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패스 정상을 향해 걷다

처음 보는 히말라야 식 텐트에서의 하룻밤, 이만하면 유수하다. 침낭이 크고 든든해 그런지 그다지 춥지도 않았고, 오히려 열댓 명이 함께 자는 도미토리보다는 훨씬 은연하고 고요하다. 옆 텐트의 일본인 어르신 두 분은 조금 비좁기는 했어도 훨씬 따뜻했을 터다.

새벽에 일어나 잠시 앉아 있자니 침낭 안과는 다르게 텐트 안의 공기는 무척 차고 음한하다. 텐트가 따뜻했던 것이 아니라 침낭의 보온효과가 뛰어났던 것임이 증명된다.

텐트 밖을 나선다. 롯지 사방의 어슴프레한 조무(朝霧)가 새벽빛을 받아 신령스럽게 깔린다.

첫 햇살의 이 따스하고 눈부신 사광(斜光)을 나는 몹시도 사랑한다. 그 빛이 내 온몸으로 파도쳐 들어올 때 그 빛 방향으로 마주서서 지긋이 눈을 감곤 한다. 가만 가만 그 화난한 빛을 온 몸의 감촉으로 느끼고 귀로 듣는다. 어머님 품처럼 따뜻한 빛의 찜질이 시작된다. 밤새 얼어 있던 온 몸을 포근히 녹여준다.

새벽 공기는 창창하다. 그 찬 공기와 따스한 햇살이 오묘한 조화로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춰주는 듯하다. 오늘 아침의 빛은 그 어떤 날 보다도 더 적력하고 투명하다.

보통 종라 롯지에서 촐라패스를 넘으면 점심 때 먹을 도시락을 준비해 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준비가 안 되어 있단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종라에서 닥낙으로 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반대로 고쿄리를 올랐다가 닥낙에서 종라 방향으로 오는 사람이 많아 닥낙의 롯지에서만 주로 점심 도시락을 싸 준다고 한다. 우리처럼 거꾸로 넘는 사람들은 그저 아침을 든든히 먹고 일찍 출발해서 최대한 점심 전까지는 어렵더라도, 늦은 점심이라도 먹을 수 있게 부지런히 도착하는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6시에 아침을 먹고 6시 30분에 바로 출발한다. 종라 롯지에서 바로 작은 언덕을 넘으니 텐트촌이 보인다. 새벽을 녹이는 모닥불 김도 모락모락 나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저 멀리 보이는 촐라체 아래까지는 그저 준평한 초원길이다.

그 초원 중간으로 작은 물줄기가 언 채로 흘러내린다.

아직 햇살은 눈부시다. 산 아래까지 걸었더니 종라 쪽에서 현지인 한 사람이 빈 몸에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그저 빈 몸으로 촐라패스를 넘는 것이다. 물도 하나 챙기지 않고, 먹을 도시락도 챙기지 않은 채 말이다! 연유를 물었더니 저쪽 반대편 닥낙에 일행들이 있는데 자신은 그들의 포터로 어제 미리 촐라패스를 넘어 이곳 종라에 그들을 위한 롯지를 잡아 놓고 오늘 새벽부터 다시 촐라패스를 넘어 닥낙으로 갔다가, 자신의 짐을 챙겨 또 다시 촐라패스를 넘어 와야 한다는 것이다. 맙소사!

우리는 한 번 넘기도 힘든 촐라패스를 이틀에 걸쳐 무려 3번이나 넘어오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현지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저 뒷산 오르는 듯 빈 몸으로 가볍게 눈앞에서 사라져 저벅저벅 저 가파른 촐라의 절벽을 오르고 있다.

드디어 촐라패스를 본격적으로 오를 순간이다. 마음이 이 촐라패스를 오랜 시간에 걸쳐 다 오르겠다고 생각하면 그 긴 시간의 부담과 힘겨움을 매 순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건 그 높은 촐라패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르는 것처럼 부담스러운 일이다.

내가 칼라파타르에 다녀오는 것이 힘들었다고 하자 지텐이 촐라패스는 그 두 배 정도 힘들다고 겁을 주었었다. 그랬으니 그 무거운 마음으로 미리부터 두려운 마음을 짊어지고 오른다면 그야말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격이다. 첫 번째로 실제 오르는 것이 힘들어 첫 번째 화살을 맞으면서, 두 번째로는 실제 있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을 현재에까지 가져와 미리부터 근심을 짊어지고 올라감으로써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매 순간 걸을 때는 오직 다음 발걸음만 있을 뿐이다. 그저 다음 발걸음을 매 순간 현재에 걸으면 되는 것이지 매 순간을 미래의 부담감, 저 높은 촐라패스를 몇 시간에 걸쳐 넘어야 한다는 무거움을 짊어지고 걸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에겐 언제나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미래는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내 스스로 허구를 만들어 놓고 그 허망한 생각에 짓눌려 현재를 무겁게 살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지금 촐라패스를 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다음 발자국은 언제나 가볍다. 늘 부담이 적다. 그저 한 발자국이니까. 물론 나중에 가서 다리가 아플지라도 그건 그 때의 일이지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짊어진 마음의 무게가 가벼우면 매 순간이 가볍다.

조금 오르다 보면 이제 본격적으로 절벽 같은 가파른 바윗길을 수직으로 톺아 올라야 한다.

바위산이 부서져 조각조각 무너져 내리고 부서진 큰 바윗돌들을 계단삼아 저 높이까지 기어오르듯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것이다. 아마도 이 또한 한국에서처럼 낮은 고도에서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으리라. 여기는 고도가 높다보니 몇 발자국 기어오르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바위 몇 개를 오르고 나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앉아 쉬어 줘야 한다. 호흡이 가빠지고 더욱 거칠어진다. 두 발로만 오르는 게 아니라 두 손, 두 발을 다 써서 네 발로 느릿느릿 헉헉거리며 오른다.

중간 쯤 오르다 보니 저 멀리 발 아래로 어제 내 옆 텐트에서 주무셨던 일본인 어르신 두 분이 포터, 가이드와 함께 이제 막 촐라패스 입구에 도착해 있는 것이 보인다.

 

아슬아슬 빙하지대를 넘는 사람들

 

반벽강산의 풍광을 읊조리며 가파른 초애(峭崖) 위를 올라서니 이제부터는 툭 터진 만년 설원의 눈 세상이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직접 눈을 밟는 것은 이번 트레킹에서 지금이 처음이다. 낭벼랑 끄트머리에 올라서서 뒤돌아 아랫녘을 바라보자니, 아! 정신을 잃은 듯 요연하고 아득해진다. 비로소 말 그대로 설산 위에 하얀 눈을 밟고 선 것이다!

그렇다고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아이젠이나 스패츠 없이 못 걸어갈 정도는 아니다. 눈 사이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다녀가 길이 잘 나 있다. 미끄러지거나 잘못 디디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눈길을 잘못 디디게 되거나 자칫 실수로 미끄러지면 저기 아래 빙하 지역까지 거칠게 미끄러질 판이다.

10여 년 전부터 산에 다닐 때마다 신어 오던 등산화를 발에 익숙하다고 그냥 신고 왔더니 그전에는 몰랐는데 이 곳 산길을 걸으면서 많이 미끄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에는 바위를 다녀도 발이 바위에 착 달라붙는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전 같지가 않다. 신발 바닥을 살펴보니 너무 닳아 있는 탓이다. 그래도 어쨌든 발과 신발이 착 달라붙어 한 몸처럼 익숙하니 지편하기로 따진다면이야 새 신발과 견줄 수 없다.

처음 보는 히말라야의 눈 속에 흔적 하나 남겨 본다. 이 설산 한 자락에 나의 오랜 원력이 작고 여린 꽃처럼 피어나는 곳, 내가 이 생에서 작게나마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인드라망인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이름을 내 작은 원력을 담아 히말라야 여신께 공양 올려 본다.

천천히 저어가듯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발 한 발을 내딛는다. 눈 덮 인 오르막에서는 현지인 포터나 짐꾼들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능수능란하고 오랜 경험이 있는 이들일지라도 조심조심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걸어도 미끄러지기 일쑤다. 나는 올라가는 처지라 오히려 덜 미끄러지는데, 내려오는 사람들의 더듬더듬 거리는 근밀한 모습이 볼 만하다. 오랜 경험으로 어떤 험난한 산세에도 끄떡 없을 것 같던 포터나 짐꾼들도 오히려 이런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니 더 정감이 가고 저들도 이곳에서는 역시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싶은 인간미마저 느껴진다.

포터 한 명이 우당탕거리며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활짝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모두들 미끌미끌 넘어지고 앉아서 설금설금 기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조마조마하게 눈덮인 언덕길을 오르고 내려간다. 이 구간에서만큼은 경력도 경륜도 별 소용이 없고, 현지인이며 여행자며 할 것 없이 모두가 소심익익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모든 차이가 없어지고 대자연의 장대함 앞에 한 인간으로써 겸손한 평준화가 이루어진다.

이 위험천만한 마의 구간에서는 모두가 절친한 친구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벗이 된다. 반질반질 미끄러운 내리막을 아스라이 내려와서는 활짝 웃고 합장하며 “나마스떼!”를 외치는 짐꾼의 미소가 천연스럽고도 다정하다.

꽈당거리며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도 이 사람들은 심각하지가 않다. 매우 즐겁고 유쾌하게 미소 짓고,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며 그 무거운 짐을 운반해 간다. 등짐품이라 생각하고 심각해진 사람이 이 길에서 한바탕 넘어졌다면 결코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이 긴긴 오르막을 일로써 오르내리면서도 그다지 심각하거나, 이런 삶을 비관하거나, 마지못해 돈벌이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그저 이 삶을 받아들이며 이왕에 주어진 것 무겁고 힘겨워도 웃으며 나아간다.

하기야 이렇듯 아름다운 히말라야 설산을 무대로 산과 하나 되어 걷는 사람의 표정이 무겁고 심각하며 삶의 찌든 때를 다 안고 걷는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이 설산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 심각하고 비관적이던 사람일지라도 산의 영적인 기운과 파장이 그 사람을 영감어리고 신비로우며 생기와 총기가 넘치는 대자연의 천연 주파수로 바꾸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삶의 덕목인가.

 

삶을 심각해 하지 말라

 

삶을 너무 심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너무 인생을 짐 진 사람처럼 무겁게 힘겹게 살아갈 것은 없지 않은가. 너무 심각하고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 대부분은 무언가에 그만큼 유우하게 빠져 있거나, 집착하고 있거나,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어떤 마음의 짐들을 너무 많이 짊어진 탓이기 쉽다. 그야말로 자기 스스로 마음의 짐을 만들어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힘들고 무겁고 심각해지겠는가.

삶을 가볍게 받아들이라. 어떤 것에도 너무 과도한 중요도를 부여하지 말라. 어떤 한 가지 대상이나 일이 너무 중요해지면 곧장 경직되고 심각해지게 마련이다. 삶에 긴장을 풀고 모든 것들에서 유머와 해학을 찾으라. 마음의 무게감에 힘을 빼고 어떤 대상에도 가치나 값을 과도하게 메기지 말라. 사실 우리 삶에는 그리 심각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이 실체 없이, 항상 하는 바 없이, 그저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들일 뿐이지 않은가. 소유도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가족도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도 잠시 왔다가 100년도 안 되는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것들일 뿐이다. 어떤 천상세계에서는 우리의 1,600년이 그들의 하루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에게는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온갖 욕심을 채우고 삶에서 성공하려 애쓰는 그 각급한 세월이 천상에서 본다면 그저 잠깐 사이의 찰나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실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천상 세계의 여인이 남편과 함께 꽃을 따는 작업을 오전 중에 하다가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이다. 한두 시간 사이라 남편은 별 생각 없이 어디를 좀 다녀왔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그 짧은 순간 동안 아내는 인간으로 환생하여 수십 년 동안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 살다가 이렇게 죽어 다시 남편 곁으로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삶이 얼마나 무상한가. 그러한 무상의 이치를 이해한다면 그 허망한 것들을 꽉 붙잡지 못해 안달할 것도 없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지위가 높아졌다가 낮아지고, 돈도 많았다가 적어지고, 사랑도 왔다가 가고, 즐거운 일도 괴로운 일도 그렇게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만 연극처럼 꿈처럼 인연 따라 잠시 오고 가는 것들일 뿐이니 그 순간 주어진 삶을 충분하게, 그 삶의 연극을 즐기며 살기에도 바쁜 시간인 것이다. 욕심 때문에 삶을 충분히 진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런데도 사실 많은 사람들은 욕심과 집착을 키우느라 정작 중요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충분히 순간순간 주어진 삶을 누리고 만끽하며 변해간다는 이치를 너무 심각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변화할 뿐인 것이다.

사랑이 온다고 좋을 것도 없고, 떠나간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연극의 주인공이 맡은 배역을 열심히 하되 연극이 끝나면 바로 그 배역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삶을 살아가듯,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인연이 다 했고 그저 가야 할 때가 되어 가는 것일 뿐이다. 어차피 그 사람은 언젠가 떠나갈 것이었다.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유쾌하고 즐겁게 살라. 기분 나쁘거나 좋지 않은 상황이 오더라도 한바탕 웃음과 천진한 익살로써 넘길 일이다. 모든 것을 심각하게 여기거나, 삶에 너무 긴장감을 느끼면 그만큼 삶이 피곤해지고 버거워진다. 삶이라는 것은 생존을 위해 너를 죽이고 내가 살아야 하는 투쟁과 다툼의 장이 아니라 다만 즐거운 하나의 놀이이며 흥미로운 드라마다.

이 5,330m 고지, 눈 덮인 촐라패스를 미끄러져 가는 저들의 웃음처럼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묵직하거나 더넘스러운 것이 아니다. 심지어 잘 알고 지내던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인 죽음 앞에서일지라도 사실 알고 보면 그리 크게 심각해 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누구나 그 순간은 겪게 마련이다. 언젠가 찾아 올 일이 다만 지금 찾아 온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죽음에 대해 우리는 절심하게 느끼고, 비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그동안 배워왔고 주입 받아 와서 그렇지 죽음이 왜 고통스럽고 엄혹한 것이어야만 하는가. 사실 죽음이란 다만 삶의 또 다른 연장일 뿐이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고 끝이 아니다. 그 또한 다만 하나의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돗자리에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내의 죽음이 그저 사계절의 자연스런 변화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더라도 곡을 하거나 울지 말라고 말한다. 유교식에서는 죽은 귀신을 불러들이고 후손들 곁에 남아서 돌봐달라는 의미로 못 떠나게 하려고 곡을 하며 눈물을 흘림으로써 혼백을 붙잡아 두려고 애쓴다. 그러나 불교적 전통에서는 죽은 자는 더 이상 이 생에 미련 없이 잘 떠나도록 해 주는 것이 영가를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배려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후손의 선물이라고 본다. 그래서 흔히 유교의 제사는 ‘오십시오’라고 하는 의식이라면 반대로 불교의 재는 ‘가십시오’라고 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가야 할 분은 자신의 길을 찾아 온전히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변화할 때가 되면 변화하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아니 사실은 우리는 매 순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나고 죽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적인 질서이고 그 자신의 온전한 삶의 길이다. 아마도 그가 살면서 아름답고도 선한 삶을 살았다면 그는 오래된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로운 몸과 새로운 부모와의 새로운 인연으로 아름답게 거듭날 것이다. 그것은 어둡고 탁하며 두려운 느낌이 아니라 새롭고 찬란하며 축하해 주어야 할 무엇이다. 물론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말하듯 조금 더 깨어있는 삶과 지혜를 닦은 사람이라면 죽는 순간이 가장 깨달음을 얻기 좋은 때임을 놓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의 저 빛과 숲 너머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가 된다면 삶의 그 어떤 문제가 심각해 질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의 죽음조차 그리 심각한 어떤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삶의 한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어떤 근심 걱정이 있겠는가 말이다. 이만한 지혜 속에서는 살아가면서 느끼는 그 어떤 고민도 근심도 걱정도 한바탕 웃음과 해학으로써 흥겹게 받아들이며 넘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촐라패스를 즐겁고 유쾌하게 넘어가는 저들의 천진한 미소처럼 말이다.

 

최악의 오르막을 앞두고 펼쳐진 콘서트

 

햇살에 순수하게 반짝이는 투명한 눈길을 스멀스멀 굼뜬 걸음으로 흘러간다. 처음으로 어렵게 구해 온 선글라스를 끼어본다. 그야말로 이 정도의 선명한 눈과 투명한 햇살이 반사되면서 피부와 두 눈을 뚫고 스며들어오는 빛의 침투력은 충분히 시력을 앗아가고도 남을 법하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그야말로 두 눈을 반짝이며 뜨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눈 부비며 일어날 때 눈을 뜰 수 없는 것처럼 이 높은 고도에서의 햇살은 쨍하다 못해 아뜩할 정도다.

어느덧 촐라패스 가장 높은 고지가 바로 저기 코앞이다. 촐라패스의 고갯마루 가장 높은 고지에 가까이 오니 조금씩 반대쪽 닥낙에서 출발해 촐라패스를 넘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이쪽 종라에서 닥낙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닥낙에서 종라로 넘어가는 것이 더 쉽고 수월하다 보니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쿄를 먼저 들렀다가 촐라패스를 넘어 칼라파타르로 향하곤 한다고 한다. 직접 넘어보니 그 연유를 충분히 알겠다.

드디어 눈길을 저어 촐래패스의 가장 높은 협곡까지 도착.

오고 가는 순례자들이 극침(棘針)의 강쇠바람 골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잠시 숨을 돌리고 앉아있다.

찢어질듯 휘날리는 룽다가 반가이 사람들을 맞아준다.

고지에 서자마자 바로 저 고쿄와 닥낙 쪽 풍경이 거침없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설산이 아닌 전혀 새로운 세계, 전혀 다른 별유선경(別有仙境)이 ‘두둥!’ 하고 시야 앞으로 툭 터진다.

아, 이제야 알겠다. 이래서 쿰부 지역을 고쿄와 칼라파타르 두 지역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저 쿰부설산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고쿄 지역과 칼라파타르 지역을 나누는 것일까 하던 궁금증이 단박에 해소되었다. 이 쿰부의 골짜기가 뭐 다 비슷비슷하겠지 하던 생각이 감사하게도 쾌쾌히 빗나가 주었다.

한참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의 상태가 춥고 배고프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가져왔던 비상식량을 지텐과 둘이 앉아 주섬주섬 주워 먹는다.

지텐이 먼저 내려가며 닥낙 롯지를 예약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즐기며 내려오라고 한다. 이제부터는 눈길이 끝나고 자잘하게 부서진 바윗길, 돌길의 가파른 급사면을 내려가야 한다. 이 또한 거의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말 그대로 주판지세(走坂之勢)의 급경사길이다. 더욱이 이 벼랑진 하산길은 말이 돌길이지 특별히 길이라고 할 만한 길도 없을뿐더러, 전부가 부서진 바윗돌 위를 걷는 것이다 보니 발자국의 흔적 같은 것도 찾을 수가 없다. 그저 감각으로 걷거나, 저기 멀리서 올라오는 이들을 보고 그 방향을 가늠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 작게 부서진 바윗돌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부서져 내리고 있는 것인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흔들리고 미끄러지고 움직이느라 자칫 잘못 발을 내디뎠다가는 크게 내동댕이 쳐 질 판이다. 어느 돌을 밟아야 할지가 매 순간 관건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흔들바위 같은 흔들돌길을 땅만 보고 걷는다.

30여 분쯤 내려오니 짐꾼 여럿이서 바위 여기저기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쉬고 있다. 저 여유와 행복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신발도 변변찮은 것들을 신고 저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쉬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환히 웃으며 흥겨운 노래라니! 아마도 우리 같으면 ‘이제부터 진짜 가파른 길이 시작될 것인데...’ 하면서 미리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곁에 앉아 있는 이들은 때때로 ‘얼쑤’ 하듯 추임새를 보태거나, 따라 부르거나 혹은 간간이 박수를 치며 환호함으로써 이 낭색의 생생한 음악회 자리가 점점 흥겨워지고 있다. 뒤따라 올라오던 외국인 여행자들도 힘겨운 발걸음에 무겁던 얼굴이 일순간 활짝 피어나며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순간 이 쩍지고 버거운 촐라패스의 중턱 고비가 즐겁고도 흥겨운 작은 축제처럼 바뀌면서 마음에도 신명진 흥과 운치가 솟아나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에 힘입어, 또 여행자들의 힘겨운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심각하던 얼굴들에 미소가 띄어짐을 보자 내친 김에 제 스스로 앵콜곡까지 두어 곡을 내리 불러 재낀다. 노래가 네팔 국민가요라고 할 만한 ‘레쌈 삐리리(Resham Firiri)’로 이어지면서 작은 콘서트는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나도 너무나 익숙해 거의 외웠을 법한 노래가 바로 레쌈 삐리리다. ‘레쌈’은 비단 손수건, ‘삐리리’는 흔든다는 의미로 ‘손수건을 흔들며’ 정도의 제목이 아닐까 싶다. 내용을 보면, 사랑의 감정을 사냥에 비유해 만들어진 노래라고 하는데, 그 뜻은 대강 ‘한 방 두 방 총을 쏘아 보지만 내가 진정 쏘고 싶은 것은 사슴이 아니라 사랑하는 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그야말로 통속적인 사랑가다. 그래도 우리나라로 치면 아리랑 같은 네팔 전통 민요인데, 네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선 어김없이 쉽게 들을 수 있는 터라 네팔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노래다.

하하! 참 이 장엄한 대 자연 설산 한 가운데서, 그것도 가파른 최악의 오르막을 눈앞에 두고 이런 정감어리고 살풋한 아름다운 풍경이라니. 덕분에 내 가슴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하다. 나도 저절로 흥이 나 몇 소절 따라 불렀더니 환호성과 노랫소리가 더욱 활기를 띤다. 그리고 한바탕 노래가 끝나자 또 다시 아쉬운 여흥을 뒤로한 채 무거운 짐들을 짊어지고 한 발 한 발 묵직한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내 마음도 덩달아 흥이 붙었다. 흥얼흥얼 혼자 노래를 부르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내리막길도 끝났구나 싶어 이제 다 왔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시 큰 언덕 하나가 길을 막아선다.

언덕을 오르기 전 드넓게 펼쳐진 숨숨한 초원 위에서 잠시 길을 벗어나 앉았다가 아예 등을 대고 벌러덩 드러눕는다. 햇살이 따가워 모자로 얼굴을 푹 눌러 덮는다. 그리고는 숨을 느끼고 햇살의 따스함과 간들거리는 선선한 바람과 등 뒤에서부터 스며드는 흙내음을 가만가만 느껴본다. 지금 이 순간의 아늑한 평화와 평안을 안으로 안으로 살며시 살펴본다. 아주 잠깐 사이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여윈잠이 달콤하게 스쳐간다. 잠시지만 깜빡 이 낯선 곳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

영마루 위에 올라 하염없이 펼쳐진 초원과 산과 하늘을 바라본다. 아마도 처음 보는, 닥낙 이정표가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킹 코스이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트레커들이 찾는 곳임을 생각했을 때 이 산 어디에도 이정표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히말라야의 매력이 아닐까. 만약 포터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갈림길이 나오면 그저 알아서 찾아가거나, 자신의 감에 의지하거나, 그도 아니면 기다렸다가 다른 포터나 가이드를 동반한 여행자의 뒤꽁무니를 슬그머니 따라가야 한다. 처음 보는 닥낙 이정표가 오히려 신선할 정도. 하기야 이것 또한 말이 이정표지 커다란 바위 끄트머리 한 켠에 누군가가 특별히 의도한 바 없이 재미삼아 써 본 것이라는 추측이 들 정도로 꾸불꾸불한 서체의 ‘Dragnag’이 쓰여져 있을 뿐이다.

계곡을 따라 천천히 내려간다. 이 내리막이 금세 끝날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길다.

계곡 물소리에 말을 맞추며 생각이 끊어진 채 그저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덧 1시간 조금 넘어 드디어 닥낙 마을에 도착한다. 지텐이 먼저처럼 또 한참을 미리 나와서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방은 여전히 없고 어렵게 도미토리를 구해 놓았다. 롯지 도미토리 침대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앉았는데, 거의 닥낙에 도착하면서부터 머리에 지끈지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깨질 것처럼 더욱 아파온다. 도착과 함께 마음이 풀려서 그런지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입맛도 없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기운이 죄다 빠져나가는 듯하다. 지텐이 곁에서 여느 때와 달리 축 처져있는 나를 지켜보더니 사실은 자신도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주로 촐라패스를 넘고 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벼운 고산 증세로 편두통을 경함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오른 고도와 또 그렇게 오르고서 다시 갑자기 고도를 뚝 떨구어 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두 시간 쉬면 금방 나아질 것이라던 지텐의 얘기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두어 시간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 상태가 다시 돌아와 있다.

롯지 앞 계곡에서 끌어 온 호스에서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샤워는 못 할지언정 그간 밀린 빨래도 하고 몸도 씻고 났더니 한결 홀가분해진다.

이렇게 촐라패스를 넘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조금씩 이 쿰부에서도 하산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쉬워라.

저녁을 먹고 롯지 바깥으로 나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별들이 눈 호수로 뚝뚝 떨어져 들어온다. 롯지 식당은 아직 여행자들의 이야기꽃으로 훈풍이 돈다. 이렇게 또 하루가 흐르고 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불광출판사, 법상) 중에서

히말라야내가작아지는즐거움법상스님과함께하는쿰부트레킹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법상 (불광출판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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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