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은사스님께
계를 받을 때
그 때 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정당하게 소유해도 좋다는
두 가지 말입니다.

하나는 발우...

그리고 또 하나는 가사와 장 삼...

처음 출가할 때는
달랑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무소유...

수행자는
발우와 가사장삼
이렇게만 있으면
온천하 우주법계를
거저 다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때는
정말 무엇하나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행자 생활이 끝나고
받아든 발우와 가사장삼...
그것은 단 순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억을 준다한들
이것들과 맞바꿀 수 있었을 까요...

늘 이 것들은
제 방 한 켠을 채우고 있습니다.

게을러지고,
나약해질 때,
그리고 탐심 이 올라올 때도
고개를 들고 이 놈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떠올립니다.
수/ 행/ 자/

그러고 나면...
가슴 속에
번쩍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철~렁하는 무언가가 말입니다.

발우...
그리고 가사장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Posted by 법상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에 대하여
애착을 버려야 할 것이니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경구 가운데 하나.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나의 소유라고 하고
'내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어찌 뒷동산의 나뭇잎이
내 것일 수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이 대지의 한 부분을 가지고
어찌 '내 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 대지 위를 걷는
소나 돼지를 가지고
어찌 '내 소' '내 돼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한 사람을 가지고
'내 여자' '내 남자'라고 소유코자 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존재는
저 홀로 존귀하며,
저마다가 자신의 주인일 뿐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독자적이고 독존적이지
'내 것'이라고 묶어 둘 수 있는 것은 없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왔다가
인연이 다 하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일 뿐.

과연
무엇을 가지고
소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무상한 존재인데,
하물며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동산의 나뭇잎이 어찌 ‘내 것’일 수가 있으며,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돈을 지불한다고
어찌 ‘내 땅’일 수가 있겠는가.

'내 돈'이라고,
'내 땅'이라고,
'내 집'이라고,
'내 사람'이라고,
'내 물건'이라고,
'내 자식'이라고,
'내 지위'라고,
'내 가족'이라고,
'내 권력'이라고,
'내 종교'라고,
'내 계급'이라고,
'내 소유'라고...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뿐.

이 세상에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두고, 집착하려 할 때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잠시 이 세상에 살며 소유하는 것일지라도
그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진데
내 것이 아닌 것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기에서 온다.

버리고 버리고,
비우고 또 비우고 나면 마음이 평온하다.

전체를 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가질 수 있다.









Posted by 법상


많은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 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소유와 자유를 동시에
얻을 수 있기란
삶과 죽음 을 동시에 가지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입니 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집착하고 있는 것이 많을 수록
그만큼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소유는 우리를 얽어매고
되려 우리를 소유해 버리고 맙니다.

소유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지금 이 대로의 텅 빈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그냥 지금 여기에서
충분하고 꽉 찬
온연한 내면 을 비추는 텅 빈 충만을 말입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 한다면
언제까지고 행복은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자꾸 늘 리려고 하고,
채우려고 하면
세상에 얽매임이 많아 지다 보니
우리 본연의 맑은 참빛을 놓치게 됩니다.

텅 비 워 버리면
그냥 그대로 충분하고 자유로워
그 속에서 참 성품 의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자유와 행복이란
얼 마나 채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비우느냐에 달 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아닌 필요에 의한
최소한의 소유,
소유라 는 관념도 비워 버린
무소유의 소유,
그런 맑고 텅 빈 소유를 하라는 것입니 다.




Posted by 법상

        때때로 홀로 존재하고 싶은 깊은 속 뜰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언젠가 나 홀로 떠나 그림자와 함께 여행하던 그 바닷가 외로운 포구, 혹은 저 홀로 울울창창 소리치며 그 깊은 산 우뚝 솟아 있던 한 그루의 소나무가 지독하게 보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럴 때는 한 며칠 일도 다 때려 치고 내 행동 범위도 최소한의 것으로 한정시킨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핸드폰, 전화 벨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행여 TV를 켜거나 신문 보는 것조차 번거로워 잠시 접어 둔다. 될 수 있다면 먹는 음식도 소박하면 좋겠고, 군것질도 끊고 나면 속이 비어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야말로 입에는 말이 적고, 마음에는 일이 적고, 뱃속에는 밥이 적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배려한다.

  그럴 때면 이른 새벽 뒷산 깊숙이까지 들어가 호젓하게 자연 속에서 그저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도 한다. 후덥지근하던 열대야 더위에서나, 온몸을 달달 떨어야 하는 한겨울 추위에서는 느끼지 못할 그런 청정한 산기운이 길을 걷는 한 사람의 속 뜰을 비춰줄 수 있는 그런 날. 그런 날, 바로 오늘 같은 날에 삶의 무게를 무색하게 만드는 외로움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곤 하는 것이다.

 

 

  모처럼 찾아오는 이런 외로움의 때를 예전 같으면 무기력이나 우울증쯤으로 여기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겠지만, 가만히 그 느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건 우울한 때가 아닌 오히려 신선한 삶의 활력이 되는 때임을 깨닫게 된다. 이럴 때가 있다는 것이 많이 고맙고 감사하다. 이런 때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이 모처럼만에 성숙할 수 있을 기회를 맞이한다는 것. 외로움의 깊이만큼 내 삶의 깊이도 한층 깊어진다는 것. 그런 것이다.

  사실 외로움이란 근원적인 문제다. 그 깊은 외로움을 통해서 잊고 있었던 참된 자아와 만나는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홀로 된 외로움을 통해서 전체와 하나로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한없이 충만한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면 헛헛하고 외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텅 빈 가운데 성성하게 깨어 있는 속 뜰은 마구잡이로 채워 넣는 소유의 정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울 때 비로소 내가 나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일상에서는 내가 나의 존재를 잊고 내 바깥 존재며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지 나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지 못하지만, 외로울 때, 나 홀로 고독의 한 가운데 딱 내 버려져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내 안에 숨어 있던 참된 친구, 어진 벗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홀로 있으면 외롭고, 외로움은 싫은 것이라고.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음으로써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쓴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느끼고 실제로 함께 함으로써 조금 덜 외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깊이 비추어 보면 함께 하고 있음이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해도 우린 여전히 외롭다. 가족과 함께 할 때도 우린 외롭고, 친구와 함께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번잡한 군중 속을 거닐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을 때라도, 그 어느 때라도, 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라도 우린 여전히 외롭다. 함께 있음으로써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고 할 때 우린 세상에 속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을 떨쳐낸 것이 아니라 잠시 덮어두고 있을 뿐, 언제까지 그 외로움을 덮어둘 수 있을까. 덮어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속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린 내 안의 참된 고독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저 홀로 외로움을 맞이했을 때 그 때 우리는 외롭지 않다. 아니 어쩌면 너무 외로워서 외롭지 않다. 우린 누구나 그러한 외로운 때를 가져야 한다. 철저하게 저 홀로 고독해져야 한다. 외로움이 싫다고 자꾸 벗어나려 하면 안 된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외로움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울 뿐. 그럴 바에야 두 눈 똑바로 쳐다보고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 관심을 바라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고, 철저히 혼자가 될 수 있을 때, 그럴 때 우린 비로소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 자신과 마주하기를 꺼려하고, 자꾸 바깥 세상에 기대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을 만나질 못한다. 나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려거든 먼저 바깥의 관심이며 기대를 다 포기해 버려야 한다. 바깥으로 치닫는 그 어떤 마음도 다 놓아버리고 철저한 고독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나 홀로 그 고독 앞에 우뚝 설 수 있어야 한다. 이 길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그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일뿐이다.

 

 

  이처럼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함께 할 수 있고, 작은 나의 허울을 벗고 전체와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몸뚱이만 그저 덩그러니 혼자 있다고 해서 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혼자 있으려면 번거로운 우리의 소유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잔뜩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많으면 우린 호젓하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물로부터 소유를 당하며 소유물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휘둘리고 있는 소유란 물질적인 것들이 물론 포함되지만 돈, 명예, 권력, 지위, 배경, 학벌, 등등의 것들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혼자 있는 법을 배우면 이런 것들이 있건 없건, 높건 낮건 우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존재하면서도 충만할 수 있는 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적인 것들이 많이 채워져야 충만하고 행복하다고 여긴다. 돈이며 명예 권력 지위 학벌이며 온갖 소유물들이 넘쳐나야 행복하지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나 홀로 덩그러니 남으면 내 존재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 마냥 외로워하고 괴로워한다.

 

 

  또한 이러한 유형무형의 소유물로부터, 온갖 물질로부터 자유로워 졌다고 하더라도 아직 온전한 홀로 있음을 실천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홀로 있음의 실천 요소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정신의 홀로 있음이다. 아무리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더라도, 온갖 소유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롭게 살더라도 우리 머릿속이 온갖 번뇌와 탐진치 삼독심貪瞋癡 三毒心으로 또 잡다한 지식 같은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면 우린 참으로 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듯, 우리 정신 또한 온갖 번뇌며 수많은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한다. 머릿속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그 때 우린 참으로 몸도 마음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넘쳐나는 소유물 속에서 또 온갖 지식과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터질 것 같은 번뇌와 잡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린 누구나 이따금씩이라도 홀로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짐으로써, 채움으로 삶의 목적을 삼아 왔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조금씩 비움으로, 놓아감으로 바꾸어 갈 수 있다.

  우린 어차피 혼자서 잠시 이 지구로의 여행을 온 것이고, 이 여행을 마치고 되돌아 갈 때, 또 다른 삶의 여행을 떠날 때 또다시 우린 혼자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때 그동안 쌓아 놓았던 모든 것들을, 인연이며, 소유물들을 한꺼번에 버리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미리 미리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버리는 연습을 해 나갈 수 있다.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우린 당당해 질 수 있고, 내 안에서 충만하게 우러나오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주변 상황이나 조건의 좋고 나쁨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나 혼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이 숲도 봄이 되니 한겨울 외로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홀로 우뚝 서 있던 나무들이 이제 다시금 여행을 떠나려고 재잘거리고 있다. 겨우내 나 홀로 이 추위를 맞이했던 이 나무들은 잘 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러고 나면 또 다시 함께 존재하는 풍성한 시간 또한 오게 된다는 것을.   법상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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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가진 것이 너무 많아 하나 씩 하나 씩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정리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해 오다 이제서야 묵은 일을 시작해 본다. 꼭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은 정말로 꼭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말하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 속에 들기가 어렵다.

물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놈이 욕망의 소산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필요'의 범주에 들어있는 것인가가 보인다. '최소한의 필요'가 아닌 것들은 대개 욕망이 개입된 것들이기 쉽다.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다 보면 모든 물질마다 제각기 독톡한 분별이 따르게 마련인데, 대부분 그 분별로 인해 첫 생각 정리 대상이었던 것들이 다시금 '소유'의 범주로 슬그머니 들어오기 쉽다. 그래서 정리할 때는 마음을 잘 비추어 보아야 그 분별에 속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조금만 방심해 버리면 그놈의 분별심과 소유욕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우리의 몸은 조금 더 불편해 지겠지만 너무 편리함만을 따르면 몸뚱이 착심만 키울 뿐, 참된 공부는 불편함을 이겨나가는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 법정스님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이겨나가는 것이 곧 도 닦는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버릴 때는 어려워도 시원스레 버리고 나면 버린 만큼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지게 마련이다. 이런 자유로움은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것이지만, 또 누구나 한번의 '무소유'를 실천함으로써 쉽게 얻을 수도 있다.

누구나 이따금 한 번씩은 이런 정리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기적으로 이런 버림의 실천을 행하는 것도 좋겠다. 이렇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거나 거저 얻게 될 때라도 함부로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훗날 버릴 것을 생각하므로 소유의 굴레 속에서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말로만 수행이 아닌 실질적인 무소유 방하착의 수행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방안을 한번 휘휘 돌아보라. 방안 곳곳 집착과 욕망의 소유물들이 넘쳐난다. 지금 그 안에 살고 있는 나는 그 소유물들에 소유당하며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그로 인해 조금의 편리함은 느끼겠지만 도리어 더 큰 살뜰한 행복감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겨울 눈꽃이 이 산사를 또 뒷산 자락을 한창 물들이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피어오른 눈꽃의 고요한 잔치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아름다움이란 아마도 무소유에서 오는 호젓한 평화로움일 것이다.

지난 가을, 화사하게 이 산사를 물들였던 단풍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며 홀로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왠지 모를 안쓰러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 때가 되어 나뭇잎을 떨군 나뭇가지는 홀가분한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낙엽을 다 떨구어 낸 무소유의 호젓한 가지만이 한 겨울 그 어떤 추위에도 결코 시들거리지 않고 우뚝 솟아 그 텅 빈 가지 위로 아름다운 꽃눈을 피우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 또한 때가 되면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나야 그 텅 빈 무소유 안에서 새로운 삶의 향기로움을 다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겨울,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또 나를 소유하고 있는 이 모든 소유물들로부터 자유로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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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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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나누어 주거나 또 무언가를 받을 때,
참 기분이 좋다.
줄 때도 기분이 좋고, 받을 때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주었을 때 좋은 기분하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좀 다르다.

주었을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무얼까.
무언가를 주게 되면
‘내 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괴로워야 할텐데
좋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우리 안의 참나,
다시 말해 온 우주 법계의 참성품이
둘이 아닌 하나로써, 대아(大我)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주는 것 또한 모두가 하나의 성품이니까
무엇을 주고 받고도 없이 그냥 좋은 것이다.

즉 주었을 때 좋은 기분은
가만히 살펴보면 근원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보통 세간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받았을 때 ‘내 것’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받았을 때는 들뜨는 기쁨이지만
주었을 때의 기쁨은 그저 담담하고 맑다.

물론 주고 받고를 다 초월해 버렸다면
주는 것이든 받는 것이든 똑같이
근원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겠지만
보통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주었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근원적인 통찰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주었을 때
좀 더 근원의 마음자리를 느끼게 된다.
좀 더 본래의 마음자리, 참성품과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었을 때 ‘내 것’이 소멸되니까
괴로워야 하겠지만
참으로 맑게 주었을 때는
‘큰 나(大我)’가 ‘큰 나’에게 주고 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도 ‘큰 나’가 받는 것이니까 좋은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베풀고 보시를 해야 하는 이유다.
보시가 단순한 복을 짓는 일을 뛰어넘어
깨달음의 씨앗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보시를 했을 때,
그 베품의 행위로 인해 기쁨을 느낄 때,
우리가 내 본래자리 참성품과 하나됨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물론 주고 나서, 베풀고 나서
좋은 느낌이 아닌 싫은 느낌일 수도 있다.
주고 나서 마음이 괴롭다거나
‘내 것’을 잃었다는데 아깝다거나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집착이 남아 있는 베풂은 기쁠 수가 없다.
참된 베풂은 집착이 없는 데서 온다.

베풂이야 말로 무집착의 온전한 실천이다.
집착하지 않아야 맑게 베풀 수 있고,
또한 베풀었을 때 집착을 버릴 수 있다.

좀 단정적으로 말하면
베푸는 것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무집착이야 말로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풀어줄 수 있는 해답이다.
집착이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괴로움의 씨앗은 집착이고,
집착을 놓아야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바로 그 집착을 놓으려면 베풀어야 한다.

집착을 놓는 것이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공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반야 지혜를 얻는 깨달음의 길이다.

지혜가 무집착이고,
무집착이 보시이며,
보시가 복덕이니 이 넷은 하나로 귀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와 지혜는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복과 지혜가 수레의 양 바퀴일 수 있는 것.

조금 달리 말하면
집착없는 행이야말로 베풂의 행위이다.
집착 없이 일을 할 때
그 일은 복덕을 증장시키며 지혜를 증장시킨다.

집착 없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집착 없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집착 없이 사랑을 하며,
집착 없이 수행을 하고,
집착 없이 출가를 하고, 또 결혼을 하고,
집착 없이 길을 거닐었을 때,
집착 없이 삶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다시 말하면
함이 없이 무엇이든 행하고 있을 때,
그 걸음 걸음은 그대로 지혜가 되고 복이 된다.

모든 일에 집착이 없으면,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집착이 없으면
그 모든 삶이 무량대복전이 되는 것이다.

수행 따로 하고,
복 따로 짓고
그러는게 아니라 집착없는 행위는
그대로 보시이고 그대로 지혜이며 그대로 복이 되는 것이다.

집착없는 행을 하려면
과거도 미래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은 할 지언정
연연해 하거나 붙잡고 늘어질 것은 없고,
미래를 계획은 할 지언정
연연해 하거나 집착할 것은 없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마음이 걸리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렇기에 집착없는 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놓아버리고
다만 이 순간에 존재할 때 집착은 없다.

아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空)만이 남는다.
그랬을 때는 줘도 준 것이 아니고
받아도 받은 것이 아니며
주고 받은 것 또한 공한 삼륜청정의 보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물을 볼 때
이 세상은 좋고 나쁠 것도 없고
옳고 그를 것도 없는 텅 빈 고요 그 자체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하고 고집할 것이 없으니
그 마음의 모든 분별이 쉬게 된다.
모든 분별을 쉬고 텅 빈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전혀 새로운 순간이 열린다.

이 세상은 이전에 알고 있던 세상도 아니고,
내 틀 속의, 내 고정관념 속의 세상도 아니며,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텅 빈 새로운 순간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이 새롭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집착이 없다는 것은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고,
날마다 새롭다는 말이며,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 삶 자체가 보시의 삶이 되고 복을 짓는 삶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그 실천을
따로 따로 공부하고
따로 따로 실천하고
그 수없는 방편을 다 수행하려고 애쓴다면,
그것부터가 분별의 시작이고 번뇌의 시작이 아닐까.

하나를 잡고 늘어지면
그 하나에서 전체를 보게 된다.

무집착.
방하착.
그 하나만 붙잡고 부여잡고 공부를 하면
그냥 거기서 다 통하게 된다.

금강경도 무집착이고,
화엄경도 무집착이고,
공사상도 무집착이고,
무아도 무집착이며,
연기도 무집착이고,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도,
응무소주 이생기심도,
반야심경의 오온개공도,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도,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도,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이락도,

팔만사천의 모든 법문이
무집착이면 된다.

또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팔만 사천의 모든 법문이
다 보시바라밀이고,
다 무분별이며,
다 깨어있음이고,
지혜와 복덕이며,
관이다.

하나를 잡고
그냥 죽기 살기로 뛰어들면 된다.




Posted by 법상



이와 같이 일체 모든 존재들이 바로 나를 키워주었고,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나를 살려주었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들로 인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며, 먹고 자고 살아갈 자양분을 얻게 되었다면 우리가 이 우주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되겠는가.

감사를 실천하는 것이다. 감사의 마음만 보낼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감사의 실천을 행할 일이다. 이 우주 법계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바로 보시며 나눔이다.

사실 우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지만, 사실 엄격히 따진다면 보답이라는 말도 필요 없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그들이 있으며, 이 우주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우주가 있다면, 또한 그들이 소멸되면 나도 소멸되고, 우주가 소멸되면 나도 소멸된다면 이 연기적인 삶에 나와 너라는 분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이며,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일 수밖에 없는 동체(同體)적인 한생명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는 한 몸, 한 생명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만유가 모두 한 몸이요, 한 생명이라면 어찌 나와 너라는 나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와 너가 없다면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분별도 사라진다. 네가 아픈 것이 곧 내가 아픈 것이며, 네가 굶는 것이 곧 내가 굶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곧 내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가난이 곧 나의 가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나누고 보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동체적인 보시는 보시나 나눔이라는 말조차 필요치 않는다. 내가 배고플 때 내가 먹는 것을 가지고 내가 내게 보시한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에게 베풀더라도 사실 그것은 베풂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의 참모습이다. 동체대비란 말 그대로 온 우주법계가 한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크나큰 자비를 말한다. 이러한 큰 자비는 자비라는 말조차 쓸 필요가 없는 자비이다.

이러한 동체대비야말로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꽃피어나는 상(相) 없는 자비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 속에서 실천되어지는 자비는 아무런 상을 내세울 것도 없고, 티를 낼 것도 없다. 스스로의 자비를 자비라고 치켜세울 것도 없고, 자비를 행하고서 스스로 자비를 행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일 뿐이다.

내가 배고프면 내 밥을 먹듯이 누구라도 배고프면 내 밥을 먹여 주는 것이다. 내가 타인을 먹이는 것이지만, 연기법에서는 내가 나를 먹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베풀면서 베풀었다는 상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베푸는 것은 동체대비요 베풀었다는데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이다.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으니 내 것을 너에게 준다는 관념 또한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라는 존재 또한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공한 존재, 연기적인 존재일진데 내 소유가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나도 없고 내 소유도 없으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연기로 바라본 이 세상의 본질에는 무아(無我), 무소득(無所得), 무소유(無所有)의 덕목이 있다. 나도 없고, 내가 얻을 바도 없으며,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연 따라 다만 나라는 존재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존재일 뿐이며, 내 소유라는 것도 잠시 인연 따라 내게로 왔다가 잠시 머무른 뒤 어김없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무아요, 무소득이며, 무소유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 ‘내 것’이라고 가두어 둘 수 있겠는가. 내 소유를 늘려나가는데 집착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연 따라 나에게로 잠시 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내게 온 것들조차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며, 이 우주 전체의 것일 뿐이다.

우주의 것이 인연 따라 내게도 오고 너에게도 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연 따라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이 있도록 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다. 상대에게 그것이 필요하면 그것을 내어줄 뿐이다. 그렇게 내어 주고 나서도 내가 상대에게 주었다는 상을 낼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있어야 할 자리에 간 것일 뿐이다. 내가 네가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다만 나는 도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러한 연기의 세계에서 보시는 보시가 아니다. 보시를 하고서도 보시했다는 상이 생길 여지가 없다. 이러한 보시야말로 연기적인 보시요, 동체대비의 깨달음에 입각한 보시인 것이다.

연기를 깨달으면 이처럼 동체대비의 보시행이 저절로 삶의 방식이 된다. 그러나 연기를 깨닫지 못했더라도 반대로 상 없는 무주상보시를 끊임없이 행하면 보시의 실천행 속에서 연기적인 자각이 꽃피어난다. 그러니 보시행, 자비로운 나눔이야말로 연기법을 실천하고, 연기를 깨닫는데 있어 중요한 실천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관자재(觀自在)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도 ‘관세음보살’이라는 명칭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도, 어렵고 힘들 때면 의례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는 염불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의 의미는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사바세계의 중생이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해 주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부르고 신앙하고 있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 바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입니다. 이 두 이름 모두 범어 ‘아바로키테 스바라 보디사트바’를 번역한 것으로,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 번역되면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로 불리었으나, 이후에 관자재보살로 바꿔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아바’는 지킨다는 뜻이고, ‘로키테’는 본다, 관조한다는 의미로, 이는 ‘지켜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스바라’는 ‘자재하다, 자유롭다’는 의미이므로 이름 그대로 뜻을 새기면 ‘자유 자재하게 지켜본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온갖 괴로움과 액난에 대해 자유자재하게 지켜보고 살펴서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린 관세음보살의 어원에 담긴 속뜻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관세음)’는 의미는 나라는 주관과 객관계의 일체의 경계를 온전히 바로 관함을 말하며, ‘보살’이라고 함은 우리 내면의 본래자리, 깨달음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는 의미는 나와 내 밖의 일체 경계를 관하여 본래면목 깨침의 자리에 온전히 방하착 하고, 경계를 닦아간다는 자기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일체 세간의 음성, 다시 말해 온갖 경계를 바로 관하고 그러한 모든 경계를 녹이고자 온전히 자기내면의 참나 본래자리에 놓을 수 있도록 하는 밝은 방편 수행인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 즉 온전히 자신과 바깥 경계를 관하고 녹여 보살,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불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불(念佛)이라고 할 때, 염(念)이란, 우리네 마음속에서 경계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 마음의 조각들을 말하며 불(佛)이란, 우리네 마음속에 저마다 갖추고 있는 본래자리, 근본성품, 참나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염불은 우리마음 ‘염’과 부처님 마음 ‘불’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하는 밝은 수행인 것입니다.


보살(菩薩)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인데,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단어로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갖춘 자가 바로 보살인 것입니다.

 이는 보살의 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위로는 깨달음,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모든 보살의 한결같은 서원인 것입니다. 물론 아래다, 위다 하는 구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후(先後), 고하(高下)의 상대 개념이 아닌, 분별이 끊어진 개념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적극적인 행이며, 보리를 구함이 바로 일체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대비원력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을 흔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이익 되게 함이 곧 타인, 이웃을 이익 되게 함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후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는 이것이야말로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뽑아놓은 부분입니다. 나머지 뒷부분은 이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의 주요 실천 덕목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함에 있어,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완벽하고도 치우침 없이, 그리고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바로 ‘깊은’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대승보살의 주요한 수행 덕목인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어떠한 수행을 말하는 것일까요? 반야바라밀이란,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깊고도 수승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공의 도리, 연기의 이치, 무아, 무자성, 중도의 이치를 올바로 조견(照見)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진리를 밝게 깨칠 수 있는 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 연기, 무아, 중도, 무자성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공이고, 연기된 존재이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무집착(無執着)이며, 어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라고 하는 분별을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무분별(無分別)이고,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며,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이 여실히 녹아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 무소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온갖 대상에 ‘집착’하고, 머리속으로 사량(思量)하고, ‘분별’하며, 보다 많이 얻으려는 ‘소유’의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로 공의 이치, 연기의 도리를 모르는 데에서 오는 어리석음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공, 연기의 이치를 올바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우리는 확연한 지혜[반야]를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생사가 없는 열반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바라밀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 실천 수행의 핵심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인 것입니다.


조견(照見)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을 통해 확연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든가, 절대자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셨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춤, 즉 조견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나’에 대한 조견, ‘현실’에 대한 조견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의 바른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 그리고 ‘현실’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나와 내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나와 내 밖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지, 어떠한 성질,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온전한 깨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 교설이라고 하는 연기법, 삼법인,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사성제, 팔정도, 사념처 등 이 모든 교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다르타의, 현실[일체, 제법, 우주, 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가만히 관찰해 봄으로써 연기법이라는 현실의 법칙을 조견할 수 있었고, 그 연기법을 통해 현실의 속성, 성질인 삼법인의 교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구성방식을 가만히 비추어 보니, 우리의 신, 구, 의 3가지로 행한 행위가 업이 되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법칙, 현실의 성질, 현실의 구성방식에 대하여 조견하시고는, 그렇다면 현실, 일체, 제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비추어 보셨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교설이 바로 현실의 모습, 일체 제법, 다시 말해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비추어 보신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셨습니다. 즉 조견의 결과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無我)의 교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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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사진 : 법주사]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지고 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에 대하여 애착을 버려야 할 것이니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무상한 존재인데,
하물며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동산의 나뭇잎이 어찌 ‘내 것’일 수가 있으며,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돈을 지불한다고
어찌 ‘내 땅’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뿐.

이 세상에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일체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완전한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온 것에 대해서까지
억지로 다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 소유물들의 특성을 알 필요는 있다.
내 소유물들은 인연 따라 잠시 나를 스쳐갈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잠시 보관하면서 인연 따라 쓸 뿐이다.

잠시 스쳐가는 것들을 스쳐가지 못하게
‘나’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되면
나를 중심으로 우주적인 에너지는 정체되고 만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의 목적은 끊임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여행길 위에서 잠시 들른 간이역일 뿐이라는 것을.
그 어떤 것도 종착역으로써 나에게로 온 것은 없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지.

그러니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보시가 아니라 그저 가야할 곳에 갔을 뿐인 것이다.
그것이 그것의 다음역이었던 것이지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주고 받았다는
그 생각이 바로 집착이다.
Posted by 법상



[두륜산 대둔사 부도탑]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궁금해 하는 문제일 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러해야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그 엄청난 무엇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더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과 자기 자신과의 사이를
너무 멀리 잡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깨달음은 그 어떤 특정한 근기의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 말입니 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행자라고 자부하는 이들마저도
'이번 생에는 복이나 짓고 그러다보면 다음 생 언젠가 깨칠 날이 있겠지'
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법회 때 한번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 다.
'성불(成佛)하는 것이 이번 생의 원(願)이신 분?'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생각은 하였지만 이 정도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입으로는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 하면서
실은 성불보다는 눈앞에 닥친 욕망의 충족에 더 큰 마음을 쓰고 살아갑니 다.

성불, 깨달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딴 세상의 일일거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10년 씩 장좌불와하는 스님들이나,
수십 년 세속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나 법우님, 생활수행자 도반님들!
깨달음에 대한 환상에서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깨달음 그 자체는 환상도 아니요,
신비주의적인 그 어떤 오묘한 형상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깨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그렇게 어렵게 바라보고 있 는
그 시선이 나를 깨달음과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깨달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일 것이며,
하늘이 열리고 온 우주가 개벽을 하고
천지가 내 안에 와락 들어와 안기게 될 것이라는
그런 환상적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이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분별 망상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가장 단순한 일이며,
가장 평범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운 일일 터입니다.

그 어떤 엄청난 노력과 집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 그 자체가 우리를 진리에서 너무도 멀어지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 다.

본래면목자리, 참나 주인공이란
멀리서,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안에서 언제나처럼
은은한 시선과 미소로 우리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일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찾을 수 없는,
눈이 다른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늘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눈)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보여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닐 터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 다.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일체 법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正見)'
바로 그것이 깨달음일 것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가까운 것 말입 니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한 것이기에
우리들의 깨달음에 대한 환상적 고정관념이
깨달음에서 우리 스스로를 점점 멀어지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신의 잣대로 재고 분별하여 바라보는 이가 중생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가 깨달은 이일 터입니다.

깨달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터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나는 과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눈을 가졌는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들의 시야는 그러지 못합니 다.
천지 법계는 있는 그대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여여한 모습으로 놓여있건만
우리의 시선은 온통 고정관념과 업식(業識)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 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는 숯한 편견과 색안경을 낀 채 '자기잣대'로 삐뚫어지게 세상을 바라 봅니다.

어느 한 대상을 바라봄에도
자기잣대 만큼만 바라보고 자기만큼만 판단합니다.
내 식대로의 바라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바라봄에도
수백, 수천명이 바라보는 그 '한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여여히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사람이건만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 수대로 수백, 수천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에 대해
읽고 계시는 분들은 어느 한 분이라도
똑같은 모습으로서의 글쓴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읽고 계시는 분들 모두는 '자기의 잣대만큼의 글쓴이'를 인지할 뿐입니 다.

이 말은 곧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는 오직 하나이건만
바라보는 이는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를 천차만별의 잣대로 인지합니 다.

그처럼 우리의 눈은 정견(正見)의 바라봄이 되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가 쌓아 온 만큼의 업식따라 제 멋대로 바라봅니다.
온갖 분별심을 투영하여 대상을 바라봅니다.

'과연 나는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가'
하고 수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반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을 보더라도 생김새며 출신, 학벌 등과 상관없이
처음보는 그 사람을 여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것들 말입 니다.

깨달음의 시선은
무분별(無分別), 무소유(無所有),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편견 없는 맑은 시야입니다.

분별하지 않음이며,
소유하지 않음이며,
얻고자 하지 않음이고,
그렇기에 집착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지 않 으며,
'내것이다, 네것이다' 소유의 관념을 짓지 않고,
아집 때문에 내것으로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무분별의 맑은 시야입니다.

그저 일체의 모든 대상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분별 지을 수도 없고,
소유 할 수도 없으며, 집착 할 것도 없는
애써 말한다면 '그저 그런 것' 일 뿐입니다.
숭산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입니다.

어떻게도 이름 지을수 없고 분별할 수 없기 에
'이것이 무엇인가(이뭣고)' '나는 누구인가' 했을 때
앞뒤가 꽉 막혀 버리고, 말을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의문'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이렇듯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수행자 밝은 도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연습을 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 연습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연습이며, 부처님 마음 연습이 됩니 다.

그러한 편견 없는 '바라보기'는 일체 대상 을 대함에 있어
'무분별' '무소유' '무소득' '무집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실천이며,
방하착(放下着)의 생활수행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을 버리고
분별하지 말고, 소유하려 들지 말고, 얻으려 들지 말고, 집착하지 않 음,
그래서 일체를 다 놓고 가는 방하착의 생활실천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