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법상
티베트 불교 교파 캬규파의 창시자 나로빠에게 그의 스승 틸로빠는 여러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 중 이 불법공부에 대한 핵심을 설하는 유명한 여섯 마디의 가르침이 유명하다.

살펴보면, 첫째는 이미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말라, 둘째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상상하지 말라, 셋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지 말라, 넷째는 어떤 것도 탐구하거나 머리로 헤아리지 말라, 다섯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거나 만들어내지 말라, 여섯째는 그저 쉬라이다.
이 여섯 마디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이 마음공부의 핵심을 아주 적절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 공부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상상하지 말고,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첫 세 마디 말이다.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이다. 과거나 미래, 현재라는 것은 전부 환상일 뿐, 실제가 아니다. 주로 나이가 들수록 ‘내가 예전에는 어땠는데’ 하면서 과거를 들추길 좋아한다고 한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반대로 미래를 상상하며 부푼 꿈을 꾼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를 향한 그 모든 기억과 상상은 한낱 분별망상일 뿐이다. 물론 필요할 때 잠시 필요한 만큼의 기억을 꺼내와 쓸 수도 있고, 또 필요할 때는 미래를 계획할 필요는 있다. 그것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를 하는 입장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이 전부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생각은 실제일까? 그렇지 않다. 현재에 일어나는 생각 또한 망상일 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과거 기억을 꺼내와 현재와 비교 대조함으로써 현재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일들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럼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를 경험하는 이 생생한 순간에조차 현재에 깨어있지 못한 채 과거와 비교분별의 생각 속 망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어떤 것도 탐구하거나 머리로 헤아리지 말라인데, 이 또한 현실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까지 탐구나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이 공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아주 필수적이며 중요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하면서도 세속의 습관을 못 버리곤 한다. 생각으로 헤아리고 탐구하는 버릇이 그것이다. 수행에서는 가장 독이 되는 것이 바로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이 법의 세계는 생각이나 의식으로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이라는 분별, 알음알이, 생각, 망상이 꼼짝 못하고 꽉 막힐 때가 되어야 그 너머에 있는 진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도 비슷한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거나 만들어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행을 하면서 어떤 신비체험이나 삼매나, 깨달음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고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무언가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있는 것이고, 수행은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고 만들려고 애쓰는 동안에는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깨달음을 탐구해도 안되고, 만들어내려고 추구해도 안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바로 여섯 번째 가르침에 그 답이 있다. 그저 쉬어라. 그 모든 분별망상, 생각, 조작, 탐구, 추구를 몽땅 몰록 쉴 때 진리는 드러난다.

Posted by 법상

완전히 행복해 지는 방법
  -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나와 부처와 신은 하나다

 

불성(佛性), 신성(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신이 하나란 뜻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하나란 뜻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하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부처로써, 신으로써 완전한 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사상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성자, 현자, 선각자들과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가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도울 때 사실은 나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상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가

상대방과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며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상 없이 보시하라, 무주상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것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불성과 신성이란 것은

부처님의 성품, 신의 성품 그 자체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신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불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그렇기에 사실은 보시해도 한 것이 아니다.

 

너도 완전하고 나도 완전하며,

너도 풍요롭고 나도 풍요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에너지의 이동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은

‘이렇게 하라’는 윤리 규정이거나, 명령이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불성이 있다, 신성이 있다는 말은

곧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하고 충만하다.

그렇기에 불성과, 신성과 다르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써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완전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세상 자체가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 세상의 본 바탕, 근원은 이러한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완전성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완전한 자비, 동체대비 그 자체인 것이다.

 

추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현실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신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다.

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진실로 말씀해 주셨고,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도 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제해야 할 중생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삶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

 

그러한 진실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나쁘다’고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판단과 분별작용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무분별의 중립적인 현실에

끊임없이 판단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일 뿐이다.

 

본래는 완전한 자비의 불성이고,

완전한 사랑의 신 그 자체만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

우리를 꼬셔서 지옥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 밖에 없는 완전한 우주법계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순전한 상징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의 싸움 또한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상징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신이 세상을 창조한 근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인간의 상상이거나,

상징이었을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완전한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며,

아상이고, 에고라는 허상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즉 내면의 번뇌, 욕망, 집착, 화, 어리석음, 아상인 것이다.

 

악마는 바로 아상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판단이다.

마왕은 바로 탐욕과 화와 번뇌이다.

 

즉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나, 상황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나의 판단과 해석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미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시냐고.

지금 자신의 삶이 대체적으로 행복한가 하고.

과거에 생각했던 행복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하고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반대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세상은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진실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삶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삶의 완전성을 삶에서 드러내는 법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고 빌고 욕망할 때

존재 본연의 완전성은 사라지고

결핍과 부족과 실패가 창조되고 만다.

 

사실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욕망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부처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다.

신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그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성과 신성의, 우주법계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완전성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신도

우주 법계도 언제나 완전하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실패 자체도 없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해서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생각이 모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삶을 창조하는 토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한 현실이 창조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현실이 창조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또한 내가 바로 당신이고, 우주이며, 존재 자체이다.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토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토대의 생각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른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의 본질에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창조된다.

사실은 바로 그 토대의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토대는 어떤가?

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신이라면 어떨까?

 

완전한 존재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

언제나 충만한 행복과 만족과 풍요로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환상도 없다.

그저 매 순간 순간 완전함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삶의 완전성이 창조된다.

 

아니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전했으며 완벽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 본연의 고향,

완전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귀의, 귀향!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이 말은 상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완전하고 풍요롭다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풍요로움이란

우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것이다.

내가 아까워하고, 축적하고, 적다고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결과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두려움 없이 도우라.

그 마음에 우주 근원의 에너지인

풍요와 완전성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풍요의 토대 위에서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풍요가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완전히 행복하다면

무언가를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미래에 오게 될 행복을 꿈꿀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완전무결한 행복이라고 외치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라.

넘치는 행복 그 자체인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행복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실패란 없다.

언제나 삶은 완전하며 성공적이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성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라.

현실의 상황에 대해 성공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운 현실을 창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공만을 창조해 낸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상스님의 미투  (0) 2010.01.28
쉽게 실천하는 생활 명상법  (0) 2010.01.27
완전한 행복을 찾는 방법  (0) 2010.01.25
법상스님의 미투  (0) 2010.01.23
법상스님의 미투  (0) 2010.01.21
시크릿을 넘는 아바타의 지혜  (0) 2010.01.19
Posted by 법상

 

[비슬산 정상에서]

비구들이여,
(법을)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은
부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스님들의 가르침에 길들여져 있지 않다.

또한 그는 불법승 삼보의 가르침에 길들여지지 않아,
땅을 땅으로 실제시하여 인정하며, 땅을 땅으로 인정한 다음,
땅에 대해 번뇌하고, 자신을 땅과 관련시켜 생각하고,
땅을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고,
'땅이 내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땅으로 인해 즐거워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그것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물, 불, 바람도 반복)

비구들이여, 완성된 자, 깨달음을 성취한 자,
여래도 또한 직관적으로 땅을 땅으로 안다.

하지만 여래는
땅을 땅으로 안 다음, 땅에 대해 번뇌하지 않고,
자신을 땅과 관련시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땅으로 생각하지 않고,
'땅이 내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땅으로 인해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래가 그것을 완전히 알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중부경전]


불법의 진리를 올바로 알아
삼보를 호지하고 삼보에 길들여 져 있는 자는
땅을 고정된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땅에 집착하지 않고,
땅으로 인해 번뇌하지 않으며,
'이것은 내 땅'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땅을 나와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또한 물이나 호수나 강가에서
이 물은 내 물이라거나, 내 호수라거나,
내 강이고 내 시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것은 내 물'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불도 바람도,
따뜻한 온기며 햇살이며 불이며,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도,
그것은 모두 대자연의 인연에 따른 조화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없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수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은 모두
지수화풍 네 가지로 이루어 졌으니,
이 세상의 물질적인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모두 고정된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번뇌하지 않으며,
'이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것'과 나를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실체적일 수 있으며,
언제까지고 '내 것'일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언제까지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진 모든 물질적인 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고(제법무아)
항상하지 않으며(제행무상)
언제까지나 즐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일체개고)

그러니 어디에 집착할 것이 있으며,
그로인해 번뇌하고
'내 것'으로 붙잡아 둘 것이 있는가.

가만히 '스스로 그러하게(자연스럽게)' 잘 있는 땅에
측량을 하고 금을 그어
'이것은 내 땅, 저것은 네 땅' 하면서 갈라놓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인해 번뇌하거나 기뻐하고,
그렇듯 많은 땅을 소유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능력인 양
자기와 동일시하는 그런 어리석은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계에서는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이런 세상에 전면전을 선포하고
땅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실체 없으며 항상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
거기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에 대해, 물질에 대해, 땅에 대해
지혜롭게 완전히 아는 자의 삶의 방식이다.

무엇이든(일체, 지수화풍, 오온)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무소유)
내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은,(무집착)
그로인해 번뇌하고 있는 모든 것은,(해탈)

고정된 실체도 아니요,(무아)
항상하는 것도 아니며,(무상)
언제까지나 즐거움을 주는 것도 아니므로(고)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다만 잠시 인연따라 관리할 뿐임을 알아(연기)
마음내어 잘 관리하다가도(이생기심)
인연이 다 하면 집착없이(응무소주)
자연스레 돌려줘야 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골고 루 세상을 적셔 주듯,
우주 법계에서 내리는 법의 비도(法雨)
온누 리에 공평무사하게 내립니다.

우주 법계에서 내리는 법우를
우주 법계의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법 신 부처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고,
충만한 성령이나 영성 이라 할 수도 있을 테고,
우주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 을 것 같습니다.

말이야 무어라고 해도 상관없 지요.
그것에 인격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하느님, 부처님이라 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 법계의 에너지는
아무런 분별도 없고, 시공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저 그냥 충만하게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에 불과하지요.
'지금 이 순 간' 과거 현재 미래가 고스란히 있는 것입니다.
공간이 라는 개념 또한
사실은 나와 너, 자연과 우주 이 모두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법계 의 에너지도
'지금 여기'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지,
과거나 미래 혹은 다른 장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 니다.

우주 법계의 에너지는,
법 신 부처님의 힘이며, 성령의 강림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만 온전하게 빛을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 금 이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즉 온전히 지금 이 순간 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런 결정이나 고 민이나 분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순간 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 속에서
자성부처님이 그 삶을 진리로 이 끌어 갈 것이고,
가장 온전한 길로 안내할 것입니 다.

미래의 결정 때문에 고민할 일 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의 문제이며,
과거의 일들 때문에 걸 림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걸리는 일인 것입니다.
오직 지 금 여기에서 집중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의 모든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
모 든 법계의 힘이며 에너지가 전부 주어집니다.
그럴 때 정 확히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필요한 것이 진리에 걸맞게 나 투어 지는 것입니다.


원할 것도, 바랄 것도 없고
오직 깨어있 으면 법계에서 다 알아서 해 나갑니다.
오직 지금을 살아가면서
나머 지 것들은 그저 믿고 맡기기만 할 뿐
다른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 다.
[법구경]의 말씀에서 처럼
오직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 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보아라.  
그리하여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참되게 굳은 관찰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법구경(法句經)]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 니다.
이 순간 깨어있을 때
우주는 나에게 무량한 힘 을 보태어 줍니다.
이 힘은 유위의 힘이 아닌 무위의 함 이 없는 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문제라도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의 근본은
바로 법계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는
법계의, 이 우 주의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외롭다고 혼자라 고 느끼는 순간에 조차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 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면
우주 법계로부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아니 가져다 쓴다는 말도 모 자랍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온전한 지금 여기에서의 나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의 나는 그대로 법계와 하나가 됩니 다.

그랬을 때
좋고 나쁘고도 없고,
긍정 부정도 없는
무분별의 함이 없는 행이 이어지 며,
고스란히 진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 다.

아무런 분별이 없는 진리의 삶 이기 때문에
다른 결과를 초래할 것도 없고,
과보를 받거나 현실 을 만들어 낼 것도 없이
순간 순간이 그대로 진여의 나툼 일 뿐인 것입니다.

이 순간에는 앞뒤가 딱 떨어 져
과거며 미래를 만들지 않는 것이고,
업을 짓는 일도, 업보를 받는 일도 딱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행하는 나'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이,
오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를 놓고 가는 것이며,
놓았다는 생각 조차 다 놓고 가는 것 입니다.

바로 그 때
법신 보신 화신 이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 다.
그야말로 법대로, 여법(如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신명을 다 하고, 마음을 다해 살아가십시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것을 하고 있느 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벽암록(碧巖錄) ]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 다.  
내 삶 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 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 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 로 오늘 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Posted by 법상





요즘 들어 부쩍 가난과 청빈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또 돌아보게 된다.
가난한 삶, 청빈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있어 아니 나에게 있어 가난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가난이란
모든 수행자들의 삶에 있어,
아니 모든 근원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삶이란
곧 근원적인 삶을 의미하며,
‘나’ 자신과 소탈하고 순수하게 대면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 가장 체험적인 수행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이야 말로
삶을 보다 윤기있고 지혜로우며
향기롭게 또 맑게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한 체험이자 요소인 것.

가난해야 그 속에서 맑음과 청정이
또 참된 지혜가 움튼다.
부유한 사람이 수행하기 보다
가난한 사람이 수행하기 훨씬 더 쉽고,
부유한 사람이 지혜롭기 보다
가난한 사람의 속 뜰에서 더 충만한 지혜가 움트는 법.

가난해야 수행하지
부유하면 수행은 벌써 멀어지고 만다.
가난과 수행
이것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가난했을 때
그 안에서 법계를 체험할 수 있고,
이 대자연의 경이로움이며
참 진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가난 속에서
또 저 대자연에 기댄 맑은 의식 속에서
지혜가 움트고 사랑이 움트지
저 빌딩 숲 속에서
거대한 부유함 속에서
참되고 맑은 지혜와 사랑은 그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은 다 가난했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이기 보다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서의 가난이기 보다는
그들의 삶의 지혜의 근원으로서의 가난이었다.

가난을 가까이 하고 살수록
우리 안의 지혜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가난하게 살자.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 비추어 보고 살자.

그렇다고 가난한 삶이란
단지 외적인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돈’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돈이나 경제력 같은 단어가
‘가난’이라는 단어를 좌지우지 할 만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요소가 못 된다.

가난은 돈이나 경제력과 상관없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가난해질 수 있다.
아무리 적게 소유하더라도
그 속에서 부유할 수 있는 것 처럼...

어쩌면 작은 의미에서 물질적 가난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물질적 가난을
구하려고 애써 좋은 조건의 직장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

물론 물질적 가난은 모든 이들에게 있어
맑고 지혜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 주는
참 좋은 요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에게 있어
‘가난한 삶’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설사 물질적 풍요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린 그 속에 살면서 가난해 질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어렵지만 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소유에, 그 부와 풍요에 집착하지 않는 것.

다시말해 삶 그 자체가 가난해야 참된 가난이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만이 참된 가난인 것은 아니라는 말.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마음 속에 욕심과 욕망을, 또 물질적인 부를 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많이 소유해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가난할 수 있다면
그는 실로 가난한 것이다.

삶의 모습에 있어 가난이란
말하자면 청빈 같은 것인데,
마음에는 바라는 것이 없이 자족할 수 있어야 가난이고,
행동에 있어 절약하고 절제하며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갈 수 있어야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많이 소유해도 소박하게 살 수 있다.
배고플 때 인연따라 내게 온 공양을 먹으면 되는데
욕심이 시키는 대로 밥이 있는대로 불구하고
더 맛있고, 더 많고, 더 비싼,
더 좋은 음식, 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소박하게 사는 것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칫솔질을 할 때라도
한 컵으로 할 수 있는데
수돗물을 콸콸 쏟아 붓는다면
이 사람은 가난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추우면 있는 옷 챙겨 입으면 되는데
더 비싸고, 더 좋고, 더 예쁜 옷을
그것도 몇 벌씩,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올 때마다
새로 사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어릴적 아버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기업의 회장이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마시고는
남은 소주를 호주머니에 넣고 가더라는 말씀.

이런 사람이 요즘에는 있는가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끼고 절약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실천,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욕심과 욕망 보다는
정말 필요한 작은 소유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베풀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수백억을 가지고 있더라도
가난에서 오는 참된 지혜와 미덕을
그대로 안으로 움트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물질들은
그 사람 것이 아니라
법계의 것이고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가난을 꿈꾼다.
내가 늘 부유하게 살지만, 그래서 항상 부끄럽지만
내 안에서는 늘 맑은 가난을 꿈꾸고 있다.

우리들 모두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맑은 가난을 꿈꾸며 실천할 수 있을 때
바로 그곳이 극락이고 천상이 아니겠나.

그랬을 때
이 세상은 항상 충만한 곳이고,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가난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부지기수다.

‘최소한의 필요’의 영역을 정하고
그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다 베풀어 주는 것도 가난의 실천이며,
무엇보다 삶이 절약과 절제되어 있어야 가난이고,
마음에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할 때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꼭 필요한 곳이라면
전 제산이라도 다 베풀어 줄 수 있어야 하겠고,
꼭 필요하지 않은 곳이라면
물 한방울 낭비하는 것에도 부끄러워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 가을...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 안의 가난에 대해 돌이켜 본다.

또 우리 모두가
가난에 대해
내 삶의 가난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비추어볼 수 있었음 하고 바란다.










Posted by 법상




[봄이 오고 있는데,
사진은 벌써 가을 단풍이네요...]

28.
깨어있는 명상으로써 마음을 관하는 수행자는
방일과 근심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본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듯이



어느 날 삡팔리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마하가섭이 아침에 탁발을 하고 돌아와 공양을 드시고 자리에 앉아 천안으로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들이 어떻게 업에 따라 나고 죽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닦아 밝아졌는지,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나태하고 산만한 마음으로 생을 허비하고 있는지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이번 생에 이렇게 부유하게 태어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어떤 과거생의 인연으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지, 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인연과 업은 어떤 과거생의 수많은 인연으로 얽혀있었는지 등에 대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연을 환히 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가섭을 관찰하시고는 가섭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말씀하신다.

“가섭이여, 일체 중생들이 각자의 업에 따라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를 환히 깨달아 아는 것은 오직 붓다의 지혜에만 한계가 없다. 다른 이의 지혜로서는 중생들이 여기 저기에서 업에 따라 부모를 만나며 나고 죽는지를 다 알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네 능력 밖이다. 붓다만이 이 모든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있느니라.”

물론 가섭 또한 아라한이기 때문에 전생과 업에 대해 볼 수는 있을지라도 일체 모든 중생들의 심지어 축생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어떤 업 때문에 저 두 사람이 원수 지간이 되었는지, 어떤 업 때문에 저 아이들이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업 때문에 저들은 이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거나, 이별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인연이기에 이번 생에 함께 결혼하게 되었는지, 또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며, 주인과 하인이 되었는지 일체 모든 중생의 일체 모든 업연을 하나 하나 낱낱이 환히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업과 인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스승들은 무수히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처럼 일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과 윤회의 사실을 분명하고도 환히 알고 보는 분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부처님처럼 그 무수히 많은 출재가의 재자들에게 그것도 분명한 대기설법을 통해 때로는 말 한마디로, 때로는 지속적인 수행의 주제를 내어 주고 법을 설해 줌으로써 아라한으로 이끈 이는 없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과거 전생의 수많은 인과와 윤회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어떤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인과 이야기를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또한 믿기 힘들 정도로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 하나만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이 때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과를 증득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심지어는 수십, 수백명이 동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능력은 인류 역사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영적인 스승일지라도 가능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스승이 등장하고, 성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능력은 우리의 생각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러나 부처님 같은 이런 능력은 그 어떤 이에게도 없었다.

바로 이 가섭에게 한 설법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가섭이 어떤 제자인가. 마하가섭이라는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님의 상수 제자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제자요, 선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은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가섭 정도의 지혜라면 인류의 수많은 성자와 영적 스승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분 가운데 한 분이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는 이토록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것인가.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전생부터의 선근 공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공부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나 우리도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부처님의 법문 한 자락 끝에 저마다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선근 공덕을 지어야 하고, 바로 그 선근이란 것이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다름 아니다.

방일함이 없이 깨어있는 관찰의 수행을 닦는 수행자는 언젠가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려다 볼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한 단계 아래로 깔본다거나,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의 대지와 사람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듯이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붓다는 모든 중생들의 인과와 업과 근기 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근기와 업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걸맞는 수행재료를 줄 수도 있고,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만 유독 수많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깨어있는 명상이라는 마음 관찰의 수행이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25.
마음을 잘 절제하고 게으름 없이 노력하며
주의 깊은 마음 관찰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지혜로운 이는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다.



마음을 잘 절제하고 게으름 없이 노력하라. 마음에서는 온갖 것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온갖 생각들, 온갖 욕망과 성냄과 과거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 올라오는 생각, 느낌, 욕구들을 잘 절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올라오는 생각들에 나 자신을 빼앗기고 휘둘려 그 생각과 감정, 욕망과 화에 나의 주인자리를 내 주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잘 절제할 수 있는가? 주의 깊은 마음 관찰을 통해 그 마음을 잘 절제할 수 있다. 게으름 없이 주의 깊은 마음 관찰 수행을 지속시키며 노력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수 있다.

주의 깊은 마음 관찰을 통해 마음을 잘 절제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지혜로운 이는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다. 여기서 홍수란 네 가지 거센 폭류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를 생사윤회의 바다로 거칠게 몰아 넣는 거센 흐름을 말한다. 즉 윤회 바다의 거친 흐름과 폭류, 홍수 속에서 헤매다가 안전한 의지처인 섬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지혜로운 이는 마음 관찰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안전한 섬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홍수라고 표현한 네 가지 거센 흐름인 사폭류(四暴流)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욕망의 거센 흐름(欲流), 그릇된 믿음과 견해라는 거센 흐름(見流), 자아의 집착에서 오는 존재의 거센 흐름(有流),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거센 흐름(無明流)을 말한다. 이 네 가지 거센 흐름 때문에 우리는 생사 윤회라는 바다로 거센 흐름의 폭류에 휩쓸려 떠내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거센 폭류가 되어 우리를 홍수가 휩쓸고 가듯 순간 생사윤회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릇된 믿음과 삿된 견해 또한 우리를 생사 윤회의 폭류에 휩쓸리게 하며, 아상의 집착에서 오는 아집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 역시 거센 흐름이 되어 우리를 생사 윤회의 고해바다에 빠지게 한다.

이렇듯 거센 격류에 휩쓸려 생사 윤회의 고통 바다로 떠내려가 바닥을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다가 섬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안전하고 평안할 것인가. 바로 그러한 안전한 섬을 쌓는 일이 바로 주의 깊게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생사 윤회의 모든 고통 바다에서 격류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주고, 안전한 섬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마음관찰 수행이요, 이것이야말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오롯한 길인 것이다.  


라자가하에 부유한 은행가의 딸이 성숙해지자 부모는 그녀를 너무 심하게 감시하며 칠층 꼭대기 방에 가두었다. 인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인의 순결과 순종을 집착적으로 지키려는 습관이 있다보니 이런 일들이 다반사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이란 보호하고 떨어뜨리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불타오른다는 것 또한 이치이고 보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그 때도 유효했던가 보다.

그런 보호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인과 사랑을 나누고 도망쳤다. 도망쳐서 살다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되어 아내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정으로 가려다가 길 위에서 아이를 낳아 이름을 빤타카(길)라고 지었다. 이 첫째 아이가 마하빤타카이고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 둘째도 길 위에서 낳았으니 둘째 이름이 우리가 주리반특으로 잘 알고 있는 쭐라빤타카였다.

이후에 친정 부모는 마하빤타카와 쭐라빤타카를 키우게 되었고, 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께 가서 자주 법문을 듣곤 했다. 그러던 중 먼저 마하빤타카가 출가하여 무색계 선정에까지 이르른 뒤에 동생도 출가를 시켜 이런 행복을 경험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동생을 출가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쭐라빤타카는 머리가 둔해 4개월 동안 단 한 구절의 가르침도 외우지 못했다. 쭐라빤타카는 전생에 가섭불 시절에 둔한 스님을 보고 바보라고 놀린 과보로 이번 생에 아둔한 인물로 태어난 것이다.

어느 날 부처님과 스님들의 주치의이자 유명한 의사였던 지바카가 스님들을 공양에 초청하자, 공양 배정의 소임을 맡고 있던 마하빤타카가 쭐라빤타카는 아직 공양을 받을 만한 수행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공양초청에서 제외했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동생 쭐라빤타카는 환속을 결심하고 절을 떠나다가 이러한 정황을 아신 부처님께서 쭐라빤타카에게 그의 근기에 맞는 특별한 수행법을 알려주게 된다.

그것은 ‘라조 하라낭’으로 이는 ‘때를 닦다’ ‘더러운 것을 닦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인데, 라조 하라낭을 염하며 마루를 닦도록 수행의 재료를 주셨다. 이에 고무된 쭐라빤타카는 마루의 때를 닦으며 수건이 때에 물드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은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광명을 놓아 쭐라빤타카에게 ‘수건이 때로 물드는 것처럼 사람 마음도 때로 물든다. 탐욕의 때, 성냄의 때, 무지의 때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를 보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때를 완전히 제거하면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라는 법을 설해 주시고, 이에 더욱 용기를 얻은 쭐라빤타카는 더욱 마음을 모아 관찰함으로써 머지않아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뿐 아니라 둔함이 사라지고 지혜가 증장되는 공덕을 얻었다.

쭐라빤타카는 과거생 왕이었을 때도 수건에 얽힌 인연 이야기가 있었다. 왕이었을 때 성을 순회하면서 이마에 땀이 흘렀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자 수건이 더러워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변해가는 것이구나’ 하는 무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졌던 것이다. 수건이 때로 물들고 변해가는 그 단순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마음을 모은 것이 무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왔고, 그러한 이해가 선근의 공부 인연으로 쌓여 이번 생 쭐라빤타카는 라조하라낭을 통해 아라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거 전생의 작고 사소한 깨달음의 선근까지도 환히 알고 보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기에,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이들의 영겁 전생까지를 살펴본 뒤 저마다의 근기에 맞는 수행의 재료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이란 것, 해탈이란 것은 크고 대단하며 웅장한 어떤 것 속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다 보면 아주 작고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부처님은 수행의 재료로 주시고,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일화를 많이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촛불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거나, 산불이 나는 것을 보고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거나, 흐르는 물을 관하거나,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관하거나, 느낌을 관하거나, 욕망을 관하는 등의 다양한 수행 재료로써 저마다의 근기와 그릇에 맞는 수행을 닦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했을 때 그 대상은 결코 작지 않다. 우주법계의 진리가 수미산 보다 더 큰 우주 속에도 담겨 있듯이 티끌보다도 작은 데에도 똑같은 무게의 진리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크고 웅장하며, 감각을 자극하는 대단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고, 무엇을 하더라도 세계 최대, 동양 최대, 최고, 최초 같은 것만을 관심 있어 하지만 사실은 봄에 나지막이 피어나는 소박하고 작은 꽃 한 송이 속에서도 우주의 진리는 연주되고 있는 것이며, 집안을 수건으로 닦거나, 비질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그 사소한 일과 속에도 마음만 모아 집중하고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우주의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쭐라빤타카가 아라한을 성취한 것을 아시고는 부처님께서 지바카의 공양에 초청하여 많은 대중 앞에서 부처님을 대신해 법을 설하도록 하셨다. 후에 비구들이 쭐라빤타카에 대한 이야기로 법담을 나누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읊으셨다.

아무리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지식이 없고 공부를 못하며 명석하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다만 마음을 절제하고 게으르지 않은 노력으로 주의 깊게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그 어떤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이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 결국에는 이르게 된다. 아무리 모자라고 어리석다고 할지라도 자기 안에는 자기 스스로 의지처로 삼을 만한 지혜의 소식이 금강과도 같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는 것은 지식이나 똑똑한 것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 없는 마음 집중의 힘으로 찾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부처님 저는
'만약 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죽게 된다면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이며, 어디에 태어나게 될까'
하는 생각만 하면 두려워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설령 그대가 죽는다 해도 괴로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믿음과
계율을 지님,
진리를 배움,
집착과 욕망을 버림,
지혜을 닦는 등의 수행을 하였다면
비록 언제 어떻게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설사 사나운 짐승이나 새에게 먹힌다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

마치 기름종지를 깊은 연못에 넣어 깨트리면
깨진 종지의 조각들은 가라앉겠지만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
오랜동안 믿음, 지계, 진리, 비움, 지혜를 닦은 이는
설사 죽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대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죽은 뒤를 걱정하지 말라.
언제 어떻게 죽을지 걱정하지 말라.
어차피 죽음은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말고
다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믿음과 지계, 진리, 비움, 지혜가
부족하지 않은가를 살피라.

죽음 이후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을 통해 결정된다.

삶에서
진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살았는가!
계율을 생명처럼 지키고 살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
욕망과 집착을 비우며 살고 있는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에 대해
나는 얼마나 떳떳한가!
얼마나 지키고 닦으며 살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실천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실천하고 있다면,
혹 완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 실천을 향해
내 삶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면,
진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높이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설사 죽음을 맞더라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죽음을 목격한다고
그것이 모두 같은 죽음이 아니다.
같은 병으로 똑같이 죽었을지라도
그 죽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는 전혀 다르다.

나의 죽음 이후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삶을 보라.
삶에서 내가 벌이는 모든 일들을 살피라.
그 삶의 방향이
믿음과 계율과 진리와 비움과 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답하기가 두렵다면
그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죽음과 동시에 간장종지가 깨져
호수 아래로 가라앉듯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지옥 끝까지 도달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을 두려워하라.
주의깊지 못한 삶을 두려워하라.

수행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이 육신의 겉모습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지만
근본에서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삶 그 자체는 언제나 영원하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미래에 올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주의깊게 살핀다.



Posted by 법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17.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18.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


한 번 악행을 하고 나면 그 악행은 업습(業習)으로 자리잡는다. 업이 되어 언젠가 갚음인 보(報)를 가져오지만, 보를 가져 오기 이전에 습(習)으로 먼저 자리잡으면서 나를 따라다닌다. 한 번 악행을 하면 그것은 악한 습, 악한 습관의 흔적을 남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 번 할 때는 어려워도 한 번 습관이 들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그 습관대로 행동하게 되지 않는가. 악행이 바로 그렇다. 악행의 습은 또 다른 악행을 부르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쉽게 습관적으로 악행을 범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습관들어진 악행은 이번 생을 넘어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냥 잠재되어 있다가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 어느 때인가 그 갚음인 결과만 남기면 좋겠지만 이 악행은 결과를 남기기 이전에 우리 몸과 마음에 습으로 베이고 스며드는 것이다.

데바닷다의 반역사건은 부처님의 생애에서도 눈여겨 볼 아주 유명한 대목이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세 번이나 살해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악인의 전형이다. 데바닷다는 마가다국의 태자인 아자타삿투를 부추겨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의 왕위를 찬탈하게 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이렇게 왕의 권위를 등에 업은 데바닷다는 부처님께 이제 불교의 승가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하기에 이르지만 부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 이에 수치심과 복수심을 느낀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세 번 해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자객을 보내어 살해를 시도하였지만 오히려 자객은 부처님께 감화되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며, 두 번째는 영취산에서 지나가는 부처님께 바위를 굴림으로써 부처님의 엄지 발가락에 상처를 입힌다. 세 번째로 코끼리에서 술을 먹여 부처님께 돌진케 하지만 달려오던 코끼리들은 부처님의 앞에 이르자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게 된다.

이뿐 아니라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더욱 훌륭한 스승임을 드러내기 위해 부처님의 계율보다 훨씬 강화된 다섯 가지 계율을 제시한다. 비구는 숲에서만 생활하며, 신도의 공양 초청해 응해서도 안 되고, 쓰레기로 버려진 천으로만 가사를 만들어 입어야 하고, 나무뿌리나 무덤 사이에서만 생활할 수 있으며, 생선이나 고기는 전적으로 못 먹도록 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의 계율을 제시하였지만, 부처님은 이에 반대를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데바닷다는 자신의 강화된 계율에 찬동하는 몇몇 젊은 비구를 이끌고 떠나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들 또한 사리불과 목건련의 교화에 다시 승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를 안 데바닷다는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뒤늦게 부처님을 만나고자 부처님께로 향했으나 결국 부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길가 연못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져 더 큰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라고 설법하셨다.

이에 반해 재산가의 셋째 딸로 태어난 수마나는 부모님께 배운대로 스님들께 정성스럽게 탁발 공양을 올려 드리면서 수행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틈나는 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는데, 결국 수마나도 결혼도 못 한 채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수마나는 죽음을 앞두고도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사대 오온에 마음을 잘 집중시킴으로써 죽음 직전에도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을 지녔고, 죽은 뒤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고 설법하셨다.

악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을 살면서 온통 악행으로 인한 업습에 이끌려 계속해서 악업을 짓게 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평안하지 않으며,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업에 따라 고통의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선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에도 즐겁고 죽음 직전에도 평화로우며 죽은 뒤에도 항상 즐거운 곳에 난다.
그래서 처음 한 번의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처음 한 번의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의 악행은 연이어 악행을 불러오지만, 초심의 선행은 연이어 계속되는 선행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에게 이익이 될 지라도 그것이 악행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하지 말 것이며, 아무리 나에게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선행이라면 반드시 저질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와 복덕의 시작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