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1.25 완전한 행복을 찾는 방법
  2. 2009.12.16 가난해서 감사합니다!
  3. 2009.12.12 스스로 선택한 가난의 삶

완전히 행복해 지는 방법
  -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나와 부처와 신은 하나다

 

불성(佛性), 신성(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신이 하나란 뜻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하나란 뜻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하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부처로써, 신으로써 완전한 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사상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성자, 현자, 선각자들과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가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도울 때 사실은 나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상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가

상대방과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며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상 없이 보시하라, 무주상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것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불성과 신성이란 것은

부처님의 성품, 신의 성품 그 자체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신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불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그렇기에 사실은 보시해도 한 것이 아니다.

 

너도 완전하고 나도 완전하며,

너도 풍요롭고 나도 풍요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에너지의 이동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은

‘이렇게 하라’는 윤리 규정이거나, 명령이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불성이 있다, 신성이 있다는 말은

곧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하고 충만하다.

그렇기에 불성과, 신성과 다르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써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완전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세상 자체가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 세상의 본 바탕, 근원은 이러한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완전성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완전한 자비, 동체대비 그 자체인 것이다.

 

추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현실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신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다.

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진실로 말씀해 주셨고,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도 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제해야 할 중생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삶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

 

그러한 진실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나쁘다’고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판단과 분별작용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무분별의 중립적인 현실에

끊임없이 판단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일 뿐이다.

 

본래는 완전한 자비의 불성이고,

완전한 사랑의 신 그 자체만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

우리를 꼬셔서 지옥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 밖에 없는 완전한 우주법계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순전한 상징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의 싸움 또한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상징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신이 세상을 창조한 근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인간의 상상이거나,

상징이었을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완전한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며,

아상이고, 에고라는 허상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즉 내면의 번뇌, 욕망, 집착, 화, 어리석음, 아상인 것이다.

 

악마는 바로 아상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판단이다.

마왕은 바로 탐욕과 화와 번뇌이다.

 

즉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나, 상황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나의 판단과 해석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미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시냐고.

지금 자신의 삶이 대체적으로 행복한가 하고.

과거에 생각했던 행복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하고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반대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세상은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진실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삶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삶의 완전성을 삶에서 드러내는 법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고 빌고 욕망할 때

존재 본연의 완전성은 사라지고

결핍과 부족과 실패가 창조되고 만다.

 

사실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욕망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부처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다.

신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그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성과 신성의, 우주법계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완전성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신도

우주 법계도 언제나 완전하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실패 자체도 없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해서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생각이 모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삶을 창조하는 토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한 현실이 창조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현실이 창조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또한 내가 바로 당신이고, 우주이며, 존재 자체이다.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토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토대의 생각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른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의 본질에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창조된다.

사실은 바로 그 토대의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토대는 어떤가?

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신이라면 어떨까?

 

완전한 존재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

언제나 충만한 행복과 만족과 풍요로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환상도 없다.

그저 매 순간 순간 완전함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삶의 완전성이 창조된다.

 

아니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전했으며 완벽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 본연의 고향,

완전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귀의, 귀향!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이 말은 상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완전하고 풍요롭다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풍요로움이란

우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것이다.

내가 아까워하고, 축적하고, 적다고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결과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두려움 없이 도우라.

그 마음에 우주 근원의 에너지인

풍요와 완전성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풍요의 토대 위에서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풍요가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완전히 행복하다면

무언가를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미래에 오게 될 행복을 꿈꿀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완전무결한 행복이라고 외치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라.

넘치는 행복 그 자체인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행복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실패란 없다.

언제나 삶은 완전하며 성공적이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성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라.

현실의 상황에 대해 성공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운 현실을 창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공만을 창조해 낸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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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요즘 들어 부쩍 가난과 청빈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또 돌아보게 된다.
가난한 삶, 청빈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있어 아니 나에게 있어 가난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가난이란
모든 수행자들의 삶에 있어,
아니 모든 근원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삶이란
곧 근원적인 삶을 의미하며,
‘나’ 자신과 소탈하고 순수하게 대면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 가장 체험적인 수행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이야 말로
삶을 보다 윤기있고 지혜로우며
향기롭게 또 맑게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한 체험이자 요소인 것.

가난해야 그 속에서 맑음과 청정이
또 참된 지혜가 움튼다.
부유한 사람이 수행하기 보다
가난한 사람이 수행하기 훨씬 더 쉽고,
부유한 사람이 지혜롭기 보다
가난한 사람의 속 뜰에서 더 충만한 지혜가 움트는 법.

가난해야 수행하지
부유하면 수행은 벌써 멀어지고 만다.
가난과 수행
이것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가난했을 때
그 안에서 법계를 체험할 수 있고,
이 대자연의 경이로움이며
참 진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가난 속에서
또 저 대자연에 기댄 맑은 의식 속에서
지혜가 움트고 사랑이 움트지
저 빌딩 숲 속에서
거대한 부유함 속에서
참되고 맑은 지혜와 사랑은 그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은 다 가난했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이기 보다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서의 가난이기 보다는
그들의 삶의 지혜의 근원으로서의 가난이었다.

가난을 가까이 하고 살수록
우리 안의 지혜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가난하게 살자.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 비추어 보고 살자.

그렇다고 가난한 삶이란
단지 외적인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돈’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돈이나 경제력 같은 단어가
‘가난’이라는 단어를 좌지우지 할 만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요소가 못 된다.

가난은 돈이나 경제력과 상관없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가난해질 수 있다.
아무리 적게 소유하더라도
그 속에서 부유할 수 있는 것 처럼...

어쩌면 작은 의미에서 물질적 가난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물질적 가난을
구하려고 애써 좋은 조건의 직장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

물론 물질적 가난은 모든 이들에게 있어
맑고 지혜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 주는
참 좋은 요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에게 있어
‘가난한 삶’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설사 물질적 풍요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린 그 속에 살면서 가난해 질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어렵지만 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소유에, 그 부와 풍요에 집착하지 않는 것.

다시말해 삶 그 자체가 가난해야 참된 가난이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만이 참된 가난인 것은 아니라는 말.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마음 속에 욕심과 욕망을, 또 물질적인 부를 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많이 소유해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가난할 수 있다면
그는 실로 가난한 것이다.

삶의 모습에 있어 가난이란
말하자면 청빈 같은 것인데,
마음에는 바라는 것이 없이 자족할 수 있어야 가난이고,
행동에 있어 절약하고 절제하며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갈 수 있어야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많이 소유해도 소박하게 살 수 있다.
배고플 때 인연따라 내게 온 공양을 먹으면 되는데
욕심이 시키는 대로 밥이 있는대로 불구하고
더 맛있고, 더 많고, 더 비싼,
더 좋은 음식, 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소박하게 사는 것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칫솔질을 할 때라도
한 컵으로 할 수 있는데
수돗물을 콸콸 쏟아 붓는다면
이 사람은 가난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추우면 있는 옷 챙겨 입으면 되는데
더 비싸고, 더 좋고, 더 예쁜 옷을
그것도 몇 벌씩,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올 때마다
새로 사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어릴적 아버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기업의 회장이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마시고는
남은 소주를 호주머니에 넣고 가더라는 말씀.

이런 사람이 요즘에는 있는가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끼고 절약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실천,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욕심과 욕망 보다는
정말 필요한 작은 소유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베풀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수백억을 가지고 있더라도
가난에서 오는 참된 지혜와 미덕을
그대로 안으로 움트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물질들은
그 사람 것이 아니라
법계의 것이고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가난을 꿈꾼다.
내가 늘 부유하게 살지만, 그래서 항상 부끄럽지만
내 안에서는 늘 맑은 가난을 꿈꾸고 있다.

우리들 모두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맑은 가난을 꿈꾸며 실천할 수 있을 때
바로 그곳이 극락이고 천상이 아니겠나.

그랬을 때
이 세상은 항상 충만한 곳이고,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가난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부지기수다.

‘최소한의 필요’의 영역을 정하고
그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다 베풀어 주는 것도 가난의 실천이며,
무엇보다 삶이 절약과 절제되어 있어야 가난이고,
마음에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할 때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꼭 필요한 곳이라면
전 제산이라도 다 베풀어 줄 수 있어야 하겠고,
꼭 필요하지 않은 곳이라면
물 한방울 낭비하는 것에도 부끄러워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 가을...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 안의 가난에 대해 돌이켜 본다.

또 우리 모두가
가난에 대해
내 삶의 가난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비추어볼 수 있었음 하고 바란다.










Posted by 법상




[선암사에서...
원광스님과 수녀님...]

요즈음 들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거추장스러움도 많이 느끼게 되고,
소유에 오히려 걸리는 일들 또한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과연 내게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
스스로 비추어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충분히 지혜롭고
또 그 지혜로움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것이 요즈음 화두처럼 제 삶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선택한 가난은
무한한 지혜로움의 원천이며,
영혼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소박하게 살고, 청빈하게 산다는 건,
우리 안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본연의 능력을
삶 속에서 마음껏 발휘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로움을 충분하게 실현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부유하게 살고
그래서 편리하게 살게 되면
우리는 본래의 능력을 자꾸만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축소되면서
몸과 마음의 능력도 함께 퇴화되고 맙니다.

그렇게 부유함에 길들여져 무능력해 지고 나면
그 때부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게 되고,
반드시 물질적인 편리함이 뒷받침되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경제력이라는 경계에,
'소유'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요즘같은 사회에서야
경제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지을 수 있는 잣대인 듯
세상에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너도 나도 돈 돈 하며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사실 그 내면적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부유할수록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퇴화되고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며, 돈이 대신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부유하고 돈이 많을수록
우리 손과 발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고 따지고 비교 분석하는 등의
온갖 번뇌와 혼란스러운 삶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더욱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더욱 손과 발을 놀리길 원하게 되며,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부유해 지길 원하곤 합니다.
그 마음은 곧 욕심과 집착을 부추기고
욕심과 집착은 곧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됩니다.

발로 걸을 것 차가 다 알아서 태워 주고,
농사 지어 먹거리 만들 것을 돈이 알아서 다 만들어 주며,
스스로 밥하고 반찬 할 것을 가정부가 다 해 주고,
스스로 집도 고치고, 시장도 보고, 밭도 갈고
그래야 할 일들을 돈이 알아서 다 해주게 되니까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돈 많은 사람만 그런다는 게 아니예요.
요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분야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게 변했습니다.

컴퓨터만 치면 되는 사람,
운전수만 하면 되는 사람,
기계 돌리는 사람,
그것도 기계의 어느 한 부분만, 똑같은 공정을
하루 종일, 아니 일년 365일을 똑같은 일만 해 먹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의 일이 분업화 되다 보니까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어요.
그냥 한 가지 일만 잘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이야 그런 분업이 좋은 것이라고 야단인데다
한 분야만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습하면 전문가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보니
당연하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번쯤 깊이 있는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다 보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냥 깜깜무소식이고 어둔 밤입니다.
요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형광등 하나 갈지 못하고
변기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주 단순해졌고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 몸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의 길이
딱 막혀 버린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했을 때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밭도 갈고,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일하고,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져 버리면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없어져요.
어쩌면 소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그러나 인간의 삶에 있어 아주 근간이 되고 근본이 되는
그런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이
그냥 돈의 몫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자꾸만 놀게 되고
돈으로 만들어진 온갖 가공되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
판을 쳐서 우리 몸을 공격하고 맙니다.
몸으로 일하지 않으니까 우리 몸도 병약해 지는 겁니다.

이건 얼마나 불행인 건 지 몰라요.
몸이 해야 할 것을 돈이 다 알아서 해 주니까
몸의 많은 기능이 그냥 놀게 되고
퇴화되어 버리고
그러면서 온갖 병이 몸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람이 두 발로 흙 위를 걸을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몸과 마음의 근본이 서게 되는데
걸을 일이 없다보니
몸이 병약해 지고,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라도,
숲 속에서라도 자신의 창조적인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또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면서
비로소 대자연과 내 몸이, 내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데,
이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우리 몸은 자꾸 움직여 줘야 합니다.
내 발로 대지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으로써 대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것이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손과 발이 있는 이유는
손과 발로써 움직이고 일을 하며
살면서 필요한 모든 생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손발의 본래 목적을 방치하면서
그 일을 돈이 대신하고, 기계가 대신하도록 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손발 본연의 창의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퇴화되며, 온갖 병이 만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없으면
당장에 농사를 지어야 하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온몸으로 흙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흙과 가까워질 수 있고,
대자연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으로써, 손발로써 늘 일을 하고 씨앗을 뿌리며 거둠으로써
몸도 건강해 지고 마음 또한 함께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거두어 먹으니 욕심이 줄어들고
마음은 이내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더 많이 거두어 봐야 저장할 곳도 없고 상하기만 할 것이니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애쓸 일도 없어집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필요에 의해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모자란 것은 모자란대로 부족한 듯 아껴 쓸 수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의 조화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그 흐름과 하나되어 삶으로써
나 또한 대자연의 일원으로 건강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옛 선지식이나 현자들은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수 있고,
온갖 번뇌며 욕심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욕심과 집착 소유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며,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이 흘러가듯
아주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걸림없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길 빌어서는 안됩니다.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유하더라도
그 부유함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더라도
그 소유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난하게 살며
아끼고 살며
나누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가난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두가 입을 모으고
부자를 칭송하는 때이지만,
눈밝은 지혜로운 이라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난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에 쫒아갈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간다고 나도 그리로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모든 경제인, 정치가, 위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가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외롭지만 홀로 가는 밝은 길을 택할 것입니다.

가난한 삶이 주는
그 참된 지혜와 복덕을
가슴 깊이 사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것이고,
내게 충분히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지혜로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