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물도 존중해야 하는 이유 - 생물과 무생물 구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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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물도 존중해야 하는 이유 - 생물과 무생물 구분은 없다

목탁 소리 2014. 6. 1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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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에서는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곤 한다. 유정물, 다시 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prion)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눠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Stanley B. Prusiner)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불교에서도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이처럼 세상 모든 것들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와 다르지 않다는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면 그 마음이 바로 나 자신을 존중, 공경, 찬탄하며 나 자신을 드높이는 연습이 된다. 세상 모든 것을 드높일 때 우주법계는 나 자신을 드높여주는 온갖 일들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존귀하게 여길 때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이 존귀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를 배웠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웠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비중으로 공경 받아 마땅한 무한 생명의 어머니인 것이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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