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생활수행'에 해당되는 글 339건

  1. 2007.12.12 일체를 다 받아들여라
  2. 2007.12.11 방하착과 불교교리
  3. 2007.12.11 행하는 바 없이 행하라
  4. 2007.12.11 방하착, 그 마음을 놓으라
  5. 2007.12.11 내 고집을 버리라
  6. 2007.12.04 죽음을 준비하자
  7. 2007.12.04 기도하기 힘들 때는
  8. 2007.11.09 연기법의 생활실천
  9. 2007.11.09 연극처럼 살라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입니다. 적멸보궁이란 온갖 번뇌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란 뜻.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수행하던 중 문수보살로부터 석가여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한 뒤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저기 보이는 법당 뒷 산 어디엔가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데요. 또 하나, 법흥사는 우리나라에서 산림조류가 가장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까막딱따구리, 수리부엉이를 비롯한 온갖 희귀한 천연기념물인 각종 철새와 텃새가 즐겁게 노래하는 도량으로도 유명합니다.]

현실이라는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일어나는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는
재수 없게 어쩌다 생겨난 일이 아니요,
우연이나 숙명적으로 생겨난 일도 아니며,
그 어떤 절대자가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
만들어 낸 것 또한 아닙니다.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경계는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일 뿐입니다.
잠시 분별심 내어 만들어 낸
거짓된 신기루이며 한바탕 꿈일 뿐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생기고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레 소멸해 버리는 인연생(因緣生)이며 공생(空生)입니다.

그렇기에 일체는 다 공(空)하다 하는 것입니다.
일체는 다 인연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그리고 전생에 지어 온
일체의 모든 행위들이 원인의 씨앗이 되어
때가 되면 무르익어 열매가 열리듯
그렇게 때맞춰 과보를 가져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만들어졌다가
그저 인연따라 흩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누가 인연 지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입니다.

쉽게 내 뱉었던 말 한마디,
머리 굴려 쥐어 짜낸 생각 하나 하나,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 하나 하나가
0.1%의 에누리도 없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어느 것 하나 우연이 없습니다.

수 억겁을 윤회하며
우린 참 많은 행위를 일으키며 살았습니다.
수많은 업을 짓고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엔
그 오랜 세월동안 지어 온
일체의 모든 업장이 고스란히 다 녹아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일으킨 신구의 세 가지 선업도 들어 있고,
악한 마음으로 일으킨 탐진치 3독심도 가득합니다.

누구 하나 선한 업만을 지은 이도 없고
누구 하나 악한 업만을 지은 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선악의 모든 업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현실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선업만을 짓고 살았다면
물론 즐거운 일만 있을 것이고
악업만을 짓고 살았다면
물론 괴로운 일만 있을 테지만,
이 모든 선악의 일상이 우리의 과거이므로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이나 미래 또한
괴로움과 즐거움의 수 없는 반복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과의 도리를
실천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절에 오며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나쁜 일들은 부처님께서 다 거두어 주시고
늘 즐거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서 당당해 져야 합니다.
떳떳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은 것 모두 내가 받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진실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체의 모든 경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행심입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을 연기법, 인과법이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말합니다.
큰스님네들은 연기와 공을 실천키 위해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기, 공을 실천할 수 있고
어찌 해야 비울 수 있습니까.

모두를 버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진정 비우는 것인가요?

비운다는 것은
공을 실천한다는 것은
연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지을 때는 선도 악도 모두 닦치는대로 지어놓고
받을 때 되어선 좋은 것만 받겠다고 하니
중생심이란 얼마나 교활합니까.
괴로움은 받기 싫은데
지어 놓았으니 지은대로 자꾸 나오게 되고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내 앞에서 당당해 지세요.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 들이세요.

나는 수행했으니
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괴로움이 비켜갈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진정한 수행자라면
괴로움, 즐거움 이 모두를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수행 많이 한다고
괴로움이 비켜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수행심으로 괴로움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이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괴로움의 과보가 왔을 때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셔야 합니다.
내 안에서 다 녹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용광로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나의 참생명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까짓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이세요

나의 참생명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님 이십니다.
Posted by 법상



[현재 한국에 하나밖에 안 남아 있는 목조탑, 국보 55호 법주사 팔상전, 법당 내부에 부처님의 일대기인 팔상성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전체 높이는 상륜까지 65미터로 현존하는 한국 탑파중 가장 높은 것이지요.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절에 갈 때는 오후 5시 쯤 느즈막이 가도 좋습니다. 도량을 참배하다가 보면 저녁예불의 장엄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지요. 특히 요즘같이 낮이 긴 여름에는... ]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무아(無我)의 진리...
연기(緣起)의 진리...
삼법인(三法印)의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진리...
중도(中道)의 진리...
공(空)의 진리...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 모든 교리에 대한 충실한 실천수행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一切, 森羅萬象)
다만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잠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 인연들이 서로 연(緣)하여 일어나고(起)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그런 것입니다.[연기법]

인연이 만나 생(生)함이 있는 것과 같이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멸(滅)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는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제행무상]

그러나 이렇듯 연기의 진리대로
인연따라 잠시 왔다 가는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내 것'이라 집착하여 붙잡으려 합니다.
잠시 내게 온 돈을 '내 돈'이라 하고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식' '내 가족' '내 사랑'...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상]

그러나 본래 내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제법무아]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따라, 전생 업식따라 왔다 가는 존재일진대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는 마음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데에 집착하니 '상대'가 생겨납니다.[인상]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는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그 최초의 분별심은 이윽고
수많은 지엽적인 분별심을 몰고 옵니다.[중생상, 수자상]

그런 수많은 분별심들은 어느 한 쪽을 고정짓고 대상화 하여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이라는 수많은 극단의 분별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본래로 인연따라 길고 짧음이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있고
귀하고 천함이 있는 것이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은 길다.'와 같은 명제 또한
인연따라 전봇대 옆에 서면 짧아지고
이쑤시게 옆에 서면 길어지는 것이지
본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함 또한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라,
목이 길어야 아름다운 나라,
아랫 입술을 뚫어 길게 늘어질수록 아름다운 나라,
우리처럼 가늘고 눈코입 배치가 잘 되어야 아름다운 나라....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 잘 배치된 아름다움이겠지요.

이렇듯 세상 모든 극단적인 분별들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인연따라 장단, 귀추, 생사, 거래, 시종, 고저, 대소 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어느 것을 보고 길다 짧다 할 수도 없으며
잘났다 못났다 할 수도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래로 극단은 존재하지 않아 모두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연기법, 삼법인, 무아를 이와 같이 바로 볼 수 있는
옳고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을 수 없기에 중도이며
그렇게 되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깨끗하다 더럽다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 없다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
인연따라 연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이고
무아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 어느 한 물건이라도
이렇듯 연기이며 무아이고 중도, 공이기 때문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은 공한 것이니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어느 하나 집착할 대상이라곤 없습니다.[무집착, 무소득]
그렇기에 '집착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放下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하착이야말로
이렇듯 모든 불교 교리에서 이끌어 낸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그럼 불교 교리의 집성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다시한번 방하착의 교리를 체계지워 설명코자 합니다.
사성제를 일컬어
경전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를 해 보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일체는 잠시 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일체는 '고(苦)'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는 다른 말로 공(空)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세상을 중도(中道)의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아
지혜(智慧, 明)를 증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와 삼법인, 공, 중도의 시각으로 일체을 정견(正見)해 보니
세상은 괴로움[고성제(苦聖諦)] 아님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
모두가 집착(執着)에서 옵니다.

연기, 삼법인[무아, 무상, 고], 공, 중도를 바로 정견하여
일체에 집착할 것이 없는 허망(虛妄)한 것임을 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공하고 허무한 것에 집착을 하니
온갖 분별망상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로 업(業)을 짓게 되고
집착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원인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인 것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괴로움 소멸이란 지혜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알고 나면 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고)와 문제의 원인(집)을
지혜의 견해(연기, 삼법인, 중도, 공)로써 올바로 알고 나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의 해답이 열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괴로움 소멸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니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 정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올바른 괴로움 소멸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성제를
여덟가지 길로 나누어 팔정도라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성제를 가장 쉽게 풀어 이야기 한다면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방하착이 바로
집착(着)을 놓아버려라, 비워버려라,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알아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하착인 것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핵심을 '무집착(無執着)'이라 이야기 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둘러 가는 길이 아닌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방하착입니다.

일체(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모든 경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이란 놈입니다.
그것을 놓고 가는 길이
참 수행자의 밝은 정도인 것입니다.
방하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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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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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김룡사, 김룡사는 인근에 있는 참선도량 대승사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도량입니다. 다른 도량들이 유명세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 때 이 두 도량은 차분하고 고요하여 정말 절 같은 절입니다. 성철스님께서 30년 수행의 침묵을 깨시고



"많은 법우님들께서 '방하착' '방하착' 하니
그렇게 다 놓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많이들 궁금해 하셨습니다.
다 놓고도 일체를 다 할 수 있는 도리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방하착, 방하착 하니
많은 이들이 의심을 가집니다.
그러면 다 놓고 나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방하착(着)이란
착심(着心)을 놓으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멍 하니
바보처럼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

마땅히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일입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살아갈 일입니다.
다만 마음을 한 쪽으로 머물러 착(着)을 두어선 안됩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복을 까먹는 일일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복을 짓고 순간 순간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밝은 깨침의 마음으로 늘 순간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벌되 돈에 대한 '집착'으로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 그 자체에 마음이 머물면
많이 벌게 될 때 즐거울 수 있지만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돈에대한 집착을 놓으면
많이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놓았기에 적게 벌어도 여여하며,
많은 돈을 벌었어도
다른 이를 위해 보시를 할 때
아깝다는 마음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돈에 대해 집착이 없으니 돈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지 '집착'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면
나와 함께 해서 괴롭더라도 붙잡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내 여자' '내 남자'라고 하는 또 다른 아상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내것'이라는 생각
나 좋은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我執)'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맑고 순수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라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렇듯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연장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경계를
그저 주인공,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참나라고 하는
그 지고함 속에 넣고 녹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녹이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를 이렇듯
내 안에 밝은 자리에 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방하착.. 놓고 가는 이는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여여합니다.

함이 없이 늘 묵묵히 일을 해 나갑니다.
이렇듯 함이 없이 해야합니다.
일을 하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면 위험합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
'내가 한다'고 하는 그 아상, 아집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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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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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경내에 피어난 금낭화, 5월이면 전라도 어느 도량을 가든 금낭화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절에는 많이 피어있는 꽃입니다. 봄에 여린 잎을 채취하여 나물로도 먹으며,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일 터입니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는 일일 터입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아! 괴로움!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연따라 잠시 온 것을
''내 것''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放下着)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입니다.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습니다.
''나'' ''내것''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놓음...
방하착(放下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방하착(放下着)!!
그 속에 불교 수행의 모든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방하착...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 ''집착, 걸림''을 의미합니다.
즉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참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나의 자리에
몰록 놓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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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대승사는 요즘의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다른 유명절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들어가는 마을에서부터 입구 어디에도 현대식 건물을 찾기 힘들고, 다른 절 같이 식당이며 온갖 것들이 있지 않은, 그저 완전히 시골 마을 시골 절입니다. 사불산 해발 600미터높이 산마루에 자리한 대승사는 근래 대승선원에 치열하게 정진하는 선승들이 많이 찾는 참선도량이기도 합니다. 부속 암자로 나옹스님의 출가 암자이자 성철스님께서 정진했던 묘적암과 비구니 선원으로 아기자기한 도량 윤필암 그리고 보현암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 속에 갖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그렇게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안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 갈 때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 '내 것' '내 생각'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연따라 잠시 왔다 스쳐 가는 것을
애써 잡아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울타리를 쳐서
'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빠져버립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나'에 집착합니다.

부처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너가 아니야
그 울타리만 걷어차고 나오면
무한한 세상이 다 네 것이야'

지금껏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많이도 늘려놓았습니다.
'내 것'을 늘리는 일,
그것이 우리네 사는 일상입니다.
우리네 한평생 살림살이입니다.

누구나 '내 생각'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관이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철저한 객관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순수한 '내 생각'은
쉽게 찾아낼 수 없습니다.
모두가 '길들여진 내 생각' 이었음을 봅니다.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내 생각이었음을...
지독한 고정관념의 연장이었음을...

사회가 만들어낸 수많은 고정된 틀
그 수많은 고정관념들을
뭉뚱그려 '내 생각'으로 만들어 놓고
주관이라 그럽니다.
내 생각, 내 가치관이라 그럽니다.

선과 악에 대한
자신의 판단 또한 그렇습니다.
여기에서는 '선'이었던 것들이
다른 쪽으로 가면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선과 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고 선이라 하고 악이라 해야 합니까.
극단적인 비유로 살생(殺生)은 모두 '악' 인가요?
상황에 따라 그 또한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들은
고정된 바 없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딱하게도
지독하게 고정되어 돌아갑니다.

스스로 혹은 사회에서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고정되게 틀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기준에 빠져 우리는 울고 웃고 그럽니다.
그 얄팍한 틀을 깨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것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선악의 비유를 들었지만
대부분의 모든 관념의 틀이
이렇듯 고정지은 바 대로 어처구니 없게 돌아갑니다.

상황 따라 바뀌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고정관념은 상황이 바뀌어도
한 가지 관념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공(空)에 너무 치우친 이에게는 유(有)를 일깨우셨고,
유에 치우친 이에게는 공의 이치로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건만
우리의 생각들은 너무도 편협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고정된 관념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지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린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집을 버리면 세상이 고요합니다.
주위가 평온해 집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처럼...
우물에서 뛰쳐나온 개구리처럼...
그렇게 세상을 보는 기준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뻥 뚫려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이미 내 앞에 활짝 열려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이 '꼭 이렇게 해라' 하고 이야기 할 때
고집이 많고, 고정관념이 큰 사람일수록
내 생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쉽게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내가 옳다면 상대도 옳을 수 있음을
가슴 깊이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니야 그래도 이 것만은 내가 옳아!' 라고 고집 할 때
이미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100% 옳은 것은 없는 법입니다.
상황따라, 인연따라 옳은 것일 뿐입니다.

어차피 바꾸지 못할 바에는
빨리 내 고집을 포기해 버려야 합니다.
빨리 방하착 해야 합니다.
턱! 하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의 틀을 깨고 보면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이해가 달라 질 것입니다.

우유부단하게
무조건 상대방에게
이끌리기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리 고정지어둔 고정관념을
깨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한 마음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마음속의 분별심들 때문에
정견(正見)의 잣대가 흔들려선 안됩니다.

텅 빈 마음으로
상대의 의견을 내 의견처럼
몽땅 받아들여 볼 수 있는 열린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의 의견과 내 의견의 대립이 아니라
그저 평등한 두 가지 의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 고집을 버리고
상대를 향해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법은 없습니다.
이것도 법이요, 저것도 법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보면
세상엔 참 옳은 의견이 많습니다.

이건 이래서 옳고
저건 저래서 옳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지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는 어두운 마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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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5월, 동백의 낙화...]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여
생하고 멸하는 것 또한
본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生),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死)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因)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불[果]을 얻을 수 있으며
우리는 따뜻함(報)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던 것이 아니며,
공기 중에 있던 것도,
비벼주는 손 안에 있던 것 또한 아닙니다.
불은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며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불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듯,
우리 존재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잠시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죽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냇물이 태양이라는 연(緣)을 만나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뭉쳐 구름이 되며
구름이 다시 비가 되고 눈이 되고 그럽니다.

그렇다고 우린 시냇물이 죽고 수증기가 되었다고 하지 않으며
수증기가 죽어 구름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 것 처럼
우리의 인생 또한 그와 같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구름이 없어짐(死)과 동시에 비가 생겨나듯(生)
생하는 순간 멸하는 것이며 멸하는 순간 다시 생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네 죽음 또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이 껍데기 유효기간이 다 되어 새롭게 몸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이 생에서 지은 업에 걸맞는 새로운 껍데기를 찾아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부터 생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착하므로 온갖 괴로움이 따라 붙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空性)의 올바른 이해이며
연기(緣起)의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상할 수 있다면
우리네 목숨 없어지는 것에도 여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인생 일대의 명제 앞에 두고
당당히 싸워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 조차 이겨 낼 수 있다면
죽음의 관념 조차 텅 비워 방하착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여여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명제 앞에서는 그 어떤 일상의 괴로움도
그다지 큰 괴로움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까짓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면 생사를 놓아버릴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이따금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합니다.
아무리 힘겨운 경계라도 죽음과 맞바꿀 수는 없기에
죽음을 초월하는 명상 앞에 더 이상 괴로움은 있지 않습니다.

늘 죽음과 마주하는 삶,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네 생활 수행자들의 첫 번째 마음 자세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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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수행으로 바꾸고자 하는 초심 수행자들이
종종 '기도'에 얽매이는 경우를 봅니다.

삶을 되돌아 보며
이따금 명상을 해 보고도 싶고
절에 가서 기도에 동참해 보고도 싶으며,
때로는 수련회에 참여해 자신을 찾고자 노력도 해 봅니다.

그러나 일과 수행
일상과 수행자의 삶이란
언제나 마음 먹은대로 되어지지만은 않는 법입니다.
놀고 흥청이던 이전의 오랜 습(習)들이
고요해지고자 하는 수행심을 방해하기 일수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집에서 기도를 하고자 합니다.
108배도 해 보고,
금강경도 독경해 보고,
아침 저녁으로 예불이며 참선도 해 보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굳게 마음먹었던 108배며, 금강경 독경이
첫 날 마음 같지 않고
절에서의 마음 같지 않게
왜 그리 길게 느껴지고 힘겹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매번 그런 식입니다.
기도하겠다 하고는 몇 일 못 가서,
아니 하루도 못 하고 주저앉기 일수입니다.

108배에 또 금강경 독경에 목숨 걸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불, 법, 승 삼보님 전에 나를 낮추고 귀의하는
그 맑고 향기로운 지극함이면 충분합니다.

업식(業識)이 이겨내지도 못하는
108배며, 그 긴 금강경을 독경하려 하니 어렵습니다.
하루 한 번이라도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전을 하루 한 두 구절씩 읽고 명상하는 것이며,
반야심경을 아침 저녁으로 독경하는 것,
아침 저녁 108배 대신 3배, 혹은 7배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108배가 어려우면 지극한 마음으로 천천히
단 5분간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절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정좌 하고 앉아 108번 지극하게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심도 좋을 듯 합니다.

108염주나 작은 단주를 들고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관세음보살' 염불하시는 것도
참 좋은 일상 기도입니다.
하루 단 10분, 아니 5분만 시간 낼 수 있어도 됩니다.
하루도 거스르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7일간 108배를
혹은 100일간 금강경 1독씩을 원 세워놓고
몇 일 못가서 그만 두는 것 보다
몇 배 이상 좋은 기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근기(根器)에 맞는
스스로의 기도방법을 찾으시면 됩니다.
처음엔 그리 시작해야 합니다.
어렵지 않게 기도를 집에서나 일상에서 편히 할 수 있는
그런 포근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할 뿐,
기도에 집착이 되어선 안됩니다.
기도가 되려 걸림의 대상이 되어선 안됩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지켜낼 수 있는
아주 작은 생활 기도를 원 세워 보시길 바랍니다.
어떤 바쁜 날이라도, 일상에 찌든 날이라도, 설령 휴가철이라도
쉽게 마음내어 지킬 수 있는 작은 기도를 말입니다.

그것은 기간을 정해두고 그 날만 기도하면 된다는,
또 절에 갈 때만 마음 곱게 먹고 기도하면 된다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일깨우는 큰 정진력, 생활 수행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렇게 쉽고 자신에 맞는 기도를 하더라도
이것만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크게 마음을 내어
발심(發心) 할 인연이 된다면
육신의 집착과 게으름, 즉 몸뚱이 착심을
큰 발심으로 이겨 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 때는 3일이고, 7일이고, 3.7일, 혹은 100일, 1000일씩
크게 신심내어 업식과의 한 판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 때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자신과의 여여한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도 근기에 맞아야 합니다.
현재 자신의 상황에 맞아야 합니다.

무조건 힘든 것, 육신을 괴롭히는 것만이 좋은 기도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집착않기 위해 너무 편한 기도만을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그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 바로
부처님 당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단면인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고민을 하였던 듯 합니다.

물론 부처님의 결론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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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황악산 직지사



[신라 아도화상이 세운 절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 절안의 오랜 소나무의 운치하며 깊은 계곡 맑은 물소리가 항상 맑게 들리는 절입니다. 경내에 나무가 참 많고 도량이 깨끗하기로 유명, 직지사는 전 대중스님들이 운력을 중시하기로 소문났지요. 아침 공양이 끝나면 모든 스님들이 나와 도량에서 운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단순하게 사상으로만 그치는
허울좋은 관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법은 죽은 사상이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자라고 한다면
연기법을 믿는 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주위엔
참 겉보기만 불자인 사람이 참 많은 듯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럿이 있을 때는
참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쉽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던가요...

다른 법우님들과 함께 차를 탈때면
참 조심스레 천천히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차를 몰게 되면
어느덧 거리의 무법자가 되어
다른 운전자를 황당케 하는 경우를 저 또한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연기법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법사인가?
하고 되묻곤 한답니다.
진정 연기법을 아는 이는
연기법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연기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첫째가 인과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인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상대에게 욕좀 얻어 먹고 나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어느정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만
혼자있을 때라면 그 과보 그대로를 훗날 모두 받아야 합니다.

법계의 인과는 어느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법계에 그대로 저축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법계의 인과라는 철저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못 보이면
다음에 다시 잘 보이게 되면 그만이지만
한 번 지은 업장은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없게 됩니다.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지은 모든 것이 그대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무심코 지은 미세한 생각까지도 철저히
내가 짓고 내가 그대로 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인과를 믿는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누가 있든 없든
항상 맑고 향기로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어느 한 때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 순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어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순수한 삶을 살아 간다고 확신 할 수 있는가요.

그러나 우린 이미 인과라는 법계(法界)의 이치에
우리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노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일체 모든 이에게 나의 삶을
그대로 보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연기를 믿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삶, 그리고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 한 톨에 담긴
일체 법계의 은혜를 명상해 보셨나요?

농부의 은혜,
농부를 낳아주신 부모님 그리고 또 그 부모님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속의 모든 조상, 존재의 무한한 은혜...

곡괭이의 은혜, 비료의 은혜, 비료 공장 모든 인부들의 은혜
토양의 은혜, 태양의 은혜, 비와 바람의 은혜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공간을 향기롭게 감싸고 있는
이 모든 무한한 은혜...

우린 일상을 살아가며 작고 하찮은 일에서도
이 모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니 순간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벽 두 눈을 뜨면서부터 감사하는 연기의 실천은 시작됩니다.
아침을 깨워주는 자명종의 은혜, 침대의 은혜, 맑은 아침공기의 은혜...
새면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의 은혜, 비누, 샴푸의 은혜...
아침 공양에 올라온 이 모든 음식물의 은혜...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온 우주의 밝고 넓은 은혜...

... 너무나도 너무나도 세상엔 감사할 것들 뿐입니다.
이런 긍정명상을 통해 우린
나를 살려주고 있는 세상의 무한한 은혜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고개들어 세상을 보며 감격스런 눈물이 흐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무한한 참생명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의 나툼이심을...

그렇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는
결코 둘이 아닌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한마음 한생명이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무아(無我)이며 동시에 전체아(全體我)인 것입니다.

이런 감사한 세상을 향해,
나와 둘이 아닌 일체의 참생명을 향해,
무한한 생명력으로 나를 살려주고 있는 법계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회향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회향해야 합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회향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회향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기법을 믿는 수행자는
언제나 회향할 꺼리를 찾아 눈을 돌립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기에 회향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일체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회향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이 그저 이유라면 이유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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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한바탕
신나는 연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이 연극의 주인공이고 작가이고 감독입니다.

연극의 주인공은
그 연극의 대사가 슬프다고 실제로 슬퍼하고
그 대사가 즐겁다고
실제로 즐거워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연극이라는 것은 실제상황이 아닌
비실체적인 것을 알기에
그 속에서 회사가 부도가 나든,
애인에게 버림을 받든,
직장 상사에게 비난을 받든
사람들에게 심한 욕을 듣든
아니 그 이상의 괴로움 속에서도
겉으로 드러난 괴로운 표정 연극은 할 지언정
실제 참된 주인공은 흔들려서 괴로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즐거워도
크게 즐거움에 노예가 되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연극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한 연극과 같이
비실체적인 것이기에
인생 속에서의
온갖 괴로움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괴롭다고
크게 얽매여 집착할 필요가 없으며
즐거움에도
크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 괴로움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인연에 따라 잠시 온 것뿐이며
인연이 다하면 자연히 흩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주인공은 어차피 각본을 다 짜놓고
연극을 하기에 재미가 없지만
우리네의 인생은 당장 앞에 일어날
10분 후의 일도 예감할 수 없기에 더욱 박진감이 넘칩니다.

이미 써있는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충분히
내 연극의 각본(業力)을 바꾸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전생 그 전생부터 가지고 있던
우리의 업장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업이야 어떻든
충분히 내 삶을 바꾸어 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연극인가요.
이 얼마나 박진감 넘치고 흥미 있는 연극인가요...
이렇듯 우리의 삶이 한바탕 연극인 줄
올바로 아는 사람은
인생의 크고 작은 경계에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연극에서 스스로
연극 전체(세계, 주위 환경, 사람들...)의 주인공이 되어
그 박진감 넘치는 연극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인생인가요...
이렇게 인생은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실로 인생 전체를 연극이라 관할 수 있다면
살며 느끼는 괴로움들은 크게 적어짐을 느낍니다.
다만 연극에 충실 할 뿐
그 속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내 삶을 망쳐버리지는 않게 됩니다.

어느날인가 문득
'인생은 참으로 연극과도 같구나'
하는 진한 감동이 가슴을 밀고들어왔습니다.
그리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나의 모습들...
이기적인 모습,
작은 일로 아웅다웅 하는 모습,
좀 더 성공 되고자 애쓰는 모습,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어리석은 분별들...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헛되지만 너무도 소중한 나의 모습임을...
이 모두가 내 연극 속의 주인공들임을...
주인공이 곧 엑스트라임을...
이 모두가 참으로 고운 '하나'임을 말입니다.

세상을 참으로 살아 볼 만한
괜찮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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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