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내 주위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맑은 '한마음'을 내어 줍시다.

언제나
'나'를 위하고
'나'를 치켜세우려는
이기적인 마음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이기적인 마음은
잠시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지만
그 마음은 잠시일 뿐
크게 보면 내 복을 한없이 갉아먹는 어리석음입니다.

이타적이며 헌신적인 마음은
당장에 힘들고 손해보는 것 같아도
넓게 보면 내 복을 한없이 증장시키는 지혜입니다.

남을 위한 이타적인 마음을 많이 내면
그에게 축복됨은 물론이지만
먼저 내 마음이 맑아집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 기도하는 마음은 남의 마음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에
먼저 나의 마음이 맑고 향기로워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부처님의 마음은 항상 머물러 있기 마련입니다.
가장 싫어하는 직장 상사의 마음에도...
나를 괴롭히는 친구의 마음에도...
돈 떼먹고 달아난 이의 마음에도...
나의 부처님은 뚜렷이 머물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그 맑은 마음이
우주 법계의 모든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입니다.

내게 잘 해주는 이에게는
누구라도 이타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를 괴롭히는 이에게 하는
작은 이타심은 너무도 힘이 듭니다.
부처님 마음 연습하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듭니다.

오늘은 미워하는 이와의 나쁜 인연을 끊는
수행을 해 보기로 합시다.
누구든 내 주위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욕하고 미워하고...
그러지만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욕하고 미워하는 그 마음은
내 마음이기에 내가 답답한 것입니다.
이제 그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는 나의 부처님 이십니다.
나의 악한 마음이 그의 행동에 비춰진 것입니다.
그의 행동에서 나의 악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루... 이틀...
계속해서 그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몇 번이고 그에게 다가가 칭찬을 해 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수고로움도
훌륭한 나의 수행이며 기도입니다.

순간 순간 '저 놈은 나쁜놈인데...'
하는 마음이 올라올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나무아미타불...'하며
부처님께 다시 기도를 드립니다.

"저 분이 나를 성숙시키는 부처님이십니다.
이런 나쁜 모습으로 기꺼이 나투어 주신
부처님의 하늘같은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그 마음에
나를 위한 이기심은 녹아내릴 것입니다.
'나'를 치켜세우기 위한 아상이 녹아내릴 것입니다.

불교는 이 지독한 아상(我相)과의 전쟁입니다.
'나다'하는 아상이 있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나'의 실체를
무아(無我)라고 하셨습니다.
아상을 비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있기에 나를 치켜세우려 하고
내가 높아지고 싶은데 잘 되지 않으니
분별이 일어나고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수행자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아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상을 비워버리는데
가장 훌륭한 수행이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를 모두 비워버리고
진정 '남'을 위해
나를 낮추고... 비우고...
상대방을 한없이 높여주는 가운데...
상대방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속에...
진정 '참 나'는 한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행자는 기도를 합니다.
남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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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과학으로 본 시크릿, 과학으로 본 불교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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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제 23, 정심행선분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보리를 얻으라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정심행선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앞서 6분 정신희유분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선법이란 악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선한 법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 즉 ‘지혜로운 마음 집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고 있다. 무상정등정각의 완전한 깨달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심행선은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발 붙일 틈이 없다. 높고 낮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선하고 악하다거나, 크고 작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나아가 어리석고 지혜롭다거나, 중생과 부처라거나, 생사와 열반이라는 개념조차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개념일 뿐 진실한 법의 바탕에서는 그 모든 차별이 대 평등의 용광로 속에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보라. 모든 것이 차별과 나뉨이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높고 낮은 구분을 두어 차별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더라도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부터 꼴지까지 등수로써 높낮이를 매겨 차별하고, 기업도 대학들도 무슨 무슨 평가의 틀에 따라 등수를 매겨 세계에서 몇 위의 기업인지, 대학인지를 가늠하곤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차별된 어리석은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모두가 직장에서 서열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고, 점수화되어 관리되고, 나아가 먹거리들 또한 어떤 틀에 맞춰 몇 등급인지가 정해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높고 낮은 틀을 정해두고 그 결정에 따라 사람들의 등수가 정해진다. 또 그 등수에 따라 사람들 서로간에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 높고 낮은 차별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투쟁하고 싸우고 심지어 국가간 인종간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 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곳 낮은 계층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만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 달려있고, 반대로 괴로움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열등에 놓여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이 차별이 모든 세상의 괴로움을 몰고 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법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그렇듯 높고 낮음을 차별하는 거기에 있지 않고 대평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만생명 대평등의 가르침 속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차별 뿐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사람과 자연간의 높고 낮은 차별의 마음이 지금 이 세상을 극단적인 환경 악화로 인한 멸망 위기까지 몰고 왔다. 신과 인간도 차별되어선 안 되고, 인간과 동식물도, 인간과 자연도 차별되어선 안 된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이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이요, 온전한 법이고 불이고 신으로써 대평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 평등의 가르침,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의 땅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 대 평등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 존재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기 때문에 너와의 차별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차별이 생겨남으로써 나아가 우리나라와 남의나라,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등의 모든 부가적인 차별들이 연이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차별의 원인은 바로 아상에 있다. 아상을 타파하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높고 낮은 차별도 생길 수 없다. 내가 있어야 나를 더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으며, 내가 높아졌을 때 오는 기쁨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인데, 나라는 아상이 소멸되고 나면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남이란 차별이 없다면,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둘이 아닌 한생명이란 자각이 있다면 나와 남 사이를 높고 낮게 나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높고 낮은 차별 없이 일체만유, 만생명이 대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구마라집의 한역의 의미로 보자면 착한 법을 닦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착한 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악한 법에 상대되고 차별되는 선한 법이기에 이 또한 높고 낮은 차별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법의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의 가르침’ 즉 ‘마음 집중’의 수행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이 일체의 마음 집중 수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이해해 보면, 이 법 즉 진리의 가르침은 높고 낮음도 없이 대 평등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높고 낮음 없는 대 평등의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에서 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체 상의 타파는 마음 집중의 수행을 통해 온다. 그러니 다시 돌려 말하면, 높고 낮음 없는 대평등의 진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집중의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왜 불교의 가르침이 무차별이요 무분별인지, 무아이며 무아상인지, 왜 대평등인지,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분이 바로 정심행선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부처님은 자비로운 우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났더니 ‘아! 그러면 마음 집중의 수행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집중’의 수행에 집착하고 있을 중생들을 위해 선법 즉 마음집중의 수행 또한 그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 거기에 집착할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마음집중의 수행,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이라는 수행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여 그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도 이름 뿐인 것이지 거기에도 빠지면 안 된다. 요즘 위빠사나니 관수행이니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 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의 수행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하여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고 있는 부분이다.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과 간화선을 공부하는 수행자 혹은 염불이나 진언, 독경이나 절 수행 등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때때로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한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자신의 수행법이 더 우수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다툼도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대평등의 법을 거스르는, 높고 낮은 차별심에서 나왔으며, 나아가 어떤 한 수행법에 집착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 금강경에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선법도 선법이 아니니 이름이 선법일 따름이다. 즉 마음집중이란 수행도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니 다만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처럼 분명하고 자비롭다.

높고 낮은 일체의 차별심을 거두어 대평등으로 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찌 수행법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에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법에 다름 아니다. 즉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염불도 참선도 진언도 독경도 절 수행도 그 모든 수행도 모두 그 중심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에 있다. 염불하는 수행자가 마음을 염불에 모아 주의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과 번뇌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찌 염불수행일 수 있겠으며, 절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지 않고 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절을 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 수행이 아니라 단순한 다리운동에 불과할 것이고, 염불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입 운동이고 소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간화선도 마찬가지다. 화두를 의심하며 그 의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분별하고 따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화두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든 수행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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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무법가득분
얻을 법이 없다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須菩提 白佛言 世尊 佛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爲無所得耶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뇩多羅三먁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는 것은 곧 얻으신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에서는 본래 얻을 법이 없음을 밝혔다.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무아(無我)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 아님’의 이치, 무아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바로 모든 수행자가 실천해 나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무아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바로 법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또 다시 그 법에 집착을 하게 된다. 법을 깨닫기 위해 애쓰게 되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이 분에서는 법을 깨달아 얻겠다는 그 생각까지도 모두 놓아버릴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얻을 법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는 것은 곧 얻으신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것은 곧 앞서 말한대로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는 말이다.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얻으신 정각의 깨달음에 대해 그 또한 얻으신 바가 없는 것이 아닌가를 묻고 있다.

그동안 앞선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복덕도 얻을 것이 본래 없고, 마음도 없고, 나도 없으며, 어떤 한 법도 없고, 부처님의 형상 또한 실체가 아닌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이 다만 인연따라 신기루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듯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바로 수보리 앞에 있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부처님께서 얻으신 정각의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얻은 바가 없다는 말인가?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생각에는 부처님은 우리들 범부 중생과는 다른 그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떤 ‘법’을 얻지 않고서야 어찌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 생각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없다고 하셨다. 즉 이미 모든 존재는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보신 것이다. 이미 우리는 부처요, 깨달음의 법신 그 자체인 것이다. 더 이상 깨닫기 위해 애쓰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완전한 생명을 부여받았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완전한 평화, 완전한 고요, 완전한 행복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수행을 해서 깨닫고 난 다음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린 누구나 완전한 부처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찌 또다른 무슨 ‘법’을 얻고자 하겠는가. 이미 우리의 존재 자체가 법의 몸, 법신이요, 진리 그 자체일진데 또다시 법을 얻고자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얻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바로 그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는 그 이치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우린 이미 완전한 부처요, 완전히 텅 빈 대자유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괴로움과 아픔, 질투와 외로움, 슬픔과 번뇌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부처라면 왜 우리는 이런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모두 꿈과 같은 것이다. 꿈 속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배신당하고 슬퍼할 지라도 꿈을 깨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우리의 현실 또한 그대로 꿈인 것이다. 우리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픔의 실체이거나, 전적인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다만 꿈인 것이다. 꿈을 꾸고 있더라도 괴로울 땐 괴롭고 슬플 땐 슬프지 않는가. 그러나 그건 다만 꿈일 뿐, 실제로 아픈 것이 아니고 슬픔도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연극의 주인공과도 같다. 연극은 그야말로 연극일 뿐이 아닌가. 연극의 주인공이 슬프고 아픈 연기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 실제로 아픈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우리 또한 삶에서 나에게 주어진 연극을 잘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린 저마다의 연극의 주인공이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중인공에 있는 것이다. 나를 깨달으면 곧 온 우주 법계를 깨닫는 것이니 어찌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찌 나라는 존재가 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린 모두 주인공이요, 이 법계의 중심에 있다. 중심에 있으면서 변두리에 있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법계 그 자체요, 부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연히 스스로 집착하고 욕심을 일으켜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왜 이렇게 인생은 괴로운 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스스로 욕심을 만들고 집착을 만드니 그로인해 괴로운 것인데,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부처님께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빈다고 그것이 행복해 질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행복했었다는 그 사실만 깨닫고, 욕심과 집착은 내가 허상이 실체인 줄 착각하여 만들어 낸 것인 줄 올바로 깨달으면 그 뿐이다.

어떤 한 이성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라. 본래부터 내 여자, 내 남자가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 본래부터 절대적인 내 여자, 내 남자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인연따라 이번 생에는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애인도 되는 것이고, 또 다음 생이나 전생에는 또다른 사람의 아내요 남편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사람이 이번 생에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윤회를 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보통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다인 줄 알고, 그 사람만이 나의 인연인 것 같고, 그 사람 없으면 안 될 것 같고 못 살 것 같이 느끼지 않는가. 그러나 그 사람과의 사랑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또 어떤가. 옛 사랑은 잊혀지고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지 않는가. 물론 여전히 전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괴로울 것이지만. 그 애착과 집착만 끊어버리면 또 다른 사랑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의 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에 대한 집착이고 애착이다. 즉 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 ‘내 여자’ ‘내 남자’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다. 그건 누가 만들었는가. 본래부터 고정되게 나에게 있어왔는가. 그렇지 않다. 내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랑하는 감정, 애착의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헤어지게 되었다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그 원인도 나에게 있고 그 해답 또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붙잡아 내 것으로 하고자 애착을 내었으니 붙잡은 그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나인 것이다. 그걸 어찌 부처님께서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은 내 마음인데. 내 마음 내 스스로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방하착, 그 집착을 놓을 수 있어야 내 마음의 괴로움도 녹아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으면 나만 괴롭다. 때로는 그 괴로운 마음, 질투의 마음이 생각지 못한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지 않은가. 못 이룬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떠나갔다는 이유로 해치려 하지를 않나, 그 모두가 스스로 한 사람을 택해 집착을 하면서 그 사람을 ‘내 사랑’으로 붙잡아두려는 마음에서 시작된 불행이다. 그러니 그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일 뿐이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해서 마음에 집착과 애착을 놓아서 다시 편안해 졌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괴로움을 없앤 것인가. 물론 없앤 것이기는 하지만, 본래부터 없던 괴로움을 제 스스로 만들었다가 그 괴로움에 스스로 아파하다가 다시 그 괴로움을 놓아버린 것이 집착이 본래부터 없던 사람이 보기에는 참 공연한 일을 벌인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공연히 제 스스로 집착하고 그로인해 아파하고 다시 그것을 놓아버린 것이니 아무 일 없는 사람에게는, 집착을 애초부터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 일을 꾸민 것이 되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은, ‘아무 일 없다’는 것이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다. 다만 이 세상에 이처럼 수많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은 공연히 스스로 붙잡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일조차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본래 고요하다. 아무 일도 없다. 괴로움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괴로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신기루처럼, 환상처럼, 제 스스로 집착을 만들어내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내 것이 안 되니 괴로워하고, 혹은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잠시 기뻐하다가, 언젠가 다시금 그 집착의 대상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 낸 집착의 대상은 어떤 것도 예외없이 모두 언젠가는 소멸되고 만다. 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하고 마는 것들이다. 항상하지 않아 제행무상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제법무아이며, 그렇게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괴로움인 것이다. 즉 일체개고인 것이다. 그러나 항상하지 않아 실체가 없는 줄 올바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가 텅 빈 고요함이요 열반적정의 순간인 것이다. 즉,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기 때문에 무집착하고 이미 집착한 것은 방하착하면 그것이 바로 열반적정의 깨달음이란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께서 깨달은 어떤 법이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집착을 만들어 내지 않으셨다. 스스로 ‘나다’하는 아상을 만들지 않았으며, ‘내 것’이라는 소유의 아집을 일으키지 않으셨다. 스스로 집착과 애착, 욕심과 번뇌를 만들지 않았는데 다시 놓을 것이 무엇인가. 다시 놓을 것도 없고, 집착을 버릴 것도 없으며, 아상을 버릴 것도 없고, 다시 내 어리석음을 없앨 것도 없다. 이미 처음부터 텅 비었고, 고요했으며, 열반적정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법을 별도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사실은, 본질에 있어서는 우리들 또한 이미 깨달아 있다. 이미 텅 비어있고, 고요하며, 열반적정에 머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낸 꿈같고 공연한 집착만 놓아버리면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의 본래 생명자리인 불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귀의(歸依)다. 돌아가 의지함이다. 불법승 삼보에게 귀의한다는 것이 이 의미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며, 청정한 수행자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내 안의 자성부처님께 돌아가고, 내 안의 이미 구족되있고 충만한 가르침에 돌아가 의지하며, 내 안의 자성청정한 수행자의 성품으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실은 돌아갈 것도 없다. 온 곳이 없으니 갈 곳도 없다는 말이다. 다시 갈 곳도 없고, 다시 깨달을 것도 없이 다만 알면 된다. 내가 공연히 집착하여 잡고 있었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자각하면 된다. 공연한 집착과 착각, 이것을 무명, 즉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무명만을 없애면 본래 밝은 지혜가 드러난다. 이렇듯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요,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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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비설소설분
설함 없이 설하다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則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내가 법을 설했다’는 생각을 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내가 법을 설했다’는 그런 생각을 내시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고 하지만 법을 설한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에 다만 이름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있어서 다음 세상에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비설소설은 설하되 설한 바가 없는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하나 설한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하나 법을 설할 주체로서의 여래 또한 없음을 아울러 말하고 있다. 이렇게 설할 법도 없고 설할 주체인 여래 또한 공하다고 하는 것에서 이 분의 가르침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어 그 설한 법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설법의 대상인 중생들 또한 본래 공함을 밝히고 있다.
설법을 하려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법을 설하는 자 즉 ‘여래’와 듣고 믿고 따르는 자인 ‘중생’,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갈 ‘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비설소설분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텅 비어 있으며 실체 없는 공성임을 밝힘으로써 ‘설하되 설한 바 없는 이치’를 설함 없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구마라집과 현장 역에서는 세존과 수보리의 대화 형식이 아닌 세존의 직설로 옮기고 있으나 산스크리트 원전에서는 이상에서와 같이 세존과 수보리의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세존의 직설로 해석하는 것 보다 원전에서와 같이 대화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해석할 때 그 이해가 더욱 빠르기 때문에 산스크리트 원전의 해석 방식을 따랐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내가 법을 설했다’는 생각을 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내가 법을 설했다’는 그런 생각을 내시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는 ‘나’가 없다. 완전한 무아(無我). 본래 내가 없음을 온전히 체득하여 각찰(覺察)한 이가 바로 여래요, 부처다. 내가 없다는 것(無我)은 곧 ‘비어있음’을 의미하며, 공성(空性), 연기, 중도, 무상(無常), 무상(無相), 무주(無住)를 의미한다. 즉, 나라는 실체가 없어 공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의 극단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다만 이렇게 세상에 나도 있고 너도 있으며 세상도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유는 연기하기 때문인데, 수많은 인연들이 모여 잠시 물거품처럼, 꿈처럼 잠시 만들어졌다 사라질 뿐인 것이다.

그건 부처님께서 내가 없음을 깨닫고자 애쓴 결과가 아니다. 본래 이 세상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라는 것, 삼라만상 만물이라는 것이 우리 눈에 보기에는 ‘있는’ 것 처럼 보이고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과 존재 또한 분명 이렇게 우리의 오감, 육감으로 느낄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은 ‘있다’고 착각을 하며 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모든 존재의 이면을 살펴보라. 어느 하나 항상하는 것이 있는가, 죽지 않는 것이 있는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언제까지고 변치 않는 것이 있는가,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곳이 있는가, 누구나 잠시만 사유의 뜰에 비질을 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곳에서 어찌 고정된 실체의 ‘나’를 찾을 것인가. 지금 눈에 보이는 나는 다만 인연이 모여 잠시 잠깐 물거품처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점을 깨달은 분이 부처요 여래다. 나 없음의 도리를 깨달으신 분이 부처님이다. 나 없음의 이치를 깨달으신 분께서 ‘나’를 도모하며 살고자 하겠는가. 어느 곳에서 ‘나’를 내세우고자 하시겠는가. 내가 법을 설했다거나,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거나, 내가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겠다거나, 내가 한 종교의 교주가 되겠다거나, 나의 종교 교세를 확장하고 신도를 늘리겠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을 낼 수 있겠는가. 도저히 그런 생각이 일어날 수 없다. 만약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건 여전히 아상에 갇혀 있다는 증거이고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는 여래가 아니며 부처가 아니다.

요즘 이 시대를 보라.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이들이 종교를 지도하고 있으며, 종교를 신행하고 있는가. 참된 종교 지도자, 수행자, 성직자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스스로를 뽐내지도 않고, 자신의 이름을 널리 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교세를 확장하려는 생각이 없고, 신도를 많이 모으려는 시주금을 많이 모으려는 생각이 없다. 종교 본연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가 얼마나 올곧은가, 얼마나 진리와 합일하고 있는가, 얼마나 부처님의 하느님의 가르침과 일치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려거든 얼마나 상에 갇혀있지 않은가, 얼마나 나를 내세우지 않는가, 얼마나 내 욕심과 집착을 채우려는 생각이 없는가를 보라. 그것이 바로 진리를 걷는 길이요, 부처님과 하느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처럼 내세울 내가 없고, 욕심과 집착을 채울 내가 없으며, 법을 설할 내가 없다. ‘여래가 법을 설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 중생들 쪽에서 바라본 생각일 뿐이지, 여래 당신은 그런 생각이 없다. 법을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법을 설하면서도 ‘내가 법을 설했다’는 그런 아상에 갇히지 않는다. 설함 없이 법을 설한다. 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하신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함이 없는 행이다.
만약 누군가가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법을 설할 여래라는 주체를 내세워 말한다면, 그는 전혀 여래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는 자요, 여래를 비방하는 자다.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한다는 말은 법을 설할 여래가 있다는 말인데, 그 말은 여래가 무아를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 없음’을 깨달은 자가 여래인데, ‘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래에게 깨닫지 못한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전혀 여래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는 자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법을 설할 주체인 ‘여래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법을 설할 ‘여래’도 없고, 설할 바 ‘법’도 없으며, 설한 법을 들을 ‘중생’도 없다는 비설소설분의 첫 번째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고 하지만 법을 설한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에 다만 이름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법을 설할 ‘여래’가 없다는 가르침에 이어, 이 부분은 설할 바 ‘법’ 또한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래가 법을 설한다고 하지만 사실 설한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다. 다만 이름하여 법을 설한다고 했을 뿐이다.
아무리 순수 무결한 진리의 법이라 하더라도 그 법을 진리라고 고정 짓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법으로써의 자격을 상실하고 만다. 법은 고정될 수 없고 집착될 수 없다. 법을 법이라고 하면 더 이상 법이 아니다. 다만 이름을 법이라고 한 것일 뿐.

그러니 어떠한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불법만이 참다운 법이라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법을 어떤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틀에 가둬 놓고 이 안에 있는 것만이 진리며 이 바깥의 것들은 다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틀렸고, 알라의 말씀은 다 틀렸고, 부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이지 진리라는 이름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 그 내용 자체에 있지 그것을 가두는 불법이라는 틀에 있지 않다. 불법은 성경 속에도 있을 수 있고, 코란에도 있을 수 있으며, 수많은 고전들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설법은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스님들의 입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님이나 신부님의 말씀 속에도 설법은 있을 수 있고, 어린 아이의 입에서도 법은 설해질 수 있으며,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진리의 법은 들을 수 있다.

불법을 어떤 틀에 가두지 말라. 가두고 묶어두고 머물러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로써의 생명력을 잃고 만다. 진리라는 것이 가둬지지 않은 것을 이름하는 것이며, 고정되지 않은 것, 집착되지 않은 것을 이름하기 때문이다. 진리대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법일 수 있겠지만, 진리답게 이해되지 못하면 법도 법이 아니다. 그래서 옛 말씀에 어리석은 이가 말하면 법도 법이 아닌 것이 되지만, 지혜로운 이가 말하면 법 아닌 것도 법이 된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니 불경을 해석하고 공부하면서도 진리답게 공부하지 못하면 불경을 보면서도 외도의 가르침을 보는 것이 되지만, 성경이든, 고전이든, 그 어떤 책이건 간에 진리답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속에 법은 깃든다. 문제는 ‘경전’ 그 자체가 아니라 경전에 대한 올바른 ‘봄(正見)’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부처님 열반 전까지 설하셨던 모든 가르침에 대해 당신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법을 설하면서도 법을 설한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있어서 다음 세상에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의적절한 질문을 바로 이 때 할 수 있기 때문에 수보리가 혜명(慧命)이다. 혜명이란 비구스님을 높여 존칭하는 말로 온전한 지혜를 구족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법을 설한 ‘여래’가 공하며, 설한 바 ‘법’ 또한 공하다는 법문을 듣고 혜명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여래 아닌 여래가 설한 바 없이 설하는 법을 듣는 중생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여래의 깊은 깨달음을 이 다음에 어떤 중생들이 듣고 믿어 깨달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과연 이러한 깊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낼 수 있는 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즉 법을 듣는 대상인 중생들 또한 공하다는 말이다. 중생이라는 것이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생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제도할 중생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이들은 본래부터 깨달아 있다. 별도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중생이 마음 닦는 수행을 통해 깨달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에서도 말했듯이 중생과 마음과 부처는 하나다. 그러나 중생이라 이름붙인 이유는, 다만 본래 깨달아 있는 본래부처들이 잠시 미혹하여 번뇌를 스스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면, 나라는 주관과 이 세상이라는 객관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들리는 등 오감으로 느껴지다 보니 실제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실체화했고 그 실체화가 연이어 나와 남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수많은 번뇌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중생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잠시 착각하여 집착한 자일 뿐이다. 그 착각과 집착만 제거하면, 전도된 망상인 미혹만 제거하면 일시에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니 어떤가. 중생도 중생이 아니요 여래도 여래가 아니다. 중생이 미혹과 집착만 제거하면 곧 여래인 것이다. 그러나 미혹과 집착, 번뇌며 욕심이라는 것 또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이 곧 여래요, 번뇌가 즉 보리이고,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이다.
‘법’의 시선에서 본다면 ‘법’ 그 자체도 물거품이요 꿈이며 환상이고, ‘중생’도 물거품이요 꿈이며 환상이고 ‘여래’도 물거품이요 꿈이며 환상일 뿐이다. 이 분 비설소설분에서는 이처럼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한다’고 하는 이 말이 그저 말일 뿐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래가 중생에게 법을 설한다’는 것은 곧 ‘여래가 중생에게 법을 설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말이 ‘여래가 중생에게 법을 설한다’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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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제 17, 구경무아분
구경에 내가 사라지다


究竟無我分 第十七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於燃燈佛所 有法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若有人言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如來所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 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 無壽者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17분 구경무아분은 금강경의 가르침이 구경에는 무아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임을 지금까지 앞서 설했던 예들을 들어가며 설하고 있다. 발심한 보살들은 마음을 항복받고 수행하며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에도 ‘나’라는 상에 머물지 말아야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한 법도 얻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것도 실은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가면서 그 어떤 경계에도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되고, ‘나’라는 상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래는 ‘무아법’ 즉 ‘내가 없다’는 법에 완전히 통달하였을 때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 혹은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등 일체의 ‘내가’라고 하는 감옥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 분에서 끊임없이 설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내가 한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보살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금강경에서 지금까지 설해 온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된다. 아상을 타파하라는 그 한 가지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것이 항상하고 실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온 존재를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항상하지 않는다. 즉 무아(無我)이며 무상(無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동반한다. 다시말해 ‘나’의 실체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삼법인(三法印)의 법칙을 따른다. 나는 항상하지 않고[諸行無常],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으며[諸法無我], 그렇기에 나라는 것은 곧 괴로움[一切皆苦]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바로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나’ 이외의 것들에서 괴로움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 ‘나’라는 집착에서 ‘너’라는 상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주관의 성품이 삼법인으로 공(空)하기 때문에, ‘너’라는 상대 또한 삼법인의 성품으로 똑같이 공한 것일 뿐이다. ‘나’도 삼법인이며, ‘너’도 삼법인이고, ‘일체제법’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모두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괴로움인 삼법인의 성품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는 주관도, ‘상대’라는 객관도 모두 삼법인으로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기에 ‘나’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엔 괴로움을 가져오며, ‘상대’에 집착하는 것도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이나 명예, 지위, 권력, 이성, 사랑, 학벌, 소유물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의미한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항상하거나 실체적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깨달음, 멸도, 해탈,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 까지도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내가 수행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거나 하는 등의 말에도 ‘내가’라고 하는 아상이 전제되어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무아법의 통달이 아니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내가’라는 상도 붙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아(無我)’라는 진리를 깨닫는 데 있다. 무아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은 삼법인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공성(空性)을 깨닫는다는 말이고, 연기법, 중도(中道)를 깨닫는다는 말과도 같다. 또한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무소득(無所得)’을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하며, 화엄경의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諸法宗本來 常自寂滅相)’,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가르침과도 같으며, 조주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나, 무소유(無所有), 무분별(無分別), 무자성(無自性), 무소득(無所得)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의 가르침,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등의 사구게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이 말을 간단하게 풀어보자.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며 그렇기에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삼법인의 가르침 때문에 무아인 것이고, 공인 것이다. ‘나’와 ‘세상’을 비롯한 일체의 삼라만상(森羅萬象) 오온(五蘊)이 결국에는 다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공이다.[照見五蘊皆空] ‘나’라는 실체가 있으려면 항상해야 하고 고정되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니 ‘나’가 아닌 ‘나 없음’ 즉 무아(無我)인 것이다. 항상하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니 집착할 것이 없고[無執着, 放下着], 얻을 것이 없으며[無所得], 언제까지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無所有] 집착이란 언제까지고 항상하길 바라는 마음인데 존재의 본질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집착은 결국 괴로움을 부를 뿐이다.

그러면 그렇게 일체가 다 공(空)이고,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렇게 움직이는 ‘나’는 무엇이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무아라면 내가 없다는 말인데, 분명 우리 눈앞에는 내가 있고 상대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 인연[緣起法]의 나툼일 뿐이다. 수많은 크고 작은 인연들로 인해 잠시 ‘나’도 만들어지고, ‘대상’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 다 하면 누구든 사라지고 또한 다시 인연이 모이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생사와 윤회 또 이 모든 존재들과 그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으며 환영과 같은 것일 뿐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모든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앞서 말했듯 그 허망한 상이 여러 모양으로 나투는 법칙이 바로 연기법, 인연법, 인과응보인 것이다. 바로 이 점, 일체 모든 존재는 다 환영과 같이 허망한 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을 바로 관(觀)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상이 허망하며 무아이고 공하여 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와같이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인연따라 잠시 모였다가 흩어질 뿐이다. 고정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연따라 많이 베풀었다면 부자로 태어나는 것이고 인색하게 살았다면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인연따라 생사가 벌어지고, 아름다움과 추함, 크고 작음, 옳고 그름이 생겨날 뿐이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아름다움도 영원하지 않고 추함도 영원하지 않다. 크고 작다는 것도 옳고 그르다는 것도 다만 인연따라 그렇게 보일 뿐이지 고정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연기법의 세계,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분별할 것이 없다.[無分別] 그렇기에 어느 한 쪽으로 고정 짓는 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극단은 어리석은 견해일 뿐이다. 그렇기에 연기법,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디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오직 중도만이 지혜를 전해 줄 뿐이다.[中道]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따라 잠시 변화하는 것 뿐이지 영원한 마지막과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사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생사는 껍데기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 본질에는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나고 죽지 않는 영원한 안식처가 있다.[生死卽涅槃] 일체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적멸의 모습이다.[諸法宗本來 常自寂滅相] 그렇기에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生滅滅已 寂滅爲樂] 바다는 항상 고요하지만 물결은 날씨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 처럼, 우리의 본질에는 대 열반의 적요가 있지만 우리의 껍데기는 항상 울고 웃고 변화한다. 우리의 저 깊은 존재의 심연(深淵)에 있는 바다와 같이 고요한 그것을 열반(涅槃)이라고도 하고 해탈(解脫)이라고도 하며 적멸(寂滅), 혹은 깨달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즉 삼법인(三法印)이지만 그 본질, 근원에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를 완전히 여윈 대 열반의 적멸이 있는 것이다.[涅槃寂靜]

바다의 물결은 인연따라 거세게 몰아쳤다가 잔잔해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우리의 삶과 같이 인연따라 울고 웃고, 행복하고 불행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물결도 결국에는 바다 그 자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울고 웃으며 중생으로써 살고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바로 참부처인 것이다.[自性佛] 본래부터 부처인 것이다. 물결이 바다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물결도 본래는 바다와 하나이듯, 우리도 중생이니 부처가 되겠다고 애쓸 것 없는 본래부처인 것이다.[本來佛] 그런데 전도된 몽상[顚倒夢想] 때문에 우리는 물결의 움직임에 울고 웃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물결이 곧 바다인 것을, 중생이 바로 부처이며,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은 오직 잘 지켜보는 길[觀] 밖에 없다. 물결이 바다가 되겠다고 자꾸만 애쓰고 고생하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만 물결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잘 관찰해 보기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 인연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관찰했을 때 결국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이면에는 본래부터 고요했던 대 적멸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결이 곧 바다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대 적멸이라는 본 바탕 위에 잠시 인연따라 나고 죽고, 울고 웃으며, 온갖 행복과 불행의 연장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인연에 따른 변화가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에 순응해야지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無執着, 放下着] 그렇기 때문에 그 변화를 타고 흘러야 한다. 그 흐름을 타야 한다.[須陀洹] 변화[諸行無常]야 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니 그 인연의 변화에 일체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고 순응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攝受] 일체의 인연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곳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放下着], 오직 순간 순간 비추어 보고[觀照], ‘나’라는 고정된 집착을 놓아버려 본래 자성부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自性佛]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가르침과 경전의 핵심 경구들을 풀어 보았는데,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경전이든, 어떤 교리든, 또 어떤 선지식의 말씀이건 모두가 하나로 회통(回通)되는 가르침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다 따로 따로 떨어져 다른 가르침이거나, 팔만사천의 수많은 경전이 다 다른 가르침이거나, 스님들의 온갖 다양한 방편설법이 다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로 회통되는 가르침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수많은 방편과 경전과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은 모두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근기와 다양한 수준에 맞게 방편의 설법을 하다보니 그렇게 복잡 다단해 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불교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과 생각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불교는 아주 단순한데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고 정신 없으며 어렵게 살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도 그 복잡한 사람들의 근기에 일일이 맞추어 법을 설하시다 보니 불교가 어렵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쨌거나 불교를 공부하는 수행자는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잘 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한 가지 가르침을 붙잡고 그 안에서 일체 모든 경전과 교리가 다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 경전이 더 좋으냐 저 경전이 좋으냐라고 따진다거나, 이 교리가 더 훌륭한지 저 교리가 더 훌륭한 지를 따진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수행법이 더 좋은가 저 수행법이 더 좋은가를 따질 것도 없다. 모든 수행법도 다 방편일 뿐 결국에는 그 궁극의 한 곳으로 가는 수많은 길일 뿐이다.

이 분에서는 그 가운데에도 ‘무아법’을 가지고 지금까지 설했던 금강경의 가르침을 회통시키고 있다. ‘무아’ 이 하나에서 일체 모든 가르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앞서 본문에서 나온 바이다. 앞서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하신 무아의 도리를 펴기 위해 수보리의 이심전심 염화미소의 질문이 시작되었고, 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앞서 설했던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의 비유로써 무아의 가르침을 펴고 계신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상(相)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본래 고정된 상이란 없기 때문이다. 즉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상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체 상의 근본은 바로 ‘나다’하는 아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금강경은 끊임없이 아상 타파를 위한 법문을 내리고 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아이기 때문이다. 본래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의 ‘나’라는 상이라도 생겨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보살이 되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 분에서 부처님께서는 3가지 비유로써 무아를 통달하도록 이끌고 있다. 첫 번째 비유는 수보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수보리가 처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데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다.

똑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된다면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같은 말의 두 번의 반복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같은 말을 열 번, 아니 스무 번, 백천만 번을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다. 말은 같은 말일 지 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전해 새로운 말이다. 내 안에 과거가 꽉 들어 차 있고, 과거의 기억과 판단이 꽉 들어 차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다만 같은 말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같은 말을 듣는 순간 벌써 내 안의 과거는 말할 것이다. ‘저 말은 이미 들었던 말이야. 나도 다 아는 말이야.’ 그러나 과거의 견해나 분별로써 지금의 말을 판단하려 들지 말라. 지금의 말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고 설법이다. 이유가 있고 제 몫을 가지고 그 말들은 반복된다. 그러나 내 안이 과거의 분별로 꽉 차 있다면 그 말의 이유를 한 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3가지 비유가 이 분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아법의 깨달음을 위함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선남자 선녀인은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한 명도 제도한 자가 없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그것은 벌써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다. 보리심을 발한 수행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상이 바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가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참된 수행자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면서도 스스로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다. 일어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수행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 또한 제도하고 포교하며 주변 사람들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끌더라도 ‘내가 포교한다’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복을 짓는다’ ‘내가 보시했다’ 는 상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스스로 ‘나는 수행한다’거나, ‘나는 깨달았다’거나,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보시한다’ 거나 하는 등의 ‘내가한다’는 상을 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의 가르침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혹 요즈음의 세상을 보면 스스로 견성을 했다거나 깨달았다는 사람도 많이 등장하고, 또 어떤 단체에서는 돈 얼마를 내면 몇 일 안에 부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얼마를 더 내면 부처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옛 말씀에, 이번 생에 한 번 얼핏 자신의 성품을 본 사람, 그것을 초견성이라고 하거나 수다원이라고 하거나, 견도라고 하거나 그렇게 어떤 이름을 지어 놓고 스스로 그 지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번 생 공부의 진척은 더 나아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스스로 ‘나는 견성을 했다’거나, ‘나는 이만큼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혹은 ‘나는 이만큼 깨달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구나’ 하는 등의 스스로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분별심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많다’ ‘내가 잘났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매혹적인 큰 상일진데,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아상이야 얼마나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목표인가. 그러나 ‘내가 깨달았다’는 미세한 아상은 곧 상대방과의 차별을 가져오고 그 차별은 나를 더욱 어리석은 아상의 나락으로 몰고 갈 것이다. ‘나는 어리석다’는 아상이나,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아상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이 더 큰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수보리의 질문과 이어지는 부처님의 답변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아상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마음이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내가’ ‘깨달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없다. ‘내가’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을 그 어떤 법도 없다. 얻을 깨달음도 없으며, 얻을 주체인 ‘나’ 또한 없다. 완전한 무아, 완전한 텅 빔, 완전한 공만이 있음과 없음을 초월해서 있다.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고 못 얻고 하는 어떤 법으로 착각을 하곤 한다. 법을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이분법으로 진리를 나누고 있다. 그 어떤 나뉨도, 그 어떤 이분법도 진리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깨달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깨달은 나’에 대한 환상은 쓰레기 통에 집어 넣는 편이 낳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깨달음에는 ‘나’가 없다. 깨달을 ‘나’가 없었을 때, 얻어야 할 어떤 ‘깨달음’이 없었을 때 참된 깨달음은 드러남도 없이 드러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환상을 버리라. 이것이 첫 번째 부처님의 무아 법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고 서원하며 실천해야겠지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했더라도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고 설하신 것이다.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어 깨달음에 이르게 했으면서도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수행을 하는 많은 이들은 ‘내가 깨달았다’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는 수행자다’ ‘나는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나는 수행력이 높다’ ‘나는 수행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하다’ 하는 등의 비교, 판단, 분별이 끊임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올라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탓할 것은 없다. 다만 그런 생각에 스스로 빠지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런 모습이다. 다만 그런 생각이 일어났음을 놓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휘둘리지 말라. 다만 깨어있는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잘 살피라.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다만 잘 살피기만 하라. 잘 살피고 관해야 거기에 속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그 우월감에 기뻐하거나, 열등감에 고개 숙이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필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하며 자문해 보자. 스스로 ‘나는 금강경을 공부했다’ ‘불법의 지혜를 요달했다’고 하는 등의 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금강경을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금강경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글로써만 받아들일 뿐 내 안에 그 의미가 온 존재로써 와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오직 불성(佛性)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부처님 마음의 나툼일 뿐이다. 불성이라고 이름짓는 것도 그저 이름을 붙이자니 그렇게 붙여 놓은 것일 뿐이지, 불성이라는 말 또한 어디에 붙을 데가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적인 ‘깨달음’의 모양이 있어서 깨달음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또 깨달았다고 하는 큰스님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잘생겼을까 못생겼을까? 마른체형일까 아니면 통통하실까? 눈은 어떤 모습이고, 귀와 코, 입은 어떻게 생겼을까? 키는 클까 작을까? 몇 cm 정도가 되실까? 옷은 어떤 옷을 입으시고, 신발은 어떤 메이커의 신발을 신고 다니실까? 밥은 무엇을 드실까? 햄버거나 콜라, 커피도 드실까? 과연 어떤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깨달은 자의 모습인가?

정답은 없다. ‘어떤’ 모습일거라고 모양을 만들어 두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일 뿐이다. 우리의 바램일 뿐이다. 어떤 모양도 없기 때문에, 어떤 형식이나 틀에도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투실 수 있고, 자유자재하게 나투실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은 자’를 어떤 성격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어떤 외모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남자 혹은 여자일거라고 고정 짓지 말라. 그것은 깨달음의 본 모습이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것에도 고정되게 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은 어때야 한다고 고정짓지 말라. 점잖아야 한다거나, 말도 느려야 한다거나, 외모가 자비롭게 생겨야 한다거나, 화도 내면 안 된다거나 하는 등의 고정된 관념으로 ‘스님’이라는 관념을 내 안에 만들어 두지 말라. 그것은 스님이 아니다. 어떤 틀에 갇힌 정형화된 스님은 스님이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틀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란 ‘수행자다운’ 어떤 틀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사람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자기 자신’만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자다. 획일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자가 수행자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길은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어떤 ‘틀’에 가두지 말라. ‘누구’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부처님’처럼 살려고 애쓴다거나, ‘누구’처럼 돈 벌려고, 좋은 차 살려고, 좋은 직장에 다니려고, 혹은 ‘누구’처럼 예뻐지려고 온갖 노력을 쏟지 말라. 그것은 참된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법은 ‘어떤 틀’ 속에 갇히지 않는다. 어떤 한 법도 없는 것이 참된 법이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되는 것이고, 그랬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본래불의 모습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법신불(法身佛)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법신불이 무엇인가. 산도 부처요, 강도 부처요, 나무며 풀에서부터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시내물과 짐승과 곤충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살인자에게도 부처의 본래 모습은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부처는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규정짓는다거나, 어떤 모습으로 만든다거나, 어떤 법으로 정한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부처는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를 말한다. 그러니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킬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다는 것도 표현이고 말일 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정해진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법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그 모든 일체법을 다 나툴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지지 않아야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물은 그 모양이 정해지지 않았다 보니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어지고, 네모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며, 날이 추워지면 얼고, 너무 더워지면 수증기로 날아가지 않는가. 물의 모양이 이미 어떻게 정해져 있다면 그렇게 나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법도 마찬가지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정할 것인가. 이번 생에 사람이었다가 다음 생에 짐승으로 윤회를 했다면 짐승이 고정된 ‘나’인가, 아니면 사람이 고정된 ‘나’의 실체인가.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 ‘나’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동물도 될 수 있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다. 무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연따라 그 어떤 것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이 말해주는 ‘정한 바 없는 법’이고, ‘한 법도 없는 법’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과거 인행시에, 연등부처님께서는 미래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의 법을 얻어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셨다. 연등부처님은 과연 석가모니부처님께 어떤 법을 전해 주셨던 것일까? 또 어떤 법을 전해 주었기에 미래에 깨달을 것을 그 먼 과거에 미리 알고 수기를 내려 주셨던 것일까? 그 ‘법’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답을 주고 계신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법을 받으셨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받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석가모니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셨다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라고 생각할만한 ‘어떤 법’을 생각하거나, 그 법에 갇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법 아닌 법을 받음 없이 받으셨기에’ 훗날 석가모니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법을 말씀하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법문을 설해 주셨다.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 십이연기, 사념처 등 수도 세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을 설해 주셨다. 일평생 수많은 설법을 하시면서 수많은 중생에게 법을 설해 주셨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나는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평생을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셨지만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신 바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한 법’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고정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다. 그런데 어떤 것을 진리라고, 법이라고 고정지을 것인가. 고정 지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항상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고 법일진데, ‘고정지을 것이 없다’는 진리를 고정화 할 것인가,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항상하는 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자아가 없다는 무아법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울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말씀에 집착할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하고, 머물고, 고정짓고, ‘진리’라고 이름짓고, ‘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나다’하고 고정지을 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워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법도,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내세우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다. 그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법’이기 때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결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없는데, 또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내가 없는데,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있지 않음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수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라고 했다면 연등부처님은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 때문에,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그 어떤 법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래라 하는 것은, 부처라 하는 것은 모든 법에 있어 여여(如如)한 것을 말한다. 여여하다는 것은 어떤 법에도 집착함이 없고, 어떤 법에도 머물지 않지만 그 모든 법을 나투고 그 어떤 법도 자유자재하게 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툰 모습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툴 수 있지만, 늘 한결같이 본래의 바탕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본 바탕은 늘 여여하다. 여여한 불성 그대로이다. 우리 자신이 그대로 부처요, 자성불이며, 법신불인 것이다. 여래로써 늘 여여한 본래 그대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모든 법에 있어 늘 여여하다. 어떤 모습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어떤 법에서도 본바탕에서는 늘 한결같은 여여한 성품을 잃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이 언젠가 수행을 통해 깨달아 여여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여여한 부처인 것이다. 본래불이고, 본래 자성이 청정하니 사실은 수행도 필요없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불가에서는 수많은 수행 방편을 이야기하면서, 참선, 염불, 간경, 주력, 절 등의 수행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본래불이라면 수행할 필요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가 본래부터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다. 스스로가 여여한 여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번뇌를 만들고, 욕심을 만들어 그 욕심과 번뇌에 스스로 얽매이는 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나’라는 허상에 얽매여 ‘내가 잘나고 싶고’ ‘내가 돈 벌고 싶고’ ‘내가 유명해지고 싶고’ ‘내가 깨닫고 싶다’는 등의 온갖 욕심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만 만들지 않는다면 ‘내 욕심’이 어디 붙을 자리가 있겠는가. ‘나’만 완전히 놓아버려 무아법을 깨닫고 나면 본래 여여한 여래가 목전에 당도해 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부처이고 여래라는 사실을 ‘나’라는 아상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구경무아분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 처럼 무아법을 구경에 바로 보게 되는 순간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여여한 여래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이렇게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다보니 부처님께서도 방편을 써서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있는 데서 벗어나도록 도와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며, ‘나’를 벗어나도록 하는 실천행을 일러주시니 그것이 수행이다. 본래부처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수행도 필요없고, 설법도 필요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에 갇혀 있고, 괴로워하고 있으며, 삶에 아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수행이 필요한 것이고, 법문이 필요한 것이다. 괴롭지 않다면,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어떤 법에도 걸림이 없다면 불교도 필요 없고, 수행도 필요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다 쓰잘데 없는 말일 뿐이다. 그 어떤 한 법도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구경에 무아법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법에 여여한 여래임을 바로 보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고.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금강경을 보라. 금강경에서는 이 당연한 말까지도 부정을 하고 있다. 금강경이야말로 일체 모든 방편을 거두어 들여 온전한 진리로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조금이라도 참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전부 부정하고 파하여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파사현정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던 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고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려다 보니까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언어라는 것의 조악함 때문에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편을 버리고 진리의 편에서 이 명제를 관찰해 보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거나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 과연 여래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을 ‘여래’, ‘부처’가 없다. 깨달음을 얻은 ‘나’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상대성에 빠진 생각이다. 깨달은 부처가 있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은 불세계로 나가기 위해 수행한다는 생각은 벌써 부처와 중생을 둘로 나누어 놓은 생각이다. 부처는 그 어떤 분별의 세계에도 몸을 담고 있지 않다.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라는 두 가지 극단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 부처는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깨달은 ‘자’라는 어떤 존재적인 틀에 부처를 가둘 수는 없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완전히 무아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내가 없음’을 온전히 자각한 것, 구경무아인 것이다. 무아가 곧 깨달음일진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나’가 없는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에게 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깨어있는 순간 바로 부처인 것이다. 깨어있는 순간, 오직 깨어있음의 빛만이 있을 뿐 나와 너라는 상대개념도 사라지고 생사,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 또한 사라진다. 바로 그 것, 깨어있음, 그것이 바로 부처다.

만약 스스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나’에 갇혀 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아(我)는 깨닫지 못한다. 무아(無我)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말 그대로 무아, 내가 없음이며 텅 비어 있음이고 무상과 무아, 무자성과 공이기 때문에 주체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깨달을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진데 스스로를 깨달음을 주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을 밝히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여래라는 주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깨달음의 상태를 얻어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여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음’도 없다. 그렇기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은 완전한 거짓이다. 언어 자체에 큰 모순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며, ‘깨달은 자’에 집착해 있는 것이고, ‘얻음’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자’가 있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여래는 없다. 또한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떤 특정한 ‘법’이 아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없다. 여래가 얻은 법이라는 것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어떤 ‘법’을 얻었다면 그것이 참된 것, 실다운 것이라는 말인데,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헛된 것 또한 아니다. 실다운 법에 집착해도 안되고, 헛된 법에 집착해도 안 된다.

우린 누구나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얻을 깨달음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실체적인 것, 진리다운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어떤 것’으로 고정지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그 어떤 ‘법’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왜 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깨달았다고 할 어떤 법도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일체법이 곧 불법’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것이 불법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것만이 불법이라면 어떤 깨달을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라면 거기에 어떤 것만을 정하고 택해 깨달아야 한다고 할 특정한 ‘법’이 없지 않겠는가. 진리 아닌 것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99%는 진리가 아니고 1%가 진리라고 한다면 그 1%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애써야 하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완전히 100% 전부가 다 진리이고 불법이라면 어떤 특정한 1%를 깨닫고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불법이란 그와 같다.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기 때문에 별도로 실다운 법과 헛된 법을 나눌 수가 없다. 100% 모두가 그대로 불법이다. 100% 모두가 그대로 실다운 법이다. 그러니 거기에 몇 %를 실답다고 나누고, 몇 %를 헛되다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실다운 것을 찾는 노력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불필요한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주체가 없으며,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그 어떤 특정한 ‘법’이 없다면 어찌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분명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이가 생겨날 것이다.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니 그 ‘일체법’에 집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일체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일체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일체법이라는 것은 일체법이 아니며, 그 이름이 일체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도 같다.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둘을 나누어서 그 가운데 큰쪽을 택한 큰 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초월한 절대 큰 몸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의 몸집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크고 작은 분별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의 육신이 아닌, 온 우주 법계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삼라만상의 당체인 법신에서는 그 어떤 크고 작은 분별도 다 사라지고 만다. 온 우주의 어떤 한 부분을 차지하는 몸집을 가졌다면 크고 작다는 분별이 생기고 따라서 ‘어떤 한 몸’ ‘큰 몸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온 우주 법계 그대로인 법신은 따로 떼어 내어 얼마만한 몸의 법신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우주 법계의 크기를 100 이라고 보았을 때, 그 가운데 몸집이 1이나 2 정도의 크기라면 그것은 크다 작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법신의 몸은 그대로 우주 법계의 크기인 100이기 때문에 크다 작다고 분별할 수 없으며 별도로 얼마만큼 크냐 작으냐를 논할 수 없다. 어떤 한 큰 몸이 아니라 법신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는 말처럼, 일체 모든 법계가 그대로 법신으로서의 큰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큰 몸이라는 것도 이름을 큰 몸이라 이름 붙였을 뿐 따로 큰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큰 몸은 큰 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몸, 큰 몸 하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큰 몸을 택하는 큰 몸은 참된 큰 몸일 수 없다. 그것은 상대적인 큰 것일 뿐, 절대로서의 큰 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설법은 계속되고 있다.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깨닫게 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가’라는 아상에 빠져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보살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주체가 없다. ‘나’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어찌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내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보살은 한없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단 한 명의 중생도 멸도에 들게 한 적이 없다. 보살이란 어떤 한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를 이름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멸도에 들게 했다’라는 상에 갇혀 있다면, ‘중생을 구제했다’는 법에 집착해 있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부처와 중생이 나누어져 있고, 생사와 열반이 나누어 져 있지만 이미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그 어떤 종류의 나뉨도 없다.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다 헛된 꿈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이미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이다.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의 씨앗 불성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성을 싹틔워야 한다는 말은 다 방편일 뿐이다.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깨달음에 이르게 할 중생도 없으며, 이미 깨달음에 이른 부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의 증득이 가져다 주는 대 해탈, 대 자유의 깨달음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삶과 죽음 등의 그 어떤 나뉨도 용납하지 않는 진리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무아법을 체득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을 가질 수가 없다. 구제할 중생이 없고, 구제할 내가 없으며, 그렇기에 구제라는 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깨달음의 회향인 ‘중생구제’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상구보리에도 머물지 않고 하화중생에도 머물러 있는 않는 이가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했는데 일체법, 즉 불법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 어떤 상도 용납되지 않는다. 즉 그 어떤 ‘나다’라고 하는 상도 용납지 않는다는 말이다. 깨달을 ‘나’도 없고, 중생을 구제할 ‘나’도 없다. 지혜를 증득할 ‘나’도 없으며, 자비를 베풀 ‘나’도 없다. 상구보리할 내가 없으며 하화중생할 내가 없는 이가 바로 보살이다. 일체법은 한 치의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하는 말이 그대로 스스로 보살이 아님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없고, 장엄할 불국토가 없으며, 장엄할 것도 없는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상에 머무를 수 있단 말인가. 무아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체 모든 법, 일체 모든 존재에 고정된 실체적인 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도 너도 없으며, 중생과 부처도 없고, 예토와 정토도 없다. 오염된 예토인 중생의 국토가 없고, 장엄된 불국토가 따로 없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분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깨달음일진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실질적인 그 어떤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엄인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경무아분의 핵심이며, 나아가 금강경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무아법의 통달이 바로 금강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법의 이해를 위한 설명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 또한 무아법의 통달을 위한 사구게다.

반야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이 바로 무아법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무아법이 바로 무자성, 공, 중도, 연기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모두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모습을 보인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깊이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연기적인 현상으로 잠시 꿈과도 같이, 환영과도 같이, 그림자와도 같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인연을 만났느냐에 따라 물이 소를 만나면 우유를 이루고, 독사를 만나면 독을 만들 듯 그렇게 인연따라 겉모습이 끊임없이 변화될 뿐이지 결코 고정된 실체인 것은 아니다. 또한 물은 계곡에서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흘렀다가 수증기로 변하고 구름으로 변하고 또한 인연을 만나 비로도 우박으로도 눈으로도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내린 눈비가 또다시 계곡을 지나면서 나무도 되었다가 식물도 되었다가 사람 몸으로도 변했다가 또다시 시내로 계곡으로 강으로 흘러 흘러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럴진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여 ‘이것이 실체다’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연기법에 따라 겉모습을 바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다만 꿈처럼 신기루처럼 몸을 바꾸면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를 뿐인데, 어떤 하나를 붙잡고 집착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나다’라고 고집하여 내 몸에 혹은 내 생각에 집착할 것인가.

내 몸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수화풍의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 몸의 지수화풍의 구성원들은 흘러 흘러 바다고 되고 강물도 되고 산도 되었다가 나무도 풀도 되고, 또한 짐승도 되고 풀벌레도 되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 몸에 집착할 것인가.
내 생각이라는 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불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라고 할 것인가. 모든 생각은 변화한다. 흐를 뿐이다. 이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생각도 관념도 가치관도 고정된 실체로써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학벌도, 배경도, 사랑도, 가족도,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머물러 집착할 것인가. 집착은 곧 괴로움을 불러올 뿐이다. 돈에 집착하면 돈으로 인해 괴롭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 그로 인해 괴로울 뿐, 결국에는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어디에 ‘내 것’을 붙일 것이며, 집착할 것인가. 이 구경무아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설하고 있다. 구경에는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어떤 물질에도, 어떤 존재에도, 어떤 깨달음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사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다.

한 평생 잠시 왔다가 갈 뿐이다. 인연따라 잠시 어떤 한 몸으로 왔다가 갈 뿐이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몸을 바꿀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하며 살겠는가. 집착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과연 어디에 집착하며 살 것인가. 다만 인연따라 법계의 몸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돌려줘야 할 일이고, 인연따라 법계의 돈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회향시켜 줘야 할 일이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모두가 잠시 인연따라 응해 줬다가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인연이 다 해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놓아줄 수 있다. 붙잡고 조마조마 하며 살 것인가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 것인가.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 바로 무아법의 터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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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울산바위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인연따라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인연이 다하고 나면 화가 사라지기도 하며,
또 상황 따라 어떤 때는 불같은 욕심이 치솟기도 하고
질투심, 고민, 집착, 증오, 사랑 등 수많은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기야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이런 감정적 기복의 연장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마음은 혼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 저홀로 일어나는 법은 없다.
그럴만한 인연, 상황이 생겨야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평소 가깝던 친구가 별일 아닌 것으로 갑자기 욕을 한다면
그런 상황에 따라 마음에서는 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같이 욕도 하고, 때로는 주먹질까지 하게도 된다.
그렇게 같이 붙잡고 화를 내고 싸우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 때부터 그 친구와의 관계는 불편해지고, 괴롭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친구가 그 때는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사과를 요청하게 되면 또 다시 마음은 금새 풀어진다.

이처럼 인연따라 우리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화가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도저히 억누르기 어려울 만큼 큰 화가 생기기도 하고,
삶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계로 끝간데 없이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런 인연이
우리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경계가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 삶도 끊임없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경계에 휘둘려 마음이 괴로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명상이라는 것, 수행이라는 것도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친구가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욕을 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해 보자.
혹은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 하며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조금 예민하게 그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살펴보자.

친구가 욕을 하는 순간,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하며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순간,
그 마음을 조금 깊이 있게 지켜보자.
그 순간 욕을 얻어 먹는 순간은 어떤가.
그 순간에 내가 있는가?
그 순간에 욕을 얻어 먹는 내가 있는가?

조금 깊이 지켜보라.
욕을 얻어 먹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없다.
오직 그 순간에는 '화'만 존재한다.
아주 맹목적이고, 본능적으로 당장에 생각할 것도 없이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법이라는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인연이 생기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을 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성숙하고, 젊잖으며, 수행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대뜸 욕을 얻어먹고도 당장에 화가 올라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몽둥이로 한 대 얻어 맞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부분이 아픈 것하고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프다.
마찬가지로 욕을 얻어 먹으면 자연스럽게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때려서 아픈 것이나,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나는 것이나
그것은 이 세상의 이치, 인연법의 이치에 따른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걸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왜 이렇게 화를 잘 내지?'하고 괴로워 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접촉하는 순간에는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아니 '나'라는 관념이 생길 것도 없이
저절로 '화'라는 것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욕을 얻어 먹고도 화가 안 일어나거나,
때리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지,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그것은 자연의 변화라는 흐름에 따라
구름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연따라 수증기가 구름이 되었닥가 다시 비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숲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수확을 하며 열매를 맺었다가 단풍으로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가 남게 되는
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변화와 무엇이 다른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도 자연의 변화와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다음의 순간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욕을 얻어 먹는 순간 화가 났다면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것이 무엇인가.
전혀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에 시비를 건다.
즉, 그 순간에 아상을 개입시킨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화'만 있었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화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한다.
그저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화'를 자기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너 때문에 화가났다'
'너가 나를 화나게해?' '너가 나에게 욕을 해'하고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그 '화'는 객관적이고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 '화'에
'내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감히 너가 나에게 욕을 해?'
'화 내는 것은 나쁜 것이니 화를 참아야 해'
'저 사람이 내게 화를 내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친구가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하고 있구나'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은 아주 미세하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이면에는 분명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제 그 '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화'는 '내 화'가 되어버렸다.
'욕을 얻어 먹은 나',
'화를 내면 안 되는 나',
'무시당하는 나'
그렇게 수많은 '나'가 생겨나게 된다.

이제 조금 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버렸다.
조금 전 상황,
즉 '나'가 개입되기 이전,
오직 '화'라는 것만이 있던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나'가 개입되면서 그것은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 화로 인해 괴롭고 답답하다.

만약 처음 '화'가 일어날 때
그 때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버려 두고 다만 바라보기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화는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스스로 타오를 만큼 타올랐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마치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구름이 일어났다가
저절로 구름이 짙어져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다.
우리 몸 또한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그저 내버려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듯이 스스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화'를 '내 것'으로 붙잡지 말라.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는 순간,
온갖 '내 생각' '내 분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 것이다.
연이어 불같은 감정이 생겨나고,
불같은 말을 내뱉으며, 몸 또한 불같은 행동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욕을 얻어 먹으므로써 자연스럽게 화가 일어났다면
다만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 처럼,
그저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그냥 순수하게 지켜보기만 하라.

거기에 해석이나 판단, 분석, 생각, 아상을 개입시키지 말라.
상대방의 행동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갖다 붙이지 말고,
내 화에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이나, 분별, 구분을 가져오지 말라.

'나'와 '화'를 구분하지 말라.
관찰자와 관찰되어지는 대상을 나누지 말라.
다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되라.
'화'가 났다면 그저 '화' 그것이 되는 것이다.
'나'와 '화'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순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그 화는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 즉 '나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연따라 '화'가 났을 뿐이지 거기에 '나'는 없다.
그저 '화'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 화난 나는 없다.

내 스스로 '내가 화났다'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 없는 나를 실체적인 있는 나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나를 실체화하게 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커지고 만다.

화는 중립이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은 '화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 '화'는 없다.

괴로움도 중립이다.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것도 이름붙인 것에 불과하지
그것도 괴로운 상황일 뿐이다.
다만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 '괴로움'은 없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이지
'괴로운 나'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괴로운 나라는 것도,
화라는 것도, 화를 내는 나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실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해석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觀) 수행이라는 것이
무아(無我)에 이르는 근본불교의 수행이며,
아상(我相)을 타파하는 금강반야경의 수행이고,
연기 법칙을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다만 '화'가 일어난
그 연기적 인과성, 즉 연기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랬을 때 그 '화'에 '나'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나'와 '화'를 나누지 않으며,
자아라는 관념을 실체화하지 않고,
'나'라는 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명상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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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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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여법수지분
여법하게 받아지니라.


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 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 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 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恒河沙等 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여법수지분은 이 경의 이름과 이 경을 어떻게 여법하게 수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의 이름을 밝혀주셨지만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상의 가장 작은 미진에서부터 이 세상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아가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다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음을 설함으로써 다시한번 금강경의 무집착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이렇듯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어떤 티끌도, 세상도, 부처도, 경전의 이름도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체 상의 완전한 타파의 자리에 깨달음은 드러남 없이 드러난다. 여기에 이 경의 위대함이 있다. 그래서 세세생생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 보다 이 가르침 하나만을 받아 지녀 설하는 것이 더욱 큰 공덕이 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지금까지 들어 온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수보리는 한없는 감동과 환희에 휩싸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이러한 말 없는 위대한 말을 듣고 수보리와 같은 깊은 제자가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이렇게 표현했을 때 그 표현은 위대하지 못하다. 그 표현으로써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담고 있는 그 깨우침의 깊이는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초월하여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수보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으면 좋을지 묻고 있다. 일체의 모양을 타파하고, 상을 버리도록 이끄는 이러한 가르침, 일체의 그 어떤 이름에도 집착함이 없도록 일깨워주는 이러한 가르침에 도리어 또 다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얼핏 생각했을 때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름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름을 깨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모순 속에는 무한한 ‘방편’과 ‘자비’가 녹아있다.

앞서도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말이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거나, 말 그 자체를 가지고 옳고 그른 진위를 가리려고 한다면 한마디 말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모순이고 잘못일 수 있다. 그렇듯 말이란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 말 것인가? 아무런 언어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침묵하기만 할 것인가. 그렇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미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항상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본연의 침묵의 가르침은 항상 법계에 가득하다. 다만 그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할 뿐, 침묵의 법문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러한 침묵의 말 없는 가르침은 항상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듣지 못한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그러한 침묵의 가르침이면 되었지 왜 애써 어리석은 이들을 일깨우고자 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 때문이다. 지혜의 본질은 자비에 있다. 아니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다. 지혜가 충만하면 자비 또한 똑같이 충만하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은 이는 당연하게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 고통 받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이라는, ‘언어’라는 방편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보리는 질문을 하고 있다. 부처님께 ‘자비’와 ‘방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마땅히 자비와 방편으로써 답을 하고 계신다. 이름을 타파하고 깨뜨려야 한다는 이 가르침에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계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모순은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수단으로, 그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 우리들 중생들이 좋아하고 이해하기 쉬워하는 ‘말’이고 ‘언어’인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자비와 방편으로 이름 붙여 준 이 경전의 제목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즉, 금강과도 같은 반야바라밀을 설한 경이란 의미다. 금강과도 같이 견고하여 깨어지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설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이렇게 방편과 자비로 반야바라밀 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지만 어리석은 많은 중생들은 또 다시 ‘반야바라밀’이라는 경의 이름에 집착하고 얽매일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해 주시고는 그것이 방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해 주고 계신다. 다시말해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이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여래가 설한 것 그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여래는 다시 설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에 속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말 속에, 반야바라밀경이라는 그 경전 속에만 어떤 특정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지 말라. 몸으로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입으로 반야바라밀이라고 외운다고 해서 나쁜 업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신격화하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단어에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고 신비로운 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반야바라밀 답지 못한 이해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이 이름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면 안 된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많은 금강경 수행자들이 특히 눈여겨 볼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이들은 다만 금강경 독송을 마음을 쉬기 위한 방편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이라는 이 경전 자체에, 이 글귀 자체에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나, 수행력 같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금강경 독송만 하면 그 어떤 특별한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다면 이는 금강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금강경이기 때문에 금강경을 독송하고 공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고 독송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금강경’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흡사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는 말과 같다.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금강경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은 그 어떤 진리라도, 부처라도, 고정되게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로써의 기능을 잃고 만다는 완전한 무집착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옛 스님들께서는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하든, 어떤 경전을 독송하든, 아니면 하늘천 따지를 하든, 가나다라마바사를 하든 마음만 집중하고 비우며 그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방편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준엄한 말씀이시다. 중요한 것은 금강경 그 자체가 아니라, 금강경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혹 스승들께서 어떤 분은 ‘아미타불 염불’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스님은 ‘금강경 독송’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간화선’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고 하시고, 또 다른 스승은 ‘위빠싸나’가 최고라고 했다면 그것은 모두 자비와 방편으로 행한 말씀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한 가지 수행법이 절대적인 것이니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에만 집착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그 한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퇴전심이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자신이 택한 그 수행법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라는 경책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그 자체에도,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문의 말씀처럼,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반야바라밀이 아님을 온전히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며, 어떤 이름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고, 일체의 모든 고정된 집착에서 벗어난 지혜이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이렇듯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셨고, 그 가르침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이름지어주셨다. 그러나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는 ‘진리를 설했다’는 상마저도 버리도록 이끌고 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벌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에 갇히게 되고 만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설법은 설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설하셨지만 단 하나의 진리도 설하신 바가 없다. 함이 없이 행한 것이다. 진리를 설하고도 그 설한 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은 실천해야 할 계율이 있고, 들어야 할 설법이 있지만 깨달은 여래는 행하는 바가 그대로 계율이고, 설하는 말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여래는 스스로 법을 설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저 함이 없이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연따라 이렇게 설하기도 하고 저렇게 설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선(善)을 행하도록 이끌기도 하고, 선악을 다 놓도록 이끄시기도 한다. 때로는 공(空)을 설하고, 또 때로는 유(有)를 설할 수도 있다.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이렇게도 행하시고, 저렇게도 행하시지만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행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선을 행하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선악을 다 놓으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한쪽에서는 선을 애써 행하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면서 선악도 다 버려야 한다고 고집을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분별지(分別智)다. 사람들은 그것을 설법이라고 이름 붙인다.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법문이고 그것이 경전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나서 이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저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하고 다툰다. 이 법문이 옳으니 저 법문이 옳으니 하고 분별한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종류의 실체도 있을 수 없는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다. 무아와 진아(眞我), ‘나 없음’과 ‘참나’, 얼핏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불성에 어떤 모양을 정해 두거나, 실체화 시키거나, 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성을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불성은 없다. 그러나 불성이 불성이 아님을 바로 알았을 때 그 때 온전한 불성은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불성이 있다. 그러나 무아이다.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찌 불성이 있는가. ‘나’가 없기 때문에 불성, 즉 ‘참나’가 있을 수 있다. ‘참나’를 ‘나’와 같은 어떤 존재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실체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참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나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나는 있다. 불성에 집착하지 않는 이에게 불성은 있다. 즉 불성이 불성이 아닐 수 있을 때 참된 불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불성에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 불성은 없다. 그것은 불성이 아니다. 윤회하는 주체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윤회하지만 무아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가. 참나와 무아 사이에 그 어떤 모순이 있는가.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는 그 어떤 혼란도, 그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온통 모순 덩어리다. 불교의 역사가 3,0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아직까지 논쟁의 불씨가 되는 것이 바로 윤회와 무아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말에 얽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윤회가 아니기에 윤회이고, 무아는 무아가 아니기에 무아라는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말에 속지 말라. 윤회가 옳은 것인가, 무아가 옳은 것인가 하고 다투지 말라. 어리석은 이에게는 다 틀리지만 충분히 지혜롭다면 그것은 아무런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법도 법이 아니지만,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는 법 아닌 것도 그대로 법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 혹은 ‘진리’의 테두리에 가두지 말라. 어떤 말로써든 그 ‘언어’ 속에 가두지 말라. 언어 속에 가두게 되면 끊임없는 논쟁과 다툼만을 만들게 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설한 바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까지 끊임없이 법문을 들려주셨지만 단 한 말도 설한 바가 없다. 설했지만 설한 바가 없다.
어리석은 이는 설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설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물 흐르듯 흘렀을 뿐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초록이 물오르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겨울이 되어 호젓하게 잎을 떨굴 뿐이다. 계절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고, 대자연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지면 논쟁을 낳는다. 그 무한한 설법 속에서도 설한 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참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래 설해 질 진리가 없다. ‘진리’라고 이름 붙일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런데 어찌 진리를 설할 수 있단 말인가. 설해질 진리도 없으며, 그 진리가 설 땅도 없다. 이 세상이라는 곳 또한 완전히 텅 빈 공화(空華)일 뿐이다. 이 세상은 텅 빈 한 송이 꽃이다. 또한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 세포들, 미진들, 티끌들 또한 모두가 텅 비어 있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어떤 말로 설해질 수도 없다. 진리도 없고, 세상도 없으며, 미진도 없다. 그것이 바로 법이고 진리인 것이다. 법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이 법이고 진리이다. 그래서 다음 게송에서는 삼천대천의 세계와 미진 또한 텅 빈 공일 뿐, 그 이름이 세계이고 미진일 뿐, 그 어떤 실체도 없다는 설법이 이어지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삼천대천세계가 텅 빈 공이고,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티끌들, 미진들이 실체가 없는 텅 빈 공일 뿐이다. 다만 그 이름이 미진이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실체는 없다. 그러니 그 세계의 진리 또한 텅 빈 것이며, 이름이 진리일 뿐인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란 이 우주를 말하는 것이고, 미진이란 그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티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가장 크고 가장 작은 그 모든 존재계가 다 텅 빈 공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이름이 미진이고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가유(假有)에 불과할 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소멸된다.

이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 또한 실제 내가 아니다. 나를 나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가유일 뿐이다. 내 몸뚱이 또한 내가 지은 인연, 즉 업에 의해 이번 생에 잠시 이렇게 인연화합되어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번 생 인연이 다하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지,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전생에 남자로 태어났다가 이번 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다음 생에 짐승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콕 찝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사람 모습으로도 태어났다가, 짐승의 모습으로도 태어나고, 부자의 모습으로도, 가난한 모습으로도, 잘생긴 모습으로도, 못생긴 모습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나툼일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번 생에 많이 베풀고 살았다면 부자의 인연을 받아 태어날 것이고, 술을 많이 먹고 지혜의 종자를 끊어버린 사람이라면 다음 생에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태어날 것이며, 입으로 욕이나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은 목소리가 나쁘게 태어나게 될 것 아닌가. 그렇듯 인연따라 이런 모습으로도 저런 모습으로도 나투는 것이지, 어떤 한 과정이 ‘나’의 실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물을 한모금 먹으면 물이 나로써 나투게 되고, 땀을 많이 흘리면 땀으로 빠져 나가게 마련이고, 그것은 또다시 수증기로도 강물로도 무엇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삼라만상의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와 같다.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미진’이라고, ‘세계’라고, ‘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나아가 무엇을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진리’라고, ‘여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꿈이고, 신기루일 뿐이다. 하물며 여래의 32상호를 가지고 여래라고 이름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인 미진도, 나도, 모든 것들이 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일진데, 부처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32상이란 부처의 거룩한 모습의 특성을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부처의 모습을 가지고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부처는 상 없음을 이름한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모양도 이름도 실체도 없다. 그럴진데 어찌 부처에게 32상이란 특별한 상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육신으로써 부처를 볼 수는 없다.

부처를 어떤 특정한 모습이라거나, 특정한 성격이라거나, 특별한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고자 하지 말라. 사람들은 보통 부처님은 이럴 것이다, 큰스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큰스님의 성격은 자비로울 것이고,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맑을 것이며, 성품은 온화하여 말도 없을 것이고, 큰스님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늘 가부좌하면서 좌선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는 등의 온갖 모양을 규정짓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런 모양에 있지 않고, 성격에 있지도 않다. 어떤 모양에, 어떤 외모에, 어떤 성격에 부처님을 가두지 말라. 그 어떤 틀에도 가두지 말라. 틀에 갖힌 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

부처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으며, 사람같을 수도 있고, 짐승같을 수도 있으며,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고, 티끌일 수도 있으며, 하늘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가능성도 활짝 열어두라. 어디에도 가두려 하지 말라. 갇힌 것은 부처가 아니다. 깨달음이 아니다.

큰스님들을 보더라도 어떤 분은 한없이 자비로우시지만, 또 어떤 분은 사천왕처럼 엄하고 무섭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 많을 수도 있고, 말이 적을 수도 있으며, 걸음이 빠를 수도 있고, 걸음이 느릴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모습이 수행자의 참모습일 것이라고 스스로의 틀을 만들어 두지 말라. 그렇게 되면 갇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부처는 중생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히지 않는다. 다만 갇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참된 수행자란 누구를 닮고자 하는 이가 아니다. 부처를 닮고자 하거나, 큰스님을 닮고자 하거나 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자기답게’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는 자다. 자기 자신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리답게 사는 길이다. ‘누구처럼’ 살고자 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목표치가 있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내가 있기 때문에, 그 간격만큼 마음은 괴롭고 무겁게 마련이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어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한 만족이 있을 때 깨어있을 수 있고 그 깨어있음이란 ‘자기답게’ 사는 방식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어떻게 정해진 길이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길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나답게 사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필요치 않으며 매우 자유롭고 걸림이 없다.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될 수 있다. ‘부처님’처럼 살지 말고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어떠한가. 부처님의 외형적인 모습인 32상 80종호를 닮고자 애쓸 일이 무엇인가. 32상 80종호가 부처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32상으로 모습을 바꾸고자 애쓴 분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32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다. 부처는 부처라는 상도 없고, 32상이라는 상도 없다. 다만 32상이란 우리들 중생들이 부처를 바라보고 스스로 상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32상이란 중생들의 시선이지 부처의 시선이 아니다. 부처가 32상을 갖추게 된 것은 그것이 갖춘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걸림 없이 ‘자기답게’ 산 결과다.

부처님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애써 32상을 갖추고자 애쓴 적도 없고 또한 특별한 상을 버리려고 애쓴 적도 없다. 그저 아무런 상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을 뿐이다. 부처님은 ‘누구처럼’ 살고자 전혀 애를 쓰지 않는다. 과거 연등부처님이 훌륭하셨으니 그 분처럼 살아야지 하고 생각한다거나, 스스로 부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겠다는 등의 생각이 없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상을 만들어 놓았고, 불상도 만들어 놓았으며, 32상 80종호도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된 부처님의 모습은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다. 특정한 모습 없음을 일러 법신이라 부른다. 다시말해 법신이란 진리의 몸이란 뜻으로 특정한 모습이 없는 온 우주법계, 삼라만상의 모든 모습을 부르는 이름이다. 내 모습도 법신이며, 산과 들도, 하늘과 바람도, 짐승이며 하늘사람도 모두가 법신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완전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이 모두 법신이다. 그래서 온 우주 법계에 법신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하나, 사람들만이 ‘남들처럼’ 살고자 애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나툰 법신 부처님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만이 열등감과 우월감, 잘나고 못난 분별로 인해 괴로운 것이다. 나무가 꽃을 닮지 못했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며, 하늘이 땅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만이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비교, 판단에서 오는 괴로움을 감당하고 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신이 되라. 법신 부처님으로 살아야지 왜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 것인가. 누구든 ‘나답게’ 사는 사람은 법신불로 사는 것이다. 법신부처님이 나로써 온전하게 나툴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부처님께 맡기고 가라. 완전하게 내맡기고, 완전하게 바치며,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법신부처님의 향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일체는 텅 비어 있다. 세계도, 미진도, 나도, 부처도 다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짐도 다만 인연에 따를 뿐이고, 미진도 나도 부처도 모두가 인연의 가합에 의해 이루어지고 사라질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다만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이름하여 진리라고 하고,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그것이 괴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슬프고 괴로운 마음은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봄이 와 꽃이 피다가 꽃이 지고 여름이 온다고 해서 봄은 죽고 여름이 살아났다고 할 것인가? 봄이 죽어서 괴롭고 여름이 태어나서 즐겁다고 할 것인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강물은 죽고 바다는 살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강물이 바다로 윤회했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다 이름일 뿐이고 모양일 뿐이다. 어떻게 이름지어도 좋지만, 어떻게 이름 짓더라도 옳다고 할 수도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라고 고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수의 목숨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 목숨으로써 보시했다고 한다면 그 복덕은 어떠한가. 내 소유의 물질로써 보시하더라도 그 복덕은 많을 것인데, 하물며 내 목숨을 바쳐 보시하였다면 그 복덕은 무량할 것이다. 앞서 말했던 칠보로써 보시하는 복덕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은 벌써 나고 죽는다는 분별 속에서의 보시이다. 내 삶을 바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 그것은 생사법에 빠져 있는 보시이다. 그것은 참된 무위의 함이 없는 보시가 되지 못한다. 본래 생사가 둘이 아니라면 생을 사로 바꿈으로써 보시할 것이 무엇인가.

차라리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 세상도 없고, 미진도 없으며, 나도 없고, 부처도 없다면, 열반도 없고, 생사도 없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온전한 보시이다. 본래 보시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주상보시가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지혜야말로 복덕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와 복덕은 하나다. 지혜가 복덕이고 복덕이 지혜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게송이 바로 이 금강경의 사구게이다. 그러한 지혜로 우리를 안내하는 게송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왜 애써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해야 하는가. 그 공덕은 유위의 공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생사가 본래 없으며, 보시할 것도, 보시할 사람도, 보시 받을 사람도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량한 복덕이 될 수 있다.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수도 없이 많은 생을 윤회하였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이만 많이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다는 사실이 그대로 나를 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도 없이 윤회하며 생사를 반복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은 커녕 업만 자꾸 쌓아왔다면 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 억겁의 세월을 허비하며 지낸 것이다. 그 사람에게 깨달음의 빛은 날로 줄어갈 것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믿고 받아지녀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면 그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 수도 없이 많은 생을 목숨 바쳐 보시하고, 수많은 물질로써 보시하고, 칠보로써 쌓아 보시한들 그것은 단 한 가르침을 올바로 수지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위의 복은 쌓는 공부지만, 무위의 공부는 놓아가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선이라도, 아무리 많은 복이라도 쌓는 것 보다는 놓아버리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선을 쌓고자 애쓰지 말라. 복을 짓고자 애쓰지 말라. 아무리 선을 행하고 복을 지어 봐야 유위의 복이고, 유위의 업일 뿐이기에 그것은 결국 채우는 공부 밖에 되지 못한다. 아무리 선이라 할지라도 채우는 것은 근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놓아버리는 것이다. 본래 공한 줄 알고, 본래 실체가 없는 줄 알며, 본래 그 어떤 상도 상이 아닌 줄 알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놓는 공부는 복덕이라는 유위를 뛰어넘는 무량복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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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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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홀로그램과 법계 그리고 수행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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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제 5, 여리실견분
진리의 참 모습을 보라.(참된 이치를 여실히 보라.)


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앞의 2분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대승정종분을 통해 네 가지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함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우도록 이끄셨으며, 묘행무주분을 통해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함으로써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함을 일깨우셨다.

이 분 여리실견분에서는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이어진다. 진리의 참된 이치를 여실히 볼 수 있도록, 여리실견 할 수 있도록 일체의 모든 상의 허망함을 일깨우며,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결국 여래를 볼 수 있도록 수행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여리실견분에서 금강경 내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금강경의 사구게가 등장을 하며, 이 사구게의 법문을 통해 우리가 수행해 나가야 할 마음공부의 방향을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이 때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께서 해 주신 법문에 대해 수보리는 ‘이렇게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하면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성취한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실천하였기에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셨고, 저렇게 거룩한 32상의 상호를 구족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처님께서 관해 보시고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형상에 얽매이고, 형상에 집착하며, 형상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분별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눈에 보여 지는 경계로써의 형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앞의 묘행무주분에서 언급했던 온갖 경계, 즉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의 모든 경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눈에 보여 지는데 집착하고, 귀로 들려지는데 집착하며,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모든 대상에 집착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바로 관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질문하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형상인 육신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일체 모든 대상의 형상을 보고 그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으며, 나아가 부처님 조차 형상으로써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형상으로써, 육신으로써는 부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수보리 앞에 계신 부처님이라는 형상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앞에 서 계시는 부처님의 육신은 단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형상일 뿐인 것이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다. 지수화풍이 인연 따라 모여진 것은 언젠가는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다. 인연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은 모두가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無我), 괴로우며(苦),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空)이다. 부처님의 형상 또한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상, 무아, 고, 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형상은 다만 지수화풍 사대가 임시로 모여 만들어진 가합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부처님의 형상에 얽매이는 것은 요즈음 절의 불상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절에 불상이 있고, 그곳에 절을 하는 이유도 불상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어느 한 곳 부처님의 숨결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며 결국에는 불상의 모습을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모습을 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부처님의 실체는 형상으로써의 육신 그 이면에 법신(法身)으로써 존재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법신이란 형상이 아닌 진리 그 자체의 몸이며, 크고 작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하는 모습이 아닌 진리의 당체이고, 온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숨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 진리 그 자체로써, 법으로써 부처님을 보아야지 눈앞에 보여 지는 형상으로써의 거룩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눈앞에 계신 부처님의 육신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고, 형상은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형상을 통해 참 진리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을 다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언제든 참 진리를 만났을 때 형상은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형상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라는 형상, 32상 80종호라는 형상의 거룩함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부처라는 형상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됨을 연설하고 있으며, 부처의 눈귀코혀몸뜻이 부처의 실체라고 집착해서도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교주인 부처의 몸에 조차 집착하지 말라고 설한다. 부처의 몸이라는 것도 부처의 몸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부처의 몸일 뿐이다. 인연가합의 공한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하물며 부처의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에 집착하여 머물고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정신은 제한 없는 무량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가 등장하고 있다. 이 사구게야말로 금강경 전체를 아우르고, 일체 모든 경전의 진리를 아울러 담고 있는 불교의 핵심 경구라고 할 수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게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하고 중요하며 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해 놓은 게송이다.

‘범소유상’이란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제법, 일체의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주체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눈귀코혀몸뜻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고, 몸으로 감촉되며 뜻으로 헤아려 지는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개시허망’이란 일체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범소유상이 다 개시허망이다. 이 세상에 형상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허망하다는 말은 공하다는 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표현되어지는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 공(空), 인연(因緣), 중도(中道), 무집착(無執着), 무소득(無所得)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삼라만상 형상 있는 일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으며[제행무상], 고정된 자아가 없고[제법무아], 괴롭다[일체개고]는 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공하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는 이유는 다 인연의 가합이라는 말이다. 인연이 가합되어 가짜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니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 무집착, 무소득인 것이다. 그러니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으며, 잘나고 못나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는 그 어떤 극단도 있을 수 없는 중도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구게에 등장하는 ‘허망’이라는 단어는 ‘허무하다’거나 하는 등의 ‘허무주의’로 쓰인 말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연기법과 삼법인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과도 같고,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중도, 무집착이나 무소득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는 이 점이 우리 앞에 놓여진 이 현상계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여 어느 하나 참된 것이 없고, 항상[常]하거나 즐겁거나[樂] 고정된 자아가 있거나[我] 깨끗하지[淨]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게송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는 말,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인 것을 바로 알아 일체 모든 형상이 실제는 형상이 아니며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즉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바로 금강경의 핵심중에 핵심이며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우리 사람들이 괴로운 것은 모두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명예가 권력이 욕심이 집착이 자아가 나아가 부처 조차도 모두 허망한 것이요, 텅 빈 것이며,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해 거기에 집착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모든 이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모두가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이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즉견여래 하지 못하고 괴로운 중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괴로운 것도 돈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위나 권력이 낮은 것도 지위나 권력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고, 성공하지 못한 괴로움도 성공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 ‘무엇’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내가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바로 그 ‘무엇’이 사실은 그렇게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무엇’에 대한 괴로움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끝끝내 집착하고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할 뿐 끝내 포기할 줄 모르고, 성공이라는 부유함이라는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한 생각 돌이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포기할 줄 모른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연기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로 ‘그것’을 쟁취해야지만 행복한 곳은 아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완전히 행복한 곳이고, 완전히 풍요로운 곳이며, 완전한 깨달음과 완전한 고요함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망하며 텅 비어 있기에 깨달음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란 말이다. 우리의 행복은 집착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그 마음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찾아 온다. 완전히 풍족한 세상에 살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족하며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일 때 행복은 찾아온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본래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사실이 진실로써 내 안에 깃들게 된다. 본래불이라는 것이 그 말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요, 본래 무한히 행복한 자며, 완전한 평화의 존재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떤 것에 상을 일으키고 그 상에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상을 짓고 부수고, 행복을 만들고 없애고 그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본연의 세계, 이 진리의 법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그 어떤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나타나지 않았으니 소멸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아무것도 없다. 본래자리로 가면 일체 모든 것이 딱 끊이진 적멸의 자리일 뿐이다. 아무리 우리가 몇 백 생을 윤회하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더라도 본래의 입장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룻밤 꿈을 꿀 때, 힘든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나고 죽기도 하며,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행을 벌이고 있지만 딱 꿈을 깨고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꿈이었을 뿐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답답해 할 아무 이유가 없다. 지금 이 현실 세계 또한 꿈인 것이다. 꿈이며 신기루고 환상이며 물거품인 것이다.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고 환상이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설사 이 지구가 몇 번 멸망을 하고 빙하기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본질에서는 적멸이고 지고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나고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본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음을,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하여 어느 하나 실체가 없음을, 다만 인연이 거짓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란 말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기 때문에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 한다는 이 진리에 대한 무명 때문인 것이다.

그 무명,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온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우리를 얽어맨다. 그러니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살아가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그러한 지혜가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이 게송의 소중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고,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한다는 이 말 앞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대자유의 깨달음인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에서 군더디기 붙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게송에서 대자유인의 걸림 없고 여여한 삶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광대무변하며 성성적적 무량한 깨달음이 바로 금강경 제일사구게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잠깐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역의 해석을 살펴보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해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 나온 상이란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모든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처님의 32상 이라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참된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32상이라는 모양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모양이 아닌 관점으로만 보아도 안 되며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으로 치우침 없이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상 아닌 데에도 집착하지 말도록 이끄는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에서처럼 모든 상이 허망한 것이므로 모든 상에 치우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상 아닌 것을 새로이 만들어 집착하게 되는데, 상에도 집착하면 안 되는 것 처럼, 상 아닌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형상에 집착하면 안 되듯이 형상 없는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또한 결국에는 구마라집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크게 볼 때 상도 타파하고, 상 아닌 상도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해석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즉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니, 모든 상을 타파하면서 도리어 ‘상 아닌 것’을 새롭게 만들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 또한 타파해야 할 것이란 얘기다. 상 아닌 것을 만드는 순간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분의 결론이자, 금강경의 중요한 핵심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일체 형상 있고 없는 모든 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고 있는 것임을 이 분에서 살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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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