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의법출생분
이 법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 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 福德性 是故 如來說 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 乃至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 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 出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법출생’이라는 이 분에서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 경의 가르침에서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상을 타파하는 이 경전의 가르침이 수승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수승함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는 것 보다 더 한 수승함이다. ‘일체 모든 상의 타파’를 밝히는 금강경의 가르침이야말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 즉 불법이라고 하는 그 상 마저도 타파되어야 할 또 다른 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불법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것이 불법이며, 금강경의 가르침이고, 거기에는 불법이라는 상 또한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그렇듯 불법조차 모두 타파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불법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 보기 앞서 삼천대천세계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말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할 뿐더러, 사찰을 지을 때에도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도량을 건축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요즈음의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연구되고 있는 결과와도 불교의 우주관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서 있고 그 수미산을 동심원으로 일곱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싸여 있다. 이 칠산팔해(七山八海)의 가장 변방의 산이 철위산(鐵圍山)이고 철위산으로 둘러싸인 팔해의 마지막 바다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커다란 대륙이 있는데, 이곳이 북구로주(北俱盧洲), 남섬부주(南贍部洲), 동승신주(東勝身洲), 서우화주(西牛貨洲)이다. 수평적으로 보았을 때, 이 네 곳의 대륙의 지표면에 인간과 축생이 살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남쪽의 섬부주로 이 곳이 가장 살기 어렵고 박복한 곳이라고 한다.

한편 수직적으로 보면 인간과 축생이 사는 그 아래쪽 철위산의 밑바닥에 지옥과 아귀의 세계가 차례로 있으며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의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다. 사천왕천은 네 개의 천상으로 이를 다스리는 네 명의 천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그리고 사천왕천에서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는 33천이라 불리우는 도리천(忉利天)이 있으며, 이 곳의 천주(天主)가 제석천(帝釋天)이다. 또한 천상계는 아니지만 공중에 아수라(阿修羅)가 있는데 이들은 항상 분노와 진심이 많아 인접해 있는 제석천의 천병(天兵)들에게 계속해서 싸움을 건다. 항상 지면서도 업이 그러하기 때문에 늘 전쟁을 일삼아 아수라가 사는 곳은 늘 정신이 없고 전쟁터처럼 폐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수라장(阿修羅場)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다.

그 다음이 야마천(夜魔天)이고, 그 위에 차례로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는데, 이상의 여섯 개의 천상을 욕계육천(欲界六天)이라고 한다. 욕계란 식욕․수면욕․색욕과 같은 온갖 욕망으로 뒤덮인 세계를 말한다. 이 욕계의 하늘이 이상과 같이 여섯 가지라 욕계 육천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앞서 말했듯이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이 살고 있다. 욕계 육천 위로는 색계(色界)의 18천이 있고, 다시 그 위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이 있다. 색계란 욕계에서와 같은 온갖 욕망들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세계로 살아 있을 때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4가지 선정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곳이며, 무색계란 욕망은 물론이고 물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4무색선정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수미산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시작하여 위로 28개의 천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계를 하나의 수미세계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수미세계 1,000개가 모인 것을 일 소천세계라 하며, 이 소천세계 1,000개를 모은 것이 중천세계, 또 이 중천세계를 1,000개 모은 세계가 바로 ‘대천세계’인 것이다. 이 대천세계는 소천, 중천, 대천이라는 세 종류의 하늘세계가 모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라고 불리운다. 즉 삼천대천세계는 10억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로 그야말로 무량수 무량광 한량없는 크기의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칠보(七寶)는 수많은 경전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의 보물로써 『아미타경』에서는 금, 은, 유리(다이아몬드), 파려(적백의 수정), 자거(백색의 산호), 적주(붉은색 진주), 마노(짙은녹색의 보옥)를 들고 있고, 『법화경』에서는 여기에 파려와 적주를 빼고 대신에 진주와 매괴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보배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세계인 삼천대천세계에 가장 진귀한 보배인 칠보로써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를 묻는다. 이에 수보리는 매우 많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유를 함께 말씀드리고 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질문하신 깊은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저 많다고 하지 않고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있다. 수보리는 지혜로운 답변을 하고 있다. 그저 많다고 한다면 그 답변은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나 수보리는 많다고 답변하면서 그 이유는 ‘복덕은 복덕이 아니므로 복덕이다’고 하고 있다.

이 논법은 금강경에서 전체적으로 나오고 있는 논리 전개법이다. 일반적인 생각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도저히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은 논리를 초월해서 지혜로써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논법이다. 어리석은 이에게 있어서 이 논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법이야말로 금강경의 ‘완전한 상의 타파’를 그나마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완전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완전한 진리를 표현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성립될 것 같지 않은 논법이 진리를 표현하는 금강경의 논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구마라집 번역에서는 위의 번역에서와 같이 복덕과 복덕성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씀으로써 앞의 복덕과 뒤의 복덕성의 차별을 두어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쓰여지는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금강경 논법을 조금 벗어나 있다.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의 해석은 ‘세존이시여, 선서시여, 그 선남자 선여인은 이로 인해서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공덕의 무더기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직역을 중시한 현장의 번역에서도 이러한 해석은 계속되고 있다. [현장역, 世尊. 福德聚福德聚者 如來說爲非福德聚 是故 如來說名福德聚福德聚]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구마라집의 의역일 것이라고 보여진다. 다시말해 혜거스님의 강설에서 이해되었듯이 유위법으로써의 복덕과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조금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즉,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은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이란 본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많고 적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란 분명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는 금강경의 본래의미를 확연히 드러내 주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앞서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의 해석에서처럼 ‘그렇게 보시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공덕의 무더기라고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를 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은 유위법으로 보았을 때 공덕이지만, 무위법으로 보았을 때는 공덕이 될 수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 상 자체도 타파되어야 한다. 앞서 4분에서 이해되었던 것 처럼, 보시를 하지만 상에 얽매여 보시를 하지 않았을 때 그 공덕은 무량한 것이다. 다시말해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았지만 ‘이것이 공덕의 무더기다’라고 스스로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공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의 무더기라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다’라는 논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공덕이다라고 상을 짓는 것은 공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공덕의 비유를 드심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이 무량함을 말하고 계신다. 그 무량한 이유는 무주상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하더라도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상에 머물러 보시하고, ‘보시했으니 이것은 공덕이 될 것이다’라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공덕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많은 보시를 했으면서도 ‘공덕은 공덕이 아니다’라고 바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은 많은 공덕이 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의 문답을 통해서 물질로써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복덕이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이처럼 복덕이 많은 것이니 물질적으로 많이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보시도 무주상이 되었을 때는 이처럼 큰 공덕을 성취할진데, 하물며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사구게란 앞의 제5분에 나왔던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와 같은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게송들이 시적으로 표현되다 보니 네 글귀의 시적인 게송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그래서 대표적으로 사구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 반드시 네 구절로 된 경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특정한 구절을 지정해서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참된 의미는 ‘이 경전 가운데 가르침을 잘 함축하고 있는 어느 한 구절’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강경의 핵심 사구게인 제5분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구마라집 번역에서나 사구게로 딱 떨어지도록 되어 있지,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네 구절로 딱 떨어지지는 않는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부분에서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무언인가. 앞서 언급한 칠보 보시의 비유는 그처럼 많은 물질적 보시를 하더라도 공덕이 무량할진데, 정말 소중한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보시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적 보시보다는 법보시가 더 수승하다는 말이다. 왜 그러할까. 그 답변이 다음 구절에 나온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법보시가 수승하고 공덕이 많은 이유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경전의 가르침을 깨달아야만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최상의 법이라는 것도 상을 타파하는 금강경의 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의 법을 얻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보시를 많이 행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정신까지 부유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보시 중의 으뜸 가는 보시는 물질적인 보시가 아니라 가르침의 보시이다.

가르침의 보시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고, 탐진치 삼독심을 버릴 수 있게 해 주며,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한 가르침의 보시 중에 가장 으뜸가는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르침,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하여 법상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상이란 상은 다 타파해 주는’ 가르침이다. 일체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깨달아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나며, 상에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으로 깨달으신 분들이 부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이유는 일체의 모든 상을 다 타파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말씀하고 계신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마라집 역에서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로만 맺음이 되어 뒷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그 뒤에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현장역에서는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길, 모든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고 했고,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수보리여, 불법들이라는 것은 불법들이 아니라고 여래에 의해서 설해졌나니, 그래서 말해지기를 불법들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 뒷 구절이 나와 있어야 비로소 아상타파를 위한, 공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금강경의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이 성립된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법보시의 공덕에 대해 설하는 이 장의 맺음에서 왜 갑자기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말은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며, 이는 다시말해 불법 속에서 부처님이 나왔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흡사 이 말은 이 금강경의 가르침인 불법만이 진리이며, 이 법만이 부처님을 나오게 한다고 들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불법을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상을 타파하라는 불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불법이라는 상에 얽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불법 속에서 모든 부처가 나왔으며, 이 불법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듣고 나니 어리석은 중생들은 ‘아 이 불법만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 불법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고 계신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즉 불법에도 집착하면 안 되고, 불법이라고 고정된 어떤 실체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불법이라는 틀, 불법이라는 상까지도 타파했을 때 비로소 참된 불법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바로 알았을 때 비로소 불법은 빛을 발할 수 있다.

불법도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불교도 이름이고, 부처도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옛 스승님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상의 타파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설령 부처가 되었든, 불법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고정되게 실체화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될 수 없다. 불교를 불교라고 하면 불교가 아니고, 진리를 진리라고 하면 진리가 아니며, 부처를 부처라고 하면 더 이상 부처가 아니다. 불교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진리가 아니며, 부처라는 상을 세워도 이미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은 스스로를 ‘불자’라는 틀에 가둬선 안 된다. 불법의 진리를 ‘불교’라는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 가두어진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신앙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참된 불자라면 이렇게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걸려선 안 된다.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불교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진리라는 틀에서도, 부처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불교를, 진리를, 부처를 바로 보고 믿으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버렸을 때 비로소 불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어디에도 치우쳐져 있지 않은 이 세상의 종교이고, 이 세상의 진리이다. 믿건 믿지 않건 간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건 그렇게 생각하지 않건 간에 불교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공통된 종교인 것이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해 놓았다 보니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이름이 불교일 뿐,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불교이다. 그렇기에 진리이고, 그렇기에 일체 모든 존재의, 일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이며 진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상세계의 종교는 오직 ‘불교’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천상세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불교라는 이름을 보고 있거나, 불교라는 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오해가 있는데는 불자들의 잘못이 크다. 불자들 스스로 ‘불교’를 틀에 가두고 그 틀 속에 많은 신자를 끌어 모으기에만 바빴고, 불법이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며, 어떤 말로도 규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했을 뿐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이름 하여 ‘불교’라고 이름 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의 불자, 수행자들은 간간이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왜 불교신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하는가. 불교가 타종교에 비해 신자가 많아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를 어떤 하나의 ‘종교’로 가두어 놓고 사람들을 그 안에 많이 포섭시키기 위해 애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동일 뿐이다.
우리의 신자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이고 생명이며 우주법계 그 자체다. 심지어 소나 돼지나 강아지조차 우리의 신도이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구름과 바람과 하늘이 다 우리의 신도이다.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 원불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그리고 종교가 없는 그 모든 이들이 우리의 신자이다. 그들이 우리의 신자이며, 우리가 그들의 신자이다. 이름을 불교라고 해서 그렇지, 이 모든 존재와 생명이 그대로 진리의 신자이며, 진리 속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좋은 도반들일 뿐이다.

이렇게 툭 터진 마당에 왜 억지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교신자와 타종교 신자로 나누어 놓고 불교신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라는 틀을 깨야 한다. ‘불법’이라는 틀을 깨야 한다. 그 틀만 깨면 아무런 장애가 없고, 다툼이 없으며, 일체가 고요하고 평화롭다. 불교신자라는 틀이 없으니 타종교신자라는 틀이 있을 것도 없고, 불교라는 틀에 가두지 않으니 일체 모두가 불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보편적이고 온전한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Posted by 법상



[대승사 산내암자 윤필암]

부처님과
하느님이 둘이 아니십니다.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참으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과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이 둘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자성부처님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내밖에 그 어떤
동떨어진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밖을 향해 믿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느님과 부처님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일체를 당신께 맡기고 가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성령이
그대로가 성부이며 성자인 것이지
그 셋을 어찌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어요.

성부와 성자 또한
성령으로써 내 안에 항상 충만한 것이며,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빛을 놓고 계십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 부처님 또한
서로 다른 부처님이 아닌
내 안의 자성부처님으로서 '하나'인 것입니다.

'참 나'의 이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또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어떠할 것이며,
알라신이라고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결국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리의 몸(法身)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고 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로 말할 뿐
근본이 흔들리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니 종교니 내 종교니 하면서
싸울 것도 없고,
내 가르침이 더 깊이가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내 가르침만이 나를 천당으로 가게 할 수 있고,
내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고집하지 않음입니다.
어느 한 쪽을 고집하게 되면
벌써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일체 분별을 다 여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주교, 기독교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지요.

그 말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천주교를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참진리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 참진리 또한 버려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더 밝은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밝은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이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집이 아닌 맑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만이 옳다'는 고집을 가지고
'참된 믿음'이라 착각을 하지는 마세요.

참된 믿음이란
억척스러운 고집이 아니라
텅 비어 어느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열린 믿음일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한 쪽에 머물러 고집스레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진리란 어떤 방법으로든 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요.

활짝 열린 탁 트인 마음이
모든 수행자의, 모든 구도자의 참마음일 것입니다.
수도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도리어 꽉 찬 그런 훤칠하게 트인 길로 가야지,
좁은 한 길만 고집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어찌 만중생을, 숯한 어린 양들을 구할 것입니까.

불교 신자, 수행자 법우님들과,
기독교 천주교 신자, 수도자 형제 자매님들
참으로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진리의 길을 걷는 '좋은 도반'입니다.

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언제나 맑고 향기롭습니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갖혀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금긋고 살았지만,
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반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나'도 놓아버리고,
'내 종교'도 놓아버리고,
'내 알음알이 진리'도 놓아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본래자리 밝으신 '자성부처님' '한마음 부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내면의 참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어린 양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성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당당하고 시원스레 살아갑시다.

부처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산다고 생각지 마세요.
자꾸 아상을 키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아상 대신에,
'자성부처님'께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도록 온전히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일화의 맑고 향기로운 빛을 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이며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