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를 오르던 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고 또 걷다보니 뒤늦게 점심식사를 하지 못한 생각이 났다. 배시계는 꼬륵꼬륵 자명종을 울려댄다. 한참을 걷다보니 작은 간이식당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요기를 하기로 한다. 딱히 메뉴랄 것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이 허름하고 지저분한 식당에서 특별한 것을 주문할 생각도 없고 또 시간도 없고 해서 그저 간단히 ‘누들스프’라고 쓰여 있는 우리말로 ‘라면’을 주문한다.

기다리다가 잠시 주방을 구경하러 들어갔더니 눈에 들어오는 풍경! 설거지도 하지 않은 아마도 이전 사람에게 음식을 해 주던 것 같은 냄비에 그대로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순간 황당한 마음이 일어났지만 인도에서 그랬듯 이 정도야 그냥 지켜봐주며 웃어넘기기로 한다. 여기는 네팔이 아닌가.


인도에서 만났던 한 여행자는 제게 “인도에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 라면 역시 기대에 부응하는 상상이하의 라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더한 것은 그 곁에 있던 전에 쓰던 씻지 않은 국자, 개미들이 다닥다닥 붙어 음식찌꺼기를 먹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설마설마 했던 그 국자가 곁에서 “잠깐!” 하고 소리 지를 틈도 없이 그냥 냄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즈음에서 아예 포기를 하고 차라리 보지를 말자는 심정으로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휴~~ 그래 여기는 네팔이니까”


이 한마디로 한국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던 너무도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용납이 되고 받아들여진다. 결국 내 앞에 배달된 네팔 라면 한 그릇에는 포크를 들 때마다 면발 사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하듯 작은 개미들의 시신이 입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아~! 관세음보살”


해외 여행길에서 배우는 것이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견고하게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다른 나라에 가면 꼭 그렇지 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당연한 상식조차 다른 어떤 나라에서는 전혀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경악할 만한 어떤 일들이 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사람들 참 더러워 죽겠네’ 라고 할 만하지만 이 사람들은 반대로 한국 사람을 보고 더럽고 비위생적인 사람이라고 경악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런 음식 먹는 습관이나 조금 전 부엌의 상황과 같은 이런 더러운 모습에 놀라지만, 네팔인들은 한국인들이 달밧 하나를 시키고 또 무슨 국이나 수프를 시키고 또 볶음면 같은 프라이드 누들 등을 시켜 각각 자기 것을 자기가 먹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펼쳐 놓고 다같이 먹는데서 기절을 한다.


그러니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관념도 다 제 생각하기 나름이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불구부정(不垢不淨) 아닌가.


여기 사람들처럼 애고 어른이고 매일 숲에서 들에서 일하고 흙을 만지다가 그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이 더 더러운가, 아니면 깨끗하게 하겠다고 손에 온갖 크림을 바르고, 지하철, 버스, 공중화장실, 곳곳의 위생적인 현대 시설과 현대적 기계와 자동차, 매연, 가스, 분진 등을 수북이 덮어 쓴 손이 더 더러운가.


이 즈음에서 세상의 옳고 그름이라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우리에게서 옳은 것이 반드시 저들에게도 옳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 여행을 통해 서로 다른 것이 꼭 옳고 그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이점일 뿐임을 겸허히 수용하게 됩니다. 


[BBS 불교방송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중에서]


위 내용의 원본 여행기와 사진 바로가기

http://cafe.daum.net/truenature/KING/32

Posted by 법상

 

 

언젠가 히말라야 산길을 걷다가 촘롱이라는 산중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서 널고 촘롱의 밤 공기에 몸과 마음을 씻으러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아! 또 한 번의 내 인생의 클라이막스가 등장한다.


아! 나는 이런 밤하늘을, 이런 별들을, 이런 은하수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지리산에서 보았던, 그리고 설악산 중청산장과 지난 가을 비온 뒤 강원도 양구에서 보았던 별들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 더 밝고 초롱초롱히 빛나는 별들을, 그것도 몇 배는 많은 숫자를 지금 한 눈에 바라보고 있다.


별빛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깨닫고 있다. 어떻게 저토록 많은 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지 않고도 저렇게 떠 있을 수 있는지. 내 생에 이렇게 많은 별들의 숫자를 헤아려 본 적은 없다. 지금 이 순간,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별에 대한 고정관념, 별빛에 대한 가치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전혀 새로운 의미로써 새겨지고 있다. 말 문이 콱 막힌다. 도무지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별똥별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이에게 한 여행자는 태연히 말했다.


"하늘의 별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5분 이상만 눈을 안 떼고 별을 지켜보면 분명히 별똥별을 볼 거예요. 5분, 10분에 한 번꼴로 별똥별이 떨어지거든요."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거의 정확하게 5분에 한번 꼴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다.


저렇게 자주 떨어지는 별똥별을 왜 우리는 보지 못하고 살았을까. 밤하늘에서는 매일 같이 저 고징한 별들의 공연이 5분마다 펼쳐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인생의 30년, 40년 아니 70년, 80년을 단 한 번도 저들을 보지 못하거나 단지 몇 번 보고 소원을 빌 정도로 우리의 관심은 별에서 하늘에서 우주에서 자연에서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다. 빨리 빨리 해야 할 일을 해치우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업무를 소화해 내고, 남들에게 뒤질세라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바빠서 잠시 멈추고 세상을 바라보는데 익숙치 않은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과연 그런가?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향해 나의 주의와 시선을 모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이 그렇게 무의미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가장 흔히 간과되며,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삶의 비밀스런 진리가 바로 이 '바라봄'에 있다.


'분별 없는 바라봄',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어떤 한 대상을 관찰해 보라. 분별없이 다만 지켜보기만 해 보자. 바로 그 때 우리는 바로 그 대상과의 진정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으며, 진정 의미 있는 관계로 맺어질 수 있고, 참으로 그것을 사랑과 자비로 어루만지게 된다.


보통 우리가 보는 바라봄이란 현재를 내 안에 있는 과거의 어떤 틀이나 관념으로 대상을 끼워 맞추는 것이기 쉽다. 분별망상으로 걸러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그 어떤 틀이나 생각, 관념,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채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고 세상을 눈부신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바라봄의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별이든, 한 송이 꽃이든 그것 속에서 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 순간 내 안에서는 한 송이 연꽃이 만개할 것이다.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축복을 부여받는다.


[불교방송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중에서]


위 원고에 대한 여행기 전문 바로가기

http://cafe.daum.net/truenature/KING/34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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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고 얼마 안 가 구루종(Ghurjung, 2050m) 마을에 도착. 잠시 롯지에서 평소에 잘 안 먹던 콜라를 한 병 시켜 의자에 앉아 에둘러 돌아온 길을 바라본다. 이렇게 휘휘 돌아 올 일은 아니었는데, 또 그저 산 중턱으로 난 소로길을 따라 오기만 했어도 비교적 평탄한 길로 무난히 올 수 있었는데, 저 깊은 계곡 아랫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 것을 생각하니 꼭 우리 인생을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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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걷는다. 다시 저 아래 계곡 킴롱코라(Kimrong Khola)까지 내려갔다가 다리를 건너 다시 저 건너편 산 위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제 좀 익숙할 법도 한데,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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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분을 내려가고 다시 느릿느릿 1시간 이상을 걸어 오른다. 건너편 산 정상 부근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시원스레 내달려 계곡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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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 곳곳에는 어김없이 이 고산에서 몸 붙이고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다랑이논과 밭들이 위태롭게 서 있다. 그 논밭 사이로 아스라이 자리 잡고 있는 시골집 마당에는 곡식이 햇살을 받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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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에 다시 올라서니 그 높은 곳에 거짓말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이 깔린 훌륭한 롯지가 장쾌한 전망을 바라보고 우뚝 서 있다. 찌아 한 잔을 마시고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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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본격적인 야생의 밀림이 시작된다. 숲의 나무들이 그야말로 사람의 간섭을 한 번도 거치지 않은 것처럼 자유분방하게 제멋대로 쭉쭉 뻗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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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라고 했는데 사실 자연의 이 제멋대로 속에 인간의 질서를 넘어서는 자연 그 자체의 자연스럽고도 조화로운 질서가 저 졸막졸막한 가운데 종요롭게 스며 있다. 그래서 자연에 깃들 때는 인간의 가치판단이나 생각들을 한 켠으로 밀어재꺼두고 텅 빈 마음으로 하나의 자연이 되어 뛰어들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연의 가르침을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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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숲의 무위(無爲)함을 보라. 저 거칠 것 없는 야생의 사자후를 들어보라. 말과 생각이 끊어진 이 천연의 산중에서 이렇게 글을 토해낸들 그것이 저 풀 한 포기의 떨림인들 담아낼 재간이 있겠는가! 그저 걸으며, 소담히 소요하며 침묵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

어느덧 파아란 롯지가 인상적인 타다빠니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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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에서 사들고 간 라면 하나를 비로소 여기에서 끓여 먹는다. 라만 끓여주는데 30루피, 밥은 다 못 먹는다고 엄살을 부리면서 반공기를 50루피에 시켜먹는다.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일찍 타다빠니에 도착했고 점심식사도 12시 이전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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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약 4시간 거리의 푼힐의 베이스캠프인 고라빠니까지 가는 일정이다.

엊그제 ABC에서 만난 중국인 두 명의 친구를 또 만난다. 나보고 ‘스트롱맨’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추겨 세우고 지나간다. 그야말로 요즘 네팔에서는 중국인들을 어디를 가나 무수히 만난다. 산에도, 포카라에도, 룸비니에서도 중국인들의 인해전술 같은 여행패턴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간다.

네필이 왕정을 끝내고 마오쩌뚱 사상을 표방한 마오이스트가 정권의 핵심으로 들어오면서 중국이 네팔을 거의 형제의 나라처럼 생각하게 되었던 영향이 크다고 한다.

타다파니에서 고라빠니까지의 길은 그야말로 야생화들의 천국이다. 곳곳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천연의 꽃들이 만개했다. 느릿느릿 걸으며 꽃들을 사진에 담아본다. 야생화의 숫접은 생경함에 취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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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군락과 몇 백년도 더 되었을 법한 야생숲의 엄숙함을 뚫고 말인지 야크인지 안나푸르나의 물자 이동수단인 가축떼가 싱그러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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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빠니 사이의 중간 즈음이 되었으려나, 계곡물이 청연히 흐르는 무릉도원이 나타나더니 그림 같은 롯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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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사과 하나를 사서는 한 입 베어무는데 종작없는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후두둑 비 피할 시간도 주지 않고 폭포처럼 떨어지는 소나기에 깜짝 놀라 여유롭게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던 여행자들이 비좁은 롯지 식당 안으로 일제히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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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하던 롯지 식당이 순식간에 활기를 띄면서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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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지나가는 소나기다. 그것도 고작 5분 여를 넘기지 못하고 소락소락하게 오다 말고 가 버렸다. 비 옷을 꺼내 단단히 싸메 입다 말고 다시 접어 넣는다. 덕분에 계곡의 초록 생명들은 수런수런거리며 활기를 되찾는다. 시그러지던 계곡물도 생기를 띄며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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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마지막 오르막을 걸어오를 채비를 마친다. 어둑어둑한 계곡물을 따라 오르다가 이내 계곡과는 작별을 고하고 능선으로 접어든다. 새로운 꽃이며 풀들이 반갑다는듯 홀연한 바람을 만나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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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즈음에 다다르니 비로소 구름 사이를 뚫고 잠시 햇살이 오랜 숲에 부서져 반짝인다.

길을 걷다 보니 다시 한 번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라고 해 봐야 고작 롯지와 식당을 겸해서 운영하는 집 두어 채 있는 것이 전부지만, 이 곳에는 다양한 상품들도 내어 놓고 길 가는 여행객들의 시선을 잠시 잡아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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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빠져나가니 황량한 너른 들판에 휭하니 차고 외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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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머얼리 구름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아련한 설산의 봉우리들이 그 모습을 보여줄듯 말듯, 숨었다가 고개를 내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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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량한 정상에 작은 구멍 가게 하나! 이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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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길 위에서 걸음을 멈춘다. 난감한 갈림길.

도대체 어쩌자고 이 나라에서는 세계 도처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갈림길 이정표 하나 만들어 놓지 않았단 말인가.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보통 상식 수준에서는 이렇게 이정표 없는 갈림길은 어느 곳으로 가도 길은 통한다는 무언의 암시이기 쉽다. 물론 이 또한 한국에서의 이야기다.

네팔은 어디까지나 네팔이니 이 나라의 상식을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이 갈림길은 정확히 90도 직각으로 난 전혀 다른 길이 아닌가!

조금 앉아서 숨도 돌릴 겸 혹시나 뒤따라올 다른 여행자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거의 대부분 여행자가 포터나 가이드를 동반하고 있으니 물어가면 될 것이란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가며 나의 숨돌림은 30분을 넘어서고 있다.

그냥 직관으로 가야겠다고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그 길 반대편에서 네팔 현지인 3명이 걸어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다닥 내려가 물었더니 역시나 이 길이 고라빠니 길이다. 물론 예상했던 것처럼 다른 길로 가더라도 돌아가기는 할지언정 고라빠니에 도착하는 길이라는 것도 알았다.

20여 분을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고라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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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빠니의 롯지에서 주인과 얘기를 하다가 오늘 내가 온 길이 남들은 이틀을 걸어오는 길이었음을 듣고는 노곤한 피로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고라빠니에 어둠이 내린다. 어둠과 함께 곧장 잠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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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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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은 안나푸르나 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마을이다. 게스트 하우스도 많을 뿐 아니라 따뜻한 물이 부족하지 않아 샤워를 할 수도 있고, 어떤 롯지에는 탈수기도 있어 빨래를 빨리 말려 입을 수도 있다. 전기 사정도 좋아 전기제품이나 특히 카메라 건전지 충전을 마음껏 할 수도 있다.

처음 촘롱 입구에서 본 롯지에는 한글로 김치찌개, 김치, 된장에 심지어 백숙까지 한다며 한국인을 잡아끄는 곳도 있었다. 내가 머문 롯지에서도 네팔 닷밧을 시켰더니 한국인이라고 특별히 김치를 추가로 얹어주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많이 비싸지만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촘롱을 넘어서면서 급격하게 뛰는 물가를 생각했을 때 촘롱은 모름지기 모든 여행자들이 마지막으로 문명의 혜택을 큰 부담없이 누릴 수 있는 안나푸르나 여행의 전진기지인 셈이다.

나도 어제 도착하는 대로 모처럼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카메라 밧데리 충전도 하고, 주전거리기도 하면서 모처럼 정리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부터는 안나푸르나 지역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푼힐을 가기 위한 날이다. 아침 일찍 새로운 마음으로 가볍게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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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고 타다빠니를 찾아가는데 분명 지도상으로 보자면 저 아래 계곡마을 끝까지 다 내려가기 전에 두 갈래 길이 나와야 하는데 그저 올 때 왔던 길 밖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내리막 중턱 즈음에 희미한 갈래길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길이 정상적인 갈림길처럼 확연하지 않았는데다 아무런 이정표가 없어서 설마 했던 것이 길을 잘못 들게 하는 결정적 실수가 된 것이다.

올라가자면 한 시간 여를 올라야 할 거리를 다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단번에 돌아오는 첫 마디가 “길을 잃었다”는 말. 그러나 곧장 뒤따르는 말이 아주 희망적이다. “노프라블럼!”

한 30분만 다시 올라가면 또 다른 길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 낯선 곳에서 길을 잘못들어 30분 만에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길을 잘못 들은 것 또한 내가 알 수 없는 법계의 또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었으리라.

아무리 사소한 상황, 아무리 사소한 문제가 발생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우주적인 인다라망의 정연한 연결고리 속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고 벌어지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상황, 그 모든 사람, 그 모든 문제를 그저 아무런 분별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일이다. 더 깊은 우주적 차원에서 법계는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도록 배려 해 줌으로써 그 순간 우리가 털고 가야 할 어떤 삶의 과제를 완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때때로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나에게 아픔을 주는 방식으로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내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법계의 의미를 완전히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어떤 일이라도 내 존재위를 자연스럽게 오고 가도록 허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수행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누는 일을 그만두고, 양 극단을 뛰어넘는 완전한 대긍정으로 내 삶에 찾아오는 모든 경계를 받아들이라. 그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다. 더 큰 진리의 목적에서 보았을 때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다.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부정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버리고 양변을 뛰어넘는 중도적인 대 수용, 대긍정의 열린 마음으로 전환할 때, 우리의 삶에는 경이로운 변화가 깃들기 시작한다.

사사로운 내가 소멸되고 더 큰 진리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흔히 ‘업장소멸’이라고 부르는 대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고의 수행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자가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진리의 방식, 비법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완전한 수용과 받아들임, 무분별의 대긍정은 그 모든 두려움과 근심 걱정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그런 경계가 닥치는 순간 수용과 대긍정이 가능해지려면 바로 경계와 접촉하는 그 순간에 깨어있어야 한다. 생각과 판단에 휘둘리는 순간 받아들임과 대긍정이란 깨어있음의 덕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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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준 대로 걷기는 하는데 영 길을 잘못 들어 온 것인지 길이 끊기고 또 끊긴다. 대충 손짓으로 저 산 중턱까지는 가야 길을 만날 것이라고 했던 그 지점만을 바라보며 길 없는 우거진 숲길을 만들며 헤쳐간다.

마을에서부터 따라오던 피부병 심하게 난 개 한 마리에게 돌아가라고 아무리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질러도 아랑곳 않고 따라온다. 포기를 하고 숲길을 새로 내며 걸어가는데 이 녀석이 무슨 호법 신장이 된 것처럼 나를 앞지르더니 한동안 길을 들춰 오롯한 본래의 길로 안내를 해 주는게 아닌가. 옴 마니 반메 훔.

바른 길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길을 걷다가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니 그 개가 안 보인다. 비스킷이라도 주려던 마음에 안타까움이 서린다. 우주 법계 곳곳에 인로왕보살이 있고 나를 돕는 보이지 않는 힘이 없다고 어찌 섯불리 말할 수 있는가.

그러고 보면 이런 순간이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그런 생각지 못한 도움의 손길이 있어왔다.

대학시절 미국에 배낭여행을 갔다가 하루는 워싱턴에서 무작정 교외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다. 잘 알려진 여행지가 아닌 그저 무작정 현지인들의 속살 안으로 파고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한 겨울 버스 안에서 한참을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적이 드문 시골을 지나고 있었다. 후다닥 버스에서 내렸더니 해는 저물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신호가 왔다. 배는 고프고,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고, 한 겨울이라 몸은 얼어오고, 가까이 여관이나 숙소 그림자는 하나도 안 보이고, 불빛 있는 쪽으로 몇 발자국을 걸었더니 도로 가 식당 안에서 행복한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따뜻하고도 정겹게 맛깔스런 음식을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 생각도 나고, 외롭고, 또 어찌 해야 할지 방법은 없고, 이런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 놓고도 답 없는 상황에서 난감해 하고 있던 중이었다.

겨울, 낯선 외국 땅, 그것도 여행자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 홀로 뚝 떨어진 상황에서 답답해하며 시간이 흐르자 점차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저 막연히 걸었다. 걷다 보면 무언가 해결책이 나오겠지. 추운 겨울, 어딘지도 모르고, 인적도 없는 미국의 어느 한 시골 마을을 그렇게 계속 걸었다. 그런데 멀리 교차로가 하나 보이고, 그 한 켠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를 보았지만 그것은 그저 도로 한 켠을 채우고 있는 의미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흔해빠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전화부스가 그 순간 반짝이며 내 눈에 들어온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그것이 우주법계가 베풀어 놓은 나를 돕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마치 알기라도 했다는 듯 나도 모르게 무심코 전화부스로 발길을 옮겼다. 보통 전화부스에는 영어로 된 전화번호부 책이 두툼하게 한 권 메달려 있곤 했다. 추위나 녹일 겸 전화 부스 안에 앉아 의미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척이는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책 뒤에 한글로 된 한인 전화번호부가 무슨 부록처럼 달랑거리고 있지 않은가. 반가운 마음에 책을 뒤척였지만 도대체 이 많은 워싱턴 주변 한인 전화번호부의 수많은 사람들 이름과 상호명에서 어디로 전화를 걸어 SOS 요청을 한단 말인가? 한참을 살펴보았더니 그 뒤쪽으로 한인 종교시설들이 즐비하게 있는 것이 아닌가. 수 백 여 한인 교회 이름이 나왔고 이어서 단 몇 개 정도의 절 이름도 보였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법주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저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주지스님께서 전화를 받으셨고, 한참을 그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으시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전화를 끊으셨다. 그 ‘잠시’를 믿고 몇 십 분을 꼼짝 않고 벌벌 떨며 기다렸지만 스님의 소식은 없었다. ‘그래 다른 곳에 가서 나를 찾고 계실거야’, ‘이 미국 큰 땅덩어리의 어느 한 귀퉁이에 앉아 고작 주변 상호명 몇 개를 알려드렸는데 제대로 찾아온다는 것이 이상한거지’. 한 시간이 지나면서 그야말로 포기를 하고 있는데, “학생” 하며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전화를 끊고 잠시도 쉬지 않고 차를 몰아 달리신 것이다. 이 정도 거리는 미국에서 ‘잠시’가 맞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 날은 마침 구정, 설 전날이었다. 절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따뜻하게 단잠을 자고, 그 다음날에는 구정이라 절에 오신 신도님들과 떡국도 얻어 먹고 행복한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고등학교 3학년의 시작을 앞둔 1월의 어느 겨울,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겨울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 그대로 별 생각 없이 청바지에, 구두에, 얇은 점퍼만 하나 걸치고, 가방에는 물 한 병, 빵 한 조각 없이 새벽부터 치악산을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릴 때라 국립공원이니 가다보면 슈퍼나 민박집에 딸린 매점이라도 있겠거니 하고 올랐는데, ‘아니 이럴수가’, 그 흔한 매점 하나 없는 코스로 올랐던 것이다. 허기진 배야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고, 뭐 죽기야 하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상원사 쪽에서부터 비로봉 쪽으로 눈으로 길도 뚝뚝 끊겨버린 능선을 따라 종주를 이어갔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배는 고파오고, 손발은 꼼짝없이 얼어붙고, 구두는 낡고 미끄러워 번번이 미끄러지기 일수고, 게다가 겨울산을 산행하는 사람은 그 날만 그런 것인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니 시간은 저녁으로 치닫고, 마침 그 때부터 때 아닌 눈발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겨울 산행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완전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 중간에 내려가는 길이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정신까지 혼미해지고 있었다!

배고픔과 추위와 외로움과 공포, 눈보라와의 사투를 비몽사몽으로 이어가던 중 환영이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바로 무슨 절이 나온다는 이정표가 아닌가. 내려가는 길이었다. 미끄럼을 타듯 혼미한 정신으로 겨우 겨우 내려갔더니 스님께서 따뜻한 라면에 밥, 과일과 떡을 가득 내어주셨다. 잠시 쉬고 기운을 차리고 났더니 버스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 주셨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처럼 살면서 막막하고 답이 없을 것 같던 수많은 순간들을 우리는 잘도 헤쳐 나왔다. 늘 그 때마다 답은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라. 기적 같지 않은가. 그야말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나 요정, 호법선신이 있는 것이든 아니면 예전에 돌아가셨던 할아버지 조상신께서 나를 돌본 것 같기도 하다. 무어라 불러도 좋지만 분명 그런 ‘분’은 계신다. 물론 그 분이 ‘분’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사람이나 신적인 존재일지, 아니면 그저 불성이나 신성, 혹은 법신이나 성령처럼 형상이 없는 존재일지, 그것도 아니라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원리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고 돌보아 주는 수호천사는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다. 삶이라는 현장 그 자체의 근본 속성이 자비요 사랑이 아닌가. 불교에서는 자비를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교리가 아니다. 이 우주법계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며 돕고 있고, 자비와 사랑으로 감싸고 있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조차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나를 돕는 자비로운 손길일 수 있다.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에게서 나는 어머님의 품 같은 자비로우심을 본다.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서 보라. 발 아래 여린 풀꽃과 돌맹이 하나 조차, 하늘의 구름과 바람 한 자락 조차 소곤소곤 우리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있다. 삶이 버겁고 힘겨워질 때면 언제나 이 우주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 보라.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겼을 때라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내면과 세상을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라. 분명히 나를 돕는 손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일수도 있고, 동물일수도 있으며, 책 한 권일 수도 있고, 흘러가는 라디오 소리일 수도 있으며, 바람과 구름일 수도 있다. 스승님일 수도 있고, 어린 아이일수도 있으며, 바보 같다고 여겼던, 혹은 미워했던 누군가일수도 있다.

만약 아직도 그 도움의 손길을 보지 못했다면, 먼저 내 가슴이 덜 열려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이 세상이 나에게 주는 가르침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열려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만약 가슴을 활짝 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거나 서글퍼진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답일 수도 있다! 지금은 잠시 힘들고 괴롭고 슬픔을 경험해야 할 때인 것이다. 바로 괴로움과 슬픔을 통해 성숙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 우주는 나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리라.

삶은 언제나 균형 있게 배워야 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균형 감각을 가지고 세상을 경험해 나가야 한다. 행복을 통해 얻는 것과 동시에 불행을 통해서도 얻을 것이 있다. 풍요로움을 통해 깨닫는 것과 동시에 가난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도 함께 얻어야 한다. 나에게 칭찬해 주는 사람을 만남과 동시에 나를 비난해 주는 사람을 통해서도 깨달아 나가야 한다. 어느 한 쪽만을 고집하면 영적 성숙이 균형을 잃는다.

어떤가.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이 우주법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 우리를 무한한 자비로움으로써 돌보고 있다.

히말라야가 아니라, 아프리카나 극지방에 있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그 어떤 여행을 떠날지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이 우주법계라고 하는,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숲과 나무와 동물 친구들이, 또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자연과 우주가 있지 않은가. 활짝 열린 가슴만 있다면 어디로 떠나도 좋다. 어디에도 좋은 벗, 좋은 스승은 있으니.

그러니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여행자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 어떤 것도 겁내지 말라.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림 없이 자유롭게 거닐어 보라. 이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 아니 나를 돕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가 나를 품어 기르고 있다. 가슴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을 향해 우리는 다만 두려움 없이 걸어가면 된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는 질서 그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크고 깊은 법계의 질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질서에만 귀 기울이고 살 것인가, 아니면 그 이면에 깊은 뜨락에 자리한 법계의 투명한 질서에 나를 내맡기고 자유롭게 휘적휘적 우리의 삶을 유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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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밀라야 일출을 기다리며

그 어떤 날보다 일찍 눈을 뜬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보는 일출, 그것을 어둠이 채 거치기도 전부터 하나하나 누려본다. 롯지는 여전히 어둡고, 하늘의 별은 선드러지게 빛난다. 후레쉬를 켜고 롯지 뒤편 작은 언덕에 오른다.

아직 밝아지기 전인데도 이 찬 공기를 마다않고 많은 여행자들이 눈 부비며 이불을 막차고 나와 있다. 이 곳에서의 일출이나 일몰이라는 것은 사실 직접 태양이 산 너머로 뜨고 지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저 머얼리 어딘가에서 뜨고 지는 태양이 그 빛을 설산의 영봉들에게 나누어주는 붉은 의식을 보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이 대지위 가장 높은 곳부터 붉은 은총이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 끝자락에 붉은 점이 찍히다가 서서히 그 점이 아내로 향하면서 봉우리 전체를 밝그레한 새색시의 순후한 낯빛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강가쥴리의 일출이 구릉족들의 염원을 담은 룽다의 푸두둥거림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렇게 한참을 봉우리의 빛 잔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아연하게 주변 전체가 밝아져 있음을 본다. 이 황량한 신비속에서 세상이 아직 깨어나기 전에 가장 먼저 첫 아침을 맞이하는 소회에 젖어든다.

이 아침에 또 다시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 같은 것이 머얼리서 마치 사자의 표효처럼 들려온다. 아! 이 소리는 내 삶에서 그간 들어왔던 그 어떤 소리와도 견줄 수 없는 일종의 두려움을 동반하는 경외감이다. 문득 저 빙하를 무너뜨렸을 법한 황량한 소소리바람이 스쳐간다.

 

아, 이 낯선 외로움!

아! 이 낯선 외로움!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치 않은 설면한 것들이라 이 외경의 새로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가 힘에 겹다. 그러나 삶의 신비는 이토록 역설적인 것인가. 낯선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알수 없는 익숙함과 어머니 우주의 자궁과도 같은 고향의 내음이 들려온다.

그러면서 순간, 지금 이 자리가 낯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그리 길지 않았던 내 삶의 여정이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이라는 내가 살아온 익숙한 고향에서 잠시 이 곳으로 순례를 떠나 온 여행자가 아니라, 이 곳에서, 내 태속과도 같은 숭고한 이 귀의처에서 영겁을 살아오다 잠시 한반도라는 작은 땅을 여행하고 되돌아 온 귀향인이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하룻밤 꿈속에서 지금까지의 한 생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한 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순간이 한 순간의 꿈이 아니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은 우리 모두가 꿈을 꾸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현실인식인지 모른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제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 가운데 꿈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 도대체 하나라도 있단 말인가! 내가 목숨 걸고 지키려고 발버둥치며, 소유하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것들이 꿈처럼 언젠가는 사라지고야 마는 것들 아닌가.

그간의 삶에서 구축해 왔던 견고한 모든 것들, 내 소유, 내 명예, 내 집과 재산, 내 사랑, 내 가족, 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전혀 견고하지도,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니던가! 그런 것들에 우리는 너무 집착해 왔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쏟아왔으며, 그 허망한 것을 지켜보고자 때로는 남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속이고, 심리적, 물질적 폭력을 가해 온 것은 아닌가.

10시간 하룻밤 잠 속에서 꿈꾸는 것과, 100년도 안 되는 시간 삶 속에서 꿈꾸는 것이 사실 시간을 초월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매한가지 일 뿐이다.

우리는 과연 이 삶이라는 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꿈을 깰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믿어왔던 이것이 꿈 속의 존재라면 과연 꿈 깬 나는 누구란 말인가?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뭣고!

 

하산, 일출을 뒤로하며

활화산 같은 화두를 품고 타박타박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저 걸을 뿐. 그저 다음 발자국에만 주의를 모으며 걷다보니 어느덧 촘롱이다. 걷고 있다는 이 순간의 움직임, 그 자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걷는다는 것은 그저 걸을 뿐이지 어떤 도착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목적지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며칠까지 산행을 끝내고,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걷는다면 우리는 그 순간 참된 걷기를 잃고 만다.

걷는 목적은 그저 그 한 발자국의 옮김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도착을 위해 걸을 때 우리는 걷는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걸음에는 어떤 힘도, 어떤 지혜도, 어떤 아름다움이나 자비로움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걸음 그 자체로써 걸을 때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는 성스러운 영적 수행의 길과 다르지 않다. 걷는 그 순간 우리는 바로 거기에 있으며, 과거나 미래나 혹은 다른 공간이 들어설 틈이 없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별적 사고에서 벗어나 오직 '지금 여기'에서 다만 걷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성스러운가. 절이나 교회에서 정기적인 기도회에 참석해 예배를 올리는 행위가 이보다 더 신성하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단순간 걷는 행위가 얼마나 신성해질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낀 하루!

올라갈 때를 생각하면 이틀에 걸쳐 오른 길을 내려올 때는 단박 하루 만에 내려오고도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

촘롱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엊그제 밤에 묵었던 옆 롯지에 들어가 씻고는 한가로이 마을을 산책한다. 어둠이 마을 전체에 깃들고 저녁식사를 마친 뒤 롯지 식당에 앉아 책을 읽는다. 그런데 무슨 사물놀이 하듯 흡사 북치고 장구치며 꽹과리를 부는 소리가 어스라히 들려온다. 무슨일인가 싶어 마을길을 걸어내려갔더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열고 있다. 나팔을 불며 여인네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이 마을에 사는 구릉족들의 페스티발이다. 외국인 여행자들도 함께 모여 흥겨운 잔치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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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고지, 양떼들의 존재감

MBC를 지나 ABC로 가는 길은 이번 트레킹 중에서도 최고의 클라이막스다. 절정이란 말은 이럴 때 하는 것! 이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닌 대자연의 길이요, 이 지구가 아니 어쩌면 우주 저 끝의 알 수 없는 근원에서부터 잉태된 태초부터의 선물일런지 모르겠다. 대 장엄의 서사시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소름끼치는 하모니가 지금 내 앞에서 이렇게 연주되고 있다.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몇 걸음 못 가 이내 걸음을 멈추고 서서 '아!' '아!' 하는 탄성을, 내가 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 모든 것을 느끼는 어떤 존재가 내 입을 빌려 마구마구 쏟아내고 있는 듯 하다.

ABC가 가까워지도록 바람이 약간 서늘할 뿐, 예상했던 것처럼 그리 차지는 않다. 저 멀리 ABC 너머 강가츌리와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차디찬 설봉을 스치고 왔을 바람치고는 춥다기 보다 청량감에 가깝다.

바람 맛이 아주 달다. 때때로 거세게 몰아치는 돌풍이 온몸을 적시는 느낌이 청청하다.

'휘~익', '슈~웅'

바람을 좋아하는 내게 이 산정의 바람은 안나푸르나가 나를 반기는 인사 같기도 하고 고마운 선물 같기도 하다. 황막한 좌우의 거친 산봉우리 중턱까지 양떼가 풀을 뜯으러 올라갔다.

이 4,000고지의 황량한 땅에서 그나마 졸졸 흐르는 계곡 좌우로 땅에 다닥다닥 붙어난 가난한 풀을 뜯는 양떼들이라니! 아! 이 풍경이 상상이나 되려나?!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떤 뛰어난 시인의 묘사나 화가의 작품, 심지어 사진이나 HD 동영상으로 담을지라도 어찌 지금의 이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훌륭한 시인이라도 양떼의 울음소리 하나 또렷이 담을 수 없고, 아무리 뛰어난 화가일지라도 저 황막한 산빛과 냇물의 투명한 빛을 담아낼 수는 없으며, 뛰어난 사진작가일지라도 이 청량한 바람 소리를 담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 이 느낌! 이 소리! 이 촉감, 이 빛깔과 향기를 어찌 인위적인 기계가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대자연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다만 순간 순간 찰나찰나 느껴볼 수 있을 뿐! 이 느낌, 이 신과 나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 대화, 이 느낌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다.

인도와 히말라야에 오기 전에 만난 TV 브라운관 속의 설산과 안나푸르나는 지금 내가 온 몸으로, 온 존재로 만나고 있는 이 만남과는 달라도 크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의 길과 자연의 길이 조화롭게 펼쳐진다. 억지스럽지 않고 소담한, 길에서 길로의 자연스런 이어짐. 이 곳에서는 인간도 하나의 자연일 수밖에 없다. 이 장대한 자연 앞에 어찌 인위적인 폭력이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계획변경, 베이스캠프에서의 하룻밤

ABC에 도착한 시간이 아직 점심 전이다. 점심 즈음이 되면 구름이 낀다고 일찍 가야 ABC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거라던 앞선 여행자의 조언이 딱 맞아 떨어졌다.

MBC에서 ABC 중간 까지만 해도 청량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물을 빨아들인 것 같은 구름이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ABC에 도착할 즈음에는 멀리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캠프의 롯지는 구름 속에 갇혔다.

ABC를 보고 내려가려던 계획이었지만, 어찌 이 풍경을 그저 힐끗 보고 정신 없이 바쁜 사람처럼, 혹은 오직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처럼 곧바로 발길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예상하지 못했던 MBC와 ABC의 장쾌한 풍경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다가 꽉 들어찬 구름이 ABC의 풍경이 어떤지를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묵기로 계획을 변경하기로 한다.

오후 내내 어둡고 무거운 구름들이 롯지 주변으로 배회를 하느라 때때로, 아주 때때로 구름 사이로 작은 창을 하나씩 만들어 거짓말처럼 저 멀리 설산의 속살을 애간장 태우듯 간간이 비춰주곤 한다.

4,200고지, 이 청량감 넘치는 고산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쉰다. 롯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이 높은 곳에서 이런 휴식의 장소가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할 정도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산장에서도 보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들까지, 게다가 혼자 잠을 청하고 쉴 수 있는 독실까지 준비되어 있는 롯지가 새삼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안나푸르나가 토해 낸 맑은 숨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코를 통해 저 아래 깊은 곳까지 아마도 온 몸의 맥과 혈을 타고 세포 하나 하나에 이르도록 몸 전체를 타고 흐른다. 가만히 가만히 바람을 느껴보면 그것이 호흡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온몸에 감전되듯 전해져 나가는 그 흐름을 잡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몸 안에 물줄기가 흐른다. 생명의 줄기를 타고 존재의 빈 공간 구석구석까지 사랑의 에너지를 입맞추듯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 이렇게 앉고 걷는 이 자리가 안나푸르나의 중심이요, 세상의 중심 자리가 아닌가 하는, 그리하여 내 존재가 그 중심에 우뚝 서서 이 장대한 우주길을 소요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온 존재를 활짝 열어두고 이 대자연에 모든 것을 맡긴다.

 

일몰, 마차푸차레와 빛의 장엄한 연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시간이 멈춰버린 사이에 문득 서쪽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구름 사이로 우뚝 솟아나더니 이내 황홀한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이 아닌가. 아무 소리 없이, 무슨 홍보나 귀뜸도 없이 홀연히 저홀로 저토록 찬연한 공연의 막을 올리고 있다.

자연이란 늘 이런 식으로 침묵 속에서 찾아온다. 인간의 방식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지 않은가. 사람들이야 무슨 조악한 것을 벌이면서도 그것을 홍보하랴 티내랴 자랑하랴 열을 올리지 않는가. 내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고 나면 입이 근질근질해 참지를 못한다. 인간의 방식은 늘 과장과 과시와 어떻게든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보라. 저 대자연의 방식은 언제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저토록 장엄한 연극의 막을 올리면서도 그 누구에게 귀뜸조차 하지 않고,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그저 소담히 표연히 무위로써 제 할 일을 해 나갈 뿐이다.

마차푸차레와 태양빛이 합주해내는 연주는 그리 길지 않다. 한 5분에서 10분 여의 시간 동안 홀연히 시작되다가 앵콜도 없이 그저 자연스레 막을 내리는 것이다. 금빛 햇살이 봉우리를 따스히 감싸안더니 이내 흩뿌렸던 하늘의 빛조차 모두를 거두어간다.

대지는 다시 묵직한 어둠에 잠긴다. 산맥 산맥의 거칠 것 없던 힘줄도 햇살과 함께 종적을 감춘다. 큰 빛이 세상 모든 것을 거둬가면서 인간세상의 작은 빛들이 롯지 곳곳에 힘없이 피어나더니 그 또한 이른 시간에 꺼져간다.

산의 밤은 그래서 길다. 8시, 늦어도 9시면 모든 이들이 잠에 들곤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빛의 향연을 그리워하는 몇몇 사람의 발걸음이 늦은 9시 롯지 곳곳에서 또 다른 탄성을 만들어낸다.

별이다. 은하수와 별과 그 빛에 잠시 숨었던 육중한 몸을 아스라이 보여주는 저 히말라야의 설빛,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우주, 또 다른 차원이 하나 뚝 떨어진 것 처럼.

낯선 아름다움, 타임머신을 타고 우주가 시작되던, 혹은 공룡들이 이 지구 행성 위를 소요하던 그 태초의 원시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제법 찬 바람이 저간의 틀에 박힌 정신과 일상에 성성한 죽비를 후려치듯 차디찬 경책이 영혼을 일깨운다.

오늘 밤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정신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쟁쟁하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서 창밖의 별을 헤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자다가 무슨 소리를 듣고 깨었는데, 이 적막강산에 표연히 거센 소리 하나가 산중을 덮친다. 저 머얼리 머얼리서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 와! 겉옷 하나를 껴 입고 뛰쳐나가 잠깐 사이에 들려 온 빙하 소리의 자취를 더듬어 보지만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거대한 설산, 거대한 침묵 속에 거대한 소리 하나가 보태지면서 잠자던 내 안에 거대한 파문 하나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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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랄리 계곡을 따라 베이스캠프로

데우랄리 깊은 계곡에 날이 밝는다. 바로 곁에 계곡이 있어 그런가, 아니면 그만큼 높이 올라와서 그런가. 데우랄리는 지금까지 묵은 곳 중에서 가장 춥고 바람이 많은 곳이다.

어지간히 바람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 곳 계곡의 골바람은 한겨울 살을 에는 그것처럼 차다. 밤새 꿈속에서도 들려오던 계곡 물소리, 바람소리와 짧은 작별을 고하고 이제 이번 트레킹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 Annapurna Base Camp, 4130m)와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MBC, Machhapuchhare base camp, 3700m)를 향해 발을 옮긴다.

계곡의 아침은 늦다.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을 한참 오르도록 저 위에 봉우리에서만 밝게 빛나는 햇살은 내려 올 기색이 없다. 어둑어둑한 계곡길을 따라 춤을 추듯 느릿느릿 타박타박 걷는다. 고도를 높일수록 새로운 꽃들이 반긴다. 새롭게 고개를 내미는 꽃들을 만날 때마다 오랜 연인을 만나듯 설레는 눈빛으로 지켜본다.

고갯마루 하나를 올라서니 저 멀리 투명하고 노오란 설산 하나가 우뚝 다가온다.

새벽 빛에 물들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그러나 청정히 서 있는 설봉, 그 설봉을 향해 한 발 한 발 연인을 만나는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야말로 '그녀를 만나는 곳 백미터 전'인데, 이 거리가 눈으로 보면 잠깐 사이에 오를 것 같지만 얼마나 먼 거리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 안나푸르나의 묵직하고 드넓은 풍경은 전에 보아오던 거리감이나 공간감이 아니다보니, 과거 비슷한 기억을 끄집어 내어 비교, 대조해 볼 대상이 내 안에 없는 것이다.

눈 앞 정면으로는 높은 설산 하나 우뚝하고, 왼쪽과 오른쪽으로는 높이 솟은 봉우리들의 어깨동무, 그리고 그 사이 내가 걷는 길 오른편으로 청연한 계곡의 물이 흐른다.

물길을 따라 위로 위로 걸어 오른다. 길 좌우로는 제법 드넓은 초원에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잠시 뒤 있을 햇살과의 살가운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행성, 마차푸차레

그리 오래 걷지 않아 저 멀리로 MBC가 목전이다.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 가까이인데 왜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993m) 봉우리가 왜 보이지 않나 싶었는데, 오른편 산봉우리 뒤로 잠시 숨었다가 MBC 롯지 가까이에 다다라서야 그 투명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포카라에서, 사랑콧에서, 페와 호수에서 며칠이고 만나왔던 바로 그 뽀족히 우뚝 솟아오른 독특한 영봉의 주인공, 물고기 꼬리라는 뜻의 마차푸차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는 것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것인가. 더욱이 마차푸차레는 히말라야에서 유일하게 아무도 등정하지 못한 산으로 유명하다. 1957년 지미 로버트가 이끄는 영국 등반대가 정상 50m 앞까지는 등반한 적이 있으나, 결국 그 이후로 단 한 사람의 등반가도 이 곳 봉우리까지 오른 이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는 네팔인들이 특별히 이 산을 신성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의 롯지에 오른다. 따뜻한 생강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롯지 주위를 걷는다.

롯지는 마차푸차레를 비스듬히 좌측으로 바라볼 수 있게 지어졌으며, 뒤쪽으로는 안나푸르나 장엄한 영봉들을 병풍처럼 호위시키고 있다.

롯지 뒤쪽으로 난 길을 몇 미터 가면 탁 트인 뷰포인트를 만난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는 전혀 만나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여기가 바로 안나푸르나구나' 싶은 그런 이국적인 혹은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법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위쪽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방향으로 계속해서 이 꿈같은 황량한 아름다움이 이어지는 것이다.

오전의 햇살이 드디어 롯지 위로 내려앉는다. 따스한 눈부신 햇살의 찜질을 받으며 따끈한 생강차 한 잔에 몸을 녹이며, 산들 산들 살랑살랑 불어오는 남실바람이 뺨 위로 스치우는 느낌에 귀 기울이며, 눈으로는 마차푸차레와 지나 온 여정의 계곡을 바라보고 이렇게 서 있다. 이렇게 가만히 서서 이 모든 것을 느껴본다.

온 산의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깊은 평온 같은 것이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바람이 맨살에 부딪히는 촉감조차 성스럽게 느껴진다. 눈귀코혀몸뜻을 완전히 활짝 열고, 예민하게 깨어 지켜보며, 이 여섯의 문으로 들어오는 대자연의 모든 것들을 거르지 않고 흡수한다.

눈에 비친 설산의 영봉들과 귓전을 스치우는 계곡 물소리, 바람소리, 사람들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슨 동물의 꽥꽥이는 웃음소리, 그리고 간간이 그 소리 사이 사이에 묵직하게 내려 앉은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까지 온 몸이 귀가 되어 그 소리들이 증폭되어 들려온다. 그리고 코로는 이 설산의 내음을 맡아 본다. 향기 없는 청정하고 순결한 그 어떤 내음이 나지 않는 맑은 샘 같은 향기가 코로 들려온다. 혀로는 생강차의 따스하고 달콤한 온기를 고르란히 굴리며, 몸으로는 노곤한 하루를 마치며 집에 들어와 쓰러져 누운 아비의 심신을 고사리 손으로 주물러 주는 어린 아이의 손길 같은 햇살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손길을 느껴본다.

이렇게 온몸의 감각을 열어두고 느끼다 보면 저절로 생각이 줄어든다. 어느덧 생각이 활동을 멈추고 생각 너머의 맑은 공간이 대자연의 이 공간 처럼이나 선명히 드러나곤 하는 것이다.

이 우리 몸의 여섯 문을 달마는 도적이라 비유했다. 이 여섯 문을 잘 지키면 그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대상에 속지 않을 수 있고, 집착하거나 욕망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우리 존재는 그 어떤 다툼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섯 문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오고 만다. 그러면서 우리 내면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도적을 잘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달마는 『파상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눈으로 욕망의 대상이 들어오고, 귀로 달콤한 칭찬과 듣기 싫은 욕설이 함께 들어오고, 코, 혀, 몸, 생각에도 온갖 것들이 들어와 마음의 백지에 온갖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 여섯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에 생각은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다는 분별과 차별의 이름을 붙여놓고서는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미워하는 활동을 시작한다. 그 활동에서 모든 애착과 증오, 모든 괴로움과 쾌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는 눈귀코혀몸뜻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집착하거나, 좌우되며 휘둘리거나, 분별심을 일으키거나, 탐미하지 말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여섯 문을 잘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이 여섯 문에 집착하지 않고 지혜를 닦아갈 수 있을까. 주인이 자기 집 문을 잘 지키면 도둑이 들어오지 않듯, 우리 몸의 여섯 문을 잘 지켜보면서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아차리고 자각한다는 말은 다만 있는 그대로, 들어오고 나가는 그대로 지켜본다는 말이지 거기에 어떤 판단을 가하거나 특별한 쪽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각과 깨어있음은 모든 분별을 넘어선 곳에 있다.

그래서 달마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 라."

여섯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잘 관찰, 관조해 보라는 것이다. 잘 지켜보라는 말이다. 지켜본다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오고 나가는 그 모든 것에 차별상을 붙이지 않고 어떤 것이든 그저 바람처럼 오고 갈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받아들이되 붙잡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잘 지켜본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저 그것이 오고 가는 것을 충분히 느껴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분별 없이 잘 지켜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눈이란 문으로 한 송이 작은 꽃이 들어올 때도 그 꽃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면서 그 안에서 신의 특성을, 진정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찾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것을 잘 관하게 되면 그 안에서 신성을 만나고 근원을 마주하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은 그 안에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와 같은 인위적이지 않은 대자연의 자연스런 숨결을 마주할 때 그 진리의 속성들은 우리 안에서 꽃처럼 피어나기 쉽다. 가공되지 않은 천연스러움,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그것 자체가 이미 근원 속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법상

 

사우스와 히운추리의 일출

이른 새벽,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눈이 뜨인다. 눈을 뜨자마자 깜짝 놀란 사람처럼 앞마당으로 뛰어 나간다. 여전히 새벽별이 하늘을 수놓고 있지만 동녘하늘이 깨어남과 함께 별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어스름한 아침, 어둔 이불을 걷어치우는 촘롱 마을, 그 위로 우뚝 선 안나푸르나 사우스(Annapurna South, 7219m)와 히운추리(Hiunchuli, 6441m)의 기상이 초연하다.

시간은 정지된 듯 정지된 듯 그러나 침묵의 새벽을 뚫고 쏜살같이 흐른다. 어느덧 창백하던 새벽빛이 황금빛으로 바뀌며 사우스와 히운추리 설봉의 저 위쪽부터 서치라이트를 비추듯 빛이 비쳐 내려오고 있다.

사우스와 히운추리가 금빛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대자연의 공연을 벌이는 동안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501m)와 안나푸르나 3봉(Annapurna III, 7555m)은 저만치 떨어진 발치에서 해끔한 눈을 뒤집어쓰고 즐거운 관객이 된 양 두 봉우리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다. 촘롱에서는 새벽 시간의 주인공은 사우스와 히운추리의 장엄한 일출이고, 저녁 시간의 주인공이 바로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3봉의 처연한 일몰이다.

해질 무렵이 되면 하루 종일 희뿌옇던 두 봉우리가 저녁놀과 함께 장결한 빛의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두 공연 모두 클라이막스는 잠깐이다. 한 5분에서 10분 정도 봉우리를 붉게 달구며 태양과의 합주를 이루어내고는 이윽고 더 밝아지거나 더 어두워지곤 한다.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일출을 이곳에서처럼 가깝고도 명정하게 볼 수 있는 곳은 없지 싶다. 산정의 봉우리 빛깔이 비스듬히 비치는 첫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붉게 타오르더니 점차 그 빛을 산 아래 몸뚱이 전체로 흩뿌리며 절정의 빛감을 대지와 나눈다. 봉우리의 빛이 흐려지는 대신 촘롱 전체가 밝아오기 시작한다. 첫 새벽의 빛은 화려하지만 좁고, 이윽고 퍼져나가 산 전체를 감싸는 빛은 수수하지만 전체 산맥을 고루 비춘다.

이마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따갑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햇발에 등을 돌린다. 산과 나무와 집과 꽃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 햇귀의 축복을 받아 하늘거리며 속삭인다.

일찍 아침을 챙겨먹고는 길을 나선다. 사우스 봉우리는 여전히 당당하다. 산등성을 따라 길게 늘어 선 게스트 하우스, 표연히 나부끼는 룽다(Lungda)와 타르초(Tharchog), 그리고 반짝이는 햇살과 영봉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 말고 이 한 자락 그림 풍경에 넋을 잃고 서 있다. 길을 걷다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하릴없이 이 수윤한 풍경에 잠긴다.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 곳은 경전이요 진리가 숨 쉬는 법신(法身) 그대로다. 거기에 타르초의 성성한 수트라 한 구절이 여린 바람에 흩날려 이 대지 위로 법을 설하고 있는 풍경이란!

깊고 중후한 목소리의 노스님 염불소리가 귓전을 씻고 지나가는 듯도 하고, 가난한 시골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성가대의 연주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이 오랜 대지와 산이 만들어내는 진리의 풍경소리가 어찌 인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인가.

내리쬐는 아침 햇발 사이사이로 따스한 법비(法雨)가 내리는 듯 하다. 산봉우리에서부터 능사면 전체로 퍼져나간 촘롱의 계단을 오랜 마을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걸어내려 간다. 계단 끝에는 사우스에서부터 내려왔을 눈 녹은 시원한 계곡물 줄기가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면 지금까지 내려 온 만큼 다시 걸어 올라가야 한다.

 

가을, 산에는 꽃이 피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햇살을 머금고 있는 꽃들과 인사를 나누며 산을 오른다. 꽃들이 참 많다. 지난 주 막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 온 한 여행자에게 설레는 마음으로

"산에 가면 지금쯤 꽃들도 많겠지요?"

하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꽃요? 못봤는데요. 요즘 산에는 꽃 없어요."

였다.

그러면 지금 내 눈 앞에서 이렇게 선하디 선한 모습으로 내 눈길을 반겨주는 이들은 뭐란 말인가! 분명 지천으로 피어난 꽃을 바라 볼 마음의 빈 공간이 없던 거지 꽃이 없던 것은 아니다.

우리 눈이라는 것이 그렇다. 모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관심사만, 내 마음 속에 혹은 기억이나 업식(業識)에 담겨 있던 것들만을 선택해서 볼 뿐이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우리 눈과 마음은 자동적으로 분별하고 취사선택한다. 내 관심사가 아닌 것은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된 채. 그런 바라봄에서는 지혜가 움트지도 않으며 만물에 대한 평등한 사랑도 깃들 수 없게 만든다.

그 시선 자체가 벌써 세상을 차별하고 나누는 것이다. 카스트만 카스트가 아니라 이런 마음의 창을 닫아버린 모든 시선이 바로 카스트다. 카스트는 겉으로 드러난 차별이다 보니 오히려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잘못된 것이라는 앎이라도 있지만, 우리 시선에 깃든 이 엄청난 차별심은 아마도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리기 쉽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두라. 닫지 말고 모든 것이, 모든 사물이 아무런 제한 없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라.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의 길이며, 모든 성자들의 길이다. 왜곡과 색안경과 나만의 필터에 거르지 않은 순수한 야생의 자연 그대로의 것, 날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우리 삶에는 경이로운 변화와 삶의 진정한 진보가 시작된다. 바로 그 때, 생생한 지혜가 스스로 우리를 찾아온다. 아니 찾아 온다기 보다 그동안 꽉 닫아 놓았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둠으로써 그동안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하던 지혜, 사랑, 깨달음이라는 영적인 것들이 비로소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이것뿐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향해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내 존재 위를 오고 가도록 내버려 두되, 무엇이 오고 가는지 차별 없이 다만 지켜보는 것!

한참을 걷다 잠시 게스트 하우스 식당에서 쉬며 점심으로 색다른 메뉴를 시켜 본다. 맛있게 먹고는 잠시 쉬면서 한숨을 돌린다.

 

'쨍!' 하고 빛나는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순간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은 길을 걷는 내내 계속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꽃한송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싱그러운 생명력을 본 적이 있는가! 날갯짓하는 자유로운 비둘기의 비상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의 거센 웅고함 속에서, 우레와 같은 거친 침묵으로 거기 서 있는 저 희말라야 설산 봉우리 속에서, 때로는 습한 계곡의 작은 이끼들 혹은 이름 모를 풀들의 가녀린 손짓 속에서, 간드룽을 지나며 만난 갓 두 살 바기 아기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일상을 벗어난, 세속을 넘어서는, 말로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쨍!' 하고 빛나는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순간을 만나곤 한다. 이런 순간의 침묵의 지켜봄이야말로 우리의 거친 속 뜰에 신의 메시지를 전해주며, 붓다의 지혜를, 생기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계속해서 숲길이 이어진다. 원시의, 몇 천 년을 인간의 인위적 손길이 깃들지 않았을 법한 순수 천연의 야생 숲들이 눈길 가는 곳마다 펼쳐진다. 야생 원숭이들이 이 나무 저 나무를 질주하고, 나무 등걸마다 천년만년 세월을 버텨 온 이끼들로 고색창연한 옷을 뽐내고 있다. 말 그대로 듣기만 했던 원시 밀림이 오롯하게 펼쳐진다.

이곳부터는 사원이 있는 지역이라 일체 고기나 생선 종류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트레커들에게도 정숙과 경건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푯말이 걷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사실 사원이 있든 없든 이 자연 그대로가 사원이요, 이 야생을 흐르는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거룩한 법당이다. 숲은 모든 존재를 거룩하게 씻어주는 맑은 옹달샘과도 같다. 콘크리트 빌딩과 도시 속에서 매일같이 생존투쟁을 벌이며 싸우고, 욕하며, 사로 먼저 가려고, 더 많이 가져가려고, 더 높이 오르려고 아웅다웅하던 사람들도 도시를 벗어나 청량한 숲에 깃드는 순간 저절로 자연의 마음을 닮게 된다. 대자연이 신성한 갠지즈 강물이 되어 길을 걷는 이를 목욕시키는 것이다. 억겁의 묵은 때를 벗겨내듯, 오랜 업장의 켜켜한 때까지 활활발발하게 벗겨내 주는 것이다. 어찌 자연을 닮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히말라야 생수와 산딸기 천연간식

뱀부(Bamboo, 2310m)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가 다시 걷는다. 하루 종일 꾸준한 오르막이 계속되지만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기만 한다. 걷기에 집중이 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저 길들을 올라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솟구친 듯 지도를 보면 날아 와 있다.

뱀부에서 점심을 먹고 물통에 물을 사 온다는 것이 그만 깜빡 하고 말았다. 생수를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생수 값은 고도가 올라갈수록 값이 훌쩍 따라 올라간다. 그래서 생수 대신 사 먹을 수 있는 물이 산중을 흐르는 계곡물을 끓여서 파는 물인데, 생수 값에 비하면 아주 저렴한 편이다. 그런데 깜빡 하고 그 물조차 사오지 못한 것이다.

계곡을 따라 걷는 코스가 계속되거나, 계곡 한쪽 옆에서 폭포수처럼 뚝 떨어지는 작은 지류의 계곡물들이 드문드문 보이면서 목마름을 유혹하고 있다. 여행자들 말에 이곳의 계곡물은 그냥 막 먹으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현지 포터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현지의 계곡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아무런 탈이 없다. 어떤 포터들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포터들이 아예 물통을 가져오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물을 먹고 싶으면 그저 계곡물을 마시면 되기 때문이다. 물통이 따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행자들만 물통이 필요한가!

내 목마름 탓도 있겠으나, 가만 생각해 보니 이 물이 이 울울창창한 밀림과도 같은 숲을 뚫고 흐르는 물이 아니던가. 숲을 통과한 물이란 그 어떤 성능 좋은 정수기 보다도 더 좋은 대자연의 필터로 조화롭게 정제된 생명수일 터다. 이런 생각이 들자 현지의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되고, 마셔서도 안 된다고 했던 여행자의 말이 기우처럼 들렸다.

생각이 많은 것 보다는 저지르는 것이 많아야 한다. 짐꾼들이 쉬고 있는 계곡 곁에서 함께 쉬다가 그들을 따라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물을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마시고, 물통에 물까지 채워 둔다. 물 마시는 걸 본 영국인 여행자 한 사람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활짝 웃더니,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도 아예 얼굴을 계곡물에 푹 파묻고 입을 뾰족하게 내밀어서는 후루룩 하고 물을 들이 마시더니, 이윽고 "카~"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시원스레 불을 마시고, 또 채워 넣고 길을 걷다 보니 이제는 배가 고파온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어느 때 부터인가 길 곁에 빠알간 산딸기가 토실토실 익어 있는 게 아닌가. 분명 한국에서 보아오던, 따 먹었던 바로 그 산딸기가 맞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이 맛있는 산딸기가 이렇게 바로 길가에 풍요하게 열려 있는데 아무도 따 먹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현지인 포터들도 이 산딸기를 따 먹지 않는다. 순간 무언가 내막이 있지 않을까, 먹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지만 기본 상식을 따르기로 한다. 분명 한국에서의 산딸기가 맞는데다가, 가시가 있는 나무의 열매는 백이면 백 독이 들어 있지 않은 열매다.

이럴 때는 남들이 따 먹어 주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맙다. 혼자서 쉬엄 쉬엄 길을 걸으며 한 두 발자국 길에서 더 들어간 쪽에 풍성하게 열려 있는 산딸기를 따 먹는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 계속해서 길가에는 산딸기가 멈추지를 않는다. 오후 한 때의 간식으로는 그야말로 제격이 아닐 수 없다.

 

혼자 걷기, 생각과 함께 걷기

쉬엄 쉬엄 걸어 오르는데도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다. 많이 가야 희말라야 롯지(Himalaya, 2,870m) 쯤에서 하루를 묵지 않겠나 하던 계획이 저절로 바뀌면서 희말라야 롯지 위쪽 3,200고지 데우랄리(Deurali, 3,200m)까지 내친김에 오르기로 한다.

3,000고지부터 본격적인 고산병이 시작된다고 하니 2,800고지인 희말라야 롯지보다는 오히려 3,000고지를 조금 웃도는 데우랄리에서의 1박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그래야 3,200고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고산병 증세를 하루쯤 묵혀둘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많다. 산에 와서 그저 걷기만 하다 보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상념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이 또 끊임없이 조잘대며 올라오는지가 보다 더 생생하게 보인다. 희말라야 롯지에서 자든 데우랄리에서 자든 사실 뭐 특별할 것이 있겠나. 본래의 계획이야 어떻든 간에 그 때 그 때 바뀔 수 있는 것이니 별 생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면 되지만, 이런 별 것 아닌 순간에 조차 생각은 늘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위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 내곤 한다. 내가 혼자 만든 계획을 나 혼자 바꾸겠다는데 무슨 논리가 필요한가 말이다. 그러나 생각이란 녀석은 완전 자동 시스템으로 완벽한 자기합리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때로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어떤 잘못에 대해서도, 우리 생각이란 녀석은 언제나 줄기차게 내 편에 서서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인 변명거리를 만들어주는 든든한 아군이다. 그러나 이 아군이 고맙다고 그 녀석의 논리에 반갑게 동조해서는 안 된다. 생각, 사고는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내 편도 아니고, 나 자신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생각은 생각일 뿐, 내 아상이라는 편에서 아상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자기 집착의 전형일 뿐이다. 여기에 속게 되면 이제부터 나의 존재는 생각의 늪에 빠져 공허하고 괴로운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 두 눈 똑똑히 뜨고 생각이라는 감옥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이 내가 주체적으로 이 삶 위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방법이다.

걷다 보면 생각이 나를 지배할 때와 내 존재가 투명하고도 분명한 인식으로 나 자신의 길을 걷는 두 때를 만나게 된다. 전자의 길을 걸을 때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고 온갖 기억과 추억과 과거의 또 미래의 흔적 속에서 무수한 소설의 시나리오를 써 가곤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늘 내 안에 있던 과거 기억들의 반복이요 진부한 스토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이란 녀석은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생각은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생각을 비웠을 때,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창의력과 새로움이 마구 마구 샘물처럼 솟아나곤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일을 계획할 때라도 생각으로 계획을 짜서는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 명상 속에서, 무념(無念), 무심(無心) 속에서 텅 빈 공간을 거름으로 피어난 생명은 창조적이고 전혀 새로운 꽃을 피워낸다. 그래서 때때로 어떤 회사원들은 명상을, 참선을 시작하고부터 새롭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많이 샘솟는다고 말한다. 또 어떤 분은 그런 연유로 명상을 할 때면 꼭 메모지를 앞에 두고 시작한다고 한다. 일상이 아닌 명상 속에서, 생각이 아닌 무심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존재는 대지 위에 참생명의 전혀 새로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비로소 내가 가야 할 내 몫의 길 위를 우왕좌왕하지 않고 오롯이 걸을 수 있게 된다.

데우랄리 롯지에 어둠이 덮인다.

촘롱에서보다 더 빛나는 별빛이 눈을 끌어당기지만, 3,000미터 고지를 넘어선 계곡의 산장은 너무 춥다. 차디찬 계곡물이 흐르고, 그 물소리가 쩌렁쩌렁 산장을 울리고, 그 시린 계곡에 목욕한 차가운 바람이 여행자의 뼛속 깊은 곳까지 파동을 심어주고 있다.

돌아보니 오늘은 많이도 걸었다. 거의 1,000여 미터 가까이를 하루 사이에 내달려 오른 것이다. 덕분에 내일은 조금 여유있는 일정이 될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떨어진다.

Posted by 법상

 

 

촘롱의 밤하늘, 이것이 별빛이구나

 

촘롱의 초입 즈음에 한 두 채 작은 게스트 하우스가 보인다. 그런데 이 히말라야 산중 마을에, 그것도 지금까지 한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이곳에 익숙한 한글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내용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간다. 한국인이 많은 것인지, 한국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주인이 사는 것인지, 한국 라면에 김치찌개 심지어 한국식 백숙까지 해 준다니!

촘롱은 지나 온 간드룽 보다도 더 크고 더 장대한 품으로 나를 이끈다. 산위 한 쪽 능사면 전체가 저 위 봉우리부터 저 아래 계곡까지 온통 게스트 하우스 천지다. 그 사이 사이로 중간 아래쪽 부터는 평범한 이 곳의 원주민인 구릉족들의 삶의 터전, 평범한 시골 농가가 펼쳐져 있다. 당연하다는 듯 제일 꼭대기의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의자에 앉아 촘롱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있다.

아,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조금 전만 해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촘롱 건너편 산 위쪽으로 그림처럼 하이얀 설옹산이 고개를 내밀다 말다 한다. 여유로운 오후 내내 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촘롱 마을과 사람들과 숲과 안나푸르나 사우스(Annapurna South, 7220m), 히운출리(Hiunchuli, 6441m), 안나푸르나 3봉(Annapurna III, 7555m), 마차푸차레(Machhapuchre, 6993m) 고고한 영봉들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소리를 듣고 있다.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서 널고 촘롱의 밤 공기에 몸과 마음을 씻으러 나온다.

그런데, 아! 또 한 번의 내 인생의 클라이막스!

아! 나는 이런 밤하늘을, 이런 별들을, 이런 은하수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지리산에서 보았던, 그리고 설악산 중청산장과 지난 가을 비온 뒤 강원도 양구에서 보았던 별들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 더 밝고 초롱초롱히 빛나는 별들을, 그것도 몇 배는 많은 숫자를 지금 한 눈에 바라보고 있다. 과장 없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별의 축제를 지금 누리고 있는 중이다.

별빛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깨닫고 있다. 어떻게 저토록 많은 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지 않고도 저렇게 떠 있을 수 있는지. 내 생에 이렇게 많은 별들의 숫자를 헤아려 본 적은 없다. 지금 이 순간,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별에 대한 고정관념, 별빛에 대한 가치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전혀 새로운 의미로써 새겨지고 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아! 어떻게...'

말 문이 콱 막힌다. 도무지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만약 지금의 이 느낌을 알기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이 자리에 와서 보지 않고서는 이 말을 도저히 공감할 수 없으리라.

'추운 밤공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 야외식당 긴 의자에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저 멀리 별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눈 바로 앞에서 떨어질 것처럼, 내 눈 속으로 빠질 것처럼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눈으로 빠져들어 마음속에 고스란히 박히고 있다.

 

5분에 하나씩 떨어지는 별똥별 관찰

 

별똥별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이에게 한 여행자는 태연히 말했다.

"하늘의 별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5분 이상만 눈을 안 떼고 별을 지켜보면 분명히 별똥별을 볼 거예요. 5분, 10분에 한 번꼴로 별똥별이 떨어지거든요."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거의 정확하게 5분에 한번 꼴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볼 수도 없을뿐더러, 이토록 선명하게 보여 질 리 만무하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의 밤하늘에서는 이토록 자주 별똥별을 관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금 더 별을 관찰할 여유와 인내, 심연을 갖추었더라면 누구나 흔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저렇게 자주 떨어지는 별똥별을 왜 우리는 보지 못하고 살았을까. 밤하늘에서는 매일 같이 저 고징한 별들의 공연이 5분마다 펼쳐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인생의 30년, 40년 아니 70년, 80년을 단 한 번도 저들을 보지 못하거나 단지 몇 번 보고 소원을 빌 정도로 우리의 관심은 별에서 하늘에서 우주에서 자연에서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다. 빨리 빨리 해야 할 일을 해치우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업무를 소화해 내고, 남들에게 뒤질세라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바빠서 잠시 멈추고 세상을 바라보는데 익숙치 않은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과연 그런가?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향해 나의 주의와 시선을 모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이 그렇게 무의미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가장 흔히 간과되며,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삶의 비밀스런 진리가 바로 이 '바라봄'에 있다.

'지속적인 바라봄',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어떤 한 대상을 관찰해 보라. 분별없이 다만 지켜보기만 해 보자. 바로 그 때 우리는 바로 그 대상과의 진정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으며, 진정 의미 있는 관계로 맺어질 수 있고, 참으로 그것을 사랑과 자비로 어루만지게 되는, 지극히 평범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속에 가장 비범하고 지혜로우며 깨어있는 어떤 내 안의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힐긋 보기, 진하게 보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잠깐 잠깐 흘깃 흘려 보거나, 생각과 판단으로 대상을 가치판단하며 색안경을 끼고 재단해 보는 정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바라봄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진지함과 진솔함 혹은 순수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내 안에 있는 과거의 어떤 틀 안에 대상을 끼워 맞추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반복이요 지루함의 연속일 뿐이다. 과거의 그 어떤 틀이나 생각, 관념,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채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고 세상을 눈부신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랬을 때 이 세상의 그 모든 대상은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별이든, 한 송이 꽃이든 그것 속에서 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 순간 내 안에서는 한 송이 연꽃이 만개할 것이다.

별을 향해 이 몸을 눕히고 벌렁 드러누워 나를 완전히 낮추고 비운 채로 오직 빛나는 별을 바라보기만 한다. 어떤 한 사람을 만날지라도 그 순간 오직 그 사람을 진지한 집중력을 가지고 별을 보듯 지켜보라. 다른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나의 지위와 상대의 지위라거나, 나와 상대의 관계라거나, 과거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과 그로인한 좋거나 나쁜 모든 감정들 또한 텅 비워두고 완전히 새로운 날 것의 한 사람으로 그를 마주하라.

그가 누가 되었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친소유무를 떠나, 나에게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를 전혀 판단하지 않은 채 오직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서 있는 바로 그에게 나의 모든 집중과 에너지를 쏟아 주의를 집중하라. 그랬을 때 의미 없을 것 같던 사람 속에서 진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미워하는 사람 안에서도 깊은 사랑을 발견하며, 도움이 안 될 것 같던 사람에게서 큰 지혜를 선물 받게 될 수 있다.

이처럼 '지속적인 텅 빈 바라봄'은 삶의 비밀스런 원칙이요 진리의 법칙이고 신에게 붓다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삶의 매 순간이 선물이요, 매 순간의 진중한 바라봄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힐긋 볼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지혜의 가치와 덕목들이 진하게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무수히 쏟아져 내린다.

별똥별 열 두 개를 무려 하룻 밤 잠시 동안 본다는 것은 어쩌면 안나푸르나가 내게 준 선물이다.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축복을 부여받는다.

Posted by 법상

2일차

 

산중 도시, 촘롱을 지나며

밤늦도록 빗줄기가 이어지더니 이른 새벽 빗물 머금은 산과 나무와 풀들과 논의 벼까지 모든 생명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고 생기어린 춤을 춘다. 밤새 비는 그쳤고 비 그친 산은 더없이 개운하고 청명하다. 간단히 베지누들수프(야채라면)와 직접 새벽에 할아버지께서 소에게서 짜 끓인 우유로 만든 찌아 한 잔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떠난다.

오늘은 간드룽을 거쳐 촘롱(Chhomrong, 2170m)까지 갈 계획을 잡고 여유 있는 느린 걸음을 옮긴다. 한두 시간 산길을 오르니 간드룽을 만난다. 얕은 산 정상 즈음에 올망졸망 게스트 하우스들과 시골 농가가 모여 있는 우리나라 작은 시골 마을 같은 곳이다. 그래도 산에서 처음 만나는 규모 있는 도시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첫날 밤을 보내는 곳이니 그럴 법도 하다.

어제 하룻밤을 보낸 숙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최신시설을 갖춘 깨끗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즐비하고, 언뜻 살펴 본 메뉴판에도 훨씬 다양한 먹거리들이 입맛을 유혹한다. 게스트 하우스 뒤로 히말라야의 장쾌한 설산이 두둥 하고 불현듯 나타났다.

마을 곳곳에 히말라야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마을을 관통하며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살림살이에 눈이 머문다. 어릴 적 살던 시골집 풍경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 낯설지 않은 풍경 속에서 고향을 느낀다.

마을이 처음에는 작은 듯 하더니, 계속해서 제법 큰 규모의 산중 도시가 본색을 드러낸다.

아직 점심 시간은 이르고 아침 먹을 것도 채 소화가 안 된 터라 조금 더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한 시간 쯤 더 가니 콤롱 고개(Kyumrong, 2,255m) 정상 즈음에 식당과 간이휴게소가 하나 나오고 휴게소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리니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산 아래 계곡이 흐르고 가파른 내리막과 저 계곡 너머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이 나를 손짓하듯 부르고 있다.

 

오르막 길의 즐거움

안나푸르나를 내려오며 '어렵게 오르면 그만큼 또 내려가야 하길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고 했던 한 여행자의 허탈한 말투가 생각났다. 하기야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가만 느껴 보면 오르막길은 오르막 길 나름대로의 재미와 묵직한 느낌이 좋고, 내리막길은 오르막에서 지친 다리를 풀고 가볍게 흘러내릴 수 있어서 좋다. 때때로 내리막길보다 오히려 오르막길이 나 자신을 더 진하게 깊이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데서 더 매력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내리막길 보다는 가파르고 힘겨운 오르막에서 몸은 급한 마음을 접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 한 발을 거북이처럼 걷게 된다. 그런 느릿느릿 힘겨운 숨을 몰아쉬다 보면 저절로 생각은 저만치 달아나고 만다.

바로 이 순간이 일반적인 사람들도 때때로 생각을 비우고 집중과 몰입에 들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명상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오르막은 내리막에서처럼 마음이 들뜨지 않고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입 또한 조잘대기 보다는 저절로 침묵하게 되고, 그간의 끊임없이 어어지던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설가도 그 집필을 멈추고 만다. 이 순간을 잘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오르막의 육중한 무게감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고요와 평온의 깊이를 온 존재로써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만 해도 오르막길은 힘들고 어려운 곳이며,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조금 더 힘들여 오르면 내리막이 나오겠지 하며 내리막길이 마치 행복의 조건인 양 내리막길을 좇곤 했다. 물론 삶도 그랬다. 힘겹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이 역경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이 오르막이 끝나고 나면 내 삶에도 반짝이는 내리막길이 있을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 행복과 불행, 역경과 순경계라는 두 가지 차별심을 내려 놓고 그 양 극단의 길을 가만히 현존하며 살펴보니 그 분별이 무의미한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된다. 오르막도 오르막대로 좋은 점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힘겹고 고되며 슬픔이 지속되는 순간에조차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잠시 내려 놓은 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 상황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 보면 그것 또한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며, 심지어 흥미와 묘한 재미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괴로울 때, 슬플 때, 실현 당했을 때, 실패했을 때, 외로울 때, 시련이 찾아왔을 때,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애쓰고 애쓰다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던 어느 순간, 문득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시 그것과 함께 있어 본 적이 있는가? 벗어나길 멈추고 그것과 함께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해 줄 때 바로 그 의식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에 깨달음과 평화는 찾아온다. 영적인 성숙이란 언제나 그런 순간에서 반짝이며 깃드는 것이 아닐까.

 

내 삶의 클라이막스가 흐른다

한 달음에 가파른 내리막 길을 날아 한 마리 노새가 가볍게 착지하듯 콤롱 계곡(Kyumrong Khola) 옆 콤롱(Kyumrong, 2010m) 마을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다. 주로는 달밧을 시켜 먹곤 하는데 산에서 먹는 음식에, 또 네팔 음식에 조금씩 적응을 해 가는 건지 이제는 달밧이 그저 우리 밥 먹는 것처럼 맛있고 행복하다. 그러나 매번 먹는 달밧이 물렸는지, 색다른 메뉴에 눈길이 간다. 산중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는 피자는 어떤 맛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맛은 포기한다는 마음으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시켜본 피자 맛이 일품이다. 하기야 이 배 고픈 때에 무엇인들 맛 없을 수 있으랴.

따스한 오후 햇살과 계곡을 기면서 흐르는 느린 바람의 나지막한 속삭임, 그 달콤한 속삭임에 몸둘바 모르고 사랑에 빠져버린 코스모스의 하늘거리는 춤사위 하며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세상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족하다. 태초의 자연과 하늘과 바람과 계곡 물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 이 속에 몸을 박고 숨 쉬며 살아가는 구릉족 원주민들조차 이 야생의 거룩한 신의 품속에서 하나의 자연으로 숨 쉬고 있다.

점심 식사 후의 이 여유로운 바라봄. 대자연과의 하나 되는 순간!

이런 순간이야말로 매 순간 우리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삶의 최고의 클라이막스가 아닐까. 그 어떤 거창한 성취나 엄청난 소유, 높은 지위나 명예, 유명세나 인기가 가져다주는 거추장스런 삶의 순간이 클라이막스가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마주할 수 있는 우리 앞의 바로 이러한 생생한 존재와의 대면, 그 대자연과의 마주침, 교감,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 그 소박한 평범한 순간이야말로 우리 삶에 최고의 절정이다.

이제 다시 내려온 길과 똑같은 높이의 오르막을 고스란히 걸어 올라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숨, 한 호흡의 색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눈길을 줄 시간!

계곡과 함께 흐르는 마을 초가들과 논두렁 계단들이 오후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인다.

몇 걸음 오르고 고개 들어 저들을 바라보고, 또 몇 걸음 걷다가 하늘을 바라보길 두어 시간 이렇게 오르막은 오르막 대로의 삶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곳곳에 작은 계곡 물소리가 새소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주고 있다.

 

나의 전생은 히말라야의 거센 바람이었으리라

네팔의 특색 있는 시골 특성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산 중턱이고 정상이고를 가리지 않고 지어진 집들과 논밭의 그림 같은 풍경일 것이다. 네팔 자체가 히말라야의 장대한 산맥들로 둘러쌓여 있다 보니 평지랄 곳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네팔의 마을은 거의가 산을 끼고 그 허리춤이나 머리 꼭대기에 한두 채 삶의 터전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워낙 높은 곳을 좋아하고, 시야가 툭 트인 풍경을 좋아하는 터라 이런 네팔 산마을의 전경들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에서도 강원도나 지리산 자락을 다니다 산 중턱에 한 두 채 낡은 집을 만날 때면 당장에 뛰어올라가 내 작은 오두막이나 토굴로 쓸 수 없을지를 여쭙고 싶어질 정도다.

지리산을 종주할 때에도 나는 늘 높은 봉우리만을 쫒아 다니곤 했다. 지리산 하면 가장 떠오르는 풍경도 높은 봉우리 위에 홀로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이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산하를 굽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늘 그랬다. 높은 곳 어디 쯤에 앉아 대자연을 굽어보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렇게 앉았다가 바람이 불어올 때는 잠시 눈을 감고 온몸에 젖어드는 바람의 숨결을 느꼈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높은 산을 표표히 휘감고 여행하는 거센 바람이었나 보다.

언제나 길을 걷다 툭 트인 풍경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곤 했다. 이런 내 취향 상 네팔의 이런 풍경들은 나의 그리움, 나의 소망을 마구 마구 현실로 거두어 들여 줄 것만 같은 기대를 품게 한다. 이런 곳에 저 농가 하나를 얻어 나름의 공부처요 터전으로 은둔하며 사는 것도 아름다운 한 생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화엄경이나 도덕경, 바가바드 기타나 신약 같은 내밀한 지혜서들을 읊어가면서 말이지. 하하. 이런 생각 끝에는 항상 환한 웃음이 묻어난다. 저들의 웃음처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며 걷다 보니 어느덧 촘롱이다. 그러고 보니 촘롱까지 오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 아름다운 터전에 자리를 잡고 토굴을 짓기도 하다가, 그 생각들은 어느덧 한국의 낯선 농가, 산하를 굽어보는 높은 산촌 마을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도를 닦으며, 소소히 책을 읽은 한도인이 되기도 하고, 한바탕 소설을 쓰고 있지를 않는가. 이것 봐라. 아까 전에 거친 오르막을 거닐 때에는 그 느긋한 발걸음을 챙기고, 그 가쁜 숨을 챙기느라 생각이고 뭐고 없이 무던히 텅 빈 마음으로 걷다가도 오르막이 끝나고 평지의 편안한 길을 걷다 보니 슬그머니 생각이란 놈이 자신만의 오랜 습에 길들여진 이야기를 펼쳐놓지를 않는가.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치는 시간을 되짚어 보면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순간의 자연 풍광은 기억에서 희미하다. 생각이란 녀석에게 주인 자리를 내주고 있던 순간 나는 더 이상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라는 통속적이고 진부한 길 위를 걷고 있는 것일 뿐.

가만 보면 생각이란 녀석은 우리 머릿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생각해 내면서 우리의 내면을 정신 없게 만들곤 한다. 생각에 빠져, 생각이 온갖 소설을 쓰도록 내버려 두는 그 순간에 나는 없다. 그저 생각이란 녀석이 자신의 오랜 이야기를 두서없이 꿈을 꾸듯 시정잡배처럼 마구잡이로 풀어헤칠 뿐!

'아차!' 하며 그 생각을 주시할 때, 비로소 한 편의 공허한 소설은 막을 내리고 이제부터 진짜배기 삶의 순간이 나를 통해 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길을 걷다 문득 생각이 솟구치고 있는 순간을 관찰하면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한 마디 경책을 보낸다.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그러고 나면 과거와 미래를 분주히 쏘다니던 생각이 들킨 도둑 마냥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몸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붙어서 온전히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몸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는 다는 것이 쉬우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몸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를 쏘다니며 생각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다. 명상이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이다. 몸 있는 곳에 언제나 마음도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수행이며 참선이다.

산길을 걷는 모든 순간이 그런 깨어있음의 생생한 진짜 순간이 되게 하리란 다짐으로 다시 길을 걷는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