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고지 히말라야의 호수, 고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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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5000고지 히말라야의 호수, 고쿄리

목탁 소리 2011. 8. 3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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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풀려진 미래라는 환상에 속지말라

벌써 에베레스트 순례가 11일차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한편으로는 너무 아쉽고도 아쉬워 며칠 더 묵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또 한 편에서 올라오는 마음을 관찰해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내일이면 드디어 내려가는 구나’ ‘3~4일 쯤 후면 카투만두에 도착하겠지’ ‘빨리 이 트레킹을 끝내고 미얀마로 가야지’ ‘빨리 이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구름처럼 폴폴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 진짜 내 본심인가. 이 역설적인 두 가지 마음을 관찰해 본다. 그러고 보면 꼭 이번만이 아니라 늘 내 마음 속에는 다음 순간의 그 어떤 일을 꿈꾸는 누군가가 존재해 왔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고 늘 미래를 기다리고, 다음 순간에 있을 즐겁고 설레는 무언가를 꿈꾸는 또 다른 나, 그것이 바로 아상(我相)이요, 에고였다.

이놈의 아상은 시도 때도 없이 슬그머니 기어 올라와 나를 지배하려고 애를 쓰곤 한다. 아상은 지금처럼 늘 내일을, 미래를 꿈꾼다. 내일 있을 어떤 일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더 매혹적이고 설레며 좋은 것일 것이라는 그 어떤 막연한 과장과 기대를 담고 있다. 그 때문에 끊임없이 ‘지금 여기’가 아닌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상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더 부풀려져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꿈꿔오던, 혹은 기대해오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을 때 과연 지금 생각처럼 그 현실이 실로 매력적이고 설레는 순간으로 다가오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현실이 되면 또 다시 그저 그런 순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내가 그렇게 원했던 그 순간에조차 그 순간의 삶을 충분히 누리고 만끽하며 느껴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시 다음에 있을 미래를 과장하여 계획하고 상상하며 새로운 또 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우리 삶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이런 삶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매 순간 미래의 환상에 속으면서도 습관처럼 또 다시 환상을 품는다. 이것이 바로 정확히 아상이 꾸며내는 일의 실체다. 어차피 무언가를 기다리고 상상하며 부푼 꿈으로 계획하는 미래가 사실은 그다지 매력적이거나 매혹적이지 못하다면 왜 자꾸 그런 미래를 기다리느라 ‘지금 여기’ 현실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현재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가. 왜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꿈꾸고 기대하느라 현재를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현재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현재는 늘 재미도 없고 밍숭맹숭하다.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럴 바에야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게 낫다고 여긴다. 정말 그럴까?

‘더 나은 미래’는 없다. 그 미래가 실현되는 순간은 언제나 현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방식은 언제나 현재를 홀대해 왔다. 현재를 홀대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으로 지금 여기의 삶을 소외시켜 왔고, 오직 환상과 기대와 막연한 꿈의 신기루 속에서 주어진 삶을 외면해 왔다. 그러니 아무리 환상적인 미래가 온들 그것이 현재가 되었을 때 다시 그것은 여지없이 습관처럼 홀대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가 되는 순간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고? 우린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그다지 중요히 여기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우리의 습관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게 얼마나 가치가 전도된 일인가. 진실은 이렇다. 미래는 없다. 우리에겐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환상적으로 부풀려지고 꾸며진 미래는 우리 생각과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허구에 에너지를 쏟느라 ‘지금 여기’라는 진실을 끊임없이 축소시키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에너지와 생명력의 원천인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과거와 미래 전부를 놓치는 것이다.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매 순간 삶 전체를 놓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우리가 부푼 기대와 추구로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결코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아름답거나 신비롭지 않다. 아무리 대단한 성취와 장밋빛 미래일지라도 그것은 결정코 현재와 별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미래의 그 어떤 순간도 바로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향기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심지어 강박적으로 무언가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는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기다림의 끝에는 언제나 ‘현재’밖에 없다. 그렇다면 긴긴 기다림의 끝에 얻을 수 있는 현재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당장에 기다림이라는 중간 과정을 없애고 바로 지금 당장에 그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는가.

빨리 산을 내려간들, 카투만두에 도착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들 그 때 무슨 대단한 더 좋고 나은 일이 기다리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딛는 발걸음, 이것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미래는 없다. 이보다 더 생생하고 진한 삶의 이야기는 없다. 지금 이 발걸음 하나를 놓치면 그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물론 기대하고 추구해 오던 미래의 빛 또한 조금씩 그 흔적을 잃어가고 만다. 다음 순간에는, 내일에는 무언가 새롭고 신선하며 특별한 미래가 나를 기다릴 것 같지만 바로 그 새롭고 신선하고 특별한 것은 바로 지금의 한 호흡과 한 발걸음을 지켜보는 그 속에 있다.

고쿄리를 오르며 침묵의 연주를 듣다

어설픈 미래를 추구하려는 에고의 기대를 알아차리며 닥낙 롯지를 출발해 ‘지금 여기’의 한 발 한 발을 고쿄(Gokyo, 4750m)를 향해 옮긴다. 이쪽 닥낙에서 저쪽 고쿄까지 가려면 그 중간을 거대하게 흐르고 있는 빙하 언덕을 지나야 한다. 나는 지도에서 빙하지역이라 해서 거대한 얼음이나 눈으로 뒤덮인 큰 강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은 다 녹았는지 없고 다만 거대한 강줄기의 흔적, 혹은 얼음 빙하 흐름의 흔적만을 남겨둔 채 먼지 나는 모래 언덕만이 내내 펼쳐지고 있다.

지나치는 발자국마다 먼지를 폴폴 일으켜가며 빙하지역을 빠져나오니 드디어 저쪽 언덕 너머 아름다운 고쿄의 풍경과 설산을 배경으로 압도하는 거대한 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고쿄의 풍경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들과는 또 다른 전혀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준다. 특히 빙하 호수와 그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진 설산과 우뚝 선 고쿄리(Gokyo Ri, 5340m), 그리고 드넓은 호수 곁에 롯지 예닐곱 개 정도의 작은 마을이 꿈결처럼 펼쳐져 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의 마을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롯지에 여장을 풀고 식당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이 곳 쿰부 지역의 대부분 롯지가 그렇듯 이곳 또한 식당의 삼면이 너른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바깥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식당에 앉아 넓은 통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저 창밖의 이랑지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예쁜 동화의 이야기 속에 들어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고 이렇게 사람을 깃들게 하는 롯지가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투명하고 눈에 쏙 들어오는 몽외지경의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대자연의 예술적 감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을 통해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조차 너무나도 감동스럽다. 눈이 부시다. 표현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 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이 자체의 아름다움을 그저 침묵 속에서 바라만 볼 뿐이다. 말 그대로 무아몽중! 나를 잊고 매 순간순간 일념일동(一念一動)의 감흥에 젖어든다.

롯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짐을 방에 내려놓은 뒤 곧바로 오후가 되기 전에,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고쿄리를 다녀오기로 한다. 롯지를 출발해 호숫가를 건너 호수 너머로 우뚝 서 있는 맨송맨송 나무 없는 민둥산 고쿄리를 오른다. 호수에 반짝이는 햇살이 천진한 아이의 눈처럼 맑다. 저 멀리 설산의 물이 녹아 흐르다가 이 큰 호수와 만나는 지점에 작고 허름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를 흐르는 물이 속살을 훤히 드러내며 무색투명하게 꿰비치고 있다.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렸더니 그 호숫가를 배경으로 또 다른 아름다움의 고쿄 마을이 서 있다. 호수 옆길을 끼고 돌면 곧바로 가파른 흘올(屹屼)의 고쿄리 산이 시작된다.

저만치 오르는 사람들이 모두 거북 걸음으로 전혀 속도감 없이, 그야말로 바람 한 점 없는 날 구름의 속도로 저어간다. 한 발 한 발 가파른 산길에서 호흡과 걸음을 일치시키며 걷는다. 길을 따라 걸으면 너무 먼지가 많아 길 없는 초원 쪽으로 홀로 오른다.

습관처럼 오르다가 뒤돌아보고 오르다가 뒤돌아보기를 반복한다. 고도를 조금만 높여도 저 아래 호수와 고쿄의 마을 풍경이 달라진다. 호수에 비친 여행자의 실루엣이 고요하고도 평화롭다. 조금씩 더 높이 오를수록 고쿄 마을과 빙하지대 건너편 내가 그동안 지나온 곳들의 설산 봉우리들이 불쑥 불쑥 솟아오르곤 한다.

중턱을 조금 넘어섰을까. 칼라파타르에서 보지 못했던 에베레스트 봉우리가 가까운 검은 산봉우리 뒤로 조금씩 그 우뚝 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초오유(Cho Oyu, 8201m) 봉우리도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발아래를 돌아보니 호수로 흘러드는 작은 지류들이 산의 계곡에서부터 흘러나와 춤을 추듯 드넓은 호수의 품에 안기고 있다.

바람이 좋다. 햇살이 따스하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 어느 구석에도 부조화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공의 모든 존재들이 제 몫을 정확히 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과 나 사이에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전체적인 관계성이 놓여 있다.

생각해 보라. 아니, 느껴보라. 이 우주적인 조화, 이 장결한 설산과 눈부신 태양, 저 아름다운 호수가 나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것들과 나는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에 온 우주가 합연해 내는 대 장엄의 음악이 침묵으로 연주되고 있다. 연주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음악이 있다. 소리를 빌지 않더라도 침묵 속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오디오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현재와 연결되는 순간, 내 앞의 모든 존재가 우주적인 하모니로 대 장엄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낸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렇게 생생히 들려오는 이 침묵의 연주는 무엇이란 말이냐!

알고 떠나는 여행, 모르고 떠나는 여행

정상에 가까워올수록 숨이 차고 가쁘다. 몇 발자국 내딛는 것이 너무나도 힘에 겹다. 공기가 희박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이 마치 거센 폭풍우와 휘몰아치는 바람 속을 정면으로 돌진해 나가는 것처럼 더디고 힘에 부친다. 바로 저기 눈앞에 보이는 열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를 한참을 걸려 갈 수밖에 없다는 이 기막힌 상황이 직접 겪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큰 맘 먹고 열 발자국 정도를 한 호흡에 내달리듯 걸어 보기로 한다. 아, 이놈의 급한 성미 때문에 말이다. 그랬다가 열 발자국 걸은 뒤에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니 드러누워 죽을 것 같은 거친 숨을 한참 동안 미친 사람처럼 몰아 쉬고 있다. 완전히 KO를 당한 패전 선수처럼 헉헉거리며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한다. 열 발자국 빨리 가려다가 되려 그보다 더한 시간을 앉아 지체해야 했던 것이다.

이곳은 그런 인간의 생각이나 욕심 따위로 제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느리지만 정직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저 엎어지면 코 닿을 것 같은 거리조차 도저히 도달해 낼 수가 없는 곳이다. 칼라파타르에서 정상을 불과 30여 미터 앞두고, 일반적인 생각 같아서는 고작 이 정도 거리를 남겨두고 그 먼 길을 비행기 값에 비싼 돈을 주고, 귀한 휴가 기간을 들여 찾아 와 놓고 포기하고 내려가나 하겠지만, 이곳이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다.

정상은 눈앞에 벌써부터 보이지만 생각처럼 몸과 호흡이 뒤따라 주지 않다보니 그 짧은 길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도착한다. 도착해서도 한참동안 거친 숨을 고른다. 호흡을 본래로 되돌려 놓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 숨을 되찾고 나니 비로소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가 불현듯 꿈처럼 솟아오른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칼라파타르뿐만 아니라 고쿄리 트레킹을 그리도 많이 하는지를 알겠다. 눈앞에 이 쿰부 지역의 전체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룽다가 구름 한 점 없는 벽공(碧空)을 배경으로 청연하게 푸두둥거린다. 이미 많은 순례객들이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이 깊은 풍경에 빠져 숨을 죽이고 있다. 룽다는 쉼 없이 흔들린다. 이 묵직한 풍경 속에 움직이는 것은 오직 룽다와 새들, 그리고 사람 뿐이다.

 

저 멀리 눈앞에 수많은 설산의 봉우리들이 경이롭다 못해 존외스러움으로 우뚝 서 있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이 필요한가. 무슨 설명이 필요하며 심지어 설산 봉우리의 이름들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저 봉우리 이름은 무엇이고 언제 처음으로 어느 나라 등산가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그 이후로 몇 차례 사람들이 올랐고, 그 과정에서 누구누구가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또한 저 봉우리는 몇 만 년 전에 어떤 역사를 가지고 솟아올랐다는 등의 수많은 정보와 지식이 반드시 저 봉우리를 보고 느끼는 데 필수적인 것일까? 어떤 문화재 전문가는 “아는 만큼 본다.”는 유행어까지 남겼는데, 과연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아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할까? 지식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볼 때 우리 안의 지식으로 걸러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봉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으로 걸러서, 즉 과거라는 색안경으로 걸러 보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제한한다. 그 드넓은 자유로움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아마 내 안에 저 봉우리들에 대한 수많은 지식과 역사와 이야기들을 죄다 꿰고 있으며 모든 봉우리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나의 봉우리가 나타날 때마다 ‘봄’에 앞서 ‘지식’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저 봉우리는 이름이 뭐고 어떻게 그 이름이 명명되었으며 어떤 역사와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수많은 정보가 나의 순수한 ‘바라봄’ 그 자체를 가로막았을 터다. 지식과 정보와 역사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일 뿐이지만 ‘바라봄’은 오직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재다. 현재와 과거는 공존할 수 없다. 과거가 끼어들면 현재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우리의 바라봄이 현재와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될 때 과거의 모든 흔적들은 사라지고 지금 여기의 살아있는 에너지가, 생생하고 깊은 현존의 숨결이 우리의 ‘봄’에 지혜와 사랑의 파장을 보내게 될 것이다.

세상의 지식 사회에서는 “아는 만큼 본다.”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너머의 영적 뜨락에서는 그저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지식은 순수한 ‘바라봄’을 제한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고쿄리 정상에서 내 눈에 들어 온 봉우리들의 이름이 왼쪽부터 초오유, 푸모리, 에베레스트, 눕체, 로체, 마칼루, 촐라체, 타보체 등이라는 것은 지금에서야 글을 끄적이다 인터넷의 바다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아마도 고쿄리 정상에서 하나하나의 봉우리마다 이름을 붙여가며 더불어 온갖 정보와 역사와 과거로 무장된 지식들을 뒤섞어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 순간의 그 느낌이 과연 순수할 수 있었을까!

요즘 매일 밤 나의 오감을 투명하게 해 주는 별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별을 바라볼 때 별자리에 관한 정보며, 그 명칭이며, 역사와 과학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할까. 오히려 별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바라봄은 제한적이고 순수해지기 어려운 것이다.

‘말을 잊게 만드는 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그런 풍경 속에서 우리는 말을 잊고, 글을 잊으며, 생각과 지식을 잊는다. 오직 장엄한 풍경 앞에서 모든 것이 멈춰진다. 세상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침묵할 뿐이다. 별 앞에 설 때나 푸른 초원의 언덕 너머로 떨어지고 솟아오르는 일몰과 일출을 마주할 때, 이와 같은 설산의 산령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마음은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그저 경이감에 현묵할 수밖에 없다. 그 숭고함은 언어를 초월해 있고, 시성(詩聖)의 그 어떤 표현보다도 더 깊고 넓다. 바로 그 모든 것이 침묵하는 외경과 신비의 순간,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 우주 본연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깊이의 생명력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지식과 정보와 온갖 종류의 과거의 흔적이 끼어들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바라봄이다.

 

한 두 번 가 보고 여행기를 출간한다고?

조금 다른 비유로, 여행하며 많은 여행자들을 만나다 보니 특히 오래도록 수많은 나라를 여행한 사람일수록 ‘한두 번 그 나라를 가보고 아는 척 책 내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편견과 심지어 최악의 평가를 동원하며 평가 절하하는 소리를 종종 듣곤 한다. 어떤 여행자의 말이다.

“나는 인도를 수십 번 다녀봤지만 아직도 인도를 잘 모르겠는데 인도에도 몇 번 가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인도를 어떻게 안다고 여행기를 낸다는 것인지 웃기지도 않아요.”

물론 그 책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정보 지식을 전해주는 소개서 내지 가이드북 같은 것이라면 수긍이 가는 말이지만 여행기라는 것이 꼭 그런 지식을 위한 책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식’에 대한 책이 아닌 ‘봄’에 대한 책, 혹은 ‘느낌’에 대한 책은 왜 아름다운 가치로 인정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습관이 오직 지식과 정보에만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보니 ‘봄’의 문제, ‘느낌’의 문제,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재의 문제’와는 접촉할 기회도 가르침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인도 여행을 수백번도 넘게 했을지라도 인도를 다 알 수는 없다. 아니 인도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산 사람이라도 인도를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안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가.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온전히 다 알 수 없다. 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고, 지식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데는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학력도 필요 없으며, 교양도 필요 없다. 그것은 많은 경험과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 번 보고 배워야 하지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더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수하고 투명하며 전혀 과거나 지식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바라봄은 첫 번째의 ‘봄’이 더 깊다. 어제 본 것을 다시 보는 마음과 난생 처음 전혀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처음’이라는 말의 가치, ‘처음처럼’이라는 의미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넓다. 불교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하여 첫 번째 일으킨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가장 순수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했다. 그 첫 마음은 지식도 정보도 과거도 끼어들지 않은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태초의 새벽처럼 선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행에서든 일상에서든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처음으로 볼 때 그 느낌은 어떤가. 그 눈은 어린아이의 순박하고도 천진스런 맑은 호수 같은 시선이다. 거기에는 때가 끼어있지 않다. 그 어떤 정보와 지식, 과거로 오염되어 있지 않다. 그저 눈앞에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순실하게 볼 뿐이다. 그 ‘봄’에는 그 어떤 판단도 분별도 좋고 나쁘다는 차별도 없다. 그 대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것을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바라봄의 시선은 ‘오직 볼 뿐!’이다. 그것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분별과 차별이 개입될 수 있겠는가.

‘오직 모르는 시선’ 그것이야말로 투명하고 지혜롭다. 왜 그런가. 사실 우리는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전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자기 자신을 전체적으로 다 알지 못한다. 하물며 내 아내, 내 자식, 내 오랜 친구의 마음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알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그 시선이야말로 진실하며 투명하고 바른 길이다.

그래서 틱낱한, 달라이라마와 함께 세계의 살아있는 3대 생불이라 불렸던 숭산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로써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뭣고?’라는 화두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면으로 이끈다. 그런 ‘오직 모를 뿐’의 텅 빈 바라봄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모르는’ 그 시선으로 처음 그것을 대하듯 내 앞의 모든 익숙한 일상을 대해 보라. 아무리 익숙한 것일지라도 사실 그것은 어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일 뿐이다. 이것을 옛 사람들은 “똑같은 강물에서 두 번 목욕할 수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니 어떤가. 오직 모르는 시선은 첫 번째일 때가 가장 투명하다. 첫 마음, ‘처음처럼’, 초발심이야말로 모든 투명한 시선과 가깝다.

그러니 몇 번씩 그곳을 여행하게 될수록 거기에 대한 온갖 정보와 지식이 쌓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지식으로 걸러서 볼 수밖에 없다. 처음처럼 숫접고 신선한 눈으로 보는 천진함을 잃게 된다. 그 때 오직 남는 것은 쌓인 지식뿐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첫 여행에서는 주로 그것을 그저 느낄 뿐이지만 여행이 두 번, 세 번 계속될수록 느낌보다는 생각과 과거의 경험이 더욱 그 여행을 지배하기 쉽다. 익숙한 것일 때 그 지각은 피상적이기 쉽다. 하지만 새로운 것일 때 우리의 오감은 더욱 예민해지고 활짝 열려 있는 개방성으로써 모든 것을 더욱 생생하게 살핀다.

물론 그 중 어느 쪽이 더 좋고 다른 쪽은 더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지식과 정보를 담은 책도 중요하지만, 봄을 담고 있는 책 또한 나름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저마다의 몫이 있으니 자신의 잣대로 남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 모든 평가와 판단과 분별이 사라진 텅 빈 시선, 차별 없는 봄 속에서부터 삶의 지혜와 사랑은 싹튼다.

이렇게 고쿄리 위에 서서 ‘저 봉우리는 어떻고, 저것은 저것만 못하고, 이쪽 봉우리가 가장 아름답고’ 하며 분별과 비교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이 먼 곳까지 와서 히말라야 대자연 어머니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적 일상을 다시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곳이 히말라야가 아닌 집이나 직장일지라도 일상의 모든 순간에 만나는 대상과 상황과 사람들을 바라볼 때, 판단과 분별과 비교 없이, 배경지식과 정보와 과거라는 색안경에 걸러짐 없이 그저 순수하게 처음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는 그 일상에서 히말라야를 친견하고 붓다를, 신을 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엄청난 풍경과 최고의 경치를 이렇게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내 안에 또 하나의 우월한 비교 대상만 만들어 놓는꼴이 된다면 이 여행은 차라리 오지 않느니만 못하다. 이 거대한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발아래 피어난 매일 보아오던 사소하고 볼 품 없는 풀꽃 또한 그에 못지않은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이 히말라야를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 설악과 지리의 산맥을 마주하며 ‘히말라야에 비하면 이것은 산도 아니다.’라고 비교하고 평가절하 한다면 그는 과거와 비교와 에고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차별 없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을 배워간다면 동네 뒷산의 평범하지만 차분한 아름다움 속에서도 쿰부와 칼라파타르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참된 아름다움이란 비교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쿄리의 거센 바람을 피해 바위 뒤 바람 잦은 옴팡진 곳에 몸을 묻었다가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고는 하산을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을 기점으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구나! 진짜 하산이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표현했듯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내려가는 길에서는 오르막에서 보지 못한 또 다른 것들을 보게 된다. 보다 생생한 하늘색과 봉우리 사이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뭉게구름들과 호수 위로 반짝 이며 이랑지는 눈부신 보석들의 반짝임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연주하는 이름 모를 새들의 동선의 유연함, 언덕과 봉우리와 산맥이 만들어내는 선과 선의 아름다운 조화며 발아래 수줍은 풀꽃들의 애잔한 속삭임,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조우하는 순간순간 내 안에서 피어나는 진하고 짠한 감흥들까지, 오르막에서보다 더 많은 것들이 투명하게 감지되고 있다.

길 위에는 언제나 오르는 사람들의 무거운 발걸음과 내려가는 이들의 가벼운 발자국이 함께 찍힌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며 교차되는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선명한 이치를 함께 남긴다. 삶의 오르막에서 힘겹게 비틀댈지라도 그것은 곧 흘러가고 사라진다. 내리막에서 어려움 없이 가볍게 순조롭게 질주하더라도 그 또한 곧 흘러가고 사라질 뿐이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역경이든 순경이든 그 모든 것은 무상하게 흐르고 흘러 우리 앞을 유유히 지나간다. 그 모든 것들의 본질은 무상(無常)과 덧없음이니 그 양쪽의 삶에 너무 비통해 하거나 너무 으스댈 것도 없다. 잘 나갈 때 오히려 조심할 줄 알아야 하고 침체되어 있을 때도 거기에 너무 빠져 있을 필요는 없다. 힘겨운 오르막 뒤에는 가벼운 내리막도 있을 테니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모든 것은 무상하게 지나갈 뿐이니, 어느 것도 잡아 세우거나 가두어 내 것으로 붙잡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순탄함과 어려움,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이 삶의 연극 대본 하나 하나에 너무 일희일비할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은 곧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애초부터 그 상황을 역경, 순경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여여(如如)하게 매 순간을 넘긴다. 그 어떤 역경(逆境)이 오더라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 어떤 순경(順境)이 오더라도 붙잡아 집착하지 않고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그에게 오르막과 내리막은 둘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이 나를 휘두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겉모습에 속지 않는다. 우뚝 선 자기중심으로 자유롭고 걸림 없이 사는 것이다.

고쿄 롯지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온다. 배도 슬슬 고파 온다. 모처럼 점심으로 피자를 시켰더니 깜짝 놀랄 만한 맛으로 나를 놀라게 한다. 이 높은 고지 롯지에서는 주로 맛은 생각지 않고 그저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먹었는데 이렇게 의외의 음식 맛을 더러 만나기도 한다. 어떻게 이 높은 고지 고쿄에서 이런 피자 맛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감탄스러울 뿐이다. 행여나

이 글을 보고 고쿄를 찾는 분이 있다면 제일 높은 롯지의 피자를 기억하시라. 인도, 네팔에서도 그랬지만 이 동네 피자는 한국에서처럼 그렇게 커서 여럿이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게 아담한 싸이즈로 구워 나오니 혼자 여행 오신 분에게도 제격이다.

점심 식사 후에 조금 쉬었다가 고쿄 마을을 가볍게 산책한다. 고쿄는 그래도 제법 큰 마을이라 구멍가게 같은 작은 롯지 매점에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각종 트레킹 장비와 등산 필수품에서부터 생필품, 학용품, 간식, 기념품에 책까지 그 작은 매점 안에 촘촘히 많은 것들을 구비해 놓았다. 마침 떨어진 휴지를 구입했는데 물론 아래에서보다 값은 두 배가 넘는다.

마을길을 걷다 보니 여기 저기 야크똥을 말리고, 차곡차곡 쌓아둔 풍경이 보인다.

하늘빛도 진한 푸른빛을 띠면서 마을을 비추고, 벽담의 호면 위로 반짝이는 햇살의 부서짐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흘러간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내가 오전에 고쿄에 당도할 때 쯤 일 나갔던 야크 떼가 막 마을 어귀로 들어오고 있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짊어지고 온 무거운 짐들을 풀어놓고 사람들은 그 짐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마을 다른 한켠에는 텐트촌도 눈에 띈다.

꽤 많은 롯지 식당들마다 통유리창 너머로 평화로이 책을 읽거나 고즈넉이 햇살을 받으며 호수를 바라보거나 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풍경이 유적하기만 하다.

이 온아적정한 마을을 따스하게 비춰주던 태양이 머뭇머뭇 봉우리 뒤로 사라져 간다.

다시 롯지 식당으로 들어가 떨어지는 태양과 떨어진 뒤에 오래도록 남는 붉은 여광의 흔적을 지켜본다. 어디선가 나른한 오후를 보내던 여행자들이 하나 둘씩 식당을 메운다.

그 조용하던 롯지와 마을 도대체 어디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왔나 싶을 정도로 식당은 금세 만석이다. 식당이 분주해지면서 창밖으로 비춰진 고쿄 마을은 순간 괴괴한 정적이 흐른다. 이렇게 고쿄의 밤은 깊어가고 있다. ‘이제 내일부터는 내려가는 길만 남았구나’ 하는 시원섭섭한 마음에 쉬 잠이 오지 않는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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