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창조하는 네 가지 방법

빗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지난 시간에 ‘내가 내 삶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 삶을 아주 멋지게 만들어낼 수가 있다, 창조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랄까 좀 희망찬 그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전 같으면, ‘집착을 하지 마십시오,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사십시오.’ 이런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마음을 멋들어지게 창조해내고 자유자재로 쓰면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보니까 아무래도 아주 상기가 되면서 ‘아! 이렇게 멋지게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바꾸어 가면서 살 수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찌 보면 이제 좀 찬물을 끼얹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말씀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일으켜서, 나의 삶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업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내 삶을 만들어낸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구의 삼업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사는 이유는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써 다른 업을 지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가 창조를 할 수 있느냐? 그리고 대부분 내가 내 생각으로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로 된다는 얘긴가? 사실과 좀 다른 것 같다. 『시크릿』에서도 얘기하기를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 나의 현실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더라.’ 라는 얘기를 한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이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아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 이 우주법계에서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하면서 남들에게는 ‘너는 망해라’ 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 거예요.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너지와 남들은 망해라 하는 에너지를 함께 일으킨 거니까 우주법계에서 볼 때는 이게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겁니다.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으니까, 그 두 가지 마음에 대해 똑같이 창조에너지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고 싶단 말인지, 망하고 싶다는 말인지 영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써 나의 창조에너지로 바뀐다 이 말입니다. 남들에게 ‘너 좀 망해 봐라’ 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나를 망하게 하는 강력한 창조에너지로써 내 삶을 망하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오는 자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세상을 창조하는 일체유심조의 원칙은 뭐냐 하면 바로 내 바깥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얼마만큼 자비롭게 대했느냐 하는 것이 내 삶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주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원리는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내 삶은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일종의 아상(我相), 아집(我執)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기 스스로 자기 능력을 한정짓고, 한계를 지우기 때문에 그만큼의 범위 안에서만 창조가 되지 그 바깥의 더 많은 창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은 이것 밖에 안 돼,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계를 지움으로써 자기능력을 자기 스스로 그렇게 딱 제한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능력을 딱 제한 해 놓으니까 그 능력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기 한계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신을 제한하고, 묶어두는데 쓰고 있으니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내 스스로 그 제한과 한계와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놓여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외부적인 힘도 나를 바꿀 수 없고, 내 삶을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자기 한정의 관념만 깨버리면 무한한 자기 창조의 에너지로써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이 깨어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다면 그것이 생겨나기를 바라고, 빌고, 기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라는 그 부분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 하고, 만족스러워하고, 충분히 느끼고 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빌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고 한다면 돈을 더 벌려고 막 기를 쓰고 원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재산 그 돈에 대해서 충분히 누릴 줄 알아야 되고 느껴볼 줄 알아야 되고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알면 그 감사한 것이 우주로 전달이 되어서 감사할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감사하지 않고 만족해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일으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창조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감사와 만족에 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현실을 창조해 내려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맑고 깨끗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깨끗하고 텅 비어 있을 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강력한 에너지를,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항상 혼란스럽고 망상이 들끓고 온갖 생각들이 막 죽 끓듯이 왔다갔다 오락가락합니다. 한 가지 판단을 가지고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가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듯이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까 뭔가 한 가지 원하는 것에 힘이 집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잘 하는 말로 몰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흐트러지고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에너지를 강력하게 쓸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명상과 기도 끝에 하는 발원이 힘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삶을 멋들어지게 창조하고 싶다면, 네 가지가 중요합니다. 만약에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네 가지 중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로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지요. 두 번째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짓지 말아야 한다, 아견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무한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바라고 빌기보다는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하는 참선과 명상 같은 그런 기도와 수행을 통해서 발원을 했을 때 그것은 큰 힘을 받는 것이라고 이렇게 네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의 창조를 뛰어넘으라

그러면 이제 좀 어떻습니까? 이제 좀 현실에서 잘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마음을 쓰면, 배운 것처럼 마음 내는 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삶이 창조되어 집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하는 그 크기만큼 거꾸로 내 삶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이제 창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내 뜻대로 세상을 창조한다 그것은 업이 아닙니까? 뭔가 내가 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이잖아요. 의지적인 행위가 곧 업(業)입니다. 의지적인 생각도 업(意業)이고, 의지적인 말(口業), 의지적인 행동(身業)도 업입니다. 아주 정확히 본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지만 다른 말로 내가 나의 업을 창조해내는 거예요. 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바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좋은 에너지, 좋은 삶을 창조해내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난 시간에 내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설법을 했던 내용은 뭐냐 하면 “기왕 세상을 창조할 거라면 못살고 고통 받고 부정적인 에너지 가지고 세상을 살지 말고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고 뭔가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창조하십시오.” 라는 방편으로써 그런 말씀을 드렸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이것이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한다면 본질은 뭔가? 방편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는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내안에서 자성부처님께서 본래적인 참나가 나를 창조해내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맡겨놓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가 내 삶을 창조하도록 완전히 나를 내맡겨놓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창조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본질적인 지혜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껍데기 의식인 에고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무명(無明)이다 보니까 나 잘되고자 하는 아상(我相)과 이기심에 기초한 세상을 창조한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방편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의업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아름답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창조된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창조에너지로 작업 해 놓은 것이 현재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지은 업들이 모여 그 업보라는 결과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라는 것은 곧, 불교적 표현으로 업을 변화시킴으로써 업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은 행위인데, 신구의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고,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마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 그 중에도 뿌리인 의업, 즉 생각을 어떻게 조작하고 다스리며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업의 결과인 업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도 바로 이것입니다. 업을 내보내면 업보가 끌어당겨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건 내보내는 업에 있어요, 업을 내보내면 당연히 업보가 끌어당겨지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반대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끌어당겨지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했습니다. 불교는 나의 행위가 중심이고, 『시크릿』은 내가 받을 결과물이 중심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데서 조금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업을 잘 지어야 좋은 과보를 받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업을 잘 짓고 과보를 창조해 낼 것이냐’를 말씀드렸는데요,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업이라는 것이 이 세상, 즉 껍데기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만, 근원으로 들어가면 업이라는 것도 공(空)합니다. 우리가 선업, 악업이라고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라는 것도 공해요. 불교에서는 업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업이라는 공한 환영과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 업 자체를 뛰어넘고, 선악 자체를 뛰어넘어 어떻게 업을 넘어선 본질적인 곳에 가 닿을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의 핵심을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라는 의미인데요,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업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선악 업을 뛰어넘어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즉 업이라는 구속에서 조차 뛰어넘는 것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창조에너지를 가지고 좋은 업을 짓고, 우리가 마음을 잘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명예도 높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도 사고, 남들 돕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 된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으로 그냥 인생이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부자로 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를 창조하고 싶어서 부자를 창조할 수는 있겠지만 부자와 가난 그 양 극단을 뛰어넘어 부에도 가난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고, 명예도 높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그 차원에서는 『시크릿』의 가르침, 업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공부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 잡히고, 여여한, 우뚝 선 지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착하게 사는 방법은 됐을지언정 착하게 사는 것이 도(道)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제가 누군가에게 기분은 나쁘겠지만 꼭 해 주어야 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을 한 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그 사람하고 좋게 지내려면 날카로운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겠지만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당장은 조금 껄끄럽더라도 한 마디 해 줘야합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그것이 다는 아닌 겁니다. 선악을 뛰어넘고,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으며, 부와 가난을 뛰어넘는 더 큰 지혜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텅 빈 근원 위로 많은 것이 지나간다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것은 이 완전한 지혜, 내안에 있는 부처가 나를 창조할 수 있도록 전혀 뒤탈이 없는 그런 어떤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려면 우리가 먼저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는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말씀드리자면 본래는 어땠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는 지금 나라는 아상에 얽매여서, 에고에 얽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질은 어떠한가? 나라는 삶에 얽매이지 않았을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중생으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얘기입니다. 이 우주법계의 본래 근본, 나라는 존재의 근본 마음자리, 그 바탕자리, 주인공자리, 그 자리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완벽하고도 고요하고도, 청정하고도, 순수하고도, 텅 비어있는, 하여튼 맑고 텅 비어있는 어떤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원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나라는 존재를 원이라고 했을 때, 원 안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욕심과 집착과 삶의 계획과 판단과 온갖 것들로 내 것, 내 생각, 내 소리라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본래는 이 원이 텅 비어있었고 맑고 청정한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티 없는, 먼지하나 없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는 그러한 청정하고 맑은 텅 빈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이 우주법계도 그렇고. 본래의 우리 자신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많은 때가 낀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본바탕은 항상 깨끗하고 맑고 청정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더러워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더럽혀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마음자리는 항상 맑고 깨끗하고 청정하다, 텅 비어있다, 텅 빈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이 맑고 깨끗한 텅 빈 자리에 수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흘러가고 지나갑니다. 삶이라는 것이 등장을 하고 사라지고, 스쳐 지나갑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가고, 갑자기 친구가 하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중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고등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20대 때 대학교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또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요. 여러분 삶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지금까지 내 존재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도 스쳐 지나가고 나쁜 일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도로에, 고속도로에 가만히 있으면 자동차들이 무수한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간단 말입니다. 온갖 생각 생각들도 지나가고 우리의 어떤 감정들도 지나가고 수많은 에너지들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물질들이 지나가고 수많은 대상들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고 사건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어떤 에너지의 파장들이 파동들이 지나갑니다. 제가, 물리학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본질은 모든 물질도 정신도 모두가 하나의 파동이었고 파장이었다 그랬거든요. 수많은 파동들 파장들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수많은 파동과 파장, 에너지의 파장이 그 본바탕 위를 지나간다 말이에요.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맑고 깨끗한 바탕 위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지나가니까 맑고 깨끗한 바탕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물러있지 않는단 말이죠. 그냥 지나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모든 것이 지나갈 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벌이기 시작했냐 하면, 그 중에 눈에 띠는 게 있단 말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게 있어요. 뭔가 모르게, 모든 것들이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는데, 수많은 자동차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그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맘에 드는 게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의식의 초점을 집중합니다. 처음의 텅 빈 자리는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더라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 스쳐 지나는 것들은 아무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았어요.


지나가는 것을 멈춰 세운다

우리의 의식은 다만 무엇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어요. 강가에 앉아서 강물 줄기가 지나가는 것을 다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게 없었고, 나와 더 가깝거나 더 먼 것도 없었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었어요. 좋은 것 나쁜 것 없이 그저 존재 위를 스쳐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나에게 좀 더 관심이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띠기 시작했고,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갖다 보태게 된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냥 스쳐지나가야 될 것이 갑자기 나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나의 의식이 거기에 딱 머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의식으로써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자, 다만 바라보는 자로서 머물렀어야 되는데, 다만 보는 자가 되지 않고, 거기에 내 생각을 개입시키고, 내 의지를 개입시켜서 내가 맘에 드는 것을 유독 관심을 가지고 봤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 아상을 개입시킨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멈추게 됩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멈추게 만든 거예요. 그럼으로써 머무르게 됩니다.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바라보기만 해야 되는데, 그것이 나에게 와서 머물기 시작합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해요? 집착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집착이 하나 없었던 맑고 청정하게 티 없이 깨끗하던 본바탕에, 그저 그 위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것들을 그 가운데 일부분을 내 식대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만 채택해서 머물게 만들고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옆으로 껴놓고 사는 겁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집착하고, 좋아하고, 머물러 사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것과 관련된 것들, 또 다른 좋은 것들이 눈에 띠게 되고 그때그때마다 이제 집착해서 붙잡아 놓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의 덩어리들은 자꾸자꾸 덩치를 키워요. 점점 커지는 겁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사실은 그 본바탕이 본래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아상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또 나머지 대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집착 없이 그저 지켜보는 자 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인 삶도 일부분 살고 있고 중생의 붙잡고 집착하는 삶도 살고 있습니다. 그냥 스쳐 보내는 것도 있고, 붙잡아두는 것도 있잖아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내가 좋다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상으로 붙잡아 놓고 집착해 놓고 내 것으로 만들려던 대상들을 나머지 대부분 그저 스쳐 보내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두고 스쳐 보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 자유로워집니다. 붙잡아 둘 것이 없어져요. 내 것을 빼앗길까봐 근심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집착한 것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그 모든 삶 위에 스쳐 지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되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크게 보면, 집착을 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선택적으로 내가 관심이 있는 것들만 집착을 하고 살지, 관심 없는 것까지 집착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상, 아집의 형성

제가 앞에서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자동차가 휙휙 지나갈 때 빠른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은 집착 안 하거든요. 마음이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갈 뿐이에요. 근데 순간 어떤 한 차에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남자친구가 거기에 타고 있는데, 딴 남자하고 딴 여자하고 부둥켜안고 운전하는 것 같은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럼 그것은 붙잡는 겁니다. 그 생각에 계속 머물러있어요. 그래서 몇날 며칠이고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그 다음에 여자 친구를 만나 얘기도 못하겠고 그 생각에 자꾸 붙잡혀있는 겁니다. 이것처럼 뭔가를 붙잡아두면 그것이 나에게 와서 문제가 되고 그것이 나에게 집착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집착하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많지요. 더 많습니다. 즉 흘려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흘려보내듯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 또한 흘러갈 수 있도록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섭니다. 내 의지로써 내 생각으로써 그것을 거기에만 제한시켜서 관심을 둠으로써 막아서서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럼으로써 뭐를 창조하느냐 하면 이제 아집(我執)을 창조해냅니다.

나라는 집착덩어리, 내가 좋아서 선택적으로 붙잡아두었던 것, 그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어때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내거라고 생각해서 붙잡아두었던 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정이 드는 거예요.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자꾸 개입되니까 이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붙잡아 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내가 집착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집착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아니고 나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스쳐지나가는 것을 붙잡아놓았을 뿐입니다. 붙잡아놓았을 뿐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흘러가도록 돼있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나에게 와 있을 것이라는 고정된 믿음을 가지고 붙잡고 있는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아요. 꽉 부둥켜안고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이나 존재 뿐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 어떤 한 가지 특정한 생각을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 내 견해라고 생각하고 내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자기 견해가 뚜렷한 것을 좋아해요. 나라는 견해가 뚜렷하게 있으니까 나라는 견해 그것을 가지고 또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 견해에 합당한 외부적인 대상을 찾아서 붙잡아 집착합니다. 그러면서 이 바깥에 있는 것들도 다양한 것들이 내 것으로 편입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안팎에서 내 것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내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아집과 아상, 아견이라는 나의 집착 덩어리가 이 몸뚱이를 붙들게 됩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설정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방어벽이라는 것도 내 것이라는 집착, 어떤 생각에 대한 집착, 그것을 하나의 방어벽처럼 나라는 울타리, 나라는 울타리를 막고 있는 방어벽으로써 탁 틀어막고 있는 거지요. 그 방어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의 집착이고, 하나의 나라는 아견이고, 아상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는 하나의 틀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다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어떤 한 가지를 보고 누구나 집착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것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그저 흘려보내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는 강가에 있는 돌이 다 스쳐지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중 특별한 돌들을 붙잡아 ‘내 것’ ‘내 소유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아무리 봐도 내 거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냥 흘려보내기 밖에 안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기가 만들어놓은 어떤 틀, 아집, 아상, 그 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상을 내가 만들어 놓은 아집에 빗대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잣대 짓고, 방향성을 설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그것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고, 삶의 방향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까 말했듯이, 돌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떠냐 하면 돌만 찾아다닙니다. 심마니가 산삼만 캐러 다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건 관심이 없습니다. 운동 좀 해볼래 해도 운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 좀 해볼래 해도 수행에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 높은 자리를 준다고 해도 별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요. 내가 딱 틀 잡아 놓은 나라고 형성해 놨던 그 틀에 있어서 거기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를 정의하는 어떤 집착덩어리를 가지고 자기를 정해놨던 틀로 만들어서 그것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내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식을 전혀 다르게 키웁니다. 자식에게 정말 친환경 쪽으로, 정말 자연 그대로, 정말 지혜롭게 키워야 되겠다는 가치관을 가진 분들은요, 서울에 사는 대학교 교수님이 자기 자식이 서울의 좋은 대학, 고등학교, 좋은 대학을 다니는 애를 갑자기 데리고 시골에 내려와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시골에 있는 허름한 대안학교 같은 데 보낸다 말입니다. 그 좋은 대학 그만 두고 서울대를 나오고 무슨 카이스트를 나오고 한 사람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 삶을 갑자기 때려치우고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서울대를 나왔던 사람들이 대거 몇 명씩 한꺼번에 출가를 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어떻게든 공부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가치관을 가지고 키우는 사람은 모든 것의 기준을 공부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결정짓겠지요. 그러나 어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면 뛰어놀게 해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과 하나 되어서 어울리게 해줄까 이런 거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삶의 방식 자체가 어디에 머물러 있고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이라는 그 직업이 바로 나와 동일시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 과목 어떤 과목을 담당한다고 하면 그 과목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 뭐가 관련되더라도 그 과목과 관련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그 틀에 그 색안경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수학선생님은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보고, 과학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보고, 음악선생님은 어디를 가도 관련된 음악을 찾게 됩니다. 우스개로 직업병이라고도 하는데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평생 흙 가지고 무엇을 만들고 짓고 하셨다 보니까 어디 모처럼 여행을 가셔서도 흙만 보시면서 좋은 자재다, 아니다 하는 것만 생각하십니다.

스님이나 성직자 분들도 마찬가지죠. 자기종교라는 그 틀에 빗대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색안경에 빗대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불교신자나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도 마찬가지죠. 자기의 종교적인 색안경, 집착하고 있는 그 종교적 견해나 사상 그 틀 속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갈등이 엄청나잖아요? 자기만이 집착하고 있는 하나의 덩어리가 딱 있어서 그것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환경론자와 개발론자 사이에 그 갭 또한 엄청 크거든요. 그것도 자기가 나름대로 틀 잡아 놓은 그것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나라는 생각에 탁 굳게 집착되어 있단 말입니다.


창조할 것인가 창조를 넘어설 것인가

이렇게 되다 보니까 처음에 애초에 텅 비어있던, 맑고 깨끗하던 그 공간을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 중 처음에는 하나를 붙잡아 두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개, 세 개, 수많은 것들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아놨던, 머물게 집착해놨던 수많은 것들로 나라는 어떤 존재를 형성시키게 됩니다. 아상을 만들고, 존재의 집을 만들고, 어떤 존재의 성을 만든단 말입니다. 견고한 어떤 벽돌을 쌓아서, 방어벽을 쌓아서 나라는 것을 딱 만들어두는 작업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해왔던 작업이고, 그 틀에 기초해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행무상이라는 단순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순한 가르침을 변화하도록 내버려두질 않고, 막아서고 집착하고 붙잡아둠으로써 생겨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그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 또는 시크릿이나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책들에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창조해내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 역설하고 있는 그 많은 가르침들, 그것이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말한 본질적인 가르침에서 얘기한다면,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내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붙잡아서 나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법을 말해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의 어떤 집착, 집착 덩어리를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것을 집착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그것에 집착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방편이라고 했어요. 기왕 집착할 거면 나쁜 걸 집착하지 말고 좋은 걸 집착해라, 기왕이면 아주 그냥 지지리도 가난하게 못 살지 말고 부유하게 살아라, 이런 방편을 얘기해줬던 거예요. ‘나’라는 것, 아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을 ‘나’로 창조할 것이냐 하는 부분이 바로 지금까지 살펴봐 왔던 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창조 작업은 곧 아상을 견고히 하고 확장하는 방법인데, 어떤 방법으로, 어떤 부분으로 나를 창조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란 곧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창조한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기에, 이런 아상을 창조해 내기 보다는 차라리 창조해내지 않는 게 더 윗자리입니다.

선행(善行)보다는 무위(無爲)의 행이 더 본질적이란 말이지요. 선행을 하는 것은 선의 과보를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윤회하는 토대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선의 과보를 통해 천상에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벗어나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선악 자체를 뛰어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는 법을 방편으로 말씀을 드렸지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정체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얘기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생각은 항상 이기적인 것을 창조해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창조해내요. 우리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아집과 아상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본질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있습니다. 아상에 묶여 이기적인 것들만 만들어 내기 쉽습니다.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만을 위한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다보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처음부터 실수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처음부터 과한 욕심을 부려서 나쁜 짓까지 하게 되고 남들을 괴롭혀서라도 더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유함이 늘어나다 보면 점점 더 집착이 늘고, 차차 점점 더 삿된 생각으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상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창조 작업, 아상과 아집을 잔뜩 쌓는 작업을 잘하는 사람을 아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옹호하고,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줍니다. 온갖 상을 내려줍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하나 딱 일으켜서 부자가 된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일인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일인 것처럼 당연히 이 세상에서는 알고 있고, 묘사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렇게 강력한 마음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을 때 업(業)조차 비껴갈 수 있습니다. 잠시 비껴갈 수 있다 이 말이지요.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업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업이라는 것은 과거에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입니다. 과거에 만들어놓은 창조의 행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가 지금 드러나는 거거든요. 지금 아니면 미래에 드러난다는 거예요. 즉 과거에 이미 해놨던 창조의 행위, 신구의로써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 그것을 우리는 업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지금 이 순간 내가 한 창조의 행위, 그게 바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자유의지 즉 현재의 업으로써 과거의 업에 대한 과보를 잠시 비껴갈 수는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과거의 과보를 받아야 하지만 현재의 자유의지, 즉 창조의 에너지가 강력해서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새로운 업을 짓고, 새로운 자유의지를 일으킨다면 이번에 받아야 할 업을 지금 당장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미 지어놨던 업은 반드시 받기는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언젠가 받아야 해요.

이 정도로 우리가 지금 생각한 어떤 마음 에너지가 강력하기는 하나, 업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거나, 업장을 소멸시키거나, 이럴 수 있지는 못하다는 말입니다. 창조 작업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과거에 지어놓은 아주 큰 업이 있으면, 지금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했더라도 그것은 꿈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꾼 것과 동일한 것이지 결국에는 그 악업이 내 인생에 등장을 반드시 하게 될 때가 있단 말입니다.

지금 당장 등장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 에너지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현실세계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나쁜 짓도 하고 못된 사람인데도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때, 혹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다음 생에 결정이 됩니다. 그 다음 생에 바로 인색했던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날 수가 있고, 사람을 괴롭힌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 태어나도 괴롭힘을 당하는 인연을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죠.



아상이 아닌 참나가 나를 이끌게 하라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느냐?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이냐? 내 삶을 아상에 기초해 창조하며 사는 방법 말고,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앞에서 제가 잠깐 말씀 드렸는데, 내가, 나라는 아상 아집이, 나라는 에고가 내 삶을 창조해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해서는 안 돼요. 아상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주법계가,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참된 법신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하기 좋아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불성, 주인공, 자성불, 본래자리, 참나, 신성(神性), 대지의 어머니, 어떻게 얘기해도 좋은데, 그 본연의 자리, 본바탕의 자리, 그 자리에서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그냥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더 깊은 본래의 내가 나를 끌고 가도록 맡겨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나는, 아주 나약한 나고, 아주 조악한 나고, 아상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아주 조잡스런 나가 아니겠습니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이잖습니까? 이런 지혜도 없고 빈약한 내가 아니라 내 안에는 더 큰 내가 있고, 엄청난 지혜의 덩어리가 있단 말입니다. 참나가 있다. 그 참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도록 하는 겁니다. 결정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주인공이 할 수 있도록, 모든 내 안에 있는 본래자리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가, 우주법계가 스스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에서 행하는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내버려둔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가장 지혜로운 본연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내 안의 자성부처에게 믿고 맡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일이 펼쳐집니다. 아주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이 펼쳐져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우주법계는 나에게 근원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겉껍데기의 나라는 아상은 당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본질적인 도움이 아닌 일들을 벌입니다. 아상이 보기에는 남들을 돕기보다는 나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원적 지혜에서 본다면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을 때는 당장에 조금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참된 지혜의 일들을 합니다. 이처럼 우주법계의 계획은 광대하고 무한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는 이기적인 성취를 잘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기초해 벌어들인 돈이고 성취이며, 타인을 밟고 일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 죽고 나면 다음 생에 지옥 갈 게 뻔하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우주법계에서는 그런 계획을 잡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음 생에까지 도움이 되는 계획을 잡는단 말입니다.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계획은 더 장대하고, 더 크고 넓으며, 시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계획은 지금 나의 계획과는 다를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당장 돈을 많이 버는 게 절대목표일 수 있으나, 법계의 계획은 그게 목적인 아닌 겁니다. 우주법계의 계획은 내 계획과 다를 수 있으나 항상 전적으로 옳은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우주법계에서는, 내 안의 자성부처는 나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 그것도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써 전적으로 옳은 일만 하고 있는 겁니다.


우주법계의 본래의 계획, 금강경의 가르침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참다운 지혜, 참된 깨달음, 열반, 평화,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엄청나고 웅대한 우주법계의 계획을 위해, 부처님의 계획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즉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의 사상이에요.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녀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구류중생 전부를 내가 모두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발원해야 하며 그 발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답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에 ‘내가 했다’고 하는 아상을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해 냈다는 아상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아상을 타파하고 우주법계의 계획에 따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 따라 그저 일체 모든 존재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그 큰 법계의 질서에 나를 내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기에 그게 조금 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더라도, 좋든 나쁘든, 맞고 틀리든, 잘된 일이든 나쁜 일이든, 판단 없이 무조건 맡기고 가라는 겁니다. 더 큰 차원의 진리에서 더 큰 차원의 어떤 나를 돕는 계획의 일환에 모든 것을 맡기고 가라 하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아상이 무너지고, 뭐든지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믿고 맡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붙잡지 않겠지요? 이제부터는 막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내 걸로 만들어놓고 막 집착해서 붙잡던 삶에서, 모든 걸 믿고 맡기게 되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게 됩니다. 그냥 거기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요. 흘러가는 것이 법계의 일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제행무상이 진리란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거예요. 이처럼 내 걸로 붙잡지 않고, 믿고 맡기게 됐을 때 저절로 집착이 놓입니다.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주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맡기는 것이 바로 무집착(無執着),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겁니다.



창조할 것인가 내맡길 것인가

그러면 이즈음에서 궁금한 게 있을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내 삶을 내 스스로 창조하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보다는 온전히 맡기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어떤 말이 맞는 겁니까?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앞에서 설명한 일체유심조, 즉 내 스스로 창조하는 작업은 방편의 지혜이고, 본질적인 지혜는 곧 내맡김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창조한다는 말은 업의 굴레 속에서의 일이고, 내맡김이라는 것은 업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또 창조 작업은 내 스스로 무엇이 창조되기를 바라고, 원하고,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원하고 원하지 않는 둘로 나누어지기 쉬워요. 의도한 바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때 우리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결과에 집착하게 된단 말입니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행하면서, 즉 마음으로써 무언가를 의도하고, 어떻게 되기를 바랄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그저 순수한 의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뭐랄까요 그것은 그저 선호의 차이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나는 이 두 길 가운데 이 길을 선호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쨌든 그 두 가지 길 모두가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금방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죠.

이것처럼 우선 첫째로는,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창조하며 살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 첫째 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본질적인 지혜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모든 선호를 놓아버리고, 모든 의도를 놓아버리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언제나 지금 이대로 완전한 우주법계의 완전성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내 의도가, 내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굳게 믿고 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창조 작업에 비해 두 번째 내맡김의 길은 더없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아니, 내맡김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구현해 가는 작업이 됩니다. 창조하겠다는 생각에는 창조될지 말지에 대한 구분이 있고, 원하고 원하지 않는 선호가 있지만, 내맡김은 그 어떤 구분도 없고, 분별도 없고, 오직 완전성만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겁니다. 내맡김의 길에서는 언제나 ‘지금 이 자리’가 최상의 자리가 됩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창조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것을 창조해야지만 완전해 지고, 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완전히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해 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원하던 모든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내맡길 것인가, 관(觀)하라

그러면 이제 맡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에 일체를 내맡기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 잘났다고 내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우주적인 근원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겠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고 싶어도 잘 안 된다는데 있습니다. 맡기고 싶지만 맡겨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건가 싶다 말이에요.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맡겨지고, 어떻게 해야 흘러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답이 바로 똑바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어떤 것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것이 어떤 방식으로 스쳐지나가다가 내가 그것을 끌어당겨서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내 옆에 두려고 애써서 집착하고 있었는지까지 눈에 보이고, 이것을 놔버리게 됐을 때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이 흘러갔을 때 더 큰 자유가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고 집착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뒀을 때, 그때 아름다운 본연의 일이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관(觀)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깨어있어야 된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려 하는지를 분명히 보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분명히 보고 있을 때, 또렷이 보고 있을 때,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내가 막아서고 있는지, 이 세상 이치가 제행무상이라는 것, 제법무아라는 것, 실체가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구나 라는 자각이 생기고, 이해가 생기고, 참된 지혜, 앎이 생기는 겁니다. 그랬을 때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억지로 집착을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집착이 놓여지게 되죠. 저절로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나인가

그러면 보세요. 이제 방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관하라, 믿고 맡기라, 집착을 버려라 얘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도,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이렇게 또 묻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조금 다른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두는 스쳐지나가고 있는데, 스쳐지나가는 것을 내가 내 것으로 붙잡았고, 집착해서 묶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묶어 둬 놓고 수많은 것이 내 옆에 막 쌓여있는 것, 나라고 생각해서 막 쌓여있는 것, 그게 나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내 소유, 내 생각, 내 성격, 내 몸뚱이, ‘이것이 과연 나인가’, ‘이것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놓고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었는데, 실제 그게 내가 맞는 것인가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해 내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집착해서 쌓아놓은 게 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나인가. 몸뚱이를 나라고 하지만 이것은 이번 생에 지나고 나서 다음 생이 되면,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신의 세계에 갈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도대체 어떤 것이 나냐? 가만 살펴보면 내가 없단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냐’, 이렇게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뭐냐’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된다 말이에요.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나에게 묻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꾸만 묻게 되면 어쨌든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지를 답을 내야 되잖아요. 물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답을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답을 찾게 됩니다. 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봐야 되거든요. 봐야 답이 나오잖아요.

문제를 냈는데, 어떤 도형을 하나 갖다놓고, 이 도형을 어떻게 하면 어떤 게 만들어져? 이거 한 번 만들어 봐라, 답을 내 봐, 하고 물으면 그 답을 풀기 위해서는 도형을 자꾸 봐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봐야지만 답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봐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이 뭐꼬?’ 하면, 나는 누구인가, 이 뭐꼬 라는 화두에 답을 내려면, 봐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편견 없이 봐야 합니다. 기존의 편견, 선입견 어린 시선으로 보면 답을 낼 수가 없어요. 새로운 문제를 냈는데, 기존의 편견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답을 풀 수가 있겠어요?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완전히 과거를 놓아버리고, 편견을 놓아버리고,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봐야 됩니다. 편견의 시선으로 보면 똑같이 집착의 눈으로 보이니까 똑같은 편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편견 없이 무분별로써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게 됐을 때 답이 나온다 그 말입니다. 이게 바로 화두선(話頭禪),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입니다.

화두선, 이 뭐꼬,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그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 물음을 자꾸 던졌을 때, 그것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지켜보게 되고, 그 결과 ‘아 이것이 흘러가는 거고 내가 붙잡아 놓은 것이구나, 이것이 붙잡아 놓은 것일 뿐이지 이것이 실체가 아니구나’라는 자각이 생겨서 법계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보게 된다는 관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수행이나, 관하라는 수행이나, 집착을 버려라 하는 수행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라 하는 수행이나,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든 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여라, 거부하지 마라,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얘기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써 내가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법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또 그렇게 했을 때 집착이 놓이니까 집착을 하나하나 놓아보고, 또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나라고 생각했던 이 집착덩어리 이것이 과연 내가 맞는가 라는 물음을 자꾸자꾸 나에게 던지고, 그리고서는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관찰함으로써 과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가 하고 바라보고 관찰하는, 그러면서 직접 온몸으로 답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수행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한번 실천해 볼만 합니까? 수행해 볼만 하지요?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당장에 실천해 스스로 맛보고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법상, 무한 중에서




Posted by 법상



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네요. 비가 오니까 초록들이 더 싱그러움을 띄는 것 같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바람도 함께 불다보니까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오고가는 모습들이 얼마나 보기가 아름답고 생기로운지 모릅니다.

그때그때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항상 우리 주변에는 있거든요. 그런데 때때로 고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어서 상담을 하려고 찾아오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을 가만히 뵈면 찾아서 걸어 들어오는 그 얼굴에 아주 큰 고민과 번뇌와 안쓰러움이 얼굴 표정에도 묻어납니다.

그런 분들을 뵈면 제 마음이 참 안쓰럽고, 안타깝고, 아프거든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전혀 눈길 한번 줄 수 없고, 이 아름다음을 누릴 수 없는 가슴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자리하게 되곤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를테면 '수행을 하십시오'라고 하고, 당장 빚 독촉 때문에 시달리고 계시는 분한테 '수행하라'고 하거나, 당장 죽을병에 걸린 분이라던가 아니면 부부 관계가 안 좋거나 뭔가 자식이 당장 어려움에 처했거나 세속적인 큰 결정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계시는 분에게는 대개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도, 어떤 좋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해 드리더라도 그것이 귀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수행해라, 기도해라 하는 이야기가 그냥 멀쩡한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지 우리같이 힘들어 죽겠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 하면 되겠습니까, 우린 당장 먹고 살 길이 힘들고 당장 내 앞에 갑갑한 일들이 많은데 그 수행이 어떻고 하는 게 다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불교의 근본법과 방편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불교의 본질, 근본법에 입각해서 본다면 수행에 대한 담론으로 들어가야 될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다양한 방편법들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현실 생활 속에서 힘들고 고되고 괴로워하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은 먼저 그것부터 어떻게 풀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방편법으로써 다가서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행히도 불교는 다양한 상황에 처해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이들을 위한 다양한 방편 법문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편으로써 우선 그 사람의 힘든 일부터 보듬어 주고 그 사람이 살면서 당장에 최소한 필요한 의식주부터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뭐랄까 부득이하게 본질적인 근본법보다는 방편법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게 되기도 합니다.

 

시크릿을 보는 불교적 관점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방편법에 관련된 건데요, 조금 쉽게 말해서 내가 좀 잘 살고 싶고 뭔가 좀 남들만큼 살고 싶은 사람들, 정말 지금 나한테 있어서 나의 목을 콱 조이고 있는 이 힘들고 고된 문제부터 어쨌든 먼저 해결해야 되겠다 싶은 그런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보통 쉽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면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세속적인 성공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관련된 책들도 요즘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즘에 『시크릿』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시크릿』에서는 내가 마음 하나 일으키는 것으로서 내 삶을 창조해 낼 수가 있다, 내가 마음먹은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희망에 찬 이야기지요. 이것이 불교의 아주 가장 기본이 되는 방편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조작해서 성공하는 삶, 생각을 조작해서 부자가 되는 삶,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우주라는 것, 이 세상이 만들어진 창조의 원리는 무엇이냐 하면 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을 어떻게 말로 내뱉고 또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 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인데, 그 근본에는 바로 생각이 있는 겁니다.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이 생각을 가지고, 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지만 내 삶을 멋지게 만들 수 있느냐,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고 성공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즘에 아주 유행하는 『시크릿』이나 어떤 다양한 이런 류의 책들은 이 생각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이 생각으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니까 이 생각을 조작하고 움직임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런 관련된 책들 가운데 어떤 것은 가난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청빈의 정신을 말하는 것을 자기는 참을 수가 없다, 용납이 안 된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사람이 있던데요, 방편법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생각에 실체가 있어서 생각으로 부유함을 창조해 내고 부자가 되라, 성공해라, 여기까지를 얘기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부자와 성공에 너무 집착해 있는 모습을 그런 책들을 통해서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의 한계 같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 정도 까지만 해도 많이 발전된 모습이라고는 보여집니다. 그렇게 우선 방편의 진리라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보다는, 그래서 괴로움 속에 허덕이고 사는 것 보다는 일단 일차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내 삶에 딱 중심을 잡고 그리고 나면 이제 근본법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은 많은 근본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던 것 같고 오늘은 이 방편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가지고 내 삶을 아름답게 바꿔낼 수 있느냐, 어떻게 내 삶을 정말 행복한 삶으로 바꿔내고 성공적인 삶으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창조과정과 업보

불교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한 그것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서 그것이 이 우주 법계로 진동을 해 나간다는 것이지요. 즉 내 생각으로 내 삶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떤 절대자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내 삶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설계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화가가 마음 먹은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내 현실 세계라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지요.

마음에서 일으키는 대로 현실세계를 그림 그리듯 그려나갈 수 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많이 들어본 듯한 그런 이야기인데요, 이것은 그저 내가 아는 이야기야 하고 덮어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적은 있을지언정 이것에 대해서 굳게 믿거나 진지하게 사유해보거나 그것이 정말 맞구나 라고 무릎을 쳐 본적은 사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생각할 뿐이에요.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하면 생각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때때로 몇몇 가지는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지만 세상이 어떻게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느냐, 그렇게 안 된다, 이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가 아니라는 쪽으로 굳게 믿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러분의 바로 그 생각입니다. 그 마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내가 마음 쓴 대로 현실이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 마음 일으키는 것이 근본이 되어서 말로 가고 행동으로 감으로써 신구의 삼업이 바탕이 되어서 내 현실세계를 이루어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으로 태어났거나, 부자로 태어났거나 가난하게 태어났거나, 능력 있게 태어났거나 능력 없게 태어났거나 이 모든 현실의 모습이 내 과거의 신구의 삼업에 의해서 지금 만들어진 결과라는 말입니다.

업의 결과, 즉 업보(業報)로써 지금의 이 현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 주었겠어요. 내가 지은 업(業)에 따른 보(報)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만들어 주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냥 신의 뜻대로 라든가 부처의 뜻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어찌 그렇게 부처나 신이 불공평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는 부유하게 태어나게 해 주고, 누구는 가난하게 태어나게 하고, 누구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 두 살, 세 살 밖에 안 되었을 때 기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뭔가 새롭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볼 여지가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으니까 말이지요.

닭장에서 한 달 만에 죽어서 무슨무슨 치킨이며 온갖 닭고기, 통닭으로 우리 입에 들어가고 있는 닭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아무 힘도 못써본 채, 파닥거리지도 못해본 체 그냥 한 달 만에 죽어가지고 그렇게 도살을 당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듭니다. 내가 만들지 결코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어마어마합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우리가 알아야 되는 아주 확실한 불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공한 것이다, 환영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공한 것이고 환영 같은 것이어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듯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실체가 없는 그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단 말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은 실체가 아니야 라고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은 그 고통이 당장 자신에게는 실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空)병에 걸려가지고, 깨달음 병에 걸려가지고 '모든 것이 다 공이야' 라고 쉽게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가난해지더라도 상관이 없고 고통 받아서 내일 당장 큰 병으로 죽어 가더라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런 깨달음에 놓여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방편법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잘 쓸 수가 있는지, 이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이것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 거짓 나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자는 거죠. 우선 제가 아주 쉽게, 어렵게 하면 복잡해지니까 쉽게 마음을 두 가지 정도로 분류해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것 또한 방편입니다. 첫 번째 마음은 편의상 이렇게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이 껍데기에 드러난 표면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것, 내가 내 생각을 가지고 ‘아, 오늘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저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느끼는 마음, 이 생각으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살아가는 것, 내가 생각을 쓰며 살아가는 그 표면의식, 껍데기에 들어가는 그 생각들, 그걸 이제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 붙여 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겉에 드러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껍데기 마음, 이것을 가지고 세상을 만들어내고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이 겉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의 특징이 뭐냐 하면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온다는 겁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내 의지대로가 아니라 제 멋대로 우후죽순으로 올라옵니다. 이건 논리도 없고, 체계성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우리가 꿈 꿀 때 보면 갑자기 이 꿈의 장면에서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막 그냥 휙휙 바뀌는데 논리적이지가 않고 막 왔다 갔다 하잖아요. 오락가락 합니다. 그걸 보면서 왜 그렇게 꿈은 말도 안 되게 오락가락할까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오락가락하죠. 가만히 내 생각을 지켜보다 보면, 이 생각이었다가 갑자기 저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뜬금없이 또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정말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아무 생각이나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옵니다. 논리가 없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면서 나의 실체라고 착각하면서 그 생각을 부둥켜안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생각에 휘둘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온갖 생각들에 하나하나 그냥 휘둘려 가면서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겉껍데기로써의 나’는 주로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상, 에고에 갇혀서 언제나 나에게 도움 되는 일, 나한테 이익 되고 좋은 일들만을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나’라는 아상에 치우쳐진 껍데기 나는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할 뿐 이타적인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아상에 밥 주는 일’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상, 아집을 강화시키는 일에만 힘을 쏟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은 항상 나한테 좋은 방향이 뭘까만 생각합니다. 아상에 갇혀 있어요. 이것을 아상, 에고 말고도 ‘거짓자아’ ‘거짓 나’ ‘가짜 나’ ‘껍데기 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거짓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순식간에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하는 것을 그냥 자동적으로 계산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실 이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 아상,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뢰할 바가 못 됩니다. 신뢰할 바가 못 되고 진실 되지 못합니다. 항상 거짓을 꾸며내고 항상 이기적인 마음들만 꾸며내게 마련입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한 존재이고, 나를 돕고, 나를 가엽게 여기고, 언제나 나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이니 나에게는 둘도 없는 귀한 존재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은 근원적인 참나에 대한 이해가 없고, 이타적인 자비가 없으며, 이 우주법계가 둘이 아닌 하나 된 존재라는 이해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지혜로운 이가 보기에는 이타성이 결여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에 휩싸여 왔는데, 여기에 휩싸여 살아서는 우리 삶을 온전하게, 아름답게, 지혜롭게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더 깊은 마음, 근원의식, 참 나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 껍데기 마음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더 깊은 차원의 깨어있는 마음, 참나, 근원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생각들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 표면의식의 밑에 그 바다 그 엄청난 뿌리에는 히말라야와도 같은 엄청난 근원적인 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드러난 것은 표면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밖에 안 보이지만 더 깊은 차원의 세계,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우리 안에는 내재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제 편의상 ‘더 깊은 마음’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근원의식이라고 불러도 좋고, 참나라고 불러도 좋고, 불성, 신성, 어머니 대지,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습니다.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이 ‘더 깊은 마음’은 우리 내면의 깊은 마음, 참나이면서 동시에 이 우주법계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더 깊은 마음’은 나에 한정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근원을 이루는 근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은 어떤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은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이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의 근원이니 어떻게 나와 남의 분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특징은 물론 나와 남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나와 남의 분별이 있으니, 나와 너를 나누고,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분별하며, 모든 대상물을 나누고 구분짓고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더 깊은 마음,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나와 남의 분별이 없으며, 일체의 모든 분별과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듯 나다 너다 하는 마음의 분별이 없으니까 이기적인 마음이 일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상대가 곧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온 우주를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이타적인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항상 온 우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와 남의 분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더 깊은 마음의 주요 특성입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본질은 우리 겉에 드러난 껍데기가 아니라 근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본질은 나와 남의 구분이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통의 나는 이 껍데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나와 남을 끊임없이 분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에게 욕하고, 남이 잘되는 것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들에게 해코지를 하고 산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들을 깔아뭉갤 수 있느냐 이런 것에 교묘하게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에요. 조금 똑똑하고 세련된 지성을 가진 사람일수록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자기를 높이고 남들을 내려 누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보자면 전부 나라는 상에 입각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거죠.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보통 남에게 욕을 하고 시비를 걸고 하기를 좋아하는데 더 깊은 마음의 특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내가 남에게 욕하는 것은 곧 뭐를 의미하냐면, 내가 나 자신을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근본에 있는, 내 본질에 있는 마음에서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으니까 내가 남들한테 '너 이 죽일 놈, 나쁜 놈' 하면서 욕을 하면, 우리 본질의 마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면 나와 남이 없으니까, 너 죽일 놈 나 죽일 놈이라고 하는 너나의 구분이 없으니까 본질의 마음에서는 뭘 인식하냐 하면 욕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죽일 놈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내가 남에게 죽일 놈 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은 나 자신을 죽일 놈을 만드는 창조의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욕을 했다 했을 때, 못난 놈이라고 얘기하고 실패나 해버려라 하고 얘기 한다면 사실은 정작 내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한 얘기지만, 남에게 한 나쁜 생각이고 나쁜 마음이지만 그것은 돌이켜 나에게 와서 화살이 꽂히는, 그래서 나의 현실을 창조해 내는 창조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욕하고, 탓하고, 시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은 나 자신을 탓하고 욕하고 시기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는 이런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 스스로가 그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하지 않았다’고 착각할 뿐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는 절대 실패를 창조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남들에게 욕하고 시비하고 실패하라고 얘기했던, 남들을 미워했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나의 미래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미래를 그렇게 창조한 적이 없고 남에게만 욕을 했지 나에겐 안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남에게 행하는 것은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행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본질적인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이에요. 거기에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습니다.

앞에서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법계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근원이자 이 우주 전체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너와 나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근원의 자리에서는 네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너인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테면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베푼다, 자비를 베푼다, 사랑을 베푼다, 그 사람이 힘들 때 옆에서 도움을 주고 상담을 해준다고 할 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상대방을 돕는 것을 넘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푸는 최고의 보시행위입니다. 내 인생을 풍요롭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행복하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부자로 창조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니까 이 우주의 법칙은 내가 보낸 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욕이 나가면 반드시 욕이 돌아옵니다. 칭찬이 나가면 칭찬이 돌아옵니다. 마음속에서 저 사람을 어떻게든 무너뜨려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져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우주법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무너뜨려 줍니다. 어떤 문제 때문에 근심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내가 나 자신을 향해서 끊임없이 근심 걱정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점을 어떻게 맞춰야 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잘 안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내가 잘 안 되기를 바라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남을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남을 물고 늘어지면 내 바깥을 향한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방향이 자꾸 바깥을 향해 있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성공하고 싶다, 진급하고 싶다, 부자 되고 싶다 이랬을 때, 내가 진급하고 싶다는 생각은 차라리 낫지요, 나의 경쟁자가 어떻게든 사고를 쳐가지고 좀 무너져라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말의 에너지라도 전혀 다릅니다. 부정적인 것을 상대방에게 보낼 때는 그것이 나에게 오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보내는 연습을 하지 말고, 나를 향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연습을 하게 되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쏟아 붓게 됩니다.

그런데 나를 향하게 마음을 쓰게 되면 항상 긍정적이 돼요. 내가 나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내가 나 자신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본래의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본래적인 마음의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되겠죠.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긍정적인 언어의 파장

또한 둘째로, 이것도 비슷한 얘기인데요 ‘더 깊은 마음’ ‘우주적 근원의 마음’은 완전한 무분별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는 것이 없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어요. 또한 긍정 부정이라는 분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안 됩니다. 긍정적인 단어를 자꾸 사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주법계는 말하는 대로 그저 현실로 만들 뿐이지 긍정적인 것은 만들고 부정적인 것은 안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똑같은 창조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구업(口業)으로 작용합니다. 즉 말이란 것은 에너지가 되어 특별한 파장으로 우주법계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것은 반드시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에너지의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부정적인 현실이 창조되고,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긍정적인 현실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분별없이 내 입에서 나간 것을 전부 나 자신에게로 되돌려 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을 보고 부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가 있고 긍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 있잖아요. 긍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고 부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습니다. ‘너 자꾸 거짓말 하면 나쁜 놈 된다.’ 이렇게 자식한테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부정적인 단어를 자꾸 연습시키는 겁니다. 이 말에는 ‘거짓말’이라는 말과 ‘나쁜 놈’이라는 부정적인 말들이 계속 연이어 반복됩니다. 이 똑같은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진실 된 말을 하면 아주 착한 사람이 된단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같은 의미이지만 긍정적인 단어의 연속으로 바뀝니다. ‘거짓말’ 대신 ‘진실 된 말’로 바뀌었고, ‘나쁜 놈’ 대신 ‘착한 사람’으로 바뀌었단 말이지요. 그 에너지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단어를 쓰게 되면 그것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가서 탁탁 박히게 되는거에요. 이것은 어찌 보면 사소한 말의 습관이지만, 이 평범한 말의 습관이 전혀 다른 과보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사실은 요즘 젊은이들이나 어르신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의 숨겨져 있는 엄청난 잠재의식을 현실에서 전혀 써먹지 못하고 사는 게 현실 세계입니다. 여러분에게 엄청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써먹지 못하고 살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압니까? 어릴 적에 우리가 부모님한테 들어왔던 습관 때문에 그래요.

'하지 마' '안 돼' '나쁜 사람 돼' '무조건 하지 마' '절대 안 돼'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오다 보니까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식이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나쁜 것이구나’ 이런 것들만 인식이 되는 거예요. 좋은 것이 인식되지 않고 나쁜 것들이 자꾸 인식이 됩니다.

이를테면 불교에서도 그렇게 방편으로 말을 쓰긴 하지만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발원합니다’하는 모습이 발원문에 쓸 때 훨씬 아름다운 긍정의 표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내 안에서 내가 쓰는 생각, 많은 패턴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가 이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인식을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우주 법계는 그렇다 아니다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긍정, 부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쓴 그 단어 자체가 나에게 와서 꽂히는 거예요. ‘나쁜 놈 되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이거는 나쁜 놈이라는 에너지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 되기를 발원합니다.’ 쪽이 얼마나 더 듣기도 좋습니까.

 

근원에 믿고 맡기라

그리고 또한 세 번째는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 법계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완전히 연결되어 있을뿐더러 즉 내안의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여러분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내 안에 있는 마음과 이 우주법계 전체에 있는 마음이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결만 되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정보, 모든 지혜, 모든 지식, 모든 에너지, 모든 업장까지 모든 것을 다 그 안에 구족(具足)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의 설법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증명됐던 이야기들을 말씀 들렸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더 깊은 차원의 이 마음은 어마어마한 지혜의 저장고입니다. 엄청난 지혜와 어마어마한 정보와 엄청난 업력(業力)과 모든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일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가면 아집에 길들여진 그런 현실 세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상에 물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요. 항상 보면 좀 문제 있는 삶을 살아가기가 쉬워집니다.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그런 표면의식으로 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나를 일치 시키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항상 완벽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나를 돕고 있습니다. 항상 나에게 끊임없는 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차원과 내가 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 근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갈 수 있고 우리 삶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어내는 삶이 아닌 기존에 만들어냈던 문제를 끊임없이 비우고 없애버리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때때로 ‘일체 모든 것을 맡겨라’ ‘너라는 아상이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근원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네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다’라는 내맡김의 수행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잘 살아 보려고 애쓰지 말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모든 것을 근원의 주인공 자리에 맡기고 가라, 그랬을 때 될 것은 될 것이고 안 될 것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곧 표면에서 안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써 안 되는 것이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서 잘되어야지만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지혜는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장은 힘든 일을 겪더라도 마땅히 그것을 겪게 해줌으로써 그 사람을 더욱 더 한 단계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계획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지, 이 일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업장이 녹아내리는지, 나의 영적 성숙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오직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이 우주법계의 모든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다만 어떠한 계획이 있구나, 더 깊은 차원에서 나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또 다른 어떤 계획이 있구나 라고 굳게 믿고 내 안에 있는 근본에 모든 것을 턱 믿고 맡기고 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상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가, 지혜가 나를 끌고 가게 되고 그렇게 됐을 때 나도 모르는 생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결정지을 때 생각으로서 판단하기 보다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이나 어떤 영감 같은 것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나를 완전히 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직관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끄심은 항상 정확해요.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요, 무엇이든지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든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본질은 모든 것은 이대로 완벽하며 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완전하게 보이지 않고, 불완전하게 해석되어서 그렇지 본질적인 무분별의 근원적 시각으로 본다면 삶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쓸 때 내 생각을 하나하나 쓰잖아요. 그러면 내 껍데기의 마음은 많은 생각을 하는데 더 깊은 차원에서는 내 껍데기가 만들어 놓은 내 생각들을 구현해 내는 작업을 합니다. 껍데기 마음이 일으킨 것을 현실로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드러난 이 생각은 그것을 현실로 이루는 힘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은 내가 껍데기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는 그 마음이 힘을 실어준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면의식만 잘 다스릴 수 있으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의 창조 에너지를 끌어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다스려라, 번뇌를 놓아버려라,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하는 이유가 표면의식을 잘 다스리라는 이야기 입니다. 겉에 드러난 이 껍데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면, 그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차원의 어마어마한 힘, 어마어마한 창조의 에너지 장을 우리 현실로서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 마음의 어마어마한 힘과 에너지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힘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데요, 우리 안에 잠재된 이 창조에너지를 우리는 때때로 현실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우리의 표면의식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가는 작업이었구나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어떤 직관적인 힘, 어떤 느낌을 딱 감지하거든요. 그럴 때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때때로 목격하게 됩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어떤 사람이,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어떤 사람이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님이 자식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날따라 무언지 모를 어떤 찜찜한 직관 같을 느낌들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것은 겉 표면의식이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성(同時性)

이를테면 융이 말하는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것도 이것과 좀 비슷한데요. 이 우주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이 눈에 띄지 않다가 내가 뭔가 새로운 것을 공부했을 때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는 거지요.

또 예를 들어 내가 뭔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내 내면 안에 눈덩이처럼 커진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TV를 켰을 때 우연히 그 TV에서 거기에 실마리가 될 만한, 답변이 될 만한 소식을 들을 수가 있다거나, 누군가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한 마디 던진 말이 해답을 가져다 줬다거나, 우연히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나에게 정말 필요한 대답이 탁 들어 있었다거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보살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불법이 담겨있는 책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때때로 읽어보고 있다는데, 우연히 뭔가 자식문제로 고민이 있거나 이런 저런 고민이 있을 때 중간에 아무 곳이나 책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마침 거기에 내가 오늘의 문제를 풀어 줄 만한 얘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번, 세 번 이어진다는 것이에요. '야 이거 참 신기하다.' 그래서 이분이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책에다 손을 얹고서는 마음속으로 마음을 비운답니다. 마음을 말끔하게 비우고는 책을 넘긴대요. 그러면 물론 이것이 100% 다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필요한 답변이 될 만한 경구들을 발견하게 되더라 이런 얘기들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는 우연이라고 볼 것이냐,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어떤 동시성의 원리가 실제 우리 현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결 되어진 상태에서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우주 법계가 나에게 답변해 주는 작업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또 모처럼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에게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고,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하려고 막 누르려는데 그 사람도 나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상화 기법(Visualization)

요즘 의학계에서는 심상화기법(Visualization)이라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상상하게 됐을 때 그 일이 현실로 신기하게도 이루어진다 하는 내용입니다.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방사선 치료로 인해 암세포들이 막 죽는 상상을 해라, 또 백혈구가 죽어 있는 그 암세포를 밖으로 막 떼어 내어 주는 그런 상상을 해라, 하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심상화기법을 암 환자들에게 실행했더니 159명의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 환자들 가운데 4년 후에 63명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 평균치의 두 배가 넘는 경우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 나사(NASA) 연구소의 연구원이자,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경기력 과학연구소장인 찰스 A, 가필드(Charles A. Garfield) 박사에 의하면 구소련의 최정상급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마음의 상상력과 실제 신체능력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먼저 운동선수들을 네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은 연습시간의 100%를 훈련에만 전념시켰고, 두 번째 그룹은 75%의 시간은 훈련을 시키고, 25%의 시간은 그들이 하는 운동에서 바라는 성과를 그대로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쓰게 했습니다. 금메달 따는 장면, 승리하는 장면 등을 상상으로 생각하도록 심상화기법을 쓴 것이지요. 세 번째 그룹은 그 비율을 50 : 50으로 했고, 네 번째 그룹은 25 : 75로 했습니다. 그야말로 네 번째 그룹은 조금 모험에 가까웠지요. 한 시간을 연습시키고 세 시간을 앉아서 자신이 승리하는 장면을 떠올리게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1980년도 뉴욕의 레이크 프레스드에서 벌어진 동계올림픽에서 네 번째 그룹, 즉 세 시간을 마음속으로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1시간만 운동했던 그 그룹이 가장 뛰어난 경기력 향상을 보였고, 그 다음이 세 번째, 그다음이 두 번째 그룹 순이었다고 합니다. 심상화기법은 쓰지 않고 운동만 했던 첫 번째 그룹은 운동량에 있어서는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에서는 심상화기법을 사용한 그룹보다 경기력 향상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가필드에 의하면 심상화기법이 신체의 움직임을 두뇌 속에서 홀로그램 방식으로 기록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연구들 덕분에 요즘에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이런 심상화 트레이너가 별도로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약(僞藥) 효과, 즉 플라시보 효과도 일종의 이런 힘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갔다 오면 낫곤 합니다. 그런데 병원 갔다 와서 나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20~30% 정도만이 병원에서 치료에 의해서 나은 것이지 실제로 70~80%는 플라시보 효과일 것이라고 현대 의학계에서도 인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 부분의 경우 내가 병원 갔다 왔으니까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지 실제 약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위약효과의 연구는 아주 너무나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서 50년대에 협심증 환자들의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수술을 할 때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팀은 정상적인 수술을 했고요, 다른 한 팀은 신체를 잠깐 조금만 절개를 했다가 수술했다고 하고 닫아 놓고는 그 사람에게는 수술이 잘 끝났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똑같이 양쪽이 다 협심증이 치료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플라시보 효과가 온갖 병들, 두통, 알레르기, 감기, 천식, 사마귀, 통증, 구토, 위궤양, 우울증, 상당한 정신과적 증후군, 관절염, 당뇨병 심지어 암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것들이 플라시보 효과로 완쾌가 되더라하는 말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심지어 말기 암 환자가 죽을 때가 됐는데 플라시보 효과로 위안을 주면서 신약이라고 하면서 이걸 먹으면 무조건 난다라고 했을 때 그 걸 멀고 완쾌가 되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세기 유행을 했던 결핵이라는 병은 1880년부터 갑자기 없어지기 시작을 했다는데요. 그 결핵의 원인이 1882년 로베르트 코흐라는 박사에 의해 밝혀지고 그 사실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이제는 약만 개발하면 된다는 아주 기쁜 소식에 들떠 그 신문기사만을 보고도 결핵환자들이 획기적인 감소를 했다고 합니다. 단지 원인만을 알아냈지 그것을 통해 약을 만드는 데는 약 50년이 소요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알아냈다는 희망적 기사만을 가지고 그 당시 10만 명당 600명이 결핵 환자였는데 200명으로 갑가지 대폭 감소를 했다는 것입니다. 10만 명당 400명이 그 소식만 듣고 나아버린 겁니다.

이것처럼 사실 우리 마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바꾸고 다스리느냐에 따라 불치병도 낫고, 온갖 질병이 나으며, 운동 경기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고, 심지어 동시성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 우주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끌어당겨 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끌어 쓸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좋은데, 문제는 여러분이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렸지만, 그 방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내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제가 교육을 하던 중에 사람들에게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은 사람이 많기에 그 책의 내용 즉, 마음에서 일으킨 것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마음에서 어떤 것을 끌어당겼을 때 그것이 이 우주에 있는 것을 끌어 당겨서 이루어지게 만들어준다, 우리 마음의 힘이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진짜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니 어찌 생각해 보면 조금 당연하지만 한 10~20% 정도만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나머지 80~90%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 하고 반문을 하곤 하였습니다. 될 수 있으면 마음을 긍정적으로 해 나가라고 권장사항 정도로 말해 놓은 책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거나, 마음을 낸다고 100% 그것이 실제 현실로 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실제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실제로 마음 낸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을 하더란 말입니다.

신기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마음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처럼요. 그러니 어때요. 내 안에서 스스로 그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안 믿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로 되지 않아요. 이처럼 안 이루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고, 창조해 낼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해요. 그러면 왜 그런 힘을 내가 쓸 수 없는지,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실은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보지 못할 뿐!

우선 첫째는, 사실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내는 대로, 여러분이 생각한 것의 상당수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스로가 살면서 깨어있지를 못해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분명히 지켜볼 수 있는가요? 평소에 마음이 어떤 것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지켜보지 못해요.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조차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또 겉에 드러난 마음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지만 깊은 속마음으로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미처 캐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게 왜 벌어졌지 하고 착각을 하는거에요. 내가 분명히 생각을 한 것인데, 그러니까 내가 주의 깊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일으킨 생각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안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가 일으켰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것들만이, 창조한 것들만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지켜봐야 합니다. 지켜보게 되면 ‘아, 이 생각이 이러한 현실을 창조했구나’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똑똑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면 사라진다

또한 심지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뿐더러, 분명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만성 두통 환자분들이 있는데요. 만성 두통 환자들을 모아놓고 뭔가 실험을 하려고 두통 환자들에게 우선 어느 정도의 강도와 어느 정도의 빈도로 두통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몇 가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일단 치료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하려고 얼마만큼의 강도로 머리가 아프냐, 그리고 얼마만큼 자주자주 머리가 아프냐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매일매일 얼마만큼 머리가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픈지를 다 쓰게 했어요. 오늘은 얼마만큼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프고 몇 번이나 아팠고 이런 것을 자세히 관찰하며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냥 그 빈도와 강도를 단지 조사해서 쓴 것 밖에 없는데 두통이 나아버린 겁니다. 사실은 기초 작업을 하려고 한 것인데 그 기초 작업만을 가지고도 두통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만성두통이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보게 되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해소되기도 합니다. 해소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해소가 분명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마음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생각의 특성은 너무나도 엄청난 잡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쉴 새 없이 온갖 잡념, 온갖 생각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밑도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와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창조적인 마음의 에너지가 집중되지를 않는 겁니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마다 다 에너지를 실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우리 마음이 어떠냐하면 그 한 가지를 줄곧 밀고 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할까 하다가도 바로 마음이 바뀌어 저렇게 하고, 이 결정을 할까 하다가 금세 저 결정으로 바뀌곤 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한 쪽의 마음을 딱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어쩌다 절에 나오시는 분들은 '절에 갈까? 에이, 가지말자. 에이, 그래도 가자.' 머릿속에서 이것 하나 결정하는데 열 번 백 번을 반복하다 오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그 정도로 무슨 한 가지를 판단 할 때도 우리 생각은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한 가지에 집중적으로 창조 에너지를 실어 주어야 그것이 실현이 될 것인데, 이랬다저랬다 하고, 오락가락 하니까 우주의 에너지가 제대로 실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하자’ 그랬다가 오후에는 ‘하지 말자’ 그랬다가, 또 10분 전에는 ‘가자’ 그랬다가 10분도 채 못 되어 ‘가지 말자’ 그런단 말입니다. 자장면 먹자 그랬다가 금방 짬뽕으로 바뀌듯이 말입니다. 중국집에 밥 한 끼 먹으러 가면서 발은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장면이냐 짬뽕이냐를 가지고 수십 번도 넘게 반복한단 말 이예요. 이렇게 우리 생각이 날뛰는 원숭이처럼, 조금 심하게 말하면 정신병자처럼 오락가락합니다.

 

명상수행과 창조에너지

그래서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집중을 합니다. 무언가 한 가지에 집중함으로써 삼매에 빠지는 경험도 하고, 조용히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는 명상을 한단 말입니다. 명상을 하고 집중을 하게 됐을 때, 한 가지에 딱 집중을 하게 됐을 때 잡념이 사라지고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을 하게 되잖아요. 그리 됐을 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강력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평소 상태는 온갖 잡념 상태이거든요. 복잡다단한 생각들, 문맥도 없고, 맥락도 없고, 주제도 없고, 명확한 방향도 없는 온갖 잡스런 생각들이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휘청거리며 오고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잡념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는 사이에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부자가 되어야지, 내가 잘돼야지, 이렇게 생각한들 온갖 잡념 중에 하나밖에 안되니까 그것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 공기 중에는 모든 라디오 주파수가 다 떠돌아다니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주파수를 딱 맞추려면 제대로 맞춰야지만 하나의 주파수가 딱 잡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지지직거리기만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파수를 제대로 딱 맞추면 소리가 분명하게 잘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산란된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 마음의 원(願)으로서 딱 주파수를 맞췄을 때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딱 주파수가 연결이 되어서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설마 진짜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비움과 집중 속에 드러난 하나의 생각, 마음, 서원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해 주는 아주 중요한 통로요 방법이 됩니다. 껍데기 마음이 비움과 집중을 만나 하나의 강력한 마음으로 바뀔 때 그것은 강력한 창조의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겉껍데기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집중과 관찰입니다. 깨어있음, 명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관(止觀)수행이죠.

예를 들어 여러분들 발원(發願)기도를 하잖아요. 이렇게 되기를 발원하고, 저렇게 되기를 발원한단 말입니다. ‘건강해지기를 발원합니다.’ 이런단 말이에요. 발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을까요? 막 시도 때도 없이 발원한다고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을 비운 다음에, 마음을 고요히 비운 상태에서 한 가지를 발원하고 마음을 냈을 때 그 발원은 큰 힘을 얻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기도하지 않습니까. 집에서 기도하고 참선하잖아요. 기도 끝에, 기도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수행함으로서 그 마음을 딱 비워놓은 다음에 그 청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발원을 했을 때 발원에 강한 창조의 에너지가 붙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도할 때도 발원문은 기도를 다 하고 난 제일 마지막 부분에 독송하라는 것입니다. 법회를 가도 사홍서원의 발원을 제일 마지막에 하잖아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과 집착을 비우고, 기도로써 마음을 고요히 한 끝에 발원을 하면 거기에 더 큰 힘이 붙습니다.

그것은 온갖 산란한 마음들 사이에서 일어난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진 사이에 일어난 한 생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은 내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우주법계의 근원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비워진 상태에서 마음 하나를 딱 일으켰을 때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이 되고 온 우주 법계의 마음과 연결 되어서 우주 법계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작업을 내 내면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전체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뭔가 원을 세울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한 상태에서 원을 세워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몇 천 배, 몇 만 배, 수십억 배 높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 본연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쓸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력이 높은 수행자일수록 한 번 일으킨 마음이 금방 현실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력이 낮은 사람일수록 생각과 현실의 창조 사이가 멀어요. 창조가 될지라도 늦게 창조가 되는데 반해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는 한 생각 일으킨 것이 곧장 우주법계와 연결이 되어 곧장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과거의 수많은 업장들을 그 생에 다 해결하고, 그 한 생에 동안 받을 것 다 받고 완전한 반열반(般涅槃)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수행력은 곧 창조의 힘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하고 명상하는 사람은 무한한 창조에너지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한정의 관념을 타파하라

다음은 세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마음이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믿음’에 있습니다. 왜 안 이루어지느냐 하면 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안 믿거든요. 스스로 안 믿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안 믿어요. 스스로 자신은 능력이 없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현실이 창조되고, 능력 없다고 생각하면 능력 없는 현실이 100% 창조되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힘을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 쓰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못 쓰는 쪽으로 완벽한 창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일으킨 마음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절대 안 믿습니다. 100%를 못 믿어요. 한 50%만을 믿거나 어떤 사람은 한 30%정도쯤 믿거나 이런단 말입니다. 내가 100% 믿으면 그것이 100% 힘을 발휘하고 50% 믿으면 50%만 힘을 발휘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자기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 정도 밖에 안 돼’ 하고 자기 한정의 관념에 빠져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정 짓고 있단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의 틀 속에 제한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떻게 성공하고 싶은지를 물어보면 ‘나는 그냥 조그만 식당하나 운영해서 적당히 먹고 살 정도만 되면 됩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기왕이면 좀 더 넓은 식당을 운영해서 부자 되면 그것으로 남들에게 복도 많이 짓고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아닙니다. 저는 그 정도 능력은 안 되고요. 그냥 밥 벌어 먹을 정도나 할 수 있으면 좋은 거죠.’ 이렇게 생각해요. 더 큰 힘이 나에게는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수해 가지고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목표가 어디냐 그러면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 정도 되면 됩니다.' 라고 합니다. 기왕 목표를 잡을 거면 서울대나 하버드대학을 목표로 잡지 왜 그 정도를 잡느냐 그러면 '해봐도 안 됩니다. 제 능력은 제가 아는데, 공부는 못한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렇게 목표 잡아봐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론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거나,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내 스스로의 능력을 미리부터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청빈이라면 좋지만, 내 스스로 나는 안 되고, 가난하고, 못난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내 능력이 그것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을 완벽하게 한정 짓고 제한하기 때문에 내 능력은 내가 한정 지은 그것만큼 밖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은 요만큼 밖에 안 돼’라고 내 마음으로 딱 만들어 놨잖아요. 그러니까 우주 법계에서는 내 마음에서 만든 것을 100% 힘을 실어줍니다. 100% 이루게 해줘요. 그러니까 고만큼만 100% 이루어지는 거지요.

내가 공부 열심히 하면 한 50%는 서울대에 붙을 것도 같고 50%는 안 붙을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붙을 확률이 반반 입니다. 그게 사실은 우주에서 100% 힘을 실어준 거예요. 내가 50%만 원했으니까 50%만 이루게 해준거에요.

마음의 힘, 의업(意業)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어때요. 그게 100% 이루어진 겁니다. 내가 믿지 않는 만큼 안 이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100%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안 이루어지도록 믿었으니까 안 이루어 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한정시키고, 제한시키게 되면 결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울타리, 그 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나는 안 돼’ 하고 울타리를 쳐 놓으면 그 틀은 그 누구도 대신 깨줄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자기라는 틀을 깨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스스로 울타리 친 그 틀은 부처님조차 대신해서 깨뜨려 주지 못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출가를 하실 때 마부로 뒤따라왔던 찬나라는 마부가 나중에 출가해서 수행자가 됐는데 ‘지금은 이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지만 초기에 부처님이 출가하셨을 때는 나밖에 없었어. 너희들이 대단한 제자들이라고 으스대지만 내가 최고다. 너희들 중 누가 처음에 부처님 출가하셨을 때 옆에 있었느냐? 그때 부처님을 지켜준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내가 최고의 제자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겸손하지를 못했지요. 찬나에게 부처님께서는 몇 번을 설득하고 타이르면서 그런 마음을 버려라 버려라 해 주셨는데 그 마음을 못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끝에 그 이후에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그 특단의 조치가 뭐냐 하면, 모든 제자들에게 저 찬나에게는 모두 침묵으로 대해라, 말도 응해주지 마라, 묵빈대처(默賓對處)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이런 묵빈대처의 방법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교화가 불가능한 외도들에게만 그런 방법을 쓰셨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찬나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 부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여기엔 뭔가 뜻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잘못이 이 정도로 컸단 말인가. 어리석었구나.' 하고 스스로 크게 뉘우친 끝에 결국 나중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처럼 자기 스스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이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이 있으면 부처도 그 틀을 깨주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능력을 한정 짓고 있는 이상 그 능력은 내 스스로가 깨야 되는 것이지 부처가 와도 여러분의 그 자기한정과 제한된 틀을 못 깨줍니다.

큰 스승을 만나면 깨줄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멋모르고 스승만 찾아다닌다고 그 스승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내면에 변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올지라도 외부에서 나를 변화시키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내가 활짝 열려 있어서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내 옆에 있는 내 도반이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의 자식도 훌륭한 스승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 때는 세상 곳곳에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나를 열어두고 내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것밖에 안 돼’, ‘나는 깨달음을 얻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한정 짓는 마음을 먼저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 자기를 가두는 마음을 버려야 해요.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다음은 네 번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가 거꾸로 연습하는 겁니다. 우주는 마음에 뭔가 연습한대로 되돌려주려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방법을 모르는 거예요.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주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데, 나와 상대가 따로 떨어진 존재로 있는 줄 알고 상대방에게 욕을 하니까 사실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타인을 욕하고 공격하고 못났다고 낮추는 것이 곧 나를 욕하고 내 능력을 위축시키는 일이거든요. 저 사람 확 망해버려라 하면서 그 사람이 성공 하는 것에 대해 배가 아프다면, 사실 그 말은 나를 성공 못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전에 몇 번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하고 뭔가 원하고 바라면서 기복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원하고 빌고 바란다는 마음 자체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몸에 지병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몸이 낫기를 바라고 원하면서 ‘몸 낫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한단 말 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되레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 바람 자체가 ‘내 몸은 너무 좋지 않다’라는 사실을 자꾸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계속된다, 또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지속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관(觀)하라는 알아차림의 관 수행을 자주 말합니다. 마음을 관찰하고 깨어있으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 깨어있는 것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마음을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에게 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 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그것을 느껴보라, 우울한 사람에게는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우울한 그 느낌을 느껴보고, 고독한 그 느낌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화가 날 때는 그 화나는 느낌을 느껴보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욱하고 화가 올라올 때 그 올라오는 화를 느껴보아라 하는 겁니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관(觀)한다는 것이고요. 그 관하고 느끼는 것, 그것에 우주 법계는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는 마음은 무엇을 느끼게 해주느냐하면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해줘요. 결핍된 것을 느끼게 해줘요. 그러니까 사실은 '부처님,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빌지만 사실 그 말은 ‘지금은 부자가 아닙니다’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뜻이 되고 그 결과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지금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지금 현재 받고 있는 연봉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랬을 때 돈에 대해서 긍정과 감사와 풍요로움이 느껴져요. 그러면 우주법계는 이 사람이 풍요로움을 느끼니까 풍요로움을 자꾸 가져다줍니다.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돈을 가져다줘요. 내보내는 것이 돈으로 인해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내니 그 결과로써 들어오는 것도 풍요로운 결과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언제나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온다는 법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업보의 법칙 이예요. 생각으로 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받는 겁니다.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생각, 의업을 세상으로 내보내면 거기에 따라 풍요롭고 부유한 현상세계가 그 과보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은 그 자식이 계속 불만스러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와 게임에 빠져 있잖아요. 그럼 너는 왜 만날 컴퓨터에 빠져있어 하고 화를 내고 탓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결코 그 컴퓨터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 집착을 내가 놓아 버리기 전까지는. 오히려 거기에 대한 더 큰 집착이 생기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탁 놔버릴 줄 알았을 때 그랬을 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은근히 마음속에 반발심이라는 게 엄청 커요.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에는 일단 반발심부터 일어납니다. 그 반발심을 잠재우지 못하면 어떤 좋은 말도 거꾸로 들려요. 거꾸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만화책 보지 마! 컴퓨터 하지 마! 게임 하지 마!’ 이 말이 오히려 게임을 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꾸 받아들여진다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못 하게 하면 더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도 떼어 놓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둘 사이의 사랑의 감정은 더 깊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임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것일까요? 이건 옳다 그르다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옳다 그르다 얘기한다면 게임하면 안 되겠죠. 그렇죠? 그러나 게임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 마음의 집착 그 집착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자식이 게임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 문제의 크기보다 너는 그 게임하면 안 되고 공부만 해야 돼 라는 부모의 집착이 사실은 더 문제고 더 큰 탁하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져 옵니다. 우주 법계를 더 어둡게 만든다 이 말 이예요. 그건 자식과의 관계회복도 어려워지게 하고 그렇게 되면 결코 자식은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금강경』에서는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해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도가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도 아니고, 지혜로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이상에서처럼 창조의 원리를 말씀드렸고, 왜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창조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 될 창조과정의 핵심적인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마음을 가짐으로써, 마음속에서 바라고 의도함으로써 현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상에서와 같은 이이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낼 것입니다. ‘아, 나도 저렇게 마음을 잘만 쓰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겠구나’, ‘나도 원하는 대로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지위나 권력도 얻을 수 있고, 능력도 키울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이면에는 창조에 대한 바람, 집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언가를 원하고 의도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괴롭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많이 의도하고, 많이 바라고, 큰 에너지로써 창조한 것일수록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도 크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괴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하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을 일으키지도 말고, 의도를 일으키지도 말고, 창조 작업을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다 내고 살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고, 의도하고, 창조하고, 바라면서 살기는 할지라도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순수하게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겠지만 당연히 가능합니다. 사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런 삶도 괜찮고 저런 삶도 괜찮다, 이 결과도 좋고 저 결과도 좋다고 믿고 받아들이되, 다만 나는 이런 쪽을 선택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방향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 방향이 다른 방향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반드시 이 길 아니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두 가지 평등한 길 가운데에서 어느 한 쪽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으나 나는 그저 이 길을 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 길로 접어들더라도 상관없단 말입니다. 어차피 어느 쪽으로 가든 내 표면의식대로는 안 되었을 지라도 더 깊은 차원의 우주에서는 나에게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것을 언제나 보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 우주법계는 정확히 필요한 일을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보내주고 있습니다. 우주는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사실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완전한 일이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은 자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자신은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랄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고, 창조할 것도 없이, 이대로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창조하는 방법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더 본질적인 것은 매 순간 순간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 가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 오고 있는데요, 세상을 창조하는 방편의 가르침과 내맡기는 본질적인 가르침을 아우르는 아주 경이로운 수행방법 하나를 말씀드리면서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라고 반복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어떤 경계, 어떤 느낌, 어떤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괴로움을 대상으로, 그 미운 사람을 대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순간의 모든 마음들을 대상으로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아니면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숨이 들어 올 때 감사함으로써 대긍정으로써 들어올 수 있도록 내 안의 에너지를 긍정으로 감사로, 풍요로움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나에게 그 어떤 것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은 감사할 재료가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에 빠져서 미쳐있습니다. 그거는 감사할 일이에요. 감사할 일이죠.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을병에 걸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모님 입장에서 그냥 공부 못해도 좋으니까,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할지라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거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그런 감사함의 결정을 할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 결정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공부 잘하기를 바라지 말고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그 사실 때문에 스스로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은, 분별하는 것은 좋은 쪽으로 분별할지라도 차라리 분별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스님, 자식들한테 자꾸 좋은 얘기를 해줘야지. 분별하지 않고 그냥 뭐든지 받아들여 주고 허허 웃기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이지요. 물론 안 될 수도 있지요.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똑바로 얘기해 주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은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해 빠져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옳은 것이 아니게 됩니다. 분별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식과의 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말을 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않고 하면 자식이 나쁜 짓을 하게 되더라도 괜찮아요. 내가 내 생각에서 나쁜 짓이고,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이 나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떤 것이 되었든 들어 올 때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또 나에게서 나갈 때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내가 내뿜는 호흡도 사랑의 호흡을 내뿜을 수 있도록, 또 나에게서 나가는 말 한 마디도 ‘사랑’으로 나갈 수 있고, 나에게서 나가는 행동 하나도 ‘사랑’이 가득한 행동으로 내보내고, 모든 마음의 에너지를 내보낼 때는 사랑의 에너지를 보태서 내보내는 것입니다. 육근(六根) 즉,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써 들어오고, 심지어 누가 나한테 욕을 하더라도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할 이유가 없지요.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감사할 이유는 모든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법계는 언제나 나를 돕고 있으며, 나를 성숙케 하기 위한 자비로운 일만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괴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차원의 계획의 일환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내 계산으로 따지면 나쁜 일일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주법계의 계산으로 따지면 사실은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근(六根)으로 들어오는,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고,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가 감사하게 느껴지고, 코로 냄새 맡는 모든 것이 감사한 냄새가 되고, 맛보는 모든 음식을 감사하게 음미하게 되고, 감촉 느끼는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써 들어오게 되고 나에게서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 폐를, 내 오장육부를, 내 내면을 한번 거치고 나갈 때는,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감사와 사랑과 자비심으로서 융화가 되어서, 그것이 뿜어져 나갈 때는 항상 사랑으로써 나갑니다. 자비로움으로써 나갑니다.

그랬을 때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얼마나 경이롭게 바뀌는지, 그냥 조금조금 바뀌는 게 아니라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뀌는지를 스스로의 존재로서 증명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내가 얼마만큼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내 인생 내 존재가 그렇게 바뀌어 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체험이 안 됩니다.

불교는 체험의 종교이지 그냥 껍데기 종교가 아닙니다. 이걸 내 스스로 체험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내 스스로가 실천하게 된다면 여러분 인생은 지금부터 경이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요, 사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한 생각 바뀌면서 삶이 바뀌는 겁니다. 그 한 생각 바꾸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뭐 하러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혹은 아주 안 좋은 경험을 통해서나 고난을 격고 나서야 비로소 한 생각을 바꿉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한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 한 생각 바꾸는 아주 좋은 방법, 그래서 생각을 아름답게 바꾸는 방법, 방편적인 진리의 실천,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고 그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호흡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으로 나를 항상 데려오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본질법, 근본법과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삶에서 풍요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에 대해서는 별도로 목탁소리 홈페이지나 저의 다른 글들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내 능력은 무능하다. 나는 능력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모든 마음의 에너지들을 거둬들이고 이제부터 새롭게, 정말 멋지게 내 삶을 내 스스로 부처가 되어서 내 삶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경이로운, 신비로운 그런 삶을 스스로의 존재로서 살아내 보시고 직접 체험해 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완전히 행복해 지는 방법
  -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나와 부처와 신은 하나다

 

불성(佛性), 신성(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신이 하나란 뜻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하나란 뜻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하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부처로써, 신으로써 완전한 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사상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성자, 현자, 선각자들과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가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도울 때 사실은 나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상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가

상대방과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며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상 없이 보시하라, 무주상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것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불성과 신성이란 것은

부처님의 성품, 신의 성품 그 자체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신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불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그렇기에 사실은 보시해도 한 것이 아니다.

 

너도 완전하고 나도 완전하며,

너도 풍요롭고 나도 풍요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에너지의 이동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은

‘이렇게 하라’는 윤리 규정이거나, 명령이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불성이 있다, 신성이 있다는 말은

곧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하고 충만하다.

그렇기에 불성과, 신성과 다르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써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완전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세상 자체가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 세상의 본 바탕, 근원은 이러한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완전성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완전한 자비, 동체대비 그 자체인 것이다.

 

추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현실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신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다.

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진실로 말씀해 주셨고,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도 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제해야 할 중생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삶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

 

그러한 진실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나쁘다’고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판단과 분별작용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무분별의 중립적인 현실에

끊임없이 판단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일 뿐이다.

 

본래는 완전한 자비의 불성이고,

완전한 사랑의 신 그 자체만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

우리를 꼬셔서 지옥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 밖에 없는 완전한 우주법계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순전한 상징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의 싸움 또한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상징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신이 세상을 창조한 근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인간의 상상이거나,

상징이었을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완전한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며,

아상이고, 에고라는 허상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즉 내면의 번뇌, 욕망, 집착, 화, 어리석음, 아상인 것이다.

 

악마는 바로 아상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판단이다.

마왕은 바로 탐욕과 화와 번뇌이다.

 

즉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나, 상황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나의 판단과 해석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미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시냐고.

지금 자신의 삶이 대체적으로 행복한가 하고.

과거에 생각했던 행복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하고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반대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세상은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진실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삶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삶의 완전성을 삶에서 드러내는 법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고 빌고 욕망할 때

존재 본연의 완전성은 사라지고

결핍과 부족과 실패가 창조되고 만다.

 

사실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욕망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부처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다.

신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그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성과 신성의, 우주법계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완전성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신도

우주 법계도 언제나 완전하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실패 자체도 없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해서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생각이 모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삶을 창조하는 토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한 현실이 창조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현실이 창조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또한 내가 바로 당신이고, 우주이며, 존재 자체이다.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토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토대의 생각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른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의 본질에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창조된다.

사실은 바로 그 토대의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토대는 어떤가?

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신이라면 어떨까?

 

완전한 존재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

언제나 충만한 행복과 만족과 풍요로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환상도 없다.

그저 매 순간 순간 완전함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삶의 완전성이 창조된다.

 

아니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전했으며 완벽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 본연의 고향,

완전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귀의, 귀향!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이 말은 상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완전하고 풍요롭다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풍요로움이란

우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것이다.

내가 아까워하고, 축적하고, 적다고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결과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두려움 없이 도우라.

그 마음에 우주 근원의 에너지인

풍요와 완전성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풍요의 토대 위에서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풍요가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완전히 행복하다면

무언가를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미래에 오게 될 행복을 꿈꿀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완전무결한 행복이라고 외치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라.

넘치는 행복 그 자체인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행복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실패란 없다.

언제나 삶은 완전하며 성공적이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성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라.

현실의 상황에 대해 성공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운 현실을 창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공만을 창조해 낸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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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과학으로 본 시크릿, 과학으로 본 불교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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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날짐승 길짐승 등의 모든 중생은
자기가 지 은 업대로 살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짐승들은 업을 받기만 하지만
사람은 업을 받는 것과 동시에
새롭게 개척해 가는 능력이 있다.

새는 더워도
깃털을 감싸고 살아야 하지만
사람은 더우면
옷을 벗어 버릴 수가 있다.

비록 모든 인간이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곤란을 당하고
걱정 근심 속에 살고 있지만,
한생각 돌이킬 줄 아는 이 또 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통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한 생각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한다.

마음 을 비우고
한 생각을 돌이켜
지은 업을 기꺼이 받겠다고 할 때
모든 업은 저절로 녹아내린다.

사바세계를 무 대 삼아
연극 한바탕 멋있게 잘해야 한다.

경봉 스님의 말씀이십니다.
연극인데
못 받아들일 일이 없 다는 거지요.

적극적으로
한바탕 멋지게 받아들여
시원스레 살아가는 데서
대장부 수행 자의 걸출함이 나옵니다.




대나무를 보면
올곧은 수행자를 보는 듯 합니다.

때로는
은사스님의 매서움인 듯 하고,
선방 눈푸른 납자의 성성한 눈빛인 듯 하며,
초발심 행자의 서원을 보는 듯도 합니다.

뒤도 옆도 안 돌아보고
곧게만 자라는 우직스러움이
제 마음을 빼앗곤 하는 것입니다.

대나무 같은 수행자...

물론
그렇게 곧기만 해선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고 할 지 모르나

좋게 말하니 인간미지
치열하지 못한
적당히 중생과 수행자를 오고가는
그런 나약한 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나무 같이 곧은 발심
곧은 정 진
곧은 깨침
이 생(生)을 넘기지 않길...




우리의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대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종이 위에
몸과 입과 생각이라는 붓으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려 낼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능히 상대를 바꿀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바뀌면
'상대'의 마음도 바뀌게 마련입니다.

모든 문제의 중심은
오직 '나'에게 있습니다.
바꾸어야 할 '너'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너'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사회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하고 우주가 변합니다.

상대가 나의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을 바꾸려 하지 말고
어리석은 나를 바꿀 일입니다.
내가 바뀌면
부처님은 자동으로 바뀝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하는 바가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사람,

남들이 존경해도
우쭐대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 사람,
남들이 비난해도
흔들리지 않아 중심이 잡힌 사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숫타니파타]의 말씀입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이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음은,
내 앞의 그 어떤 사람과도
맑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 자는 그래야 합니다.
어떤 사람과도 화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지만,
미운 사람과도
맑게 지낼 수 있는 일은
마음 닦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존경에 우쭐하고
비난에 흔들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존경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일이야말로
수행자 의 마음 살림살이입니다.

존경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나'라는 상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므로,
중심없는 중심이 딱 잡힌 사람입니다.

참 어렵지만
한번 저지르면 쉽게 행할 수 있고,
또 참 쉽게 할 수 있 지만
한생각 돌이키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며,
그 누구 에게도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수행자와 중생의 차이가
이렇게 작지만 너무도 큰 차이인 것입니다.
크지만 너무도 작은 차이인 것입니다.

수행자와 중생의 차이는
그 차이 없는 차이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며... 해가집니다.]

힘들고 답답할 때면
우린 내 주위를 탓하기 쉽습니다.

선배의 나쁜 성격을 탓하고,
후배들의 안일함을 탓하며,
사람들의 무능력을 탓하면서
'나'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정작 탓해야할 대상이 누구이며
관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수행자의 진면목은
이 세상 모든 일은 '나'로부터 나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올바로 알고 실천
할 줄 아는 모습에서 나옵니다.

탓해야할 '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동료들의 모습에서 나의 이기심을
볼 줄 알아야 하며
안일하고 게으른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나의 나태함에
채찍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욕하거나 헐뜯는 사람
나에게 발길질하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다투려 들거나 화를 내어서는 않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거칠게 나타나는 환경, 조건.
이 모든 경계가
내 마음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얼른 '내가 바뀌어야 겠구나'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주위 환경 속에는 내가 수 억겁을 살아오며
지은 모든 업장, 인연의 연줄이 올올이
아로새겨 져 있습니다.

내가 한 말과 행동과 생각에 따라
나의 환경, 조건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음 먹은 생각, 행동,
나의 언어 하나 하나는 곧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종이 위에
몸과 입과 생각이라는 붓으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려 낼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능히 상대를 바꿀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바뀌면
'상대'의 마음도 바뀌게 마련입니다.

모든 문제의 중심은 오직 '나'에 있습니다.
바꾸어야 할 '너'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너'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사회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하고 우주가 변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마음 속에 상대를 위한 지극한 원을 세우고
그들을 편견없이 바라보십시오.

그들이 바로 나의 부처님 이십니다.
나에게 욕하는 선배 부처님,
눈치만 살피며 게으른 후배 부처님,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 부처님,
이 모든 분이 나를 이끌어 주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바꾸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굴려
나와 함께 하는 내 주위의 모든 부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어리석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절에서 몇몇분들과
한달에 두 번
법구경 공부를 하기로 하여,
이 참에 법구경 강의를 조금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올렸던 강의를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

제1장 쌍서품(雙敍品)

마음

[경전]

1.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2.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형상을 따르듯이



[강설]

경전에 보면 ‘마음’이란 말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전에서 나오는 마음이란 용어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으로 나뉠 수 있다. 진심이란 본래심(本來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본래마음, 즉 불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망심이란 번뇌심, 생멸심(生滅心), 산심(散心)이라 이해되며 우리들의 산란하고 번뇌에 휩싸인 분별심이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음이란 진심이 아닌 망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망심, 즉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며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망심이란 유위법(有爲法)의 근본이 되는 마음으로 유위란 위작(爲作) 혹은 조작(造作) 즉, ‘만들어진 법’이란 의미다. 다시 말해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세계의 법칙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유위법 즉 망심이 근본이 되어 현상세계의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반대로 진심이란 무위법(無爲法)으로 만들어지거나 생멸하는 법칙이 아닌 만들어지기 이전 세계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진심이란 무엇 하나 붙을 것이 없고 만들어 질 것이 없는 일체가 딱 끊어진 공(空)의 본래자리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말한 ‘마음’이란 망심 즉 우리의 분별심, 생멸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분별 망심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세상을 만드는 근본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말이요, 마음을 일으켜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을 시킨다는 말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만들어내고, 모든 일을 시키며, 마음이 주인이 되어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든 것도 인간의 마음이며, 나에게 주어진 내 세상을 만들어 낸 것 또한 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없었다면 세상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일으킨 마음이 오늘날의 현실을 만들어 냈고, 지금 이 순간 일으키는 마음이 나의 미래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일으킨 모든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세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세계, 법계는 그것을 놓치지 않지만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놓치고 만다. 아니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을 일으켜 놓고도 스스로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끊임없이 마음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끊임없이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이치를 통째로 집어삼키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머리로만 대충 알 뿐, 온 존재로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지금처럼 주의 깊지 못하게 마음을 함부로 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게 주어진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를 전혀 살피지 못한 채 그냥 그냥 주어진 생을 소모하고 있다. 마음을 놓치면 세상을 놓치는 것이다. 마음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이 진실을 주의 깊게 사유해 보라.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면, 세상의 모든 일이 왜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머물렀다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전체적으로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보면 된다.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살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마음을 보라.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모든 일을 시키고, 이 모든 세상을 만들어 내는 주인은 바로 마음이다.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끊임없이 운명을 변화시켜 갈 뿐.

마음을 간절히 일으킨다면 세상은 거기에 반응을 할 것이다. 그 마음이 더욱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간절한 소망으로 사무친다면 우주는 조금 더 민감하고도 강하게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절이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일률적이지는 않다. A라는 마음이 반드시 a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b나 c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떤 결과는 빠르고 어떤 결과는 늦을 수도 있다. 또한 간절히 마음을 내더라도 내가 생각한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업(業)과 인과(因果)와 전생의 사건들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마음 낸 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빨리 혹은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주의 에너지는 공평무사하게 응당한 반응을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반응이 너무 복잡하고 무량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거기에는 분명한 인과의 법칙, 다르마(진리)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 그 반응의 법칙은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를 따른다. 즉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경전에서는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으로 선악을 대비시키고 있다.

삿되고 악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이 말은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악업(三惡業)을 짓게 될 경우 허물과 괴로움이 따르며, 신구의로 세 가지 선업을 짓게 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법구비유경』에서는 위의 게송이 나온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푸라세나지트왕이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손 씻을 물을 나르고 음식을 만들어 공양 올리는 것을 보고 한 상인은 ‘부처님은 제왕과 같고 제자들은 충신과 같구나. 저 왕은 참으로 현명하다. 부처님을 높이 받들고 자신의 뜻을 낮출 줄 아는구나.’라는 찬탄의 마음을 낸 공덕으로 훗날 왕위에 오르지만, 또 한 상인은 ‘저 임금은 어리석구나. 자기가 국왕인데 무엇을 더 구하려고 부처님께 공양하는가. 부처는 마치 소와 같고 제자들은 수레와 같구나. 저 부처에게 무슨 도가 있다고 저렇게 뜻을 굽혀 받드는가?’라며 나쁜 생각을 일으킨 과보로 죽어 태산지옥에서 불수레에 깔리는 갚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첫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좋은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왕이 되었으며, 두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수레에 깔려 죽을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됨을 설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법구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인과의 방편법에서 머물지 않고 본질적인 근본법을 아울러 설하고 있다. 근기가 낮은 이들에게는 선악이라는 인과의 법칙이 더 쉽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선악의 마음을 대비시켜 설하고 있지만,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악의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선다. 본래 세상에 선악이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마음도 근본적이지 못하지만, 역시 선한 마음도 본질적이지 않다. 옛 말에 ‘선한 것은 도(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불법문중에서는 깨달음을 문제 삼을 지언정 착한 것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선악이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선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 마음은 삿된 분별심일 뿐이다. 악한 마음만 삿된 마음이 아니라 선한 마음도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자체가 이미 마음에서 선과 악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선을 선택, 분별, 차별하는 마음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을 일으키는 그 자체가 이미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이며, 악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일 뿐이다. 선한 마음을 내면 스스로 선한 마음을 냈다는 상이 생기고, 선한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미워하게 되며,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이 깊어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증오의 마음도 함께 커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배신을 당했을 때 증오도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선한 마음도 차별심이며, 악한 마음도 차별심이라고 보았을 때, 불교에서는 선악의 차별적인 모든 마음을 다 여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마음을 일으켜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번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선에 집착하게 되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와 구도자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비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마음을 내는 것 보다 그 마음 자체를 비우는 것이 더욱 수승하다.


한동안 세간에 화재가 되었던 책 ‘연금술사’나 ‘시크릿’ 등은 바로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만들고 세상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설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 방편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간절히 원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은 불교의 근본 목적이 아니다. 마음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본질적인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다. 요즘 같은 세상의 트렌드에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간절히 원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간절히 원하면 명예나 지위도 얻을 수 있으며, 간절히 원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희망을 가지게 하며, 꿈과 욕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가. 그러나 잔뜩 욕망에 넘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비워라’ ‘간절히 원하는 그 마음도 궁극에 가서는 놓아야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김빠지는 말인가.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과 놓음의 가르침보다 오히려 시크릿이나 연금술사 같은 류의 책들이 세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결국에는 넘어서야 할 것들이다. 그 마음 조차도 결국에는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경구를 다시 살펴보면,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은, 무언가 마음을 일으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마음을 비우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이다. 즉 삿된 마음은 일반적인 우리의 마음[心]을 의미하고, 순수한 마음이란 ‘마음비움’ ‘마음 놓음’이란 무심(無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가라는 말인가. 선한 마음도 악한 마음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 도대체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순수한 마음이란 집착이 없는 마음이다. 마음을 아예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는데 집착하지 않고, 악한 마음을 일으켰더라도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도 일으키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되 집착 없이,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좌절하고 괴로워 할 것이지만,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내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