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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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과학으로 본 시크릿, 과학으로 본 불교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제 14, 이상적멸분
상을 떠나면 적멸이다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 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 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 希有功德 世尊 是 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我今 得聞 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佛告 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 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 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時 若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 過去於 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 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提 如來 是 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思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此法 無實無虛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有目 日光 明照 見 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멸은 말 그대로 상을 떠난 바로 그 자리가 적멸의 자리라는 뜻이다. 상을 깨는 것이 적멸 즉 실상이며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이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이 무량하며 그 방편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쉽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상을 깨라’는 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편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상을 여읨으로써 깨달음 즉 적멸에 이르는 방편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분에서는 지금까지 13분까지 이어오며 설해 왔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정리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멸분으로써 그동안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를 해 오던 분들 가운데는 여기 이렇게 수보리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보리 뿐이 아니다. 누구든 어둡고 막연했던 삶에 대해 어리석었다가 밝은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나면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맑은 신심을 일으켜 이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물을 흘려 보았을 것이다.
보통 눈물이라는 것이 슬플때나 기쁠 때 나오기도 하지만, 진리의 감동에 젖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다. 그동안 온통 상에 물들어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분별 판단 시비하여 걸러 보았다 보니 우리 마음에 온갖 때가 끼고 녹이 슬어 좀처럼 상 이전의 맑고 순수한 본래심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어리석게 살다가 상을 여읜 진리의 자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난다면 누구든 상 이전의 본래 자리에서부터 감로가 샘솟듯 온몸의 감동이 눈물로써 나오곤 하는 법이다.

또한 법문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모든 상이 잠시 떨어져 나가고 고요해 지면서 온통 상으로 둘려 쌓였던 탁한 마음이 잠시 적적한 세계를 맛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온 존재로써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감동은 눈물로써 표현되곤 한다.
그런 눈물은 애써 감출 것이 아니다. 법문을 들을 때건, 수행을 할 때건, 내면의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때는 오직 그 눈물에 내 온 존재를 맡겨라.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도 없고, 눈물을 억지로 닦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몸과 마음의 떨림과 흐르는 눈물과 하나가 되어 함께 흐르라. 눈물이 스스로 멈출 때 까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 보려는 의도를 버리고 그저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그 눈물은 눈이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에 따라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플 때, 혹은 너무 기쁜 일이 있을 때, 그런 온갖 종류의 인연이 내게 다가올 때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 따라 흘리는 눈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 인연이 다하고 나면 눈물도 메말라 버린다. 기쁜 일이 가고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눈물은 멎는다.
그러나 진리의 눈물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며, 진리가 온 존재로써 일치되어지는 작은 경험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업장(業障)이 소멸되는 눈물이며, 진리의 발견에 대한 귀의(歸依)의 눈물이고, 본래의 존재로 회귀하려는 귀향(歸鄕)의 눈물이다.

그렇다고 그 눈물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라. 흐르는 눈물에 또 다른 의미를 덮씌우거나 붙잡고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어리석은 상을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선명함과 가볍고 적멸한 느낌을 애써 반복하여 경험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려라.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맑은 느낌도 스스로 맑다느니, 업장 소멸의 느낌이라느니 하고 분별을 붙이고 나면 되려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말고, 스스로 대견하다고 느끼지도 말고, 좋아하면서 붙잡고자 하지도 말고,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지도 말고, 다만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라. 다만 그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또한 왜 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일까, 왜 난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왜 난 수행 중에 온갖 경계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분별 또한 턱 놓아버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수행을 조금만 해도 금새 삼매에 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기도를 해도 금새 눈물이 흘러 나오며 깊은 감동을 느낀다는데, 나는 아무리 기도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눈물은 커녕 그 어떤 감각적인 느낌도 없고, 환희심도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수행 중에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눈물을 탓하지 말라. 눈물을 많이 흘리고, 정진 속에서 부처님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놓아버릴 뿐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마장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 법문을 듣고 나니 수보리의 온 존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법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를 들었다는 그 사실이 수보리의 온 존재를 강렬한 눈물로써 휘감고 있다. 어떠한가. 당신의 존재에서도 눈물이 흐르는가. 앞의 13장 동안에 정진해 왔던 금강경의 가르침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온갖 상에 얽매여 맑은 눈이 가려져 버렸다. 본래의 텅 빈 시선에 온갖 어둡고 탁한 것들이 잔뜩 끼어 버렸다. 수보리는 그동안 얻어 들었던 가르침으로 인해 지혜의 눈이 열렸지만, 수보리의 혜안으로 보더라도 지금의 이 가르침은 희유하고 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리의 가르침을 만나거든 수보리와 같이 찬탄하고 또 찬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탄의 연주가 온 우주 법계에 까지 울려 퍼지게 하라. 찬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중요한 수행이 된다. 찬탄은 법계를 울리고, 또한 내 안의 본래 자성을 일깨운다. 찬탄의 소리는 그대로 진언이 되고, 다라니가 되어 안팎을 진리의 향기로 수놓을 것이다.
여기서 수보리가 지금까지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간 소승의 견해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만이 가장 수승하며 소승의 다른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곧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퇴락해 가는 기존 불교의 삿된 부분을 타파하고자 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소승불교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 즉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을 원하는 대중의 소망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점, 삿된 점을 파하고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대승이며, 대승의 기본이 되는 경전이 반야경인 것이다. 물론 이 금강경은 반야경 속의 작은 경전이며, 동시에 반야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소승불교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포함시켜 소승불교는 잘못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훌륭한 것이라거나 하는 분별도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많이 타락하고 퇴락해 갈 때 이러한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불교결사로써 정혜결사가 이루어 졌다고 해서 고려의 불교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과 같다.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부파불교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오던 부파의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타파하고 바른 가르침을 세우기 위해 반야경, 금강경의 가르침이 나타나고 그로인해 부처님의 오롯한 정법이 다시금 새롭게 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해오신 이 가르침을 얻어 듣고 그 가르침을 믿는 마음이 청정해 진다면 그 사람은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며, 이 사람은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 즉 사상을 비롯한 일체의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맑아지면 곧 실상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 상을 여의게 되면 좋다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일체 모든 시비 분별을 쉬게 된다. 시비 분별이 없다면 좋다고 더 집착하여 잡으려 할 것도 없고, 싫다고 미워하여 버리려 할 것도 없게 된다.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 잡으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한 적멸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것(시비분별)을 더 붙잡아(집착) 두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내 것’(아집)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원인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아상) 내가 있으니 ‘내 것’을 더 늘리고 싶고, ‘내 것’을 더 늘리려다 보니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착이 일체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그 모든 근본 원인이 된 ‘나’라는 ‘아상’만 여의게 된다면 일체 모든 괴로움은 소멸되고 만다. ‘나’라는 아상이 없어지면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고,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면 자연스레 ‘집착’도 사라지며, 모든 집착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어느 한 가지 상도 내세울 수 없는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상’을 깨달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상을 깨닫는다는 말은 따로이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상을 여의게 되면 일체 그 어떤 상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이름 붙여 실상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다시말해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이름을 방편으로 붙였을 뿐이지 실상이라는 상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표현에 어떤 모양을 짓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벌써 실상에서 벗어나 있다. 실상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실상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이 말은, 불성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불성일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내가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어떤 불성이라는 모양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성이라는 상을 어떻게 만들어 둘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성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는 그 어떤 답도 내려줄 수 없다. 불성은 허공과 같다거나, 거울과 같다거나 억지로 방편으로 그렇게 표현은 해 줄 수 있겠지만 어찌 불성을 어떤 모양, 어떤 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불성이란 일체의 상을 여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 없는 자리가 바로 불성이며 실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떠한가. 실상을 깨달았을 때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도 방편일 뿐이다. 실상을 깨달아, 일체 모든 상을 여의었다면 공덕이라는 것도 방편의 말일 뿐이지, 별도로 공덕이 있을 리 없다. 일체의 상을 여읜 마당에 어찌 공덕이라는 또 다른 상이 붙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무량한 공덕이라거나 하지 않고, ‘희유한 공덕’이라고 했다. 공덕은 공덕인데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거나, 어떤 보상이나 대가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억만장자가 되는 보상이 따른다거나, 능력과 외모, 성격 등이 출중해 진다거나 하는 그런 공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을 여의어 실상이 밝게 드러나면 그 어떤 공덕도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방편을 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냥 여여부동하며 성성적적하여 어떤 한 법도 일으킬 것이 없어지고, 어떤 한 말 조차 붙일 틈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텅 비어 충만할 뿐이다. 그렇기에 공덕이라는 말의 표현을 빌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희유한 공덕’이다. 아무런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아무런 비교나 판단이나 집착이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와 너를 나눌 것도 없고, 잘살고 못산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아름답고 추하다거나, 좋고 나쁘다거나, 행복하고 불행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모든 분별상들을 다 비워버렸기 때문에 둘 중 어떤 한 가지 좋은 쪽을 택해 많이 얻게 되는 그런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좋고 나쁜, 양 극단을 초월한 절대의 평화만이 있음도 없이 있을 뿐인 것이다. 좋다거나, 잘났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그런 상대를 가진 좋은 쪽의 공덕이 아닌 그러한 일체 모든 양 극단을 뛰어넘은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즉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희유한 좋음’이 있고, 긍정 부정 양 극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이 있으며, 공덕있음과 공덕 없음을 뛰어넘는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때라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듣고 지닐 수 있겠지만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같은 경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서도 아라한이 되지 못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거늘 어찌 오는 세상 미래세에 이러한 희유한 가르침을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하는 것도 희유할진데 미래세에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일 것인가.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렇더라도 물론 올바로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희유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만을 인연지은 것이 아니라 수 억겁동안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지으며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여 실천한 까닭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 하는 희유한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사람에게 아상은 더 이상 아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 또한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에 있어 깨달음이란 오직 ‘상을 여의는 것’이며, 부처님이라는 것은 오직 ‘상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멸(寂滅)이란 이상(離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이 경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이것이다. 오직 상을 떠나는 것, 오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요 깨우침이다.

일상 속에서 우린 얼마나 상에 얽매여 살고 있는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다만 인연따라 거짓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보고, 또한 눈귀코혀몸뜻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얼마나 고집하며 얽매여 살고 있는가. 상을 떠난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를 가를 것도 없으며, 인간과 자연을, 신과 인간을, 인간과 우주를 나눌 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나’라는 상을 짓고, ‘너’라는 상을 지으며, ‘우주’라는, ‘자연’이라는, ‘신’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나와 너를 갈라놓고 내가 너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려고,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왜 부와 가난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높고 낮음을 만들어 놓았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가.

꽃은 꽃대로 완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공기는 공기대로 저마다 온전한 진리의 인연 따른 나툼임을 모르고, 그들을 갈라 놓고 등수를 매기며, 좋고 나쁜 것을 골라내야만 하는가. 사람 또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대로 저마다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나툼이 있건만 스스로 너와 나를 비교하고 분별하며, 비교 우위와 비교 열등에 목숨 걸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가.
그래놓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상에 스스로 얽매여, 좋다거니 싫다거니 개념을 붙여 놓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개념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개념에 빠져 좋은 것은 더 못 가져서 안달하고, 싫은 것은 떼어내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왜 계속해서 하고만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오직 ‘상을 여의었을 때’ 끝난다. 상을 여의었을 때 실상이 드러난다. 상을 여읜 것이 바로 적멸이며,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르침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고 익혀왔던 세상의 가르침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배워 익히며, 보다 ‘내 것’을 많이 쌓는 것에서 찾아 왔다. ‘나’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내 것’을 많이 채우는 것이야말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며 삶의 의미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를 드러내고자 돈을 벌고, 명예를 높이며, 학벌과 재력과 권력을 쌓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는 이름 석자를 더 많이 알릴 수 있고, 나는 더 유명해질 수 있으며, 나는 더 높아질 수 있고, 결국 그러한 ‘나’라는 아상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 행복의 조건이고, 진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여겨왔다.
그렇게 아상을 높이려는 내 삶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잠시 쉴 새도 없이 달려오기만 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만 쉬는 것 같아 도무지 쉴 수가 없다. 쉬다보면 남보다 뒤쳐질 것 같고, 남보도 더 적게 소유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뒤쳐진 사람이 될 것이며, 더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나는 늘 바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늘 바쁘고, 남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숨도 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내 삶의 전부를 걸고 달려왔던 이 길, 이 길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 길. 지금 이 길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가르침과 만난 것이다. [금강경]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길은 참된 진리가 아니며,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다’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한 소유도 실제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내 사상, 견해, 생각에 대한 것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가지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소유의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는 마당에 ‘내 것’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양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올바로 볼 수 있을 때 여래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왔던, 내 삶의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달려왔던 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고 까무라칠 일인가. 언뜻 들어보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고, 놀랄만한 일이며, 겁나는 일인가. 지금 금강경의 이 가르침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나’라는 상을 높이려고 살아왔던 나의 삶 자체를 모두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으니 다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일체를 다 놓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다 비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런 말인가. 그동안 쌓고 쌓느라 얼마나 많은 생을 소비해 왔는데,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제와서 다 놓아버리라니, 다 비워버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놀라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와서 다 비워버리라니, 다 허망한 것이라니 얼마나 억울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니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 인연을 지으며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고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한 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는 것 만으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구마라집은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최승바라밀(最勝波羅蜜)이라 번역을 했다. 일반적으로 제일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구마라집 번역의 제일바라밀이 첫 번째 바라밀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번역하신 각묵스님은 이것이 구마라집 번역의 한문 해석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은 최승바라밀은 다름 아닌 반야바라밀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으며[如來說最勝波羅蜜多 謂般若波羅蜜多], 각묵스님은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초기부터 세존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전해 받은 이 경이야말로 최고의 바라밀,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이라는 말로 이해한다’고 함으로써 제일바라밀을 ‘최고의 바라밀’ 즉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상을 깨는’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다. 즉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약견제상비상]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 즉 지혜로써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궁극의 깨달음을 설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니 각묵스님의 최고의 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현장스님의 반야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또한 구마라집 번역의 보시바라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로 보자면 동일 선 상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금강경에서는 상을 타파하는 것이 주된 가르침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설법의 대상이 주로 보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주된 서원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그 중에서도 하화중생의 관점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는 보시를 예를 들어 상을 타파할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자 원을 세워 실천하지만, 보살에게 ‘내가 중생을 교화한다’거나, ‘내가 중생에게 가르침으로써 베풀고 있다’ ‘나는 법보시를 행하고 있다’는 등의 ‘내가 보시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상’의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문장의 제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최고의 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혹 보시바라밀이라 해석하더라도 큰 금강경의 문맥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경전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다’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제일바라밀이라는 것, 혹은 최상의 바라밀, 반야바라밀,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으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반야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에도, 육바라밀에도, 나아가 부처님의 그 어떤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지만 그 모든 가르침을 집착함이 없이 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또 제일바라밀에 이어 또 하나의 비유로써 인욕바라밀을 들고 계신다.

인욕(忍辱)이란 어떤 괴로움이라도 잘 참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억지로 참는다거나,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고 쌓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된 인욕이란 참되 참는다는 생각마저도 다 소멸된 참음이다. 참는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나’라는 아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참음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체의 상 또한 모두 소멸된 가운데 참는 것을 말한다.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라고 했다. 인욕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인욕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욕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내가 인욕바라밀을 행한다’는 상이 없다. 그러한 수행자에게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때, 고요한 숲 속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의 왕인 가리왕(歌利王)이 사냥을 나와 있었다. 가리왕이 산 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잠을 자고 깨어 보니 함께 온 시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함께 온 시녀들은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는 그 모습이 너무나 청정하고 고귀해 보여 친견하고 예를 올리고 있던 차였다. 이 광경을 본 가리왕은 질투심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말하기를, “어찌 방자하게 남의 여색을 탐하는가” 라고 하니, 선인은 답하기를 “나는 여색을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얼마나 인욕을 잘 하는가 두고보자’ 싶은 마음에 인욕선인의 코를 베고, 팔을 베고, 다리를 베면서 사지를 갈기갈기 잘라 놓고는 “네놈이 이래도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생각 없이 참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인욕선인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화를 내거나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인욕 선인은 육신이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이 베이고 잘림을 당하였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억지로 참아 가슴 속에 화를 담아 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화를 낼 ‘나’가 없으며, 원망할 ‘나’가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의 인욕선인으로 사지를 찢기고 베일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지만, 부처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신이란 다만 인연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밥과 반찬이 내 앞에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인연에 따라 밥과 반찬이 인연따라 내가 된 것일 뿐이다. 밥과 반찬이 나로써 윤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대소변으로 빠져 나가거나, 땀으로 빠져 나갔다면 그것은 다시금 인연따라 대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인연따라 잠시 우리 몸으로도 변했다가, 흙으로도 변했다가, 나무로도 변하고, 꽃으로도 변하는 것일 뿐, 어느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과 하나가 있을 때 그것을 칼로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내가 먹고 사과가 우리 몸의 살로 변했다고 치자. 그랬을 때 칼로 살을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고 원망할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 몸이 ‘내 것’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만 사과가 변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먹은 것이 내 몸으로 잠시 변화하여 인연따라 나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내 몸을 칼로 그었을 때 괴롭거나 화를 내려거든, 사과를 칼로 자르거나, 나무를 칼로 자를 때도 똑같이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인욕선인 뿐이겠는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금강경을 번역하신 구마라집의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승조스님은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 승조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마시오"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하니 다음과 같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四大元無主)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五陰本來空)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將頭臨白刀)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 이 금강경 가르침이야말로 감히 범인으로써는 범접하기 어려운 광대한 기상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가.

이처럼 세상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변화시킬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내가 죽어 다음 생에 개나 돼지로 태어났다고 치자. 그러면 이번 생의 내가 나인가, 다음 생의 개나 돼지가 나인가. 또 그 다음 생에는 천상에도 태어날 것이고, 또 그 다음 생에는 지옥으로도 태어날 것이며, 어떤 생에는 여자 몸을 받았다가 또 어떤 생에는 남자 몸을 받게 될 것인데, 어느 한 때를 콕 찝어 ‘나’라고 고정지어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도 ‘나’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변화하기만 할 뿐.

이와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 선인이 되었을 때에도, 수없는 생을 윤회하고 육신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되 일체의 상을 떠나서 일으켜야 한다. 일체의 어떤 상에도 얽매임 없이,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보리심을 일으킨다. 수많은 이들이 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위없는 대 보리를 증득하고자 수행하고 정진하며 또 보시하고 있다. 지혜와 복덕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상에 머무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긴 하는데, 거기에 또 ‘나’를 내세우게 된다. ‘내가 깨닫겠다’ ‘내가 보리를 이루겠다’ 하는 아상에 머물러 깨달음을 추고하곤 한다. ‘내가 깨달아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행복을 이루겠다’거나, ‘내가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거나 하는 등 깨닫고자 하는 주체를 ‘나’라는 상에 꽁꽁 묶어 두곤 한다.

혹은 부처라는 상을 만들어 두고, 진리라는 모양을 만들어 두고, 내가 깨달아 가야 할 이상향을 마음 속에 설정하여 모양을 만들어 두고는 그 길로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없다. 그런 부처는 없다. 어떤 모양을 가진 진리, 어떤 상을 가진 부처는 없다. 모양을 짓고, 개념을 붙이며, 생각하는 그 속에는 결코 진리도, 부처도 있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상에 머물러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되, 그 어떤 상에 머물러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참된 구도자의 길이 아니다. 수행자는 일체 모든 상을 다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상도, 부처라는 상도, 진리라는 상도, 참나라거나, 불성이라거나, 주인공, 진아, 본래자성, 본래불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일지라도 그것이 다 방편인 줄 알아야지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색성향미촉법이란 다시말해 우리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고 했다. 다시말해 ‘나’라는 주관이 접촉하여 만날 수 있는 일체의 외계 대상을 말한다. 바로 이 육근과 육경의 가르침은 근본불교에서부터 줄곧 중요한 생활 법문으로 이어져 온 중요한 가르침이기에 다시한번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마련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인 빛깔과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우리는 바깥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에 마음이 머물길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좋은 사람은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집착하면서 싫은 사람과는 떨어지지 못해 안달한다. 그렇게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것도 어떤가. 사람의 몸은 그저 똥주머니일 뿐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그야말로 이 몸이라는 것은 온갖 오물 같은 오장 육부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 놓은 똥주머니일 뿐이다. 좀 비위 상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몸 속의 모든 내장 기관들을 다 끄집어 내 보라. 그것이 어디 예쁘고 좋을 것이 있겠는가. 얼굴이 예쁘다는 것도 눈코입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살짝 옆으로 옮겨 달렸더라면 못난 얼굴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 몸뚱이라는 것, 외모라는 것도 다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몸을 받을 것일 뿐이다.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에 따라 이 똥주머니의 생김새도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몸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100년도 못 살다가 대지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갈 육신이거늘 어디에 집착해 내 것이라고 단정 짓고 소유할 수 있겠는가.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 칭찬이나 비난을 들을 때 울고 웃으면서 우리는 그 소리(聲)에 많이 휘둘린다. 칭찬을 들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들으면 싫어하기 때문에, 칭찬은 더 듣고 싶어 안달이고, 비난은 듣기 싫어 안달이다. 그러나 칭찬과 비난이라는 소리 또한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다만 소리일 뿐이지 않는가. 인연따라 잠시 칭찬도 들을 수 있고 비난도 들을 수 있는 일인 것이지, 칭찬을 들었다고 내가 정말 칭찬받을만한 실체적인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난을 들었다고 스스로가 비하되거나 못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말에,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린다는 것이 얼마나 짐승스러운가.

또한 냄새에, 맛에, 감촉에, 생각의 대상인 법에 우리는 늘 휘둘리면서 산다. 늘 그러한 육근의 대상에 이끌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그 중 좋은 데 탐심(貪心)을 내며 집착하고, 싫은 것에는 진심(嗔心)을 내며 미워하곤 한다.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이 본래 없다. 그 어떤 육근의 대상도, 그 어떤 색성향미촉법이란 대상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꿈처럼 나툴 뿐이다. 우리가 집착할 그 어떤 실체도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니 치심(癡心)이 들끓어 마음을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탐심, 진심, 치심이란 삼독심(三毒心) 생겨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본래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다. 바른 지혜만이 탐진치 삼독심을 끊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길이다. 일체의 상이 타파될 때 삼독심이 소멸하며 그 어떤 집착의 대상도 없게 된다. 그래야 자유롭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고 집착할 것 없이 자유롭게 휘적휘적 삶의 길을 내딛게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달마스님의 파상론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보자.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달마스님은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이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낸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힌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진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이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된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한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십이연기에서는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라는 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명색(名色)이란 색성향미촉법 육경(六境)을 말하며, 육입(六入)이란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말한다. 육입이 명색을 촉(觸)할 때 수(受)가 일어나고 수는 곧 애(愛)를 불러오며 애는 취(取)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촉이란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정을, 애는 애욕, 취는 집착을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 눈으로는 빛과 모양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감촉을, 뜻으로는 뜻의 대상인 법을 만날 때(촉) 좋고 싫은 느낌을 가져오고 그 느낌의 결과 애욕(애)을 일으키며 그것이 결국 집착(취), 취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즉 위에서 말한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이 육근 중 안근인 눈(육근)으로 예쁜 사람(육경)을 볼 때(촉) 좋은 느낌(수)이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이 생겨나고(애) 그 결과 그 사람에게 집착(취)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집착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이 이와같은 육근과 육입의 접촉으로 인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는 육근을 가지고 육경을 접촉하되,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이 있는 이상 육경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고 접촉하게 되면 느낌과 애욕,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십이연기의 중간 단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쉽고 실천적인 부분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수, 애, 취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만날 때 색에도 머물지 않고,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을 부처님께서는 정념(正念)에 두셨다. 즉 잘 관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깨어있는 마음으로써 잘 관찰함으로써 육경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눈이 대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할 때, 뜻으로 헤아릴 때 항시 육근과 육경을 또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그 접촉에서 오는 느낌을, 그 느낌에서 오는 애욕과 집착을 마음을 모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근본불교의 사념처(四念處)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곳을 잘 관하라고 하고 있다. 즉 육근이 머물러 있는 신념처, 즉 우리의 몸과 몸의 감각기관을 잘 관하라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 육근과 육경이 만날 때 일어나는 수념처, 즉 느낌, 감정을 잘 관하라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경계를 관하며, 넷째로 법에 대한 관찰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깨어있는 비춤으로 관하게 되었을 때, 색에도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인 육경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 육근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연이어 법문하고 계신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구마라집의 해석본에는 없지만 연이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에서는 법을 진리 혹은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 제법무아에서의 법은 존재를,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어떤 법이라도 마찬가지다. 제법무아에서 보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고 텅 비어 있는 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일체 그 어떤 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비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을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진리에도 진리가 아닌 것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마음이 머물 곳을 정해 두면 그것은 집착이고 상에 얽매이는 것일 뿐이다. 진리에도 머물면 안 되고, 부처에도 머물면 안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체 그 어떤 것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집착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 무집착에 있다. 금강경에서 상을 타파하라는 것도 상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며, 근본불교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의 삼법인을 설한 것이며, 사성제를 설한 것 또한 집착을 타파토록 하기 위함이다. 선불교에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 또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고,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 ‘마음을 비우라’는 것 또한 일체 모든 애착과 집착을 비우라는 말인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자유롭다. 집착이 없으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도 사라지며, 내것과 네것을 나누는 분별도 사라진다. 집착이 없으면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상이 생겨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집착 없음에 있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이 아니다. 본래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고, 머물 주체가 없으며, 머물 곳이 없거늘,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머물러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집착할만 한 것도 없다. 집착이라는 것 또한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꿈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실은 꿈을 깨고 보면 집착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상으로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꿈 속에서 집착하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그 꿈 속에서는 죽을 것 같고 아파 미치겠지만 꿈을 깨고 보면 그것이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집착했지만 사실은 집착이 아닌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은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고 그 연극 속에서 필요한 모든 마음을 다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일 뿐 실제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지만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집착 없이 집착하고 집착 없이 사랑하며, 집착 없이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뿐이다.
사실은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집착 없이 살고 있다.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머무름 없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선지식 큰스님들께서는 깨닫고 보니 깨달을 것이 없고, 닦을 것이 없으며, 집착을 버릴 것도 없고, 무언가 끊어낼 번뇌가 없다고 하셨다. 이미 다 이룬 부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노병사에 얽매여 고통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 처럼 환상이고 꿈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보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이룰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 자체로써 이미 다 이룬 부처이며,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입장에서 본다면,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고, 무언가를 구할 것도 없으며, 수행해서 진리를 깨닫겠다는 것도 다 허망한 말일 뿐이다. 깨닫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그 자체가 벌써 어긋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였으며, 본래 다 깨달아 있던 것이다. 본래부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고 있었으며, 집착 없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머무름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보시도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살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할 수 있겠는가.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며,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하화중생하지만, 스스로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다. 스스로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다는데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이 몸(색)에 집착하여 이 몸을 더 편히 하겠다는 생각이라거나, 이 몸이 깨달음을 이루자거나, 내가 널리 보시하여 일체 중생을 구함으로써 큰 복덕을 누리자거나 하는 그런 색에 머무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 ‘나’에 집착하고, 육신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일체 육근의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다 좋은 소리를 듣겠다거나, 보다 좋은 향기와 맛과 감촉이나 법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 스스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시하겠다는 상이 없다. 나와 너라는 상대 개념이 없으며, 좋고 싫다는 분별도 없고,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생각 또한 텅 비어 공적할 뿐이다.
보살은 어떤 한 생각도 일지 않는다. 무심(無心)일 뿐이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하거나, 마음으로 깨닫고자 하거나,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닦을 마음도 없으며, 깨달을 마음 또한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보살의 광대무변하고 원만한 일체 중생을 향한 무분별의 보시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상을 타파하라고 했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일체 모든 상이 개시허망이므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것도 없다. 타파할 상이 없다.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공연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가운데, 중생들이 홀연히 꿈처럼 망상을 일으켜 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상 또한 상이 아니다. 상이라고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지 그것은 상이 아니다. 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그 상에 빠지고 걸리며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울고 웃고 해 왔지만 여전히 상은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된 적도 없다.

다만 저 혼자서 상을 만들고 깨고 그러면서 상을 만들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상을 깨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을 깨버린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이름 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공일 뿐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중생도 마음도 부처도 이 셋은 서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중생이 마음을 닦는 과정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중생이고 무엇이 마음이며 무엇이 수행이고 무엇이 부처인가. 다 꿈 속의 일일 뿐이다. 다 신기루이고 물거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다.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설하신 상이라는 것, 중생이라는 것은 다만 방편일 뿐이다. 홀연히 상을 만들어 내, 그 상에 갖히고 집착해 있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하여 얽매이니까 ‘그게 아니다. 상이 상이 아니다. 무릇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부처를 볼 것이다.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오리무중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이 그렇게 많고 두터우며 지중하다. 온갖 망상과 번뇌가 하늘을 찌르며 수미산을 덮는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금새 신심을 일으키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는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가 또 상도 상이 아니라고 하시고,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가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라고 하시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쯤 되니 번뇌가 깊고, 두터운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의심이 든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든다. 도대체 저 말이 참말이란 말인가. 실다운 말이며 여법한 말인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왜 저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서 서로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온갖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고 말씀하신다.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는 이다. 거짓된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실없이 이유없이 말씀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신다. 온갖 다량한 상에 얽매여 있는 복잡 다단한 중생들에게 얽매여 있는 다양한 상을 깨뜨려 주기 위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실 뿐이다. 그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여법하다. 법에 합당하며, 진리로 이끄는 말씀만을 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거짓된 말일 수가 없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이 필요했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살이 스스로 하화중생을 하며 중생을 구제하면서 아주 작게나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내고 있음을 보시고, 그에 응해 상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며, 보시한다는 마음을 일으킴도 없이 보시해야 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금강경의 설법을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인다. 이 말씀을 했다가 갑자기 저 말씀을 하는 듯 보이고, 이 설법을 하시다가 왜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시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근기에 맞춰, 온갖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때 그때 필요한, 그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근기, 상황과 일어난 온갖 생각들을 비추어 보시고 그에 합당한 여법한 법문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을 모아 금강경에 집중하여 공부해 보면 위없는 부처님의 지혜에 그만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설법을 하고 나면 이 즈음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에 치우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옭고 그르다거나, 좋고 싫다거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등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어찌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있는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좋거나 싫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그 어떤 모습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있지 않다. 정답일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분별하고 시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말씀도 어느 쪽이 맞느냐 하고 둘 중 하나를 골라 그 하나를 불법이라고 못박으라고 독촉하곤 한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라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생이면 생이고 멸이면 멸이지, 또 불생이면 불생이고 불멸이면 불멸이지 불생불멸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든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 해 놓으면 어찌할 것은가. 그 사람은 그 옳다고 배운 한 쪽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옳다고 느끼며 상대는 틀리다고 몰아붙일 것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느끼기 때문에, 상대와 다툴 일이 생기고 싸울 일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나 또한 괴롭다. 어느 한 쪽에 고집함은 결국 고통을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애써 둘을 서로 나누어 놓고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려고 애쓰는가.

왜 불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 불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가. 불교만이 진리고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틀에 빠지면 타종교 신자와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나는 고통당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부처님의 이런 열린 가르침이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당연스레 받아들여지다 보니 불법으로인해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종교는 그 종교만이 진리라는데 치우치다보니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종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 옳고 그른 것을 가져오고 그러한 시비는 다툼과 전쟁을 불러오며, 그로인해 우리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으로 아파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는가. 인류의 전쟁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내 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참된 종교도 참된 진리도 될 수 없다. 참된 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전쟁을 부르고, 살상을 부를 뿐이다. 이제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정견의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불교는 그런 종교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종교.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는 종교.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종교이다. 진리에도, 법에도, 부처에도,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갈 수 있고, 그 어떤 종교와도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어떤 진리의 모습들도 다 감싸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혹 외도들과도 마땅히 대자비심이 바탕이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함이다. 불법의 치우침 없는 진리성을 대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하고 있다. ‘여래가 얻은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걸림 없는 대자유의 설법인가. 도무지 이런 말은 진리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금강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분별, 시비하는 습관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기울고 말 것이다. ‘역시 금강경의 가르침은 참된 것이구나’ ‘이 진리야말로 실다운 것이구나’ 하고 감동하거나, 혹 또다른 사람은 ‘도무지 금강경은 알 수가 없구나’ ‘실다운 것이 아닌 헛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일체 모든 상도 상이 아니라 하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니 ‘불법은 다 허망한 것이구나’ ‘불법이란 다 헛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두 가지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실답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헛되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의 가르침, 불법을 실답다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실답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불법이 실답다는 그 견해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곧 옳다는 편견을 불러오고, 그것은 집착을, 또한 그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헛되다는 치우친 생각 또한 그르다는 편견을 불러옴으로써 그릇되다는 집착과 편견으로 인해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치우친 견해일 뿐이고, 고통을 불러오게 될 뿐이다.

또한 선악(善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선악을 나누어 놓고 선은 좋은 것이니까 취해도 좋고 악은 나쁜 것이니까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본질에서 본다면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고 악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게 된다는 그 끝은 변함이 없다. 선에도 머물지 말고 악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어야 선악을 초월해 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실답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 것이며, 헛되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을 통해 끊임없이 보살의 보시에 대한 상을 놓아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승의 보살은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제 보살에게는 그 어떤 번뇌도 그 어떤 괴로움도 거의 다 사라졌다. 업(業)이 거의 다 소멸되었다. 그렇기에 보살은 업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원(願)에 의해 태어난다. 업생이 아닌 원생이다. 깨달음에 들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하화중생의 원이 모든 보살을 보살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는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아니 거의 깨달음의 입구까지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필요가 없다. 언제든지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일체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대비중생의 원력만이 보살을 지금 이 중생계에 묶어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살에게는 오직 하나의 서원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 ‘일체중생에게 보시하겠다’는 한 가지 서원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 또한 일종의 욕심이다. 그러나 그 욕심은 중생들의 욕심처럼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일체 중생을 향한 이타의 승화된 욕심이다. 승화된 욕심이지만 여전히 중생계에 남는 이유가 되는 욕심이다. 여전히 부처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지 다시금 중생계로 떨어질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금 시비 분별의 세계에 물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보살들의 이타적인 서원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바뀌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 전체에 걸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어떤 법에도 머물러 보시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을 위해 보시하면서도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다. 한 두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부모님께서 어린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타이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이야기 하듯 부처님께서도 보살에게 똑같은 법을 계속해서 설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순간 어두워질 것이다.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소멸하고 곧장 어두운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해 교화하고 보시하지만 자칫 보시한다는 한 생각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보살은 곧장 어두워질 것이다. 곧장 무명, 치심(癡心)에 물들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염려하고 계신다.
그러나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그 밝음은 유지될 것이다. 그 광명은 한없이 중생계에 빛을 놓을 것이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 세상에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다. 부처님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당체인 법신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법을 향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법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우리 마음 안의 진리를 다 알고 다 보시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 사람은 스스로 공덕을 성취한다는 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더라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외운다면 그 사람에게는 공덕이 없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그 많은 절을 짓고 불전에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어떤 공덕도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스스로 절을 짓고 보시했다는 상에 얽매이고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어떤 공덕도 없다. 그러나 일체 모든 공덕을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것이 다 잡힌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깨달음은 오며, 갖고자 하는 일체 모든 소유욕을 포기할 때 일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비우고 놓아버릴 때, 완전한 나, 전체의 나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법상



[문경 김용사]

분별하지 않으며
묵묵히 비추어 보십시요.

우리는 순간 순간
끊임없이 경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마주하는 것이지요.

경계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분별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100가지 경계를 만나면 100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분별을 일으킬 때는
우선 앞선 나의 기억이나, 경험, 업식들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진 뒤에
지금 이 경계와 유사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게 되고,
그 색안경 같은 업식의 거울로
지금의 경계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안근)으로 장미꽃을 보면서(색경)
옛 애인에게 주었던 100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면
장미꽃 또한 기분 좋은 분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서글퍼 진다거나,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우리 마음 속에서는 충분히 그 사람을 분
별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둘째 문제이지
그 사람의 본래 바탕에는 우선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는 내 안에서 분별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식이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면
어찌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풍경을
처음 행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짓는 이유는 업 때문인 것이지요.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설법을 하십니다.
그 스님은 한 분이고 한 가지 설법을 하셨을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분의 스님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 분이 아니라 듣는 사람 수 만큼의 스님이 되어 버립니다.

설법을 잘한다, 못한다,
말투는 어떻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쉽고 어렵고,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고,
내 안에서 업식이 비춰주는 한 끊임없는 분별이 이어집니다.

스님의 똑같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저도 모르게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연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꼭 이런 저런 한마디를 거들고 끼어들어야 하고,
사소한 몸짓 하나, 몸매 하나를 보고도
꼭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나무라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
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를 못하는 거지요.
TV를 보고 있지만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은
결코 비추어 보지 못하고
매냥 남의 모습, 남의 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인 줄 잘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득이 없음을 알고 있더라도
경계를 만나면 또다시 금새 궁시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업식인 것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작은 경계를 만나더라도
업식에 비추어
입으로 몸으로 아니면 생각으로
끊임없이 분별과 그에 따른 행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의 병통입니다.
이 분별이 바로 모든 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업에 비추어 모든 분별을 일으키고,
또 그 분별은 또다른 업의 씨앗이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독한 윤회의 수레바퀴 아니겠습니까.

수행이란
바로 이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업의 그림자인
안에서 올라오는 경계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경계를
그 자리에서 녹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와 맞닿은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별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보고
싫다거나 좋다는 분별이 일어날 때,
바로 그 분별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답답하다, 버겁다 하는 분별이 일어날 때
그 분별을 즉한 순간 비추어 보고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 때(눈)
또 무엇을 들었을 때(귀),
무슨 냄새를 맡았을 때(코),
무슨 음식을 먹고 맛을 볼 때(혀),
무슨 대상을 감촉하여 부딪기고 느낄 때(몸),
어떤 생각이 올라올 때(뜻),
그 여섯가지 경계와 맞닫는 순간
분명 분별은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올라오는 분별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별이 올라올 때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대상을 보고 좋게 분별하여 집착과 애욕을 만들어 내고,
싫은 대상을 보고 싫게 분별하여 미움과 증오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선업과 악업의 씨앗이 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또다른 업을 짓게 되어
괴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바로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비추어 보면 그대로 비워집니다.
관조(觀照)가 깊어지면 저절로 방하착이 됩니다.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란
분별을 여의는 일입니다.
분별을 여의기 위해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세요.
그냥 담담해 지고 여여해 지세요.
이렇다 저렇다 취사 선택하지 말고,
잘잘못을 따지려 들지 마세요.
한 티끌도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업이 있는 이상
저절로 분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 관하라는 것이지요.

분별이 없으려며는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다 인정하고 수용하며 섭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어있게 되고,
분별이 잦아들게 되어
어느 순간 무념(無念) 무심(無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지금 분별 녹이는 연습을 자꾸 하고,
지금 관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그것이 성불인연 짓는 것이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성불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도 그냥 놓아버리세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아무 필요도 없고
또 그런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비추어 보는 그 순간이
그대로 본래자리 자성부처님의 현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무량수 무량광 부처 마음을 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부처이며,
부처 마음으로 법계를 호령하며 산다는 것이,
이 꽉 찬 우주 법계를 자유롭게 꺼내 쓰고
자유자재 하게 굴리며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하여
언젠가는 깨닫겠다, 부처 되겠다 그러면
공부 못합니다.

공부는 지금 이 순간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지금 이 순간의 일입니다.

다시한번 말하건데
애쓰지 마세요.
깨달으려 애쓰지 말고
성불하려 노력하지 마세요.

묵묵히 비추어 보고
온갖 분별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자성불 본래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