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14분 이상적멸분 강의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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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14분 이상적멸분 강의

목탁 소리 2009. 9. 2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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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이상적멸분
상을 떠나면 적멸이다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 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 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 希有功德 世尊 是 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我今 得聞 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佛告 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 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 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時 若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 過去於 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 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提 如來 是 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思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此法 無實無虛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有目 日光 明照 見 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멸은 말 그대로 상을 떠난 바로 그 자리가 적멸의 자리라는 뜻이다. 상을 깨는 것이 적멸 즉 실상이며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이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이 무량하며 그 방편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쉽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상을 깨라’는 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편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상을 여읨으로써 깨달음 즉 적멸에 이르는 방편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분에서는 지금까지 13분까지 이어오며 설해 왔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정리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멸분으로써 그동안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를 해 오던 분들 가운데는 여기 이렇게 수보리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보리 뿐이 아니다. 누구든 어둡고 막연했던 삶에 대해 어리석었다가 밝은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나면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맑은 신심을 일으켜 이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물을 흘려 보았을 것이다.
보통 눈물이라는 것이 슬플때나 기쁠 때 나오기도 하지만, 진리의 감동에 젖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다. 그동안 온통 상에 물들어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분별 판단 시비하여 걸러 보았다 보니 우리 마음에 온갖 때가 끼고 녹이 슬어 좀처럼 상 이전의 맑고 순수한 본래심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어리석게 살다가 상을 여읜 진리의 자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난다면 누구든 상 이전의 본래 자리에서부터 감로가 샘솟듯 온몸의 감동이 눈물로써 나오곤 하는 법이다.

또한 법문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모든 상이 잠시 떨어져 나가고 고요해 지면서 온통 상으로 둘려 쌓였던 탁한 마음이 잠시 적적한 세계를 맛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온 존재로써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감동은 눈물로써 표현되곤 한다.
그런 눈물은 애써 감출 것이 아니다. 법문을 들을 때건, 수행을 할 때건, 내면의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때는 오직 그 눈물에 내 온 존재를 맡겨라.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도 없고, 눈물을 억지로 닦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몸과 마음의 떨림과 흐르는 눈물과 하나가 되어 함께 흐르라. 눈물이 스스로 멈출 때 까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 보려는 의도를 버리고 그저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그 눈물은 눈이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에 따라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플 때, 혹은 너무 기쁜 일이 있을 때, 그런 온갖 종류의 인연이 내게 다가올 때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 따라 흘리는 눈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 인연이 다하고 나면 눈물도 메말라 버린다. 기쁜 일이 가고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눈물은 멎는다.
그러나 진리의 눈물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며, 진리가 온 존재로써 일치되어지는 작은 경험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업장(業障)이 소멸되는 눈물이며, 진리의 발견에 대한 귀의(歸依)의 눈물이고, 본래의 존재로 회귀하려는 귀향(歸鄕)의 눈물이다.

그렇다고 그 눈물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라. 흐르는 눈물에 또 다른 의미를 덮씌우거나 붙잡고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어리석은 상을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선명함과 가볍고 적멸한 느낌을 애써 반복하여 경험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려라.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맑은 느낌도 스스로 맑다느니, 업장 소멸의 느낌이라느니 하고 분별을 붙이고 나면 되려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말고, 스스로 대견하다고 느끼지도 말고, 좋아하면서 붙잡고자 하지도 말고,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지도 말고, 다만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라. 다만 그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또한 왜 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일까, 왜 난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왜 난 수행 중에 온갖 경계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분별 또한 턱 놓아버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수행을 조금만 해도 금새 삼매에 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기도를 해도 금새 눈물이 흘러 나오며 깊은 감동을 느낀다는데, 나는 아무리 기도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눈물은 커녕 그 어떤 감각적인 느낌도 없고, 환희심도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수행 중에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눈물을 탓하지 말라. 눈물을 많이 흘리고, 정진 속에서 부처님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놓아버릴 뿐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마장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 법문을 듣고 나니 수보리의 온 존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법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를 들었다는 그 사실이 수보리의 온 존재를 강렬한 눈물로써 휘감고 있다. 어떠한가. 당신의 존재에서도 눈물이 흐르는가. 앞의 13장 동안에 정진해 왔던 금강경의 가르침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온갖 상에 얽매여 맑은 눈이 가려져 버렸다. 본래의 텅 빈 시선에 온갖 어둡고 탁한 것들이 잔뜩 끼어 버렸다. 수보리는 그동안 얻어 들었던 가르침으로 인해 지혜의 눈이 열렸지만, 수보리의 혜안으로 보더라도 지금의 이 가르침은 희유하고 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리의 가르침을 만나거든 수보리와 같이 찬탄하고 또 찬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탄의 연주가 온 우주 법계에 까지 울려 퍼지게 하라. 찬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중요한 수행이 된다. 찬탄은 법계를 울리고, 또한 내 안의 본래 자성을 일깨운다. 찬탄의 소리는 그대로 진언이 되고, 다라니가 되어 안팎을 진리의 향기로 수놓을 것이다.
여기서 수보리가 지금까지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간 소승의 견해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만이 가장 수승하며 소승의 다른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곧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퇴락해 가는 기존 불교의 삿된 부분을 타파하고자 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소승불교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 즉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을 원하는 대중의 소망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점, 삿된 점을 파하고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대승이며, 대승의 기본이 되는 경전이 반야경인 것이다. 물론 이 금강경은 반야경 속의 작은 경전이며, 동시에 반야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소승불교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포함시켜 소승불교는 잘못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훌륭한 것이라거나 하는 분별도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많이 타락하고 퇴락해 갈 때 이러한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불교결사로써 정혜결사가 이루어 졌다고 해서 고려의 불교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과 같다.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부파불교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오던 부파의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타파하고 바른 가르침을 세우기 위해 반야경, 금강경의 가르침이 나타나고 그로인해 부처님의 오롯한 정법이 다시금 새롭게 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해오신 이 가르침을 얻어 듣고 그 가르침을 믿는 마음이 청정해 진다면 그 사람은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며, 이 사람은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 즉 사상을 비롯한 일체의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맑아지면 곧 실상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 상을 여의게 되면 좋다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일체 모든 시비 분별을 쉬게 된다. 시비 분별이 없다면 좋다고 더 집착하여 잡으려 할 것도 없고, 싫다고 미워하여 버리려 할 것도 없게 된다.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 잡으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한 적멸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것(시비분별)을 더 붙잡아(집착) 두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내 것’(아집)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원인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아상) 내가 있으니 ‘내 것’을 더 늘리고 싶고, ‘내 것’을 더 늘리려다 보니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착이 일체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그 모든 근본 원인이 된 ‘나’라는 ‘아상’만 여의게 된다면 일체 모든 괴로움은 소멸되고 만다. ‘나’라는 아상이 없어지면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고,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면 자연스레 ‘집착’도 사라지며, 모든 집착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어느 한 가지 상도 내세울 수 없는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상’을 깨달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상을 깨닫는다는 말은 따로이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상을 여의게 되면 일체 그 어떤 상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이름 붙여 실상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다시말해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이름을 방편으로 붙였을 뿐이지 실상이라는 상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표현에 어떤 모양을 짓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벌써 실상에서 벗어나 있다. 실상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실상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이 말은, 불성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불성일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내가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어떤 불성이라는 모양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성이라는 상을 어떻게 만들어 둘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성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는 그 어떤 답도 내려줄 수 없다. 불성은 허공과 같다거나, 거울과 같다거나 억지로 방편으로 그렇게 표현은 해 줄 수 있겠지만 어찌 불성을 어떤 모양, 어떤 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불성이란 일체의 상을 여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 없는 자리가 바로 불성이며 실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떠한가. 실상을 깨달았을 때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도 방편일 뿐이다. 실상을 깨달아, 일체 모든 상을 여의었다면 공덕이라는 것도 방편의 말일 뿐이지, 별도로 공덕이 있을 리 없다. 일체의 상을 여읜 마당에 어찌 공덕이라는 또 다른 상이 붙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무량한 공덕이라거나 하지 않고, ‘희유한 공덕’이라고 했다. 공덕은 공덕인데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거나, 어떤 보상이나 대가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억만장자가 되는 보상이 따른다거나, 능력과 외모, 성격 등이 출중해 진다거나 하는 그런 공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을 여의어 실상이 밝게 드러나면 그 어떤 공덕도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방편을 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냥 여여부동하며 성성적적하여 어떤 한 법도 일으킬 것이 없어지고, 어떤 한 말 조차 붙일 틈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텅 비어 충만할 뿐이다. 그렇기에 공덕이라는 말의 표현을 빌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희유한 공덕’이다. 아무런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아무런 비교나 판단이나 집착이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와 너를 나눌 것도 없고, 잘살고 못산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아름답고 추하다거나, 좋고 나쁘다거나, 행복하고 불행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모든 분별상들을 다 비워버렸기 때문에 둘 중 어떤 한 가지 좋은 쪽을 택해 많이 얻게 되는 그런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좋고 나쁜, 양 극단을 초월한 절대의 평화만이 있음도 없이 있을 뿐인 것이다. 좋다거나, 잘났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그런 상대를 가진 좋은 쪽의 공덕이 아닌 그러한 일체 모든 양 극단을 뛰어넘은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즉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희유한 좋음’이 있고, 긍정 부정 양 극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이 있으며, 공덕있음과 공덕 없음을 뛰어넘는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때라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듣고 지닐 수 있겠지만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같은 경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서도 아라한이 되지 못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거늘 어찌 오는 세상 미래세에 이러한 희유한 가르침을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하는 것도 희유할진데 미래세에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일 것인가.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렇더라도 물론 올바로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희유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만을 인연지은 것이 아니라 수 억겁동안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지으며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여 실천한 까닭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 하는 희유한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사람에게 아상은 더 이상 아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 또한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에 있어 깨달음이란 오직 ‘상을 여의는 것’이며, 부처님이라는 것은 오직 ‘상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멸(寂滅)이란 이상(離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이 경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이것이다. 오직 상을 떠나는 것, 오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요 깨우침이다.

일상 속에서 우린 얼마나 상에 얽매여 살고 있는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다만 인연따라 거짓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보고, 또한 눈귀코혀몸뜻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얼마나 고집하며 얽매여 살고 있는가. 상을 떠난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를 가를 것도 없으며, 인간과 자연을, 신과 인간을, 인간과 우주를 나눌 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나’라는 상을 짓고, ‘너’라는 상을 지으며, ‘우주’라는, ‘자연’이라는, ‘신’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나와 너를 갈라놓고 내가 너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려고,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왜 부와 가난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높고 낮음을 만들어 놓았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가.

꽃은 꽃대로 완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공기는 공기대로 저마다 온전한 진리의 인연 따른 나툼임을 모르고, 그들을 갈라 놓고 등수를 매기며, 좋고 나쁜 것을 골라내야만 하는가. 사람 또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대로 저마다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나툼이 있건만 스스로 너와 나를 비교하고 분별하며, 비교 우위와 비교 열등에 목숨 걸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가.
그래놓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상에 스스로 얽매여, 좋다거니 싫다거니 개념을 붙여 놓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개념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개념에 빠져 좋은 것은 더 못 가져서 안달하고, 싫은 것은 떼어내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왜 계속해서 하고만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오직 ‘상을 여의었을 때’ 끝난다. 상을 여의었을 때 실상이 드러난다. 상을 여읜 것이 바로 적멸이며,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르침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고 익혀왔던 세상의 가르침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배워 익히며, 보다 ‘내 것’을 많이 쌓는 것에서 찾아 왔다. ‘나’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내 것’을 많이 채우는 것이야말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며 삶의 의미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를 드러내고자 돈을 벌고, 명예를 높이며, 학벌과 재력과 권력을 쌓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는 이름 석자를 더 많이 알릴 수 있고, 나는 더 유명해질 수 있으며, 나는 더 높아질 수 있고, 결국 그러한 ‘나’라는 아상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 행복의 조건이고, 진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여겨왔다.
그렇게 아상을 높이려는 내 삶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잠시 쉴 새도 없이 달려오기만 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만 쉬는 것 같아 도무지 쉴 수가 없다. 쉬다보면 남보다 뒤쳐질 것 같고, 남보도 더 적게 소유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뒤쳐진 사람이 될 것이며, 더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나는 늘 바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늘 바쁘고, 남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숨도 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내 삶의 전부를 걸고 달려왔던 이 길, 이 길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 길. 지금 이 길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가르침과 만난 것이다. [금강경]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길은 참된 진리가 아니며,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다’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한 소유도 실제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내 사상, 견해, 생각에 대한 것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가지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소유의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는 마당에 ‘내 것’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양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올바로 볼 수 있을 때 여래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왔던, 내 삶의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달려왔던 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고 까무라칠 일인가. 언뜻 들어보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고, 놀랄만한 일이며, 겁나는 일인가. 지금 금강경의 이 가르침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나’라는 상을 높이려고 살아왔던 나의 삶 자체를 모두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으니 다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일체를 다 놓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다 비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런 말인가. 그동안 쌓고 쌓느라 얼마나 많은 생을 소비해 왔는데,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제와서 다 놓아버리라니, 다 비워버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놀라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와서 다 비워버리라니, 다 허망한 것이라니 얼마나 억울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니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 인연을 지으며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고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한 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는 것 만으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구마라집은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최승바라밀(最勝波羅蜜)이라 번역을 했다. 일반적으로 제일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구마라집 번역의 제일바라밀이 첫 번째 바라밀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번역하신 각묵스님은 이것이 구마라집 번역의 한문 해석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은 최승바라밀은 다름 아닌 반야바라밀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으며[如來說最勝波羅蜜多 謂般若波羅蜜多], 각묵스님은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초기부터 세존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전해 받은 이 경이야말로 최고의 바라밀,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이라는 말로 이해한다’고 함으로써 제일바라밀을 ‘최고의 바라밀’ 즉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상을 깨는’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다. 즉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약견제상비상]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 즉 지혜로써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궁극의 깨달음을 설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니 각묵스님의 최고의 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현장스님의 반야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또한 구마라집 번역의 보시바라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로 보자면 동일 선 상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금강경에서는 상을 타파하는 것이 주된 가르침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설법의 대상이 주로 보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주된 서원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그 중에서도 하화중생의 관점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는 보시를 예를 들어 상을 타파할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자 원을 세워 실천하지만, 보살에게 ‘내가 중생을 교화한다’거나, ‘내가 중생에게 가르침으로써 베풀고 있다’ ‘나는 법보시를 행하고 있다’는 등의 ‘내가 보시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상’의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문장의 제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최고의 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혹 보시바라밀이라 해석하더라도 큰 금강경의 문맥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경전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다’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제일바라밀이라는 것, 혹은 최상의 바라밀, 반야바라밀,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으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반야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에도, 육바라밀에도, 나아가 부처님의 그 어떤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지만 그 모든 가르침을 집착함이 없이 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또 제일바라밀에 이어 또 하나의 비유로써 인욕바라밀을 들고 계신다.

인욕(忍辱)이란 어떤 괴로움이라도 잘 참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억지로 참는다거나,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고 쌓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된 인욕이란 참되 참는다는 생각마저도 다 소멸된 참음이다. 참는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나’라는 아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참음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체의 상 또한 모두 소멸된 가운데 참는 것을 말한다.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라고 했다. 인욕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인욕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욕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내가 인욕바라밀을 행한다’는 상이 없다. 그러한 수행자에게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때, 고요한 숲 속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의 왕인 가리왕(歌利王)이 사냥을 나와 있었다. 가리왕이 산 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잠을 자고 깨어 보니 함께 온 시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함께 온 시녀들은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는 그 모습이 너무나 청정하고 고귀해 보여 친견하고 예를 올리고 있던 차였다. 이 광경을 본 가리왕은 질투심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말하기를, “어찌 방자하게 남의 여색을 탐하는가” 라고 하니, 선인은 답하기를 “나는 여색을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얼마나 인욕을 잘 하는가 두고보자’ 싶은 마음에 인욕선인의 코를 베고, 팔을 베고, 다리를 베면서 사지를 갈기갈기 잘라 놓고는 “네놈이 이래도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생각 없이 참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인욕선인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화를 내거나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인욕 선인은 육신이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이 베이고 잘림을 당하였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억지로 참아 가슴 속에 화를 담아 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화를 낼 ‘나’가 없으며, 원망할 ‘나’가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의 인욕선인으로 사지를 찢기고 베일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지만, 부처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신이란 다만 인연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밥과 반찬이 내 앞에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인연에 따라 밥과 반찬이 인연따라 내가 된 것일 뿐이다. 밥과 반찬이 나로써 윤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대소변으로 빠져 나가거나, 땀으로 빠져 나갔다면 그것은 다시금 인연따라 대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인연따라 잠시 우리 몸으로도 변했다가, 흙으로도 변했다가, 나무로도 변하고, 꽃으로도 변하는 것일 뿐, 어느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과 하나가 있을 때 그것을 칼로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내가 먹고 사과가 우리 몸의 살로 변했다고 치자. 그랬을 때 칼로 살을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고 원망할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 몸이 ‘내 것’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만 사과가 변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먹은 것이 내 몸으로 잠시 변화하여 인연따라 나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내 몸을 칼로 그었을 때 괴롭거나 화를 내려거든, 사과를 칼로 자르거나, 나무를 칼로 자를 때도 똑같이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인욕선인 뿐이겠는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금강경을 번역하신 구마라집의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승조스님은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 승조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마시오"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하니 다음과 같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四大元無主)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五陰本來空)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將頭臨白刀)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 이 금강경 가르침이야말로 감히 범인으로써는 범접하기 어려운 광대한 기상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가.

이처럼 세상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변화시킬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내가 죽어 다음 생에 개나 돼지로 태어났다고 치자. 그러면 이번 생의 내가 나인가, 다음 생의 개나 돼지가 나인가. 또 그 다음 생에는 천상에도 태어날 것이고, 또 그 다음 생에는 지옥으로도 태어날 것이며, 어떤 생에는 여자 몸을 받았다가 또 어떤 생에는 남자 몸을 받게 될 것인데, 어느 한 때를 콕 찝어 ‘나’라고 고정지어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도 ‘나’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변화하기만 할 뿐.

이와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 선인이 되었을 때에도, 수없는 생을 윤회하고 육신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되 일체의 상을 떠나서 일으켜야 한다. 일체의 어떤 상에도 얽매임 없이,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보리심을 일으킨다. 수많은 이들이 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위없는 대 보리를 증득하고자 수행하고 정진하며 또 보시하고 있다. 지혜와 복덕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상에 머무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긴 하는데, 거기에 또 ‘나’를 내세우게 된다. ‘내가 깨닫겠다’ ‘내가 보리를 이루겠다’ 하는 아상에 머물러 깨달음을 추고하곤 한다. ‘내가 깨달아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행복을 이루겠다’거나, ‘내가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거나 하는 등 깨닫고자 하는 주체를 ‘나’라는 상에 꽁꽁 묶어 두곤 한다.

혹은 부처라는 상을 만들어 두고, 진리라는 모양을 만들어 두고, 내가 깨달아 가야 할 이상향을 마음 속에 설정하여 모양을 만들어 두고는 그 길로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없다. 그런 부처는 없다. 어떤 모양을 가진 진리, 어떤 상을 가진 부처는 없다. 모양을 짓고, 개념을 붙이며, 생각하는 그 속에는 결코 진리도, 부처도 있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상에 머물러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되, 그 어떤 상에 머물러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참된 구도자의 길이 아니다. 수행자는 일체 모든 상을 다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상도, 부처라는 상도, 진리라는 상도, 참나라거나, 불성이라거나, 주인공, 진아, 본래자성, 본래불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일지라도 그것이 다 방편인 줄 알아야지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색성향미촉법이란 다시말해 우리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고 했다. 다시말해 ‘나’라는 주관이 접촉하여 만날 수 있는 일체의 외계 대상을 말한다. 바로 이 육근과 육경의 가르침은 근본불교에서부터 줄곧 중요한 생활 법문으로 이어져 온 중요한 가르침이기에 다시한번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마련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인 빛깔과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우리는 바깥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에 마음이 머물길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좋은 사람은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집착하면서 싫은 사람과는 떨어지지 못해 안달한다. 그렇게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것도 어떤가. 사람의 몸은 그저 똥주머니일 뿐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그야말로 이 몸이라는 것은 온갖 오물 같은 오장 육부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 놓은 똥주머니일 뿐이다. 좀 비위 상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몸 속의 모든 내장 기관들을 다 끄집어 내 보라. 그것이 어디 예쁘고 좋을 것이 있겠는가. 얼굴이 예쁘다는 것도 눈코입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살짝 옆으로 옮겨 달렸더라면 못난 얼굴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 몸뚱이라는 것, 외모라는 것도 다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몸을 받을 것일 뿐이다.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에 따라 이 똥주머니의 생김새도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몸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100년도 못 살다가 대지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갈 육신이거늘 어디에 집착해 내 것이라고 단정 짓고 소유할 수 있겠는가.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 칭찬이나 비난을 들을 때 울고 웃으면서 우리는 그 소리(聲)에 많이 휘둘린다. 칭찬을 들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들으면 싫어하기 때문에, 칭찬은 더 듣고 싶어 안달이고, 비난은 듣기 싫어 안달이다. 그러나 칭찬과 비난이라는 소리 또한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다만 소리일 뿐이지 않는가. 인연따라 잠시 칭찬도 들을 수 있고 비난도 들을 수 있는 일인 것이지, 칭찬을 들었다고 내가 정말 칭찬받을만한 실체적인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난을 들었다고 스스로가 비하되거나 못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말에,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린다는 것이 얼마나 짐승스러운가.

또한 냄새에, 맛에, 감촉에, 생각의 대상인 법에 우리는 늘 휘둘리면서 산다. 늘 그러한 육근의 대상에 이끌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그 중 좋은 데 탐심(貪心)을 내며 집착하고, 싫은 것에는 진심(嗔心)을 내며 미워하곤 한다.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이 본래 없다. 그 어떤 육근의 대상도, 그 어떤 색성향미촉법이란 대상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꿈처럼 나툴 뿐이다. 우리가 집착할 그 어떤 실체도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니 치심(癡心)이 들끓어 마음을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탐심, 진심, 치심이란 삼독심(三毒心) 생겨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본래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다. 바른 지혜만이 탐진치 삼독심을 끊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길이다. 일체의 상이 타파될 때 삼독심이 소멸하며 그 어떤 집착의 대상도 없게 된다. 그래야 자유롭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고 집착할 것 없이 자유롭게 휘적휘적 삶의 길을 내딛게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달마스님의 파상론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보자.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달마스님은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이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낸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힌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진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이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된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한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십이연기에서는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라는 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명색(名色)이란 색성향미촉법 육경(六境)을 말하며, 육입(六入)이란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말한다. 육입이 명색을 촉(觸)할 때 수(受)가 일어나고 수는 곧 애(愛)를 불러오며 애는 취(取)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촉이란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정을, 애는 애욕, 취는 집착을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 눈으로는 빛과 모양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감촉을, 뜻으로는 뜻의 대상인 법을 만날 때(촉) 좋고 싫은 느낌을 가져오고 그 느낌의 결과 애욕(애)을 일으키며 그것이 결국 집착(취), 취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즉 위에서 말한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이 육근 중 안근인 눈(육근)으로 예쁜 사람(육경)을 볼 때(촉) 좋은 느낌(수)이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이 생겨나고(애) 그 결과 그 사람에게 집착(취)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집착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이 이와같은 육근과 육입의 접촉으로 인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는 육근을 가지고 육경을 접촉하되,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이 있는 이상 육경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고 접촉하게 되면 느낌과 애욕,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십이연기의 중간 단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쉽고 실천적인 부분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수, 애, 취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만날 때 색에도 머물지 않고,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을 부처님께서는 정념(正念)에 두셨다. 즉 잘 관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깨어있는 마음으로써 잘 관찰함으로써 육경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눈이 대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할 때, 뜻으로 헤아릴 때 항시 육근과 육경을 또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그 접촉에서 오는 느낌을, 그 느낌에서 오는 애욕과 집착을 마음을 모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근본불교의 사념처(四念處)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곳을 잘 관하라고 하고 있다. 즉 육근이 머물러 있는 신념처, 즉 우리의 몸과 몸의 감각기관을 잘 관하라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 육근과 육경이 만날 때 일어나는 수념처, 즉 느낌, 감정을 잘 관하라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경계를 관하며, 넷째로 법에 대한 관찰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깨어있는 비춤으로 관하게 되었을 때, 색에도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인 육경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 육근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연이어 법문하고 계신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구마라집의 해석본에는 없지만 연이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에서는 법을 진리 혹은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 제법무아에서의 법은 존재를,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어떤 법이라도 마찬가지다. 제법무아에서 보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고 텅 비어 있는 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일체 그 어떤 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비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을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진리에도 진리가 아닌 것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마음이 머물 곳을 정해 두면 그것은 집착이고 상에 얽매이는 것일 뿐이다. 진리에도 머물면 안 되고, 부처에도 머물면 안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체 그 어떤 것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집착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 무집착에 있다. 금강경에서 상을 타파하라는 것도 상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며, 근본불교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의 삼법인을 설한 것이며, 사성제를 설한 것 또한 집착을 타파토록 하기 위함이다. 선불교에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 또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고,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 ‘마음을 비우라’는 것 또한 일체 모든 애착과 집착을 비우라는 말인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자유롭다. 집착이 없으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도 사라지며, 내것과 네것을 나누는 분별도 사라진다. 집착이 없으면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상이 생겨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집착 없음에 있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이 아니다. 본래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고, 머물 주체가 없으며, 머물 곳이 없거늘,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머물러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집착할만 한 것도 없다. 집착이라는 것 또한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꿈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실은 꿈을 깨고 보면 집착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상으로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꿈 속에서 집착하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그 꿈 속에서는 죽을 것 같고 아파 미치겠지만 꿈을 깨고 보면 그것이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집착했지만 사실은 집착이 아닌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은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고 그 연극 속에서 필요한 모든 마음을 다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일 뿐 실제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지만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집착 없이 집착하고 집착 없이 사랑하며, 집착 없이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뿐이다.
사실은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집착 없이 살고 있다.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머무름 없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선지식 큰스님들께서는 깨닫고 보니 깨달을 것이 없고, 닦을 것이 없으며, 집착을 버릴 것도 없고, 무언가 끊어낼 번뇌가 없다고 하셨다. 이미 다 이룬 부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노병사에 얽매여 고통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 처럼 환상이고 꿈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보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이룰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 자체로써 이미 다 이룬 부처이며,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입장에서 본다면,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고, 무언가를 구할 것도 없으며, 수행해서 진리를 깨닫겠다는 것도 다 허망한 말일 뿐이다. 깨닫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그 자체가 벌써 어긋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였으며, 본래 다 깨달아 있던 것이다. 본래부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고 있었으며, 집착 없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머무름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보시도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살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할 수 있겠는가.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며,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하화중생하지만, 스스로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다. 스스로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다는데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이 몸(색)에 집착하여 이 몸을 더 편히 하겠다는 생각이라거나, 이 몸이 깨달음을 이루자거나, 내가 널리 보시하여 일체 중생을 구함으로써 큰 복덕을 누리자거나 하는 그런 색에 머무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 ‘나’에 집착하고, 육신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일체 육근의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다 좋은 소리를 듣겠다거나, 보다 좋은 향기와 맛과 감촉이나 법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 스스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시하겠다는 상이 없다. 나와 너라는 상대 개념이 없으며, 좋고 싫다는 분별도 없고,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생각 또한 텅 비어 공적할 뿐이다.
보살은 어떤 한 생각도 일지 않는다. 무심(無心)일 뿐이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하거나, 마음으로 깨닫고자 하거나,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닦을 마음도 없으며, 깨달을 마음 또한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보살의 광대무변하고 원만한 일체 중생을 향한 무분별의 보시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상을 타파하라고 했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일체 모든 상이 개시허망이므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것도 없다. 타파할 상이 없다.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공연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가운데, 중생들이 홀연히 꿈처럼 망상을 일으켜 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상 또한 상이 아니다. 상이라고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지 그것은 상이 아니다. 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그 상에 빠지고 걸리며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울고 웃고 해 왔지만 여전히 상은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된 적도 없다.

다만 저 혼자서 상을 만들고 깨고 그러면서 상을 만들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상을 깨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을 깨버린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이름 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공일 뿐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중생도 마음도 부처도 이 셋은 서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중생이 마음을 닦는 과정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중생이고 무엇이 마음이며 무엇이 수행이고 무엇이 부처인가. 다 꿈 속의 일일 뿐이다. 다 신기루이고 물거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다.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설하신 상이라는 것, 중생이라는 것은 다만 방편일 뿐이다. 홀연히 상을 만들어 내, 그 상에 갖히고 집착해 있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하여 얽매이니까 ‘그게 아니다. 상이 상이 아니다. 무릇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부처를 볼 것이다.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오리무중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이 그렇게 많고 두터우며 지중하다. 온갖 망상과 번뇌가 하늘을 찌르며 수미산을 덮는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금새 신심을 일으키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는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가 또 상도 상이 아니라고 하시고,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가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라고 하시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쯤 되니 번뇌가 깊고, 두터운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의심이 든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든다. 도대체 저 말이 참말이란 말인가. 실다운 말이며 여법한 말인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왜 저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서 서로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온갖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고 말씀하신다.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는 이다. 거짓된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실없이 이유없이 말씀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신다. 온갖 다량한 상에 얽매여 있는 복잡 다단한 중생들에게 얽매여 있는 다양한 상을 깨뜨려 주기 위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실 뿐이다. 그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여법하다. 법에 합당하며, 진리로 이끄는 말씀만을 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거짓된 말일 수가 없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이 필요했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살이 스스로 하화중생을 하며 중생을 구제하면서 아주 작게나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내고 있음을 보시고, 그에 응해 상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며, 보시한다는 마음을 일으킴도 없이 보시해야 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금강경의 설법을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인다. 이 말씀을 했다가 갑자기 저 말씀을 하는 듯 보이고, 이 설법을 하시다가 왜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시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근기에 맞춰, 온갖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때 그때 필요한, 그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근기, 상황과 일어난 온갖 생각들을 비추어 보시고 그에 합당한 여법한 법문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을 모아 금강경에 집중하여 공부해 보면 위없는 부처님의 지혜에 그만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설법을 하고 나면 이 즈음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에 치우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옭고 그르다거나, 좋고 싫다거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등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어찌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있는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좋거나 싫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그 어떤 모습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있지 않다. 정답일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분별하고 시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말씀도 어느 쪽이 맞느냐 하고 둘 중 하나를 골라 그 하나를 불법이라고 못박으라고 독촉하곤 한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라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생이면 생이고 멸이면 멸이지, 또 불생이면 불생이고 불멸이면 불멸이지 불생불멸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든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 해 놓으면 어찌할 것은가. 그 사람은 그 옳다고 배운 한 쪽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옳다고 느끼며 상대는 틀리다고 몰아붙일 것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느끼기 때문에, 상대와 다툴 일이 생기고 싸울 일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나 또한 괴롭다. 어느 한 쪽에 고집함은 결국 고통을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애써 둘을 서로 나누어 놓고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려고 애쓰는가.

왜 불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 불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가. 불교만이 진리고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틀에 빠지면 타종교 신자와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나는 고통당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부처님의 이런 열린 가르침이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당연스레 받아들여지다 보니 불법으로인해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종교는 그 종교만이 진리라는데 치우치다보니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종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 옳고 그른 것을 가져오고 그러한 시비는 다툼과 전쟁을 불러오며, 그로인해 우리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으로 아파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는가. 인류의 전쟁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내 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참된 종교도 참된 진리도 될 수 없다. 참된 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전쟁을 부르고, 살상을 부를 뿐이다. 이제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정견의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불교는 그런 종교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종교.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는 종교.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종교이다. 진리에도, 법에도, 부처에도,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갈 수 있고, 그 어떤 종교와도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어떤 진리의 모습들도 다 감싸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혹 외도들과도 마땅히 대자비심이 바탕이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함이다. 불법의 치우침 없는 진리성을 대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하고 있다. ‘여래가 얻은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걸림 없는 대자유의 설법인가. 도무지 이런 말은 진리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금강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분별, 시비하는 습관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기울고 말 것이다. ‘역시 금강경의 가르침은 참된 것이구나’ ‘이 진리야말로 실다운 것이구나’ 하고 감동하거나, 혹 또다른 사람은 ‘도무지 금강경은 알 수가 없구나’ ‘실다운 것이 아닌 헛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일체 모든 상도 상이 아니라 하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니 ‘불법은 다 허망한 것이구나’ ‘불법이란 다 헛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두 가지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실답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헛되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의 가르침, 불법을 실답다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실답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불법이 실답다는 그 견해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곧 옳다는 편견을 불러오고, 그것은 집착을, 또한 그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헛되다는 치우친 생각 또한 그르다는 편견을 불러옴으로써 그릇되다는 집착과 편견으로 인해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치우친 견해일 뿐이고, 고통을 불러오게 될 뿐이다.

또한 선악(善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선악을 나누어 놓고 선은 좋은 것이니까 취해도 좋고 악은 나쁜 것이니까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본질에서 본다면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고 악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게 된다는 그 끝은 변함이 없다. 선에도 머물지 말고 악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어야 선악을 초월해 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실답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 것이며, 헛되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을 통해 끊임없이 보살의 보시에 대한 상을 놓아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승의 보살은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제 보살에게는 그 어떤 번뇌도 그 어떤 괴로움도 거의 다 사라졌다. 업(業)이 거의 다 소멸되었다. 그렇기에 보살은 업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원(願)에 의해 태어난다. 업생이 아닌 원생이다. 깨달음에 들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하화중생의 원이 모든 보살을 보살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는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아니 거의 깨달음의 입구까지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필요가 없다. 언제든지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일체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대비중생의 원력만이 보살을 지금 이 중생계에 묶어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살에게는 오직 하나의 서원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 ‘일체중생에게 보시하겠다’는 한 가지 서원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 또한 일종의 욕심이다. 그러나 그 욕심은 중생들의 욕심처럼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일체 중생을 향한 이타의 승화된 욕심이다. 승화된 욕심이지만 여전히 중생계에 남는 이유가 되는 욕심이다. 여전히 부처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지 다시금 중생계로 떨어질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금 시비 분별의 세계에 물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보살들의 이타적인 서원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바뀌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 전체에 걸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어떤 법에도 머물러 보시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을 위해 보시하면서도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다. 한 두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부모님께서 어린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타이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이야기 하듯 부처님께서도 보살에게 똑같은 법을 계속해서 설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순간 어두워질 것이다.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소멸하고 곧장 어두운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해 교화하고 보시하지만 자칫 보시한다는 한 생각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보살은 곧장 어두워질 것이다. 곧장 무명, 치심(癡心)에 물들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염려하고 계신다.
그러나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그 밝음은 유지될 것이다. 그 광명은 한없이 중생계에 빛을 놓을 것이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 세상에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다. 부처님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당체인 법신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법을 향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법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우리 마음 안의 진리를 다 알고 다 보시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 사람은 스스로 공덕을 성취한다는 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더라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외운다면 그 사람에게는 공덕이 없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그 많은 절을 짓고 불전에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어떤 공덕도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스스로 절을 짓고 보시했다는 상에 얽매이고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어떤 공덕도 없다. 그러나 일체 모든 공덕을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것이 다 잡힌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깨달음은 오며, 갖고자 하는 일체 모든 소유욕을 포기할 때 일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비우고 놓아버릴 때, 완전한 나, 전체의 나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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