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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20 우주적이고 다차원적인 연기 - 연기법 강의(5)




우주적이고 다차원적인 연기 - 상의상관성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 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해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텐데, 부처님 당시에도 코티카라는 제자가 연기에 대해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며 사리푸타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장면이 『상응부경전』12:67에 나온다.

벗이여! 여기 두 묶음의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이 갈대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이며,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묶음의 갈대단 중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단도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며,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비유지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을 아주 쉽게 비유해 주고 있다. 두 묶음의 갈대단이 서로 의지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치우면 나머지 갈대단도 쓰러지는 것과 같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도움을 주면서 상의상관적으로, 관계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말은‘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 생성 및 소멸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돕고 도움 받는 긴밀한 연기적, 상의상관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과 ‘저것’은 따로 따로 떼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동체이며, 한생명이고, ‘이것’은 ‘저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과 ‘저것’ 그 어느 것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닌, 인연따라 생겨난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아이면서 인연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이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기에 공(空)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A와 B 사이의 연기성은 곧 B와 C 사이의 연기에서도 발견되며, 다시 C와 D 사이에서도, 또한 C와 A, D와 A, D와 B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이러한 관계는 E, F, G...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에게로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퍼져간다.

이처럼 온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모든 존재의 생성을 돕고 소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어떤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좁게는 근본적인 원인과 직간접적인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지만 조금 더 연기의 시야를 넓혀 시공간으로 확장시켜 보면 이 우주 법계 전체가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되어 있다. 즉 이 우주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한 가지 원인이 한 가지 결과를 발생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다차원적인 원인으로 인해 하나의 존재가 생기며, 하나의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다. 서양 과학은 단일한 원인이 단일한 결과를 일으킨다고 믿었지만, 동양적인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이처럼 전체적이고 우주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의 영향도 받고 있는 것, 나아가 인간이 우주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우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이러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서로 의존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을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명도 우연도 신의 뜻도 아니다

이러한 연기법에서 본다면, 어떤 한 존재가 생겼다거나, 어떤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단순한 존재의 발생이나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적이고도 전체적인 무한한 인연관계 속의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인 인생관에 반해 보통 세상의 또 다른 견해로는 모든 것이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운명론이나, 모든 일이나 존재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우연론이나, 일체 모든 것은 신이나 브라만이 만들었다는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가장 주목을 끌었던 인생관이 바로 운명론과 유신론, 그리고 우연론이었다. 『중아함경』제3권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그릇된 견해가 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파벌을 만들어 서로 주장을 달리 하지만 인생에 있어 아무런 소득이 없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숙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신이 만든 것이다’는 주장이며, 셋째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우연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사람의 모든 일을 일체가 다 숙명에 의한다거나, 신이 만든다거나, 아무 인연도 없는 우연이라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분별하며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현실의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인간이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고, 선악의 구별도 없게 된다. 저들의 주장에 맞서 나는 연기법(緣起法)을 깨닫고 중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운 선택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주장은 시대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종교며 사상,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요한 인생관들이다. 그러나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내 자신이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해 갈 수도 없고, 내 삶을 바꾸어 갈 수도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하고 포기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운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무슨 일만 생기면 사주팔자를 보러 점집에 가고, 무속인들을 찾아 가 운명을 점치는 일 밖에 없다. 그것 외에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 한 가지도 내 스스로의 의지대로 해 나갈 수 없다. 오늘날도 툭 하면 연례행사처럼 점집을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바로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갇혀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고 내 정신을 점쟁이에게 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 안의 오롯한 중심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지 점이나 사주팔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사람이 점쟁이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꾀어 재물을 구한다면, 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 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옥 생활이 끝난 다음에는 그 죄로 인해 악업의 몸을 얻고 태어나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고 했고, 『숫타니파타』에서는 ‘온갖 점을 치는 일이나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운명이나 숙명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은 어차피 잘 되도 숙명이고 못 되도 숙명이기 때문에 삶을 개척해 나가고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다. 이런 사람일수록 게으르고 나약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숙명 탓이나 남 탓, 나라 탓, 정치인 탓, 부모 탓만 하지 자기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무런 인연도 없고 원인이나 조건도 없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사람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 세상이 단순한 우연일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도 악도 다 소용없고, 선하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잘 살고 못 하는 것도 다 단순한 우연이란 말인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우연이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을 하는 등의 삿된 행위들 또한 우연일 뿐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론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어떤 윤리적인 의식도 없을 것이고, 막행막식을 하면서도 아무런 인과응보가 없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또한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우연이니 의지를 일으킬 것도 없고, 세상을 선하고 살고자 애쓸 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신의 가호나 은총만을 바라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행 등의 악행을 하더라도 그 또한 신의 뜻이라고 믿을 것이 아닌가. 여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신관은 위험하다.

이러한 세 가지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설하고 계신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와는 달리 연기법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이 100% 보장되고, 자신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며, 행복에의 가능성, 깨달음에의 가능성을 스스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인과응보의 윤리적 가르침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저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상의상관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너와 나의 차별이 없고, 너를 의지하여 내가 있고, 너로 인해 내가 있으며,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자비정신은 곧 보시와 나눔의 정신으로 이어져 모두 함께 풍요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처럼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평등하며, 둘이 아니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는 바탕에는 ‘나’라고 내세울 그 어떤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으므로 ‘나’중심의 이기적이고 아집에 물든 삶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이상에서 본 것 처럼 불교의 연기법은 우연론도 아니요, 신의 뜻도 아니며, 숙명론도 아니다.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사건들이 서로 서로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꽃피어나는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다. 그 어떤 존재도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존재도 진리에서 떨어진 채 홀로 소외를 느끼지 않는다. 진리는 결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는다. 누구나 이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에서 자기답게 자신의 몫으로 아름답게 꽃피어나도록 되어 있다. 이 연기의 장에서 모두는 한 가족이며, 벗이고 정겨운 친구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