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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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많은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 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소유와 자유를 동시에
얻을 수 있기란
삶과 죽음 을 동시에 가지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입니 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집착하고 있는 것이 많을 수록
그만큼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소유는 우리를 얽어매고
되려 우리를 소유해 버리고 맙니다.

소유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지금 이 대로의 텅 빈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그냥 지금 여기에서
충분하고 꽉 찬
온연한 내면 을 비추는 텅 빈 충만을 말입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 한다면
언제까지고 행복은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자꾸 늘 리려고 하고,
채우려고 하면
세상에 얽매임이 많아 지다 보니
우리 본연의 맑은 참빛을 놓치게 됩니다.

텅 비 워 버리면
그냥 그대로 충분하고 자유로워
그 속에서 참 성품 의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자유와 행복이란
얼 마나 채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비우느냐에 달 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아닌 필요에 의한
최소한의 소유,
소유라 는 관념도 비워 버린
무소유의 소유,
그런 맑고 텅 빈 소유를 하라는 것입니 다.




Posted by 법상




행복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을 가득 채웠을 때 오는 행복과
또 하나는
욕망을 비웠을 때 오는 행복이 그것입니다.

욕망을 가득 채워야 행복한데
그냥 욕망 그 자체를 놓아버리면
더이상 채울 것이 없으니
그대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지요.

전자의 행복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고
잠깐 동안의 평온을 가져다 주며,
유한하기에 헛헛한 행복이지만,

후자의 행복은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그대로 평화로운
무한하고 고요한 행복입니다.

모든 성자들이
'마음을 비워라'
'그 마음을 놓아라'
하는 이유는
바로 욕망을 비웠을 때 오는 행복이
지고한 참된 행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에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충족되었을 때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되고 싶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마음을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놈이
지금 이 자리에서 비워야 할 것들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하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걸리지 않음, 집착하지 않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고,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말입니다.

마음 비우기의 참 큰 매력은
비우고서 했을 때
그 때 정말 큰 성취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룬 성취는
이미 나를 들뜨게 하지 않는 평온한 성취입니다.
또한 설령 성취하지 못하였더라도
내 마음 비웠기에
아무런 괴로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채우는 행복
비우는 행복

자!
어떤 행복을 만드시겠어요?






그 어떤 경계가 닥치더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인정하지 못할 때, 받아들이지 못할 때
괴로움은 옵니다.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경계에 대한 분별을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경계를 두 가지 극단의 분별로 몰아갑니다.

음식을 먹을 때
맛이 있고 없고를 분별하기 전에
음식 그 자체로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정했을 때 음식 은 그저 음식일 뿐입니다.
맛있는 음식이거나 맛없는 음식이 아닙니다.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면
음식이란 대상에 대해 맛 이 있고 없고 등의
온갖 분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며
그 분별은 음식에 대한 집착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맛이 없 다는 것은
이 음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인연따라 온 음식을 분별없이 그냥 먹는다는 말입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있기 때문 입니다.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어질 때
우리는 일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 다.

인정하지 못할 때
분별과 집착 그리고 괴로움은 시작되지만,
일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 은 대상에 상관없이 평온해 지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실체는 ‘인정하지 못함’입니다.
인정하는 순간 괴로움은 사라집니 다.

대장부 수행자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받아들이고 저건 못 받아들인다면
그건 졸부의 못난 마음입니 다.

수행자는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경계라도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녹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가장 큰 적은
게으름과 편해지려는 마음입니다.

아상 은 끊임없이
내 몸뚱이 편해지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동의 근본은 편해지려는 마음입니 다.

사실 모든 행동은
편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편해지려고 하는 것이고,
사람을 만나 는 일,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에서
사랑하는 일이며 잠을 자는 일 조차
편해지기 위한 일들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바 로 이 편해지려는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편해지려는 그 하나의 목적으로 일을 하고자 하고
편해지지 않는 일들은 하지 않으려 고 애를 씁니다.

하기 싫은 일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편하지 않게 하는 일들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우리 마음 은 편치 않습니다.
수행이 편해지려는 마음을 닦는 것이라 할 때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수행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수행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하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이란
‘절대 하기 싫은 것 하 지 않는’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우리 몸 편하게 하는 일만 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 은 온갖 번뇌에 휩싸여
내 안의 맑음과는 자꾸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게을러서 일찍 일어나기 싫고,
아침에 일어나 108 배 하기 싫고,
화를 내는 상대방을 따뜻하게 품어주기 싫고,
맛없는 음식은 먹기 싫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기 싫고,
그야말로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생활 수행자라고 한다면
그런 하기 싫은 일을 찾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긴 해야겠는데 하지 못하는 이유는
수행이 몸뚱이 편 하게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편한 수행을 찾는 것은
수행과 멀어지는 일이기만 합니다.

옛 스님들은 수 행의 어려움을
‘도를 구할 때 뼈를 부수어 골수를 뽑아내듯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쉽게 쉽게만 하려는 우 리 몸뚱이 착심을
잘 지적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수행이 잘 되는 날 수행 잘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며 그리 큰 공덕이 되지 못하지만,
수행 하기 싫고 수행이 안 된다 싶을 때
그 때 ‘싫은 마음’ 조복 받고 정진하는 것이
그것 이 참된 수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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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상징에 불과하다.
모든 개념작용들은
환영과도 같은 공허한 헛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태초에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개념도, 관념도, 분별도, 상징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꽉 찬 충만함이 여여(如如)하게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시비도, 분별도, 싸움도, 좋고 나쁨도,
행복과 괴로움도, 성공도 실패도 없었다.

나아가 중생과 부처도 없고,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고,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없었기에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 없고,
어리석은 이가 지혜롭게 되기 위한 공부도 필요 없고,
죽지 않기 위해, 늙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성공을 위해, 부유함을 위해, 승리를 위해, 해탈을 위해 달려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며 충만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처였고, 신이였으며, 그저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아니 어느 한 순간 그러한 텅빈 충만이 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왜 나에게는 그런 충만하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가 없는가.
이 세상은 왜 이토록 어둡고 탁하며 어지러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 사유의 뜰을 거닐어 보자.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은 이름짓기다.
무엇이든 거기에 이름을 짓고, 상을 짓고, 규정 짓기를 좋아한다.
이른바 상징을 만들어 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상을 짓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감정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어떤 감정에는 ‘미움’이라는 상징을,
또 어떤 감정에는 ‘슬픔’이니, ‘행복’이니 하는 상징을 붙여 놓았다.
또 어떤 것에는 ‘부유함’을 또 어떤 것에는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어떤 상태에는 ‘성공’이라고, 또 어떤 상태에는 ‘실패’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으며,
어떤 것에는 ‘옳음’ 또 어떤 것은 ‘그름’이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중생’이라는 이름을,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부처’라는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이름붙이고 상징화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화하는 작용, 이름짓고, 상을 짓는 작용
이것이 모든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러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뭉뚱그려 ‘이런 이름’을
‘저러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저런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사실 그러한 이름과 그러한 상황이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상징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그 어떤 정해진 실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고,
또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랑이 행해질 수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100번의 사랑을 했다면
거기에 또한 100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많은 사랑의 상황 가운데
어떤 것만을 딱 찝어 ‘사랑’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을 받으면서 성공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연봉 속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이 부유하다면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을지라도 실패한 인생이라 자책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사랑도 미움도, 성공도 실패도, 옳음도 그름도, 좋음도 나쁨도,
부자도 가난도, 중생도 부처도,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대충 이러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이름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많은 문제점을 유발시켰다.

이런 수많은 약속, 수많은 상징, 수많은 이름들은
그 어떤 기억과 감정과 찌꺼기들을 양산해 낸다.



이렇게 이름짓고, 상징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만 어떤 상황을 접할 때 오직 순수하게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경험들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경험으로 분별없이,
과거의 기억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과거의 상징이며 이름들과 섞이지 않은 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징과 이름을 정해 놓기로 약속한 순간부터
우리의 어떤 경험은 어떤 이름으로 붙여져 기억 속에 저장되기 시작한다.
기억 속에 저장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파일을 저장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고,
창고에도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이름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생겨난
어떤 특정한 느낌이며 감정들을 ‘A'라고 이름을 짓기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접할 수 있는 그와 비슷한 감정들은
그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똑같이 ‘A'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것은 전혀 ‘A'가 아닌데도 똑같이 'A'로 불리는 것이다.
사랑도 똑같은 사랑이 아닌데 그저 이름은 똑같이 사랑인 것 처럼.

이것은 엄청난 문제를 초래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하고, 따분해 지기 시작한다.
이름을 붙여 놓고 나면 곧 그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게 된다.
특히나 저장될 때는 그 과거의 기억에 빗대어
좋거나 싫다는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자동으로 섞인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것과 비슷한 또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자동적으로 튀어 나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기억 속에 담겨진 이름으로 걸러서
판단하고 분별하게 만든다.
전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그 상황으로 한정짓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삶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전혀 새롭고 신선한 매 순간 순간을 늘상 그저 그렇고 새로울 것 없는
따분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 때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 과거의 ‘사랑’이 아프고 ‘싫은’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마주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서 해석을 하게 된다.
그 사람에게 사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과거에 해 보았던 기억과 그 기억에 담긴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새롭게 마주한 사랑의 상황에 대해서도 똑같은 해석과 전제를 깔게 된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상황과 사람에 대한 폭력이며 억압이다.
그것은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놓치고 있는 것인가.

이처럼 예전의 기억이 좋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좋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졌다가
훗날 새로운 비슷한 상황을 맞을 때 똑같이 ‘좋다’고 해석하게 되고,
‘나쁘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 있던 상황들은
또 다른 상황을 맞을 때 ‘나쁜 상황’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제부터 모든 상황은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지고 해석되게 된다.
과거로 걸러지면서 그것은 좋고 나쁜 두 가지 감정으로 한정되고 만다.
과거의 기억에는 언제나 그 기억이 가졌던 감정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실수며, 오류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오류인지를 모른다.
아니 그것이 옳다고 느끼고, 정당한 해석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옳고, 내 감정이 옳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매 순간 순간 전혀 새롭고 신선한 경험들을
새롭고 경이롭게 체험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얽매여 아집에 사로잡힌 해석을 가하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새로운 곳이 아니다.
매 순간 순간은 과거의 연장이며, 과거의 속박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된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
과거의 경험에 빗대로 ‘좋았던’ 감정을 ‘행복’이라고 이름 짓고
계속해서 그 좋았던 행복의 감정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물론 반대로 과거에 ‘나빴던’ 감정은 회피하고 멀리하려고 애쓰게 된다.



우리의 욕망이나 집착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과거의 잔재이며 기억된 감정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욕망하고, 욕망한 것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욕망을 채워나가는 방법으로는
언제까지고 욕망을 끝낼 수는 없다.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욕망을 끝낼 수 없다.
욕망이 생겨나게 된 전체적인 마음의 작용을 전체적으로 사유하고 깨달아
욕망이라는 것이 허망하게 일어났으며, 허망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볼 때 욕망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상’ ‘상징’에 얽매여
그러한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욕망의 문제를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채우겠다거나, 욕망을 없애겠다는 생각 모두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일어나는 방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이 중생이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면,
욕망을 없애고 초월하겠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라는 상징도, 중생이라는 상징도
모두 다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일 뿐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욕망과 집착과 아상의 전체적인 이해와 사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피나는 수행으로 욕망을 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을 채워 나가겠다는 생각도 안 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욕망을 채우거나 끊는 문제로 다가설 것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전체적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찰하되,
그 어떤 시비분별도 옳고 그르다는 판단도 없어야 한다.

다만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좋거나 싫다는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체적으로 자각하여 바라볼 때
욕망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보게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났다.
우리의 습관은 순간 과거의 어떤 비슷한 상황과 기억으로 쏜살같이 달려 갈 것이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를 판단 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 상황에 집착할 것이고,
나쁜 감정이라고 판단되면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모든 과정을 낱낱이 돌이켜 관조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애써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 된다.

바라보다 보면 순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습관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순간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작용을 지켜보게 되면 좋거나 나쁘게 보는 틀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온전히 보면
매 순간 새롭고 신선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
온전히 바라보면
욕망을 없애려고도 채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욕망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금 태초의 텅 빈 고요로써 되돌아 옴을 느낀다.
본래 아무 일도 없었음을.



[사진 : 강화도 적석사 낙조]


Posted by 법상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포근해 졌다. 그리고 벌써 이렇게 들녘엔 새봄을 맞이하는 꽃들이며 봄나물이 한창이다. 이렇게 세월은 하루가 다르게 흘러가는데 내 속 뜰의 공부는 얼마만큼 그 흐름에 부응하며 보내왔는지, 하루 이틀, 일분일초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너무 쉽게 소모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날이 갈수록 단순한 아쉬움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뻐근한 가슴앓이로 다가온다.

  이 소중한 기회 이 소중한 순간을 놓쳐버리면 다음 순간이란 그다지 소중하지 못하다. 이 순간, 내게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에 가장 소중한 때다. 백일 천일 공부할 것도 없고, 전생이나 다음 생을 논할 것도 없으며, 과거나 미래를 논할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그렇게 찾던 '바로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할 것.

  우리는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란다. 돈을 벌기 바라고, 지위가 오르길 바라고, 성공하기 바라며 계속해서 무엇인가 이루길 바란다. 그러나 바라는 순간 그 마음은 '지금 여기'에 없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자꾸 어디로 가려고 애를 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린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주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그 일을 하는 순간 온전히 거기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작은 일이 내 삶의 완전한 목적임을 알아야 한다. 작은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집중하며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때, 수많은 어려운 일, 큰일들 또한 쉽게 이루어 낼 수 있는 선적인 수행의 힘이 생긴다.

 

 


  내 밥 먹는 사소한 일상을 돌이켜 본다. 매일 같이 하루 세 번을 나누어 공양供養을 하면서도 공양을 위한 공양을 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 싶다. 밥을 먹으면서 늘 다른 것을 계획하고,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거나 무언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고 밥 먹는 것은 소홀한 뒷전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밥 먹을 때 온전히 밥만 먹지를 못했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임을 늘 그렇게 놓치고 산다.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순간이 온전한 ‘지금 여기’의 순간이자 내 생의 전부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몸은 밥상 앞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무언가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곤 하는 것을 본다.

  밥을 먹는 순간, 일을 하는 순간, 운전하는 순간, 걷는 순간, 대화하는 순간, 그 어떤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은 온전히 거기에 있어야 한다. 매 순간 도착해 있어야 한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갈 필요는 없다. 우린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임을 알면 된다. 그랬을 때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고,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명상이며 깨어있음이 된다.


  사람 성격은 운전대를 잡아 봐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맞는 말 같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도 운전대를 잡으면 갑자기 급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스님도 평소에는 정말이지 그렇게 여유가 있고 차분한데,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그냥 폭주족 저리가라 하고 질주를 한다. 물론 내 경우도 비슷하다. 가만 보면 운전대를 잡을 때 참 공부가 많이 된다. 마음이 얼마나 바쁜가, 마음에 얼마나 일이 많은가가 평소에는 숨겨져 있다가 운전대만 잡으면 고스란히 드러나 스스로에게 들키고 만다. 그래서 더욱 내면의 뜰을 잘 지켜볼 수 있을 때가 운전을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운전을 할 때도 운전이 어디까지 도착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만 운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도착하기 위해 운전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도착지라는 목적에 가 있기 때문에 운전하는 순간순간에는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마음은 목적지에 가 있는데 몸은 도중에 있으니 얼마나 조급한가. 운전하고 가는 순간순간 그대로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운전하는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놓쳐선 안 된다는 말이다. 운전하는 순간 알아차리게 되면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온전히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운전을 위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걸어서 어떤 목적지에 가려고 할 때 우리 마음은 걷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도착하는 데만 마음이 가 있다. 빨리 도착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 때 길을 걷는 일은 시원찮은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걷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빨리 도착하려는 조급한 마음도 비워지고 오직 걷는 그 자체로써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진 그 어떤 일이라도 모두가 마찬가지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그 순간순간이 그대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마음은 분열을 멈추고, 내적인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 마음이 즉한 순간 깨어있으면 그 순간 우리는 온 우주와 하나가 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왔지만 사실 우리가 산 세상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요,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그 순간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을 돌아보자.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는 이 마음을.

  우리 삶이란 것이 그렇게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남들을 더 많이 재끼면서 달려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지 한 시도 멈추고 비우며 자족하는 도착의 삶, 순간의 삶을 산 적이 없지 않은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모든 욕망과 집착에 얽매인 마음, 결과와 목적을 향해 치닫는 마음에 제동을 걸어 보자. 그 목적지를 향한 삶의 속도를 멈추는 순간, 이미 행복의 정원에 도착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빨리 달릴수록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멈출수록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자동차가 생겨나고, 기차며 비행기가 나날이 빨라지고 있지만 우리 삶의 속도는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빨리 도착하도록 해 주는 운송수단이 생겨나면 빨리 도착한 만큼 더 많은 휴식과 여유가 생겨야 하는데 반대로 우리의 삶은 더 빨라지고 정신이 없어지며, 목적지는 더 멀게만 느껴진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세상이 부유해졌고 편리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낀다. 세상의 부유함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세상 사람들의 부유함에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내달려도 힘겨울 판이다. 그러니 어찌 멈출 수 있는가. 죽을 때 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어찌 마음을 비우고 ‘지금 여기’라는 순간에 멈춰 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달려서 결국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뿐이다. 그렇게 달려가는 목적지가 성공에 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 그 속도감은 우리에게 죽음이란 목적지에 더 빨리 다다르게 할 뿐이다. 우리의 속도전은 죽음 앞에서 겨우 멈춰 서게 될 것이다. 삶에 대한 한없는 후회와 함께. 죽음의 목적지에서 모든 사람은 지난 삶을 되돌아 볼 것이다. 왜 매 순간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느끼며 즐기며 살지 못하고 이 순간만을 향해 달려왔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왜 그 때에 가서야 깨달아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멈추기만 한다면 행복과 평화, 고요함과 깨어있음이라는 참된 목적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존現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수행이며 명상, 기도란 것도 사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과 명상의 궁극도 깨달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멈춰 서는 깨어있음에 있다. 그러니 참선·염불·독경·진언·절 등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려고 해선 안 된다. 참선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이미 본래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선수행을 하기 위해 선방에 가는 순간도 그것이 절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로 가는 그 걸음 걸음의 순간 또한 그대로 본래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아닌 바로 깨닫는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절에 가는 순간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그대로 경행수행이 된다. 그랬을 때 절에 가는 과정도 참선이며, 절에 가서 앉아 있는 것도 참선이다.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경전을 꺼내어들고 방석을 펴는 순간 매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깨어있으면 수행과 생활이 따로 없고, 과정과 목적이 따로 나뉘지 않는다. 주말에 있을 참선모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무엇하러 그 긴 시간을 기다리느라 소모해야 하는가. 기다림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 도착했을 때 모든 순간이 온전한 참선의 순간이 된다. 수행을 위한 준비는 필요 없다. 바로 그것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수행의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명상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수행이라는 '마음' 닦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부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말은 방편일 뿐이다. 중생이나 마음이나 부처가 그대로 하나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며, 중생이 그대로 부처다. 그랬을 때 우리 삶의 그 어떤 순간도 우리를 괴롭게 만들지 못한다. 모든 순간이 다 온전한 순간이고,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깨달음의 순간이라면 온전한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내 삶을 돌이켜 보라. 내 삶의 속도를 느껴보라. 시간이란 것이 다 우리가 만들어 낸 조잡한 관념에 불과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 속에 내가 온전히 살고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순간을 살면 시간은 없다.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는데 시간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매 순간 도착해 있으며, 매 순간 현존의 깨어있음이 빛을 피워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잡는 것은 ‘그 순간’만을 잡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잡는 것이다. 이 새로운 순간. 이 소중한 시간 시간을 결코 소홀히 흘려보내지 말자.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Posted by 법상


가진 것이 너무 많아 하나 씩 하나 씩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정리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해 오다 이제서야 묵은 일을 시작해 본다. 꼭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은 정말로 꼭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말하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 속에 들기가 어렵다.

물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놈이 욕망의 소산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필요'의 범주에 들어있는 것인가가 보인다. '최소한의 필요'가 아닌 것들은 대개 욕망이 개입된 것들이기 쉽다.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다 보면 모든 물질마다 제각기 독톡한 분별이 따르게 마련인데, 대부분 그 분별로 인해 첫 생각 정리 대상이었던 것들이 다시금 '소유'의 범주로 슬그머니 들어오기 쉽다. 그래서 정리할 때는 마음을 잘 비추어 보아야 그 분별에 속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조금만 방심해 버리면 그놈의 분별심과 소유욕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우리의 몸은 조금 더 불편해 지겠지만 너무 편리함만을 따르면 몸뚱이 착심만 키울 뿐, 참된 공부는 불편함을 이겨나가는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 법정스님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이겨나가는 것이 곧 도 닦는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버릴 때는 어려워도 시원스레 버리고 나면 버린 만큼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지게 마련이다. 이런 자유로움은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것이지만, 또 누구나 한번의 '무소유'를 실천함으로써 쉽게 얻을 수도 있다.

누구나 이따금 한 번씩은 이런 정리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기적으로 이런 버림의 실천을 행하는 것도 좋겠다. 이렇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거나 거저 얻게 될 때라도 함부로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훗날 버릴 것을 생각하므로 소유의 굴레 속에서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말로만 수행이 아닌 실질적인 무소유 방하착의 수행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방안을 한번 휘휘 돌아보라. 방안 곳곳 집착과 욕망의 소유물들이 넘쳐난다. 지금 그 안에 살고 있는 나는 그 소유물들에 소유당하며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그로 인해 조금의 편리함은 느끼겠지만 도리어 더 큰 살뜰한 행복감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겨울 눈꽃이 이 산사를 또 뒷산 자락을 한창 물들이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피어오른 눈꽃의 고요한 잔치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아름다움이란 아마도 무소유에서 오는 호젓한 평화로움일 것이다.

지난 가을, 화사하게 이 산사를 물들였던 단풍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며 홀로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왠지 모를 안쓰러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 때가 되어 나뭇잎을 떨군 나뭇가지는 홀가분한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낙엽을 다 떨구어 낸 무소유의 호젓한 가지만이 한 겨울 그 어떤 추위에도 결코 시들거리지 않고 우뚝 솟아 그 텅 빈 가지 위로 아름다운 꽃눈을 피우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 또한 때가 되면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나야 그 텅 빈 무소유 안에서 새로운 삶의 향기로움을 다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겨울,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또 나를 소유하고 있는 이 모든 소유물들로부터 자유로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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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사진 : 범어사]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다.
세상의 즐거움이란 결국 고통 아닌 것이 없다.
탐욕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것,
모든 고통과 근심은 바로 탐욕에서 생기는 것이다.

[화엄경]

온갖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탐욕이다.
중생은 생각이 어리석어 탐욕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탐욕이 바로 괴로움인 줄 알기 때문에 수시로 끊어버린다.
탐욕을 욕망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소금물을 마셔 더욱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을 없앤다면 괴로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성실론]



탐욕은 괴로움이다.
탐욕을 채우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 또한
결국 고통이 되고 만다.
탐욕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탐욕은 커진다.
만족은 잠시일 뿐 이윽고 또 다른 탐욕이 생겨난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죽을 때 까지 오직 탐욕을 채우기에만 여념이 없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탐욕을 채웠을 때 오는 잠시의 행복이
참된 행복인 줄 착각하고 산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악행과 기만을 서슴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탐욕을 채워나간다.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짓누르고 밟고 일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아니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슬프다.
이 세상도 슬프고, 탐욕에 물든 사람들도 슬프다.
탐욕이란 사람을 눈멀게 하고,
온전한 만족에서 멀어지게 하며,
영적인 성숙과 이별하게 만든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탐욕이다.
탐욕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그렇다고 탐욕을 끊기 위해 탐욕을 미워하고 증오할 필요는 없다.

탐욕에 대한 그 어떤 분별도 버려야 한다.
탐욕 그 자체는 좋거나 나쁜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중립적이고 비실체적인 것이다.

탐욕을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말고,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머물렀다가
어떤 일들을 만들어내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그냥 알아차리고 지켜보기만 하라.

그랬을 때 전체적인 탐욕에 대한 지혜가 생기고
지혜의 빛은 곧 탐욕을 사랑으로 불태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범어사]

욕심은 더럽기가 똥덩이 같고,
밑 빠진 그릇 같으며,
무섭기가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아 위험하며
햇볕에 녹는 눈처럼 허망하기 그지없다.

욕심은 예리한 칼날 위에 묻어있는 꿀과 같고,
화려한 화장실에 칠해진 단청과 같으며,
화려한 병에 담긴 추한 물건 같으며,
물거품처럼 허망하여 견고하지 못하다.

[증일아함경]


욕심같이 더럽고 추하며 허망하고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욕심같이 겉포장이 잘 되어있는 것도 없다.

욕심은 예리한 칼날 위에 묻어있는 꿀과 같아
잠시 달콤할지 모르지만 혀를 베는 결과를 얻고,
화장실에 칠해진 단청과 같아
겉만 화려하나 속은 더럽고 추하여 냄새가 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욕심의 구린 냄새를 알지 못하고
화려하게 포장된 겉모습에만 빠져든다.
그것이 곧 내 혀를 베고, 내 몸을 베며,
내 존재의 뿌리를 잘라 내리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욕심이 지금 당장에 아무리 큰 기쁨을 가져다 줄 지라도
그 끝은 추하며 고통스럽다.
당장의 기쁨을 위해 곧 다가올 삶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욕심의 실체를 여실히 들여다보라.
욕심에 얽매여 있는 나의 모습을
한 발자국 뒤에서 전체적으로 지켜보라.
과연 나는 어떤 욕심에 빠져있는가.

똥덩이 같고, 밑 빠진 그릇 같으며,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으며,
물거품처럼 허망하여 견고하지 못한
욕심의 실체를 확연히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욕심의 덧에 걸리고 만다.

그렇다고 욕심을 없애 버리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욕망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욕망을 다루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욕망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전 과정을 깨어있는 관찰로써 온전히 이해해야 할 어떤 것이다.
욕망을 전체적으로 이해했을 때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혀를 베는 칼날’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다.

나에게는 어떤 욕심이 일어나고
머물다가
사라지고 있는가.
Posted by 법상



욕망은 화살과 같이 빠르고 정확하다.
두 남녀 사이에서 불붙는 욕망은 번뇌의 뿌리이다.
이성(異性)보다 강한 욕망은 없다.
이 세상에서 이성과 같은 것이
하나만 있다는 사실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은 번뇌의 뿌리가 아니라 깨달음의 뿌리이다.
마치 메마른 땅이나 사막에서는 연꽃이 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번뇌 때문에 깨달음의 싹은 튼다.
[이취경]




남녀 사이에서 불붙는 욕망의 크기만큼
거대하고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이성보다 더 강한 욕망은 없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이성에 대한 욕망의 크기가 큰 만큼
그로인한 깨달음도 크다.
지혜로운 수행자에게 이성은 깨달음의 뿌리이지만,
어리석은 중생에게 이성은 번뇌의 뿌리이다.
이성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번뇌해도 좋다.
그로인해 깨달음의 싹은 트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다만 사랑하는 동안
사랑이 생겨나고 머물고 떠나가는
그 모든 과정을 온전한 깨어있음으로 지켜보라.

사랑으로 인한 아픔도
사랑으로 인한 기쁨도
모두를 받아들이라.

어느 한 쪽만 일어나기를 바라지 말라.
양쪽 모두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사랑으로 인한 기쁨만을 바라는 사람은
불붙는 욕망으로써의 사랑에 빠지고 말지만,
그로인한 슬픔도 아픔도 모두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사랑은 성스러운 수행의 과정이다.

온전히 사랑하는 순간 순간을 깊이 느껴 볼 수 있고 알아챌 수 있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닌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사랑으로 인한 가슴 아픈 번뇌의 마음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아파하는 그 근본에까지
바라봄이 빛을 놓을 수 있도록 살피고 또 살피라.

그렇게 되면 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보게 된다.
이성에 대한 감정,
이를테면 사랑과 번뇌까지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그로인해 행복하고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러한 인연이었음을,
다만 그러한 상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다만 사랑이라는 인연일 뿐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