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란냐'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9.01 금강경 9분 일상무상분 강의 - 깨달음이란 상도 버려라



제 9, 일상무상분
깨달음이란 상도 없다


一相無相分 第九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 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 壽者 世尊 佛說 我得無諍三昧 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합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일상무상’의 의미는 아무리 궁극적인 실체의 모양[一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모양으로써 취할 수 있는 상이 아니라는[無相] 말이다. ‘일상’이란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 즉 해탈과 열반의 모습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체의 모든 모양이나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해탈’로 귀결된다고 우리는 느낀다. 결국에는 모두가 ‘하나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상’으로 귀일 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모든 상들을 다 타파하는 이유는 결국에 종극의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상’으로 향하기 위한 수행과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즉 수없이 나뉘는 우리의 분별상들을 다 통합하여 결국에는 ‘하나의 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깨달음이라고 느낀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보통 해탈이다, 열반이다, 부처다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위엄 있고 근엄한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거나,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를 떠올리면서 그것은 늘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천상일 것이라는 등의 모양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곧 모양 없음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상이 타파된 자리를 해탈, 열반이라고 이름붙이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이 타파된 그 자리를 가지고 또 다른 모양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이 분에서는 일상, 즉 궁극의 마지막 하나의 실체까지도 그것이 모양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는 네 가지 단계를 설하면서 그 단계 또한 모양이 아니고, 그 단계의 깨달음 또한 모양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수행 사과(四果)란 수행을 통해 증득하여 얻는 깨달음의 결과인 과위(果位)로써 수다원, 다사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가지 계위를 말한다. 우선 부처님께서는 그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깨달은 자가 ‘나는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깨닫지 못했다. 깨달았다고 할 내가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을 여읜 것이 깨달음이며, 무아(無我)의 증득이 깨달음일진데, ‘나는 깨달았다’고 했다면 그것은 벌써 한참을 어긋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주체가 없다. 어리석은 중생과 깨달은 성인이 둘이 아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그러한 툭 터진 텅 빈 깨달음의 자리에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수다원이란 말은 예류(預流), 혹은 입류(入流)라 번역한다. 이는 곳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흐름에 들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류(流)는 깨달음, 성도, 해탈, 열반을 의미한다. 즉 수행을 통해 이제 막 깨달음의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그런데 왜 깨달음을 류(流)라고 하였는가. 흐름에 든다는 표현을 썼는가. 이 표현은 참으로 진리를 설명하기에 흡족한 말이다. 우리는 모두 흐름에 들어야 한다. 흐름에 내 온 존재를 완전히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법계의 흐름, 진리의 흐름을 타고 함께 따라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흐름이란 무엇인가. 흐름이란 멈춤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세상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어디에도 멈추는 것은 있지 않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현상도 언제나 흐르며 변화할 뿐, 멈춰서지 않는다. 찰나 찰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법칙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이다. 항상하지 않고 흐르므로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제법무아(諸法無我)]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 자아가 없는 것은 괴로움이다.[일체개고(一切皆苦)]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변하지 않는 세 가지 법칙, 삼법인(三法印)이다. 이렇듯 이 세상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로 흐른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변화하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 할 것도 없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라. 변화를 멈춰 세우려고 하지 말라. 변화의 흐름을 붙잡아 두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려는 데서 온다. 흐름을 타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이 두렵고,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가족, 친구...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하는 것 말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면서, 안주할 것을 찾게 된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하여 머물 곳은 없다. 오직 변화라는 흐름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변한다. 업(業) 또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 본연의 모습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그 흐름에 들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은 오직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놔두라.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화라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대로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그 흐름에 내 전 존재를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 삶의 목적이 ‘변치 않음’의 추구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머물러 있지 말라. 그저 흐르도록 놓아두라.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면 저절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곳에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法界)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흐르는 세계라는 뜻이다.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을 애써 잡으려 하지 말라. 깨달음도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안주할 것 없는 것, 항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부처님의 수행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냥 두라. 다만 그 흐름에 들라.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변화를 거부해왔다. 변화를 거부하며 안주와 지속을 바랬다. 흐름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이란 아주 단순하며 명쾌하다. 다만 흐름에 들면 된다. 지금까지의 온갖 집착과 안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벗어나면 흐름에 들게 된다. 이렇게 흐름에 든 자가 바로 수행 사과의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이다.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다. 그러나 수다원은 제 스스로 흐름에 들었다는 생각이 없다. 흐름에 든다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얻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아무 일 없이, 그저 편안하게 푹 쉬면 그대로가 수다원이고 흐름에 든 자다. 그 어떤 얻음이나 수행의 결과가 아니다. 다만 어리석은 이들은 애써 붙잡으려 하고, 집착하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붙잡아 둘 수 없고,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어리석음을 일으키고 그로인해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수다원에 드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가, 어리석게 붙잡는 중생의 길을 택하는 것이 더 힘겨운 일인가. 중생은 스스로 붙잡고 붙잡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애를 쓰며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공연히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스스로 만든 괴로움에 스스로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냥 일시에 다 놓아버리기만 하면 즉시로 흐름에 들게 되는데 그것을 놓지 못한다. 수다원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 중생들이 어리석은 것이고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 결국, 첫 번째 수행의 과위인 수다원은 그동안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모든 집착과 욕망을 놓아버리고 자연스럽게 흐름에 드는 계위인 것이다.

이처럼 수다원은 전혀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 지극한 평범함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길이다. 그러니 흐름에 든 수다원이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길 것이 없다. 스스로 ‘내가 수다원과에 들었노라’고 선언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러한 선언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를 말하지만 실은 들어간 바가 없다. 들어가고 나가고 할 일이 없다. 그냥 쉬기만 했을 뿐. 그냥 온전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다른 어떤 일을 하지 않고 그 흐름을 타기만 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다. 수행은 그런 것이다. 깨닫기 위한 노력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이란 그저 쉬는 것일 뿐이다. 그저 푹 쉬었을 때 완전한 법계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처럼 수행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할 일 없는 쉬운 것이다. 다만 쉬기만 하면 되니 그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요즘 사람들에게, 중생들에게 수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동안 애써 쌓아왔고, 집착해 왔고, 붙잡아 왔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하니 힘들어 하는 것일 뿐이다. 본래 우리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았고, 쌓아 두지 않았기에 괴로울 것도 없었고, 다시금 놓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붙잡고, 집착하고, 욕망하기 시작하면서 ‘나’ ‘내 것’이라는 관념을 쌓아왔다. 그러니 아주 단순하게 내 스스로 붙잡아 둔 집착의 덩어리들을 다시금 내려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저 돌려 놓기만 하면 그대로 진리의 흐름을 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수다원인 것이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합니다.”

수다원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흐를 뿐, 잠시도 멈추는 일이 없다. 그 어떤 대상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항상 새롭게 흐를 뿐이다. 날마다 새로우며, 매 순간 순간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물며 형상에 머물 것인가. 모양에 머물 것인가. 수다원은 형상에 들지 않는다. 소리나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 그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흐름에 들지만 들지 않는다. 인연 따라 형상으로도 나타나고,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항상 인연 따라 응한다. 응하여 나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고 흐른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연 따라 나툰 형상을 취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부처는 마땅히 화신으로 이 중생계에 내려오기도 한다. 그것이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눈귀코혀몸뜻을 가지고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과 접촉하며 살아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이 항상하지 않으며 실체가 없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이지만 흐름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주체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이다. 즉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다. 그 대상은 각각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경이다. 즉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이 그것이다. 여섯 가지 몸의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세상의 대상을 만난다. 그러면서 그 둘의 접촉에서 좋고 싫고 그저그런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은 연이어 애욕과 집착을 불러온다.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집착하여 머무는 것은 모든 괴로움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면 마땅히 그 괴로움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 집착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집착을 없애라고 해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집착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집착의 원인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던 육근과 육경의 접촉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뜻이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을 만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육근과 육경이란 어떠한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눈귀코혀몸뜻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전생과 후생에 있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속한다. 그 대상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 육근도 육경도 항상하지 않고 흐른다. 그렇기에 붙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집착해서는 안 된다. 다만 변화의 흐름에 들 수 있어야 한다. 들으면서 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눈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좋고 나쁜 느낌이 실체가 아닌 줄 알아, 좋은 것을 가지려고 집착하지도 말고, 싫은 것을 버리려고 애쓰지도 말라. 귀로 무슨 말을 들었더라도 그것이 실체가 아닌 줄 알아 칭찬에도 쉬 들뜨지 말고, 비난에도 가라앉을 것이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나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감촉을 느끼거나, 뜻으로 마음의 대상을 헤아릴 때에도 그것이 주체건 대상이건 모두가 고정된 실체 없이 항상 변화하는 흐름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다만 그 흐름에 들 일이지 멈추어 두려고 하지 말라.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말라.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그렇게 되면 괴로움이 시작된다. 윤회가 시작된다. 이상에서 말한 것이 십이연기에서 말한 생노병사의 원인에 대한 대략의 줄거리다. 즉, 명색(육경) - 육입(육근) - 촉(육근과 육경의 접촉) - 수(좋고 싫은 느낌) - 애(애욕, 갈애) - 취(집착) - 유(업, 삼계) - 생(태어남) - 노사(늙음과 죽음 등의 괴로움) 라는 12연기의 지분인 것이다. 이러한 지분의 원인으로 인해 생과 노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육근이 육경을 촉하면서 그 육경에 대해 좋고 싫은 느낌과 애욕과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기 때문에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그 육경이란 대상에 끄달리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 된다. 쉽게 말해 눈이 대상을 볼 때 대상에 집착하지 말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집착하지 말며 내지 의식이 어떤 법을 생각할 때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다원은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 등의 육경에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땅히 색성향미촉법에 응해주면서도 머물러 있지는 않는 것이 수다원이다. 그것이 그 흐름에 들면서도 들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의 질문이 계속된다.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한다. ‘한 번 갔다 오는 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다원이 되어 진리의 흐름에 들게 되면 더 이상 업(業)을 짓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십이연기의 ‘명색-육입-촉-수-애-취’라는 흐름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업을 끊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여전히 습(習)에 이끌린 미세한 업은 짓게 된다. 업의 수레를 멈추기 위해 힘을 주기 시작했더라도 지금까지 내달려 온 힘을 한순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이 때부터는 업의 소멸이 빨라진다. 업이 점차 가벼워진다.
그러나 업이 있는 이상 여전히 윤회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는 없다. 아직도 윤회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다. 물론 그 수레는 조금씩 천천히 돌고 있으며 언젠가는 멈춰 서게 될 것이다. 그러더라도 여전히 윤회를 하겠지만, 윤회의 길이 괴롭지만은 않다. 완전히 흐름에 들어 온 존재를 흐름에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점차 업은 솜털처럼 가벼워 질 것이다. 이제 계속해서 윤회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벼워졌다. 그런 자를 사다함, 즉 일왕래라 한다. 즉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된다는 의미다. 한 번만 더 다녀오면 다시는 두 번 다시 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어떠한가. 사다함이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는 생각이 들겠는가. 내가 이제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된다는 생각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는 더 이상 사다함이 아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분별이며, 어리석은 의업을 짓는 것이고, 아상인 것이다. ‘나’라른 상을 벌써 깨버렸는데, 어디에 사다함과를 얻을 내가 있단 말인가. 사실 사다함과라는 실체는 없다. 실체가 없는데 어찌 얻을 수 있는가. 딱 정해진 것이 있고 그것을 잡을 수 있으며, 얻을 ‘어떤 것’이 있어야 그것을 얻지 않겠는가. 그러나 얻을 것이 없다.

수다원과도 사다함과도 정해진 어떤 과위가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며, 얻어야할 목적도 아니다. 편의상 이름을 붙여 수다원이라고 했고, 사다함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건 하나의 약속일뿐이지 실체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위치를 수다원이라고 사다함이라고 딱 고정지어 못 박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어떤 상태를, 수행자의 어떤 위치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수다원은 내가 수다원이란 생각이 없고, 사다함도 내가 사다함이란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아라한 또한 스스로 아라한이란 생각이 없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아나함과도 마찬가지다. 아나함이란 불래라고 하여,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한다. 더 이상 남아있는 업이 없다. 남은 여습(餘習)까지도 다 불태워버렸다. 더 이상 윤회할 이유가 소멸돼 버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다함이 수행하고 노력해서 결국에 아나함이 된 것은 아니다.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오는 자’이며, 아나함은 ‘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했다. 사다함이 한 번 갔다 오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다시 오지 않는다. 바로 아나함이 된다. 별다른 뼈를 깎는 수행을 통해 얻어진 결과가 아니란 말이다. 자연스럽게 온다. 깨달음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온다. 노력하고 애쓰면서 훈련하는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다원에서 흐름에 들고 나면 그 때부터는 그저 쉬기만 하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다시 중생계로 떨어진다. 깨닫고자 애쓰거나, 그 다음 계위인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까지 오르기 위해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 노력이 시작됨과 동시에 다시금 흐름에서 벗어나고 말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빨리 깨닫고자 애쓸 것도 없다. 다만 그냥 편안하게, 평화롭게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흐름에 들고 나면 더 이상 도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깨닫는다는 관념 자체도 소멸되어 버린다. 다만 그 흐름을 타고 평화롭게 쉴 뿐이다. 완전한 무위(無爲)만이 있다. 함이 없이 행한다.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다만 흐를 뿐이다. 흐른다는 표현도 부적절하다.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그냥 그러하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란 수행 사과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이다. 부처님 또한 경전에서 자신을 ‘대아라한’이라고 표현하셨다. 욕계 색계 무색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해탈을 이룩한 경지로, 아라한을 불생(不生), 즉 다시는 생을 받게 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아라한이란 온갖 깨달음의 경지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를 말한다.
하물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게도 있지 않은 생각이 아라한에게 있겠는가. 아라한이라는 생각은 오직 중생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라한은 아라한을 모른다.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 진리라고 이름 지을 것이 도무지 없는데 애써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울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란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이다. 그렇다고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말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아라한은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 이는 참 어려운 물음이다. 깨달았다고 해도 어긋나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어긋난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오직 침묵만이 그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만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고 한다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이다. ‘나’는 절대 아라한도를 얻을 수 없다. 아라한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아, 인, 중생, 수자가 사라졌을 때 온다. 오고 감이 없이 온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무쟁삼매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다툼이 없는 삼매를 말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고 있다. 끊임없는 다툼, 끊임없는 싸움,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다툼이란 무엇인가. 다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둘로 대립되어 있어야 한다. 둘로 대립되면 그 사이에서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나뉨이 있으면 곧 다툼이 일어난다. 불행한 자는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이 때 다툼이 일어난다. 행복을 구하지만 행복을 얻지 못하는데서 마음은 괴롭다. 마음 안에서 내적인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구하지만 그것은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괴롭다. 소유와 무소유 사이에서, 부와 빈곤 사이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일체의 모든 나뉨 속에서 무수한 다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생사와 열반, 무명와 깨달음, 중생과 부처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지만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난다. 깨닫고자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이 다툼이다. 중생과 부처를 나누지 말라.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부처가 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중생과 부처를 둘로 나누어 놓고 이쪽의 중생이 저쪽의 부처로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쪽 저쪽은 없다. 중생과 부처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다. 오직 무분별로써, 무차별로써 큰 하나일 뿐이다. 전체로써의 하나일 뿐이다. 나눌 것이 없다. 나누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이지만 거기에는 부처라는 생각조차 없다.
어리석게 생각하지 말라. 어리석게 깨닫고자 애쓰지 말라. 깨닫고자 애쓰면 벌써 다툼이 생긴다. 깨닫지 못한 ‘나’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나’ 사이에 간격이 생겨나고, 차별이 생겨난다. 그 때 그 둘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게 된다. 그랬을 때 깨달음은 멀어진다. 깨닫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다툼은 더욱 커져만 간다.

우리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로 이것이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로 나아간다는 착각. 바로 그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깨달음은 멀어진다. 중생이고 수행이고 부처고 이 모든 나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렸을 때 깨달음은 향기롭게 피어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중생과 상반되는 부처가 아니다. 중생이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없어지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직 텅 빌 뿐이다. 부처도 중생도 다 사라지고 오직 텅 빈 충만이 현현할 뿐이다.

이처럼 둘로 나뉨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무수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나눔과 분별은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분별과 다툼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라는 틀에서 온다. ‘나’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안’으로 만들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상대’라는 것이 생기고, ‘밖’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가 있으니 내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하는 나뉨이 있다. ‘나’가 있으니 내 소유의 많고 적음, 빈부가 생겨난다. 일체 모든 상대적 분별개념은 모두 ‘나’라는 틀, 즉 아상에서 온다.
아상이 있는 이상 분별 계속된다. 그런데 바로 이 아상에서 아집(我執)이 생겨난다. ‘나’라는 상이 있으니 ‘내 것’이라는 소유와 집착 그리고 욕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욕심이 있는 이상 분별은 계속되며 다툼은 계속된다.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라는 일체 모든 상이 깨지고 나면, 일체의 모든 분별이 타파되고, 일체의 모든 욕심과 집착이 사라지며, 그랬을 때 비로소 ‘다툼이 없는 삼매’ 곧 무쟁삼매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하면 또다시 어긋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하셨으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다시말해 ‘나’가 사라진 자라는 뜻이고, 무아를 체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는 또다시 일체 모든 나뉨이 사라지고 욕심이 사라지며 집착과 번뇌가 사라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스스로 ‘나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생각이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했다면 벌써 무쟁삼매와는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나’라는 것이 사라졌으며, 번뇌와 삼매라는 분별이 사라졌고, ‘사람’이라는 분별도, ‘제일’이라는 분별도 다 끊어졌다. 더 이상 그 어떤 말로도 수보리를 표현할 수는 없다. 오직 묵연한 침묵만이 그를 대변해 줄 뿐이다.

깨달은 자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깨달을 주체가 없다. 깨달은 자가 없는데 어찌 ‘나는 깨달았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깨달은 자’는 없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 존재한다고 했다. 즉, 깨달은 자는 매 순간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할 뿐이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는 생각이 없다. 다만 깨어있는 행위가 그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시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말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깨달은 자가 ‘나는 깨달았다’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깨닫지 못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버린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스스로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입니다’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 아닙니다’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그러한 분별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찌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자가, ‘나는 아라한이다’라는 어리석은 분별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분별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다툼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만약 수보리가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분별이 일어났다면 수보리는 더 이상 아라한도를 얻은 자도,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도 아니다.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아라한도를 얻은 증명이 되는 것이다.

아란나란 무엇인가. 이는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무쟁처(無諍處) 혹은 적정처(寂靜處)로써, 다툼이 없고 번잡함이 없어 고요한 곳을 말한다. 수행자들이 수행하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고요한 숲 같은 곳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부르기도 하지만, 내면의 아란야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마음이 다툼이 없이 고요하여 무쟁삼매를 얻은 그 자리를 무쟁처 혹은 적정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쟁처란 그 어떤 시비 분별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텅 빈 본 바탕을 말한다. 법신 자성이 그대로 무쟁처요 아란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긴다는 것은 다시말해 무쟁삼매에 빠져 본 바탕의 법신과 하나되는 즐거움을 즐긴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무쟁삼매로써 무쟁처에 이르는 것이 그대로 아란나행을 즐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말고도 상통하는 말이라 하겠다.
다시말해 이 말은 수보리가 어떤 성스러운 수행을 하고 있다거나,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스러운 수행이니, 위대한 깨달음이니 이 모두가 다 어리석은 분별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저 푹 쉬고 있을 뿐이다. 억지로 번뇌와 무명을 깨뜨려 진리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번뇌와 무명을 깨뜨리려는 것이 바로 다툼이다.

그런 일체의 모든 분별과 나뉨을 다 놓아버리고 푹 쉬고 있는 자리야말로 무쟁삼매의 자리요, 아란나행이다. 이는 그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일 뿐이다. 어떤 위대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할 ‘나’도 없고, 할 ‘수행’도 없어진 그저 여여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수보리를 위대하다고 생각지 말라. 저런 수보리에 비해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고 생각지도 말라. 그 모든 분별을 놓아버려라. 이 세상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일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으며,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수행’도 없다. 오직 쉬기만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아무것도 나눌 게 없다. 무쟁삼매의 자리, 아란나행을 즐기는 일은 그렇듯 푹 쉬기만 하면 되는 자리이다. 아니 그 말도 분별이라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침묵할 일이다.

침 묵

...


Posted by 법상