의식하고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연기적인 것이다.

 

이처럼 식은 연기적인 조건발생일 뿐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우리 안에 ‘의식하는 존재’, ‘의식하는 나’가 있다고 여긴다. 우리 안에 식, 즉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안에 마음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눈귀코혀몸을 통해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대상을 분별해서 알고 인식하는 것을 보고, 내 안에 ‘인식의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식은 색수상행에 머물고 커 가며 성장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지속적으로 머물면서 성장하는 실체적인 자아로써의 ‘의식의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식이 성장하고 커간다고 하니, 그것을 보고 의식의 주체로써의 영속적인 식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식, 즉 마음을 참나, 아트만처럼 영속적이고 고정불변의 어떤 실체로써 받아들이면 안 된다. 특히, 이 식을 아트만처럼 잘못 알아듣고, 고정된 윤회의 주체로 여겨 이번 생에서 죽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서 윤회를 반복할 때마다 계속 이어지는 어떤 실체로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바로 브라만교에서 주장하는 아트만이고, 불교는 이러한 실체적인 아트만 사상을 타파하기 위해 무아(無我)를 설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재생연결식이라고 하여, 다음 생에 윤회를 할 때 옮겨가는 식을 설정하고 있지만, 이 재생연결식 또한 아트만처럼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연결되는 흐름으로써의 인연 따라 생겨난 식일 뿐이다.

 

 

분별심을 버려라

 

이처럼 식온은 고정된 실체적인 마음이 아닌, 허망한 분별심일 뿐이다. 우리는 이 허망한 분별심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여 의식한다. 분별심이라는 것은 나누어서 인식한다는 말인데, 우리 안에는 식이라는 마음이 있고, 그 식의 대상을 세계라고 나누어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명색(名色)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은 나와 세상을 나누어서 인식하고, 일체 모든 식의 대상들 즉 명색을 서로 나누고 분별해서 의식한다.

 

스님들의 법문이나 불교 서적들을 살펴보다 보면 늘 많이 듣는 말이 ‘분별심을 버려라’, ‘알음알이를 놓아버려라’일 것이다. 이 분별심, 알음알이가 바로 식이다. 앞에서 식온은 무아라고 했다. 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변화하는 모든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즉,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버리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무런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전혀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일으켜 쓰되 그것이 실체인 줄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다.

 

어떤 사람을 보고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분별하여 의식한다. 어떤 음식을 보고도 몸에 좋은 음식이라거나 나쁜 음식이라고 분별한다. 날씨를 보고도 좋은 날씨 혹은 나쁜 날씨라고 분별한다. 사람들의 피부색깔을 보고 상대를 편견을 가진 채 분별하여 인식하기도 한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분별하여 인식한다.

 

우리는 이러한 분별심을 ‘내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내 안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의식활동이라고 믿는다. 그 분별심에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 의식이 인연 따라 허망하고 무상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헛된 분별심임을 알지 못하고 그 분별심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별심들은 실체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나쁜 고정된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분별하여 의식하는 마음을 보고 그것이 고정된 내 마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좋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분별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편견어린 시선으로 상대방을 해석해서 보게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꺼려하고, 시비 걸고, 미워하던 사람이 훗날에 알고 보니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큰 도움을 줄 사람이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만약 분별심이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외모나, 경제력이나, 얼굴색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따지고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을 놓아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온이 무아인 줄을 아는 지혜로운 이의 세상을 보는 참된 인식일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Posted by 법상

 

 

 

 

 

(4) 행온과 행온무아

 

행온의 의미

 

행온은 의지 작용, 형성 작용을 말한다. 무언가를 행하려는 의지, 의도, 의향 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고자 하는 욕구나 바람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업을 일으키는 형성력이 된다. 그래서 업(業)과 행(行)이라는 용어는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십팔계가 촉하면 수상행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눈이 무언가를 보았을 때 수온으로 좋고 나쁜 느낌을 느끼고, 상온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개념화하여 사유하고 나면, 행온에서 좋은 것은 더 가지고 싶고, 싫은 것은 멀리하고 싶은 의지,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배고픈 상황에서 눈으로 사과나무를 보았을 때, 수온은 배가 고프다는 인연 따라 그 사과에 대해 좋은 느낌을 일으키고, 상온은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과’라고 개념 지어 지각하고, 행온은 사과를 따 먹고자 의도, 의지를 내는 작용을 의미한다.

 

이처럼 십팔계가 촉할 때 수상행이 나타나는 것처럼, 수상행의 마음작용은 함께 일어나면서 식의 분별, 인식 작용을 돕는다. 그래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식을 심법으로, 수상행을 심소법으로 나누어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행온은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 것으로, 엄밀히 말한다면 ‘의지작용을 필두로 하는 수많은 심리현상들’을 의미한다. 행온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다 포함한다. 청정도론에서는 50가지의 심리현상을, 구사론에서는 46가지 심리현상을 행으로 들고 있다. 예를들면 의도 뿐 아니라 주의, 집중, 의욕, 탐욕, 성냄, 믿음, 양심, 수치심 등이 모두 행온에 속한다.

 

그러나 이 중에도 특히 의도, 의지작용이 행온의 주요한 심리작용이다 보니 행온은 주로 의지, 의도로써 쉽게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의지작용이 내 안에서 일어나면서 업을 지어 가다 보니, 우리는 이러한 의지작용을 가진 ‘의도하는 나’가 있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의도하는 마음작용’이 바로 행온이다.

 

행온은 이처럼 의지작용, 형성작용을 말한다고 했는데, 교리적으로 살펴보면, ‘유위를 조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위를 조작하는 존재가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유위를 조작하는 마음인 행온을 나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유위란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을 뜻한다. 유위법은 ‘일체 모든 존재’, ‘일체 모든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유위를 조작한다는 것은 의도를 일으켜 삶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행온을 의지, 형성작용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식온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행온이 유위를 조작해 만들어 놓으면 식온은 행온이 만들어낸 유위를 인식한다. 그런데 식온은 유위를 인식할 때 이름과 형태를 부여해 인식한다. 이름과 형태를 명색이라고 한다. 즉, 식온은 행온이 만들어낸 유위를 명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뒤에서 다시 살펴보니 여기에서는 이 정도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행온무아

 

상윳다 니까야에서는 ‘행온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깊이 조사해보면 그것들은 텅 빈 것으로 드러나고 허망한 것으로 드러나며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행온에 무슨 실체가 있겠는가?’라고 함으로써 행온 또한 비실체적인 무아임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일으키는 의도와 의지, 욕구와 바람 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결정론적으로 정해진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되고자 의도를 일으켰다. 열심히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뜻밖의 인연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거나, 회사에 취직하게 될 인연이 생겨났다. 만약 어릴적부터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듯 인연이 생기게 되면, 자신의 본래 의도를 버리고 새로운 꿈을 향해 새로운 의지와 욕구를 불태울 수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스님은, 출가 전에 너무도 열심히 수행을 하기에 ‘출가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절대 출가는 안 한다”고 하더니, 1~2년 쯤 후에 스스로 출가를 결정했다.

 

이처럼 우리는 절대 안 할 것 같다가도 그것을 하기도 한다. 부와 풍요,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던 사람도 어느 순간 그러한 삶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고는 가진 부와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수행자의 길을 걷기도 한다.

 

이처럼 의지라는 것은 내 안에 고정되게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 ‘의도하는 나’가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특정 방향으로의 삶을 의도하고 고집하며 욕구를 일으키는 ‘나’가 정해져 있다면, 언제까지고 그런 삶만을 고집하게 되겠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언제든 우리 마음은 인연 따라 욕구도 달라지고, 의도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내 안에 ‘부자가 되려는 의지’, ‘성공하려는 의지’가 고정된 실체로써 정해져 있어서, 나는 부자가 되고,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자아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또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의지나 욕구를 끝까지 고집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삶에서 괴로워하는 수많은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내 의도, 내 욕구, 내 바람만을 끝까지 고집하고 집착하는데서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다른 의도를 가진 사람들과 다투게 되고, 사고가 한 가지 방향으로만 제한되어 꽉 막힌 채 의식이 닫히고 갇혀 버린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그런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만 한다고 자기 의도에 고집하게 되면 그 방식 이외의 다른 방식이나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고 여기기 쉽다. 그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만이 나의 길이라 여기고, 내가 의도한 방식이 바로 ‘나’라고 여긴다. 행여 다른 사람이 나의 방식을 틀렸다고 하면서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면, 우리는 내가 공격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공격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단지 다른 방식을 제안했고, 내 방식이 옳지 못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의도, 의지, 욕구’를 ‘나’라고 여기며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된 것 같이 여기고, 내가 공격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 공허하고 변하기 쉬운 ‘의도’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의도’를 ‘나’라고 여긴다는 증거다. ‘의도’는 하나의 인연 따라 생겨난 비실체적인 마음일 뿐,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다. ‘의도하는 나’는 없다.

 

 

업(業)도 내가 아니다

 

행온은 또한 형성하는 힘으로써 ‘업’을 짓게 하는 의도적 행위라고 했다. 보통 우리는 업을 지으면 그것은 내 안에 저장되고, 지금까지 짓고 쌓아 온 업의 무더기들이 바로 나라고 여긴다.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면 그로인해 언제까지고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악업을 짓고 죄를 지은 실체적인 ‘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의공경의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업의 과보는 있을지언정 업을 지은 ‘나’라는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말을 잠시 살펴보자. 업을 짓게 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과보는 받게 된다. 그러나 실체적 존재로써 업을 짓는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촛불이 처음 탈 때의 불꽃과 시간이 흐른 뒤에 타는 불꽃은 전자와 후자가 같은 불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혀 다른 불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전자와 후자는 끊임없이 흐르며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의 연결성은 있지만(업보), 독자적이고 실체적인 어떤 실체(작자)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는 것이다.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가 되었다면,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흐르는 연결성은 있지만, 즉 업보는 있지만, 실체적인 어떤 존재 즉 작자는 없다.

 

이번 생에 한국의 남자로 태어났지만 다음 생에 미국의 여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한국의 남자가 진짜 ‘나’인가, 미국의 여자가 진짜 ‘나’인가? 그 둘 사이를 이어줄 고정된 실체적 존재는 있을까? 그 둘은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같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다르다고 해서도 안 된다. 그 전생과 후생의 둘 사이의 관계는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닌 불상부단(不常不斷)이고, 둘은 같지도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다. 이것이 중도적 시각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중도적으로, 즉 연기적으로, 비실체적으로 있을 뿐,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남자가 보시를 행했고, 그 과보로 다음 생의 미국의 여자가 부자가 되는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이것이 바로 업보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인 과보는 있다. 그러나 실체적인 업을 짓는 ‘자’와 업을 받는 ‘자’는 동일한 어떤 존재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동일한 실체적인 존재로서 짓는 자와 받는 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짓는 자와 받는 자가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 중도적이고 연기적인, 끊임없이 흐르는 무상과 무아를 바탕으로 짓고 받기 때문에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즉 업보는 있지만, 실체적인 짓고 받는 자, 즉 작자는 없다는 것이다.

 

바라문교에서는 업을 짓는 자와 받는 자에게는 아트만이라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가 있어서 동일한 근원적 자아인 아트만이 짓고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육신이 죽어도 계속 이어지는 실체가 있다는 상견(常見)이며, 그 실체적인 자아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유견(有見)이지만, 부처님께서는 불상부단의 단상중도와 유무중도를 설하심으로써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고 중도를 드러내셨다.

 

촛불도 사람도 마찬가지로, 전자와 후자는 ‘끊임없이 흐르면서 이어지는’ 것이기는 해도, 전자와 후자를 동일한 어떤 실체적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의 실천

 

보통 우리는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좋은 사람이야’ 혹은 ‘별로야’라고 답변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착한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나쁜 짓을 행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사람에게 ‘착한사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그는 어떤 짓을 해도 영원히 착한 사람이겠지만, 그에게는 착한 사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착한사람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위를 했을 때 착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일 뿐이다. 착한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착한행위가 먼저인 것이다. 착한행위(업)를 하면 착한사람(보)이 되는 것이지, 착한사람(작자, 실체적 존재)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

 

이것은 실천적인 삶의 중요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보통 우리는 사람들을 착하거나 나쁜 어떤 사람으로 규정짓고 실체화하기를 좋아한다. 상온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나쁜 놈, 도둑놈, 배신자, 착한 사람, 수행자, 보시하는 사람 등으로 규정짓곤 한다. 그렇게 규정 짓고 나면 우리는 그 규정된 개념에 실체성을 부여한다.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계속 배신을 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배신자라는 꼬리표를 계속해서 달아주는 것이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라는 이치에서 본다면, 사실 배신자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배신(업)이라는 행위를 했을 때 배신자(보)이라는 말을 듣고, 배신자 취급을 받는 과보를 받을 뿐이다. 그 사람은 배신을 했을 때 배신자인 것이지, 배신을 하지 않을 때는 배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계속해서 배신을 할 거라고 여겨 언제까지고 편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배신자라고 낙인찍고는 한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는 이치에서는 배신을 한 것은 과거의 일이고, 현재는 배신을 하지 않았다면, 그를 배신자로 낙인 찍어서는 안 된다. 배신자라는 ‘작자’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계속해서 배신자라고 그를 낙인 찍어 놓고 배신자라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개과천선해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더욱 더 바뀌기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러나 배신자라고 낙인 찍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써 바라봐 준다면 그는 더 이상 배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에 잘못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실체적인 배신자, 도둑놈, 나쁜놈이 되어 버린다면 이 세상에 나쁜놈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한한 용서와 행위의 종교

 

과거를 내려 놓고, 용서해 주고, 참회함을 통해서 언제고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앙굴리마라는 99명을 죽인 살인자였지만, 이후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행을 한 결과 아라한이 되었다. 작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살인자이겠지만, 작자가 없기 때문에 그는 불교의 수행교단에 들어와 살인자가 아닌 한 명의 수행자요 아라한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일반 중생들은 여전히 그를 한 명의 살인자가 스님 행세를 하는 나쁜 놈으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래서 탁발을 나갈 때마다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구타를 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서는 그 어떤 악행이라 할지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고, 참회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와 참회와 용서의 방식이다.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그 어떤 죄의식에도 실체적으로 사로잡히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한 사람일지라도, 세상 모두가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비웃는다 할지라도, 부처님 전에 와서는 크게 안심해도 좋다. 이 불가의 방식은 전혀 과거를 문제 삼거나, 과거의 잘못을 문제 삼는 가르침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로 이미 지나갔고, 과거의 살인자도 죄인도 ‘작자는 없다’는 가르침에 의하면 지금은 더 이상 살인자도 아니며 죄인도 아닌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과보는 받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용서받을 수 있으며,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실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종교나 사상, 철학 등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겠지만,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억지로 용서하려고 해서 용서하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가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진리에 합일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는 ⟪숫타니파타⟫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에 의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현자(賢者)는 이와 같이 행위를 사실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어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쐐기에 의해 매어 있듯이.” 라는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는 이처럼 작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하다. 실체적 자아, 실체적 바라문이나, 실체적 왕이나, 실체적 도둑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지어진다고 본다. 아무리 과거에 잘못을 지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의 행위에 의해 그는 매 순간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법상

 

 

 

(3) 상온과 상온무아

 

수온과 상온의 상호피드백

 

만약에 이처럼 고정된 실체로써의 ‘느낌’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왜 좋거나 싫은 느낌을 느끼는 것일까? 싫은 느낌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좋은 느낌을 느끼며 행복해하는 것일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좋은 느낌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애착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싫은 느낌도 고정된 것이 아님을 안다면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모든 대상에 대해 특정 느낌을 투영시키고 개입시킨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그 대상 자체에 실체적인 ‘싫은’ 어떤 것이 있어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다른 어떤 대상에 비해서 싫은 것일 뿐이다. 이처럼 모든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은 ‘비교’에서 시작된다.

 

연봉 5,000만원은 사람에 따라 싫은 것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5천만 원에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1억원의 연봉을 받는다면 반 밖에 못 받는 나의 처지가 나를 괴롭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남들을 다 3천만 원 밖에 못 받는데 나만 5천만 원을 받는다면 5천만 원으로 인해 행복한 느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실제 설문조사를 했더니, 남들이 다 6천만 원을 받을 때 나만 5천만 원 받는 것 보다, 차라리 남들이 다 3천만 원을 받을 때 나만 4천만 원 받는 것이 더 좋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비교하는 마음이 다음에 공부하게 될 상온(想蘊)의 작용이다. 수온과 상온은 감성과 이성, 감정과 사유,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으로써 늘 함께 작용하며 서로를 피드백하며 견고하게 만든다. 느낌으로 인해 생각이 견고해지고, 특정 방식으로 견고해 진 견해나 사유로 인해 그 대상은 더욱 견고한 느낌을 부여받는다.

 

어떤 사람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좋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개념을 저장해 둘 것이고,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특정 행동에 대해 나를 위해서 한 좋은 행동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반대로 겉으로는 좋은 척하지만 이기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만나 나쁜 느낌을 받았다면, 상온은 그 사람에 대해 ‘나쁜 사람’으로 개념 지을 것이고, 다음번에 만났을 때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부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또한 상온이 개념화하고 사유하고 비교, 판단하는 것은 수온의 감각적인 정보에 의지한다. 느껴지는 모든 대상에 대해 비교하고 사유하며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불고불락수처럼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버려지는 느낌들을 제외한 선명하고도 강력한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들에 한해 받아들여 개념화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온의 기초자료에 의해 상온을 쌓게 되고, 다시 상온의 작용을 통해 더 수온이 증폭되고 확장되면서 상호 피드백하며 마음의 작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십팔계가 촉할 때 수상사라는 마음작용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처럼 수온과 상온은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따로 일어나기도 하면서 서로 서로를 도와 되먹임 고리를 연결시키며 수온은 상온을 돕고, 상온은 수온을 도우면서 마음의 실체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상온의 도움을 받아 수온이 ‘내 느낌’이라고 여기고, 수온의 도움을 받아 상온이 ‘내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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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의 의미

 

위에서 본 것처럼 우리 마음의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이 바로 수온과 상온이다. 수온이 감성이라면 상온은 이성이고, 수온이 감각적이며 감성적이라면 상온은 지성적이고 이지적이다. 쉽게 표현하면 수온은 느낌으로 상온은 생각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오온을 공부할 때는 이렇게 느낌과 생각이라고 쉽게 이해하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상온은 단순히 생각이나 사유, 이성과 지성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런 개념들을 포괄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이해한다면, 표상작용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절하다. 표상(表象)작용의 사전적 의미는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에 상대하여 그것을 상기시키거나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일, 드러내어 나타내다’라고 나와 있다.

어떤 대상을 보고 과거에 저장되어 있던 경험과 지식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기억해 내 눈앞의 대상에 대해 이름과 특징, 모습, 개념 등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표상작용이다.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할 때 수상사가 생긴다고 했는데, 눈으로 사람을 보고 ‘김 아무개’라고 아는 것도 표상작용이며, 꽃을 보고 ‘장미꽃’, ‘할미꽃’ 이라고 알 수 있는 것도 표상작용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가수의 어떤 제목의 노래’라고 아는 것도, 코로 냄새를 맡으며 ‘된장찌개 냄새’인지, ‘카레 냄새’인지를 아는 것, 혀로 맛보며 ‘짠맛인지 단맛인지’를 아는 것, 몸으로 촉감을 느끼며 ‘거친지 부드러운지’를 아는 것 등이 모두 표상작용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생각을 구상하는 기억의 연상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각이 일어나려면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조합되고, 연상되어져야 한다. 그 수많은 기억들은 시간의 순서대로 입력되어 있다가 순서대로 생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서없이, 맥락도 없이 마구잡이로 생각이라는 수면 위로 올라온다. 바로 그렇게 올라오는 과거의 기억들, 표상들을 구상하고 연상해내어 이름 붙이는 작용을 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미 과거에 보고 듣고 경험해 아는 기억과 지식 등을 가지고 현재 눈앞에 있는 대상을 드러내어 나타내는 작용이 바로 표상작용이며 상온의 작용이다. 표상작용이 일어나려면 과거의 경험을 통해 개념을 만들어 놓은 지식과 언어적 개념들의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 수많은 정보와 지식, 개념들을 비교하고 총괄하여 현재 눈앞에 보이는 대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넓게 보면 비교, 판단, 추리, 총괄, 개념화하는 모든 이성적 사유나 생각들을 상온이라고 할 수 있다.

 

국화꽃은 그 품종이 2,000여 가지가 넘으며, 국화과에는 2만여 종과 940여 속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꽃을 보고 자세히 국화꽃 품종 중에 어느 품종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국화꽃’의 일종이라고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표상작용을 통해서다. 그것이 국화꽃인지를 알려면, 먼저 그 꽃을 다른 꽃들과 비교, 판단, 대조해 봄으로써 국화꽃과 비슷한 부류에 들어 와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만약 국화꽃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비슷한 꽃을 보더라도 그냥 ‘꽃’이라고만 할 뿐, 국화꽃의 일종인지 조차 모를 것이다. 그 사람의 표상 속에는 국화꽃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와 판단을 통해서 국화꽃이라고 알고 있었던 개념들을 중심으로 이 꽃이 그전에 알고 있던 국화꽃과 비슷한지 아닌지를 판단해 국화꽃과 비슷한 속성이나 모습들을 추려낸다. 이를 추상작용이라고 하는데, 추상이란 ‘개별 사물의 공통된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작용과 함께 추리작용도 일어난다. 추리는 ‘알고 있던 사실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사실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상, 추리작용을 통해 국화꽃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결론적으로 종합, 총괄한다. 과거의 지식이나 표상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구체적으로 국화과 엉겅퀴속의 큰엉겅퀴라고 총괄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이다.

 

혹은 그 이름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어서 식물백과를 살펴봄으로써 결국 이 꽃은 국화과의 취나물속의 각시취라고 밝혀지게 되었다면, 이는 새로운 표상을 개념화시켜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또한 표상작용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표상작용과 비교, 판단의 작용, 추상과 추리, 종합과 총괄, 새로운 표상과 개념화 등이 모두 상온의 범주에 포함된다. 비교, 판단, 추리, 총괄, 개념화 등을 통해 현재 내 앞에 있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기에 상온을 지각작용이라고도 한다. 이런 지각, 표상작용을 통해 나아가 보다 깊은 이념, 철학, 과학 등 다양한 사상을 확장시켜 연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온은 꼭 물질적 대상만을 사유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 미추(美醜), 장단(長短), 행복과 불행, 지혜와 자비, 평화와 자유 등 정신적인 이성적 언어개념들 또한 상온의 대상이 된다. 어떤 행위를 보고 선행인지 악행인지를 비교, 대조, 총괄, 추리를 통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바로 이 상온일 것이다. 색온, 수온은 동물들에게도 있을 수 있지만, 상온, 즉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개념 짓는 활동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너무 복잡하고 오히려 더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그래서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이러한 모든 상온의 작용을 통틀어 개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생각’, ‘사유’ 혹은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표상작용이지만, 개괄적으로 ‘생각’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상온도 마찬가지로 내부의 상온과 외부의 상온이 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사유와 생각, 표상작용 등을 오취온으로써 내부의 상온이라고 하며, 그 상온이 일어날 때 외부의 대상에 표상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외부의 상온이다. 즉 눈앞의 꽃을 보고 노란색 국화꽃이라고 지각할 때, 사실은 과거에 배우고 개념지어 놓았던 노랗다는 언어적 개념과 국화꽃이라는 지식과 정보들을 끄집어 내어 비교, 추상해 봄으로써 총괄적으로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표상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외부의 꽃을 보고 그런 개념이 일어난 것을 보고, 외부에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고정된 실체적 존재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고정된 상온이 내 밖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 바깥에 노란색 국화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노란색 국화꽃’으로 지각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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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무아

 

그렇다면 상온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실체적인 것일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표상, 개념화의 정신작용은 과거 기억된 정보의 데이터베이스를 비교, 추리, 총괄함으로써 드러내고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내 안에 ‘생각하는 나’가 있거나, ‘사유하는 나’가 있거나, ‘지각하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앞의 대상을 보면 언제나 ‘이것은 국화꽃이고, 저것은 소나무고, 저것은 자동차고, 이 사람은 아무개다’라고 표상지어 알기 때문에 내 안에 그러한 표상작용, 개념작용, 지각작용이 고정되게 실존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아마도 과거에 알게 된 정보나 지식들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삶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하고 변화시켜 갈 것이다. 똑같이 노란색인 줄 알았는데 새롭게 아이보리색이라는 언어적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면, 내 안의 표상 데이터베이스에는 아이보리색이 하나 추가된다. 그 전에는 비슷한 색을 모두 노란색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부터는 노란색과 아이보리색을 구분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무슨 색이냐고 했을 때 ‘노란색’이라고 말했겠지만, 이제부터는 ‘아이보리색’이라고 답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상온이라는 것은 고정되게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사유하며 생각하고 개념 짓는 능력이 내 안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상온이다. ‘생각하는 나’, ‘사유하는 나’를 나의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 또한, 이러한 상온을 보고 실체적인 ‘나’가 존재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이 상온은 무아(無我)다. ‘생각하는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팔계가 접촉한다는 인연 따라 생겨난 인연가합의 연기적 존재인 것이다.

 

내 안에 상온이라는 사유와 생각하는 정신작용이 실제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우리는 내 바깥 세계에도 실질적인 생각의 대상, 표상의 대상, 사유의 대상들이 실존한다고 여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사실은 바깥 세계에 그런 언어적 개념을 가진 사유의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사유의 대상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 정의와 사랑, 길고 짧은 것, 굵고 가는 것, 아름답고 추한 것 등이 실재로써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그런 것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낸 개념적 가설일 뿐, 실체적으로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진짜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실체가 정해져 있어서 우리가 단지 그를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 문화들, 나라들에서 서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추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상온을 통해 사유와 생각, 나아가 사상과 이념과 철학 등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이념과 사상 등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여기며, 사로잡히고 집착함으로써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다투고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상온무아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사유와 생각, 사상과 이념 등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다. 내 생각만이, 내 종교와 이념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집착하고, 타인의 생각과 사상, 이념은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여김으로써 심지어 이념적, 종교적 전쟁까지 일어나지 않는가. 보수와 진보의 갈등, 종교적 갈등, 이념적 갈등, 인종적 갈등, 지역적 갈등 등 이 모든 갈등들은 사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특정 생각, 사고, 이념들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 집착은 상온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집착할 만한 것이 없는 ‘무아(無我)’임을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처럼 상온이 무아임을 안다면 사회적인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대립을 넘어 화합과 조화로써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고 용납하며 활짝 열린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와 대적정의 무쟁사회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상을 타파하라

 

이처럼 개념작용, 표상작용인 상온은 비실체적인 것이지만,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상온을 ‘나’라고 생각함으로써, 많은 집착과 욕망, 번뇌를 야기시킨다. 내 안에는 생각하고 사유하는 ‘나’가 있다고 여김으로써 ‘나’에 집착하고, 내 바깥에는 생각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여김으로써 ‘세계’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은 타파해야 할 것으로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다. 상온은 말 그대로 허망한 상으로써,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작용이며 표상작용일 뿐이므로, 거기에 얽매여 그것이 실재한다고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개념 짓고 표상작용을 일으키며, 비교, 총괄, 사유하는 작용을 일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필요할 때는 당연히 표상작용을 일으키고 생각하고 사유함으로써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렇듯 생각과 사유를 하며 살아갈지라도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실체가 아니며 무아이므로 그 생각과 사유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비교가 필요할 때는 비교하고 대조해야 하겠지만,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양 극단의 감정이 생겨나고, 그로인해 괴로움이 생겨남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과 비교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궁핍한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교하는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남들보다 가난하면 괴롭다고 결론짓고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상을 타파함으로써, 즉 상온이 무아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추상과 추리도 마찬가지다. 실제 있지도 않은데 있는 것으로 오인하여 추측하고 추리하며 추상함으로써 우리는 머릿 속에서 무수한 괴로운 일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회사 사람 두 명이 모여서 내 욕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어쩌면 단순히 가벼운 마음으로 욕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욕을 들은 사람은 그 상황에 추측과 추상을 더한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모두들 모이면 이렇게 내 뒤에서 나를 욕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나를 회사에서 퇴출시키려는 걸지도 몰라. 난 다음 승진에서 분명히 떨어지고 말거야! 그러면 자식과 아내 얼굴은 어떻게 보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이 나이에 나를 받아줄 회사는 아마도 없을거야. 난 실패한 인생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은 무수한 추측과 추론과 상상의 나래를 펴며,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전혀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으며 소모적이기만 한, 더욱이 나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이런 추측 속에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상온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냄으로써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고, 괴롭히곤 한다. 생각이라는 것이 언제나 이런 식으로 뜬금없고, 맥락도 없으며, 말도 안 되게 확대해석을 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런 비교, 판단, 추상, 추리, 표상과 개념화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현실을 총괄하는 사유 또한 상온의 역할이다. 그러나 앞의 비교와 추상 등이 무상하고 무아인 비실체적인 것들이다 보니 그 정보들을 가지고 종합하고 총괄하는 사유작용 또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거짓된 정보를 가지고 잘못된 종합, 총괄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유적 결론을 실재라고 착각함으로써 괴로움에 빠진다.

 

이처럼 상온은 비실체적인 것으로써, 전혀 집착할 것도 못되고, 실재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상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대승불교의 금강경에서는 이러한 타파해야 할 상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설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구마라집의 금강경에서는 상(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모두 상(想)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결과적으로 ‘생각하는 나’, ‘사유하는 나’, ‘개념 짓고 표상하는 나’를 설정함으로써 이 안에 ‘나’가 있다는 아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내 바깥에서 ‘생각하는 대상’이 있다는 상에 사로잡힘으로써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상의 타파야말로 공의 반야 지혜를 깨닫는 매우 중요한 수행임을 일깨우고 있듯이, 상온을 실체화하여 사로잡혀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타파해야 할 중요한 공부의 과정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Posted by 법상

 

 

 

 

(2) 수온과 수온무아

 

수온의 의미와 종류

 

앞에서 십팔계가 ‘촉’하게 되면 그에 따라 수상행이라는 오온이 연기한다고 했다.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계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객관계를 만나면 그에 따라 식과 수상행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이비설신과 색성향미촉은 ‘색’이며, 의와 법은 ‘마음’이다. 즉, 안이비설신이라는 우리 오관에서 각각 색성향미촉의 대상을 만날 때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작용이 생겨나며, 의와 법이 만날 때 즉 마음 내부에서도 수상행식이 일어날 수 있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귀로 어떤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좋거나 나쁜 어떤 특정한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비오는 날에 대해 어떤 사람은 눈으로 비를 보고, 귀로 빗소리를 들으며, 습기 머금은 축축한 느낌을 몸으로 감촉하면서 ‘싫은 느낌’을 느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런 비를 ‘좋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똑같은 사람을 어떤 사람은 좋다고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싫다고도 느낀다. 특정 동물을 볼 때에도 어떤 사람은 좋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싫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대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고 느낀다. 즉 감정을 섞어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어떤 대상을 받아들일 때는 언제나 좋거나 싫거나 그저 그런 느낌 중 한 가지로써 받아들인다. 이것을 삼수(三受)라고 하여, 싫은 느낌을 고수(苦受), 좋은 느낌을 낙수(樂受),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저 그런 느낌을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한다.

 

이 가운데 주로 우리가 인지하는 느낌은 고수나 낙수이고, 불고불락수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잊어버리기 쉽다. 뚜렷하게 좋거나, 아주 싫은 느낌은 잘 기억되지만, 그저 그런 느낌들은 쉽게 잊혀지고 기억에서 버려진다고 해서 불고불락수를 ‘버린다’는 의미에서 사수(捨受)라고도 부른다.

 

 

 

 

내부의 수온과 외부의 수온

 

이와 같이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이 느낌이 나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다 보니 이 느낌을 ‘내 마음’, ‘내 느낌’이라고 여긴다. 느끼는 마음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수온이다.

 

그런데 오온은 나에 한정해서 부를 때 오취온이라고 했고, 일반적으로는 오온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색온은 오취온으로 보면 ‘내 육신’이 색온이고, 내 바깥의 대상으로써의 색온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계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내부의 오온은 오취온이고 외부의 오온은 오온이다. 색온에서 본다면, 내부의 오취온은 육신이고, 외부의 오온은 물질 세계다. 그래서 내부에 있는 주관으로써의 안이비설신과 외부에 있는 객관으로써의 색성향미촉을 색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수온도 내부의 오취온으로써의 수온은 내가 느끼는 좋고 나쁜 감정이다. 감정과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내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낄 때 외부에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특정한 느껴지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외부로써의 수온이다. 즉, 수온은 두 가지인데, 내부에서 느끼지는 감정을 수온이라고 하여 ‘나’로 여기고, 외부에서 느껴지는 대상에 대해서도 외부에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수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는 좋다고 느껴지는 대상도 있고, 싫다고 느껴지는 대상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내 안에도 느낌, 감정이 있고, 내 밖에도 느껴지는 감정적 대상이 있다고 착각하는 마음을 수온이라고 한다.

 

처음 오온에 대해 배울 때, 나도 이 세상도 모든 것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배우면서 조금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오취온으로써 물질적인 색과 정신적인 수상행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이 세상이라는 내 외부의 대상 세계도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색으로 이루어진 것은 알겠는데 수상행식으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말은 곧 외부의 대상 세계에 대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느껴지는 대상, 생각되는 대상, 의지와 욕구를 일으킬 대상, 인식되는 대상으로써의 외부 세계가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외부세계의 수상행식인 것이다. 십이입처와 십팔계는 어디까지나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이 객관세계를 만날 때 인식되어지는 것들만을 ‘일체’로 인식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즉, 십이처에서는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만을 ‘일체’라고 했는데, 우리의 감각기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만을 일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온 또한 이 일체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오온에서 수온이란, 내가 느끼는 내적인 느낌과 외부에 느껴진다고 여기는 감각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이라는 색온은 색성향미촉이라는 색온을 대상으로 접촉하고, 의 즉 마음은 색성향미촉법 전체를 대상으로 접촉함으로써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인식하면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인식하는 내부의 마음을 수상행식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느껴지도록 만든 외부에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인식할 만한 마음이 실재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외부의 수상행식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나’도 색수상행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부세계도 색수상행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온이라고 여기는 나와 세상의 모습이다.

 

 

 

수온무아

 

그렇다면 수온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온은 주관적인 감정일 뿐이다. 동일한 대상을 보고도 사람에 따라 좋게 느끼기도 하고 나쁘게 느끼기도 하며, 같은 사람일지라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느낀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황에 관계 없이 언제나 비오는 날이 좋아야 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소풍날이나, 중요한 행사를 할 때 비가 온다면 그 비는 싫은 느낌으로 느껴질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너무 배가 부를 때는 맛도 없게 느껴지고 싫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약 특정 음식을 대하는 내 느낌이 항상 고정되어 있고, 실체적이라면, 그 음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맛있는 느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배가 고플 때는 맛있고 좋은 느낌이었다가, 배가 불러 올 때는 그저 그런 느낌으로 바뀌고, 과도하게 배가 부른데도 억지로 먹어야 한다면 그것은 괴로운 느낌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느낌은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조건 따라 계속해서 흐르면서 변화하는 것이지 정해진 어떤 실체적인 느낌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같은 조건 속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내 내적인 마음 상태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어도 전혀 맛을 느낄 수 없다. 평소와 달리 입맛도 사라지고, 평소에 아름답던 것들도 전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던 세상이 온통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인다. 거꾸로, 세상에 아무것도 행복할 것도 없고, 즐거울 것도 없다고 여기던 부정적인 사람일지라도 어느 날 마법같이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더라도 생기가 넘치고 행복에 겨워 질 수도 있다.

 

이처럼 느낌은 인연 따라 언제나 변화하는 것일 뿐, 고정되게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내가 느끼는 ‘느낌’을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외부에 좋거나 싫은 느낌이 실재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외부 대상이 언제나 나에게 좋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 때는 그 사람의 모든 점이 다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만, 그 사람이 배신을 하고 떠났다면 사랑은 곧 배신과 증오로 바뀌고 만다. ‘그 사람’은 고정된 실체로써 좋은 느낌 혹은 나쁜 느낌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좋은 사람도 되었다가 나쁜 사람으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비오는 날을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것 또한 ‘비가 내린다’는 상황 자체에 고정된 좋다거나 싫은 느낌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비라는 대상 자체에 고정되게 좋다는 느낌이 정해져 있다면 비는 누구에게나 좋은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비라는 외부의 대상은 고정되게 좋거나 싫은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비오는 날을 싫어하던 사람도, 우연히 내린 비 때문에 사랑하던 사람과 한 우산을 쓰고 빗 속을 거닐게 되었다면, 그 비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겠는가. 이처럼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 대상 자체에 어떤 특정한 느낌과 감정이 고정되게 실체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수온, 즉 느낌은 내가 느끼는 느낌도 고정되게 정해진 것이 아니며, 외부의 대상 또한 좋거나 싫다라고 느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내부의 수온과 외부의 수온이 모두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좋다거나 싫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이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나, 나라에 따라서,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시대에서는 좋은 느낌이던 것이 다른 시대에서는 나쁜 느낌으로 바뀌기도 하며, 어떤 나라에서는 좋은 느낌인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나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은 뚱뚱한 정도가 미(美)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 뚱뚱한 여인일수록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뚱뚱한 여자를 보면 사랑스럽게 느끼고,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삐쩍 마른 사람을 아름답게 느끼지 않는가. 이처럼 ‘느낌’이나, ‘감정’은 고정된 실체인 것이 아니라, 시대며 나라, 종교며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안이비설신의와 수온무아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계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객관계를 접촉할 때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 느낌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눈으로 똑같은 음식을 볼 때, 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느낌이 일어나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싫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 음식 자체에 고정된 좋은 느낌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느낌이 일어나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또한 같은 음식을 먹을 때라도 배가 부를 때는 맛이 없게 느껴지고, 배가 고플 때는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것을 볼 때, ‘느낌’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통통하다’ 혹은 ‘건강미가 넘친다’라고 말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뚱뚱하다’는 말로 알아듣고 싫은 느낌을 느낄 수도 있다. 같은 소리지만 듣는 이에 따라, 또 내가 뚱뚱할 때 듣느냐, 가냘플 때 듣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염불소리도 불자들이 들으면 좋은 느낌이겠지만, 불교를 싫어하는 타종교인이 듣는다면 싫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도 마찬가지다. 청국장 냄새는 한국인이 맡으면 좋은 느낌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나쁜 느낌일 수도 있다. 절집 음식 중에 고수나물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 절에 갔을 때 향이 짙은 고수나물은 그 독특한 향 때문에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계속 먹다 보니 그 독특한 향을 즐기게 되었다. 싫은 느낌의 향기가 어느덧 좋은 느낌의 향기로 바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향수를 진하게 뿌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 향수를 자신을 대표하는 향기처럼 매일같이 뿌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인위적인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길 때 오히려 역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냄새와 향기에는 실체적인 정해진 느낌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혀로 맛을 보는 것도 그렇다. 한번은 네팔의 산중마을에서 스님들과 함께 머물었을 때인데, 음식 중에 고수나물이 나왔기에 계속 더 달라고 하며 몇 접시를 먹고 났더니, 주인이 이 나물을 이렇게 잘 먹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이처럼 같은 냄새와 맛이지만 그것은 좋은 느낌이 되기도 하고, 싫은 느낌이 되기도 하며, 언제든 뒤바뀔 수도 있다. 특정 음식을 좋아하다가 싫어지기도 하며, 싫어했지만 좋아지기도 하는 것과 같다.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다. 더운 여름날 땀이 흘러내릴 때는 찝찝하고 짜증스런 느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사우나에서는 오히려 ‘시원하다’고도 하지 않는가. 나는 인도에 다녀온 뒤부터는 다녀오기 전에 비해서 무더운 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덥기 때문에 느끼는 스트레스는 훨씬 덜해 짐을 느낀다. 훨씬 더 더운 곳에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하루 종일 걸었다 보니, 그것에 비해 한국의 더위는 그 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약하게 느껴진 것이다. 이처럼 같은 더위일지라도 똑같이 덥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춥고 덥다는 감촉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손이 맞닿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억지로 손을 잡으려 한다면 짜증스러운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또한 같은 정도의 달리기를 할지라도 축구경기를 하며 골을 한 골 넣었을 때는 아무리 뛰어도 힘든 줄을 모르지만, 기합으로 운동장을 몇 바퀴 돌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자에 비해 훨씬 괴로운 느낌이 들 것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월급을 받을지라도 어떤 사람은 많이 받는다고 느끼며 행복해 하고 풍요를 느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너무 조금 받는다고 투덜대며 불행과 궁핍을 느낄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산다고 행복해하지만, 어떤 사람은 더 좋은 아파트에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면서 ‘느낌’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느낌과 감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적인 마음이 아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좋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 싫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는 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 느낌이 정해져 있다면 동일한 상황 하에서 우리는 똑같은 느낌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만, 느낌은 고정된 실체적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주인이 되어 느낌을 선택할 수도 있다.

 

뒤에 나오겠지만, 상온과 행온, 또한 식온을 어떻게 작용시키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외적인 상황의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과는 별개로 내 스스로 외적인 상황의 주인이 되어 무엇을 느낄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빅터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부모, 형제, 아내를 모두 잃고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모든 가치를 파멸당한 채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핍박과 공포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발견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자유가 강탈된 수용소에서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밖에 없음을 깨달았고, 그 이후 그는 수용소에서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최악의 공포스럽고, 괴로운 상황을 내 마음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그 속에서 조차 주어진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외적인 상황이 그 삶의 느낌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태도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외적인 상황과는 상관 없이 주도적으로 행복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 느낌과 감정에는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법상 스님의 불교 교리 콘서트)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도)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법상

 

 

 

2. 오온과 오온무아

 

앞 장에서 삼법인의 제법무아를 살펴보면서, 무아야말로 초기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무아는 곧 연기, 중도, 공과 다르지 않은 개념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전 생애에 걸쳐 이 무아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편의 가르침을 전해주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온의 가르침이다. 내가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내가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몸뚱이도 있고, 생각하고, 느끼고, 의도하며, 의식하는 마음도 분명히 있는데 왜 무아라고 하셨을까? 바로 그 답변으로 설하신 가르침이 오온이다.

 

무조건 ‘내가 없다’, 무아다 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어떤 요소들로 나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각각의 부분들이 왜 실체가 없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요소들이 각각 모두 비실체적이며, 텅 빈 공허한 것이라면 그 다섯 가지가 조합된 ‘나’라는 존재 또한 무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무아라는 말은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고 오온무아라는 의미로 쓰일 뿐이다. 삼법인의 무상, 무아, 고는 부파불교 시대에 그렇게 조직화 시킨 것일 뿐, 사실 무아는 오온무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온의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고, 오온의 각 온들이 왜 실체가 없는 무아인지를 살펴보게 된다면, 그 비실체적인 다섯 가지가 쌓여 이루어진 우리 존재 또한 무아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 장에서는 먼저 오온의 의미에 대해 살펴 보고, 그 오온의 각 온들이 왜 고정된 실체적 존재가 아닌 무아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색온과 색온무아

 

색온의 의미

 

우리가 ‘존재한다’, 혹은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크게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물질적인 것을 ‘색온’이라고 부른다. ‘온’은 쌓임, 집합,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 등의 의미로 쓰인다. ‘색’은 보통 모양과 형태를 갖춘 것을 의미한다. 즉, 색온이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총체를 말한다. 오취온이라는 인간을 한정해서 말한다면 색은 우리의 육신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눈, 귀, 코, 혀, 몸을 색이라고 한다. 바깥 대상 중에는 안이비설신의 대상인 색성향미촉 또한 색이다.

 

물질은 사대(四大) 즉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 져 있으며,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한다. 우리 몸으로써의 색은 내사대(內四大), 외부 대상의 색은 외사대(外四大)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수화풍 사대는 땅, 물, 불, 바람의 요소를 말한다.

 

땅의 요소인 지대(地大)는 딱딱한 성질의 물질로써 변형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우리 몸에서는 피부, 뼈, 머리카락, 손발톱, 심장 등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기관들이나 딱딱한 구성요소들을 뜻한다.

 

물의 요소인 수대(水碓)는 흐르거나 적시는 성질을 가진 액체 부분으로써 우리 몸에는 피, 오줌, 침 등을 말한다.

화의 요소인 화대(火大)는 뜨거운 열의 기운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몸의 체온을 말하며, 우리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일정한 체온이 유지되어야 하듯 화대 또한 우리 몸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풍의 요소인 풍대(風大)는 움직이는 성질의 것으로 우리 몸에서는 호흡, 혈액의 움직임, 가스 등을 말하며, 우리 몸이 움직이는 것은 모두 바람의 요소가 작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우리의 육신을 색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색온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은 낱낱의 요소들이 고정된 실체적 존재는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인연 따라 내 육식을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아침에 먹은 음식이 땅의 요소가 되고, 마신 물과 음료 등이 물의 요소가 되며, 움직이고 운동을 할 때 화의 요소가 모이고, 숨을 쉬거나 움직일 때 풍의 요소가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색온, 즉 육신 또한 고정된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육신이라는 내사대도, 세계인 외사대도 모두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가합의 존재일 뿐, 고정된 실체는 아니다. 이 육신이 ‘나’라는 착각이 어리석은 중생들이 생각하는 색온의 모습이다.

 

외도들의 요소설을 보면 똑같이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사대를 설하고 있지만, 그것이 불교의 사대와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도에서 말하는 사대는 물질을 구성하는 상주불변의 실체적 요소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사대는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일 뿐, 그 어떤 실체도 없는 것이다.

 

 

 

 

색온무아의 과학적 증명

 

현대과학에서도 우리 몸의 최소의 구성요소는 결국 존재하지 않음을 밝혀내고 있다. 물질의 구성요소를 나누어 보면, 분자에서 원자로 또 양자, 중성자, 전자로 나뉘며, 결국 소립자로 나누어 진다. 그런데 이러한 입자는 질량과 무게가 있어야 하는데, 소립자는 어떤 상태에서는 무게를 가지다가 어떤 상태에서는 무게 없이 사라진다. 인연 따라 있기도 하다가 없기도 하는 것이다. 측정 장치와 관찰자의 인지상태에 따라 관찰 결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관찰자의 마음에 따라 입자가 되었다가 파동이 되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물질도 결국 마음에서 인연 따라 연기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물질, 즉 육신이 실체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또한 우리 마음에서 연기한 것일 뿐이다.

 

그 뿐이 아니다. 원자의 구조를 놓고 보더라도, 물질의 미시적인 구조는 거의가 비어 있는 상태로 있음이 밝혀졌다.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데 그 상태는, 콩알 만한 원자핵 주위를 먼지 보다 더 작은 전자가 월드컵 경기장 만한 큰 공간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원자는 99,999%가 다 비어있으며, 0.0001%도 안 되는 전자와 양자만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자와 양자 또한 나누어 보면 결국 최소 구성요소라는 실체적 알갱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손으로 상대방의 몸을 누르면 그 안으로 손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못 하는 이유는 바로 전자와 전자가 마이너스끼리 접근하면서 전기적인 반발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99.999%가 다 텅 비어 있는 육신이지만 반발력 때문에 딱딱하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텅 비어 있는 육신을 우리는 특정 에너지, 특정 인연 때문에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색온이라는 것, 우리 육신, 몸이라는 것은 텅 비어 있으며,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에서만 ‘있다’라는 착각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있다’라는 착각은 바로 관찰자의 인지상태라는 인연에 따라 소립자가 있는 것처럼 꾸며내기 때문인 것이다.

 

 

 

육신이 ‘나’라는 착각이 고를 만든다

 

이렇게 육신은 사실 텅 비어 있어 고정된 실체가 아니지만 우리는 육신을 보고 ‘나’라고 생각한다. 육신이 ‘나’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채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사적 사고방식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육신이 있을 때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지만, 육신이 죽고 없어지면 ‘나’는 끝난 것, 죽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은 ‘죽음’을 인생이 끝난 것으로 알고, 최대의 실패로 여긴다. 육신이 ‘나’라는 사고방식에 갇히게 되면, 살아남는 것만이 성공이다. 그렇기에 죽음이 언젠가 올 것을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죽음은 곧 괴로움인 것이다. 육신이 ‘나’일 때는 이처럼 죽음은 끝이며,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육신이 ‘나’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면, 삶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이 생만이 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또 다른 삶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생사적 사고방식에 빠져,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색온을 ‘나’라고 착각하고, 오온을 나라고 착각함으로써 괴로움에 빠져 있는 중생의 실상을 보고, 오온무아, 색온무아를 설하신 것이다. 색온, 즉 이 육신이 ‘나’가 아님을 안다면, 생사적 사고방식에 빠져 노병사를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근원적인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삶의 이치를 깨달아 해탈열반에 이르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생사를 벗어났다고 하신 분이 왜 죽게 된 것일까? 이것은 생사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괴로움이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잘못된 허망한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이지만, 육신이 내가 아님을 분명히 깨닫고, 오온이 내가 아님을 분명히 본 부처님에게 죽음은 고가 아닌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법상 스님의 불교 교리 콘서트)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도)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법상

 

 

(2) 십팔계와 촉에서 생겨난 수상사

 

그런데 이 십팔계의 삼사화합을 통해 ‘무언가가 있다’는 의식인 ‘촉’이 나타나게 되면, 이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 즉 촉에 의해 수상사(受想思)가 생겨난다. 여기에서 수상사는 곧 오온의 수상행(受想行)을 의미한다. ⟪잡아함경⟫306경에서는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이 촉이다. 촉에서 수상사가 함께 생겨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와 성을 연하여 이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이 촉이며, 촉에서 수상사가 함께 생겨난다. 나아가 의와 법을 연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이 촉이며, 그 촉에서 수상사가 함께 생겨난다. 안이비설신을 서로 연결하고 종합하여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의’라고 했으니, 결국, 의계와 법계가 연하여 의식계가 생기고 그 세 가지가 촉함으로써 수상사가 생겨난다는 말은 곧 우리가 마음이라고 여기는 ‘의’와 ‘의식’ 속에서 수상행이라는 오온이 만들어짐을 뜻하는 것이다. 십팔계가 인연 따라 접촉함으로써 마음에서 오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의 – 의식 – 법’ 이라는 세 가지가 화합하여 ‘촉’함으로써 새로운 ‘있다’고 여기는 오온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오온이란 십팔계와 촉에서 연인 따라 만들어진 ‘존재’라고 착각된 것이다.

 

쉽게 말해, 십팔계가 화합함으로써 ‘무언가가 있다’라는 존재론적인 착각에 빠지게 되고, 사실은 없는 것이지만,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우리는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있다는 착각이 있으면, 좋은 것에는 애착하고, 싫은 것은 미워하게 되며, 생각으로 따져 보기도 하고, 욕망을 투영하여 가지려고 애쓰기도 한다. 수상사, 즉 수상행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촉’이 생기면 촉을 인연으로 수상행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무수한 보물을 보고, 큰 돈을 벌었다고 할지라도 꿈에서 깨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 때문에 꿈에서 깨는 순간 그 꿈 속의 금은보화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 본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좋아하면서 애착하거나, 싫어하면서 증오할 필요도 없고, 거기에 대해 생각할 것도 없으며,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우리의 삶 또한 이러한 꿈과 마찬가지로 허망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있다’라고 여기고, ‘존재한다’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꿈과 같다. 실존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은 무명에 의해 허망하게 착각을 함으로써 촉입처에 의해 ‘진짜로 있다’고 착각한다. ‘촉’에 의해 진짜로 있다고 착각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좋거나 싫다는 느낌이 일어난다. 바로 이렇게 해서 생겨난 좋거나 싫다는 느낌, 감정을 수온(受蘊)이라고 한다. 이 느낌에서 연이어 과거에 알았던 것과 비교해서 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판단하고 사유하며, 생각을 만들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온(想蘊)이다. 좋은 느낌이 생기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연이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행동에 옮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행온(行蘊)이다. 이렇게 해서 수상행이 생겨난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수온은 느낌과 감정을 말하고, 상온은 생각, 사유, 표상작용이고, 행온은 욕구, 의지작용으로써 무언가를 행해야겠다는 업의 원동력이 되는 작용이다. 물론 행온에는 이러한 의지작용 외에도 수온과 상온, 식온에 들어가지 않는 수많은 정신작용을 포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화 시켜 의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 눈 앞에 어떤 여인이 나타났다. 눈으로 그 여인을 보고 분별해 인식함으로써 십팔계가 화합하여 ‘촉’이 생긴다. 즉 그 여인을 ‘실체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 만약 우리가 그 여인이 눈 앞에 나타난 순간, 큰 고민과 걱정거리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고뇌에 빠져 있었다면 그 여인은 눈앞에 어떤 존재로 인식되지 못했을 것이다. 즉 그 여인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여인이 내 눈 앞에 나타났을지라도 나는 그 여인을 인식해 ‘있다’고 여기는 촉의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연이 화합하여 마침 내가 그 여인을 보았고 인식했으며 ‘있다’고 여겼다. 십팔계에서 촉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 여인에 대해 좋다는 느낌이 생긴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감정이 생기고, 호감이 간다. 이것이 수온이다. 그러면 곧바로 상온은 과거에 가졌던 여인에 대한 표상들을 떠올릴 것이고, 아름답다는 개념들을 떠올릴 것이며, 그것을 통해 과거에 만났던 여인들에 비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상온이다. 그렇게 좋은 느낌과 생각이 만들어지게 되면 자연히 그 다음에는 그 여인에게 말이라고 걸어보고 싶고, 차라도 한 잔 나누고 싶고, 사귀고 싶은 욕구, 의지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행온이다.

 

 

 

 

(3) 오온의 성립

 

그러면 이제 비로소 오온이 모두 성립되었다. 오온이란 우리가 ‘촉’으로 인해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즉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존재한다’고 여기는 일체 모든 것들은 전부 오온에 포섭된다. 즉, 일체 모든 존재를 오온으로 나눌 수 있다.

 

앞에서 십이처도 일체라고 했고, 일체를 십팔계로도 나눌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또 다시 일체 모든 존재를 오온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에서 일체 존재에 대한 다양한 분류 방법을 설하셨는데 대표적인 것이 온처계라고 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인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눈데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정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5온을 설하고, 물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12처를 설하며, 정신과 물질 모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18계를 설한다고 한다. 이렇게 온처계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다양한 근기의 온갖 중생들에게 결국 물질과 정신은 모두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다만 인연 따라 연기되어진 가합의 존재에 불과하며, 공한 것이고, 무아인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5온의 온(蘊)은 ‘모임’이라는 뜻으로 음(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좁게는 인간 존재도 오온이라고 부르며, 넓은 의미로는 일체 모든 존재를 오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별히 인간 존재만을 구별해서 사용할 때는 오취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자아라고 집착한다는 의미에서 오취온이라고 한 것이다.

 

오온에 의하면 일체제법은 물질적인 색과 정신적인 수상행식으로 나눌 수 있다.

앞에서 수상행에 대해서는 설명했는데, 색과 식 또한 이미 설명이 되었다. 색은 물질로써,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과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을 색이라고 부른다. 눈과 눈에 보이는 대상, 귀와 귀에 들리는 소리, 코와 코로 맡아지는 냄새, 입과 입으로 맛보아지는 것, 몸과 몸으로 감촉 느껴지는 대상 전부를 색의 범주에 넣는다. 그리고 식은 십팔계에서 설명한 육식을 말한다.

 

앞에서 식의 대상을 명색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수상행식을 명으로, 색을 색을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의 대상은 명색, 즉 색수상행식 오온인 것이다.

 

‘나’라는 인간 존재를 오온이라고 했고, 오온은 ‘촉’으로 인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실제로 내가 없는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있다고 여기는 이유는 바로 ‘촉’ 때문이고, 그 허망한 촉으로 인해 ‘내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종류에는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가 있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색인 이 육신을 ‘나’라고 여긴다. 육체가 이렇게 있고,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혀가 있기 때문에 물질인 육신을 보고 ‘내가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색온이다.

 

육신만을 가지고 우리는 ‘나’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정신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 ‘내 마음’이라고 여긴다. 정신 또한 ‘내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인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는 첫째, 느낌, 감정 즉 수온이 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에는 첫 번째로 감정을 느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슬픔, 아픔, 절망, 기쁨, 행복감 등을 느낀다. 좋은 느낌도 느끼고, 싫은 느낌도 느끼며, 그저 그런 느낌도 느낀다. 이렇게 촉을 통해 ‘있다’고 여겨지는 ‘느끼는 존재’, ‘느끼는 마음’을 수온이라고 한다.

정신의 두 번째로는 생각, 사유, 사고하는 마음인 상온이 있다. 느끼는 것도 내 마음이지만, 판단하고 사유하고 추리하는 등의 생각 또한 중요한 마음의 작용이다. 개념 혹은 표상작용이라고도 하는데, 대상을 보고 어떤 것인지 이름을 붙이고, 표상을 부여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수온을 감성이라고 한다면 상온은 지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도 보면 감정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감성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성적인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세 번째로는 바람, 의지, 욕구라고 할 수 있는 행온이 있다. 어떤 행위를 일으키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거나, 어디에 가고 싶다거나, 가지고 싶다거나, 말하고 싶다거나 하는 바람, 욕구, 의지적인 마음의 부분이 있다. 이것은 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는 마음이기도 하다. 물론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 행온은 수온, 상온, 식온에 포함되지 않는 수많은 다양한 정신적용을 두루 포섭하고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주요한 작용이면서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단순히 의지 작용이라고만 알아 두자.

 

네 번째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인식하는 마음이 있다. 수상행식이라는 마음 작용 중에 가장 근원이 되는 마음으로,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인식하는 작용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대상을 파악하여 인식할 때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인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연 따라 인식이 생겨났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우리 안에 어떤 특정한 ‘인식하는 존재’가 있어서 대상을 그 ‘식’이라는 존재가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대상을 종합적으로 분별하여 알고 인식하는 마음을 식이라고 한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는 오온 각 지의 세부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법상 스님의 불교 교리 콘서트)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도)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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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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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오온

 

 

1. 오온의 성립

 

(1) 십팔계와 촉 –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실체

 

우리는 앞 장에서 십팔계가 성립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6가지 주관자아계와 6가지 객관대상계 그리고 6가지 의식계가 서로 계역을 이루어 나뉘어 져 있는 의식상태를 십팔계라고 한다고 했다. 이렇게 각각 6가지 주관계, 객관계, 의식계가 계역을 이루며 나뉘어 져 있다가 이 세 가지 계역이 합쳐져 접촉을 하는 것을 ‘촉(觸)’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언제나 함께 모여서 나타난다. 눈으로 색을 보게 되면 안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주관인 눈과 객관인 색, 그에 따른 본다는 의식인 안식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 계가 각각 존재하고 있다가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지는 ‘촉’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무언가를 인지할 수 있고,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나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냄새 맡을 때나 맛볼 때, 감촉을 느낄 때나 생각할 때 의식이 함께 접촉하면서 ‘무언가가 있다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눈은 있지만 무언가를 보고 인식하지 않으면 무언가 ‘보여지는 것이 있다’는 의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어도 ‘들리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즉 ‘촉’이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낌으로써 비로소 ‘무언가가 있다’는, ‘존재한다’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촉이란 단순한 육근과 육경과 육식의 접촉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의식,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의식을 말한다. 촉이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의식’이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촉을 ‘촉입처’라고 부르기도 한다. 입처란 십이입처에서처럼 결국에 우리가 소멸시켜야 할 허망한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도 열두가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지분 중에 하나로 ‘촉’이 나오는 것이다. 즉 촉을 소멸함으로써 결국 괴로움이 소멸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만약에 촉이 단순한 육근과 육경과 육식의 접촉이라면 촉을 소멸해야 괴로움이 소멸된다는 12연기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촉이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허망한 의식’이기 때문에 결국 소멸되어야 할 것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공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있고, 내가 만나는 세상이 있으며, 내 마음도 있고, 바깥의 물질적 대상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닌, 인연가합으로 연기되어 잠시 일어난 공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도 있다고 여기고, 대상도 있다고 여긴다. 왜 그렇게 여기는 것일까? 왜 실재로는 없는 공한 세상을 우리는 ‘있다’고,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촉’이라는 허망한 의식 때문이다.

 

눈이 있고 눈에 보이는 대상이 있으며 눈으로 그 대상을 볼 때 대상을 분별해 아는 의식이 생겨남으로써 이 세 가지가 화합할 때 비로소 ‘무언가가 존재한다’, ‘있다’는 허망한 의식이 연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볼펜을 던졌다.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볼펜임을 확인해 보고, 몸으로 볼펜의 감촉을 느끼게 된다. 눈으로 보고서 볼펜이라고 분별해서 아는 의식이 생겼기 때문에 ‘볼펜’이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의식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귀로 볼펜 던지는 소리를 듣고 이 소리를 감지해 볼펜 던지는 소리라고 인식하는 이식계가 함께 화합하면서 비로소 ‘어떤 소리가 들렸다’는 ‘있다’고 하는 촉의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몸으로 볼펜의 감촉을 느끼고 인식함으로써 ‘무언가가 있다’는 ‘존재’의 느낌인 촉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한다’고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다 이 ‘촉’의 작용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그렇고, 현대 물리학에서도 이 세상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텅 비어 공한 것임을 끊임없이 설하고 있다. 이렇듯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은 ‘있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무언가가 있다’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 바로 ‘촉’이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있다’,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계와 객관계, 의식계라는 십팔계가 인연 따라 모여서 ‘촉’함으로써 ‘무언가가 있다’라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지난 밤 천둥 번개가 치고, 요란하게 폭풍우가 내렸지만, 한 사람은 그로 인해 벌벌 떨며 걱정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났다고 치자. 후자의 사람에게 폭풍우와 천둥번개는 인식되지 않았다. 십팔계가 이 사람에게는 전혀 ‘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있었다’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천둥번개도 폭풍우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연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에게는 눈으로 폭우를 보고, 귀로 번개 소리를 듣고, 생각으로 온갖 두려운 생각을 품으면서 인식을 했기 때문에 십팔계라는 삼사가 화합하여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있었다’라는 ‘촉’의 생겨난 것이다. 전자의 사람에게는 촉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가 존재’했지만, 후자에게는 촉이 없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십팔계가 삼사화합하여 ‘촉’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 내 바깥에 무언가가 실재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허망한 중생심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내 바깥 세상에 천둥번개가 실체적으로 존재했다고 여기고, 그것을 인지하고 감지하는 내가 실체적으로 존재했다고 여기며, 그 천둥번개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이라는 내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십팔계와 촉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둥번개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감지하는 내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분별해서 아는 의식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주관계와 객관계와 의식계가 화합함으로써 그 인연 따라 촉이라는 ‘실재로 있다’라고 착각하는 망상이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일체 모든 것은 이와 같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잠깐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인연가합의 존재일 뿐이다. 인연가합이란, 인연 따라 거짓으로 합쳐져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사실은 그 무엇도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십팔계라는 인연이 화합하면 ‘있다’라는 촉입처라는 허망한 의식이 생겨나고, 그로인해 진짜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십팔계와 촉의 교리는 불교의 무아(無我), 공(空),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 삼법인(三法印) 등의 가르침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왜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하고, 공이라고 하는가? 왜 이렇게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실제로는 공하다, 무아다라고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바로 십팔계와 촉의 교리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불교의 존재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촉입처의 교리야말로 불교의 존재론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인연 따라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설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본래 공하지만, 인연 따라 연기 되어져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므로, 그것은 실체가 아니고, 고정된 자아가 없으며, 실체가 아니므로 그 어떤 존재에도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본래 없지만 없다는데 집착하면 인연 따라 있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기 때문에 있다는데 집착하게 되면 인연 따라 생겨난 허망한 것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중도적인 안목, 중도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법상 스님의 불교 교리 콘서트)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도)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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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라

    

여러 사람이 똑같은 거리를 걸었을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거리에서 본 것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똑같은 소리를 듣고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며, 같은 음식의 향기를 느끼면서 좋다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육입처는 외부에 있는 육경이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식대로 인식한다. 자기 마음에 끌리는 것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인식할 때 육근을 ‘나’라고 착각하는 육입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육근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경을 인식할 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원하고 욕망하는 방식대로 육경을 해석해서 보는 것이다.

 

‘나’라는 허망한 착각, 즉 아상이 생겨나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무엇이든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아집이고, 욕망이며 탐욕이다. 육입처라는 의식에서 이처럼 아상과 아집, 욕망과 탐욕이 생겨난다. 그래서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자기 욕심대로 바깥 대상을 선별해서 차별적으로 분별해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을 분별해서 인식하는 의식을 육식이라고 한다고 했다. 육식, 즉 마음은 언제나 대상을 분별해서 인식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 내가 관심가지는 것들과 관심 없는 것들, 나에게 도움 되는 것과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을 분별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우리의 식은 자기의 탐욕에 일치되는 것들만 받아들여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다면, 똑같이 산행을 했는데, 건축업자는 나무의 쓰임새만 보며 걸을 것이고, 사진작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으려는 마음으로 산길을 볼 것이며, 꽃 연구가는 꽃에만 눈길이 갈 것이다. 또한 마음이 괴롭고 우울한 사람은 숲길 또한 음침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마음이 기쁨에 넘쳐 있는 사람은 생기로운 숲과 달콤한 공기, 맑은 자연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산행 이후에 각자가 본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처럼 식이라는 분별심으로써 세상을 의식하게 되면, 저마다 자기의 욕심과 탐욕이 원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대상인 명색을 인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식대로, 자기가 만들어 놓은 대상을 인식할 뿐이다. 결국, 육식의 인식 또한 환영에 불과하며, 온전한 의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경전이나 법문들에서는 ‘분별심을 버려라’는 무분별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왜곡해서 볼 때, 왜곡된 자아관(안계 내지 의계)과 세계관(색계 내지 법계), 인식관(안식계 내지 의식계)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로 인해 온갖 분별, 판단, 비교, 평가 등이 생겨나며, 그 결과 우리의 삶이 복잡하고 괴롭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 삶의 모든 괴로움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괴로움은 사실 진짜 괴로움이 아니라 내가 괴로움이라고 분별, 왜곡하여 인식한 것일 뿐이다. 즉, 내 스스로 외부의 대상을 왜곡하고 분별해서 인식한 뒤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인식을 대상으로 괴로움을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내 내면에서 일어난 허망한 장난일 뿐이다. 진짜 괴로울 일이 있어서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공연히 마음속에서 의식으로 조작해 낸 거짓 괴로움을 가지고 그동안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안계 내지 의계)가 있고, 세상(색계 내지 법계)이 있으며, 내가 세상의 일로 인해 괴로웠다고 생각하며(안식계 내지 의식계) 세상을 원망하거나 못난 나 자신을 원망하고 살았지만(苦), 사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이 허망한 의식의 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진짜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괴로워 할 ‘나’도, 괴로움을 주는 ‘대상’도, 괴롭다는 ‘의식’도 모두가 식의 장난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허망한 식일 뿐이다. 그래서 뒤에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서는 ‘오직 식일 뿐’이라고 역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육식이라는 아상에 기초한 욕심으로 조작하고 분별하며 왜곡해서 보던 방식을 그저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분별심으로 보지 않고 무분별로써,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데 있다. 다시말하면, 육식이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그 어떤 것도 자신과 동일화하지 않은 순수한 의식으로써 다만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식이 ‘나’라는 자기동일시가 없을 때, 아상과 아집과 탐욕이 사라지며, 그로인해 나와 세계를 구분 짓는 분별심이 사라지면, 그 분별해서 인식하던 허망한 식 또한 사라지게 되고, 비로소 그 때 여여하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던 세상에 대해 아무런 시비도 붙이지 않고, 아무런 분별도 개입시키지 않은 채로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것을 지혜라고 하며, 유식에서는 전식득지라고 하여, 허망한 식을 지혜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뒤에 팔정도에서 언급하겠지만 이와 같이 세상을 분별심으로 허망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십팔계를 관하는 수행, 계분별관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선정 수행으로는 사념처가 있는데, 이 사념처 수행의 예비적 수행으로 오정심관이 있다. 오정심관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 아만, 분별이라는 다섯 가지 번뇌를 다스려 가라앉히는 수행법으로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계분별관, 수식관을 말한다.

 

이 가운데 계분별관은 아만이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수행법으로 십팔계의 18가지를 관함으로써 이 모든 것에 고정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며(무아)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흐르는 것(무상)일 뿐임을 알아차리는 수행법이다. 이 십팔계의 작용을 보고 이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아만과 무지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인 것이다.

 

눈으로 대상을 볼 때 인식이 일어난다. 여기에서는 십팔계 중에 안계, 색계, 안식계, 의계, 의식계가 함께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이 때 이 모든 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다면, 눈으로 대상을 볼 때, 눈동자가 갑자기 커진다거나, 초점이 흐려진다거나, 게슴츠레 해 진다거나 하는 등등으로 대상에 따라 우리의 눈동자도 변화하는데 이것을 관찰하는 것이 안계에 대한 관찰이다. 눈으로 보여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색경에 대한 관찰이며, 눈으로 대상을 볼 때 좋거나 나쁘다고 인식해서 보는 눈의 분별을 관찰하는 것이 안식계에 대한 관찰이고, 그러면서 의계와 의식계는 다른 들리고 냄새 맡아지고 감촉이 느껴지는 등의 나머지 감각활동의 도움을 받거나, 과거의 경험등을 떠올리면서 대상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비교하고, 분별하면서 인식하는 작용을 하는데 대한 관찰을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귀코혀몸뜻에서도 나와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 모두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계분별관의 수행법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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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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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십팔계

 

 

십이입처와 육식의 발생

 

위에서 육입처는 외부에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의식을 개입시킨다고 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며 생각하는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즉 십이입처에서 아상과 법상이 생긴다. 이렇게 육내입처에서 내부의 감각 및 지각 기능과 활동하는 것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아상이 생겨나고, 외부의 대상을 보고 ‘세계’라고 착각하는 법상이 생겨난다. 이런 착각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육내입처는 육외입처를 보면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욕망과 집착을 일으킨다. 아상이 활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십이입처는 ‘자아’와 ‘세계’를 나와 세상이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다. 그런데 자아와 세상을 나누고, 나와 너를 나누는 이 십이입처에서 나와 세상을 나누고 분별하여 인식하는 마음인 육식이 생겨난다.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육식이 생기는 것이다.

 

십이입처의 의식에서는 자아의식이 생기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보고 싶고, 좋은 소리만 듣고 싶고, 좋은 향기와 좋은 음식을 맛보기를 원하게 된다. 반대로 싫어하는 것은 멀리하고 싶고,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진다. 육내입처가 육외입처를 만나면서 좋고 나쁜 분별이 일어나고, 나에게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식의 분별해서 인식하는 작용, 식별해서 아는 작용이다.

 

무언가를 볼 때 보이는 대상에 대해 분별해서 인식하는 마음이 생기고, 들을 때 들리는 것에 대해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 생기며,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식별하고 분별하여 대상을 아는 마음을 식(識)이라고 한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분별하는 마음을 안식(眼識), 귀로 들리는 것을 분별해 아는 마음을 이식(耳識), 코에 냄새 맡아지는 것을 분별하는 마음을 비식(鼻識), 혀로 맛보아 지는 것을 분별해 아는 마음을 설식(舌識), 몸으로 감촉되어지는 것을 분별해 아는 마음을 신식(身識)이라고 부르며,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오식에서 들어오는 분별심들을 종합적으로 분별해 아는 마음을 의식(意識)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십이입처라는 허망한 의식이 생겨나면 십이입처라는 인연 따라 육식이 연기한다. 육식은 쉽게 말해 어떤 대상을 식별해서 아는 마음이고,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며, 우리가 보통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초기불교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을 이름은 다르지만 동의어로 보고 있으므로, 쉽게 생각하면 의와 식을 모두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라는 허망한 의식에서 육식이 생겨나면, 이 십이입처와 육식을 인연으로 십팔계라는 새로운 계(界)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계란 ‘경계를 나눈다’는 의미로, 같은 종류로 묶어 경계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십팔계는 자아계 내지 주관계로써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의 6가지와 대상계로써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의 6가지, 그리고 의식계로써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의 6가지로 합쳐서 18가지를 말한다. 육근 내지 육내입처가 십팔계에서는 내육계가 되고, 육경 내지 육외입처가 외육계가 되며, 새롭게 의식계인 6가지 의식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는 것은 바로 이 18계의 첫 번째인 안계도 없고, 나아가 18계의 마지막인 의식계도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십팔계가 모두 공하다는 뜻이다. 즉 십팔계는 다만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는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분별해서 아는 인식 주체라는 착각, 육식

 

이처럼 우리는 보통 육식을 ‘마음’이라고 이해하며, 이는 대상을 아는 의식이다. 다시말해, 육내입처에서 육외입처라는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육식이다. 내가 세상을 접촉하면서 받아들여 인식하다 보니 내 안에 ‘마음’ 혹은 ‘의식’이라는 것이 별도로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단순히 눈이 대상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라는 신체의 시각기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눈을 통해 내 안에 실재하고 있는 ‘의식(마음)’이 세상을 본다고 여기는 것이다. 눈으로 볼 때, 눈으로 봐서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하고 아는 ‘놈’이 있다고 여기게 되고, 바로 그 인식하는 마음을 ‘식(識)’이라고 부른다.

 

눈이 대상을 볼 때 보는데 따른 분별과 인식이 생김으로써 내 안에 보는 주체인 ‘보는 놈(안식)’이 있다고 여기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는 듣는 주체인 ‘듣는 놈(이식)’이 있다고 여기며, 맛보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할 때도 각각 그것을 인식하는 ‘식’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식을 나의 주체라고 착각하게 된다. 경전에서도 “어리석은 중생들은 식을 ‘나 자식’이라고 착각하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해, 어떤 의식하는 주체가 내 안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눈으로 대상을 볼 때는 보는 의식으로 나타나고, 귀로 들을 때는 듣는 의식이 되는 등, 각각의 안이비설신의가 대상을 접촉할 때마다 그 ‘의식하는 놈’인 ‘식’이 눈으로도 귀로도 코로도 혀로도 몸으로도 뜻으로도 나타나면서 바깥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내 안에 인식하는 주체인 ‘식’이 있다는 착각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인식활동을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라고 하고, 인식대상을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라고 하며, 바로 그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 주체를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라고 함으로써 십팔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육식이 일어나는 것은, 의식 주체가 내 안에 진짜로 있어서 눈으로 볼 때 안식계 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십이입처라는 허망한 착각으로 대상을 인식할 때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 따라 허망하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공한 것일 뿐이지만, 중생들은 어리석은 착각으로 인해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식’이라는 실체로 여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식을 내 안에 영혼처럼 생각하면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지속되는 실체로 여기고, 나아가 죽고 난 다음에도 다음 생을 받는 영원한 존재라는 주장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뒤에 있을 유식사상은 이 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제7말나식과 제8아뢰야식설까지 식사상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렇게 내 안에, 대상을 분별해서 의식하는 마음인 식이 있다는 육식의 분별심이 생기면, 내 바깥에는 이름과 형태를 가진 의식의 대상 즉 명색(名色)이 있다는 생각이 만들어진다. 육식이라는 분별심이 대상을 이름 붙여 인식하고 형태로써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육식의 대상을 경전에서는 명색이라고 부른다. 육근의 대상은 육경이지만, 육식의 대상은 명색이 되는 것이다. 즉 육근이라는 감각기능, 감각활동은 육경이라는 감각 대상을 상응하지만, 육식이라는 분별해서 의식하는 마음은 이름과 형태를 가진 것들로 대상을 분별해서 의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뒤에서 살펴 볼 12연기의 구조와도 연결되어 있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등으로 이어지는 12연기의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어리석음, 즉 무명으로 인해 육내입처를 나라고 여기고, 육외입처를 세계라고 여기는 허망한 착각이 생겨났고, 그러한 십이입처라는 허망한 착각이 생기는 과정에서 아상과 욕망, 탐욕이 생겨나게 됨으로써 아상에 기초한, 이기심에 기초한, 탐욕을 채우기 위한 행(行)이 시작된 것이다. 눈귀코혀몸뜻으로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헤아리는 것 자체가 행이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행, 귀로 소리를 듣는 행,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접촉하며, 뜻으로 헤아리는 행을 하게 되면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눈으로 보는 의식, 귀로 소리를 듣는 의식 등의 육식이 있다는 착각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무명-행-식이 일어난 과정이다.

 

그렇게 내 안에 보고 듣고 맡보는 등 세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있다는 착각이 생겨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안에는 ‘식’이 있고, 내 바깥에는 그 대상인 ‘명색’이 있다는 허망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처럼 무명-행-식-명색의 과정에 이어 순환과정으로써 육입이라는 착각, 촉이라는 착각, 수-애-취-유-생-노사라는 12연기의 순환구조가 이어지는 것이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12연기를 살펴볼 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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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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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입처)이 만들어낸 세상

 

청정한 육근으로 인식되는 세상은 괴로울 것이 없지만, 육근이 오염되고, ‘나’라는 관념이 개입되게 되면 육근에 대한 의식이 육내입처로 바뀌면서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것이 고의 원인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12연기의 지분 중 하나인 육입(육내입처)이 왜 괴로움의 원인인지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면 육근이 오염되면서 어떻게 육입처의 의식으로 왜곡되는지를 살펴보자. 앞에서 안이비설신 오근이 각자 자신의 대상을 인식한 것을 가지고 의근(마음)은 종합하여 사람, 동물, 과일, 산과 들 등 삼라만상으로 인식하며, 나아가 행복, 질투, 고요, 기쁨 등의 정신적인 것들 또한 인식하게 된다고 했다. 의근의 대상은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것,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근의 활동을 살펴보면, 의근은 외부에 있는 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대상들을 오근의 도움을 받아 자기 식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함으로써 ‘내가 있다’는 아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의근에 아상이 개입되어 의입처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것을 보았더라도 사람에 따라 각자 그 장소에서 인식한 것이 다르고,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부의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조합되고 종합된 ‘의입처가 만들어 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입처는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들어 낸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외부의 육경 또한 이처럼 내 바깥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며, 외부라고 여겨지고 있는 또 다른 내면의 세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환영의 가짜 존재, 인연화합의 존재를 존재라는 말 대신 ‘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외부의 세계가 어떻게 내가 만들어낸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외부에는 독자적인 외부의 세계가 있고, 그 독자적인 외부 세계를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인식할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외부세계가 진짜로 실체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양자역학에서도 이 세상 만물은 진동하는 에너지이며 파동일 뿐이고, 실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외적인 대상들은 그것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지 않으며,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상태에 따라, 인연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실재로 그런 상태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에서 그런 것을 보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도로 보느냐에 따라 이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내가 의도했던 그 부분대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나(육근)도 이 세상(육경)도 또한 내가 내면에서 인연 가합으로 조작하여 만든 것일 뿐이다.

 

만약에 내 바깥에 고정된 실체로써의 세상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보는 것이라면, 누가 보든 보이는 세계는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안근으로 보는 세상과 자외선까지 볼 수 있는 물고기나 꿀벌이 보는 세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물고기들은 자외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눈에는 똑같이 생긴 물고기지만 물고기들은 물고기마다의 자외선의 얼룩무늬로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뱀은 눈 아래 있는 골레이세포라는 특수한 신경 세포를 통해 적외선을 감지한다고 하니, 적외선을 감지하는 뱀이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 또한 천안이 열린 수행자라면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신들의 세계나, 화엄성중의 세계, 영가들의 세계까지를 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세상이 정해진 하나의 모습으로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면, 이렇게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정해진 실체가 아니며, 보는 것에 따라서 보여지는 것일 뿐이기에, 즉 보는 이의 마음에서 연기한 것일 뿐이기에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파동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일 뿐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구족되어 있고, 모든 가능성이 다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져 있는 무한 가능성을 세계를 자기의 의식 수준에서만, 자기라는 내적인 필터를 통해 걸러서 볼 뿐인 것이다. 즉, 우리의 육입처라는 제한되고 한정된, 허망한 의식을 통해서만 육경이라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보는 자에 따라서 어떻게도 보여질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장이다. 그래서 육입처라는 허망한 착각의 의식이 소멸되게 되어 육근이 청정해진다면, 부처님이 세상을 보는 것 처럼 육안만이 아닌 천안, 법안, 불안을 모두 구족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눈, 불안(佛眼)은 안입처라는 허망한 분별에 갇힌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무한 가능성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깨닫지 못한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세상에 대해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안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해된 세상, 나에게 파악되어진 제한된 세상을 안 것에 불과하다. 양자역학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전자를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측정하는 관찰자나 관찰도구 등 관찰되어지는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모든 과학적 연구 또한 아무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라 할지라도, 사실은 특정 조건과 상황 속에서의 진실일 뿐이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체’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인 십이입처를 말할 뿐이다. 즉 나에게 감지되고, 인식되어진 것만을 일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일체란 12처이니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의와 법이다. 만약 누군가가 고타마가 설한 이 일체 이외에 다른 일체를 설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일 뿐, 물어도 알지 못하며 의혹만 증가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육내입처로써 우리가 직접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개념적으로만 있는 존재일 뿐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말일 뿐이며, 끊임없는 논쟁만 만들어 낼 뿐이고, 의혹만 증가시킬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소득도 없다. 그것은 육내입처의 인식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도 불성도 윤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입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바라문교에서 말하고 있는 아트만이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심지어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 여래장이라는 것 또한 사실은 십이입처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만 말뿐인 개념적 존재일 뿐 ‘일체’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는 방편으로 여래장, 불성, 주인공, 참나, 진아, 대아, 본래면목 등을 설정해 두고 있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말로 표현을 하든 십이입처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안이비설신의에서 인식되지 못한 범부 중생들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없는 것이다. 실재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초기불교의 무아는 그 어떤 것도 실재적으로 ‘있다’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바로 이 무아, 연기, 공을 뒷받침하기 위한 교리가 바로 초기불교의 모든 교리들이고 이 십이입처의 교리 또한 무아를 뒷받침하고 있다. 십이입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불성이든, 본래면목이든, 여래장이든 그 모든 것들은 다만 말일 뿐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윤회의 가르침 또한 십이입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범부중생들에게는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이나 내생이 있는가? 지옥이나 천상이 있을까? 알 수 없다. 십이입처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주관인 육내입처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성도, 여래장도, 전생도 내생도, 지옥도 천상도 모두가 없는 것일까? 없다면 왜 경전에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중도의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없다고 고집할 것도 없고,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서도 안 된다. 없다고 하지만 있고, 있다고 하지만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주머니 속에 귀한 보석(불성)을 넣고 다녔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을 거지처럼 살다가 죽었다고 치자. 이 사람에게 보석은 있었는가? 없었는가? 십이입처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답일까?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해도 틀렸고, 없다고 해도 틀렸다. 있다는 사실에만 집착해도 잘못이고, 없다는 사실에만 집착해도 잘못이다. 어떤 한 가지를 고집하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다. 있다는 말로도 없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언어도단이며,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중도적 견해다. 당신에게 불성은 있는가 없는가? 침묵할 수 있을 뿐이다.

 

윤회는 어떨까? 전생과 다음생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십이입처에서 본다면 윤회는 없다. 내 의식에서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사유에 의해서 개념적으로 알려진 것일 뿐이다. 즉 우리의 의식에서 윤회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윤회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윤회에 대한 법은 설할 지언정 우리에게 윤회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중생들에게 그것은 허망한 말 뿐인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논쟁만 일어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회라는 것 또한 깨닫고 보면 한낱 꿈속의 일처럼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회를 무수히 했을지라도 그 윤회의 삶 자체도 비실체적인 꿈이며 신기루 같은,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인연 따라 소멸하는 아지랑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일체(십이입처)는 일체가 아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길을 걷다가 나무 그림자를 귀신으로 착각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 길이 지름길인줄 알지만 귀신이 두려워 한동안 그 길로 다니지 못하였다. 실제 있지도 않은 귀신을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힘들게 먼 길을 돌아 다니다가 어느날 실제 귀신이 아니었으며 자신이 착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 귀신은 실제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물론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분명 있었고,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재는 없는 것이지만 육내입처에는 분명 거짓으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무명 역시 이와 같다.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무명이라는 실체적인 어떤 것이 내 안에 있어서 나의 깨달음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무명이라는 것은 실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착각일 뿐이다. 즉 이 착각은 십이입처에서는 분명 있는 것이기에 ‘일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십이입처라는 의식 자체가 허망한 망상이기 때문에 망각 속의 ‘일체’인 것이다.

 

이처럼 십이입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일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십이입처 또한 허망한 의식일 뿐이다. 어차피 나도 내 바깥의 세계도 모두가 다 환영에 불과하다. 비실체적이고 공한 환영의 세계를 우리는 허망한 착각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내가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으며, 인식할 수 있는 만큼의 자아와 세계만이 내게 알려진 존재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일체라는 존재계 또한 실체가 아니다. 진짜가 아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의 의식수준에 있어서는 그것이 전부(일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를 일체라고 하는 것은, 십이입처만이 실체적인 전부이기 때문에 일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전부(일체)’인 것이기 때문에 일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반어적으로 우리가 일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정말 실체적인 ‘일체’ 모든 것인 줄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의식 수준에서 감지된 ‘제한된 일체’임을 알아야 한다.  

 

[붓다수업] 중에서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