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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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금강경과 마음공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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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여법수지분
여법하게 받아지니라.


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 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 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 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恒河沙等 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여법수지분은 이 경의 이름과 이 경을 어떻게 여법하게 수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의 이름을 밝혀주셨지만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상의 가장 작은 미진에서부터 이 세상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아가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다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음을 설함으로써 다시한번 금강경의 무집착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이렇듯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어떤 티끌도, 세상도, 부처도, 경전의 이름도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체 상의 완전한 타파의 자리에 깨달음은 드러남 없이 드러난다. 여기에 이 경의 위대함이 있다. 그래서 세세생생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 보다 이 가르침 하나만을 받아 지녀 설하는 것이 더욱 큰 공덕이 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지금까지 들어 온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수보리는 한없는 감동과 환희에 휩싸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이러한 말 없는 위대한 말을 듣고 수보리와 같은 깊은 제자가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이렇게 표현했을 때 그 표현은 위대하지 못하다. 그 표현으로써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담고 있는 그 깨우침의 깊이는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초월하여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수보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으면 좋을지 묻고 있다. 일체의 모양을 타파하고, 상을 버리도록 이끄는 이러한 가르침, 일체의 그 어떤 이름에도 집착함이 없도록 일깨워주는 이러한 가르침에 도리어 또 다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얼핏 생각했을 때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름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름을 깨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모순 속에는 무한한 ‘방편’과 ‘자비’가 녹아있다.

앞서도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말이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거나, 말 그 자체를 가지고 옳고 그른 진위를 가리려고 한다면 한마디 말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모순이고 잘못일 수 있다. 그렇듯 말이란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 말 것인가? 아무런 언어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침묵하기만 할 것인가. 그렇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미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항상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본연의 침묵의 가르침은 항상 법계에 가득하다. 다만 그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할 뿐, 침묵의 법문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러한 침묵의 말 없는 가르침은 항상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듣지 못한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그러한 침묵의 가르침이면 되었지 왜 애써 어리석은 이들을 일깨우고자 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 때문이다. 지혜의 본질은 자비에 있다. 아니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다. 지혜가 충만하면 자비 또한 똑같이 충만하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은 이는 당연하게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 고통 받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이라는, ‘언어’라는 방편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보리는 질문을 하고 있다. 부처님께 ‘자비’와 ‘방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마땅히 자비와 방편으로써 답을 하고 계신다. 이름을 타파하고 깨뜨려야 한다는 이 가르침에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계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모순은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수단으로, 그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 우리들 중생들이 좋아하고 이해하기 쉬워하는 ‘말’이고 ‘언어’인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자비와 방편으로 이름 붙여 준 이 경전의 제목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즉, 금강과도 같은 반야바라밀을 설한 경이란 의미다. 금강과도 같이 견고하여 깨어지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설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이렇게 방편과 자비로 반야바라밀 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지만 어리석은 많은 중생들은 또 다시 ‘반야바라밀’이라는 경의 이름에 집착하고 얽매일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해 주시고는 그것이 방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해 주고 계신다. 다시말해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이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여래가 설한 것 그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여래는 다시 설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에 속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말 속에, 반야바라밀경이라는 그 경전 속에만 어떤 특정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지 말라. 몸으로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입으로 반야바라밀이라고 외운다고 해서 나쁜 업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신격화하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단어에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고 신비로운 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반야바라밀 답지 못한 이해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이 이름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면 안 된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많은 금강경 수행자들이 특히 눈여겨 볼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이들은 다만 금강경 독송을 마음을 쉬기 위한 방편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이라는 이 경전 자체에, 이 글귀 자체에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나, 수행력 같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금강경 독송만 하면 그 어떤 특별한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다면 이는 금강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금강경이기 때문에 금강경을 독송하고 공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고 독송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금강경’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흡사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는 말과 같다.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금강경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은 그 어떤 진리라도, 부처라도, 고정되게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로써의 기능을 잃고 만다는 완전한 무집착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옛 스님들께서는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하든, 어떤 경전을 독송하든, 아니면 하늘천 따지를 하든, 가나다라마바사를 하든 마음만 집중하고 비우며 그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방편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준엄한 말씀이시다. 중요한 것은 금강경 그 자체가 아니라, 금강경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혹 스승들께서 어떤 분은 ‘아미타불 염불’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스님은 ‘금강경 독송’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간화선’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고 하시고, 또 다른 스승은 ‘위빠싸나’가 최고라고 했다면 그것은 모두 자비와 방편으로 행한 말씀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한 가지 수행법이 절대적인 것이니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에만 집착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그 한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퇴전심이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자신이 택한 그 수행법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라는 경책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그 자체에도,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문의 말씀처럼,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반야바라밀이 아님을 온전히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며, 어떤 이름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고, 일체의 모든 고정된 집착에서 벗어난 지혜이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이렇듯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셨고, 그 가르침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이름지어주셨다. 그러나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는 ‘진리를 설했다’는 상마저도 버리도록 이끌고 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벌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에 갇히게 되고 만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설법은 설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설하셨지만 단 하나의 진리도 설하신 바가 없다. 함이 없이 행한 것이다. 진리를 설하고도 그 설한 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은 실천해야 할 계율이 있고, 들어야 할 설법이 있지만 깨달은 여래는 행하는 바가 그대로 계율이고, 설하는 말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여래는 스스로 법을 설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저 함이 없이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연따라 이렇게 설하기도 하고 저렇게 설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선(善)을 행하도록 이끌기도 하고, 선악을 다 놓도록 이끄시기도 한다. 때로는 공(空)을 설하고, 또 때로는 유(有)를 설할 수도 있다.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이렇게도 행하시고, 저렇게도 행하시지만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행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선을 행하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선악을 다 놓으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한쪽에서는 선을 애써 행하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면서 선악도 다 버려야 한다고 고집을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분별지(分別智)다. 사람들은 그것을 설법이라고 이름 붙인다.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법문이고 그것이 경전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나서 이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저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하고 다툰다. 이 법문이 옳으니 저 법문이 옳으니 하고 분별한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종류의 실체도 있을 수 없는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다. 무아와 진아(眞我), ‘나 없음’과 ‘참나’, 얼핏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불성에 어떤 모양을 정해 두거나, 실체화 시키거나, 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성을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불성은 없다. 그러나 불성이 불성이 아님을 바로 알았을 때 그 때 온전한 불성은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불성이 있다. 그러나 무아이다.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찌 불성이 있는가. ‘나’가 없기 때문에 불성, 즉 ‘참나’가 있을 수 있다. ‘참나’를 ‘나’와 같은 어떤 존재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실체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참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나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나는 있다. 불성에 집착하지 않는 이에게 불성은 있다. 즉 불성이 불성이 아닐 수 있을 때 참된 불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불성에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 불성은 없다. 그것은 불성이 아니다. 윤회하는 주체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윤회하지만 무아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가. 참나와 무아 사이에 그 어떤 모순이 있는가.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는 그 어떤 혼란도, 그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온통 모순 덩어리다. 불교의 역사가 3,0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아직까지 논쟁의 불씨가 되는 것이 바로 윤회와 무아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말에 얽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윤회가 아니기에 윤회이고, 무아는 무아가 아니기에 무아라는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말에 속지 말라. 윤회가 옳은 것인가, 무아가 옳은 것인가 하고 다투지 말라. 어리석은 이에게는 다 틀리지만 충분히 지혜롭다면 그것은 아무런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법도 법이 아니지만,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는 법 아닌 것도 그대로 법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 혹은 ‘진리’의 테두리에 가두지 말라. 어떤 말로써든 그 ‘언어’ 속에 가두지 말라. 언어 속에 가두게 되면 끊임없는 논쟁과 다툼만을 만들게 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설한 바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까지 끊임없이 법문을 들려주셨지만 단 한 말도 설한 바가 없다. 설했지만 설한 바가 없다.
어리석은 이는 설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설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물 흐르듯 흘렀을 뿐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초록이 물오르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겨울이 되어 호젓하게 잎을 떨굴 뿐이다. 계절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고, 대자연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지면 논쟁을 낳는다. 그 무한한 설법 속에서도 설한 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참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래 설해 질 진리가 없다. ‘진리’라고 이름 붙일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런데 어찌 진리를 설할 수 있단 말인가. 설해질 진리도 없으며, 그 진리가 설 땅도 없다. 이 세상이라는 곳 또한 완전히 텅 빈 공화(空華)일 뿐이다. 이 세상은 텅 빈 한 송이 꽃이다. 또한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 세포들, 미진들, 티끌들 또한 모두가 텅 비어 있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어떤 말로 설해질 수도 없다. 진리도 없고, 세상도 없으며, 미진도 없다. 그것이 바로 법이고 진리인 것이다. 법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이 법이고 진리이다. 그래서 다음 게송에서는 삼천대천의 세계와 미진 또한 텅 빈 공일 뿐, 그 이름이 세계이고 미진일 뿐, 그 어떤 실체도 없다는 설법이 이어지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삼천대천세계가 텅 빈 공이고,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티끌들, 미진들이 실체가 없는 텅 빈 공일 뿐이다. 다만 그 이름이 미진이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실체는 없다. 그러니 그 세계의 진리 또한 텅 빈 것이며, 이름이 진리일 뿐인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란 이 우주를 말하는 것이고, 미진이란 그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티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가장 크고 가장 작은 그 모든 존재계가 다 텅 빈 공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이름이 미진이고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가유(假有)에 불과할 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소멸된다.

이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 또한 실제 내가 아니다. 나를 나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가유일 뿐이다. 내 몸뚱이 또한 내가 지은 인연, 즉 업에 의해 이번 생에 잠시 이렇게 인연화합되어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번 생 인연이 다하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지,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전생에 남자로 태어났다가 이번 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다음 생에 짐승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콕 찝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사람 모습으로도 태어났다가, 짐승의 모습으로도 태어나고, 부자의 모습으로도, 가난한 모습으로도, 잘생긴 모습으로도, 못생긴 모습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나툼일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번 생에 많이 베풀고 살았다면 부자의 인연을 받아 태어날 것이고, 술을 많이 먹고 지혜의 종자를 끊어버린 사람이라면 다음 생에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태어날 것이며, 입으로 욕이나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은 목소리가 나쁘게 태어나게 될 것 아닌가. 그렇듯 인연따라 이런 모습으로도 저런 모습으로도 나투는 것이지, 어떤 한 과정이 ‘나’의 실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물을 한모금 먹으면 물이 나로써 나투게 되고, 땀을 많이 흘리면 땀으로 빠져 나가게 마련이고, 그것은 또다시 수증기로도 강물로도 무엇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삼라만상의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와 같다.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미진’이라고, ‘세계’라고, ‘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나아가 무엇을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진리’라고, ‘여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꿈이고, 신기루일 뿐이다. 하물며 여래의 32상호를 가지고 여래라고 이름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인 미진도, 나도, 모든 것들이 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일진데, 부처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32상이란 부처의 거룩한 모습의 특성을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부처의 모습을 가지고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부처는 상 없음을 이름한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모양도 이름도 실체도 없다. 그럴진데 어찌 부처에게 32상이란 특별한 상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육신으로써 부처를 볼 수는 없다.

부처를 어떤 특정한 모습이라거나, 특정한 성격이라거나, 특별한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고자 하지 말라. 사람들은 보통 부처님은 이럴 것이다, 큰스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큰스님의 성격은 자비로울 것이고,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맑을 것이며, 성품은 온화하여 말도 없을 것이고, 큰스님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늘 가부좌하면서 좌선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는 등의 온갖 모양을 규정짓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런 모양에 있지 않고, 성격에 있지도 않다. 어떤 모양에, 어떤 외모에, 어떤 성격에 부처님을 가두지 말라. 그 어떤 틀에도 가두지 말라. 틀에 갖힌 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

부처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으며, 사람같을 수도 있고, 짐승같을 수도 있으며,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고, 티끌일 수도 있으며, 하늘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가능성도 활짝 열어두라. 어디에도 가두려 하지 말라. 갇힌 것은 부처가 아니다. 깨달음이 아니다.

큰스님들을 보더라도 어떤 분은 한없이 자비로우시지만, 또 어떤 분은 사천왕처럼 엄하고 무섭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 많을 수도 있고, 말이 적을 수도 있으며, 걸음이 빠를 수도 있고, 걸음이 느릴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모습이 수행자의 참모습일 것이라고 스스로의 틀을 만들어 두지 말라. 그렇게 되면 갇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부처는 중생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히지 않는다. 다만 갇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참된 수행자란 누구를 닮고자 하는 이가 아니다. 부처를 닮고자 하거나, 큰스님을 닮고자 하거나 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자기답게’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는 자다. 자기 자신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리답게 사는 길이다. ‘누구처럼’ 살고자 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목표치가 있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내가 있기 때문에, 그 간격만큼 마음은 괴롭고 무겁게 마련이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어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한 만족이 있을 때 깨어있을 수 있고 그 깨어있음이란 ‘자기답게’ 사는 방식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어떻게 정해진 길이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길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나답게 사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필요치 않으며 매우 자유롭고 걸림이 없다.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될 수 있다. ‘부처님’처럼 살지 말고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어떠한가. 부처님의 외형적인 모습인 32상 80종호를 닮고자 애쓸 일이 무엇인가. 32상 80종호가 부처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32상으로 모습을 바꾸고자 애쓴 분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32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다. 부처는 부처라는 상도 없고, 32상이라는 상도 없다. 다만 32상이란 우리들 중생들이 부처를 바라보고 스스로 상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32상이란 중생들의 시선이지 부처의 시선이 아니다. 부처가 32상을 갖추게 된 것은 그것이 갖춘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걸림 없이 ‘자기답게’ 산 결과다.

부처님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애써 32상을 갖추고자 애쓴 적도 없고 또한 특별한 상을 버리려고 애쓴 적도 없다. 그저 아무런 상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을 뿐이다. 부처님은 ‘누구처럼’ 살고자 전혀 애를 쓰지 않는다. 과거 연등부처님이 훌륭하셨으니 그 분처럼 살아야지 하고 생각한다거나, 스스로 부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겠다는 등의 생각이 없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상을 만들어 놓았고, 불상도 만들어 놓았으며, 32상 80종호도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된 부처님의 모습은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다. 특정한 모습 없음을 일러 법신이라 부른다. 다시말해 법신이란 진리의 몸이란 뜻으로 특정한 모습이 없는 온 우주법계, 삼라만상의 모든 모습을 부르는 이름이다. 내 모습도 법신이며, 산과 들도, 하늘과 바람도, 짐승이며 하늘사람도 모두가 법신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완전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이 모두 법신이다. 그래서 온 우주 법계에 법신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하나, 사람들만이 ‘남들처럼’ 살고자 애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나툰 법신 부처님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만이 열등감과 우월감, 잘나고 못난 분별로 인해 괴로운 것이다. 나무가 꽃을 닮지 못했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며, 하늘이 땅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만이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비교, 판단에서 오는 괴로움을 감당하고 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신이 되라. 법신 부처님으로 살아야지 왜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 것인가. 누구든 ‘나답게’ 사는 사람은 법신불로 사는 것이다. 법신부처님이 나로써 온전하게 나툴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부처님께 맡기고 가라. 완전하게 내맡기고, 완전하게 바치며,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법신부처님의 향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일체는 텅 비어 있다. 세계도, 미진도, 나도, 부처도 다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짐도 다만 인연에 따를 뿐이고, 미진도 나도 부처도 모두가 인연의 가합에 의해 이루어지고 사라질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다만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이름하여 진리라고 하고,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그것이 괴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슬프고 괴로운 마음은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봄이 와 꽃이 피다가 꽃이 지고 여름이 온다고 해서 봄은 죽고 여름이 살아났다고 할 것인가? 봄이 죽어서 괴롭고 여름이 태어나서 즐겁다고 할 것인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강물은 죽고 바다는 살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강물이 바다로 윤회했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다 이름일 뿐이고 모양일 뿐이다. 어떻게 이름지어도 좋지만, 어떻게 이름 짓더라도 옳다고 할 수도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라고 고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수의 목숨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 목숨으로써 보시했다고 한다면 그 복덕은 어떠한가. 내 소유의 물질로써 보시하더라도 그 복덕은 많을 것인데, 하물며 내 목숨을 바쳐 보시하였다면 그 복덕은 무량할 것이다. 앞서 말했던 칠보로써 보시하는 복덕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은 벌써 나고 죽는다는 분별 속에서의 보시이다. 내 삶을 바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 그것은 생사법에 빠져 있는 보시이다. 그것은 참된 무위의 함이 없는 보시가 되지 못한다. 본래 생사가 둘이 아니라면 생을 사로 바꿈으로써 보시할 것이 무엇인가.

차라리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 세상도 없고, 미진도 없으며, 나도 없고, 부처도 없다면, 열반도 없고, 생사도 없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온전한 보시이다. 본래 보시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주상보시가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지혜야말로 복덕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와 복덕은 하나다. 지혜가 복덕이고 복덕이 지혜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게송이 바로 이 금강경의 사구게이다. 그러한 지혜로 우리를 안내하는 게송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왜 애써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해야 하는가. 그 공덕은 유위의 공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생사가 본래 없으며, 보시할 것도, 보시할 사람도, 보시 받을 사람도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량한 복덕이 될 수 있다.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수도 없이 많은 생을 윤회하였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이만 많이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다는 사실이 그대로 나를 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도 없이 윤회하며 생사를 반복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은 커녕 업만 자꾸 쌓아왔다면 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 억겁의 세월을 허비하며 지낸 것이다. 그 사람에게 깨달음의 빛은 날로 줄어갈 것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믿고 받아지녀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면 그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 수도 없이 많은 생을 목숨 바쳐 보시하고, 수많은 물질로써 보시하고, 칠보로써 쌓아 보시한들 그것은 단 한 가르침을 올바로 수지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위의 복은 쌓는 공부지만, 무위의 공부는 놓아가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선이라도, 아무리 많은 복이라도 쌓는 것 보다는 놓아버리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선을 쌓고자 애쓰지 말라. 복을 짓고자 애쓰지 말라. 아무리 선을 행하고 복을 지어 봐야 유위의 복이고, 유위의 업일 뿐이기에 그것은 결국 채우는 공부 밖에 되지 못한다. 아무리 선이라 할지라도 채우는 것은 근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놓아버리는 것이다. 본래 공한 줄 알고, 본래 실체가 없는 줄 알며, 본래 그 어떤 상도 상이 아닌 줄 알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놓는 공부는 복덕이라는 유위를 뛰어넘는 무량복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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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의법출생분
이 법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 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 福德性 是故 如來說 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 乃至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 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 出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법출생’이라는 이 분에서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 경의 가르침에서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상을 타파하는 이 경전의 가르침이 수승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수승함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는 것 보다 더 한 수승함이다. ‘일체 모든 상의 타파’를 밝히는 금강경의 가르침이야말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 즉 불법이라고 하는 그 상 마저도 타파되어야 할 또 다른 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불법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것이 불법이며, 금강경의 가르침이고, 거기에는 불법이라는 상 또한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그렇듯 불법조차 모두 타파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불법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 보기 앞서 삼천대천세계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말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할 뿐더러, 사찰을 지을 때에도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도량을 건축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요즈음의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연구되고 있는 결과와도 불교의 우주관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서 있고 그 수미산을 동심원으로 일곱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싸여 있다. 이 칠산팔해(七山八海)의 가장 변방의 산이 철위산(鐵圍山)이고 철위산으로 둘러싸인 팔해의 마지막 바다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커다란 대륙이 있는데, 이곳이 북구로주(北俱盧洲), 남섬부주(南贍部洲), 동승신주(東勝身洲), 서우화주(西牛貨洲)이다. 수평적으로 보았을 때, 이 네 곳의 대륙의 지표면에 인간과 축생이 살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남쪽의 섬부주로 이 곳이 가장 살기 어렵고 박복한 곳이라고 한다.

한편 수직적으로 보면 인간과 축생이 사는 그 아래쪽 철위산의 밑바닥에 지옥과 아귀의 세계가 차례로 있으며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의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다. 사천왕천은 네 개의 천상으로 이를 다스리는 네 명의 천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그리고 사천왕천에서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는 33천이라 불리우는 도리천(忉利天)이 있으며, 이 곳의 천주(天主)가 제석천(帝釋天)이다. 또한 천상계는 아니지만 공중에 아수라(阿修羅)가 있는데 이들은 항상 분노와 진심이 많아 인접해 있는 제석천의 천병(天兵)들에게 계속해서 싸움을 건다. 항상 지면서도 업이 그러하기 때문에 늘 전쟁을 일삼아 아수라가 사는 곳은 늘 정신이 없고 전쟁터처럼 폐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수라장(阿修羅場)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다.

그 다음이 야마천(夜魔天)이고, 그 위에 차례로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는데, 이상의 여섯 개의 천상을 욕계육천(欲界六天)이라고 한다. 욕계란 식욕․수면욕․색욕과 같은 온갖 욕망으로 뒤덮인 세계를 말한다. 이 욕계의 하늘이 이상과 같이 여섯 가지라 욕계 육천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앞서 말했듯이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이 살고 있다. 욕계 육천 위로는 색계(色界)의 18천이 있고, 다시 그 위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이 있다. 색계란 욕계에서와 같은 온갖 욕망들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세계로 살아 있을 때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4가지 선정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곳이며, 무색계란 욕망은 물론이고 물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4무색선정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수미산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시작하여 위로 28개의 천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계를 하나의 수미세계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수미세계 1,000개가 모인 것을 일 소천세계라 하며, 이 소천세계 1,000개를 모은 것이 중천세계, 또 이 중천세계를 1,000개 모은 세계가 바로 ‘대천세계’인 것이다. 이 대천세계는 소천, 중천, 대천이라는 세 종류의 하늘세계가 모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라고 불리운다. 즉 삼천대천세계는 10억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로 그야말로 무량수 무량광 한량없는 크기의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칠보(七寶)는 수많은 경전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의 보물로써 『아미타경』에서는 금, 은, 유리(다이아몬드), 파려(적백의 수정), 자거(백색의 산호), 적주(붉은색 진주), 마노(짙은녹색의 보옥)를 들고 있고, 『법화경』에서는 여기에 파려와 적주를 빼고 대신에 진주와 매괴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보배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세계인 삼천대천세계에 가장 진귀한 보배인 칠보로써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를 묻는다. 이에 수보리는 매우 많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유를 함께 말씀드리고 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질문하신 깊은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저 많다고 하지 않고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있다. 수보리는 지혜로운 답변을 하고 있다. 그저 많다고 한다면 그 답변은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나 수보리는 많다고 답변하면서 그 이유는 ‘복덕은 복덕이 아니므로 복덕이다’고 하고 있다.

이 논법은 금강경에서 전체적으로 나오고 있는 논리 전개법이다. 일반적인 생각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도저히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은 논리를 초월해서 지혜로써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논법이다. 어리석은 이에게 있어서 이 논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법이야말로 금강경의 ‘완전한 상의 타파’를 그나마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완전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완전한 진리를 표현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성립될 것 같지 않은 논법이 진리를 표현하는 금강경의 논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구마라집 번역에서는 위의 번역에서와 같이 복덕과 복덕성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씀으로써 앞의 복덕과 뒤의 복덕성의 차별을 두어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쓰여지는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금강경 논법을 조금 벗어나 있다.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의 해석은 ‘세존이시여, 선서시여, 그 선남자 선여인은 이로 인해서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공덕의 무더기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직역을 중시한 현장의 번역에서도 이러한 해석은 계속되고 있다. [현장역, 世尊. 福德聚福德聚者 如來說爲非福德聚 是故 如來說名福德聚福德聚]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구마라집의 의역일 것이라고 보여진다. 다시말해 혜거스님의 강설에서 이해되었듯이 유위법으로써의 복덕과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조금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즉,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은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이란 본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많고 적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란 분명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는 금강경의 본래의미를 확연히 드러내 주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앞서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의 해석에서처럼 ‘그렇게 보시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공덕의 무더기라고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를 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은 유위법으로 보았을 때 공덕이지만, 무위법으로 보았을 때는 공덕이 될 수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 상 자체도 타파되어야 한다. 앞서 4분에서 이해되었던 것 처럼, 보시를 하지만 상에 얽매여 보시를 하지 않았을 때 그 공덕은 무량한 것이다. 다시말해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았지만 ‘이것이 공덕의 무더기다’라고 스스로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공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의 무더기라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다’라는 논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공덕이다라고 상을 짓는 것은 공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공덕의 비유를 드심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이 무량함을 말하고 계신다. 그 무량한 이유는 무주상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하더라도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상에 머물러 보시하고, ‘보시했으니 이것은 공덕이 될 것이다’라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공덕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많은 보시를 했으면서도 ‘공덕은 공덕이 아니다’라고 바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은 많은 공덕이 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의 문답을 통해서 물질로써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복덕이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이처럼 복덕이 많은 것이니 물질적으로 많이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보시도 무주상이 되었을 때는 이처럼 큰 공덕을 성취할진데, 하물며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사구게란 앞의 제5분에 나왔던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와 같은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게송들이 시적으로 표현되다 보니 네 글귀의 시적인 게송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그래서 대표적으로 사구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 반드시 네 구절로 된 경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특정한 구절을 지정해서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참된 의미는 ‘이 경전 가운데 가르침을 잘 함축하고 있는 어느 한 구절’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강경의 핵심 사구게인 제5분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구마라집 번역에서나 사구게로 딱 떨어지도록 되어 있지,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네 구절로 딱 떨어지지는 않는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부분에서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무언인가. 앞서 언급한 칠보 보시의 비유는 그처럼 많은 물질적 보시를 하더라도 공덕이 무량할진데, 정말 소중한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보시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적 보시보다는 법보시가 더 수승하다는 말이다. 왜 그러할까. 그 답변이 다음 구절에 나온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법보시가 수승하고 공덕이 많은 이유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경전의 가르침을 깨달아야만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최상의 법이라는 것도 상을 타파하는 금강경의 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의 법을 얻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보시를 많이 행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정신까지 부유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보시 중의 으뜸 가는 보시는 물질적인 보시가 아니라 가르침의 보시이다.

가르침의 보시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고, 탐진치 삼독심을 버릴 수 있게 해 주며,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한 가르침의 보시 중에 가장 으뜸가는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르침,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하여 법상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상이란 상은 다 타파해 주는’ 가르침이다. 일체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깨달아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나며, 상에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으로 깨달으신 분들이 부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이유는 일체의 모든 상을 다 타파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말씀하고 계신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마라집 역에서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로만 맺음이 되어 뒷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그 뒤에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현장역에서는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길, 모든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고 했고,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수보리여, 불법들이라는 것은 불법들이 아니라고 여래에 의해서 설해졌나니, 그래서 말해지기를 불법들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 뒷 구절이 나와 있어야 비로소 아상타파를 위한, 공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금강경의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이 성립된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법보시의 공덕에 대해 설하는 이 장의 맺음에서 왜 갑자기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말은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며, 이는 다시말해 불법 속에서 부처님이 나왔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흡사 이 말은 이 금강경의 가르침인 불법만이 진리이며, 이 법만이 부처님을 나오게 한다고 들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불법을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상을 타파하라는 불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불법이라는 상에 얽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불법 속에서 모든 부처가 나왔으며, 이 불법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듣고 나니 어리석은 중생들은 ‘아 이 불법만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 불법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고 계신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즉 불법에도 집착하면 안 되고, 불법이라고 고정된 어떤 실체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불법이라는 틀, 불법이라는 상까지도 타파했을 때 비로소 참된 불법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바로 알았을 때 비로소 불법은 빛을 발할 수 있다.

불법도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불교도 이름이고, 부처도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옛 스승님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상의 타파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설령 부처가 되었든, 불법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고정되게 실체화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될 수 없다. 불교를 불교라고 하면 불교가 아니고, 진리를 진리라고 하면 진리가 아니며, 부처를 부처라고 하면 더 이상 부처가 아니다. 불교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진리가 아니며, 부처라는 상을 세워도 이미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은 스스로를 ‘불자’라는 틀에 가둬선 안 된다. 불법의 진리를 ‘불교’라는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 가두어진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신앙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참된 불자라면 이렇게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걸려선 안 된다.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불교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진리라는 틀에서도, 부처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불교를, 진리를, 부처를 바로 보고 믿으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버렸을 때 비로소 불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어디에도 치우쳐져 있지 않은 이 세상의 종교이고, 이 세상의 진리이다. 믿건 믿지 않건 간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건 그렇게 생각하지 않건 간에 불교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공통된 종교인 것이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해 놓았다 보니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이름이 불교일 뿐,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불교이다. 그렇기에 진리이고, 그렇기에 일체 모든 존재의, 일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이며 진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상세계의 종교는 오직 ‘불교’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천상세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불교라는 이름을 보고 있거나, 불교라는 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오해가 있는데는 불자들의 잘못이 크다. 불자들 스스로 ‘불교’를 틀에 가두고 그 틀 속에 많은 신자를 끌어 모으기에만 바빴고, 불법이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며, 어떤 말로도 규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했을 뿐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이름 하여 ‘불교’라고 이름 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의 불자, 수행자들은 간간이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왜 불교신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하는가. 불교가 타종교에 비해 신자가 많아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를 어떤 하나의 ‘종교’로 가두어 놓고 사람들을 그 안에 많이 포섭시키기 위해 애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동일 뿐이다.
우리의 신자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이고 생명이며 우주법계 그 자체다. 심지어 소나 돼지나 강아지조차 우리의 신도이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구름과 바람과 하늘이 다 우리의 신도이다.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 원불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그리고 종교가 없는 그 모든 이들이 우리의 신자이다. 그들이 우리의 신자이며, 우리가 그들의 신자이다. 이름을 불교라고 해서 그렇지, 이 모든 존재와 생명이 그대로 진리의 신자이며, 진리 속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좋은 도반들일 뿐이다.

이렇게 툭 터진 마당에 왜 억지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교신자와 타종교 신자로 나누어 놓고 불교신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라는 틀을 깨야 한다. ‘불법’이라는 틀을 깨야 한다. 그 틀만 깨면 아무런 장애가 없고, 다툼이 없으며, 일체가 고요하고 평화롭다. 불교신자라는 틀이 없으니 타종교신자라는 틀이 있을 것도 없고, 불교라는 틀에 가두지 않으니 일체 모두가 불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보편적이고 온전한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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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무득무설분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無得無設分 第七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무득무설’이란 말 그대로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는 뜻으로써, 이 분에서는 본래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 무유정법의 이치를 밝혔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앞 장에서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 말씀이야말로 진리구나’ ‘이러한 법을 깨달으신 부처님처럼 나도 깨달음을 얻어야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법은 없으며, 내가 설한 바도 없고, 또한 얻은 바도 없다는 말로써 법은 어디에도 집착됨이 없음을 다시금 일깨우고 계신다.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로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한다. 그 뜻은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으로, ‘무상’이란 더 높은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고, ‘정’이란 객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치우침 없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며, ‘등’은 어느 한쪽에만 타당한 가르침이 아닌 일체 모든 존재에게 두루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야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분이시며, 부처님께서는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당연한 물음을 던지신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예 그러하옵니다.’ 가 되어야 하겠지만 수보리는 부처님 질문의 의도를 바로 깨닫고 있다.

수보리의 답변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 또한 언어적인 표현일 뿐이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없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펼치신 분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진리 그대로일 뿐이다. 진리는 항상 온 우주 법계를 골고루 비추며 항상 참빛을 수놓고 있다. 진리는 없어진 적도 없고 다시 만들어 진 적도 없으며, 아니 진리라고 이름 붙일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텅 빈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할 뿐이다. 스스로 삐뚫어진 생각과 분별로 괴로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속에 스스로 갇혀 있을 뿐이다. 괴로움도 스스로 만든 것일 뿐, 본래 괴로움이란 없다. 인간의 욕심과 집착 온갖 번뇌며 분별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여래의 눈으로 본다면 그 또한 역시 진리의 모습으로 온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여래는 전도된 망상을 깨라고 하시고, 어리석은 욕심과 집착을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며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릴 적부터 그 바윗덩이를 늘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또 남들도 그렇게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너무 무겁다. 이렇게 큰 바위를 들고 살아가기가 너무 힘에 겹다. 그래서 괴롭다고 야단이다. 어느날 바위를 이렇게 붙잡고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 한 사람이 이 사람에게 놓아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었고, 놓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으며, 남들도 다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 보니 놓을 수 없다고 고집한다. 안 놓으려고 꼭 붙잡고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놓아버리고도 아무런 일 없이, 아니 오히려 가볍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과감하게 스스로 놓아버렸다. 놓고 나면 큰 일이 날 줄 알았는데 놓고 나니 비로소 자유롭고 무거운 삶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괴로움은 없다. 그렇다면 놓으라고 한 그 말이 진리인가? 스스로 깨닫고 놓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인가? 제 스스로 들고 있으니 다만 놓으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말만을 했을 뿐이지만 그 사람은 그로인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말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실체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고정관념일 뿐이며, 욕심이고 집착일 뿐이다. 부처님은 다만 그것을 놓으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진리는 그 무엇도 붙잡고 있지 않다. 항상 빈 손이며, 텅 비어 있고, 자유롭다. 그런데 다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붙잡을 것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 내었고 거기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괴로움은 시작되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에는 붙잡고 사셨지만, 비로소 깨달았다. 붙잡고 있는 것만 놓으면 그대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은 다만 ‘집착’일 뿐이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 것’을 늘리려고 집착하고 욕심 부리고, 그래서 스스로 아상과 아집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놓아라” “그것이 너가 아니다. 놓아라”

본래 우리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있었다. 그 때는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 무거울 것이 없고, 삶이 힘들 것이 없었다. 다만 진리만이 있었고, 평화만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하나씩 하나씩 잡기 시작했다. 실체인 줄 알고 잡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집착하여 붙잡기 이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고, 고요만이 있으며,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신이고 부처였다. 아니 이런 말 조차 필요 없는 텅 빈 허공 그 자체였다. 다만 진리만이 있을 뿐, 다만 하나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나뉘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것’이라고 나누기 시작하면서 분별하고, 자신의 것을 가지려는 집착과 소유, 욕심을 일으키면서부터 이 세상은 괴로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은 온전한 진리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그 괴로움은 그 사람의 문제다.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착각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괴로움일 뿐이고, 고정된 상일 뿐이다. 스스로 붙잡아서 괴로운 것이니 스스로 놓아버리면 다시 본래자리로써 여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만 그것이다.
“잡아서 괴롭다면 놓아라”

이렇게 평범한 말이다. 이것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법이라고 할 것인가, 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것을 깨달은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것이라고 할 것인가? 물론 다 언어의 장난일 뿐이니,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여전히 우리가 만들어 낸 약속이고 비실체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 또한 놓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본래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깨달아 있는데 거기에 또다시 깨달음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붙일 것은 무엇인가. 이해를 위해 방편으로 그런 이름을 붙이기로 약속했다면 이해된 뒤에는 그 약속 또한 놓아버려야 한다. 여래가 ‘이것이 진리다’라고 고정된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멀었다. 그것조차 놓아버렸을 때 여래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계속해서 수보리는 말한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법을 취한다는 것은 법을 붙잡는다는 말이다. 붙잡아서 괴로운 사람에게 또 다른 것을 붙잡도록 이끎으로써 그 괴로움을 없애줄 것인가. 붙잡아서 괴로운 사람에게는 그저 놓을 수 있도록 ‘놓아라’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空, 無我]’ ‘네가 붙잡고 있을만한 그 어떤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떤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항상하지 않고[無常], 괴로운 것이다[苦].’라는 방편의 말로써 이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또다시 ‘진리’라는, ‘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공’ ‘삼법인’ ‘사성제’ ‘무아’ ‘무상’ 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법’이라는 상을 또다시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상일 뿐, 그것이 진리인 것은 아니다.

진리는 취할 수 없다. 아니 취함이 있었을 때 이미 그것은 진리로써의 기능을 상실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 자체일 수는 없다. 방편은 그 쓰임이 다하면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는 말할 수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교화 끝에 반열반에 드실 때 “내가 녹야원에서부터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 내 생에서 한 마디 설법도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설법을 하셨지만 그 설법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을 뿐이다. ‘함이 없이 한’ 무위의 설법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부처님은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집착을 놓으라고 하셨을 뿐이고, 욕심을 버리라고 하셨을 뿐이며, 분별을 없애도록 이끄셨을 뿐이다.
다시말해 삿된 것을 타파해 주셨을 뿐, 새롭게 진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삿된 것, 즉 욕심이며 집착, 분별들을 깨뜨리면 스스로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이념인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삿된 것을 파하면 그대로 바른 것이 드러난다. 그러니 일체 모든 삿된 것,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법상까지 다 타파하고 깨뜨릴 지언정 새롭게 ‘진리’라는 상을, ‘법’이라는 상을 내세울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놓고 살면 평화로운데, 어리석게 잡고 살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이에게 ‘놓아라’ ‘실체가 아니다’ 이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법이라고 할 것인가, 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방편에서는 법이라고 할 수도 있고, 법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진리에서는 법이라고 해도 안되고, 법이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 그저 그런 것까지를 모두 놓아버려야 할 뿐이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인과 성인, 즉 깨달은 자는 일체 모든 행위가 ‘함이 없는 행위’이고, ‘머무르지 않는 행위’이다. 함이 있는 법을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함이 없는 법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깨달은 자는 일체 집착이 없고, 번뇌가 없으며, 그러한 함이 없는 행위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업을 남기지 않고, 티끌을 남기지 않으며, 그 어떤 행위도 온전하고 순수하다. 그런 행을 무위라고 하고, 흔적을 남기며 업을 남기고 괴로움을 남기는 행위를 유위라고 한다.

쉽게 말해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집착을 하거나, 욕심이 있거나, 했다는 상이 있거나, 아상, 아집이 있다면 그는 유위를 행하는 것이지만, 집착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린 채 그 일을 했다면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차별적인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사실은 무위로써 함이 없이 한 것이다. 보시를 한다고 했을 때, 보시를 하고도 ‘내가 네게 얼마만큼 보시했다’는 상이 남아 있고, 보시한데 대한 집착이 남아 있거나, 아까운 마음 혹은 보시했으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있다면 그는 유위로써 보시를 한 것이다. 그러나 보시를 하고도 보시했다는 상이 남아 있지 않고, 보시한데 대해 그 어떤 집착이나 보상도 바라지 않으며, 아주 보시했다는 것조차 잊게 된다면 그는 무위로써 보시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리석은 중생은 무슨 일을 해도 ‘내가 했다’ 하는 상이 남고, 집착이 남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 행하지만, 일체 모든 현인과 성인은 ‘내가 했다’는 아상이 없고 집착이 없는 무위의 행을 하는 것이다. 해도 했다는 상이 없기에 무위의 행을 ‘함이 없는 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현인과 성인은 오직 무위로써 행동한다.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일체 모든 것을 한다. ‘함이 없이’ 한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다 하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교화를 하다가 열반에 드신 것 또한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어 나투시며 교화하신다. 그렇기에 여래는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무위로써 태어나기 때문이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차별심을 일으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렇듯 차별로써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유위로써가 아닌 무위로써 태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로써 차별을 두어 태어나기도 하고 늙고 병들고 죽기도 한다. 무위로써 인간들 앞에 나타나고, 무위로써 온갖 중생을 구제하며, 무위로써 살아가지만, 무위이기 때문에 나도 난 것이 아니고, 구제도 구제가 아니며, 삶도 삶이 아니고,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다. 즉 삶의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치의 집착도, 한 치의 욕심도, 한 치의 아상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어떤 흔적도, 결과도, 티끌도, 업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중생들 앞에 일체 모든 것으로 화하여 나타난다. 무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과도 하나가 되어 나툰다. 관세음보살이 33화신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 세상 삼라만상 그 어떤 곳에서도 법신불을 친견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무위의 행을 하며 무위의 법을 설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고정된 법이 없다. 고정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에도 수만가지로 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수한 중생이 있고, 무수한 근기의 중생이 있으며, 또한 그 많은 중생들의 무량한 괴로움이 있지만 여래는 무위의 행과 무위의 법을 설하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은 무량한 중생과 무량한 근기와 무량한 괴로움에 자유자재로 나투는 차별법으로 중생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바가 없이 무위의 행이라야지만 무수한 중생 앞에 차별법으로 나투는 것이 가능하며, 무량한 방편법을 행하고, 무량한 근기에 대기설법으로 응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는 무량한 차별법을 행하지만 무위로써 행한다. 함이 없이 행한다.

그렇다면 성현은 왜 차별을 일으켜 중생들 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그것은 중생구제를 향한 동체대비(同體大悲) 때문이다. 오직 성현은 중생구제를 위해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나툰다. 부처님도 깨닫고 나서 바로 반열반에 들 수 있었지만, 동체대비심 때문에 그대로 인간의 모양으로써 80세까지 교화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반열반에 드심으로써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되셨다. 아니 우주 그 자체가 되셨다. 일체 모든 것으로써 늘 나투고 계시는 것이다. 바람으로도, 구름으로도, 태양으로도, 사람으로도, 축생으로도, 사랑하는 모습으로도, 미워하는 사람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능히 나투어 주고 계신다. 능히 나투어서 일체 중생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있는 일체 모든 모양으로써 나투고 있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릴 뿐이다. 공연히 스스로 가리지만 않으면 나도 존재도 그대로가 부처이며, 모든 행위가 그대로 함이 없는 부처의 행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별 있는 모습 속에서 차별 없는 무위의 부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차별 있는 몸으로써 차별 없는 법신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무위의 행은 무엇인가. 현실을 사는 우리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무위란 앞서 말했듯이 함이 없다는 뜻이다. 함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티끌이 없으며, 아상이 소멸된 행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무위란 자연스러운 행이다.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타게 된다면 아무런 걸림이 없게 된다.

뒤에 금강경 제9분에 사향사과라는 수행의 계위가 나오는데, 그 첫 번째 수행의 계위가 수다원과로 이는 ‘흐름에 든 자’란 의미를 가진다.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깨달음인 수다원이 바로 흐름에 든 자란 뜻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흐름에 들었다는 것은 곧 이 우주의, 진리의 흐름에 완전히 내맡기고 함께 따라 흐른다는 뜻이다. 그 자연스런 흐름에 자연스럽게 들어 함께 따라 흐를 뿐, 그 자연스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 온 존재를 내맡기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진리와 하나 되며, 그 어떤 것과도 다투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은 채 진리로써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타는 것 그것이 바로 무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물처럼 사는 삶이다. 물은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저 흐름을 따라 흐를 뿐이다. 그렇기에 다툼이 없고, 괴로움이 없으며, 걸림 없이 자유롭다. 우리의 삶도 물이 그 흐름을 타고 자연스레 흐르듯, 우리 삶의 거대한 진리의 흐름에 온 존재를 내맡기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함께 따라 흐를 때, 그 어떤 다툼도, 괴로움도, 걸림도 없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는 삶 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거스르는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조작의 삶에 더 달콤함을 느끼곤 한다. 돈이 없다면 없는 대로 그 수준에 맞춰 만족하며 살면 되는데, 남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부족하다는 관념에 빠져 괴롭게 산다. 어떻게 해서든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애쓰고,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고,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자 억지스런 노력을 감행한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쓰는 것들은 모두가 인위적이며 유위적인 것들일 뿐이다.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것들은 자연스런 삶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흐를 것인데, 우리는 붙잡고자 애쓰고, 더 많이 벌고자 애쓰면서, 억지스럽고도 정의롭지 못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억지와 인위, 노력과 애씀 속에는 ‘지금 이 자리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인위적이고 억지스런 애씀을 통해 무언가를 욕구하고 갈구하며 그것을 이루고자 하지만, 그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듯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모든 것은 결국 괴로움을 불러 올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무위로써 걸림 없이, 함이 없이 사는 것이다. 무위의 삶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만족과 자족으로 이끌며,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요즘 현대 사회에 가장 큰 문제는 단연 환경의 문제요, 생태계 위기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환경 위기의 문제라는 것이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에서 기인한다. 자연을 야생의 상태 그대로, 자연스러운 자연의 상태 그대로 놓아 두면 아무런 혼란이 없고, 오염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명과 욕망에서 기인한 억지스런 유위의 노력이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운행을 막고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시키고 파괴시켜 왔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자연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유위적인 조작을 가함으로 생겨난 위기다. 요즘 같은 환경 위기의 시대야말로 무위법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현실 속에서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행은 우리들 개개인의 괴로움을 풀어줄 뿐 아니라, 현대 환경의 위기, 지구의 위기를 구해낼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실천 수행의 방법일 수 있다.

얼핏 보면 무위와 차별이라는 두 단어가 전혀 서로 다른 것 같이 느껴지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중도의 실천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우리들의 수행에 균형이 생겨날 것이다. 불교를 단순히 허무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무위법에만 치우쳐 바라보기 때문이다. 무위라고 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실천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고, 그저 바보처럼 멍 하니 살라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위법은 그렇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사회 생활도 하고, 경제 생활도 하며, 역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삶을 살라는 차별의 가르침이다. 즉, 차별이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일으키는 모든 말과 행동과 마음을 가리킨다. 세상을 살면서 행동하고 말하며 마음을 쓰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듯 차별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인과 성인의 차별은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무위법으로써의 차별인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중생이든 현성이든 모두 차별을 일으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똑같이 밥 먹고, 잠 자고, 일 하고, 삶을 살아 나간다. 그러나 중생은 유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지만, 현성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의 중도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별을 행하지만 그 차별에 집착하지 않는 무위를 행하고, 무위를 행하지만 무위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차별을 다시 행하는 것이다. 뒤에 10분 장엄정토분에 나올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도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라. 차별심을 일으켜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 나가라.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는 말라. 나만 잘 살자고 아상과 아집을 일으켜 거기에 집착하지는 말라.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함이 없이 돈을 벌고, 사랑을 하되 사랑에 집착함이 없는 사랑을 하라. 그것이 바로 무위로써 차별을 일으키는 함이 없는 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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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정신희유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정신희유’란 ‘올바른 믿음은 희유하다’는 뜻으로써, 이 분은 앞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가르침에 대해 말세의 중생들이 바른 믿음을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수보리의 의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앞의 제5분에서 부처님께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 이 세상에 무릇 모양이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그러한 사실, 즉 상이 상이 아니라는 진실을 바로 보면 곧 여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가르침은 그동안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며,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며, 몸으로 감촉되고, 뜻으로 헤아려 지는 모양 있는 대상들에 얽매여 살아 온 보통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몸뚱이를 비롯한 온갖 모양에 의지해 살아가며, 더 많은 것들을 소유코자 하고, 더 많은 지식들을 쌓고자 하며 살아왔는데, ‘나’라는 것도 허망한 허상일 뿐이고, 내가 소유코자 하는 물질이며, 배우고자 하는 공부며 가치관까지 일체 모든 상이 다 텅 비어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방식이 더 많은 상을 짓고, 상을 지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등 상에 의지해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그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상을 타파하라고 설법을 하시니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이 세상과 거꾸로 가는 당황스런 가르침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수보리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비교적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너무나 어렵고 깊은 깨달음이었기에 수보리는 문득 의심이 드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이야 근기가 수승하고,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시니 어렵더라도 잘 믿고 의지하여 바른 믿음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만약에 정법이 쇠퇴할 미래세인 말세의 중생들이 더구나 부처님도 안 계실 때에 이러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과연 잘 믿고 따르며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수보리의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과 중생구제의 대서원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구마라집의 번역에는 등장하지 않는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라는 번역을 넣었는데,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 역에서는 나타나는 것으로 이 곳에서는 이 문자이 들어가야 문맥이 더욱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넣어 보았다. 물론 구마라집 번역에도 다음 경문을 보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확고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가 지나더라도 분명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러한 사구게 법문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 잠깐 ‘후 오백세’를 살펴보면,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을 비롯한 한문본에서도 명백하게 설명되고 있지는 않으나, 금강경오가해에서 규봉스님께서 해석하신 바를 따라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2,500년 뒤를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한 부처님의 법이 전파된 뒤부터 1주기를 500년씩으로 하여 총 5주기, 즉 2,500년 동안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는 설이다.
제1기는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즉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정법이 가장 밝게 서 있는 때를 말하며, 제2기는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대로, 1기 때처럼 즉각 깨달음을 얻는 이는 매우 드물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을 열심히 하는 시기다. 제3기는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대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인 경전을 읽고 외우며 부지런히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많지만 선정을 닦고 참된 수행을 해 나가는 사람은 드물어 부처님의 법력이 많이 감소되는 시기를 말하며, 제4기는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대로써, 선정을 닦는 사람은 물론이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배우려는 사람들조차 줄어드는 시대로 이 때에는 공부나 수행은 없고 오직 사찰과 탑을 세워 복과 공덕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늘어나는 기복불교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5기는 말기로써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대로, 불법이 거의 쇠퇴하여 복을 바라며 절을 짓는 등의 불사까지도 사라지고 오히려 절의 재산을 갖고 싸우고 다투며, 불법을 팔아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며 분열하는 시기다. 여기에서 말한 후 오백세란 이런 다섯가지 시기 가운데 뒤에 있는 오백세, 즉 제5기 말기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시대의 3가지 구분법으로, 정법시대는 부처님 멸도 후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잘 수행하여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시기이며, 상법시대는 그 다음의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수행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시기이고, 말법시대는 그 이후의 500년 간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 불법이 쇠하는 시기를 말하는데, 이 가운데 말법시대를 후 오백세라고 한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학계에서는 역사적으로 금강경이 나온 시기를 고려했을 때 정법시대가 끝난 뒤의 상법시대가 후 오백세에 가장 적합하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정법, 상법, 말법시대 구분을 이처럼 일괄 500년으로 하지 않고 경전이나 논서 혹은 해석한 스님들에 따라서 500년에서 1,000년까지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다. 다시 말해 후오백세라는 것은 어떤 한 시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쇠퇴하여 사람들이 경전공부도 뒤로하고, 수행도 하지 않으며, 나날이 부패와 분열만이 있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정법을 공부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수보리의 질문, 이러한 후 오백세가 되면 정법이 쇠퇴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분열이 심해지기 때문에 그 때에도 지금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며 실천하여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으며, 앞의 사구게인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하는 등의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으며,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란 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인 삼학(三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은 모든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할 수행의 핵심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계를 지키고, 최상의 복인 깨달음을 실천하는 선정을 닦고, 부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깨달아 요달하여 지혜를 이루는 이 세 가지가 삼학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부처님께서는 계를 지키고(戒) 최상의 복을 닦으며(定)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김으로써 참된 지혜(慧)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으로써 후오백세의 말법시대에도 삼학을 닦는 청정한 수행자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부처님께서는 멸도 한 지 후 오백세가 되도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계정혜를 닦으며 정법을 수행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 하셨을까. 그 답변이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꾸준히 남아 이 세상을 밝게 비출 것이다. 그 이유는 인연법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지은 인연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佛]과 지은 인연,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수행하면서 지은 인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수많은 선지식[僧]과 지은 인연은 아무리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선한 인연의 뿌리, 즉 선근을 심되 과거 전생 또 그 전생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부처님과 그 인연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수많은 부처님과 불법인연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까지도 불법을 만나 수행할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생에 선근을 심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정진하는 마음으로 선근을 심어 나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과의 인연을 잘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부처님과 좋은 인연을 맺음으로써 아무리 험한 말법 시대가 오더라도 정법을 잊지 않고 수행해 나가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 선근을 심어 놓을 수 있겠는가. 물론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세상에 태어나 직접적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고,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시대라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이 시대라고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란 몸으로써 나투신 화신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된 부처님이란 법신을 의미한다. 법신이란 진리의 몸으로써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써 진리이고 부처님의 몸이란 말이다. 이러한 법신을 바로 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나툰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겉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의 부처님, 또 일체 삼라만상 속에 깃든 부처님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부처님은 법신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진리를 가까이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친견할 수 있고, 선근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이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을 부처님과 인연 짓듯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체 모든 업연이 선하고 텅 비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인연을 짓는 것이지만, 그 업을 짓는 주체인 몸과 말과 뜻이 맑고 텅 비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바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이 세상과의 인연이 아닌 이 세상의 근본 당체인 법신과 인연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단순한 모습으로써, 화신으로써만 보면 안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공허하고 실망감이 크겠는가. 이 금강경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부처님과 인연을 짓지 못함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겠는가. 지금 금강경에서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신으로써의 부처님과 많은 인연을 짓고, 선근을 맺어야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사는 수많은 중생들도 부처님의 출현을 기다려야하고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 놓치지 말고 좋은 인연을 심으라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선근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이다. 일체 삼라만상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진리로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밝은 눈, 정견의 시야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내 이웃과의 인연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고, 나무 한 그루와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며, 대자연과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이 그대로 부처님과 맺는 선근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부처님과의 선근공덕은 지을 수 있다. 사실 진리를 ‘불교’ 속에 한정짓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불교가 아니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저 불교에서는 진리의 가르침을 이름 지어 ‘법’이라고 하였고,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님’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 부처님을 올바로 따르고 수행하는 이를 ‘승’이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며, 그러한 불법승 삼보를 믿고 수행하는 종교를 ‘불교’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 자체에 불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 자체에 부처님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진리는 있으며, 또한 부처도 있고, 참된 깨달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깨닫고 보니 그 내용이 불교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것이다. 일체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다만 불가에서는 그것을 편의상 이름지어 ‘불교’라고 한 것 뿐이지, ‘불교’라는데 집착하고 얽매여 그것만이 진리이고 그것만이 우리를 깨닫게 해 준다는 틀에 갇히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금강경 전면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가르침이다.

저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며 바람과 구름과 태양 그리고 흐르는 물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첩첩 쌓인 푸른 산은 부처님의 도량이요, 맑은 하늘 흰 구름은 부처님의 발자취며, 뭇 생명의 노랫소리 부처님의 설법이고, 대자연의 고요함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 하는 말씀은 이 세상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산하대지현진광(山河大地現眞光)’이라 하여 ‘산하 대지가 그대로 진리의 빛이다, 즉 부처님 생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선지식 스님들은 흘러가는 구름에게 설법을 듣고, 계절따라 변해가는 숲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다. 대자연은 늘 그렇듯 똑같이 우리 앞에 있지만, 어떤 이에게 그 대자연은 진리의 나툼이며, 부처님 법신의 표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조화로운 천상의 뜰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별다른 감응도 주지 못하고, 그저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터처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업장만 늘리는 곳이지만, 지혜로운 이에게 대자연은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공덕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선근 공덕의 장이라는 말이다. 따로 부처님이 출현하신 세계에서만, 혹은 절에 가서만, 스님들을 뵙고 법을 들었을 때만, 경전을 볼 때만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있음을 확연히 알고 우리의 모든 인연을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번뇌를 버리고,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비우고, 텅 빈 마음으로,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세상과 인연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렇듯 모든 삶 그 자체를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삶으로 산 사람은 이러한 경전의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내 안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 혹은 삶 속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 문득 경전을 보고 내가 깨달은 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났을 때 그 때의 환희심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경전의 글귀 하나만을 듣고도 분명 한 생각에 바로 청정한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수많은 생을 부처님과의 인연을 지어왔고, 경전 공부를 하고, 선지식을 찾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번 생에 태어나서도 그 부처님과 지은 마음공부의 공덕과 선근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쉽고 빠르게 이해하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수많은 신도님들을 대하다 보면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알려주려 하여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어떤 신도님들은 한 두번만 경전의 가르침을 말씀해 드려도 바로 이해하며 신심을 내는 분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부처님과의 선근을 많이 심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차이다. 똑같은 설법을 하더라도 곧바로 발심하고 실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좋은 설법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바로 선근의 유무에 있다. 선근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번의 설법에, 경전의 단 한 구절에도 발심하여 정진하지만, 선근이 아직 충분하게 맺어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도록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더라도 소 귀에 경 읽기 처럼 아무런 깨달음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들어도 잘 모르겠거나, 설법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수행해야겠다는 대신심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법을 듣고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선근 공덕이 인연을 만나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 올 수 있다. 대충 대충 법문을 듣고 공부를 했더라도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소중한 인연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더라도 모르는대로 꾸준히 공부하고, 신심이 나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꾸준히 닦아 나가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 깊은 업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결정적인 인연을 만나게 되면 한순간 불꽃이 타올라 뜨거운 신심으로 피어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수행이나 기도에 힘이 붙지 않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욕심을 비우고, 집착과 번뇌를 비우고 텅 빈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시작이며, 도량을 찾아 기도를 하고 스님들을 찾아 법을 들으며 경전을 읽고 좌선을 하는 이 모든 일이 또한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다. 경전 공부를 하면서, 설법을 들으면서도 지금 당장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모르겠더라도 퇴전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이것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공부인연을 맺으면 언젠가는 밝게 깨달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선근을 맺어 놓는다면 언젠가는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날이 분명 다가 올 것이다.

다음 경구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선근(善根)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에서도 똑같이 선근으로 되어 있다 보니 한글로 해석할 때도 악의 반대 개념인 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즉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어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해석하는데 큰 불편은 없겠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 착한 법을 심었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착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진리에 있어서는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선근만을 문제 삼고 있는가. 물론 선에 대한 해석을 선악의 차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악을 초월하는 절대선, 초월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각묵스님이 번역하신 산스크리트 원전 주해에 보면 선근은 단순한 악의 반대로서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로써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선이란 산스크리트어로 꾸살라인데, 이는 꾸사라는 풀을 자른다는 의미로 이 풀은 억새풀처럼 억세고 날카로워 자를 때 마음을 주의집중하지 않으면 손을 베일 수도 있기 때문에 꾸살라는 의미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 등으로 이해된다는 내용이다.

즉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다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말은 한량없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또 선지식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여 주의집중하는 정념(正念)의 수행, 관(觀)의 수행 인연을 심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수많은 부처님에게 악한 인연이 아닌 선한 인연을 심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에게 지혜로운 주의 즉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하는 수행의 인연을 심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마음집중’이란 팔정도(八正道)의 정념이며, 근본불교 핵심 수행법을 망라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사념처(四念處)에 해당되는 수행법으로 불교의 핵심 중에도 핵심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집중’인 사념처를 닦으면 생노병사에서 벗어나며, 모든 악견을 없애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정혜쌍수의 혜, 지관겸수의 관 수행이며, 요즘 남방불교에서 잘 알려진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인 ‘위빠싸나’가 바로 이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이 정신희유분의 가르침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과 마음집중의 수행인연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인연으로 인해 여래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 선근, 선법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뒤에 23분 정심행선분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다음 게송을 보자.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다. 우리가 부처님과 선근을 얼마나 심고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는 것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그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도 부처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거나 알고 계시지 않는 것은 없다.
보통 우리들은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릴 때에도, 108배를 하면서도, 하나 하나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꼬박 꼬박 다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려 하고, 절을 하는 내내 ‘남편은 진급하게 해 주시고, 자식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시고, 화목하게 해 주시고...’ 그러면서 일일이 수많은 부탁을 드리곤 한다. 그래야지만 부처님께서 이 기도의 의미를 아시고 들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면서 내내 머릿속으로는 바라는 것들을 되새기느라 바쁘다. 한참을 말씀드렸다가도 조금 있다 보면 또 하나 생각나고, 집에 가다가도 또 하나 생각나고, 한참 후에 ‘아차 그것 하나 말씀 못 드렸구나’ 싶은 것도 생기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우리들의 인연과 업도 다 보고 계시며, 우리의 바램도, 우리의 발원도,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미세한 분별심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왜 그런가. 내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자성부처님이 항상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별이며 바람들을 그저 텅 빈 마음으로 부처님께 다 공양올리고 바치고 비울 것이지 그것을 애써 다시금 되새기며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다면 번거로운 일이고, 오히려 참된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기도며 수행은 번뇌를 비우고, 분별을 비우며, 바램도 놓아버리고 욕심도 놓아버리는 데서 온다.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데, 애써 그것들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부처님께 다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다 맡겨버렸을 때, 내 마음은 맑게 비워지고 텅 비어 참된 울림이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부처님과 진짜 선근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잔뜩 짊어지고 복잡한 때에는 부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부처님 또한 우리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바람과 소망들을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공양올린 뒤 내 마음을 평화롭게, 고요하게 텅 비울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참된 성취가 있을 것이고, 참된 공덕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글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바로 앞의 분에서 말했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송 한 구절을 보고 문득 청정한 믿음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없는 복덕을 짓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복덕 중에 가장 큰 복덕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을 얻는다거나, 바람을 성취한다거나, 지식을 얻는다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다는 것들은 유루복(有漏福)으로 유한한 것들이지만,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 진리를 깨닫는 일은 무루복(無漏福)으로 한도 끝도 없는 무량한 복인 것이다. 유루복들은 짓는 내가 있고 받는 내가 있다 보니 내가 지은 복 만큼만 받을 수 밖에 없고, 지은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텅 비고 말지만, 무루복은 ‘나’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짓고 받는 주체가 공하게 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온 우주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무량한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한 생각에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남을 만큼의 복 그 정도는 되어야 수행자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수보리여, 그들 모두는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되리라’ 다시말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여 무량한 복을 언급하고 계신다.
그래서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한 글귀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한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이구나 하는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한량없는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나’라는 형상도 형상이 아니며, 무릇 일체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바로 보았기 때문에, 복을 짓고 받는 주체도 사라지고, 그 때 비로소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이 세상 삼라만상 그대로가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무량한 복은 오는 것이다. 아상이 있으면 무루복은 없다. 아상이 없는 텅 빈 깨달음 속에서 무루의 복, 무량대복은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연이어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며, 그러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중생들에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고,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란 결국에 ‘아상’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상’이 끊어졌다는 것은 ‘나와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말은 다시 복을 짓고 받는 주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이며, 그랬을 때 ‘전체의 복’이 곧 ‘나의 복’이 되기 때문에 한량없는 무루의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다고 한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인 사구게 글귀, 즉 법을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내었는데 내가 청정한 믿음을 내어 무량한 복을 얻게 된 원인인 ‘법’에 대해서도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법으로 인해 청정한 믿음을 내었으니 자칫 법에 집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라는 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라는 상이 없다는 말은 자칫 법이 아니라는 상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라는 상에 머물러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것은 엄연히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법이 아니라는 상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있으면 진리가 아니다.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한다면, 법이라는 상, 진리라는 상에 집착하여 ‘이것만이 진리다’라는 치우친 생각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큰 갈등과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어나는 일이 있지 않는가. 많은 종교에서는 그 종교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며, 그 종교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고 실제 그런 ‘진리에의 집착’ 즉 ‘법이라는 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지금 이 시대에까지도 수많은 갈등이 조장되고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라는 집착’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일체 모든 집착과 고집은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뜻한다. ‘진리’ 또한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있다.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천주교에도, 알라신에게도, 저 아프리카 오지에도, 인디언이나 원주민들에게도, 저 숲 속의 동물 식물에게도 진리는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닌가. ‘내 종교만이 진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이제 버려야 할 때다. 특히 현재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뿌리 깊은 ‘배타주의’ ‘극단적인 근본주의’ ‘문자주의’에 빠져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경향이 90%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30%도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원주의’로써 모든 종교들을 진리와 구원의 길에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함께 배우고 협력하는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님도 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성직자 활동을 하기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성직의 길을 포기하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 변선환 박사 같은 분은 유럽이나 미국 신학계에서 공부하면서, 지각있는 서양신학자 사이에 ‘기독교만’이라는 배타주의적 생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한국에 가서 이른바 ‘종교다원주의’를 선창하다가 신학교 학장직은 물론 목사직까지 박탈당하는 ‘변’을 맞으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에, 종교에 집착하는 일인가. 참된 종교요 진리라면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 진리라는 종교라는 틀을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어찌 어떤 특정 종교 안에만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에서처럼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경전이나 부처나 신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툭 트여 자유로운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성경을 미진하나마 공부하고 있는데, 성경 속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법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만 그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다 보니 성경만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믿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담겨있는 깊은 뜻을 바로 보고 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는 분명 진리의 숨결을 담고 있다고 본다. 실제 많은 스님들께서 성경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을 해 놓고 있으며, 또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도 불경에 대한, 금강경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 정도까지만 해 두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마라집 한역의 금강경 번역인데, 현장 역이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좀더 살펴보자.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에서는 상이다 상이 아니다 하는 그런 관념 또한 치우침이기 때문에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상도 없고, 법상도 없으며, 법상이 아님도 없고, 또한 상 그 자체도 없고, 상 아님도 없다고 함으로써 일체 모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 모든 집착과 모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고요와 텅 빈 적멸이 있을 뿐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이라도 취하게 되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한 티끌도 남김이 없어야 하고, 마지막 한 가지의 ‘상’ 또한 다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법상도 비법상도 상도 비상도, ‘어떤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면 다시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이 진리의 글귀를 듣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결국에는 아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법상도 또 다른 아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상은 일체 모든 상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상이 완전히 소멸되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떤 상도 함께 완전히 소멸될 것이지만, 만약 그 어떤 미세한 상이라도 생기고 나면 그것은 그대로 아상이 생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집착을 한다고 했을 때, 집착을 하는 주체가 바로 ‘나’다. 집착이 생겼다 하면 그것은 벌써 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상에 집착해 있는 것이며, 아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나도 일체도 모두 공한 마당에, ‘진리다’라고 붙잡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공하고 진리도 함께 공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일체 모든 ‘집착’은 다 떨쳐 버려야 하는 것이다. 진리도 놓아버렸을 때 진리이지 잡고 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도 놓아버려야 하고, 가르침도, 복도, 지혜도, 선정도, 깨달음도, 일체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이러한 표현까지도 나아가 일체를 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뗏목 같은 것이기에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라 버리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 비유는 아함경에 나온 비유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기슭에 서 계셨는데 강에서 한 젊은이가 뗏목을 어깨에 이고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왜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냐고 물으셨더니 “이 뗏목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이 뗏목은 내게 고마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불법을 뗏목에 비유하였다. “강을 건너고 난 뒤에는 뗏목을 버리고 가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내 가르침도 그와 같아서 내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생로병사의 고해바다를 잘 건넜거든 내 가르침도 버려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환(幻)이다’라는데 치우친 사람에게는 본래마음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치유해 주셨고, ‘마음이 실체다’라고 치우친 생각을 가진 이에게는 마음의 공한 도리에 대해 말씀해 주심으로써 치유를 해 주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 따라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해 주신다. 그러니 어떤 한 가르침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그것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집착하지 않음에 있는데 진리에 집착을 하면 ‘집착하지 않음’의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걸림 없고 자유로운 것이 진리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법도 놓아버려야 하며, 법 아닌 것들 또한 놓아버려야 비로소 걸림 없는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



Posted by 법상





제 5, 여리실견분
진리의 참 모습을 보라.(참된 이치를 여실히 보라.)


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앞의 2분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대승정종분을 통해 네 가지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함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우도록 이끄셨으며, 묘행무주분을 통해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함으로써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함을 일깨우셨다.

이 분 여리실견분에서는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이어진다. 진리의 참된 이치를 여실히 볼 수 있도록, 여리실견 할 수 있도록 일체의 모든 상의 허망함을 일깨우며,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결국 여래를 볼 수 있도록 수행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여리실견분에서 금강경 내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금강경의 사구게가 등장을 하며, 이 사구게의 법문을 통해 우리가 수행해 나가야 할 마음공부의 방향을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이 때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께서 해 주신 법문에 대해 수보리는 ‘이렇게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하면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성취한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실천하였기에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셨고, 저렇게 거룩한 32상의 상호를 구족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처님께서 관해 보시고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형상에 얽매이고, 형상에 집착하며, 형상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분별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눈에 보여 지는 경계로써의 형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앞의 묘행무주분에서 언급했던 온갖 경계, 즉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의 모든 경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눈에 보여 지는데 집착하고, 귀로 들려지는데 집착하며,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모든 대상에 집착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바로 관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질문하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형상인 육신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일체 모든 대상의 형상을 보고 그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으며, 나아가 부처님 조차 형상으로써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형상으로써, 육신으로써는 부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수보리 앞에 계신 부처님이라는 형상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앞에 서 계시는 부처님의 육신은 단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형상일 뿐인 것이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다. 지수화풍이 인연 따라 모여진 것은 언젠가는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다. 인연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은 모두가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無我), 괴로우며(苦),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空)이다. 부처님의 형상 또한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상, 무아, 고, 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형상은 다만 지수화풍 사대가 임시로 모여 만들어진 가합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부처님의 형상에 얽매이는 것은 요즈음 절의 불상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절에 불상이 있고, 그곳에 절을 하는 이유도 불상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어느 한 곳 부처님의 숨결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며 결국에는 불상의 모습을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모습을 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부처님의 실체는 형상으로써의 육신 그 이면에 법신(法身)으로써 존재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법신이란 형상이 아닌 진리 그 자체의 몸이며, 크고 작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하는 모습이 아닌 진리의 당체이고, 온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숨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 진리 그 자체로써, 법으로써 부처님을 보아야지 눈앞에 보여 지는 형상으로써의 거룩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눈앞에 계신 부처님의 육신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고, 형상은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형상을 통해 참 진리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을 다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언제든 참 진리를 만났을 때 형상은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형상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라는 형상, 32상 80종호라는 형상의 거룩함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부처라는 형상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됨을 연설하고 있으며, 부처의 눈귀코혀몸뜻이 부처의 실체라고 집착해서도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교주인 부처의 몸에 조차 집착하지 말라고 설한다. 부처의 몸이라는 것도 부처의 몸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부처의 몸일 뿐이다. 인연가합의 공한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하물며 부처의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에 집착하여 머물고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정신은 제한 없는 무량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가 등장하고 있다. 이 사구게야말로 금강경 전체를 아우르고, 일체 모든 경전의 진리를 아울러 담고 있는 불교의 핵심 경구라고 할 수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게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하고 중요하며 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해 놓은 게송이다.

‘범소유상’이란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제법, 일체의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주체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눈귀코혀몸뜻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고, 몸으로 감촉되며 뜻으로 헤아려 지는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개시허망’이란 일체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범소유상이 다 개시허망이다. 이 세상에 형상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허망하다는 말은 공하다는 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표현되어지는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 공(空), 인연(因緣), 중도(中道), 무집착(無執着), 무소득(無所得)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삼라만상 형상 있는 일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으며[제행무상], 고정된 자아가 없고[제법무아], 괴롭다[일체개고]는 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공하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는 이유는 다 인연의 가합이라는 말이다. 인연이 가합되어 가짜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니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 무집착, 무소득인 것이다. 그러니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으며, 잘나고 못나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는 그 어떤 극단도 있을 수 없는 중도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구게에 등장하는 ‘허망’이라는 단어는 ‘허무하다’거나 하는 등의 ‘허무주의’로 쓰인 말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연기법과 삼법인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과도 같고,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중도, 무집착이나 무소득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는 이 점이 우리 앞에 놓여진 이 현상계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여 어느 하나 참된 것이 없고, 항상[常]하거나 즐겁거나[樂] 고정된 자아가 있거나[我] 깨끗하지[淨]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게송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는 말,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인 것을 바로 알아 일체 모든 형상이 실제는 형상이 아니며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즉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바로 금강경의 핵심중에 핵심이며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우리 사람들이 괴로운 것은 모두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명예가 권력이 욕심이 집착이 자아가 나아가 부처 조차도 모두 허망한 것이요, 텅 빈 것이며,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해 거기에 집착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모든 이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모두가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이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즉견여래 하지 못하고 괴로운 중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괴로운 것도 돈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위나 권력이 낮은 것도 지위나 권력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고, 성공하지 못한 괴로움도 성공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 ‘무엇’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내가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바로 그 ‘무엇’이 사실은 그렇게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무엇’에 대한 괴로움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끝끝내 집착하고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할 뿐 끝내 포기할 줄 모르고, 성공이라는 부유함이라는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한 생각 돌이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포기할 줄 모른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연기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로 ‘그것’을 쟁취해야지만 행복한 곳은 아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완전히 행복한 곳이고, 완전히 풍요로운 곳이며, 완전한 깨달음과 완전한 고요함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망하며 텅 비어 있기에 깨달음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란 말이다. 우리의 행복은 집착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그 마음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찾아 온다. 완전히 풍족한 세상에 살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족하며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일 때 행복은 찾아온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본래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사실이 진실로써 내 안에 깃들게 된다. 본래불이라는 것이 그 말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요, 본래 무한히 행복한 자며, 완전한 평화의 존재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떤 것에 상을 일으키고 그 상에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상을 짓고 부수고, 행복을 만들고 없애고 그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본연의 세계, 이 진리의 법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그 어떤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나타나지 않았으니 소멸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아무것도 없다. 본래자리로 가면 일체 모든 것이 딱 끊이진 적멸의 자리일 뿐이다. 아무리 우리가 몇 백 생을 윤회하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더라도 본래의 입장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룻밤 꿈을 꿀 때, 힘든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나고 죽기도 하며,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행을 벌이고 있지만 딱 꿈을 깨고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꿈이었을 뿐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답답해 할 아무 이유가 없다. 지금 이 현실 세계 또한 꿈인 것이다. 꿈이며 신기루고 환상이며 물거품인 것이다.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고 환상이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설사 이 지구가 몇 번 멸망을 하고 빙하기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본질에서는 적멸이고 지고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나고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본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음을,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하여 어느 하나 실체가 없음을, 다만 인연이 거짓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란 말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기 때문에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 한다는 이 진리에 대한 무명 때문인 것이다.

그 무명,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온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우리를 얽어맨다. 그러니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살아가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그러한 지혜가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이 게송의 소중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고,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한다는 이 말 앞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대자유의 깨달음인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에서 군더디기 붙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게송에서 대자유인의 걸림 없고 여여한 삶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광대무변하며 성성적적 무량한 깨달음이 바로 금강경 제일사구게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잠깐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역의 해석을 살펴보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해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 나온 상이란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모든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처님의 32상 이라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참된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32상이라는 모양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모양이 아닌 관점으로만 보아도 안 되며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으로 치우침 없이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상 아닌 데에도 집착하지 말도록 이끄는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에서처럼 모든 상이 허망한 것이므로 모든 상에 치우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상 아닌 것을 새로이 만들어 집착하게 되는데, 상에도 집착하면 안 되는 것 처럼, 상 아닌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형상에 집착하면 안 되듯이 형상 없는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또한 결국에는 구마라집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크게 볼 때 상도 타파하고, 상 아닌 상도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해석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즉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니, 모든 상을 타파하면서 도리어 ‘상 아닌 것’을 새롭게 만들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 또한 타파해야 할 것이란 얘기다. 상 아닌 것을 만드는 순간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분의 결론이자, 금강경의 중요한 핵심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일체 형상 있고 없는 모든 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고 있는 것임을 이 분에서 살펴 보았다.


Posted by 법상


인과 - 인과응보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의 상관성의 측면에서 살펴본 말로 인과, 인과율 혹은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또한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를 받는다고 하여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법이 그대로 연기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과율이 연기법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연기와 인과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설명은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또한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있다는 상의상관적인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해 있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인과라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직선적이고 시간적인 인과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씨앗이라는 ‘인’에 다양한 ‘연’이 화합함으로써 열매라는 ‘과’를 맺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법칙의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씨앗이라는 인(因)과 흙과 거름과 물 등의 연(緣)이 화합하여 열매를 맺고[果] 그 열매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인연이 화합하면 그에 따른 결과인 과(果)를 맺는다. 인과에서 본다면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이 모두 어떤 한 결과를 맺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다 ‘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씨앗이라는 ‘인’으로 인해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이며, 농부의 노력이라는 ‘인’으로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인 것이다. 이처럼 인과는 인간과 사물 간에도 작용하고, 존재와 존재 간, 존재와 사물 간 등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들에게 해당되는 자연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를 별도로 업보(業報)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라는 원인[인]을 ‘업’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의지적인 업에 따른 필연적인 대상의 반응을 ‘보’라고 한다. 이것을 업인과보(業因果報)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바로 뒤에서 설명될 십이처 교리에 입각한 주체적인 인간의 육근과 객관적인 대상이라는 육경 사이의 법칙인데, 인간이 눈귀코혀몸뜻으로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용을 일으키면[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반응[과]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과 대상 사이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연물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인과의 관계는 성립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말해주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선으로 대하면 선의 결과가 돌아오지만, 악한 행위를 하면 악의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이 업보에 대해서는 뒤에 업과 윤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법계 - 법주법계

이상의 연기, 인연, 인과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이 우주의 근저에는 연기라는 법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 우주의 기본 법칙이기도 하면서, 인간과 모든 존재들의 기본적인 운행 법칙이 바로 연기법인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것들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에 머물고 있으며[法住], 연기법이라는 진리의 세계[法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잡아함경』 12권 296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出現)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시건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法住),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건 출현하지 않으시건 일체 모든 존재는 항상 연기라는 법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세상은 항상 진리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잡아함경』12권 299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다만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이신다.”고 함으로써 연기법이라는 진리가 법계에 상주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법주 법계의 이치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저 우연히 생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저마다 완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진리의 몫을 해 내기 위해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것들을 ‘제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제각기 진리로써 존재하고 있는 ‘법’이라는 의미다.

사람만 진리로써 나툰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저 하늘의 구름이며, 바람이며, 별들도, 아무리 작은 풀벌레며 곤충과 심지어 미생물들 또한 제각기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진리로써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진리의 법계에 법으로써 법주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세계에 진리로써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만을 우월하다 하고, 자연이나 자연물들을 열등하다 할 수 있겠는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어찌 높고 낮은 우월감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계에 법주하고 있는 법으로써 정확히 필요한 곳에 정확히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정확히 필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견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이유는 분명한 진리의 몫을 띄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이 세상을 원망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이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반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살 걱정, 의식주 걱정으로 허덕이며 근근이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간교한 계략과 이기적인 술수로써 살아가는데도 성공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성실하고 소박하게 베풀며 살아가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더 이런 불만과 불평등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신을 욕하고 부처를 탓하며 이같이 불평등한 세상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기법에 기반한 법주 법계의 진리에서 본다면 이 모든 불평등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로써 진리의 모습에 하나도 어긋남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좁은 소견에서 본다면 당장에 이번 한 생 밖에 볼 수 없으며, 당장에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만 연연하지만 우주적인 진리의 시야는 시공을 초월하며 전체적이고 전 우주적인 툭 트인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언뜻 보기에는 불평등해 보이고, 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사실은 그 이면에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연, 인과, 연기의 진리가 일체 모든 존재의 저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진리가 머물러 있는 진리의 세계, 법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이 법계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이 전체적인 법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견해를 정견으로 바꾸어 나가야지, 현재의 갇혀 있는 좁은 소견으로 이 법주법계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치우쳐 있고, 갇혀 있는 좁은 소견을 온전하고도 전체적인 치우침 없는 정견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 그래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려면 먼저 법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즉 법주를 알아야 한다. 『잡아함경』14권 347에서는 “그들은 먼저 법에 머무를 줄을 알고 뒤에 열반을 알았느니라. 그 모든 선남자(善男子)들은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분명하게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으며, 나라는 소견[我見]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잘 해탈하였느니라.”라고 설하고 있듯이, 법에 머무를 줄 알고 난 뒤에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법주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곧 법이 머물러 있는 곳임을 분명하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우주는 그대로 법신불(法身佛)이요, 낱낱의 존재는 모두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말도 바로 법주법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 법계를 법신불이라고 하며, 나라는 존재 또한 사실은 진리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진리의 몸이기 때문에 자성불이라고 한 것이다.

법신불이니 자성불이니 하는 말이 어떤 실체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진리로써의 몸 없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열반을 구하려는 수행자는 이러한 법주를 바로 알아 내 안에,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에 언제나 법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러한 법신불과 자성불의 진리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의 첫째는 나를 완전히 내던져 맡기는 것에 있다. 경전의 말씀처럼 법주를 분명히 알아야 열반이 있는데, 법주를 분명히 알아 실천한다는 것은 곧 ‘홀로 고요한 곳에서 분명히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나라는 소견을 여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있다. 나를 완전히 진리에 내맡기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완전히 힘을 빼고 함께 따라 흐를 때, ‘나’라는 소견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번뇌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법에 머무른다는 말은 곧 ‘나’라는 소견을 놓아버리고 모든 생각과 번뇌를 다 내맡기고 다만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바라보기를 게으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모든 것을 맡겨야 ‘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고, 법이 머무르고 있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에게도, 내 주변의 세계에도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음을 바로 알고 믿어 법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의 소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고요히 법을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했을 때 법에 머무르는 지혜[法住智]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주지(法住智)를 얻으면 ‘나’라는 소견이 사라지고, 일체 모든 것을 법에 내맡기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평화가 깃들고 지혜가 생겨난다. 『잡아함경』14권 345에 보면 “저 사리불 비구는 실로 내가 하루 내지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묻는 이치에 대해,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그것을 해설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리불 비구는 법계(法界)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니라.”라는 대목이 보인다.

즉 부처님께서 몇 일 밤낮 동안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시더라도 사리불은 그 모든 법을 해설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리불이 법계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법계에 잘 들어가 진리의 세계를 완전히 깨닫고 진리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다 이해하고 해설해 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법주법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가 곧 진리의 세계이며, 나라는 존재 또한 진리가 머물고 있는 법신임을 믿어 ‘나’를 내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 모든 것을 진리에 내맡기고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산다고 하면 아상에 빠지게 되고, 이기와 아집에 빠지고 말지만, ‘진리’가 산다고 믿고 맡기며, 부처님이 산다고 믿고 맡기고 살게 되면, 괴로움에 허덕일 것도 없고, 삶을 헐떡거리며 살아갈 것도 없어진다. 그 때부터는 삶이 고요해지고, 이기와 아집이 소멸하며, 평화와 안식이 깃들게 된다.

괴롭기 위해서는 괴로운 ‘나’가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법주법계에 맡기고 살게 되니 ‘나’가 사라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진리’만이 남아 진리답게 법답게 저절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주법계로 사는 수행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는 것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수많은 진리의 인연에 의해 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주법계에서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법주나 법계를 주체적인 어떤 상으로 실체화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로써의 이치를 설하는 것이지 별도의 상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생계와 별도로 실체적인 어떤 법계가 있다거나, 내가 머물고 있는 이 현상계와 별도로 법주가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무아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발붙일 틈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부처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하고 머물러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를 벗어나고 만다.

Posted by 법상



[문경 김용사, '이뭣고' 하는 글자가 인상적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을 때
보통 사람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온갖 지식과 알음알이를 총 동원합니다.

지금까지 과거로부터 들어왔고 배워왔으며 익혀 온 온갖 방법을 다 써 보
고,
그것도 모자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묻거나 책을 찾아보고
요즘 같으면 인터넷을 뒤져보면서 온갖 지식들을 총 동원하여
그 지식들을 잘 분석하고 판단하며 분별하여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그래서 머릿 속에 많은 지식들이 들어 있는 사람은
책을 찾아보거나, 사람들에게 묻거나 할 일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많이 아는 만큼 남들이 그 사람에게 많이 묻곤 하겠지요.
아마 요즘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을 똑똑한 지식인이라고 부를 겁니다.
아는 것이 많아야 사는데 그만큼 편리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즈음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강요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넓혀 나가고 소위 식견을 넓히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누구에게나 아주 익숙하고 당연한 문제해결 방법이며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방법이지요.

그런데...
잠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지식이 많을수록
우리 머릿 속은 더 복잡해 지고 번거롭습니다.

우리들의 통념에서야
아는 것이 많고, 지식이 많으면 더 편리하고 더 행복하고
사회에서 더 많이 인정받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사회적인 통념이 그렇다고 다 그렇게 믿지는 말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그동안 너무 사회적인 관념에 얽매여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자신의 순수성이며 독창성을 잃고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대로 나아가려 한단 말입니다.

우린 누구 누구처럼 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며 살고 있습니까.
누구처럼 똑똑하고 공부 잘하려고,
누구처럼 돈 잘버는 사업가가 되려고,
누구처럼 리더쉽을 키워 정치가가 되려고,
누구처럼, 누구처럼 우린 얼마나 남들을 닮으려고 애써 왔어요.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이 되질 못하고
끊임없이 내 밖의 어떤 사람을 닮아가려고 애만 쓰고 산단 말입니다.
이제 사회적인 관념들을 다 놓아버리고 한번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앞에서 아는 것, 지식이 많으면 번거롭다고 했어요.
사실 우리는 아는 것이 머릿 속을 꽉 채우고 있지 않아도
다 잘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그럴 수 있도록 다 짜여있고 질서 잡혀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삶의 질서는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어요.
내 안에 밝고 원만한 지혜가, 본래 자리에서 나오는 밝은 깨침의 소리가
항상 울려 퍼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 소리를 듣지 못해요.
내적인 삶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질 못한단 말입니다.

왜 그렇겠어요.
아는 것이 많아서, 그 알음알이들이 그 소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지혜의 목소리를 지식이 가로막고 있단 말입니다.
지식이 지혜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서점에 가면 책들이 무수히 많지만
대부분의 서적들은 우리들에게 온갖 지식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내 안에 지식을 쌓아주기는 하지만
내 안을 맑게 비워주는 책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쌓는 것은 지식이고, 비우는 것은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꾸 쌓기만 하면 우린 그 쌓여있는 것들로 인해
내 안에 본래 충만한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예요.
비우면 비울수록 더 충만하고 더 지혜로워 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들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몸에 병이 들어 아프면 우리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요?
지금까지 배워오고 익혀왔던 온갖 지식들을 동원하게 마련이지요.

감기 몸살로 아플 때는 밀가루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더라,
아플 때 일수록 밥을 많이 먹어야 정신을 차린다더라,
어떤 음식은 먹으면 안되고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한다더라,
이 뿐 아니라 책에서 듣고 사람들에게서 들어 온 온갖 지식들을 총 동원하

우린 몸의 병을 치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무리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음식이 이 병에 좋지 않더라고 하면 절대 안 먹고,
또 아무리 먹기 싫고 하기 싫은 것이더라도
몸에 좋다고 하면 기를 쓰고 먹으려 하고 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아져요.
그만큼 우린 얽매이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지요.
그만큼 우린 부자유한 것입니다.

또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만큼 행동을 하려고 하지요.
어떤 사람은 지난 번 감기 때 무슨 음식을 먹고 나았다면
감기만 걸리면 그 음식을 찾게 마련이고,
또 어떤 사람은 어느 약방에서 약을 지어 먹고 나았다면
그 약국에서 꼭 그 약을 찾으려고 하고,
나름대로의 병에대한 알음알이 만큼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것이 나에게 꼭 맞는
확실한 병약이고 처방일까요?
사람이 다 다르고, 그 사람에 따라 병이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지식으로 이렇게 처방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겠어요.

먹기 싫지만 병에 좋다면 억지로 먹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마음에서 원하는 것 즐거운 마음, 맛있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좋을
지,
고정관념으로 따지지 말고 그냥 당연하게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고 먹고싶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 될 수 있는 법이지요.

내 몸에 병이 걸렸다 싶으면 그냥 받아들여 보세요.
내 몸과 마음에 그 어떤 독한 인연으로 인해 병이 왔겠구나
하고는 한 몇 일 병이 원하는 만큼 앓아주겠다 하고 말입니다.
아프면 한 몇 일 앓고 나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어요.

괜히 약 먹는 다고 하지만 약이라는 것들이
그 병의 근본을 치유하게 해 주긴 역부족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앓아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근원적 치료 방법인 것이지요.

우리 몸이란 다 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에 의지하는 것 보다, 그 어떤 병의 지식들에 의존하는 것보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의지하여 턱 맡겨 놓는 것이
그래서 자연치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치료방법이라는 거지
요.
그러고 나면 먹고 싶어 먹는 것이 그대로 양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지식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자연치유능력과도 같은 내적인 삶의 질서를 가로막게 마련
입니다.
내 몸은 이것을 원하지만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지식에서는 다른 것을 원할 때
우린 얼마나 얽매이게 되고 휘둘려 괴롭힘을 당하겠습니까.

우리 몸은 완전한 하나의 소우주이고 법계입니다.
그대로 나 자신이 온전한 부처님, 법신이란 말이지요.
애써 머리 굴리고 판단 분별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잘 살아갑니다.
배 고프면 밥을 찾고,
또 부르면 뒷간을 찾고,
졸리면 자고,
짠 음식을 많이 먹었으면 알아서 물을 찾게 마련이고,
몸에 수분이 많아지면 또 알아서 빼게 마련이라는 거지요.

물 흐르듯이 우리 몸도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법계의 이치에, 내적인 삶의 질서에 턱 맡기고 나면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밝은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왜 옛 스님들께서
‘배 고프면 밥 먹고, 부르면 똥 누는 것’이
평상심이 그대로 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겠어요.

언젠가 지리산에 올랐을 적 일입니다.
몇 일 동안 인상적인 두 팀을 만났는데
한 팀은 등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웠던 분들이라
장비에서부터 걷는 법, 등산하는 기술 등
온갖 전문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신 분들이셨고,
또 한 팀은 그야말로 몇 일씩이나 있을 종주인데도 불구하고
뒷 산 오르는 기분으로 상식적인 선에서 준비를 해 오셨지요.

첫째날은 전자의 분들과 대화를 나누었더니
아는 것이 너무 많고 지식이 너무 많으니
대화를 나누면서도 제 마음이 많이 무거워요.
이를테면 걸을 때에도 경치 좋은 곳이 나오거나
아름다운 곳에서라면 30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산을 느끼면서 행복감에 젖어보기도 하고,
정상에 앉아 명상을 즐기기도 할 터인에
그 분들은 대충 50분을 걸으면 꼭 10분 정도를 쉬어 주어야 하더란 말입니
다.

또 저녁 때 별빛이 너무 고와 도무지 잠이 들 수 없어서
한참을 별을 바라보며 걷다가 앉았다가 흠뻑 감상에 젖어 있었더니
내일 아침 몇 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출발해야 하고
꽉 짜여진 일정 때문에 일찍 잠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후자에 만났던 분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참 마음이 편하고 아름답고 싱그럽더란 말입니다.
상식 선에서 3일 산에서 머물면 이정도면 되겠다 싶어
마음 가는대로 준비를 했고,
딱히 어찌 어찌 일정을 잡지 않았다 보니
경치 좋은 곳에서는 한참을 앉아 느끼기도 하고,
밤 하늘 별빛을 바라보며 여유있는 별자리 여행도 하고 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산행을 하며 모든 부분에서
지식이 많으니 그 지식에 내 몸을 의지하는 일이 많아지고,
사소한 지식들이 없다보니
그저 마음 가는대로 산을 느끼고 걸을 수 있더란 말입니다.

과연 어떤 분들이
산을 더 정감있게 느끼고 산과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는 것이 많고, 지식이 많으면
그 지식으로 인해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기 쉽습니다.
보기 위해 지식이 있는 것인데
오히려 산을 보고 느끼는 일보다 지식이 더 앞서기 때문이지요.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발 한 발 내딛기 위해서이며,
그 순간 산과 함께 한 자리 하고 느낄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산을 느끼는데 무슨 지식이 필요하겠어요.
산을 바라보는 넓은 가슴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전 사진을 찍는 어떤 법우님께서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니다 보니
오히려 좋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정작 내 안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눈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고는 혼자 느끼기 아까워 사진 속에 담고자 찍을 터인데
아름다움을 느끼고 찍어야 하는 순서를 망각하고
찍는데 마음이 가 있다보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사라지고 말 것 같습니
다.

세상 모든 일들이 이와 같겠지요.
수행하는 일도 수행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알음알이가 많다보면
수행에 대해, 마음공부에 대해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바빠
정작 직접 실천을 하는 일은 뒷전이 되고 말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라는 것은
나 자신의 텅 빈 맑은 시선을 가리고 왜곡시킬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거지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터인데
있는 그대로를 지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니 말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정견(正見) 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온갖 알음알이며 지식들로 꽉 채워진 머릿 속을 비우고
속 뜰에서 울려나오는 내적인 삶의 질서에 온전히 맡기고 흐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배워오고 익혀온 온갖 알음알이며 지식들 때문에
우리 안에서 새어나오는 밝은 빛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온갖 지식이며 알음알이들을 다 놓아버리고,
그냥 내 안의 삶의 질서에, 내 안의 자성부처님께
일체 모든 것을 내 맡기고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저절로 다 알아서 살아주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애써 머리 굴리지 않아도 잘 때 되면 자라는 신호를 보내주고,
먹을 때가 되면 알아서 먹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주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머리 굴리고 판단 분별하면서 복잡스럽지 않게
마음을 고요히 하고 속 뜰을 비추어 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 밝은 해답이 흘러 나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바깥에서 쌓아온 온갖 알음알이들을 지식이라고 하고
내 안에서 텅 빈 가운데 우러나오는 소리를 지혜라고 하는 것이지요.
온전히 놓아버리고 내맡긴 가운데 지혜는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혜로써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삶의 질서에
일체를 내맡기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사시는 것’이 되는 것이지
요.
Posted by 법상



[대승사 산내암자 윤필암]

부처님과
하느님이 둘이 아니십니다.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참으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과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이 둘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자성부처님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내밖에 그 어떤
동떨어진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밖을 향해 믿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느님과 부처님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일체를 당신께 맡기고 가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성령이
그대로가 성부이며 성자인 것이지
그 셋을 어찌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어요.

성부와 성자 또한
성령으로써 내 안에 항상 충만한 것이며,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빛을 놓고 계십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 부처님 또한
서로 다른 부처님이 아닌
내 안의 자성부처님으로서 '하나'인 것입니다.

'참 나'의 이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또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어떠할 것이며,
알라신이라고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결국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리의 몸(法身)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고 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로 말할 뿐
근본이 흔들리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니 종교니 내 종교니 하면서
싸울 것도 없고,
내 가르침이 더 깊이가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내 가르침만이 나를 천당으로 가게 할 수 있고,
내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고집하지 않음입니다.
어느 한 쪽을 고집하게 되면
벌써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일체 분별을 다 여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주교, 기독교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지요.

그 말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천주교를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참진리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 참진리 또한 버려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더 밝은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밝은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이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집이 아닌 맑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만이 옳다'는 고집을 가지고
'참된 믿음'이라 착각을 하지는 마세요.

참된 믿음이란
억척스러운 고집이 아니라
텅 비어 어느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열린 믿음일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한 쪽에 머물러 고집스레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진리란 어떤 방법으로든 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요.

활짝 열린 탁 트인 마음이
모든 수행자의, 모든 구도자의 참마음일 것입니다.
수도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도리어 꽉 찬 그런 훤칠하게 트인 길로 가야지,
좁은 한 길만 고집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어찌 만중생을, 숯한 어린 양들을 구할 것입니까.

불교 신자, 수행자 법우님들과,
기독교 천주교 신자, 수도자 형제 자매님들
참으로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진리의 길을 걷는 '좋은 도반'입니다.

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언제나 맑고 향기롭습니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갖혀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금긋고 살았지만,
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반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나'도 놓아버리고,
'내 종교'도 놓아버리고,
'내 알음알이 진리'도 놓아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본래자리 밝으신 '자성부처님' '한마음 부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내면의 참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어린 양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성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당당하고 시원스레 살아갑시다.

부처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산다고 생각지 마세요.
자꾸 아상을 키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아상 대신에,
'자성부처님'께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도록 온전히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일화의 맑고 향기로운 빛을 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이며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보살은
모든 보살행을 갖추고 익히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진리에 집착하지 않고,
소망에 집착하지 않고
선정(禪定)에 집착하지 않는다.

적정(寂靜)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여
그 덕을 성취시키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화엄경]



참으로 수행 잘 하는 사람은
스스로 수행을 잘 하는 것을 모른다.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
선정에 든 사람은 선정에 든 것을 잊으며,
적정에 든 사람은 적정에 든 것을 모른다.

스스로 수행을 잘 하고 있다는 상이 생기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는 생각이 있으며,
스스로 깨달았다는 상이 생기면
거기에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면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참된 수행자는 하되 함이 없이 행하는 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야말로
이 공부의 핵심이다.

참된 진리는
그 진리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고
참된 선정은 그 선정에 집착하지 않는다.

금강경은 불법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된 불법이 드러남을 설하고 있다.

불법을 공부하면서도 불법 공부에 집착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몇 일이고 참선에 들어 선정을 얻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며,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여 포교했더라도
스스로 포교를 잘 했다는 상이 생기지 않았을 때
그것은 참이다.

스스로의 수행력을, 포교력을,
많은 공부의 이력을 들추면서
자랑삼아 말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행을 하고,
보시를 하고, 수행을 하고, 좋은 일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고 나서는 반드시 잊어버리라.
놓아버리라.

놓아버리는 순간 그것은 보석처럼 빛나지만
드러내는 순간 그 빛은 사라지고 만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된 불교가 드러나는 것이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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