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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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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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근심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한다.
악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16.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기뻐한다.
선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평안을 준다.


악을 행하면 악의 흔적이 남고 악의 업장이 남고 악의 습관이 남는다. 악한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악의 기운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악을 행하게 되면 내 안에 악의 기억과 악의 습관이 남아 있으므로 그 다음에도 선보다 악을 행할 확률이 높아진다. 한 번 해 본 것은 그 다음에는 더 쉽기 때문이다. 더 쉽고 때로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튀어나온다.

똑같은 상황에서 선으로 반응을 하거나 악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한 번 반응한 것은 고스란히 내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만다. 그러한 선악의 반응들이 하나 둘씩 계속 이어지게 되면 그 흔적은 습관처럼 굳어지고 만다. 습관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선의 습관은 계속해서 선을 만들어내고 악의 습관은 계속해서 악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그 때 우리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이기 쉽다. 첫째는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 줄 수 있고, 둘째는 잘난 척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쏘아붙일 수도 있다. 전자의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제 뒷날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주기 쉽다. 아니 그것이 더 쉽다. 몸에 한 번 기억되었고, 습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로 기분 나쁘게 반응한 사람은 다음에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런 사람이 꼴보기 싫고 밉상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난다면 그 때부터는 자동적으로 반응이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선은 또 다시 수많은 선을 불러오고, 악은 또 다시 수많은 악을 불러오게 된다. 전자의 반응을 한 사람은 끊임없이 칭찬해 줄 일이 생기고, 후자의 반응을 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꼴보기 싫은 사람이 생겨난다.

화나 성냄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킨 일을 잘 못하는 아랫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잘 다독이면서 오히려 격려해 주고 자비롭게 가르쳐 줄 수도 있고, 화를 내며 이것 밖에 못 하느냐고 면박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반응들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業習)을 남긴다. 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도 화나는 상황에서 자비롭게 대처하는 것이 더 편해지고, 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화를 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업습이다. 업은 이처럼 습관처럼 굳어져 선은 더 큰 선을 부르고, 악은 더 큰 악을 부른다.

그래서 선을 행한 자는 이번 생에서도 기뻐하지만 다음 생에서도 기뻐하고, 악을 행한 자는 이번 생과 다음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에 시달린다. 선행과 악행은 언제나 그를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내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을 남기기 때문이다.

선업은 선의 과보를 남기고 악업은 악의 과보를 남기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선업을 한 번 짓고 나면 그 다음에도 습관적으로 선업을 지을 확률이 높아지고, 악업을 짓고 나면 그 다음에서 악업을 짓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데 있다. 한 번 지은 과보를 한 번 받으면 그만이지만, 업습이라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습관처럼 흔적을 남기니 그것이 문제다. 그 습관은 이번 생 뿐 아니라,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선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평안과 기쁨을 주지만, 악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근심 걱정을 불러온다.


돼지잡이를 55년 동안 해 온 백정 춘다는 돼지를 평생동안 살생한 업을 지음은 물론, 성격도 잔인했으며 착한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그 결과 죽음에 이르러 손이 돼지발처럼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죽기 전 7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고,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담미까라라는 한 재가신자는 평소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덕이 많으며 늘 보시를 생활화하였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비구스님들의 탁발을 위해 항상 공양 준비를 해 주었으며, 14명이나 되는 아들과 딸들 또한 부모님의 덕을 보고 배워 계행과 보시를 실천하였으며 늘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 이런 결과 대장장이 춘다의 죽음과 상반되게도 담미까라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밤낮으로 비구스님들이 찾아 와 독경해 주었고, 죽을 때도 천상의 신들이 내려와 마중해 주었고, 죽음 이후에도 도솔천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이번 생에 행한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죽을 때까지 이어지고, 죽음 이후에도 그 결과가 다음생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선행이 중요한 것이고, 한 번의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그 한 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습관을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내가 어떤 행을 하고 있는지를 늘 지켜보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악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선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잘 지켜보아야 한다. 한 번 만들어 낸 선업은 또 다른 선업의 씨앗이지만, 한 번 만들어낸 악업은 또 다른 악업을 부르기 때문이다.

화낼 상황에서, 악업을 지을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자비롭게 대해보라. 자비로운 방식으로 자비로운 말씨로 상대방을 향해 선업의 씨앗을 퍼뜨려 보라.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그래서 연습하고 습관화해 보라. 한 번, 두 번 선행과 자비가 이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쉬워진다. 똑같은 화날 상황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또 그 다음으로 갈수록 훨씬 자비롭게 대응하기가 쉬워진다. 벌써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계속해서 기쁨을 누릴 것인가, 악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언제까지고 근심과 걱정을 안고 갈 것인가.



Posted by 법상




[사진 : 지리산 천은사]

‘내게는 업보가 닥치지 않으리라’고
작은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죄악이 된다.

‘내게는 업보가 오지 않으리라’고
작은 선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조금씩 쌓은 선이 큰 선을 이룬다.

[법구경]



아무리 작은 악업을 짓더라도
그 업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불태운다.

작은 악업의 결과가 미미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다보니
당장에는 비켜갔으리라고 안심할지 모르지만
방울물이 모여 항아리를 채우는 듯
그러한 작은 악이 모여 언젠가는 분명한 큰 재앙으로 온다.

아무리 작은 업이라도
언젠가는 분명한 결과를 받는 법.

지금 몸이 건강하다고,
지금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지금 집안이 화목하다고,
지금 나의 행복이 충분하다고
현재에 안주하여 작은 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훗날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막상 역경과 고통에 처했을 때
그 때, 대비하려면
이미 늦다.

행복할 때, 만족스러울 때를
더욱 조심하여
이 행복이 언젠가 소멸될 것을 알아
더 많은 복을 지을 일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하니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창고는 곧 비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혜로운 이는
행복할 때를 더욱 조심한다.

그렇다고 괴로울 때
삶을 포기하지도 말라.
기왕 이렇게 된 것
악행을 일삼고 스스로를 더욱 괴롭혀서는 안 된다.

불행하다는 것, 괴롭다는 것은
오히려 과거의 죄업을 받고 있는 것이니
사실은 불행한 때가
업장을 녹이는 소중한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행복한 때가 오히려 위기이고,
불행할 때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인과를 깨달아,
순경에 거만하지도
역경에 좌절하지도 않으며
언제나 조화로운 중도를 지킴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지켜 나간다.
Posted by 법상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기본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이 법칙은 나아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있고, 이 생각이 있으므로 저 생각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일체의 이원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즉 크다 작다는 분별은 사실 고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있으므로 그것과 견주어 비교되는 작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났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람이라는 분별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라는 일체의 분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체의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무언가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다른 인연이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되고, 나라는 남자와 비교될 여자라는 타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도 나보다 키가 큰 타인‘을 말미암아’ 작다는 분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양 극단의 분별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연기되어진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크다 작다거나, 남자다 여자다거나, 잘생겼다 못생겼다거나, 똑똑하다 어리석다거나 하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할 때에만 연기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양 극단의 분별은 끊임없이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無常)이고, 그러므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자아적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키가 큰 사람도 농구 선수들 앞에 가면 작게 느껴지고, 키 작은 사람들 앞에서 있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이듯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변하는 것(무상)이며 그렇기에 ‘큰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말 할 수 없다(무아)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 극단의 분별로써 고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극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항상 중도적인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크다거나, 잘났다거나, 옳다거나, 혹은 작다거나, 못났다거나, 그르다거나, 그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인연따라 크거나 작을 뿐이고, 인연따라 선하거나 악할 뿐이며, 인연 따라 변해 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중도적인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연기적인 시선이 바로 정견이며, 중도이고, 공과 무아, 무상의 바라봄인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인 시각에서는 일체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 높은 사람이라거나 낮은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고 없다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되지 않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적인 시선에서, 또 깨달음을 얻으신 큰스님들의 시선에서 우리 모든 중생들은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똑같은 존재감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연기적인 치우침 없는 대 평등의 시선이 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거나 할 것이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견해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 다른 나라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여인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옳은 이성관이지만, 예를 들어 무슬림은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얻을 수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바쿠족, 간다족 등도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와는 반대로 일처다부제인 곳으로는 티베트가 있는데, 티베트는 한 여성이 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면 그 집안의 다른 형제들과도 결혼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 또한 자가(Zaga)혼인이라고 하여 남편과의 이혼 없이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가 다르면 그곳의 문화나 풍습도 다르고, 성적인 윤리의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다 똑같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는 선악의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며, 상황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선악은 연기적인 것이며 상의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의존적이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이다. 절대적인 선악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선에 대해 악을 배제하고, 강압하며,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게 되지만 연기된 것으로 볼 때 선악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화합과 평화적인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볼 때 그 두 나라가 보기에는 서로가 극단적인 적이며 악이기 때문에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있음을 본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이 적이고 악이며, 팔레스타인들이 볼 때는 유대인들이 악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유대인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으므로 유대인이 있는 것이지, 그 어느 한 나라가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악이 되는 것이지 본래 선악이 정해 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 왔던 종교전쟁들을 보더라도 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나라는 절대선이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나라는 절대악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사실 그러한 두 종교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대에 와서는 그 두 종교가 모두 올바른 종교로써, 이 세상을 대표하는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부터 어느 종교가 선이고 다른 종교는 악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내 종교를 선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타종교는 악이라는 규정이 생긴 것이니 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믿음 속에서 연기되어 발생한 것이라면 선악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악은 연기된 것이고, 공(空)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라는 분별이 연기된 것이기에 공하고 무상하며 무아라면 선악이라는 양 극단을 나누어 놓고 서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질 것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선악의 양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연기된 것이기에 양 극단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적인 실천에서 본다면 선악으로 나눌 것도 없고, 어느 한 쪽은 옳다거나 다른 쪽은 그르다거나 하고 극단적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므로 사실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낙인찍어 놓고 선이 악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 또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연기와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전체적이며 동체로써의 자비로운 통찰이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나듯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유함과 가난의 양 극단의 삶은 양쪽 모두에게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한 쪽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며 하루에도 5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3만 5천 명씩 죽어가는 마당에 또 다른 곳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고민을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에서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가 14조원에 달하는데 그 정도면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는 부유해서 괴롭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괴롭다. 선진국들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온갖 환경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후진국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롭다. 양 극단은 언제나 고(苦)를 가져온다.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는 연기적인 자각과 중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양 극단의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양 극단의 고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는 스스로 만족과 청빈과 소욕을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으로써 가난한 나라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연간 15조원이상이 든다고 하고, 그 쓰레기로 인한 악취며 처리시 환경문제 등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은 것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조금씩 적게 가지고 적게 먹으며 쓰레기로 해치울 것들을 미리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면 부유함의 괴로움도 가난함의 괴로움도 모두 함께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소욕과 나눔의 실천적인 정신에 달려 있다. 이러한 소욕과 나눔의 정신의 바탕이 바로 가난한 나라가 없으면 부자 나라도 없고, 굶주리는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나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연기적인 철저한 자각인 것이다. 연기 중도적인 시선에서는 그들과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그들이 살아나야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쌍계사]

나쁜 짓을 멀리하고 선행을 쌓아라.
좋을 일을 하는데 게으르면
마음은 저절로 나쁜 짓을 즐기게 된다.
혹시라도 나쁜 짓을 했다면
그것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악이 쌓이는 것은 괴로움을 남기게 되고,
좋은 일이 쌓이는 것은 즐거움을 남기게 될 것이다.
[소부경전]



보통 사람들은
나쁜 일 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나는 나쁜 일은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자위하곤 한다.

그러나 좋은 일에 게으른 것도 나쁜 일이다.
좋은 일을 하는데 게으르면
마음은 저절로 나쁜 짓을 즐기게 되기 때문이다.

나쁜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살지 말고,
좋은 일을 애써 행하는 것으로써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선(善)은 때가 되었을 때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많이 벌고, 많이 모아 놓은 후에
그 때가서 크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천원이 있는 자 백원을 베풀고,
만원이 있는 자 천원을 베풀면 되는 것이지,
훗날 몇 백만원, 몇 천만원, 몇 억을 벌어
그 때가서 크게 베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말에 불과하다.

천원이 있을 때 베풀지 못하면
수천억이 있어도 베풀 수 없다.

선이란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저질러 행하는 것이다.
선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다.
과거에 이미 베풀었던 선에 매이거나,
미래에 앞으로 베풀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선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지지 않은 선은
선이 아닌 악의 씨앗이다.
지금 여기에서 선을 베풀지 않으면
마음은 저절로 악을 즐기기 때문이다.

선을 저질러 실천하지 않는 마음은
악을 연습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선에 게으른 것, 그것이 바로 악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행하지 않으면
마음은 저절로 악을 즐기게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은 무엇인가.
거창하고 대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행할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선,
바로 그것이 온 우주가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절에서 몇몇분들과
한달에 두 번
법구경 공부를 하기로 하여,
이 참에 법구경 강의를 조금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올렸던 강의를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

제1장 쌍서품(雙敍品)

마음

[경전]

1.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2.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형상을 따르듯이



[강설]

경전에 보면 ‘마음’이란 말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전에서 나오는 마음이란 용어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으로 나뉠 수 있다. 진심이란 본래심(本來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본래마음, 즉 불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망심이란 번뇌심, 생멸심(生滅心), 산심(散心)이라 이해되며 우리들의 산란하고 번뇌에 휩싸인 분별심이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음이란 진심이 아닌 망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망심, 즉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며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망심이란 유위법(有爲法)의 근본이 되는 마음으로 유위란 위작(爲作) 혹은 조작(造作) 즉, ‘만들어진 법’이란 의미다. 다시 말해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세계의 법칙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유위법 즉 망심이 근본이 되어 현상세계의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반대로 진심이란 무위법(無爲法)으로 만들어지거나 생멸하는 법칙이 아닌 만들어지기 이전 세계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진심이란 무엇 하나 붙을 것이 없고 만들어 질 것이 없는 일체가 딱 끊어진 공(空)의 본래자리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말한 ‘마음’이란 망심 즉 우리의 분별심, 생멸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분별 망심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세상을 만드는 근본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말이요, 마음을 일으켜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을 시킨다는 말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만들어내고, 모든 일을 시키며, 마음이 주인이 되어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든 것도 인간의 마음이며, 나에게 주어진 내 세상을 만들어 낸 것 또한 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없었다면 세상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일으킨 마음이 오늘날의 현실을 만들어 냈고, 지금 이 순간 일으키는 마음이 나의 미래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일으킨 모든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세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세계, 법계는 그것을 놓치지 않지만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놓치고 만다. 아니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을 일으켜 놓고도 스스로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끊임없이 마음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끊임없이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이치를 통째로 집어삼키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머리로만 대충 알 뿐, 온 존재로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지금처럼 주의 깊지 못하게 마음을 함부로 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게 주어진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를 전혀 살피지 못한 채 그냥 그냥 주어진 생을 소모하고 있다. 마음을 놓치면 세상을 놓치는 것이다. 마음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이 진실을 주의 깊게 사유해 보라.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면, 세상의 모든 일이 왜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머물렀다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전체적으로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보면 된다.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살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마음을 보라.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모든 일을 시키고, 이 모든 세상을 만들어 내는 주인은 바로 마음이다.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끊임없이 운명을 변화시켜 갈 뿐.

마음을 간절히 일으킨다면 세상은 거기에 반응을 할 것이다. 그 마음이 더욱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간절한 소망으로 사무친다면 우주는 조금 더 민감하고도 강하게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절이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일률적이지는 않다. A라는 마음이 반드시 a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b나 c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떤 결과는 빠르고 어떤 결과는 늦을 수도 있다. 또한 간절히 마음을 내더라도 내가 생각한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업(業)과 인과(因果)와 전생의 사건들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마음 낸 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빨리 혹은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주의 에너지는 공평무사하게 응당한 반응을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반응이 너무 복잡하고 무량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거기에는 분명한 인과의 법칙, 다르마(진리)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 그 반응의 법칙은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를 따른다. 즉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경전에서는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으로 선악을 대비시키고 있다.

삿되고 악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이 말은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악업(三惡業)을 짓게 될 경우 허물과 괴로움이 따르며, 신구의로 세 가지 선업을 짓게 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법구비유경』에서는 위의 게송이 나온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푸라세나지트왕이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손 씻을 물을 나르고 음식을 만들어 공양 올리는 것을 보고 한 상인은 ‘부처님은 제왕과 같고 제자들은 충신과 같구나. 저 왕은 참으로 현명하다. 부처님을 높이 받들고 자신의 뜻을 낮출 줄 아는구나.’라는 찬탄의 마음을 낸 공덕으로 훗날 왕위에 오르지만, 또 한 상인은 ‘저 임금은 어리석구나. 자기가 국왕인데 무엇을 더 구하려고 부처님께 공양하는가. 부처는 마치 소와 같고 제자들은 수레와 같구나. 저 부처에게 무슨 도가 있다고 저렇게 뜻을 굽혀 받드는가?’라며 나쁜 생각을 일으킨 과보로 죽어 태산지옥에서 불수레에 깔리는 갚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첫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좋은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왕이 되었으며, 두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수레에 깔려 죽을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됨을 설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법구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인과의 방편법에서 머물지 않고 본질적인 근본법을 아울러 설하고 있다. 근기가 낮은 이들에게는 선악이라는 인과의 법칙이 더 쉽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선악의 마음을 대비시켜 설하고 있지만,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악의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선다. 본래 세상에 선악이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마음도 근본적이지 못하지만, 역시 선한 마음도 본질적이지 않다. 옛 말에 ‘선한 것은 도(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불법문중에서는 깨달음을 문제 삼을 지언정 착한 것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선악이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선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 마음은 삿된 분별심일 뿐이다. 악한 마음만 삿된 마음이 아니라 선한 마음도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자체가 이미 마음에서 선과 악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선을 선택, 분별, 차별하는 마음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을 일으키는 그 자체가 이미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이며, 악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일 뿐이다. 선한 마음을 내면 스스로 선한 마음을 냈다는 상이 생기고, 선한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미워하게 되며,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이 깊어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증오의 마음도 함께 커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배신을 당했을 때 증오도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선한 마음도 차별심이며, 악한 마음도 차별심이라고 보았을 때, 불교에서는 선악의 차별적인 모든 마음을 다 여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마음을 일으켜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번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선에 집착하게 되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와 구도자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비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마음을 내는 것 보다 그 마음 자체를 비우는 것이 더욱 수승하다.


한동안 세간에 화재가 되었던 책 ‘연금술사’나 ‘시크릿’ 등은 바로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만들고 세상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설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 방편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간절히 원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은 불교의 근본 목적이 아니다. 마음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본질적인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다. 요즘 같은 세상의 트렌드에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간절히 원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간절히 원하면 명예나 지위도 얻을 수 있으며, 간절히 원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희망을 가지게 하며, 꿈과 욕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가. 그러나 잔뜩 욕망에 넘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비워라’ ‘간절히 원하는 그 마음도 궁극에 가서는 놓아야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김빠지는 말인가.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과 놓음의 가르침보다 오히려 시크릿이나 연금술사 같은 류의 책들이 세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결국에는 넘어서야 할 것들이다. 그 마음 조차도 결국에는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경구를 다시 살펴보면,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은, 무언가 마음을 일으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마음을 비우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이다. 즉 삿된 마음은 일반적인 우리의 마음[心]을 의미하고, 순수한 마음이란 ‘마음비움’ ‘마음 놓음’이란 무심(無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가라는 말인가. 선한 마음도 악한 마음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 도대체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순수한 마음이란 집착이 없는 마음이다. 마음을 아예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는데 집착하지 않고, 악한 마음을 일으켰더라도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도 일으키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되 집착 없이,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좌절하고 괴로워 할 것이지만,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내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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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대승사는 요즘의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다른 유명절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들어가는 마을에서부터 입구 어디에도 현대식 건물을 찾기 힘들고, 다른 절 같이 식당이며 온갖 것들이 있지 않은, 그저 완전히 시골 마을 시골 절입니다. 사불산 해발 600미터높이 산마루에 자리한 대승사는 근래 대승선원에 치열하게 정진하는 선승들이 많이 찾는 참선도량이기도 합니다. 부속 암자로 나옹스님의 출가 암자이자 성철스님께서 정진했던 묘적암과 비구니 선원으로 아기자기한 도량 윤필암 그리고 보현암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 속에 갖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그렇게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안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 갈 때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 '내 것' '내 생각'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연따라 잠시 왔다 스쳐 가는 것을
애써 잡아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울타리를 쳐서
'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빠져버립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나'에 집착합니다.

부처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너가 아니야
그 울타리만 걷어차고 나오면
무한한 세상이 다 네 것이야'

지금껏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많이도 늘려놓았습니다.
'내 것'을 늘리는 일,
그것이 우리네 사는 일상입니다.
우리네 한평생 살림살이입니다.

누구나 '내 생각'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관이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철저한 객관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순수한 '내 생각'은
쉽게 찾아낼 수 없습니다.
모두가 '길들여진 내 생각' 이었음을 봅니다.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내 생각이었음을...
지독한 고정관념의 연장이었음을...

사회가 만들어낸 수많은 고정된 틀
그 수많은 고정관념들을
뭉뚱그려 '내 생각'으로 만들어 놓고
주관이라 그럽니다.
내 생각, 내 가치관이라 그럽니다.

선과 악에 대한
자신의 판단 또한 그렇습니다.
여기에서는 '선'이었던 것들이
다른 쪽으로 가면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선과 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고 선이라 하고 악이라 해야 합니까.
극단적인 비유로 살생(殺生)은 모두 '악' 인가요?
상황에 따라 그 또한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들은
고정된 바 없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딱하게도
지독하게 고정되어 돌아갑니다.

스스로 혹은 사회에서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고정되게 틀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기준에 빠져 우리는 울고 웃고 그럽니다.
그 얄팍한 틀을 깨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것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선악의 비유를 들었지만
대부분의 모든 관념의 틀이
이렇듯 고정지은 바 대로 어처구니 없게 돌아갑니다.

상황 따라 바뀌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고정관념은 상황이 바뀌어도
한 가지 관념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공(空)에 너무 치우친 이에게는 유(有)를 일깨우셨고,
유에 치우친 이에게는 공의 이치로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건만
우리의 생각들은 너무도 편협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고정된 관념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지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린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집을 버리면 세상이 고요합니다.
주위가 평온해 집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처럼...
우물에서 뛰쳐나온 개구리처럼...
그렇게 세상을 보는 기준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뻥 뚫려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이미 내 앞에 활짝 열려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이 '꼭 이렇게 해라' 하고 이야기 할 때
고집이 많고, 고정관념이 큰 사람일수록
내 생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쉽게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내가 옳다면 상대도 옳을 수 있음을
가슴 깊이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니야 그래도 이 것만은 내가 옳아!' 라고 고집 할 때
이미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100% 옳은 것은 없는 법입니다.
상황따라, 인연따라 옳은 것일 뿐입니다.

어차피 바꾸지 못할 바에는
빨리 내 고집을 포기해 버려야 합니다.
빨리 방하착 해야 합니다.
턱! 하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의 틀을 깨고 보면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이해가 달라 질 것입니다.

우유부단하게
무조건 상대방에게
이끌리기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리 고정지어둔 고정관념을
깨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한 마음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마음속의 분별심들 때문에
정견(正見)의 잣대가 흔들려선 안됩니다.

텅 빈 마음으로
상대의 의견을 내 의견처럼
몽땅 받아들여 볼 수 있는 열린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의 의견과 내 의견의 대립이 아니라
그저 평등한 두 가지 의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 고집을 버리고
상대를 향해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법은 없습니다.
이것도 법이요, 저것도 법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보면
세상엔 참 옳은 의견이 많습니다.

이건 이래서 옳고
저건 저래서 옳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지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는 어두운 마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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