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얼마 전에 TV에서 본 것 가운데, 70대, 8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서울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돈이 없으니까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 벌 거리가 없어서 하루 종일 리어카 하나 끌고 나가서 하루 종일 폐 ․ 휴지를 줍는데, 하루 종일 폐 ․ 휴지를 주워서 갖다가 주면 그게 하루에 오천원, 육천원을 받는답니다.


또 제가 전에 독거노인분 댁에 방문했을 때 보면 겨울인데도 보일러를 안 때세요. 그날 몇 분을 뵀었는데, 그날 가는 곳마다 다 보일러를 안 때고 계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전기 이렇게 꽂아놓고 너무 추울 때만 쓰시고, 어떤 분은 전기장판 가지고 그 하나에 의지해서, 두꺼운 이불에 의지해서 그냥 그렇게 사신단 말이죠. 아주 꽁꽁꽁 얼어붙은 그런 집안에서요.


여러분,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윤회라는 것은 한 번 부자로 태어나면 한 번 또 가난하게 태어나기 쉽습니다. 가난과 부자가 번갈아가기가 쉬워요. 잘나고 못난 것이 번갈아가기가 쉽고. 그게 균형의 법칙이거든요.


그럼 그 분들을 뵐 때, 사실은 나의 전생의 모습일 수도 있고, 내 다음 생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들은 그렇게 하루에 오천원 버시느라 고생을 했어도 어딘가에 많은 박스가 쌓여 있다고 하면 그 작은 것을 감사하게 느끼고 계실 텐데, 우리는 이만큼 월급을 받으면서도 고마워하지 않고, 더 많이 벌지 못하는 걸 남편을 원망하거나, 자식에게 더 비싼 과외 못 시켜주는 것에 대해서 자식에게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한단 말이죠.


그건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죠. 자식 비싼 과외 안 시키고, 비싼 옷 안 입히는 거 그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뭐랄까 지혜롭고 당당한 부모로서 자식에게 돈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삶의 덕목을 가르쳐야 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부모라면, 자식에게 더 비싼 옷을 입히고, 더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성공해야 대접 받는다고 세뇌를 시킬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축복인지, 매일 매일 이 행복을 스스로도 감사해할 뿐 아니라, 우리보다 힘든 많은 분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더 나누고 베풀며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보다 공부 잘하고, 나보다 더 부자인 옆의 친구를 보면서 열등감을 키우게 만들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집 앞을 리어커를 끌고 박스를 주우러 가시는 저 할머니를 비롯해 수많은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무 물질이나 돈에만 의지하게 만들면, 그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천연의 힘을 빼앗은 것과 똑같습니다. 부모님이 좋은 것 사 입히고, 좋은 것 사 먹이고, 비싼 과외 시키고 자꾸 좋은 것만 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은 아이에게 뭘 배우게 하느냐면, ‘너는 너 혼자서는 힘이 없는 존재야, 너는 공부를 잘해야만 인정받는 존재야. 넌 능력 있어야만 세상에서 소외받지 않는 존재야. 너는 너 혼자서는 힘이 없어. 뭔가 비싼 옷을 입어야만 남들한테 무시 안 당하는 거야. 성적이 좋아야지만 남들이 너를 쉽게 안 볼 거야’ 이런 걸 자꾸 암시를 시키는 거예요.


그럼 그 아이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로 크겠습니까? 자기중심이 잡히지 않은, 힘을 갖지 못한, 나는 끊임없이 외부에서 뭔가를 가져와야지만 힘을 가지는 존재로써밖에 못 크는 겁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자꾸 채워야지만 내가 힘 있는 존재가 되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자꾸 잘 보이기 위해서, 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꾸 세상 눈치를 보고 그렇게밖에 크지를 못하고, 그러다 보면 자기 내면에 얼마나 큰, 중요한 깊은 가치가 이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세상을 살기가 쉽습니다.


자녀에게 나는 이미 완전히 갖추어진 존재이며, 매 순간 작은 일상에도 감사와 풍요를 느끼고 누릴 줄 아는 아이로 키워주세요. 그리고 그 넘치는 감사를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아이로 키워주세요.

www.moktaksori.kr 목탁소리 공식카페 바로가기

Posted by 법상




만약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일출이며, 히말라야의 설산이며, 난생 처음 보는 온갖 다양한 풍경을 본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사람은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그 풍경 자체를 보고 감동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을 보면서 감동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실을 이렇게 자신의 멀쩡한 두 눈으로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사진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관찰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사진이 잘 나오면 좋아하면서 감동하고, 사진이 못 나오면 실망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서, 또 셔터스피드와 조리개를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서, 혹은 어떤 필터를 쓰고 어떤 랜즈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풍경도 다르게 찍어냅니다. 현실에서는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사진기가 담아내지 못할 때도 있고, 현실에서는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은 풍경이지만 사진에는 아주 아름답게 담기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재에는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사진기로 찍혀 나오는 사진에만 관심이 있지요. 그 사진만이 진짜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실이 진짜 아름다운지 안 아름다운지는 전혀 관심 밖이고, 오로지 사진기에 찍힌 현상된 사진만이 관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로 있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어이가 없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얘기를 해 줘도 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사진 속의 필터를 거친 것만을 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 참 답답하죠? 그런데 이 답답한 사람이 바로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이고, 우리들입니다. 저 사람이 사진기로 찍은 사진을 보듯, 우리들 또한 우리 안에 분별심이라는 필터로 걸러진 현실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분별심, 의식, 알음알이라는 필터는 마치 사진기의 다양한 랜즈나 필터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다양하게 왜곡해주는 필터입니다. 그 필터를 거치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왜곡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전혀 왜곡되었다고 여기지 않고, 그 필터를 거친 현실이 진짜라고 여기게 됩니다.


우리의 분별심이라는 필터는 주로 과거의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의식이고, 남들과 나를 비교함으로써 비교 우위인지 비교 열등인지를 귀신같이 파악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장에 취직해 월급을 300만원을 받았을 때 있는 그대로의 순수의식이라면 그저 300만원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많거나 적은 어떤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분별심은 나와 비슷한 친구가 400만원, 500만원을 벌어 온 과거 기억을 떠올리면서 내 월급은 작고 나는 능력 없고 돈도 잘 못 버는 사람이라고 규정지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립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진실이 아니죠. 다만 내 의식이라는 분별심이 만들어낸 허망한 해석일 뿐입니다. 그 해석은 전혀 진실된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진실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괴롭다거나 행복하다고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거나 괴롭다고 여기는 모든 순간,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자체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 분별심이라는 필터가 그렇게 해석한 것일 뿐입니다. 분별로써 걸러서 바라보는 이 분별심이라는 필터를 내려놓고, 그저 직접적으로 삶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해석이나 분별이 없을 때 오히려 더욱 존재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현실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랬을 때 비로소 어느 순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분별없이 직접 바라보는 견성의 체험도 가능해 질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원(願)을 세우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에서 반드시 실현된다.
가능하면 크고 밝으며 원만한
이타적인 원을 세우라.
그러나 다만 원을 세울 뿐,
결과는 우주에 맡기라.

원을 세우는 것은
순수하게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다.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에 흔적을 남긴다.

가장 강력한 발원(發願)은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순수하게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조차
그냥 없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방식이든 그 결과를 현실로 드러낸다.

하물며 간절하게
집착 없이 마음을 내게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진다.

될 수 있다면
크고 밝고 원만하며
이타적인 원을 세우라.

다만 그 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과에 대한 집착은 내려놓으라.

그저 원력을 세우고 나아갈 뿐,
결과는 우주에 맡기라.

그 때 원력의 힘은 가장 강력해진다.

되도 좋고 안 되도 좋다는 마음이기에
잘 안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 없이 저질러 행하는 것이야말로
큰 힘으로 현실을 창조해 낸다.
Posted by 법상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할 수도 있다. 복과 지혜는 그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복은 복대로 지어야 하고, 지혜는 지혜대로 닦아야 하는 법이다.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라 할지라도 지어놓은 복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닦아 놓은 복력 만큼의 삶만을 살다 갈 뿐이다.


예를 들어 깨달음을 얻었을지라도 베풀어 놓은 것이 없다면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지혜와 불법을 많이 전하고 베풀어 놓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 주위에는 보다 많은 이들이 모여들 것이다. 인연복, 공부복을 지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 지내기를 좋아해 인연복을 지어놓지 않았다면 그는 깨달음을 세상에 펼치지 않고 홀로 고요히 지내게 될 것이다.


복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복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지혜까지 많은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 주위에 보면 돈도 많고, 능력도 있고, 심지어 학벌도 좋고, 지식도 많지만, 삶의 근원적인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높은 지위에 있지만 성격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많을 수 있다.


자신이 아무리 복이 많아서, 돈도 많이 벌고, 주위에 사람도 많고,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고 산다고 할지라도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어리석게 살다가 갈 뿐이다.


이처럼 지혜를 닦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은 복대로 지어야 하고, 복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만족하기 보다는 지혜를 닦아야 한다. 부처님께 귀의할 때 ‘귀의불 양족존’이라고 하는 이유는 양족, 즉 복과 지혜가 함께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이처럼 복과 지혜가 균등하게 잘 구족되신 분인 것이다.


복 또한 어떤 복이냐에 따라 제각기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많이 베풀어 식복은 있지만, 주변에 사람은 적어 인연복이 적은 사람도 있다. 건강복은 있지만, 남편복은 없는 사람도 있고, 재물복은 있지만 수명복은 적은 사람도 있다.


자신이 어떤 복을 짓고 사느냐에 따라 그 복력은 매 순간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음식을 탐하면 수명이 짧아진다. 누구나 자신이 가져온 식복과 수명이 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 매 순간 온갖 복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음식을 베풀 때 식복은 늘어나고, 음식을 탐할 때 식복은 줄어든다. 게걸스런 식탐은 기아와 가난의 과보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식복을 미리 당겨서 다 써 버리면 빨리 죽는 과보를 받게 된다.


실제 과학적 연구에서도 많이 먹는 쥐가 적게 먹는 쥐보다 빨리 죽는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죽어가는 이를 살릴 때 수명 또한 늘어난다.


모든 복이 마찬가지다. 건강복, 남편복, 자녀복, 인연복, 재물복, 그 어떤 복이든 정해진 것은 없다. 매 순간 나의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복력은 늘고 줄기를 거듭한다. 무엇이든 베푸는 것은 다시 우주로부터 받게 되어 있다. 탐하고 빼앗는 것은 우주로부터 빼앗기게 되어 있다.


이웃의 건강을 챙겨주면 내가 건강해지고, 내가 먼저 좋은 인연으로 다가서면 인연복이 생긴다. 매 순간 나의 행위가 내 삶에서 받을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늘 복 짓는 삶, 지혜를 닦아가는 삶을 살라. 매 순간 내 스스로 어떤 복을 짓고 살며, 어떻게 지혜를 닦아가는지를 살펴보라. 복은 복대로, 지혜는 지혜대로 제각기의 법칙이 있음을 잊지 말라. 수행을 잘 하니까 복력도 따라올거라고 여기지는 말라. 늘 복과 지혜를 닦아가는 삶을 살자.

Posted by 법상




‘수행하면 나에게 좋은 일만 생겨야 된다?’ 이건 우리의 집착이고, 우리의 욕심입니다. 수행하는데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것이 생기는 것을 허용해 주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그냥 지켜볼 뿐이지요.


어떤 사람이 욕을 해요. 이 세상에 그 수많은 인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욕한 것은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상황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거지요. 그것은 괴로운 어떤 상황, 특수상황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상황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또 사람들은 자기의 삶이 있으니 그 사람의 관점에서는 욕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욕을 한 것은 그 사람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닌거지요.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이 한 욕을 받고는 화를 내고, 열받아 하고, 크게 여기고, 휘둘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실 나에게 욕한 사람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욕설을 듣고 그것이 진짜라고 여기면서 실체화하고, 그 욕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사실 누가 욕을 했지만, 그 사람이 아무에게나 욕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면 그 욕을 듣고도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잖아요. 또 영화에서 욕하는 장면이 나와도 괴로워하지 않고, 타인들끼리 욕하는 것을 볼 때도 우리는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그 욕설에 아상을 개입시키지 않고, 힘을 실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욕이라는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괴로운 경계인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누군가가 욕을 해요. 그럼 그 사람 입으로 그 사람이 욕하는거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 주세요. 그 욕을 허락해 주세요. 내가 그 사람과,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마음에 안 든다고 일일이 싸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욕을 그저 해석하지 말고, 나에게 행하는 어떤 화살로 받아들여 상처입지 말고, 그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봐 주는 것입니다. 그냥 영화 보듯이 말이지요.


이처럼 수행을 하면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그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수행을 한다고 해서 나에게 욕할 사람이 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나쁜 일은 하나도 안 생기고, 계속해서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란 것이지요.

수행을 하는 것은 수행을 하는 것이고, 자신의 업은 업대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수행을 열심히 해서 자기 중심이 서 있고, 그 어떤 외부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수행력이 생겼을 때, 악업이나 괴로운 일이 생기면 오히려 더 좋은 상황입니다.


괴롭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악업이 생기면 그것이 더욱 나를 괴롭히지만, 수행을 할 때 악업의 과보가 오게 되면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그저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에 아상을 개입시켜서 ‘내 문제’, ‘내 고통’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아상이 타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부처님의 일대기를 보면 부처님께도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온갖 외도들이 부처님을 헐뜯었고, 심지어는 자객을 보내기도 했고, 거짓 임신설을 유포한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사촌이었던 데바닷다가 온갖 방법으로 부처님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괴로운 일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니지요. 다만 그 모든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는 거일 뿐입니다. 그 경계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거에요.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 경계에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 그 경계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저 바람 불고 꽃피는 것처럼 평범한 일들이 되어 버리지요. 그렇게 경계 앞에서 자유로운 자유인이 되십시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을 세우되 결과는 맡기라  (0) 2016.07.27
복과 지혜는 각각 닦으라  (0) 2016.07.03
욕을 얻어 먹을 때 마음 대처법  (2) 2016.06.07
운명을 바꾸는 길  (0) 2016.03.16
당신이라는 빛나는 브랜드  (0) 2016.03.02
직관력  (0) 2016.02.24
Posted by 법상

 

 

업장소멸의 효과

 

 

『법구경』에서는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 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데는 아무 곳도 없다’고 말합니다. 한 번 지은 업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는 ‘업장소멸’을 말합니다. 수행을 하고 복을 지으면 업장이 소멸된다는 의미입니다. 업은 분명히 받아야만 없어진다고 했는데, 또 업장이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를 소금물에 비유로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악업을 아주 짠 소금물이라고 봤을 때 악업을 한 컵만큼 지은 사람은 한 컵의 소금물을 마셔야 됩니다. 그 진한 소금물 한 컵을 다 마시려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러나 그 소금물을 마셔야 악업이 없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마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 컵에다 반드시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엄청 큰 그릇에 소금을 넣어 마시면 고통스럽지 않게 먹을 수도 있고, 온갖 양념을 해서 끓여 먹으면 맛있는 찌개로 먹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A라는 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A라는 과보를 기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얼마나 선을 행하고 복을 지으며 살았느냐, 얼마나 수행을 하고 살았느냐에 따라 따라집니다. 복과 지혜라는 두 가지 요소가 바로 우리의 그릇을 크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정확히 ‘업장소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와 동등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업보에서 ‘보’라는 것은 ‘다르게 익어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업을 지었는데 결과는 다르게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업에 따라 좌우되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쓰여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주먹으로 A를 툭 치면서 “너 이번에 정말 수고했어. 어떻게 그렇게 잘했어? 대단해”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경우 A는 주먹으로 한 대 맞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기쁩니다. 그러면 나와 A는 선업으로 맺어집니다. 반면에 이번에는 주먹으로 B를 툭 치면서 “죽고 싶어? 너 이것밖에 못하겠어? 다음에도 이 따위로 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B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하시겠지요? 똑같은 강도로 주먹으로 한 대 툭 쳤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서 사랑의 매를 댔습니다. 이것은 분노를 참지 못해 자식을 때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과보를 가져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식에게 매를 대는 행위, 즉 때리는 행위이지만, 그 이면의 의식이, 즉 의업이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악의 과보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선의 과보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저 사람들과 똑같은 업을 지었으니까 똑같이 받을 거야’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과거에 나쁜 업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로인해 지금까지 괴로워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죄의식 또한 공하니 죄의식을 내려놓으라고 하지요.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과거에 지은 악업이라 할지라도 다르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은 복과 지혜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삶을 변화시키는 때는 ‘지금 여기’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행위의 주체에 따라 다르게 받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업을 지었더라도, 보를 받을 때는 결정론적이고 기계론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보를 받는데 있어서 이러한 ‘다르게 받는 보’는 네 가지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행위의 주체에 따라서 다르게 익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그 행위를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주먹으로 툭 친 행위 자체가 과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동료를 아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격려를 위해 쳤느냐, 증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미운 마음을 담아 쳤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누가 쳤느냐에 따라서 과보는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즉 ‘누가’ 한 행위냐에 따라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업이 다 다르고, 의식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을 사랑하는 두 남자가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 표현은 감미롭고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지만, 미워하는 다른 이의 적극적인 사랑 표현은 괴롭고 고통스럽기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일한 행위에도 한 남자는 키스를 받을 것이지만, 다른 한 남자는 뺨을 맞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의식의 차원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깨달음을 얻은 큰 스승과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 똑같은 진리를 전달했을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는 영향력은 달라질 것입니다. 똑같은 말과 표현을 했을지라도 스승이 한 말은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남기지만, 평소의 삶이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준 가르침은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행위를 지은 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행위는 전혀 차원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성스러운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속된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는 사람들에게 밥을 주었습니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에게 밥을 주었지만, 전혀 다른 공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A는 내 자식이고, B는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밥을 준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그 과보는 달라집니다. 자식에게 주는 것은 아상의 연장이기 때문에 복이 적지만, 전혀 모르는 이에게 준 공덕은 아상을 넘어선 자비의 마음이기 때문에 복락을 크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와 우리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깨어있는 의식으로 행위를 하는 사람이 깨달은 자고, 깨어있지 못한 상태로 행위 하는 사람이 우리들 중생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행위를 지을 때 내가 어떤 의식으로 했느냐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당신이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할 때 얼마나 당신이 깨어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깨어있는 의식으로 그 행위를 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화를 낼 때라도 화에 못 이겨 화가 나서 화를 내면 아이와 악업으로 얽히겠지만, 아이를 위한 자비심으로 필요에 의해 화를 내준다면 선업을 지은 것이 되겠지요.

하다못해 모기 한 마리를 죽이더라도 짜증을 내며 죽일 때와 ‘다음 생에 인간몸 받아 수행하며 살거라’하고 축원해 주며 죽인다면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익어갈 것입니다.

이처럼 행위 자체보다 행위를 할 때의 깨어있음이 중요합니다.




행위의 대상에 따라 다르게 받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어제에 이어 업보를 받을 때 그 과보를 다르게 받는 두 번째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똑같은 업을 짓더라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고 했는데요, 다르게 나타나는 두 번째 경우는 행위의 대상에 따라서 업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밥 한 끼를 공양합니다. 그런데 어떤 대상에게 밥 한 끼를 사 주었느냐에 따라 과보가 달라집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과 일반인에게 올리는 공양은 당연히 그 과보가 다르게 익어가겠지요. 같은 공양이지만, 그 대상에 따라 다르게 과보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하늘의 천신이나 제석천 등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경전에는 ‘악한 사람 1,000명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 한 명에게 보시하는 것이 낫고, 평범한 사람 1,000명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착한 사람 한 명에게 보시하는 것이 낫고, 착한 사람 1,000명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수행자 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 낫고, 수행자 1,000명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깨달은 자 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같은 복을 지을지라도 ‘누구’에게 그 복을 짓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 두목에게 밥과 돈을 보시하였습니다. 도적은 그 돈을 도적질하는데 쓰고 나쁜 짓하는데 쓸 것입니다. 반대로 그 돈으로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게 되면 널리 지혜와 자비의 말씀을 전하는데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절의 보시함을 복전함이라 하는 이유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복의 밭이 되기에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 같은 절이라 해도 수행과 전법을 잘 하는 도량, 스님에게 복을 짓는 것이 더 큰 복전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신도님들께서 절에 보시하실 때도 이처럼 잘 사유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절에가면 대중공양이 있는데요, 청정하게 수행하는 대중들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것이 그만큼 큰 공덕이 되기 때문에 예로부터 사찰에서는 대중공양의 공덕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차원입니다.


이처럼 좋은 업을 지을 대상을 만나려면 먼저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하겠지요. 좋은 스승, 좋은 도반이 있다면 행위의 대상도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좋은 도반과 함께하라, 좋은 스승을 모셔라’ 하고 말합니다. 수많은 불교경전 중에서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 『숫타니파타』에도 ‘될 수 있으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벗을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더라도 매일 아파트 값이며, 투자이야기, 아이들 성적이야기만 매일 하는 친구 보다도, 함께 마음공부를 하며 수행이야기를 나눌 도반, 성적에 과도한 욕심을 가지기 보다 즐겁게 아이들과 놀아주고 따뜻한 심성을 길러주는 친구, 자녀에게 일류대학과 대기업을 요구하기 보다 진정한 꿈에 귀 기울여주는 친구, 그런 벗과의 만남이 잦아진다면 우리의 삶 또한 더욱 지혜로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쓸데없이 열등감을 키우는 모임이 아닌 진리의 모임, 수행하는 모임, 기도하는 모임에 참여하면 저절로 자신의 마음공부도 익어 가겠지요. 말 그대로 도반이 대신 공부를 시켜주는 것이지요. 나아가 아내와 남편이 이런 좋은 도반이 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되겠지요. 이처럼 같은 업이라도 다르게 익어가는 사실을 알아, 지혜롭게 잘 대상을 선택해 복을 짓고, 좋은 도반들로 주변을 가득 채워나간다면 삶 또한 더욱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과보를 받는 시간에 따라 다르게 익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어제에 이어 이미 지은 업을 받을 때 다르게 받게 되는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로, 과보는 받는 시간에 따라서 다르게 익습니다.


예를 들어 나쁜 업을 지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업이라는 것은 오래될수록 이자가 붙습니다. 악업을 지었으면 그 업을 빨리 받는 것이 좋습니다. 나쁜 업 일수록 빨리 받는 게 좋습니다. 지금 받으면 감기 한 번 오고 끝날 업인데, 10~20년 후에 받으면 고혈압이 오고, 암에 걸린다는 말입니다. 악업은 늦게 받으면 늦게 받을수록 눈덩이처럼 더욱 커집니다. 따라서 과보는 우주법계의 계산이 맞아 떨어졌을 때 받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주법계는 항상 우리를 돕는 관점에서 사랑과 자비로 모든 일을 벌입니다. 업에는 수미산을 넘을 만큼 악업도 있고 선업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주법계는 우리가 과보를 언제 받을 것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정할까요?


우주법계는 사랑과 자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업을 ‘이때 받아야지 가장 빨리 녹는다’ 싶을 때 과보를 보내줍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업을 받을 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당장 과보를 받아 조금 괴로울지 몰라도 그 업을 지금 받는 것이 가장 좋을 때인 것입니다. 몇 십 년 후, 다음 생애에 받으면 더욱 괴롭습니다. 악업에 대한 과보는 받으려고 해야지 자꾸 거부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또를 삽니다. 로또 사는 게 뭡니까? 내가 그나마 지어놓은 복을 로또로 한방에 받겠다는 것입니다. 한방에 받으면 거기서 복은 모두 끝납니다. 로또 당첨이 된 후, 남들에게 베푸는 사람 빼고는 거의 망하기 쉽습니다. 복을 미리 당겨 받으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보는 받는 시기에 따라서 다르게 익는데, 좋은 업일수록 천천히 받고 나쁜 업일수록 빨리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오늘 나에게 괴로운 일이 생겼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 업을 녹이기에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것을 거부할 필요 없이 받아야 됩니다.


감기에 걸렸습니다. 충분히 앓고 나면 나을 수 있습니다. 약을 굳이 안 먹고 이겨낼 수 있다면 이겨내는 것이 좋습니다. 병이라는 과보를 그대로 받는 것이 좋다는 말이지요. 우리 몸에는 자연치유능력이 구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약으로 자꾸 톡톡 털어 먹음으로써 약화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자연치유력은 더욱 약화되고 스스로가 이겨내기가 힘드니까 또 약을 찾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한겨울에도 밖에서 잘도 뛰어 놀았고, 집도 외풍이 세서 아주 추웠지만 어지간해서는 감기가 잘 안 결렸습니다. 감기가 걸려도 금방 나았지요. 어지간한 병쯤은 약을 먹지 않아도 그저 받아들이고 나면 금방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게 병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병을 안 받아들이고, 대신에 손쉽게 약이나 병원을 통해서만 이겨내려 하니, 오히려 자연치유력은 약화되고, 더 약한 몸이 되어갑니다.


모든 괴로운 경계가 온다면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세요. 다음에 오면 더 크게 올 것이 지금 그나마 이 정도 크기로 온 것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법계의 결정을 신뢰하세요. 내가 나서서 나쁜 업에 대한 과보가 오면 막으려고 해쓰고, 좋은 업에 대한 과보가 오면 더 집착해서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때 그 일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을 받아들여 주세요.





과보를 받는 공간에 따라 다르게 받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늘도 지은 업을 받을 때 다르게 받게 되는 또 다른 마지막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번째로, 과보는 받는 공간에 따라서 다르게 익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어떤 업을 지어서 감기에 걸렸습니다. 감기에 걸렸다 하는 것도 악업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선진국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후진국에 태어났다고 해 보겠습니다. 선진국에서 과보를 받는 사람은 가볍게 약을 먹고 금방 낫겠지요. 그러나 후진국에서 감기에 걸린 사람은 약이 없어 그 작은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감기에 걸릴 만한 업을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다음에 어떤 복을 지었느냐에 따라 누구는 선진국에 태어나서 가볍게 받고, 누구는 후진국에 태어나서 무겁게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업을 지었더라도, 과보를 받는 공간이 어디냐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거사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정말 2분만 늦었어도 돌아가실 뻔 했다고 했습니다. 이 분이 쓰러지셨을 때 누가 마침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무도 없었다면 이 얼마나 불행인 거예요. 그런데 그 공간은 내 복의 크기에 따라 결정됩니다. 내 곁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쓰러질 것인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쓰러질 것인지는 내가 지은 인연복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업을 똑같이 지었더라도 네 가지에 따라 다르게 그 과보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네 가지는 행위자의 의식, 대상, 시간, 공간입니다.


업을 지을 때 그 행위자의 의식에는 이미 그 결과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어떤 의식으로 행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똑같은 식당을 개업하더라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돈 벌려는 집착심이 있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먹이겠다는 마음으로 집착없이 시작하면 성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식당의 분점을 같은 입지조건에서 내더라도 사장의 의식에 따라 성공과 실패는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수행하고 복짓는 마음으로 행위한다면 최고의 결과를 끌어오도록 만드는 최선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둘째는 대상입니다. 좋은 도반과 스승과 주변에 좋은 인연의 복을 지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더 아름다운 과보를 받을 수가 있다는 말이죠. 좋고 나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겠지만,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도반, 좋은 스승, 좋은 인연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마음공부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좋은 대상에게 복을 지을 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다음으로 과보를 받는 때 역시 중요합니다. 그때가 언제냐, 지금 바로 이 순간입니다. 자꾸 과보를 막으려고 하지 말고, 미루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받아야 할 것은 분명히 받아들이고 넘어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과보를 받는 공간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의 복력이라고 했습니다. 얼마큼 복을 지었느냐, 또 얼마큼 인연복을 지었느냐에 따라서 그 공간이 결정된단 말입니다. 똑같은 악업을 지었어도 편안하고 쾌적한 공간에 있을 때에는 간단히 끝날 수도 있고, 생명을 위협받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복을 짓고 살아야 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똑같은 업이 똑같은 과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 자신의 업을 책임지고 업의 주인이 되어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과 지혜는 각각 닦으라  (0) 2016.07.03
욕을 얻어 먹을 때 마음 대처법  (2) 2016.06.07
운명을 바꾸는 길  (0) 2016.03.16
당신이라는 빛나는 브랜드  (0) 2016.03.02
직관력  (0) 2016.02.24
중도에는 지족과 수용이 있다  (2) 2015.10.26
Posted by 법상

 

 

 

명품이나 물질적인 소유물로 나를 채우려고 하면
오히려 점점 더 부족하고 결핍된 나를 끌어당기게 된다.
못난 사람일수록 그 텅 빈 가슴을 물질로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날 적부터 이미 존재 자체로 완벽한 명품임을 잊지 말라.


중요한 것은 외부의 물질이나, 직업이나, 학력, 큰 집, 외모, 명품가방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를 물질로 채우려고 하는 욕망은 그 마음 안에,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마음 등이 존재한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은 ‘나는 못났다’라는 사실을 강화시킬 뿐이다. 그 이면에는 낮은 자존감이 있다. 그렇게 되면 ‘남들이 나를 잘 보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계속해서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려면 나는 지속적으로 못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정확히 그것이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당황스런 현실인 것이다. 물질적 욕망을 채움으로써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은 결국 점점 더 부족하고, 결핍되고, 못난 나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그 누구에도 잘나 보일 필요가 없다. 사실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 자체로 이미 완벽한 명품이다. 왜 그럴까? 당신은 인류의 수많은 구도자들이 합일하고자 꿈꿔 온 저 근원, 신, 불성, 신성이라는 본연의 성품으로 빚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당신에게 있는 참된 자성이라는 명품 브랜드를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도의 길, 수행의 길이란 것이 바로 그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품 로고를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런 정해진 브랜드 딱지란 없다. 딱지를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온 누리, 일체 모든 존재가 전부 명품이라면 따로 명품을 찾을 것도, 명품 딱지를 붙일 것도 없지 않은가? 나도 당신도,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있는 그대로 명품이다. 명품이 되기 위해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저 지금 이렇게 명품인 채로 존재하면 될 뿐이다. 본래 명품이었음을 확인하면 될 뿐이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을 얻어 먹을 때 마음 대처법  (2) 2016.06.07
운명을 바꾸는 길  (0) 2016.03.16
당신이라는 빛나는 브랜드  (0) 2016.03.02
직관력  (0) 2016.02.24
중도에는 지족과 수용이 있다  (2) 2015.10.26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  (1) 2015.10.24
Posted by 법상

 

 

 

생각이 삶의 온갖 문제들에 지혜로운 해결책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생각은 필요할 때 잠시 써먹을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는 하지만, 근원적인 지혜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생각은 언제나 ‘나’를 중심에 두고 세상 모든 것을 둘로 나눈 뒤 그 중에 내게 이익 되는 쪽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놀라운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생각으로 판단 분별하기를 잠시 멈추고, 무심(無心)의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 보라. 생각이 놓여지는 자리에, 그 고요하고 텅 빈 공간 위로 영감과 직관이라는 깊은 지혜가 드러난다.

직관이란 머리에서 논리적으로 짜낸 생각이 아니라, 가슴에서 아니 저 깊은 심연의 본성으로부터, 혹은 우주법계의 근원으로부터 올라온 진리의 소식을 전해주는 지혜요 영감이다.

대기업의 총수들도 의외로 이해 가능한 범주에서의 논리와 생각 보다 오히려 남들이 보기에는 뜬금없고 갸우뚱할 만한 직관적인 영감에 더 많이 영향 받는다고 한다. 머리보다는 오히려 가슴을 따른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이 비슷하다. 왜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혹은 이것 보다 저 결정이 누가 봐도 더 좋은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올라오는 직관적인 영감을 따르는 경우는 많다. 그것은 얼핏 보면 얼토당토않은, 논리성이 결여된 결정인 듯해도, 사실 그런 결정이야말로 내가 가야 할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지혜의 나침반이다.

사랑할 때 무슨 논리와 생각과 이유가 필요한가? 부모님이 아무리 반대를 해도 가슴이 시키면 그 모든 반대를 무릎 쓰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택하지 않는가. 왜 그럴까?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왜 이렇게 맹목적인 것에도 용감해지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 우주가 보내준 삶의 힌트임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결정적일 때는 늘 생각 보다는 직관을 쓰고 살고 있다. 바로 그러한 직관과 영감이라는 더 깊은 차원의, 저 너머에서 온 메시지를 보다 더 자주 인생의 무대 위에 꽃피워보라.

그러려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할 것이 아니라 더 자주 생각을 비우고, 더 많이 가슴의 떨림에 귀 기울이며,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직관력은 삶에 힘을 빼고, 이완하며, 유연해지고, 그 모든 것들이 들어오도록 자신을 활짝 열어 자연스러운 삶에 자신을 내맡길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명을 바꾸는 길  (0) 2016.03.16
당신이라는 빛나는 브랜드  (0) 2016.03.02
직관력  (0) 2016.02.24
중도에는 지족과 수용이 있다  (2) 2015.10.26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  (1) 2015.10.24
법상스님 법회 안내  (0) 2015.09.20
Posted by 법상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중도에 있다. 정견이라는 바른 지견의 핵심은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견해다. 그런데 이러한 중도의 견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중도적이지 않은 것이다. 중도란 양변 가운데 어느 한 쪽만이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양변 모두가 하나의 서로 다른 부분임을 아는 것이다.


동전의 양 면처럼 하나의 서로 다른면일 뿐,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르지는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양쪽 모두가 어느 관점에서는 옳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를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인연 따라 어떤 경우에는 이쪽이 다른 경우에는 저쪽이 옳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불이 즉 둘이 아니라고도 한다. 서로 다른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서로 다른 측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도는 양 변 모두가 각자 나름의 진리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양 변 모두가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는 진리는 없다.


길고 짧은 것 중에, 덩치가 크고 작은 것 중에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 특정한 어느 하나를 가지고 좋거나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연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큰 것은 큰 것 대로의 역할이 있고, 좋은 점이 있으며, 강점을 지니고 있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의 몫이 있고, 장점이 있는 것이다.


내성적인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 대로의 장점과 아름다움이 있고, 외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대로의 장점과 개성이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이처럼 양변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인 이는 자신이 어느 쪽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쪽에 있는 사람을 탓하지도 않고, 자신을 더 우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더 좋거나 나쁜 쪽이 아니라 그저 같은 것의 서로 다른 측면임을 알기에, 양 쪽 모두가 진리일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니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이 상황 이대로 진리이고, 상대방의 상황은 그 사람 나름대로 진리인 것이다. 그러니 타인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나 자신을 탓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지금 이대로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받아들인다. 그저 언제나 자신이 처해 있는 그 곳에 존재해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단순히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며,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 하지도 않고, 지금과는 다른 특별한 성취를 얻으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무언가를 이루려고 아등바등하지도 않는다.


지금 이대로와 원하는 것을 성취한 그 순간은 양 변일 뿐이기에 서로 다른 측면일 뿐, 좋고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낸 뒤와 지금 이대로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순간 내가 처해 있는 이대로의 모습에 완전히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물론 불편한 것이 있을 때는 조금 더 편한 쪽을 선호하면서 노력하겠지만 그것만이 반드시 편한 쪽이라고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매 순간 처한 인연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지만 언제나 진리의 자리에 있음을 알기에 괴로울 것도 없고, 성취할 것도 없이, 늘 그 자리에서 여여하다.


이처럼 중도적인 이는 어디에 있든 그 자리가 최상의 자리임을 안다. 주어진 삶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이미 지나간 것을 아쉬워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근심 걱정하지도 않는다. 늘 지금 이 자리야말로 최상의 진리임을 아는 것이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이라는 빛나는 브랜드  (0) 2016.03.02
직관력  (0) 2016.02.24
중도에는 지족과 수용이 있다  (2) 2015.10.26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  (1) 2015.10.24
법상스님 법회 안내  (0) 2015.09.20
삶이 불확실하기에 아름답다!  (1) 2015.08.18
Posted by 법상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경계’가 무엇인지를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늘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는 말을 듣는데, 그 경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궁금해한다.


이 경계가 바로 육근의 감각대상인 육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근 즉,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의 감각기능들이 각각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을 대상으로 감각활동을 하는데, 각각의 감각기능들은 그 대상을 감지하면서 그 경계에 끄달리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보기 싫은 것, 보고 싶은 것 등을 나누어 놓고, 보고 싶은 것이나 보기 좋은 것은 더 많이 보려고 애쓰고, 보기 싫은 것은 고개를 돌리거나 보지 않으려고 도망치기도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외부의 대상에 끄달려 가는 것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칭찬은 듣고 싶은데 비난을 듣게 되면 마음이 괴롭다. 외부의 소리 경계에 끄달려 마음이 휘둘리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 보고, 몸으로 감촉 느끼는 모든 것에서 외부의 대상에 끄달리고, 휘둘리게 된다.


사실 우리에게 감지되는 모든 대상, 즉 여섯가지 경계는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욕망, 탐욕, 바람, 의도 등이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분별하고, 나쁜 것이라고 분별할 뿐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를 맞을 때 우리 몸의 감각기능은 그 감촉을 느끼며 싫어하거나 찝찝하게 느끼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바람 부는 날씨를 좋아하거나, 비 맞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청국장의 맛과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 경험해 본 외국인들이라면 도저히 맡기 힘든 냄새거나 맛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육근에 감지되는 모든 대상 경계들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분별도 없는 중립이지만, 우리가 나름대로의 욕망과 분별심으로 인해 그것이 좋으니 싫으니 하며 마음이 끄달리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외부의 어떤 경계로 인해 괴롭다고 할 때 사실은 외부 경계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여섯 경계를 실체화하여 분별심을 일으킴으로써 일어난 것일 뿐이다. 즉 모든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러니 경계에 휘둘리는 것 또한 내 스스로 만든 것이니, 결국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것 또한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외부의 여섯 가지 경계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여여한 중립적 경계일 뿐임을 기억하라. 그 중립적인 경계에 내 마음이 하나하나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렇듯 육근이 육경을 대하면서 일으키는 분별심을 육식이라고 한다. 식, 즉 알음알이, 분별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바로 이 분별심, 즉 육식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외부의 그 어떤 역경계가 있더라도, 사실은 외부에서 온 경계가 아니라, 내 안의 마음 즉 육식이라는 분별심이 만들어낸 허상의 경계인 것이다. 모든 것은 이처럼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유식에서는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고 늘 설한다. 외부에 실체적인 순역의 경계가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만법의 주인이 될 수 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평일 오전 7:50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중에서]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관력  (0) 2016.02.24
중도에는 지족과 수용이 있다  (2) 2015.10.26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  (1) 2015.10.24
법상스님 법회 안내  (0) 2015.09.20
삶이 불확실하기에 아름답다!  (1) 2015.08.18
늙어감을 받아들이라  (0) 2015.07.26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