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촐라패스, 불편하게 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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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에베레스트 촐라패스, 불편하게 사는 즐거움

목탁 소리 2011. 8. 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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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발전으로 히말라야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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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라 길을 택해 언덕길을 오르니 3일 전에 지나왔던 탕라와 딩보체 언덕, 페리체 마을이 한 눈에 환히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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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촐라패스 길로 접어든 실감이 난다. 언뜻 보기에도 저쪽 페리체 길보다 이쪽 길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워낙 험한 설경(雪徑)이라 촐라패스를 넘는 사람은 아직도 많지 않다. 어쩌다 눈이라도 내리거나 매서운 날씨를 만나게 된다면 촐라패스를 포기하고 다시 오던 길을 내려가서 휘휘 돌아 다시 고쿄로 올라야 한다. 올라오면서 만난 팀들 중에도 칼라파타르로 갔다가 다시 내려가서 고쿄 쪽으로 다시 오르는 코스를 택하는 팀들이 여전히 더 많다. 그만큼 촐라패스는 악명이 높다. 그러나 요즘은 예전 같지가 않아 날씨만 조금 받쳐준다면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3~5년 전만 해도 이곳의 풍경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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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설산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7,000~8,000m 고지 봉우리 위쪽만 해끗해끗하게 눈이 덮여 있을 뿐이다. 4,000~5,000 고지쯤에서는 요즘 같은 10월에 눈을 보기조차 어려워졌으니 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4,000 고지 이상에서는 요즘에도 거의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그 때는 아이젠, 스패츠가 필수 장비였을 만큼 거의 모든 구간이 눈길이었다고 한다. 불과 3~5년 사이에 이렇게 급속도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10년쯤 전까지만 해도 촐라패스는 아무나 넘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일반인 트레커들이 촐라패스를 넘어 다니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눈도 많이 뒤덮여 있었고 더욱이 절벽 같은 산을 올라야 하니 눈이 많을 때는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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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도 사실 놀란 것이 그래도 히말라야이고 에베레스트 순례인데 산들이 다들 눈옷을 벗은 채, 위쪽 봉우리들만 눈이 살짝 쌓여 있는데다가 그것도 완전히 눈 봉우리가 아니라 햇살 좋은 곳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 이게 명색이 설산인데 그 체면을 완전히 구긴 것이 아닌가. 이 모두가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니, 우리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개발, 발전의 결과가 지금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이곳에서는 더욱 분명히 보인다. 그리고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고, 시간이 갈수록 얼마나 더 빨라지고 있는지가 실감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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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 전체는 거대하고도 정교한 관계성에 의해 움직인다.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idam-pratyaya-ta), 연기적(緣起的)인 관계성에 의해 인간도 자연도 바람도 구름도 풀 한 포기도 서로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로서 삶의 장결한 맥박을 뛰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연관되어 있지 않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긴밀한 관계성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그동안 저질러 왔던 수많은 자연 파괴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통찰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왔다. 자연이 파괴되면 그것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인간 존재 또한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상의상관성에 대한 무지!

이 우주를 이루는 크고 작은 일체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은 없다. 풀 한 포기와 구름 한 점조차, 저 발 아래 곤충과 이름 모를 작은 꽃 한 송이조차 지금 이 순간 나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그들을 훼손하면 그들도 나를 훼손한다. 나무 한 그루를 베는 순간 우리 안의 생명의 일부가 동시에 스러져 간다. 하물며 인간이 저 편하고자 자연을 온갖 방법으로, 기술과 과학과 산업발전, 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 하에 합법적으로 파괴하고 훼손해 온 역사는 이제 거대한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서서히 그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더 이상 파괴당하고 훼손당한 자연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염된 자연은 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인간의 그것처럼 자기 정화, 자연치유를 시작한다. 그러나 황폐해진 자연이 스스로 치유되려면 그 전에 많은 아픔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온갖 기상이변이고 지구온난화이며 엘리뇨, 라니냐 등의 전 지구를 휩쓰는 이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구도 자신을 유지시키려면 그런 방법으로라도 자기 정화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도 내적인 병이 축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 감기 같은 것으로 며칠씩 앓고 일어남으로써 자기 정화, 자기 치유를 이루어 내듯, 지구도 그런 방식으로 자기 치유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도 어지간한 질병은 자연치유가 가능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게 되면 질병에 의해 자신의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듯, 가이아(Gaia)라는 살아있는 지구 생명체 또한 어느 정도 인간에 의한 파괴의 도가 넘게 되면 그런 방법을 쓸 수조차 없게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지금의 기상이변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덕분에 그나마 지구는 조금 더 맑은 지구를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가. 이러한 지구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소식들의 무서운 속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를 더욱 빠르고 과학적인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파괴하고 있다. 물론 그 파괴는 자연파괴라는 이름이 아니라 개발, 발전, 국가 경쟁력 강화 등의 이름으로 대체되어 장밋빛 공양처럼 퍼지고 있다. 아마도 이 지구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더욱 더 우리 고장이, 우리나라가 개발 발전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자연이 더욱 더 정교하고 폭발적으로 파괴되기를 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일부에서는 자각의 물결이 일고 있지만 그들 역시 생각은 멈추길 원하면서도 몸은 그것의 안락과 편리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전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너무나도 우리들 삶의 곳곳에까지 개발과 발전이라는 복음이 속속들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유럽과 미국, 한국과 일본 등 선진국과 일부 잘 사는 나라들에서 주로 행해졌던 이런 개발과 발전이라는 파괴의 물결이 이제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중국 13억 인구가, 인도 11억 인구가, 그리고 아프리카의 그 거대한 땅 덩어리와 사람들이, 그리고 아직 덜 파괴된 야생이 살아있는 그 모든 나라들이 이 엄청난 파괴의 프로젝트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발전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났지만 앞으로 있을 이 나머지 나라들의 파괴는 이미 개발되어 있는 온갖 인프라와 눈부신 과학기술력, 그리고 세계화와 정보화 등에 힘입어 실로 엄청난 속도감을 가지고 속도전을 치르듯 전쟁처럼 치러지게 될 것이다. 불과 10년, 20년 만에 거대한 공룡 같은 신도시들이 세계 곳곳에 늘어나고 있다. 이 엄청난 속도를 보건대, 이대로 가다가는 이 지구의 운명이 불과 몇 백 년, 아닌 어쩌면 몇 십 년밖에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그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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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게 사는 즐거움

어떤 환경론자는 말했다. 지구의 운명은, 마치 거대한 빙하로 돌진하고 있는 배 안에서 안락하고 평온한 쾌락의 즐거움에 빠져 그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뻔히 빙하로 돌진하는 배를 보고도 멈추려 하지 않는것과 같다고 말이다.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분명히 눈에 보이지만 당장에 아무 일도 없으니 그저 괜찮겠지 하며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리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아니 모두가 자기 개개인의 성공과 돈과 명예를 추구하느라 이 지구 공동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관심 밖이다. 이제부터라도 무지를 털고 깨어나야 한다. 모두가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면서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

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푸른 자연, 깨끗한 물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히말라야의 감동스런 풍경과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천진함과 무한함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지켜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면서도 다른 한 쪽으로는 이 엄청난 파괴의 일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 모든 모순을 깨고 나부터 이 지구 행성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할지라도 그 작은 것이 우주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윽하고도 강력한 공명의 힘을 가지고 주위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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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길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 환경을 살린다고 되겠느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시작할 때 그 겉모습은 작고 소박할지언정 그 힘은 무한한 공명과 울림을 싣고 전 우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순수 지혜의 실천의 힘은 곧 우주 전체의 힘과 연결되고, 전파되며, 강력한 동력의 단초가 된다. 내가 시작하는 것이 곧 우주가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현대 문명의 이기가 주는 달콤한 편리함에서 나와 조금씩이나마 불편을 감수하고 오히려 즐기는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대부분 인간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 몸을 덜 쓰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리로 걸어가야 할 것을 자동차로 대신 움직이게 하고, 손이 해야 할 빨래며 집안 청소며 온갖 일들을 세탁기, 청소기와 온갖 기계들이 대신해 주고 있다. 몸이 여름에 더워서 불편하고 겨울에는 추워서 불편하니 온풍기와 에어컨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온갖 문명의 이기들의 출발점에는 불편함을 극복하려는, 불편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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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거꾸로 우리 스스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히려 불편함이 주는 이익과 즐거움을 누리는 차원으로까지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지구 환경을 지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될 수 있다면 차로 갈 것을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도 있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나 부채를 들 수도 있으며, 물론 더 작게는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데서 출발해도 좋다. 온풍기나 보일러를 줄이는 대신 내복을 끼어 입을 수도 있고, 빨래도 너무 자주 하지 않고, 비누 없이 세수를 해 볼 수도 있으며,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을 수도 있다. 이런 작은 ‘불편의 즐거움’ 속에 지구를 살리는 엄청난 계획이 담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불편함 속에, 자족과 청빈이라는 덕목 속에 인류의 모든 성인이 말씀했고 걸어갔던 삶의 근원적인 통찰의 지혜가 숨 쉬고 있다.

히말라야를 걷다보니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불편한 것 투성이다. 따뜻한 잠자리도 없고, 온풍기며 전기난로를 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토록 추운 밤을 보내면서도 방 안에 추위를 극복하도록 해 주는 것은 오직 달랑 침낭 하나뿐이다. 그렇다고 건물 벽채가 두텁고 견고하여 외부의 추위나 열을 완전히 차단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최소한의 몸 누일 공간에 벽이라고는 고작 얇은 목재 합판 하나 달랑 붙여 놓은 것이 전부라 옆방에서 자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불편하다면 불편하고 친근하다 생각하면 그런 대로 친근한 공간이다. 어떨 때는 자다가 바로 옆에 누가 누워 자는 것 같은 숨소리와 잠꼬대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기도 한다. 그저 달랑 얇은 합판 하나를 경계로 침대가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보니 그 사이에 낯선 그와 내가, 혹은 그녀와 내가 숨소리까지 공유하며 함께 누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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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인가. 오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풍족하거나 다양한 것도 아니다. 샤워를 제대로 할 수도, 빨래를 할 물도 부족하다. 먹는 물조차 200루피를 주고 사 먹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그 어떤 문화생활이나 여가를 즐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처음에는 조금 힘들더라도 얼마 안 가서 곧 적응을 한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이토록 적응력이 뛰어나다. 조금 적응하고 나면 이윽고 이 불편함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불편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불편한 그 가운데서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과 소박한 행복들이 깃든다. 적응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불편함을 누리며 은근히 만끽하게까지 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일상 속에서는 머릿속이 복잡해 질 것도 없다. 일과 욕심과 집착과 온갖 계획들로 마음이 무거울 것도 없다. 마음이 단순 명료해 지다 보니 그 빈 공간 속으로 대자연의 경이로움이나 고요함, 평화 같은 소식이 가만 가만 노크를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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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롯지의 평온한 오후

저 설산의 산맥과 봉우리 그리고 계곡과 푸른 호수, 그리고 발 아래 피어난 꽃들의 속삭임이 걸음 걸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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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의 봉우리를 흘러내린 눈의 호수가 발아래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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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안 가 바로 지척에 롯지 2개의 작은 마을 종라(Dzonglha, 4830m)가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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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텐이 언덕 위까지 마중을 와서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방을 못 구했다고 한다. 대신에 텐트를 200루피에 얻었는데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텐트 방이라도 하룻밤 몸을 누일 수 있는 것이 어딘가. 롯지에 도착해 텐트에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아늑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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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쓰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을 듯싶다. 값도 싸고, 추위야 침낭을 겨울용으로 빌려 두었고, 또 가져 온 모든 옷가지들을 모두 끼어 입고 자면 되니 별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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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라 롯지와 주변 풍광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저기 눈 앞에 내일 넘어갈 촐라패스와 그 옆에 우뚝 선 촐라체(Cholatse, 6440m)가 보인다. 촐라체는 에베레스트 서남서 17㎞ 지점에 위치한 6,440m 봉우리로 얼마 전 소설가 박범신의 소설로 유명세를 타게 된 곳이다. 산악인들에게는 꿈의 고지라고 하는 바로 그 촐라체의 한쪽 어깨 언덕을 내일 넘어가야 한다. 물론 일반 순례자들이 가는 곳은 촐라체 정상 봉우리가 아닌 봉우리 바로 옆에 있는 촐라체의 1,000m 아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계곡을 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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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롯지에서 따뜻한 물을 작은 포트에 주문하여 텐트 안에서 속칭 뽀글이로 해결을 본다. 높은 지역은 밥값이 비싸다고 하여 라면 몇 개를 사왔더니 이렇게 때때로 밥 대신 한 끼를 거뜬히 해결해 준다. 작은 텐트 안에 앉아 침낭을 덮고 봉지라면에 물을 부어 먹는 이 맛과 운치가 색다르고 그윽하다. 이 텐트가 그야말로 수행자들이 참선하는 토굴로는 손색이 없겠다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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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는 조용히 텐트 안에 앉아 심유함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포터들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와서는 바로 내 텐트 옆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쬐면서 카드놀이를 벌이기 시작한다. 밖에 나가 보았더니 우리 지텐도 그 사이에 끼어서 한바탕 카드놀이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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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에서 포터들이 유일하게 모여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카드밖에 없다. 보아하니 그리 커 보이지는 않지만 돈이 매 판이 끝날 때마다 오고 가고 탄성과 환호성이 교차하며 시끌시끌 웃음소리가 계곡을 쩌렁쩌렁 울린다. 저 나이 지긋한 포터 분들 사이에 낀 우리 어린 포터 지텐이 크게 돈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판돈을 조금 보태어 줄까 싶다가도 밥값도 아니고 팁도 아니고 아무리 작은 놀이라지만 노름판에 돈을 보태준다는 것이 께름칙해 참기로 한다. 대신에 곁에서 한 마디 응원을 해 주었더니 으쓱 어깨가 올라간다. 다른 포터들이 코리아, 코리아를 외치며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하고 아는 한국말을 왁자지껄 죄다 쏟아낸다.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다 보니 최소한의 한국말들은 어지간히 알아듣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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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을 하다가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식당 안에서도 여행자들과 가이드, 포터들이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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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 좁은 롯지 식당 안이 트레커들로 꽉 찬다. 어제 닥낙(Dragnag, 4700m)에서부터 촐라패스를 넘어 이곳 롯지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나 말고 두 팀 정도가 나처럼 내일 촐라패스를 넘어 닥낙으로 갈 여행자들이다. 그 중에는 일본인 중년 남성 두 사람이 있는데, 이분들은 너무 늦게 롯지에 도착하는 바람에 방도 없고 텐트도 부족하여 하나 남은 내 옆 1인용 텐트에서 좁으나마 두 분이 함께 새우잠을 주무셔야 하게 생겼다. 롯지 야외 텐트가 두 채 있는데, 그나마 혼자 밖에서 자게 생겼구나 했는데 옆 텐트에 동지가 생겨서 반갑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내일 있을 촐라패스를 위해 파이팅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대신한다.

식당 중간 난로에서 야크 똥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온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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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불광출판사, 법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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