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의 세계에서 일체 모든 존재는 우연이나 운명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현상들은 모두가 그럴만한 인과 연에 의해 인연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원인에 따른 분명한 과보를 받게 마련이다. 인과응보, 업인과보의 법칙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인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분명한 결과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어떠할까.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엄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일 뿐이다. 현실이라는 결과 또한 과거의 내 인연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에 받는 것이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 스스로 받는 것이다. 업인과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분명한 인과의 흐름을 타고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억울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그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부자들은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오히려 정직하고 노력하는 자는 가난해 지기 쉽고, 오히려 열심히 살지 않더라도 머리만 잘 쓰고, 이기적인 사람이 성공하기 쉬운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에도 불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잘 만나 행복하게 부유하게 자라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다. 그 뿐인가. 어떤 사람은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척박한 땅에서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은 세상을 한탄하고, 신을 원망하며, 진리가 과연 있는 것이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이야말로 완전한 평등의 진리가 꽃피어나는 곳이다. 다만 우리의 눈에는 일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불공평한 것 처럼 보일 뿐이다. 전생과 이번생, 그리고 다음 생으로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뛰어넘어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며, 공간적으로도 볼 수 있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다.

인과라는 엄연한 진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정견의 시야가 없으며, 연기적이고 상호연관되어 일어나는 현상들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평등하고 조화롭지 못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세상, 인연과보, 연기의 세상은 완전한 대평등의 세계다. 어떤 이들에게는 인과가 적용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인과의 진리는 적용되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인과를 보고 알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인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등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인과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더라도 이 세상이 연기법, 인과응보라는 진리로써 운행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라는, 인과라는 진리를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믿든 안 믿든 연기와 인과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연기와 인과의 법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기와 인과는 분명하다.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모든 것은 인연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인과응보의 분명한 법칙에 따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어떤 현실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나타날 수는 없다.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이 내가 그 결과를 받아야 할 순간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괴로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조금은 불평등해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꼭 필요한 일이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너무 괴로워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이 시기에 내가 받을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현실이다.

그 현실은 누가 만들어냈는가. 그것은 바로 나다. 내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지을 때는 복도 짓고 죄도 짓지 않았는가. 그동안 우리는 살면서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선업과 악업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언제든 현실에서 발현되기만을 기다리다가 인연에 맞는 때가 오면 바로 그 순간에 선업이든 악업이든 현실로써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을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지을 때는 선행과 악행을 함께 지어 놓고 받을 때는 선행의 결과만 받고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스스로 만든 현실을 내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는 것, 섭수한다는 것이야말로 연기를 이해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즐거운 일은 과거에 지어 놓은 선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즐겁게 받아들이고, 괴로운 현실은 과거에 지어 놓은 악업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이 또한 받아들임으로써 악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 것이다. 업이 올라오는 순간에 완전한 긍정으로써 크게 받아들이고 섭수하면 올라오는 대로 녹아내린다. 눈부신 햇살에 겨울눈이 녹아내리듯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 모든 인연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녹이라.

받아들임에는 좋고 나쁜 분별이 없다. 좋고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받아들임을 넘어 집착이 붙게 마련이고, 나쁜 것은 거부와 배척이 뒤따른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이 붙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의 분별이 온갖 극단을 스스로 만들어 낼 뿐이다. 모든 경계를 다만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바라보면 받아들임의 지혜가 생겨난다. 좋고 나쁜 것이 없으니 좋다고 집착할 것도, 싫다고 거부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들임이야말로 곧 무분별과 무집착과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실천이며, 연기의 실천인 것이다.

이처럼 받아들임, 섭수야말로 연기와 중도, 공에 대한, 이 우주적인 진리에 대한 수용이며 존중이고 실천이다. 우주적인 진리를 진리로써 인정하며 그 앞에 나를 굴복시키고 복종시키는 진리의 숭고한 실천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상황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현실을 통째로 인정하라. 좋은 현실이든 나쁜 현실이든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섭수하라.

순간순간의 모든 삶과 삶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경계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는 평화가 깃든다. 삶을 대상으로 투쟁해 온 모든 다툼과 전쟁은 종식되고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자유로움이 깃든다. 모든 선악과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이라는 극단적인 분별이 소멸되고 중도의 지혜와 텅빈 고요함이 드러난다. 섭수는 삶을 인정하는 것이고,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를 고스란히 내 품에 끌어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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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 인과응보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의 상관성의 측면에서 살펴본 말로 인과, 인과율 혹은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또한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를 받는다고 하여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법이 그대로 연기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과율이 연기법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연기와 인과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설명은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또한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있다는 상의상관적인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해 있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인과라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직선적이고 시간적인 인과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씨앗이라는 ‘인’에 다양한 ‘연’이 화합함으로써 열매라는 ‘과’를 맺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법칙의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씨앗이라는 인(因)과 흙과 거름과 물 등의 연(緣)이 화합하여 열매를 맺고[果] 그 열매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인연이 화합하면 그에 따른 결과인 과(果)를 맺는다. 인과에서 본다면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이 모두 어떤 한 결과를 맺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다 ‘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씨앗이라는 ‘인’으로 인해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이며, 농부의 노력이라는 ‘인’으로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인 것이다. 이처럼 인과는 인간과 사물 간에도 작용하고, 존재와 존재 간, 존재와 사물 간 등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들에게 해당되는 자연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를 별도로 업보(業報)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라는 원인[인]을 ‘업’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의지적인 업에 따른 필연적인 대상의 반응을 ‘보’라고 한다. 이것을 업인과보(業因果報)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바로 뒤에서 설명될 십이처 교리에 입각한 주체적인 인간의 육근과 객관적인 대상이라는 육경 사이의 법칙인데, 인간이 눈귀코혀몸뜻으로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용을 일으키면[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반응[과]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과 대상 사이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연물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인과의 관계는 성립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말해주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선으로 대하면 선의 결과가 돌아오지만, 악한 행위를 하면 악의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이 업보에 대해서는 뒤에 업과 윤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법계 - 법주법계

이상의 연기, 인연, 인과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이 우주의 근저에는 연기라는 법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 우주의 기본 법칙이기도 하면서, 인간과 모든 존재들의 기본적인 운행 법칙이 바로 연기법인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것들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에 머물고 있으며[法住], 연기법이라는 진리의 세계[法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잡아함경』 12권 296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出現)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시건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法住),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건 출현하지 않으시건 일체 모든 존재는 항상 연기라는 법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세상은 항상 진리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잡아함경』12권 299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다만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이신다.”고 함으로써 연기법이라는 진리가 법계에 상주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법주 법계의 이치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저 우연히 생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저마다 완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진리의 몫을 해 내기 위해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것들을 ‘제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제각기 진리로써 존재하고 있는 ‘법’이라는 의미다.

사람만 진리로써 나툰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저 하늘의 구름이며, 바람이며, 별들도, 아무리 작은 풀벌레며 곤충과 심지어 미생물들 또한 제각기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진리로써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진리의 법계에 법으로써 법주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세계에 진리로써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만을 우월하다 하고, 자연이나 자연물들을 열등하다 할 수 있겠는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어찌 높고 낮은 우월감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계에 법주하고 있는 법으로써 정확히 필요한 곳에 정확히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정확히 필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견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이유는 분명한 진리의 몫을 띄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이 세상을 원망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이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반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살 걱정, 의식주 걱정으로 허덕이며 근근이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간교한 계략과 이기적인 술수로써 살아가는데도 성공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성실하고 소박하게 베풀며 살아가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더 이런 불만과 불평등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신을 욕하고 부처를 탓하며 이같이 불평등한 세상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기법에 기반한 법주 법계의 진리에서 본다면 이 모든 불평등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로써 진리의 모습에 하나도 어긋남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좁은 소견에서 본다면 당장에 이번 한 생 밖에 볼 수 없으며, 당장에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만 연연하지만 우주적인 진리의 시야는 시공을 초월하며 전체적이고 전 우주적인 툭 트인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언뜻 보기에는 불평등해 보이고, 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사실은 그 이면에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연, 인과, 연기의 진리가 일체 모든 존재의 저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진리가 머물러 있는 진리의 세계, 법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이 법계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이 전체적인 법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견해를 정견으로 바꾸어 나가야지, 현재의 갇혀 있는 좁은 소견으로 이 법주법계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치우쳐 있고, 갇혀 있는 좁은 소견을 온전하고도 전체적인 치우침 없는 정견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 그래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려면 먼저 법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즉 법주를 알아야 한다. 『잡아함경』14권 347에서는 “그들은 먼저 법에 머무를 줄을 알고 뒤에 열반을 알았느니라. 그 모든 선남자(善男子)들은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분명하게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으며, 나라는 소견[我見]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잘 해탈하였느니라.”라고 설하고 있듯이, 법에 머무를 줄 알고 난 뒤에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법주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곧 법이 머물러 있는 곳임을 분명하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우주는 그대로 법신불(法身佛)이요, 낱낱의 존재는 모두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말도 바로 법주법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 법계를 법신불이라고 하며, 나라는 존재 또한 사실은 진리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진리의 몸이기 때문에 자성불이라고 한 것이다.

법신불이니 자성불이니 하는 말이 어떤 실체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진리로써의 몸 없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열반을 구하려는 수행자는 이러한 법주를 바로 알아 내 안에,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에 언제나 법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러한 법신불과 자성불의 진리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의 첫째는 나를 완전히 내던져 맡기는 것에 있다. 경전의 말씀처럼 법주를 분명히 알아야 열반이 있는데, 법주를 분명히 알아 실천한다는 것은 곧 ‘홀로 고요한 곳에서 분명히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나라는 소견을 여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있다. 나를 완전히 진리에 내맡기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완전히 힘을 빼고 함께 따라 흐를 때, ‘나’라는 소견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번뇌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법에 머무른다는 말은 곧 ‘나’라는 소견을 놓아버리고 모든 생각과 번뇌를 다 내맡기고 다만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바라보기를 게으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모든 것을 맡겨야 ‘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고, 법이 머무르고 있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에게도, 내 주변의 세계에도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음을 바로 알고 믿어 법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의 소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고요히 법을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했을 때 법에 머무르는 지혜[法住智]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주지(法住智)를 얻으면 ‘나’라는 소견이 사라지고, 일체 모든 것을 법에 내맡기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평화가 깃들고 지혜가 생겨난다. 『잡아함경』14권 345에 보면 “저 사리불 비구는 실로 내가 하루 내지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묻는 이치에 대해,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그것을 해설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리불 비구는 법계(法界)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니라.”라는 대목이 보인다.

즉 부처님께서 몇 일 밤낮 동안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시더라도 사리불은 그 모든 법을 해설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리불이 법계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법계에 잘 들어가 진리의 세계를 완전히 깨닫고 진리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다 이해하고 해설해 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법주법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가 곧 진리의 세계이며, 나라는 존재 또한 진리가 머물고 있는 법신임을 믿어 ‘나’를 내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 모든 것을 진리에 내맡기고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산다고 하면 아상에 빠지게 되고, 이기와 아집에 빠지고 말지만, ‘진리’가 산다고 믿고 맡기며, 부처님이 산다고 믿고 맡기고 살게 되면, 괴로움에 허덕일 것도 없고, 삶을 헐떡거리며 살아갈 것도 없어진다. 그 때부터는 삶이 고요해지고, 이기와 아집이 소멸하며, 평화와 안식이 깃들게 된다.

괴롭기 위해서는 괴로운 ‘나’가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법주법계에 맡기고 살게 되니 ‘나’가 사라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진리’만이 남아 진리답게 법답게 저절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주법계로 사는 수행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는 것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수많은 진리의 인연에 의해 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주법계에서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법주나 법계를 주체적인 어떤 상으로 실체화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로써의 이치를 설하는 것이지 별도의 상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생계와 별도로 실체적인 어떤 법계가 있다거나, 내가 머물고 있는 이 현상계와 별도로 법주가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무아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발붙일 틈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부처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하고 머물러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를 벗어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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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과 흔히 혼용하여 쓰고 있거나, 함께 쓰고 있는 것으로 인연(因緣)이란 말이 있는데, 사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이다.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연기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인’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연’은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원인을 뜻한다. 그래서 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뜻으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식물에서 본다면 식물의 직접원인인 ‘인’은 씨앗이 될 것이고, 간접적인 원인인 ‘연’은 거름과 흙과 태양과 공기와 물과 농부의 노력 등 식물을 싹틔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간접적인 일체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한 존재가 생겨나는데는 그것이 아무리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한 가지 원인만을 가지고 생겨날 수는 없으며, 인과 함께 수많은 보조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이 무수하게 도움을 주어야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과 연이 화합한다고 해서 인연화합이라고 한다.

식물 하나를 싹틔우고 꽃피우는데 만도 이 우주의 지수화풍의 모든 요소와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모든 멀고 가까운 온갖 조건과 원인들이 수도 없이 많은 보조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이라는 것은 다만 몇몇가지 간접 원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시키는데 도움을 준 일체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모든 원인을 의미하며, 나아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식물 한 그루를 싹틔우는 보조적인 연으로써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 모든 생겨난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른다. 앞의 연기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들은 저홀로 독자적으로 생겼거나,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원인에 의해 한 가지 결과가 도출한다는 직선적이고 단일적인 인과가 아니라 인연법에서 보듯이 인과 연의 무수한 원인과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어 화합하였을 때 결국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인연법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인과 연이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어떤 것이 ‘인’이고, 어떤 것이 ‘연’이라고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또한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시간과 공간적인 차이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과 연이 바뀔 수도 있다.

인연법에서 중요한 것은 결정론적으로 ‘인’이 무엇이고, ‘연’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겨나는 것들은 그 생성과 소멸에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들이 무한하게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연계되면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인연화합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의 비유는 우유와 치즈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우유를 발효하여 치즈를 만든다고 했을 때 우유가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되고, 발효과정이나 발효에 들어가는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이 연이 되는 것이다. 우유만 있어도 발효라는 연이 있지 않으면 치즈를 만들 수 없고, 발효라는 연의 조건이 있더라도 우유라는 인이 없으면 치즈라는 과를 가져올 수 없으므로 인과 연은 어느 하나가 빠지더라도 과를 생성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로 물의 순환을 들 수 있는데, 물이라는 것이 인연 따라 여름철 장마를 만나면 비로도 내렸다가, 겨울에 추운 조건이 형성되면 눈으로도 내리고, 또 때로는 우박으로도 내린다. 특정하게 물이 어떤 실체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물 또한 실체 없이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대지 위를 내린 비는 산과 숲을 만나 인연 따라 나무의 수액도 되었다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피나 땀이 되기도 하고, 지하수도 되었다가, 호수나 계곡물로도 되고, 나아가 강이나 바다로도 흘러든다. 또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면 수증기로도 증발하고 다시금 하늘에 구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름이 다시 인연을 만나면 비나 우박이나 눈 등으로 다시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인연 따라 물은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이름도 비, 눈, 우박, 서리, 이슬, 구름, 수증기, 수액, 피, 땀, 강, 바다, 계곡물 등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바뀐다. 이처럼 물이라는 근본 원인(因)이 어떤 조건, 어떤 연(緣)을 만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돌고 돌며 순환한다.

물론 그 물이라는 분자 또한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나뉘면서 변화해 가고, 수소나 산소 또한 그것을 쪼개면 원자핵과 전자로 나뉘는 등 어떤 실체적인 것 없이 끊임없이 인연따라 변화해 갈 뿐인 것이다. 이처럼 그 모든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르며 변화해 간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바뀌어 갈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고, 공이며, 무상이고, 그 모든 것을 연기 혹은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이며, 무아이고, 무상이며, 연기이다.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도 마찬가지고, 존재의 생주이멸(生住異滅)도 마찬가지이며,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다만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 생성되고 머물며 변해가고 소멸되는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작게는 나라는 존재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인과 그 두 분의 사랑, 결혼 등이라는 연에 의해 생겨나고,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과 우주적인 도움을 받아 인연 따라 성장하고 늙어 가다가 죽는 것이며, 모든 존재의 생주이멸도 그러하고, 우주의 성주괴공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별의 탄생이라는 것도 독자적으로 어느 순간 탄생된 것이 아니라, 별과 별 사이의 성간물질이라고 하는 ‘인’이, 빛과 탄소와 그로인한 수축 등의 다양한 ‘연’을 만나면서 빛을 발하고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별들은 만들어졌다가 머무는 단계를 거친 뒤에는 어김없이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쓰게 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다.

태양만 보더라도 과학에서는 현재 50억 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통해 성주(成住)의 과정을 거쳤고, 앞으로 50억 년 쯤 후가 되면 수소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소모하게 되어 태양의 일생도 괴공(壞空)의 단계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처럼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생성된 것들은 크든 작든 모두가 인연화합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 누군가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처럼 생겨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인과 연의 화합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본래 텅 비어 있는 공이었지만, 인과 연을 만나면 생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심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어떻게 인과 연을 만난다고 해서 결과를 발생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이지만, 무이지만, 인연을 만나면 결과를 이룬다는 이 사실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비유로 불의 비유가 있다.

여기에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하여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과(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이 만들어 진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生)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나무를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된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소멸(消滅)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 비유는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이와 같이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의 탄생에 대해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가지고 논쟁하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인연론, 연기론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된다는 이치이다. 불이라는 것은 본래 어디에도 없었다. 손에도, 공기 중에도, 나무 안에도 불은 없었지만, 그 모든 인과 연의 조건이 화합하는 순간 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불이 창조되었다거나 진화되었다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났을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다만 인연이 모이면 생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인연법,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생성과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유(有)는 원래 스스로 무(無)인데, 인연의 이룬 바이다’라고 했다. 본래부터 존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모든 것이 텅 빈 무이며, 공이었고, 무아였지만, 다만 인연이 화합하는 순간 인연따라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體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하여 일체의 모든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것들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본래의 모습은 텅 비어 있는 공이지만,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 인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인연법은 존재와 사물의 생멸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삶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태어나면서부터 부자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 받았더라도 모두가 다 성공하고 그 부유함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받았더라도 스스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의 연을 쌓는다면 오히려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더욱 좋은 연들을 많이 만날 수도 있지만, 좋지 않은 연들을 만남으로써 실패를 맛보게 될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똑같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혹은 더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보다 더 못살고, 더 잘 살지 못했을 때 세상을 원망하고 부처를 원망하며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인연법이라는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탓이다.

인연법에서는 똑같이 시험 성적을 90점 맞았다고 그 90점을 맞은 사람들이 똑같이 잘 살며, 똑같은 부유함을 유지하며, 똑같이 대학에 합격하고, 똑같이 사회에서 상류층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시험 성적을 90점을 맞았다는 그 근본 원인인 ‘인’에 내 적성과 취향과 꿈,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조언 등 무수히 많은 ‘연’이 함께 화합함으로써 어떤 사람은 A라는 대학 a과에 진학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B라는 대학 b라는 과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며, 또 다른 많은 연들로 인해 두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한 사람은 무조건 회사도 좋은 곳에 들어가고 잘 진급하며, 못 한 사람은 나쁜 회사에 들어가 진급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 한 사람은 공부만 한 대신 인간관계를 잘 못 지었지만, 공부를 못한 어떤 사람이 대신에 인간관계를 잘 지었다면 오히려 공부를 못 했던 사람이 또 다른 ‘연’으로 인해 진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잘 지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든 내 삶에 있어 수많은 원인과 조건으로써 나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맑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이 되고 연이 되어 내 삶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성숙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A라는 근본 원인이 그대로 a라는 결과만을 똑같이 가져다 주는 곳이 아니다. 그 근본 원인에 또 다른 무수한 어떤 연이 화합되느냐에 따라 수많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오고, 똑같은 과목으로 공부를 했지만 저마다의 적성과 취향과 직업과 능력과 가치관이 다른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열심히만 살면 똑같이 성공해야 한다거나, 똑같이 노력했는데 왜 저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가 생각한다거나, 저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는데도 성공하고, 나는 이타적으로 살아도 실패를 맛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 단순하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단일적이고 일차원적인 결과만을 놓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인’과 ‘연’이라는 수많은 복잡다단한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까지 전체적이게 연기적이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A는 a가 되는데, 나에게는 왜 A가 c가 되느냐고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그 A라는 근본원인에 타인과 내가 어떤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에 대한 차이가 있었는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A라는 원인을 지었어도 선업이 많고, 복이 많으며, 인간관계에서 선한 인연을 많이 심어 놓은 사람의 결과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