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창조하는 네 가지 방법

빗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지난 시간에 ‘내가 내 삶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 삶을 아주 멋지게 만들어낼 수가 있다, 창조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랄까 좀 희망찬 그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전 같으면, ‘집착을 하지 마십시오,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사십시오.’ 이런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마음을 멋들어지게 창조해내고 자유자재로 쓰면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보니까 아무래도 아주 상기가 되면서 ‘아! 이렇게 멋지게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바꾸어 가면서 살 수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찌 보면 이제 좀 찬물을 끼얹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말씀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일으켜서, 나의 삶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업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내 삶을 만들어낸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구의 삼업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사는 이유는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써 다른 업을 지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가 창조를 할 수 있느냐? 그리고 대부분 내가 내 생각으로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로 된다는 얘긴가? 사실과 좀 다른 것 같다. 『시크릿』에서도 얘기하기를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 나의 현실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더라.’ 라는 얘기를 한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이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아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 이 우주법계에서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하면서 남들에게는 ‘너는 망해라’ 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 거예요.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너지와 남들은 망해라 하는 에너지를 함께 일으킨 거니까 우주법계에서 볼 때는 이게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겁니다.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으니까, 그 두 가지 마음에 대해 똑같이 창조에너지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고 싶단 말인지, 망하고 싶다는 말인지 영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써 나의 창조에너지로 바뀐다 이 말입니다. 남들에게 ‘너 좀 망해 봐라’ 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나를 망하게 하는 강력한 창조에너지로써 내 삶을 망하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오는 자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세상을 창조하는 일체유심조의 원칙은 뭐냐 하면 바로 내 바깥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얼마만큼 자비롭게 대했느냐 하는 것이 내 삶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주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원리는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내 삶은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일종의 아상(我相), 아집(我執)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기 스스로 자기 능력을 한정짓고, 한계를 지우기 때문에 그만큼의 범위 안에서만 창조가 되지 그 바깥의 더 많은 창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은 이것 밖에 안 돼,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계를 지움으로써 자기능력을 자기 스스로 그렇게 딱 제한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능력을 딱 제한 해 놓으니까 그 능력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기 한계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신을 제한하고, 묶어두는데 쓰고 있으니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내 스스로 그 제한과 한계와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놓여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외부적인 힘도 나를 바꿀 수 없고, 내 삶을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자기 한정의 관념만 깨버리면 무한한 자기 창조의 에너지로써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이 깨어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다면 그것이 생겨나기를 바라고, 빌고, 기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라는 그 부분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 하고, 만족스러워하고, 충분히 느끼고 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빌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고 한다면 돈을 더 벌려고 막 기를 쓰고 원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재산 그 돈에 대해서 충분히 누릴 줄 알아야 되고 느껴볼 줄 알아야 되고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알면 그 감사한 것이 우주로 전달이 되어서 감사할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감사하지 않고 만족해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일으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창조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감사와 만족에 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현실을 창조해 내려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맑고 깨끗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깨끗하고 텅 비어 있을 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강력한 에너지를,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항상 혼란스럽고 망상이 들끓고 온갖 생각들이 막 죽 끓듯이 왔다갔다 오락가락합니다. 한 가지 판단을 가지고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가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듯이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까 뭔가 한 가지 원하는 것에 힘이 집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잘 하는 말로 몰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흐트러지고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에너지를 강력하게 쓸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명상과 기도 끝에 하는 발원이 힘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삶을 멋들어지게 창조하고 싶다면, 네 가지가 중요합니다. 만약에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네 가지 중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로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지요. 두 번째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짓지 말아야 한다, 아견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무한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바라고 빌기보다는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하는 참선과 명상 같은 그런 기도와 수행을 통해서 발원을 했을 때 그것은 큰 힘을 받는 것이라고 이렇게 네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의 창조를 뛰어넘으라

그러면 이제 좀 어떻습니까? 이제 좀 현실에서 잘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마음을 쓰면, 배운 것처럼 마음 내는 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삶이 창조되어 집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하는 그 크기만큼 거꾸로 내 삶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이제 창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내 뜻대로 세상을 창조한다 그것은 업이 아닙니까? 뭔가 내가 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이잖아요. 의지적인 행위가 곧 업(業)입니다. 의지적인 생각도 업(意業)이고, 의지적인 말(口業), 의지적인 행동(身業)도 업입니다. 아주 정확히 본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지만 다른 말로 내가 나의 업을 창조해내는 거예요. 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바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좋은 에너지, 좋은 삶을 창조해내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난 시간에 내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설법을 했던 내용은 뭐냐 하면 “기왕 세상을 창조할 거라면 못살고 고통 받고 부정적인 에너지 가지고 세상을 살지 말고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고 뭔가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창조하십시오.” 라는 방편으로써 그런 말씀을 드렸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이것이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한다면 본질은 뭔가? 방편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는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내안에서 자성부처님께서 본래적인 참나가 나를 창조해내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맡겨놓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가 내 삶을 창조하도록 완전히 나를 내맡겨놓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창조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본질적인 지혜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껍데기 의식인 에고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무명(無明)이다 보니까 나 잘되고자 하는 아상(我相)과 이기심에 기초한 세상을 창조한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방편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의업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아름답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창조된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창조에너지로 작업 해 놓은 것이 현재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지은 업들이 모여 그 업보라는 결과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라는 것은 곧, 불교적 표현으로 업을 변화시킴으로써 업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은 행위인데, 신구의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고,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마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 그 중에도 뿌리인 의업, 즉 생각을 어떻게 조작하고 다스리며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업의 결과인 업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도 바로 이것입니다. 업을 내보내면 업보가 끌어당겨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건 내보내는 업에 있어요, 업을 내보내면 당연히 업보가 끌어당겨지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반대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끌어당겨지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했습니다. 불교는 나의 행위가 중심이고, 『시크릿』은 내가 받을 결과물이 중심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데서 조금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업을 잘 지어야 좋은 과보를 받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업을 잘 짓고 과보를 창조해 낼 것이냐’를 말씀드렸는데요,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업이라는 것이 이 세상, 즉 껍데기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만, 근원으로 들어가면 업이라는 것도 공(空)합니다. 우리가 선업, 악업이라고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라는 것도 공해요. 불교에서는 업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업이라는 공한 환영과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 업 자체를 뛰어넘고, 선악 자체를 뛰어넘어 어떻게 업을 넘어선 본질적인 곳에 가 닿을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의 핵심을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라는 의미인데요,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업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선악 업을 뛰어넘어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즉 업이라는 구속에서 조차 뛰어넘는 것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창조에너지를 가지고 좋은 업을 짓고, 우리가 마음을 잘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명예도 높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도 사고, 남들 돕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 된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으로 그냥 인생이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부자로 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를 창조하고 싶어서 부자를 창조할 수는 있겠지만 부자와 가난 그 양 극단을 뛰어넘어 부에도 가난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고, 명예도 높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그 차원에서는 『시크릿』의 가르침, 업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공부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 잡히고, 여여한, 우뚝 선 지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착하게 사는 방법은 됐을지언정 착하게 사는 것이 도(道)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제가 누군가에게 기분은 나쁘겠지만 꼭 해 주어야 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을 한 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그 사람하고 좋게 지내려면 날카로운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겠지만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당장은 조금 껄끄럽더라도 한 마디 해 줘야합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그것이 다는 아닌 겁니다. 선악을 뛰어넘고,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으며, 부와 가난을 뛰어넘는 더 큰 지혜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텅 빈 근원 위로 많은 것이 지나간다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것은 이 완전한 지혜, 내안에 있는 부처가 나를 창조할 수 있도록 전혀 뒤탈이 없는 그런 어떤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려면 우리가 먼저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는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말씀드리자면 본래는 어땠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는 지금 나라는 아상에 얽매여서, 에고에 얽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질은 어떠한가? 나라는 삶에 얽매이지 않았을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중생으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얘기입니다. 이 우주법계의 본래 근본, 나라는 존재의 근본 마음자리, 그 바탕자리, 주인공자리, 그 자리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완벽하고도 고요하고도, 청정하고도, 순수하고도, 텅 비어있는, 하여튼 맑고 텅 비어있는 어떤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원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나라는 존재를 원이라고 했을 때, 원 안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욕심과 집착과 삶의 계획과 판단과 온갖 것들로 내 것, 내 생각, 내 소리라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본래는 이 원이 텅 비어있었고 맑고 청정한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티 없는, 먼지하나 없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는 그러한 청정하고 맑은 텅 빈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이 우주법계도 그렇고. 본래의 우리 자신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많은 때가 낀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본바탕은 항상 깨끗하고 맑고 청정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더러워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더럽혀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마음자리는 항상 맑고 깨끗하고 청정하다, 텅 비어있다, 텅 빈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이 맑고 깨끗한 텅 빈 자리에 수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흘러가고 지나갑니다. 삶이라는 것이 등장을 하고 사라지고, 스쳐 지나갑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가고, 갑자기 친구가 하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중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고등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20대 때 대학교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또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요. 여러분 삶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지금까지 내 존재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도 스쳐 지나가고 나쁜 일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도로에, 고속도로에 가만히 있으면 자동차들이 무수한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간단 말입니다. 온갖 생각 생각들도 지나가고 우리의 어떤 감정들도 지나가고 수많은 에너지들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물질들이 지나가고 수많은 대상들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고 사건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어떤 에너지의 파장들이 파동들이 지나갑니다. 제가, 물리학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본질은 모든 물질도 정신도 모두가 하나의 파동이었고 파장이었다 그랬거든요. 수많은 파동들 파장들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수많은 파동과 파장, 에너지의 파장이 그 본바탕 위를 지나간다 말이에요.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맑고 깨끗한 바탕 위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지나가니까 맑고 깨끗한 바탕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물러있지 않는단 말이죠. 그냥 지나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모든 것이 지나갈 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벌이기 시작했냐 하면, 그 중에 눈에 띠는 게 있단 말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게 있어요. 뭔가 모르게, 모든 것들이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는데, 수많은 자동차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그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맘에 드는 게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의식의 초점을 집중합니다. 처음의 텅 빈 자리는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더라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 스쳐 지나는 것들은 아무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았어요.


지나가는 것을 멈춰 세운다

우리의 의식은 다만 무엇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어요. 강가에 앉아서 강물 줄기가 지나가는 것을 다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게 없었고, 나와 더 가깝거나 더 먼 것도 없었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었어요. 좋은 것 나쁜 것 없이 그저 존재 위를 스쳐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나에게 좀 더 관심이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띠기 시작했고,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갖다 보태게 된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냥 스쳐지나가야 될 것이 갑자기 나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나의 의식이 거기에 딱 머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의식으로써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자, 다만 바라보는 자로서 머물렀어야 되는데, 다만 보는 자가 되지 않고, 거기에 내 생각을 개입시키고, 내 의지를 개입시켜서 내가 맘에 드는 것을 유독 관심을 가지고 봤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 아상을 개입시킨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멈추게 됩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멈추게 만든 거예요. 그럼으로써 머무르게 됩니다.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바라보기만 해야 되는데, 그것이 나에게 와서 머물기 시작합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해요? 집착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집착이 하나 없었던 맑고 청정하게 티 없이 깨끗하던 본바탕에, 그저 그 위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것들을 그 가운데 일부분을 내 식대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만 채택해서 머물게 만들고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옆으로 껴놓고 사는 겁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집착하고, 좋아하고, 머물러 사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것과 관련된 것들, 또 다른 좋은 것들이 눈에 띠게 되고 그때그때마다 이제 집착해서 붙잡아 놓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의 덩어리들은 자꾸자꾸 덩치를 키워요. 점점 커지는 겁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사실은 그 본바탕이 본래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아상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또 나머지 대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집착 없이 그저 지켜보는 자 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인 삶도 일부분 살고 있고 중생의 붙잡고 집착하는 삶도 살고 있습니다. 그냥 스쳐 보내는 것도 있고, 붙잡아두는 것도 있잖아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내가 좋다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상으로 붙잡아 놓고 집착해 놓고 내 것으로 만들려던 대상들을 나머지 대부분 그저 스쳐 보내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두고 스쳐 보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 자유로워집니다. 붙잡아 둘 것이 없어져요. 내 것을 빼앗길까봐 근심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집착한 것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그 모든 삶 위에 스쳐 지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되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크게 보면, 집착을 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선택적으로 내가 관심이 있는 것들만 집착을 하고 살지, 관심 없는 것까지 집착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상, 아집의 형성

제가 앞에서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자동차가 휙휙 지나갈 때 빠른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은 집착 안 하거든요. 마음이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갈 뿐이에요. 근데 순간 어떤 한 차에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남자친구가 거기에 타고 있는데, 딴 남자하고 딴 여자하고 부둥켜안고 운전하는 것 같은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럼 그것은 붙잡는 겁니다. 그 생각에 계속 머물러있어요. 그래서 몇날 며칠이고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그 다음에 여자 친구를 만나 얘기도 못하겠고 그 생각에 자꾸 붙잡혀있는 겁니다. 이것처럼 뭔가를 붙잡아두면 그것이 나에게 와서 문제가 되고 그것이 나에게 집착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집착하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많지요. 더 많습니다. 즉 흘려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흘려보내듯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 또한 흘러갈 수 있도록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섭니다. 내 의지로써 내 생각으로써 그것을 거기에만 제한시켜서 관심을 둠으로써 막아서서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럼으로써 뭐를 창조하느냐 하면 이제 아집(我執)을 창조해냅니다.

나라는 집착덩어리, 내가 좋아서 선택적으로 붙잡아두었던 것, 그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어때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내거라고 생각해서 붙잡아두었던 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정이 드는 거예요.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자꾸 개입되니까 이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붙잡아 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내가 집착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집착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아니고 나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스쳐지나가는 것을 붙잡아놓았을 뿐입니다. 붙잡아놓았을 뿐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흘러가도록 돼있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나에게 와 있을 것이라는 고정된 믿음을 가지고 붙잡고 있는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아요. 꽉 부둥켜안고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이나 존재 뿐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 어떤 한 가지 특정한 생각을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 내 견해라고 생각하고 내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자기 견해가 뚜렷한 것을 좋아해요. 나라는 견해가 뚜렷하게 있으니까 나라는 견해 그것을 가지고 또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 견해에 합당한 외부적인 대상을 찾아서 붙잡아 집착합니다. 그러면서 이 바깥에 있는 것들도 다양한 것들이 내 것으로 편입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안팎에서 내 것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내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아집과 아상, 아견이라는 나의 집착 덩어리가 이 몸뚱이를 붙들게 됩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설정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방어벽이라는 것도 내 것이라는 집착, 어떤 생각에 대한 집착, 그것을 하나의 방어벽처럼 나라는 울타리, 나라는 울타리를 막고 있는 방어벽으로써 탁 틀어막고 있는 거지요. 그 방어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의 집착이고, 하나의 나라는 아견이고, 아상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는 하나의 틀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다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어떤 한 가지를 보고 누구나 집착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것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그저 흘려보내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는 강가에 있는 돌이 다 스쳐지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중 특별한 돌들을 붙잡아 ‘내 것’ ‘내 소유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아무리 봐도 내 거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냥 흘려보내기 밖에 안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기가 만들어놓은 어떤 틀, 아집, 아상, 그 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상을 내가 만들어 놓은 아집에 빗대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잣대 짓고, 방향성을 설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그것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고, 삶의 방향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까 말했듯이, 돌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떠냐 하면 돌만 찾아다닙니다. 심마니가 산삼만 캐러 다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건 관심이 없습니다. 운동 좀 해볼래 해도 운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 좀 해볼래 해도 수행에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 높은 자리를 준다고 해도 별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요. 내가 딱 틀 잡아 놓은 나라고 형성해 놨던 그 틀에 있어서 거기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를 정의하는 어떤 집착덩어리를 가지고 자기를 정해놨던 틀로 만들어서 그것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내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식을 전혀 다르게 키웁니다. 자식에게 정말 친환경 쪽으로, 정말 자연 그대로, 정말 지혜롭게 키워야 되겠다는 가치관을 가진 분들은요, 서울에 사는 대학교 교수님이 자기 자식이 서울의 좋은 대학, 고등학교, 좋은 대학을 다니는 애를 갑자기 데리고 시골에 내려와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시골에 있는 허름한 대안학교 같은 데 보낸다 말입니다. 그 좋은 대학 그만 두고 서울대를 나오고 무슨 카이스트를 나오고 한 사람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 삶을 갑자기 때려치우고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서울대를 나왔던 사람들이 대거 몇 명씩 한꺼번에 출가를 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어떻게든 공부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가치관을 가지고 키우는 사람은 모든 것의 기준을 공부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결정짓겠지요. 그러나 어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면 뛰어놀게 해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과 하나 되어서 어울리게 해줄까 이런 거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삶의 방식 자체가 어디에 머물러 있고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이라는 그 직업이 바로 나와 동일시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 과목 어떤 과목을 담당한다고 하면 그 과목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 뭐가 관련되더라도 그 과목과 관련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그 틀에 그 색안경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수학선생님은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보고, 과학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보고, 음악선생님은 어디를 가도 관련된 음악을 찾게 됩니다. 우스개로 직업병이라고도 하는데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평생 흙 가지고 무엇을 만들고 짓고 하셨다 보니까 어디 모처럼 여행을 가셔서도 흙만 보시면서 좋은 자재다, 아니다 하는 것만 생각하십니다.

스님이나 성직자 분들도 마찬가지죠. 자기종교라는 그 틀에 빗대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색안경에 빗대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불교신자나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도 마찬가지죠. 자기의 종교적인 색안경, 집착하고 있는 그 종교적 견해나 사상 그 틀 속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갈등이 엄청나잖아요? 자기만이 집착하고 있는 하나의 덩어리가 딱 있어서 그것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환경론자와 개발론자 사이에 그 갭 또한 엄청 크거든요. 그것도 자기가 나름대로 틀 잡아 놓은 그것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나라는 생각에 탁 굳게 집착되어 있단 말입니다.


창조할 것인가 창조를 넘어설 것인가

이렇게 되다 보니까 처음에 애초에 텅 비어있던, 맑고 깨끗하던 그 공간을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 중 처음에는 하나를 붙잡아 두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개, 세 개, 수많은 것들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아놨던, 머물게 집착해놨던 수많은 것들로 나라는 어떤 존재를 형성시키게 됩니다. 아상을 만들고, 존재의 집을 만들고, 어떤 존재의 성을 만든단 말입니다. 견고한 어떤 벽돌을 쌓아서, 방어벽을 쌓아서 나라는 것을 딱 만들어두는 작업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해왔던 작업이고, 그 틀에 기초해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행무상이라는 단순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순한 가르침을 변화하도록 내버려두질 않고, 막아서고 집착하고 붙잡아둠으로써 생겨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그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 또는 시크릿이나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책들에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창조해내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 역설하고 있는 그 많은 가르침들, 그것이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말한 본질적인 가르침에서 얘기한다면,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내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붙잡아서 나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법을 말해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의 어떤 집착, 집착 덩어리를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것을 집착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그것에 집착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방편이라고 했어요. 기왕 집착할 거면 나쁜 걸 집착하지 말고 좋은 걸 집착해라, 기왕이면 아주 그냥 지지리도 가난하게 못 살지 말고 부유하게 살아라, 이런 방편을 얘기해줬던 거예요. ‘나’라는 것, 아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을 ‘나’로 창조할 것이냐 하는 부분이 바로 지금까지 살펴봐 왔던 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창조 작업은 곧 아상을 견고히 하고 확장하는 방법인데, 어떤 방법으로, 어떤 부분으로 나를 창조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란 곧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창조한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기에, 이런 아상을 창조해 내기 보다는 차라리 창조해내지 않는 게 더 윗자리입니다.

선행(善行)보다는 무위(無爲)의 행이 더 본질적이란 말이지요. 선행을 하는 것은 선의 과보를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윤회하는 토대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선의 과보를 통해 천상에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벗어나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선악 자체를 뛰어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는 법을 방편으로 말씀을 드렸지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정체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얘기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생각은 항상 이기적인 것을 창조해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창조해내요. 우리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아집과 아상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본질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있습니다. 아상에 묶여 이기적인 것들만 만들어 내기 쉽습니다.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만을 위한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다보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처음부터 실수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처음부터 과한 욕심을 부려서 나쁜 짓까지 하게 되고 남들을 괴롭혀서라도 더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유함이 늘어나다 보면 점점 더 집착이 늘고, 차차 점점 더 삿된 생각으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상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창조 작업, 아상과 아집을 잔뜩 쌓는 작업을 잘하는 사람을 아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옹호하고,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줍니다. 온갖 상을 내려줍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하나 딱 일으켜서 부자가 된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일인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일인 것처럼 당연히 이 세상에서는 알고 있고, 묘사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렇게 강력한 마음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을 때 업(業)조차 비껴갈 수 있습니다. 잠시 비껴갈 수 있다 이 말이지요.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업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업이라는 것은 과거에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입니다. 과거에 만들어놓은 창조의 행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가 지금 드러나는 거거든요. 지금 아니면 미래에 드러난다는 거예요. 즉 과거에 이미 해놨던 창조의 행위, 신구의로써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 그것을 우리는 업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지금 이 순간 내가 한 창조의 행위, 그게 바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자유의지 즉 현재의 업으로써 과거의 업에 대한 과보를 잠시 비껴갈 수는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과거의 과보를 받아야 하지만 현재의 자유의지, 즉 창조의 에너지가 강력해서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새로운 업을 짓고, 새로운 자유의지를 일으킨다면 이번에 받아야 할 업을 지금 당장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미 지어놨던 업은 반드시 받기는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언젠가 받아야 해요.

이 정도로 우리가 지금 생각한 어떤 마음 에너지가 강력하기는 하나, 업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거나, 업장을 소멸시키거나, 이럴 수 있지는 못하다는 말입니다. 창조 작업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과거에 지어놓은 아주 큰 업이 있으면, 지금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했더라도 그것은 꿈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꾼 것과 동일한 것이지 결국에는 그 악업이 내 인생에 등장을 반드시 하게 될 때가 있단 말입니다.

지금 당장 등장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 에너지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현실세계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나쁜 짓도 하고 못된 사람인데도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때, 혹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다음 생에 결정이 됩니다. 그 다음 생에 바로 인색했던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날 수가 있고, 사람을 괴롭힌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 태어나도 괴롭힘을 당하는 인연을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죠.



아상이 아닌 참나가 나를 이끌게 하라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느냐?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이냐? 내 삶을 아상에 기초해 창조하며 사는 방법 말고,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앞에서 제가 잠깐 말씀 드렸는데, 내가, 나라는 아상 아집이, 나라는 에고가 내 삶을 창조해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해서는 안 돼요. 아상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주법계가,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참된 법신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하기 좋아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불성, 주인공, 자성불, 본래자리, 참나, 신성(神性), 대지의 어머니, 어떻게 얘기해도 좋은데, 그 본연의 자리, 본바탕의 자리, 그 자리에서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그냥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더 깊은 본래의 내가 나를 끌고 가도록 맡겨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나는, 아주 나약한 나고, 아주 조악한 나고, 아상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아주 조잡스런 나가 아니겠습니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이잖습니까? 이런 지혜도 없고 빈약한 내가 아니라 내 안에는 더 큰 내가 있고, 엄청난 지혜의 덩어리가 있단 말입니다. 참나가 있다. 그 참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도록 하는 겁니다. 결정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주인공이 할 수 있도록, 모든 내 안에 있는 본래자리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가, 우주법계가 스스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에서 행하는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내버려둔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가장 지혜로운 본연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내 안의 자성부처에게 믿고 맡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일이 펼쳐집니다. 아주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이 펼쳐져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우주법계는 나에게 근원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겉껍데기의 나라는 아상은 당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본질적인 도움이 아닌 일들을 벌입니다. 아상이 보기에는 남들을 돕기보다는 나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원적 지혜에서 본다면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을 때는 당장에 조금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참된 지혜의 일들을 합니다. 이처럼 우주법계의 계획은 광대하고 무한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는 이기적인 성취를 잘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기초해 벌어들인 돈이고 성취이며, 타인을 밟고 일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 죽고 나면 다음 생에 지옥 갈 게 뻔하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우주법계에서는 그런 계획을 잡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음 생에까지 도움이 되는 계획을 잡는단 말입니다.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계획은 더 장대하고, 더 크고 넓으며, 시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계획은 지금 나의 계획과는 다를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당장 돈을 많이 버는 게 절대목표일 수 있으나, 법계의 계획은 그게 목적인 아닌 겁니다. 우주법계의 계획은 내 계획과 다를 수 있으나 항상 전적으로 옳은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우주법계에서는, 내 안의 자성부처는 나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 그것도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써 전적으로 옳은 일만 하고 있는 겁니다.


우주법계의 본래의 계획, 금강경의 가르침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참다운 지혜, 참된 깨달음, 열반, 평화,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엄청나고 웅대한 우주법계의 계획을 위해, 부처님의 계획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즉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의 사상이에요.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녀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구류중생 전부를 내가 모두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발원해야 하며 그 발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답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에 ‘내가 했다’고 하는 아상을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해 냈다는 아상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아상을 타파하고 우주법계의 계획에 따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 따라 그저 일체 모든 존재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그 큰 법계의 질서에 나를 내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기에 그게 조금 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더라도, 좋든 나쁘든, 맞고 틀리든, 잘된 일이든 나쁜 일이든, 판단 없이 무조건 맡기고 가라는 겁니다. 더 큰 차원의 진리에서 더 큰 차원의 어떤 나를 돕는 계획의 일환에 모든 것을 맡기고 가라 하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아상이 무너지고, 뭐든지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믿고 맡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붙잡지 않겠지요? 이제부터는 막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내 걸로 만들어놓고 막 집착해서 붙잡던 삶에서, 모든 걸 믿고 맡기게 되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게 됩니다. 그냥 거기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요. 흘러가는 것이 법계의 일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제행무상이 진리란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거예요. 이처럼 내 걸로 붙잡지 않고, 믿고 맡기게 됐을 때 저절로 집착이 놓입니다.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주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맡기는 것이 바로 무집착(無執着),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겁니다.



창조할 것인가 내맡길 것인가

그러면 이즈음에서 궁금한 게 있을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내 삶을 내 스스로 창조하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보다는 온전히 맡기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어떤 말이 맞는 겁니까?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앞에서 설명한 일체유심조, 즉 내 스스로 창조하는 작업은 방편의 지혜이고, 본질적인 지혜는 곧 내맡김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창조한다는 말은 업의 굴레 속에서의 일이고, 내맡김이라는 것은 업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또 창조 작업은 내 스스로 무엇이 창조되기를 바라고, 원하고,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원하고 원하지 않는 둘로 나누어지기 쉬워요. 의도한 바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때 우리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결과에 집착하게 된단 말입니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행하면서, 즉 마음으로써 무언가를 의도하고, 어떻게 되기를 바랄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그저 순수한 의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뭐랄까요 그것은 그저 선호의 차이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나는 이 두 길 가운데 이 길을 선호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쨌든 그 두 가지 길 모두가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금방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죠.

이것처럼 우선 첫째로는,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창조하며 살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 첫째 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본질적인 지혜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모든 선호를 놓아버리고, 모든 의도를 놓아버리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언제나 지금 이대로 완전한 우주법계의 완전성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내 의도가, 내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굳게 믿고 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창조 작업에 비해 두 번째 내맡김의 길은 더없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아니, 내맡김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구현해 가는 작업이 됩니다. 창조하겠다는 생각에는 창조될지 말지에 대한 구분이 있고, 원하고 원하지 않는 선호가 있지만, 내맡김은 그 어떤 구분도 없고, 분별도 없고, 오직 완전성만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겁니다. 내맡김의 길에서는 언제나 ‘지금 이 자리’가 최상의 자리가 됩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창조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것을 창조해야지만 완전해 지고, 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완전히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해 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원하던 모든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내맡길 것인가, 관(觀)하라

그러면 이제 맡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에 일체를 내맡기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 잘났다고 내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우주적인 근원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겠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고 싶어도 잘 안 된다는데 있습니다. 맡기고 싶지만 맡겨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건가 싶다 말이에요.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맡겨지고, 어떻게 해야 흘러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답이 바로 똑바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어떤 것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것이 어떤 방식으로 스쳐지나가다가 내가 그것을 끌어당겨서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내 옆에 두려고 애써서 집착하고 있었는지까지 눈에 보이고, 이것을 놔버리게 됐을 때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이 흘러갔을 때 더 큰 자유가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고 집착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뒀을 때, 그때 아름다운 본연의 일이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관(觀)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깨어있어야 된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려 하는지를 분명히 보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분명히 보고 있을 때, 또렷이 보고 있을 때,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내가 막아서고 있는지, 이 세상 이치가 제행무상이라는 것, 제법무아라는 것, 실체가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구나 라는 자각이 생기고, 이해가 생기고, 참된 지혜, 앎이 생기는 겁니다. 그랬을 때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억지로 집착을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집착이 놓여지게 되죠. 저절로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나인가

그러면 보세요. 이제 방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관하라, 믿고 맡기라, 집착을 버려라 얘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도,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이렇게 또 묻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조금 다른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두는 스쳐지나가고 있는데, 스쳐지나가는 것을 내가 내 것으로 붙잡았고, 집착해서 묶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묶어 둬 놓고 수많은 것이 내 옆에 막 쌓여있는 것, 나라고 생각해서 막 쌓여있는 것, 그게 나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내 소유, 내 생각, 내 성격, 내 몸뚱이, ‘이것이 과연 나인가’, ‘이것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놓고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었는데, 실제 그게 내가 맞는 것인가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해 내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집착해서 쌓아놓은 게 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나인가. 몸뚱이를 나라고 하지만 이것은 이번 생에 지나고 나서 다음 생이 되면,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신의 세계에 갈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도대체 어떤 것이 나냐? 가만 살펴보면 내가 없단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냐’, 이렇게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뭐냐’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된다 말이에요.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나에게 묻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꾸만 묻게 되면 어쨌든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지를 답을 내야 되잖아요. 물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답을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답을 찾게 됩니다. 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봐야 되거든요. 봐야 답이 나오잖아요.

문제를 냈는데, 어떤 도형을 하나 갖다놓고, 이 도형을 어떻게 하면 어떤 게 만들어져? 이거 한 번 만들어 봐라, 답을 내 봐, 하고 물으면 그 답을 풀기 위해서는 도형을 자꾸 봐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봐야지만 답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봐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이 뭐꼬?’ 하면, 나는 누구인가, 이 뭐꼬 라는 화두에 답을 내려면, 봐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편견 없이 봐야 합니다. 기존의 편견, 선입견 어린 시선으로 보면 답을 낼 수가 없어요. 새로운 문제를 냈는데, 기존의 편견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답을 풀 수가 있겠어요?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완전히 과거를 놓아버리고, 편견을 놓아버리고,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봐야 됩니다. 편견의 시선으로 보면 똑같이 집착의 눈으로 보이니까 똑같은 편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편견 없이 무분별로써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게 됐을 때 답이 나온다 그 말입니다. 이게 바로 화두선(話頭禪),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입니다.

화두선, 이 뭐꼬,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그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 물음을 자꾸 던졌을 때, 그것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지켜보게 되고, 그 결과 ‘아 이것이 흘러가는 거고 내가 붙잡아 놓은 것이구나, 이것이 붙잡아 놓은 것일 뿐이지 이것이 실체가 아니구나’라는 자각이 생겨서 법계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보게 된다는 관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수행이나, 관하라는 수행이나, 집착을 버려라 하는 수행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라 하는 수행이나,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든 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여라, 거부하지 마라,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얘기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써 내가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법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또 그렇게 했을 때 집착이 놓이니까 집착을 하나하나 놓아보고, 또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나라고 생각했던 이 집착덩어리 이것이 과연 내가 맞는가 라는 물음을 자꾸자꾸 나에게 던지고, 그리고서는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관찰함으로써 과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가 하고 바라보고 관찰하는, 그러면서 직접 온몸으로 답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수행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한번 실천해 볼만 합니까? 수행해 볼만 하지요?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당장에 실천해 스스로 맛보고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법상, 무한 중에서




Posted by 법상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에 대하여
애착을 버려야 할 것이니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경구 가운데 하나.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나의 소유라고 하고
'내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어찌 뒷동산의 나뭇잎이
내 것일 수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이 대지의 한 부분을 가지고
어찌 '내 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 대지 위를 걷는
소나 돼지를 가지고
어찌 '내 소' '내 돼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한 사람을 가지고
'내 여자' '내 남자'라고 소유코자 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존재는
저 홀로 존귀하며,
저마다가 자신의 주인일 뿐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독자적이고 독존적이지
'내 것'이라고 묶어 둘 수 있는 것은 없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왔다가
인연이 다 하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일 뿐.

과연
무엇을 가지고
소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무상한 존재인데,
하물며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동산의 나뭇잎이 어찌 ‘내 것’일 수가 있으며,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돈을 지불한다고
어찌 ‘내 땅’일 수가 있겠는가.

'내 돈'이라고,
'내 땅'이라고,
'내 집'이라고,
'내 사람'이라고,
'내 물건'이라고,
'내 자식'이라고,
'내 지위'라고,
'내 가족'이라고,
'내 권력'이라고,
'내 종교'라고,
'내 계급'이라고,
'내 소유'라고...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뿐.

이 세상에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두고, 집착하려 할 때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잠시 이 세상에 살며 소유하는 것일지라도
그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진데
내 것이 아닌 것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기에서 온다.

버리고 버리고,
비우고 또 비우고 나면 마음이 평온하다.

전체를 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가질 수 있다.









Posted by 법상





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혹은 어떤 특정한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나 겉옷이나 껍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 육신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격이 나이며, 몸이 나이고,
내 느낌이나, 내 생각, 내 견해, 내 욕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다.
다만 문제가 있고, 근심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 성격이나,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구 따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그런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하며
꽁꽁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고 했을 때
나의 성격을 내세우곤 하지만,
성격이 어찌 결정적인 나일 수 있겠는가.
성격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살아 온 환경 속에서,
또 나의 경험 속에서 인연 따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경험과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또 언제라도 지금의 내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성격은 변화에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성격은 현재진행형이며 종착역에 이를 수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해 그것이 ‘나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그것을 나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인가.
이 몸 또한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제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진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들이 나인가.
느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특정한 경험 속에서 느낌이 규정되어지기도 하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도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욕구도, 생각도, 집착도, 관념이나 견해들도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욕구도 집착도 생겨나고,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이나 관념, 견해들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제 있던 욕구가 사라지고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관념들도
새로운 어떤 조건에 의해 완전히 깨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념과 신념에 의해 무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으면서 거기에 죽고 살며,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들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성격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에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성격과 나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을 내가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니 상관하지 말고, 개의치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되 다만 있는 그대로 살펴 보고 관찰하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를 내가 다 풀 수는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었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는 끊임없이 성격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찾는 일이고,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 밖에 없다.

인격이 만들어 내는 문제,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 등
그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바로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요,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은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보자.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에 일일이 다 관여하면서
몸에게 휘둘릴 필요도 없다.
몸도 성격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다.
다만 몸이 움직이며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내가 할 일은 다만 관찰하고 주시하는 일일 뿐이다.

예를 들어 몸에 감기 몸살이 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육체와 이 세상 사이의
어떤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흡사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태풍이 오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몸이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병적인 현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부터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안달하고
괴로워하며 내 마음까지 괴롭히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다만 주목하고 주시하면 된다.
감기 몸살이 아주 멀리서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라 생각하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감기 몸살과 나 자신 사이에
객관적인 넓은 공간, 먼 거리를 만들라.
혹은 감기 몸살이 다만 영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지켜보라.

다른 나와 동일시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집착이나 관념이 생겨날지라도
그것과 나 사이에 먼 공간을 만들어 지켜보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다만 지켜보듯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처럼 내 삶의 연극을 다만 지켜보라.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근심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주 멀리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흥미롭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문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가짜에 속지 말라.
껍데기에 속지 말라.

내 몸, 내 성격, 내 느낌, 내 생각, 내 관념, 내 욕구...
이 모든 것들에 ‘내’라는 ‘나’라는 수식을 빼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에 휩쓸리지 말라.
그 모든 문제며 근심걱정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만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기억하라.

흥미로운 영화를 보듯
내 삶의 연극을 지켜보라.



[사진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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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제 9, 일상무상분
깨달음이란 상도 없다


一相無相分 第九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 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 壽者 世尊 佛說 我得無諍三昧 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합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일상무상’의 의미는 아무리 궁극적인 실체의 모양[一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모양으로써 취할 수 있는 상이 아니라는[無相] 말이다. ‘일상’이란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 즉 해탈과 열반의 모습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체의 모든 모양이나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해탈’로 귀결된다고 우리는 느낀다. 결국에는 모두가 ‘하나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상’으로 귀일 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모든 상들을 다 타파하는 이유는 결국에 종극의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상’으로 향하기 위한 수행과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즉 수없이 나뉘는 우리의 분별상들을 다 통합하여 결국에는 ‘하나의 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깨달음이라고 느낀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보통 해탈이다, 열반이다, 부처다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위엄 있고 근엄한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거나,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를 떠올리면서 그것은 늘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천상일 것이라는 등의 모양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곧 모양 없음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상이 타파된 자리를 해탈, 열반이라고 이름붙이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이 타파된 그 자리를 가지고 또 다른 모양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이 분에서는 일상, 즉 궁극의 마지막 하나의 실체까지도 그것이 모양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는 네 가지 단계를 설하면서 그 단계 또한 모양이 아니고, 그 단계의 깨달음 또한 모양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수행 사과(四果)란 수행을 통해 증득하여 얻는 깨달음의 결과인 과위(果位)로써 수다원, 다사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가지 계위를 말한다. 우선 부처님께서는 그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깨달은 자가 ‘나는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깨닫지 못했다. 깨달았다고 할 내가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을 여읜 것이 깨달음이며, 무아(無我)의 증득이 깨달음일진데, ‘나는 깨달았다’고 했다면 그것은 벌써 한참을 어긋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주체가 없다. 어리석은 중생과 깨달은 성인이 둘이 아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그러한 툭 터진 텅 빈 깨달음의 자리에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수다원이란 말은 예류(預流), 혹은 입류(入流)라 번역한다. 이는 곳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흐름에 들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류(流)는 깨달음, 성도, 해탈, 열반을 의미한다. 즉 수행을 통해 이제 막 깨달음의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그런데 왜 깨달음을 류(流)라고 하였는가. 흐름에 든다는 표현을 썼는가. 이 표현은 참으로 진리를 설명하기에 흡족한 말이다. 우리는 모두 흐름에 들어야 한다. 흐름에 내 온 존재를 완전히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법계의 흐름, 진리의 흐름을 타고 함께 따라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흐름이란 무엇인가. 흐름이란 멈춤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세상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어디에도 멈추는 것은 있지 않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현상도 언제나 흐르며 변화할 뿐, 멈춰서지 않는다. 찰나 찰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법칙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이다. 항상하지 않고 흐르므로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제법무아(諸法無我)]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 자아가 없는 것은 괴로움이다.[일체개고(一切皆苦)]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변하지 않는 세 가지 법칙, 삼법인(三法印)이다. 이렇듯 이 세상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로 흐른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변화하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 할 것도 없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라. 변화를 멈춰 세우려고 하지 말라. 변화의 흐름을 붙잡아 두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려는 데서 온다. 흐름을 타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이 두렵고,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가족, 친구...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하는 것 말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면서, 안주할 것을 찾게 된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하여 머물 곳은 없다. 오직 변화라는 흐름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변한다. 업(業) 또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 본연의 모습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그 흐름에 들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은 오직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놔두라.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화라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대로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그 흐름에 내 전 존재를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 삶의 목적이 ‘변치 않음’의 추구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머물러 있지 말라. 그저 흐르도록 놓아두라.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면 저절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곳에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法界)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흐르는 세계라는 뜻이다.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을 애써 잡으려 하지 말라. 깨달음도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안주할 것 없는 것, 항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부처님의 수행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냥 두라. 다만 그 흐름에 들라.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변화를 거부해왔다. 변화를 거부하며 안주와 지속을 바랬다. 흐름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이란 아주 단순하며 명쾌하다. 다만 흐름에 들면 된다. 지금까지의 온갖 집착과 안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벗어나면 흐름에 들게 된다. 이렇게 흐름에 든 자가 바로 수행 사과의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이다.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다. 그러나 수다원은 제 스스로 흐름에 들었다는 생각이 없다. 흐름에 든다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얻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아무 일 없이, 그저 편안하게 푹 쉬면 그대로가 수다원이고 흐름에 든 자다. 그 어떤 얻음이나 수행의 결과가 아니다. 다만 어리석은 이들은 애써 붙잡으려 하고, 집착하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붙잡아 둘 수 없고,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어리석음을 일으키고 그로인해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수다원에 드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가, 어리석게 붙잡는 중생의 길을 택하는 것이 더 힘겨운 일인가. 중생은 스스로 붙잡고 붙잡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애를 쓰며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공연히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스스로 만든 괴로움에 스스로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냥 일시에 다 놓아버리기만 하면 즉시로 흐름에 들게 되는데 그것을 놓지 못한다. 수다원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 중생들이 어리석은 것이고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 결국, 첫 번째 수행의 과위인 수다원은 그동안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모든 집착과 욕망을 놓아버리고 자연스럽게 흐름에 드는 계위인 것이다.

이처럼 수다원은 전혀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 지극한 평범함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길이다. 그러니 흐름에 든 수다원이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길 것이 없다. 스스로 ‘내가 수다원과에 들었노라’고 선언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러한 선언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를 말하지만 실은 들어간 바가 없다. 들어가고 나가고 할 일이 없다. 그냥 쉬기만 했을 뿐. 그냥 온전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다른 어떤 일을 하지 않고 그 흐름을 타기만 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다. 수행은 그런 것이다. 깨닫기 위한 노력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이란 그저 쉬는 것일 뿐이다. 그저 푹 쉬었을 때 완전한 법계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처럼 수행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할 일 없는 쉬운 것이다. 다만 쉬기만 하면 되니 그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요즘 사람들에게, 중생들에게 수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동안 애써 쌓아왔고, 집착해 왔고, 붙잡아 왔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하니 힘들어 하는 것일 뿐이다. 본래 우리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았고, 쌓아 두지 않았기에 괴로울 것도 없었고, 다시금 놓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붙잡고, 집착하고, 욕망하기 시작하면서 ‘나’ ‘내 것’이라는 관념을 쌓아왔다. 그러니 아주 단순하게 내 스스로 붙잡아 둔 집착의 덩어리들을 다시금 내려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저 돌려 놓기만 하면 그대로 진리의 흐름을 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수다원인 것이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합니다.”

수다원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흐를 뿐, 잠시도 멈추는 일이 없다. 그 어떤 대상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항상 새롭게 흐를 뿐이다. 날마다 새로우며, 매 순간 순간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물며 형상에 머물 것인가. 모양에 머물 것인가. 수다원은 형상에 들지 않는다. 소리나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 그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흐름에 들지만 들지 않는다. 인연 따라 형상으로도 나타나고,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항상 인연 따라 응한다. 응하여 나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고 흐른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연 따라 나툰 형상을 취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부처는 마땅히 화신으로 이 중생계에 내려오기도 한다. 그것이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눈귀코혀몸뜻을 가지고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과 접촉하며 살아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이 항상하지 않으며 실체가 없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이지만 흐름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주체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이다. 즉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다. 그 대상은 각각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경이다. 즉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이 그것이다. 여섯 가지 몸의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세상의 대상을 만난다. 그러면서 그 둘의 접촉에서 좋고 싫고 그저그런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은 연이어 애욕과 집착을 불러온다.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집착하여 머무는 것은 모든 괴로움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면 마땅히 그 괴로움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 집착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집착을 없애라고 해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집착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집착의 원인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던 육근과 육경의 접촉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뜻이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을 만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육근과 육경이란 어떠한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눈귀코혀몸뜻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전생과 후생에 있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속한다. 그 대상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 육근도 육경도 항상하지 않고 흐른다. 그렇기에 붙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집착해서는 안 된다. 다만 변화의 흐름에 들 수 있어야 한다. 들으면서 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눈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좋고 나쁜 느낌이 실체가 아닌 줄 알아, 좋은 것을 가지려고 집착하지도 말고, 싫은 것을 버리려고 애쓰지도 말라. 귀로 무슨 말을 들었더라도 그것이 실체가 아닌 줄 알아 칭찬에도 쉬 들뜨지 말고, 비난에도 가라앉을 것이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나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감촉을 느끼거나, 뜻으로 마음의 대상을 헤아릴 때에도 그것이 주체건 대상이건 모두가 고정된 실체 없이 항상 변화하는 흐름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다만 그 흐름에 들 일이지 멈추어 두려고 하지 말라.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말라.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그렇게 되면 괴로움이 시작된다. 윤회가 시작된다. 이상에서 말한 것이 십이연기에서 말한 생노병사의 원인에 대한 대략의 줄거리다. 즉, 명색(육경) - 육입(육근) - 촉(육근과 육경의 접촉) - 수(좋고 싫은 느낌) - 애(애욕, 갈애) - 취(집착) - 유(업, 삼계) - 생(태어남) - 노사(늙음과 죽음 등의 괴로움) 라는 12연기의 지분인 것이다. 이러한 지분의 원인으로 인해 생과 노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육근이 육경을 촉하면서 그 육경에 대해 좋고 싫은 느낌과 애욕과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기 때문에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그 육경이란 대상에 끄달리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 된다. 쉽게 말해 눈이 대상을 볼 때 대상에 집착하지 말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집착하지 말며 내지 의식이 어떤 법을 생각할 때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다원은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 등의 육경에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땅히 색성향미촉법에 응해주면서도 머물러 있지는 않는 것이 수다원이다. 그것이 그 흐름에 들면서도 들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의 질문이 계속된다.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한다. ‘한 번 갔다 오는 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다원이 되어 진리의 흐름에 들게 되면 더 이상 업(業)을 짓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십이연기의 ‘명색-육입-촉-수-애-취’라는 흐름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업을 끊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여전히 습(習)에 이끌린 미세한 업은 짓게 된다. 업의 수레를 멈추기 위해 힘을 주기 시작했더라도 지금까지 내달려 온 힘을 한순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이 때부터는 업의 소멸이 빨라진다. 업이 점차 가벼워진다.
그러나 업이 있는 이상 여전히 윤회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는 없다. 아직도 윤회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다. 물론 그 수레는 조금씩 천천히 돌고 있으며 언젠가는 멈춰 서게 될 것이다. 그러더라도 여전히 윤회를 하겠지만, 윤회의 길이 괴롭지만은 않다. 완전히 흐름에 들어 온 존재를 흐름에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점차 업은 솜털처럼 가벼워 질 것이다. 이제 계속해서 윤회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벼워졌다. 그런 자를 사다함, 즉 일왕래라 한다. 즉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된다는 의미다. 한 번만 더 다녀오면 다시는 두 번 다시 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어떠한가. 사다함이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는 생각이 들겠는가. 내가 이제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된다는 생각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는 더 이상 사다함이 아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분별이며, 어리석은 의업을 짓는 것이고, 아상인 것이다. ‘나’라른 상을 벌써 깨버렸는데, 어디에 사다함과를 얻을 내가 있단 말인가. 사실 사다함과라는 실체는 없다. 실체가 없는데 어찌 얻을 수 있는가. 딱 정해진 것이 있고 그것을 잡을 수 있으며, 얻을 ‘어떤 것’이 있어야 그것을 얻지 않겠는가. 그러나 얻을 것이 없다.

수다원과도 사다함과도 정해진 어떤 과위가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며, 얻어야할 목적도 아니다. 편의상 이름을 붙여 수다원이라고 했고, 사다함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건 하나의 약속일뿐이지 실체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위치를 수다원이라고 사다함이라고 딱 고정지어 못 박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어떤 상태를, 수행자의 어떤 위치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수다원은 내가 수다원이란 생각이 없고, 사다함도 내가 사다함이란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아라한 또한 스스로 아라한이란 생각이 없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아나함과도 마찬가지다. 아나함이란 불래라고 하여,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한다. 더 이상 남아있는 업이 없다. 남은 여습(餘習)까지도 다 불태워버렸다. 더 이상 윤회할 이유가 소멸돼 버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다함이 수행하고 노력해서 결국에 아나함이 된 것은 아니다.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오는 자’이며, 아나함은 ‘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했다. 사다함이 한 번 갔다 오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다시 오지 않는다. 바로 아나함이 된다. 별다른 뼈를 깎는 수행을 통해 얻어진 결과가 아니란 말이다. 자연스럽게 온다. 깨달음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온다. 노력하고 애쓰면서 훈련하는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다원에서 흐름에 들고 나면 그 때부터는 그저 쉬기만 하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다시 중생계로 떨어진다. 깨닫고자 애쓰거나, 그 다음 계위인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까지 오르기 위해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 노력이 시작됨과 동시에 다시금 흐름에서 벗어나고 말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빨리 깨닫고자 애쓸 것도 없다. 다만 그냥 편안하게, 평화롭게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흐름에 들고 나면 더 이상 도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깨닫는다는 관념 자체도 소멸되어 버린다. 다만 그 흐름을 타고 평화롭게 쉴 뿐이다. 완전한 무위(無爲)만이 있다. 함이 없이 행한다.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다만 흐를 뿐이다. 흐른다는 표현도 부적절하다.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그냥 그러하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란 수행 사과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이다. 부처님 또한 경전에서 자신을 ‘대아라한’이라고 표현하셨다. 욕계 색계 무색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해탈을 이룩한 경지로, 아라한을 불생(不生), 즉 다시는 생을 받게 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아라한이란 온갖 깨달음의 경지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를 말한다.
하물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게도 있지 않은 생각이 아라한에게 있겠는가. 아라한이라는 생각은 오직 중생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라한은 아라한을 모른다.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 진리라고 이름 지을 것이 도무지 없는데 애써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울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란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이다. 그렇다고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말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아라한은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 이는 참 어려운 물음이다. 깨달았다고 해도 어긋나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어긋난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오직 침묵만이 그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만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고 한다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이다. ‘나’는 절대 아라한도를 얻을 수 없다. 아라한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아, 인, 중생, 수자가 사라졌을 때 온다. 오고 감이 없이 온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무쟁삼매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다툼이 없는 삼매를 말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고 있다. 끊임없는 다툼, 끊임없는 싸움,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다툼이란 무엇인가. 다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둘로 대립되어 있어야 한다. 둘로 대립되면 그 사이에서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나뉨이 있으면 곧 다툼이 일어난다. 불행한 자는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이 때 다툼이 일어난다. 행복을 구하지만 행복을 얻지 못하는데서 마음은 괴롭다. 마음 안에서 내적인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구하지만 그것은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괴롭다. 소유와 무소유 사이에서, 부와 빈곤 사이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일체의 모든 나뉨 속에서 무수한 다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생사와 열반, 무명와 깨달음, 중생과 부처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지만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난다. 깨닫고자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이 다툼이다. 중생과 부처를 나누지 말라.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부처가 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중생과 부처를 둘로 나누어 놓고 이쪽의 중생이 저쪽의 부처로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쪽 저쪽은 없다. 중생과 부처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다. 오직 무분별로써, 무차별로써 큰 하나일 뿐이다. 전체로써의 하나일 뿐이다. 나눌 것이 없다. 나누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이지만 거기에는 부처라는 생각조차 없다.
어리석게 생각하지 말라. 어리석게 깨닫고자 애쓰지 말라. 깨닫고자 애쓰면 벌써 다툼이 생긴다. 깨닫지 못한 ‘나’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나’ 사이에 간격이 생겨나고, 차별이 생겨난다. 그 때 그 둘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게 된다. 그랬을 때 깨달음은 멀어진다. 깨닫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다툼은 더욱 커져만 간다.

우리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로 이것이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로 나아간다는 착각. 바로 그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깨달음은 멀어진다. 중생이고 수행이고 부처고 이 모든 나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렸을 때 깨달음은 향기롭게 피어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중생과 상반되는 부처가 아니다. 중생이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없어지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직 텅 빌 뿐이다. 부처도 중생도 다 사라지고 오직 텅 빈 충만이 현현할 뿐이다.

이처럼 둘로 나뉨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무수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나눔과 분별은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분별과 다툼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라는 틀에서 온다. ‘나’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안’으로 만들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상대’라는 것이 생기고, ‘밖’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가 있으니 내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하는 나뉨이 있다. ‘나’가 있으니 내 소유의 많고 적음, 빈부가 생겨난다. 일체 모든 상대적 분별개념은 모두 ‘나’라는 틀, 즉 아상에서 온다.
아상이 있는 이상 분별 계속된다. 그런데 바로 이 아상에서 아집(我執)이 생겨난다. ‘나’라는 상이 있으니 ‘내 것’이라는 소유와 집착 그리고 욕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욕심이 있는 이상 분별은 계속되며 다툼은 계속된다.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라는 일체 모든 상이 깨지고 나면, 일체의 모든 분별이 타파되고, 일체의 모든 욕심과 집착이 사라지며, 그랬을 때 비로소 ‘다툼이 없는 삼매’ 곧 무쟁삼매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하면 또다시 어긋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하셨으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다시말해 ‘나’가 사라진 자라는 뜻이고, 무아를 체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는 또다시 일체 모든 나뉨이 사라지고 욕심이 사라지며 집착과 번뇌가 사라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스스로 ‘나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생각이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했다면 벌써 무쟁삼매와는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나’라는 것이 사라졌으며, 번뇌와 삼매라는 분별이 사라졌고, ‘사람’이라는 분별도, ‘제일’이라는 분별도 다 끊어졌다. 더 이상 그 어떤 말로도 수보리를 표현할 수는 없다. 오직 묵연한 침묵만이 그를 대변해 줄 뿐이다.

깨달은 자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깨달을 주체가 없다. 깨달은 자가 없는데 어찌 ‘나는 깨달았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깨달은 자’는 없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 존재한다고 했다. 즉, 깨달은 자는 매 순간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할 뿐이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는 생각이 없다. 다만 깨어있는 행위가 그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시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말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깨달은 자가 ‘나는 깨달았다’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깨닫지 못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버린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스스로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입니다’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 아닙니다’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그러한 분별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찌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자가, ‘나는 아라한이다’라는 어리석은 분별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분별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다툼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만약 수보리가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분별이 일어났다면 수보리는 더 이상 아라한도를 얻은 자도,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도 아니다.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아라한도를 얻은 증명이 되는 것이다.

아란나란 무엇인가. 이는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무쟁처(無諍處) 혹은 적정처(寂靜處)로써, 다툼이 없고 번잡함이 없어 고요한 곳을 말한다. 수행자들이 수행하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고요한 숲 같은 곳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부르기도 하지만, 내면의 아란야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마음이 다툼이 없이 고요하여 무쟁삼매를 얻은 그 자리를 무쟁처 혹은 적정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쟁처란 그 어떤 시비 분별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텅 빈 본 바탕을 말한다. 법신 자성이 그대로 무쟁처요 아란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긴다는 것은 다시말해 무쟁삼매에 빠져 본 바탕의 법신과 하나되는 즐거움을 즐긴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무쟁삼매로써 무쟁처에 이르는 것이 그대로 아란나행을 즐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말고도 상통하는 말이라 하겠다.
다시말해 이 말은 수보리가 어떤 성스러운 수행을 하고 있다거나,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스러운 수행이니, 위대한 깨달음이니 이 모두가 다 어리석은 분별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저 푹 쉬고 있을 뿐이다. 억지로 번뇌와 무명을 깨뜨려 진리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번뇌와 무명을 깨뜨리려는 것이 바로 다툼이다.

그런 일체의 모든 분별과 나뉨을 다 놓아버리고 푹 쉬고 있는 자리야말로 무쟁삼매의 자리요, 아란나행이다. 이는 그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일 뿐이다. 어떤 위대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할 ‘나’도 없고, 할 ‘수행’도 없어진 그저 여여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수보리를 위대하다고 생각지 말라. 저런 수보리에 비해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고 생각지도 말라. 그 모든 분별을 놓아버려라. 이 세상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일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으며,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수행’도 없다. 오직 쉬기만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아무것도 나눌 게 없다. 무쟁삼매의 자리, 아란나행을 즐기는 일은 그렇듯 푹 쉬기만 하면 되는 자리이다. 아니 그 말도 분별이라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침묵할 일이다.

침 묵

...


Posted by 법상




[사진 : 해인사]

노여움은
사나운 불보다도 더 무섭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노여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공덕을 파괴하는 도둑은
노여움보다 더한 것이 없다.

[유교경]



공덕을 파괴하는 도둑은 성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성냄이야말로 그동안 지어왔던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가장 큰 독이다.

화를 많이 내는 이유는 아집(我執) 때문이다.
그 중에도 ‘내 생각이 옳다’는
자기 생각에 대한 고집이 큰 사람일수록
화의 불길을 피할 수는 없다.

내 견해가 옳다는 고집이 크다보니
다른 사람의 견해는 그르다고 생각하게 되고,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생각 때문에
절대 내 생각을 굽히지 않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성냄과 화와 싸움이 생겨난다.
자기 생각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타인은 또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옳다는 고집을 놓아버리고,
옳고 그르다는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만이
올라오는 불같은 화를 잠재울 수 있다.

이처럼 ‘내가 옳다’는 아상을 버리는 것,
그것이 화에게서 나를 잘 지키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로 상황 따라 올라오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화나는 순간, 성냄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관(觀)하는 길이다.

화가 날 때
화가 난다는 것을
객관이 되어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올라오는 화를 관찰하면 화는 사라진다.
아니 도대체 화를 찾으려 해도
어디쯤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화와 나 사이의 거리를 띄우고,
멀리 떨어져서 나와는 상관없는 것을 지켜본다는 마음으로
노여움이 올라오는 순간을 지켜보라.

이처럼 아집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관하는 것만이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불같은 노여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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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김룡사, 김룡사는 인근에 있는 참선도량 대승사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도량입니다. 다른 도량들이 유명세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 때 이 두 도량은 차분하고 고요하여 정말 절 같은 절입니다. 성철스님께서 30년 수행의 침묵을 깨시고



"많은 법우님들께서 '방하착' '방하착' 하니
그렇게 다 놓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많이들 궁금해 하셨습니다.
다 놓고도 일체를 다 할 수 있는 도리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방하착, 방하착 하니
많은 이들이 의심을 가집니다.
그러면 다 놓고 나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방하착(着)이란
착심(着心)을 놓으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멍 하니
바보처럼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

마땅히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일입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살아갈 일입니다.
다만 마음을 한 쪽으로 머물러 착(着)을 두어선 안됩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복을 까먹는 일일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복을 짓고 순간 순간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밝은 깨침의 마음으로 늘 순간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벌되 돈에 대한 '집착'으로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 그 자체에 마음이 머물면
많이 벌게 될 때 즐거울 수 있지만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돈에대한 집착을 놓으면
많이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놓았기에 적게 벌어도 여여하며,
많은 돈을 벌었어도
다른 이를 위해 보시를 할 때
아깝다는 마음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돈에 대해 집착이 없으니 돈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지 '집착'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면
나와 함께 해서 괴롭더라도 붙잡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내 여자' '내 남자'라고 하는 또 다른 아상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내것'이라는 생각
나 좋은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我執)'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맑고 순수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라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렇듯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연장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경계를
그저 주인공,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참나라고 하는
그 지고함 속에 넣고 녹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녹이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를 이렇듯
내 안에 밝은 자리에 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방하착.. 놓고 가는 이는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여여합니다.

함이 없이 늘 묵묵히 일을 해 나갑니다.
이렇듯 함이 없이 해야합니다.
일을 하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면 위험합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
'내가 한다'고 하는 그 아상, 아집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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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경내에 피어난 금낭화, 5월이면 전라도 어느 도량을 가든 금낭화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절에는 많이 피어있는 꽃입니다. 봄에 여린 잎을 채취하여 나물로도 먹으며,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일 터입니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는 일일 터입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아! 괴로움!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연따라 잠시 온 것을
''내 것''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放下着)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입니다.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습니다.
''나'' ''내것''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놓음...
방하착(放下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방하착(放下着)!!
그 속에 불교 수행의 모든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방하착...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 ''집착, 걸림''을 의미합니다.
즉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참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나의 자리에
몰록 놓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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